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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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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三年이라
秦甘露元이요 燕光壽三年이라
春二月 燕主宴群臣于蒲池注+蒲池在鄴.하다
燕太子曄 早死한대 立其弟暐러니
至是하여 燕主儁 宴群臣할새 語及周太子晉注+周靈王之太子曰晉, 慧而早卒. 弟貴立, 是爲景王, 景王崩, 而子朝․子丐爭立, 周遂以亂.하고 潸然流涕曰
才子難得이라 自景先之亡으로 吾鬚髪中白注+景先, 太子曄字. 中, 直衆切, 半也.이로라 卿等 謂景先何如
司徒長史李績 對曰 獻懐太子至孝聰敏하고 沈毅疾諛하고 好學多藝하고 謙恭好施注+獻懷, 曄諡.니이다
儁曰 卿譽之雖過 然此兒在 吾死無憂矣로라 景茂何如注+景茂, 太子暐字.
太子暐侍側이러니 績曰 皇太子天資岐嶷이나 然好遊畋而樂絲竹하시니 此其所以爲損也注+岐嶷, 峻茂之狀. 一說 “岐, 智意也. 嶷, 識也.” 樂, 五敎切.니이다
顧謂暐曰 伯陽之言 藥石之惠也 汝宜誡之하라 暐甚不平注+伯陽, 績字.이러라
涼宋混 誅張瓘하다
張瓘 猜忌苛虐하여 專以愛憎爲賞罰하니 郎中殷郇 諫之한대 瓘曰 虎生三日 自能食肉이요 不須人敎也니라 由是 人情 不附하다
宋混 性忠鯁하니 憚之 欲殺混하고 因廢涼王玄靚而代之하니
帥壯士하고 奄入南城注+王隱晉書曰 “涼州城有龍形, 故曰卧龍城, 南北七里, 東西二里, 本匈奴所築, 後張氏世居之, 又增築四城, 箱各千步, 幷舊城爲五.” 又據張駿傳, 駿於姑臧城南, 築作五殿, 四面各依方色, 四時遞居之, 則南城, 張氏所居也.하여 宣告諸營曰 張瓘 謀逆일새 被太后令誅之라하니 出戰이라가 不勝하고 與弟琚皆自殺하다
輔政할새 請玄靚去王號하고 復稱涼州牧하다
秦以王猛爲京兆尹하다
秦王堅 以鄧羌爲御史中丞하고 王猛領京兆尹하다 彊太后弟德 酗酒豪横하여 掠人財貨, 子女注+橫, 戶孟切.러니
下車 收德하여 奏未及報 已陳屍於市하니 馳使赦之로되 不及이러라
與羌同志疾惡하여 糾案 無所顧忌하니 數旬之間 權豪貴戚 殺戮刑免者二十餘人이라 朝廷 震栗하여 姦猾 屏氣하고 路不拾遺러라
歎曰 吾始今知天下之有法也로라
泰山太守諸葛攸 伐燕이라가 敗績이러니
冬十月 謝萬, 郗曇 復伐之라가 病引還하고 衆潰하여 免爲庶人하다
攸將水陸二萬하고 擊燕할새 入自石門하여 屯于河渚러니
燕上庸王評 帥歩騎五萬하고 與戰東阿하여 攸兵 大敗어늘 詔萬曇하여 復伐之하다
矜豪傲物하여 但以笑詠自高하고 未嘗撫衆이라
兄安 深憂之하여 謂萬曰 汝爲元帥하니 宜數接對諸將하여 以悦其心이니 豈有傲誕如此而能濟事也리오
乃召集諸將하여 一無所言하고 直以如意 指四坐云 諸將 皆勁卒이라하니 諸將 益恨之注+如意, 手撾也. 若今之骨朶子, 執之, 所以供指麾. 凡奮身行伍者, 以兵與卒爲諱, 旣爲將矣, 而稱之爲卒, 所以益恨也.러라
慮萬不免하여 乃自隊帥以下 無不親造하여 厚相親託注+隊帥, 部隊將帥也. 造, 至也.하다
既而 帥衆入渦, 潁하여 以援洛陽注+渦水, 至山桑入淮. 潁水, 至下蔡入淮. 謝尙之兵, 自下蔡而入渦․潁之間.이러니 以病退屯彭城하니
萬以爲燕兵大盛故 曇退라하여 即引兵還하니 衆遂驚潰
狼狽單歸어늘 軍士欲圖之러니 以安故止하다
詔廢爲庶人하고 降曇號建武將軍하니
於是 許昌, 潁川, 譙, 沛諸城 相次皆没於燕하다
十二月 大旱하다
◑秦以王猛兼司隷校尉하다
秦王堅 以猛爲輔國將軍司隷校尉하여 居中宿衛하고 僕射, 詹事, 侍中, 中書令 領選如故하니
薦陽平公融 光禄任群 處士朱彤自代한대 不許하고 而以融爲中書監하고 群爲太子家令하고 彤爲太子庶子하다
時年三十六이라 歲中五遷하니 權傾內外注+猛, 自尙書左丞, 遷咸陽內史, 又遷侍中․中書令, 領京兆尹, 又遷吏部尙書, 尋遷太子詹事, 爲左僕射, 及今, 凡五遷. 人有毁之者하면 輙罪之하니 於是 群臣 不敢復言이러라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승평升平 3년이다.
[] 진주秦主(전진前秦) 부견苻堅 감로甘露 원년이고 연주燕主(전연前燕) 모용준慕容儁 광수光壽 3년이다.
[] 봄 2월에 연주燕主가 여러 신하들에게 포지蒲池에서注+① 蒲池는 鄴城에 있다. 잔치를 베풀었다.
[] 처음에 나라(전연前燕) 태자 모용엽慕容曄(모용엽)이 일찍 죽자 그의 아우 모용위慕容暐를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연주燕主 모용준慕容儁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말이 나라 태자 에게 이르자注+① 周나라 靈王의 태자를 晉이라 하였는데, 지혜로웠으나 일찍 卒하고 아우 貴가 즉위하였다. 이 사람이 景王인데, 경왕이 崩하자 子朝와 子丐(자개)가 왕위를 다투니, 周나라가 마침내 혼란하였다. 모용준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재주 있는 자식은 얻기가 어렵다. 경선景先이 죽은 뒤로 나는 수염과 머리가 반백이 되었다.注+② 景先은 태자 慕容曄의 자이다. 中(중간)은 直衆의 切이니, 半이다. 들은 경선이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자,
사도장사司徒長史 이적李績이 대답하기를 “헌회태자獻懐太子注+③ 獻懷는 慕容曄의 시호이다. 지극히 효성스럽고 총명하고 영민하고 침착하고 굳세며 아첨을 미워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기예가 많고 겸손하고 공손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하였다.
모용준이 말하기를 “경의 칭찬이 비록 지나치나 이 아이가 살아 있다면 나는 죽어도 근심이 없을 것이다. 경무景茂注+④ 景茂는 태자 慕容暐의 자이다. 어떠한가?” 하자,
이때 태자 모용위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이적이 말하기를 “황태자는 타고난 자품이 높고 크십니다. 그러나 놀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고 현악기와 관악기의 음악을 좋아하시니,注+⑤ “岐嶷”은 높고 큰 모양이다. 일설에 “岐는 지혜롭다는 뜻이고 嶷은 지식이다.”라 하였다. 樂(즐기고 좋아함)는 五敎의 切이다. 이것이 결함이 됩니다.” 하였다.
모용준이 모용위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백양伯陽注+⑥ 伯陽은 李績의 자이다. 말은 약석藥石과 같이 은혜로운 말이니, 너는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모용위는 이에 매우 불평不平하였다.
[] 나라(전량前涼) 송혼宋混장관張瓘을 주살하였다.
[] 장관張瓘은 시기하고 까다롭고 포학하며 오로지 사랑하고 미워하는 개인의 감정으로 상을 주고 벌을 내렸다. 낭중郎中 은순殷郇(은순)이 간하자, 장관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제 스스로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남이 가르쳐주는 것을 굳이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송혼宋混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강직하니, 장관이 그를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송혼을 죽이고서 인하여 양왕涼王 장현정張玄靚을 폐위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고자 하였다.
송혼이 장사壯士를 거느리고 곧바로 남성南城으로注+① 王隱의 ≪晉書≫에 “涼州城이 龍의 모습이므로 이름을 卧龍城이라 하였는데, 남북 간의 거리가 7리이고 동서 간의 거리가 2리이다. 본래 흉노가 구축한 성인데 뒤에 張氏가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또 4개의 성을 증축하였는데, 箱이 각각 1천 步이니, 옛 성을 아울러 5개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張駿傳〉에 근거해보면 “張駿이 姑臧城의 남쪽에 다섯 궁전을 지었는데, 하였으니, 南城은 張氏가 거주한 곳이다.
들어가서 여러 진영鎭營선고宣告하기를 “장관張瓘이 역모를 도모하기에 태후의 명령을 받들어 그를 주살하겠다.” 하니, 장관이 나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아우 장거張琚와 함께 모두 자살하였다.
송혼은 정사를 보필할 적에 장현정에게 왕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양주목涼州牧을 칭할 것을 청하였다.
[] 나라(전진前秦)가 왕맹王猛경조윤京兆尹으로 삼았다.
[] 진왕秦王 부견苻堅등강鄧羌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삼고 왕맹王猛에게 경조윤京兆尹을 겸하게 하였다. 강태후彊太后의 아우 강덕彊德이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고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려注+① 橫(멋대로 하다)은 戶孟의 切이다. 남의 재화와 자녀들을 약탈하였다.
왕맹王猛이 수레에서 내려 부임하자마자 강덕을 체포하였다. 왕에게 상주上奏하였는데, 미쳐 그에 대한 답이 내려오기 전에 강덕은 이미 시신이 시장에 진열되었다. 부견이 사자를 급히 보내어 사면하게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왕맹은 등강鄧羌과 뜻을 함께하여 악한 사람을 미워해서 죄인을 규찰하고 조사함에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으니, 수십 일 사이에 권력이 있는 부호의 귀척들 중에 살육을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파면된 자가 20여 명이었다. 이에 조정이 두려워하고 벌벌 떨었으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숨을 죽이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다.
부견이 탄식하기를 “내가 비로소 이제야 천하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 태산태수泰山太守 제갈유諸葛攸나라(전연前燕)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겨울 10월에 사만謝萬치담郗曇이 다시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치담은 병이 들어 몸을 이끌고 돌아왔고 사만은 병사들이 궤멸하여 파면되어 서인이 되었다.
[] 제갈유諸葛攸가 수군과 육군 2만을 거느리고 나라를 공격할 적에 석문石門으로 쳐들어가 황하 가에 주둔하였다.
나라 상용왕上庸王 모용평慕容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거느리고 제갈유와 동아東阿에서 싸웠는데, 제갈유의 군대가 크게 패하자 사만謝萬치담郗曇에게 명하여 다시 공격하게 하였다.
사만이 호방함을 자랑하고 남을 경시하여 다만 담소하고 시 읊는 것을 고상함으로 자부할 뿐 일찍이 병사들을 어루만지지 않았다.
사안謝安이 이것을 깊이 근심하여 사만에게 이르기를 “네가 원수元帥가 되었으니, 마땅히 자주 여러 장수들을 접대해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 어찌 이와 같이 오만하고 방탕하고서 능히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만은 도리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여의봉으로 사방 자리에 있는 장수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제장들은 모두 강한 졸병이다.” 하니, 제장들이 더욱 원한으로 여겼다.注+① “如意”는 손으로 잡는 채이니, 지금의 骨朶子(골타자)와 같은바, 이것은 잡아서 지휘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다. 무릇 兵卒의 行伍에서 몸을 떨쳐 장수가 된 자를 兵과 卒로 부르는 것을 忌諱하는바, 이들이 이미 장수가 되었는데 졸병이라고 칭하니, 이 때문에 더욱 원한을 품은 것이다.
사안은 사만이 화를 면치 못할 것을 우려해서 마침내 각 부대장 이하의 장수들을 직접 하나하나 찾아가注+② “隊帥”는 부대의 장수이다. 造는 이름이다. 동생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 이윽고 사만謝萬이 병력을 거느리고 와수渦水영수潁水로 들어가서 낙양洛陽을 구원하였는데,注+① 渦水는 山桑에 이르러 淮水로 들어가고 潁水는 下蔡에 이르러 淮水로 들어가니, 謝尙의 군대가 下蔡에서 渦水와 潁水의 사이로 들어간 것이다. 치담郗曇이 병으로 후퇴하여 팽성彭城에 주둔하였다.
사만은 나라 군대가 크게 강성하므로 치담이 후퇴했다고 여겨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무리가 마침내 놀라 궤멸하였다.
사만이 낭패하고 혼자 돌아오자 군사들이 그를 처치할 것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사안 때문에 중지하였다.
조령을 내려 사만을 폐출廢黜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치담의 호를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강등하였다.
이에 허창許昌영천潁川, 초군譙郡패군沛郡의 여러 이 차례로 모두 나라에 함락되었다.
[] 12월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 나라(전진前秦)가 왕맹王猛으로 사예교위司隷校尉를 겸하게 하였다.
[] 진왕秦王 부견苻堅왕맹王猛보국장군輔國將軍 사예교위司隷校尉로 삼아 궁중에 있으면서 숙위하게 하고 복야僕射첨사詹事, 시중侍中중서령中書令을 예전처럼 겸하여 선발하게 하였다.
왕맹은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광록대부光禄大夫 임군任群처사處士 주동朱彤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으나, 부견은 허락하지 않고 부융을 중서감中書監으로 삼고 임군을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 주동을 태자서자太子庶子로 삼았다.
왕맹은 이때 나이가 36세였다. 1년 안에 다섯 번 승진하니,注+① 王猛은 尙書左丞으로 있다가 咸陽內史로 승진하였고, 또다시 侍中과 中書令으로 승진하고 京兆尹을 겸하였다. 또다시 吏部尙書로 승진하고 얼마 후 太子詹事로 승진하여 左僕射가 되었고, 이제 모두 다섯 번 승진한 것이다. 권세가 조정의 안팎을 압도하였다. 사람들 중에 그를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부견이 번번이 죄를 주니,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사면의……거주했다 : 사면의 색은 동방은 청색, 남방은 적색, 서방은 백색, 북방은 흑색을 이르며, ‘사시에 번갈아 거주했다’는 것은 봄에는 동쪽, 여름에는 남쪽, 가을에는 서쪽, 겨울에는 북쪽에 거주하였음을 이른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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