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봄 2월에 연주燕主가 여러 신하들에게 포지蒲池에서注+① 蒲池는 鄴城에 있다. 잔치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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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연燕나라(전연前燕) 태자 모용엽慕容曄(모용엽)이 일찍 죽자 그의 아우 모용위慕容暐를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연주燕主모용준慕容儁이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말이 주周나라 태자 진晉에게 이르자注+① 周나라 靈王의 태자를 晉이라 하였는데, 지혜로웠으나 일찍 卒하고 아우 貴가 즉위하였다. 이 사람이 景王인데, 경왕이 崩하자 子朝와 子丐(자개)가 왕위를 다투니, 周나라가 마침내 혼란하였다. 모용준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재주 있는 자식은 얻기가 어렵다. 경선景先이 죽은 뒤로 나는 수염과 머리가 반백이 되었다.注+② 景先은 태자 慕容曄의 자이다. 中(중간)은 直衆의 切이니, 半이다.경卿들은 경선이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자,
사도장사司徒長史이적李績이 대답하기를 “헌회태자獻懐太子는注+③ 獻懷는 慕容曄의 시호이다. 지극히 효성스럽고 총명하고 영민하고 침착하고 굳세며 아첨을 미워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기예가 많고 겸손하고 공손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하였다.
모용준이 말하기를 “경의 칭찬이 비록 지나치나 이 아이가 살아 있다면 나는 죽어도 근심이 없을 것이다. 경무景茂는注+④ 景茂는 태자 慕容暐의 자이다. 어떠한가?” 하자,
이때 태자 모용위가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이적이 말하기를 “황태자는 타고난 자품이 높고 크십니다. 그러나 놀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고 현악기와 관악기의 음악을 좋아하시니,注+⑤ “岐嶷”은 높고 큰 모양이다. 일설에 “岐는 지혜롭다는 뜻이고 嶷은 지식이다.”라 하였다. 樂(즐기고 좋아함)는 五敎의 切이다. 이것이 결함이 됩니다.” 하였다.
모용준이 모용위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백양伯陽의注+⑥ 伯陽은 李績의 자이다. 말은 약석藥石과 같이 은혜로운 말이니, 너는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모용위는 이에 매우 불평不平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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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양涼나라(전량前涼) 송혼宋混이 장관張瓘을 주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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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장관張瓘은 시기하고 까다롭고 포학하며 오로지 사랑하고 미워하는 개인의 감정으로 상을 주고 벌을 내렸다. 낭중郎中은순殷郇(은순)이 간하자, 장관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제 스스로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남이 가르쳐주는 것을 굳이 기다리지 않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송혼宋混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강직하니, 장관이 그를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송혼을 죽이고서 인하여 양왕涼王장현정張玄靚을 폐위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고자 하였다.
송혼이 장사壯士를 거느리고 곧바로 남성南城으로注+① 王隱의 ≪晉書≫에 “涼州城이 龍의 모습이므로 이름을 卧龍城이라 하였는데, 남북 간의 거리가 7리이고 동서 간의 거리가 2리이다. 본래 흉노가 구축한 성인데 뒤에 張氏가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또 4개의 성을 증축하였는데, 箱이 각각 1천 步이니, 옛 성을 아울러 5개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張駿傳〉에 근거해보면 “張駿이 姑臧城의 남쪽에 다섯 궁전을 지었는데,
하였으니, 南城은 張氏가 거주한 곳이다. 들어가서 여러 진영鎭營에 선고宣告하기를 “장관張瓘이 역모를 도모하기에 태후의 명령을 받들어 그를 주살하겠다.” 하니, 장관이 나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아우 장거張琚와 함께 모두 자살하였다.
송혼은 정사를 보필할 적에 장현정에게 왕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양주목涼州牧을 칭할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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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진秦나라(전진前秦)가 왕맹王猛을 경조윤京兆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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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진왕秦王부견苻堅은 등강鄧羌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삼고 왕맹王猛에게 경조윤京兆尹을 겸하게 하였다. 강태후彊太后의 아우 강덕彊德이 술을 먹고 주사를 부리고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려注+① 橫(멋대로 하다)은 戶孟의 切이다. 남의 재화와 자녀들을 약탈하였다.
왕맹王猛이 수레에서 내려 부임하자마자 강덕을 체포하였다. 왕에게 상주上奏하였는데, 미쳐 그에 대한 답이 내려오기 전에 강덕은 이미 시신이 시장에 진열되었다. 부견이 사자를 급히 보내어 사면하게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왕맹은 등강鄧羌과 뜻을 함께하여 악한 사람을 미워해서 죄인을 규찰하고 조사함에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으니, 수십 일 사이에 권력이 있는 부호의 귀척들 중에 살육을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파면된 자가 20여 명이었다. 이에 조정이 두려워하고 벌벌 떨었으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숨을 죽이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다.
부견이 탄식하기를 “내가 비로소 이제야 천하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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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태산태수泰山太守제갈유諸葛攸가 연燕나라(전연前燕)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겨울 10월에 사만謝萬과 치담郗曇이 다시 연燕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치담은 병이 들어 몸을 이끌고 돌아왔고 사만은 병사들이 궤멸하여 파면되어 서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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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제갈유諸葛攸가 수군과 육군 2만을 거느리고 연燕나라를 공격할 적에 석문石門으로 쳐들어가 황하 가에 주둔하였다.
연燕나라 상용왕上庸王모용평慕容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거느리고 제갈유와 동아東阿에서 싸웠는데, 제갈유의 군대가 크게 패하자 사만謝萬과 치담郗曇에게 명하여 다시 공격하게 하였다.
사만이 호방함을 자랑하고 남을 경시하여 다만 담소하고 시 읊는 것을 고상함으로 자부할 뿐 일찍이 병사들을 어루만지지 않았다.
형 사안謝安이 이것을 깊이 근심하여 사만에게 이르기를 “네가 원수元帥가 되었으니, 마땅히 자주 여러 장수들을 접대해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 어찌 이와 같이 오만하고 방탕하고서 능히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만은 도리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여의봉으로 사방 자리에 있는 장수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제장들은 모두 강한 졸병이다.” 하니, 제장들이 더욱 원한으로 여겼다.注+① “如意”는 손으로 잡는 채이니, 지금의 骨朶子(골타자)와 같은바, 이것은 잡아서 지휘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다. 무릇 兵卒의 行伍에서 몸을 떨쳐 장수가 된 자를 兵과 卒로 부르는 것을 忌諱하는바, 이들이 이미 장수가 되었는데 졸병이라고 칭하니, 이 때문에 더욱 원한을 품은 것이다.
사안은 사만이 화를 면치 못할 것을 우려해서 마침내 각 부대장 이하의 장수들을 직접 하나하나 찾아가注+② “隊帥”는 부대의 장수이다. 造는 이름이다. 동생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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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윽고 사만謝萬이 병력을 거느리고 와수渦水와 영수潁水로 들어가서 낙양洛陽을 구원하였는데,注+① 渦水는 山桑에 이르러 淮水로 들어가고 潁水는 下蔡에 이르러 淮水로 들어가니, 謝尙의 군대가 下蔡에서 渦水와 潁水의 사이로 들어간 것이다.치담郗曇이 병으로 후퇴하여 팽성彭城에 주둔하였다.
사만은 연燕나라 군대가 크게 강성하므로 치담이 후퇴했다고 여겨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무리가 마침내 놀라 궤멸하였다.
사만이 낭패하고 혼자 돌아오자 군사들이 그를 처치할 것을 도모하려 하였는데, 사안 때문에 중지하였다.
조령을 내려 사만을 폐출廢黜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치담의 호를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강등하였다.
이에 허창許昌과 영천潁川, 초군譙郡과 패군沛郡의 여러 성城이 차례로 모두 연燕나라에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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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2월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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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진秦나라(전진前秦)가 왕맹王猛으로 사예교위司隷校尉를 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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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진왕秦王부견苻堅은 왕맹王猛을 보국장군輔國將軍사예교위司隷校尉로 삼아 궁중에 있으면서 숙위하게 하고 복야僕射와 첨사詹事, 시중侍中과 중서령中書令을 예전처럼 겸하여 선발하게 하였다.
왕맹은 양평공陽平公부융苻融과 광록대부光禄大夫임군任群과 처사處士주동朱彤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으나, 부견은 허락하지 않고 부융을 중서감中書監으로 삼고 임군을 태자가령太子家令으로 주동을 태자서자太子庶子로 삼았다.
왕맹은 이때 나이가 36세였다. 1년 안에 다섯 번 승진하니,注+① 王猛은 尙書左丞으로 있다가 咸陽內史로 승진하였고, 또다시 侍中과 中書令으로 승진하고 京兆尹을 겸하였다. 또다시 吏部尙書로 승진하고 얼마 후 太子詹事로 승진하여 左僕射가 되었고, 이제 모두 다섯 번 승진한 것이다. 권세가 조정의 안팎을 압도하였다. 사람들 중에 그를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부견이 번번이 죄를 주니,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사면의……거주했다 :
사면의 색은 동방은 청색, 남방은 적색, 서방은 백색, 북방은 흑색을 이르며, ‘사시에 번갈아 거주했다’는 것은 봄에는 동쪽, 여름에는 남쪽, 가을에는 서쪽, 겨울에는 북쪽에 거주하였음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