[目]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직도直道를 닦게 하였는데,注+제除는 닦는 것이다.구원九原을 경유하여 운양雲陽에까지 이르렀다.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운 것이 1,800리나 되어, 몇 년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하였다.注+도道는 경유하는 것이다. 저抵는 이르는 것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운양현雲陽縣은 풍익馮翊에 속한다.”고 하였다. 참塹은 칠염七艶의 절切인데, 구덩이를 말한다. 또한 참壍으로도 쓴다. 인堙은 음이 인因이니, 메우는 것이다.
먼저 전전前殿인 아방궁阿房宮을 지으니,注+조朝는 음이 조潮이다. 아阿는 모퉁이이다. 방房은 방실房室이라 할 때의 방房이다. 전각의 네 모퉁이를 모두 방으로 만든 것을 말한 것이다. 또 큰 언덕을 아阿라고 하는데, 그 전각이 높아서 마치 언덕 위에 방을 만든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또 아阿는 가까운 것이며, 방房은 혹 방旁이라고 쓰인다. 그 궁이 함양咸陽과의 거리가 가까우므로 아방궁阿房宮이라고 한 것이다. 또 이것은 그 형태로 궁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 궁의 네 모퉁이에 있는 방이 넓은 것을 말한다. 또 아阿는 산굽이로, 아방은 바로 옛 지명인데, 궁이 이루어지고 나서 궁의 이름을 다시 짓기도 전에 불에 탔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단지 아방궁阿房宮이라고 이른 것이다. 동서의 길이가 500보이며, 남북의 길이가 50장丈이었다.
을 나누어 만들게 하였는데,注+궁宮은 음형淫刑으로, 남자는 불까고 여자는 음부를 막는데, 사형의 다음가는 형벌이다. 다른 형벌은 저잣거리에서 행하나 궁형宮刑은 100일 동안을 음침한 방에 숨어서 요양해야 하므로, 은궁隱宮이라 하는 것이다. 도徒는 노역형이다. 도형은 죄 지은 자에게 이미 형벌을 가하고서 다시 벌로 노역을 시키는 것이다. 여驪는 음이 이離이다.
이로 인해서 3만 가구를 여읍驪邑으로 옮기고 5만 가구를 운양雲陽으로 옮겼다.注+여읍驪邑은 진秦시황始皇의 능이다. 한漢나라 때에는 임금이 즉위하면서부터 곧바로 산릉山陵을 만든 것과 백성들을 옮겨 능 곁에 고을을 둔 것은 모두 진秦나라의 제도이다. 운양雲陽은 감천궁甘泉宮이 있는 곳이다.
目
[目] 노생盧生이 진秦시황始皇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미행微行을 하여 악귀를 물리치고,注+미행微行은 은미하게 가는 것이다. 벽辟은 음이 벽壁이며, 없애는 것이다. 거처하는 궁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한 뒤에야 불사약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진 시황이 이에 영을 내려 함양咸陽의 주위 200리 안에 있는 궁관宮觀을 복도複道로 서로 연결하고, 휘장과 종고鐘鼓와 미인들로 그곳을 채웠는데, 각각 부서별로 명단을 작성하여 안치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하였다.注+궁宮은 지존이 거처하는 곳의 칭호이다. 관觀은 음이 관貫이니,
을 형상한 것과 같은 것이다. 옛날에 모든 문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관觀을 세워두었는데, 이는 궁문을 표시한 것이다. 거기에 올라가서 보면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으므로 관觀이라고 한 것이다. 안案은 안도하는 것이다. 서署는 관부이다.
또 자신이 행차를 하는 곳을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사형에 처했다.注+천자의 수레가 이르는 것을 백성과 신하들이 요행으로 여기므로 행幸이라고 하는 것이다.
目
[目] 진秦시황始皇이 일찍이 양산궁梁山宮에 있다가 승상의 수레와 말이 많은 것을 보고는注+여기서 구句를 뗀다. 언짢아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양산궁梁山宮은 부풍扶風의 호치현好畤縣에 있다.”고 하였다. “불선弗善(언짢게 여기다)”은 대개 그 권위가 성한 것을 꺼린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를 승상에게 고하니, 승상이 수레와 말의 숫자를 줄였다.
그러자 진 시황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환관들이 나의 말을 누설한 것이다.”라고 하고는, 당시에 자신의 곁에 있던 환관을 잡아다가 모두 죽였다.
그런 뒤로는 진 시황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여러 신하들 가운데 황제의 결재를 받아야 할 자들이 모두 함양궁咸陽宮에서 받았다.
綱
[綱] 유생儒生들 460여 명을 구덩이에 파묻고, 장자長子인 부소扶蘇로 하여금 몽념蒙恬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目
[目]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 서로 더불어 진秦시황始皇에 대해서 비난하는 의논을 하다가 도망쳤다.
진 시황이 그것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유생들이 혹 요언妖言을 하여 백성들을 어지럽힌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어사御史로 하여금 잡아다가 조사하게 하자, 유생들이 서로가 서로를 끌고 들어가 고발하였다.
이에 금법을 범한 자들을 직접 제거한 것이 모두 460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함양咸陽에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注+진秦나라에서는 어사御史를 두어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토벌하고, 큰 옥사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어사대부御史大夫가 통솔하였다. 전傳(차례로 돌다)은 주련柱戀의 절切이다. “전상고인傳相告引(서로가 서로를 끌고 들어가 고발하다.)”은 갑이 을을 끌어들이고, 을이 다시 병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장자長子인 부소扶蘇가 간하기를 “유생들은 모두 공자孔子의 말을 외우고 이를 본받는 사람들인데, 지금 중한 법으로 처벌하시니, 신은 천하 사람들이 불안해할까 두렵습니다.”注+“송법공자誦法孔子”는 공자孔子의 말을 외워 법으로 삼는 것이다. 승繩은 탄핵하여 다스리는 것이다.라고 하자, 진 시황이 노하여 부소를 북쪽 변경으로 보내어 상군上郡에서 몽념蒙恬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