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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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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年(229)
七年이라
魏太和三年이요 吳黃龍元年注+時夏口‧武昌竝言黃龍見, 權遂以改元.이라
右將軍亮 伐魏하여 拔武都, 陰平하니 復拜丞相注+陰平道, 前漢屬廣漢郡, 後漢屬廣漢屬國都尉, 魏分置陰平郡.하다
◑夏四月 吳王孫權 稱皇帝하다
吳王權 卽皇帝位하고 大赦改元하니 百官 畢會 歸功於周瑜注+以能拒曹公而成三分之業也.하다
將軍張昭擧笏하여 欲褒贊功德하여 未及言 權曰 如張公計 今已乞食矣注+謂張昭欲迎曹公也.리라하니 昭大慙汗이러라
追尊父堅하여 爲武烈皇帝하고 兄策爲長沙桓王하고 立子登爲太子하다
以諸葛恪爲太子左輔하고 張休爲右弼하고 顧譚爲輔正하고 陳表爲翼正하고 謝景, 范愼, 羊衜等 爲賓客注+輔正及翼正, 皆吳自創置之. 衜, 古道字.하니 於是 東宮 號多士
太子使侍中胡綜으로 作賓友目注+目者, 因其人之才品, 爲之品題也.하니 曰 英才卓越則諸葛恪이요 精識時機則顧譚이요 凝辯宏達則謝景이요 究學甄微則范愼注+凝, 堅定也. 宏, 闊遠也. 達, 明通也. 甄微, 謂甄察其微妙之指.이라하다
羊衜私駁之曰 元遜 才而疏하고 子嘿 精而狠하고 叔發 辯而浮하고 孝敬 深而陿注+元遜, 諸葛恪字. 子嘿, 顧譚字. 叔發, 謝景字. 孝敬, 范愼字.이라한대
恪等 惡之러니 其後 皆敗하여 如羊衜所言하니라
遣衛尉陳震使吳하여 及吳主權盟하다
吳主權 使以竝尊二帝 來告注+二帝, 吳‧蜀共爲帝也.어늘 衆皆以爲交之無益而名體弗順하니 宜顯明正義하여 絶其盟好注+天無二日, 土無二王, 古今之正義也.라한대
丞相亮曰 權有僭逆之心 久矣로되 國家所以略其釁情者 求掎角之援也注+釁, 隙也. 情, 欲也. 今若加顯絶이면 讐我必深이요
更當移兵東戍하여 與之角力하여 須幷其土라야 乃議中原注+角, 爭也, 競也.이리이다 彼賢才尙多하고 將相輯睦하니 未可一朝定也
頓兵相守하여 坐而須老하여 使北賊得計 非算之上者注+須, 待也. 北賊, 謂魏也.니이다 孝文 卑辭匈奴注+事見漢文帝前六年.하고 先帝優與吳盟注+胡三省曰 “優, 饒也. 今人猶謂寬假爲優饒.”하시니
皆應權通變하고 深思遠益이니 非若匹夫之忿者也注+言所計者大也.니이다
議者 以權利在鼎足하니 不能幷力이요 且志望已滿하여 無上岸之情이라하니 皆似是而非也注+無上岸之情, 謂孫權之志在保江, 不能上岸而北向也.니이다
蓋其智力不侔故 限江自保하니 權之不能越江 猶魏賊之不能渡漢이라 非力有餘而利不取也注+不能渡漢, 言魏不能渡漢而圖江陵也. 此漢, 班志所謂東漢水也.니이다
若大軍致討 彼高當分裂其地하여 以爲後圖 下當略民廣境하여 示武於內하리니 非端坐者也注+言蜀若破魏, 吳亦將分功.
就其不動而睦於我하면 我之北伐 無東顧憂 河南之衆 不得盡西하리니
此之爲利 亦已深矣注+言蜀與吳和, 則雖傾國北伐, 不須東顧以備吳, 而魏河南之衆, 欲留備吳, 不得盡西以抗蜀兵也. 權僭逆之罪 未宜明也니이다 乃遣震賀吳하니 與盟約中分天下하다
吳以張昭爲輔吳將軍하다
吳主權 嘗於武昌 臨釣臺注+水經 “武昌有樊山, 北背大江, 江上有釣臺.”하여 飮酒大醉하여 使人以水灑群臣注+醉者, 以水灑之, 醒然後能飮.하고 曰 今日 醉墮臺中이라야 乃止호리라
昭正色而出하니 呼入하여 謂曰 共作樂耳어늘 公何爲怒乎注+樂, 音洛, 下同.
昭曰 昔 紂糟丘酒池하여 長夜之飮하니 當時 亦以爲樂이요 不以爲惡也注+紂以酒爲池, 糟丘足以望十里, 一鼓而牛飮者三千人, 懸肉爲林, 使男女倮逐於其間, 爲長夜之飮.니이다 黙然하고 遂罷酒하다
至是하여 昭以病告老어늘 更拜輔吳將軍하여 班亞三司注+三司, 三公也.하다
昭每朝見 辭色壯厲하여 義形於色注+見, 賢遍切, 下同.이라 曾以直言逆旨하여 中不進見注+中間因逆旨, 故不曾敢進見.이러니
後漢使來 稱漢德美하니 群臣 莫能屈이라 復思昭하여 遣中使하여 勞問請見注+中使, 宦者.한대 昭避席謝
跪止之하니 昭坐定 仰曰 昔 太后, 桓王 不以老臣屬陛下而以陛下屬老臣注+太后, 謂權母吳氏也. 屬, 託也.하시니
是以 思盡臣節하여 以報厚恩이나 而意慮淺短하여 違逆盛旨하니이다
이나 臣愚心所以事國 志在忠益畢命而已 若乃變心易慮하여 以偸榮取容 此臣所不能也로이다 辭謝焉이러라
秋七月 魏制하여 後嗣有由諸侯入奉大統者어든 不得顧私親하다
詔曰 禮 王后無嗣 擇建支子하여 以繼大宗하니 則當纂正統而奉公義 何得復顧私親哉注+纂, 繼也.리오
其令公卿有司 深以前世行事爲戒하여 後嗣萬一有由諸侯入奉大統이어든 則當明爲人後之義하고
敢爲導諛하여 建非正之號하여 以干正統하여 謂考爲皇하고 稱妣爲后어든 則股肱大臣 誅之無赦 其書之金策하여 藏之宗廟하고 著于令典注+金策, 簡策也. 魏主無子, 知必以支孽爲後, 故豫下此詔, 以約飭爲人子爲人臣者.하라
九月 吳遷都建業하고 使上大將軍陸遜으로 輔太子登하고 守武昌하다
吳主權 遷都建業호되 皆因故府하여 不復增改하고 使上大將軍陸遜으로 輔太子登하고 及尙書九官으로 留武昌注+吳於大將軍之上, 復置上大將軍. 九官, 九卿也.하다
南陽劉廙 嘗著先刑後禮論하니 同郡謝景 稱之於遜한대
呵景曰 禮之長於刑 久矣注+長, 展兩切, 言當以禮爲先也. 廙以細辯而詭先聖之敎注+詭, 違也.하니 侍東宮 宜遵仁義以彰德音이니 若彼之談 不須講也니라
太子與西陵都督步隲書하여 求見啓誨注+吳保江南, 凡邊要之地, 皆置督, 獨西陵置都督, 以國之西門統攝要重也.한대 條時事在荊州界者 及諸僚吏行能以報之하고
且上疏曰 人君 不親小事하여 使百官有司 各任其職이라 舜命九賢 則無所用心하여 不下廟堂而天下治注+舜命九官, 禹平水土, 棄種百穀, 契敷五敎, 皐陶明五刑, 垂共工, 益作虞, 伯夷典禮, 夔典樂, 龍作納言.하니이다
賢人所在 折衝萬里하나니 信國家之利器 崇替之所由也 願重以經意하시면 則天下幸甚注+重, 直用切.이리이다
魏主叡常言 獄者 天下之命이라하고 因改平望觀하여 爲聽訟觀하고 每斷大獄 詣觀臨聽之注+觀, 古玩切. 水經注 “平望觀, 在華林園東南, 天淵池水逕觀南.”러라
魏文侯師李悝 著法經六篇하고 蕭何定漢律 益爲九篇이러니 後稍增至六十篇注+晉志 “魏文侯師李悝, 悝撰次諸國法, 著法經”하고
又有令三百餘篇 決事比九百六卷注+比, 以例相比況也. 決事比, 猶也.하고 馬, 鄭諸儒章句 又十餘家注+馬‧鄭, 馬融‧鄭玄也.러니 至是하여 所當用 二萬六千餘條 七百七十餘萬言이러라
乃詔但用鄭氏章句하니 尙書衛覬奏注+覬, 音冀.호되 刑法者 國家之所貴重而私議者之所輕賤이요
獄吏者 百姓之所縣命而選用者之所卑下注+縣, 讀曰懸. 王政之敝 未必不由此也 請置律博士하노이다 從之注+晉職官志 “律博士, 屬廷尉.”하다
又詔司空陳群等하여 刪約漢法하여 制新律十八篇 州郡令四十五篇,
尙書官令, 軍中令百八十餘篇注+州郡令, 用之刺史‧太守. 尙書令, 用之於國. 軍中令, 用之於軍.하니 於正律九篇 爲增이요 於旁章科令 爲省矣러라
十二月 築漢, 樂二城하다
丞相亮 徙府營於南山下하고 築漢城於沔陽, 樂城於成固注+沔陽‧成固二縣, 皆屬漢中郡.하다


己酉年(229)
나라(蜀漢) 後主 建興 7년이다.
나라 明帝 曹叡 太和 3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黃龍 원년이다.注+이때 夏口武昌에서 모두 黃龍이 나타났다고 말하였으므로 孫權이 마침내 改元한 것이다.
】 봄에 右將軍 諸葛亮나라를 정벌하여 武都陰平을 함락시키니, 다시 丞相을 제수하였다.注+陰平道前漢 때에는 廣漢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廣漢屬國都尉에 속하였으며, 나라 때에는 나누어 陰平郡을 설치하였다.
】 여름 4월에 吳王 孫權皇帝를 칭하였다.
吳主 孫權吳主 孫權
吳王 孫權皇帝의 지위에 오르고 大赦改元을 행하니, 百官들이 모두 모였다. 孫權이 이 을 모두 周瑜에게 돌렸다.注+〈“歸功於周瑜”는〉 周瑜가 능히 曹公(曹操)을 막아 三分天下의 공업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將軍 張昭을 들고서 손권의 공덕을 찬양하려 하여 미처 말하기 전에 손권이 말하기를 “張公의 계획과 같이 했더라면 내 지금 이미 걸식했을 것이다.”注+〈“如張公計 今已乞食矣”는〉 張昭曹公을 맞이하고자 했던 일을 이른다. 하니, 장소가 크게 부끄러워 땀을 흘렸다.
손권은 아버지 孫堅追尊하여 武烈皇帝라 하고, 형 孫策長沙桓王이라 하고, 아들 孫登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
諸葛恪太子左輔로 삼고, 張休右弼로, 顧譚輔正으로, 陳表翼正으로 삼고, 謝景范愼, 羊衜(양도) 등은 賓客이 되니,注+輔正翼正은 모두 나라가 스스로 처음 설치한 것이다. 古字이다. 이때에 東宮名士가 많다고 일컬어졌다.
太子侍中 胡綜으로 하여금 ≪賓友目≫을 짓게 하니,注+은 그 사람의 재주와 인품을 가지고 품평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기를 “영명한 재주가 탁월함은 諸葛恪이요, 당시의 機務에 정통함은 顧譚이요, 논변에 흔들림이 없고 논리가 활달하게 통달함은 謝景이요, 학문을 연구하고 미묘한 뜻을 살핌은 范愼이다.”注+은 굳게 지킴이요, 은 광활하고 심원함이다. 은 밝게 통달함이다. “甄微”는 그 미묘한 뜻을 잘 살핌을 이른다. 하였다.
양도가 사사로이 논박하기를 “元遜(제갈각)은 재주가 있으나 소략하고 子嘿(고담)은 정밀하나 모질고 叔發(사경)은 말을 잘하나 실속이 없고 孝敬(범신)은 깊으나 좁다.”注+元遜諸葛恪이고, 子嘿顧譚이고, 叔發謝景이고, 孝敬范愼이다. 하니,
제갈각 등이 그를 미워하였는데, 그 뒤에 모두 실패하여 양도가 말한 바와 같게 되었다.
】 〈나라(蜀漢)가〉 衛尉 陳震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서 吳主 孫權盟約하게 하였다.
吳主 孫權이 사신을 보내어 두 황제를 아울러 높일 것을 통고하자,注+二帝”는 나라와 나라가 함께 황제가 되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손권과 국교를 맺는 것은 유익함이 없고 명분과 체통이 하지 못하니, 마땅히 바른 義理를 드러내어 밝혀서 그와 동맹한 우호를 끊어야 합니다.”注+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왕(황제)이 없는 것이 古今의 바른 의리이다. 하였다.
이에 丞相 諸葛亮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권이 참람하고 반역할 마음을 품은 지가 오래되었으나 우리 국가에서 그의 나쁜 (욕망)을 소략히 하여 덮어둔 이유는 掎角(두 나라의 군대가 서로 호응함)의 원조를 얻기 위해서입니다.注+은 틈이요, 은 욕망이다. 이제 만약 드러내놓고 절교를 하면 우리를 원수로 여김이 반드시 깊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마땅히 군대를 이동하여 동쪽 지방에 주둔시켜 저들과 힘을 다투어서 그 땅(나라)을 점령하고 나서야 비로소 中原(나라)을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注+은 다툼이요, 경쟁함이다.나라에는 어질고 재주 있는 이가 아직도 많고 장수와 정승이 화목하니, 하루아침에 평정할 수 없습니다.
군대를 주둔하여 서로 대치해서 가만히 앉아 늙기를 기다려 북쪽의 (나라)으로 하여금 좋은 방법을 얻게 하는 것은 훌륭한 계책이 아닙니다.注+은 기다림이다. “北賊”은 나라를 이른다. 옛날에 孝文帝匈奴에게 겸손한 말씀을 하였고,注+〈“孝文卑辭匈奴”는〉 先帝는 관용을 베풀어 나라와 맹약을 하셨으니,注+胡三省이 말하기를 “는 너그럽게 대함[]이니, 지금 사람들은 아직도 寬假(관용)을 優饒라고 말한다.” 하였다.
이는 모두 임기응변하여 변통을 하고 먼 후일의 유익함을 깊이 생각한 것이니, 匹夫의 분노처럼 한 것이 아닙니다.注+〈“深思遠益”은〉 계책한 바가 큼을 말한 것이다.
】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孫權의 이익은 천하를 三分하여 鼎足의 형세를 이루는 데 있으니 그와 힘을 합칠 수가 없고, 또 손권의 뜻과 욕망이 이미 가득차서 나라의 江岸으로 올라갈 마음이 없다.’ 하니, 이는 모두 옳은 것 같으나 잘못된 의논입니다.注+無上岸之情”은 孫權의 뜻이 長江을 보존하는 데에 있어서 江岸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공격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그의 지혜와 힘이 나라와 대등하지 않기 때문에 長江을 한계로 삼아 스스로 보존하는 것이니, 손권이 長江을 건너가지 못하는 것은 나라 漢水를 건너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힘이 有餘한데 이익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注+不能渡漢”은 나라가 漢水를 건너 江陵을 도모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니, 이 漢水班固의 ≪漢書≫ ≪地理志≫에 이른바 東漢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대군을 동원하여 나라를 토벌한다면 저들은 위로는 마땅히 나라의 토지를 나누어서 후일의 도모를 할 것이요, 아래로는 마땅히 백성을 차지하고 국경을 넓혀서 武勇을 안에 보일 것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자가 아닙니다.注+〈“若大軍致討……示武於內”은〉 蜀漢이 만약 나라를 격파하면 나라 또한 장차 을 나누어 가질 것임을 말한 것이다.
만일 그가 동요하지 않고 우리와 화목한다면 우리가 북쪽을 정벌함에 동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고, 河南 지방에 주둔해 있는 나라의 병력이 모두 서쪽으로 향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이로움이 또한 이미 크니,注+〈“我之北伐……不得盡西”는〉 蜀漢나라와 화친하면 비록 온 국력을 동원하여 북쪽을 공격하더라도 굳이 동쪽을 돌아보아 나라를 대비할 것이 없고, 河南 지방에 주둔해 있는 나라의 병력이 남아서 나라를 대비하고자 해서 모두 서쪽을 향해 蜀漢의 군대와 항거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손권의 참람하고 반역하는 죄는 밝힐 수가 없습니다.” 이에 陳震나라에 보내어 〈황제에 즉위한 것을〉 축하하니, 손권은 蜀漢과 천하를 차지한 다음 반으로 나눌 것을 맹약하였다.
나라는 張昭輔吳將軍으로 삼았다.
吳主 孫權이 일찍이 武昌에서 釣臺에 가注+水經≫에 “武昌樊山이 있으니, 북쪽으로 大江을 등지고 있으며 강가에 釣臺가 있다.” 하였다.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신하들의 얼굴에 물을 뿌리게 하며注+술에 취한 자는 물을 얼굴에 뿌려서 술이 깬 뒤에야 술을 다시 마실 수 있다. 말하기를 “금일에 취하여 釣臺 가운데로 떨어져야 비로소 그치겠다.” 하였다.
張昭가 정색하고 나가자, 손권이 그를 불러 들어오게 해서 이르기를 “함께 즐겁게 놀려는 것인데 은 어찌하여 성내는가?”注+(즐기다)은 음이 이니, 아래도 같다. 하니,
장소가 말하기를 “옛날 紂王이 술지게미로 언덕을 만들고 술로 못을 만들어 긴긴 밤 술을 마셨는데, 當時에도 이것을 즐겁다 하고 나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注+ 하였다. 손권은 묵묵히 있다가 마침내 술자리를 파하였다.
이때에 〈손권이 황제를 칭하자〉 장소가 신병이 있다고 告老(致仕)를 청하였는데, 다시 輔吳將軍을 제수하여 三司 다음의 班列에 두었다.注+三司三公이다.
張昭는 매번 조회에서 임금을 謁見할 적에 말소리와 얼굴빛이 장엄하여 의로움이 낯빛에 나타났다.注+(알현하다)은 賢遍이니, 아래도 같다. 일찍이 직언을 하다가 孫權의 뜻을 거슬러서 중간에 나와 알현하지 못하였다.注+〈“中不進見”은〉 中間孫權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일찍이 감히 나와 알현하지 못한 것이다.
뒤에 蜀漢의 사신이 와서 蜀漢의 아름다운 덕을 칭송하였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 아무도 사신의 말을 꺾지 못하였다. 손권이 다시 장소를 생각하여 中使(환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청하여 만나보았는데,注+中使는 환관이다. 장소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죄하였다.
손권은 무릎을 꿇고서 사죄하는 장소를 만류하니, 장소가 좌정한 다음 고개를 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太后桓王(孫策)이 老臣을 폐하께 부탁하지 않고 폐하를 노신에게 부탁하시니,注+太后孫權의 어머니 吳氏를 이른다. 은 부탁함이다.
이 때문에 忠節을 다하여 두터운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뜻과 생각이 얕고 짧아서 군주의 훌륭한 뜻을 거슬렀습니다.
그러나 의 어리석은 생각에 나라를 섬기는 방법은 충성스럽고 국가에 유익하게 하여 목숨을 마침에 뜻을 두는 것일 뿐이니,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구차히 영화를 취하고 용납되기를 구하는 것은 이 하지 못합니다.” 손권이 사례하였다.
】 가을 7월에 나라에서는 詔令을 내려 後嗣 중에 諸侯로서 들어와 大統을 받드는 자가 있으면 私親(생부모)을 돌아볼 수 없게 하였다.
詔令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王后가 후사가 없으면 支子(지차 아들)를 가려 세워서 大宗을 잇게 하였다. 마땅히 正統을 이었으면 公義를 받들어야 하니, 어찌 다시 私親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注+은 이음이다.
公卿有司로 하여금 前代의 행한 일을 깊은 경계로 삼아서 후사 중에 만일 諸侯로서 들어와 大統을 받드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人後(남의 양자)가 된 의리를 밝혀야 하니,
〈신하 중에〉 감히 군주에게 아첨해서 올바르지 않은 칭호를 세워 正統을 범해서 (생부)를 일러 이라 하고 (생모)를 칭하여 라고 하면, 股肱大臣이 용서하지 말고 주살해야할 것이니, 이것을 金策에 써서 宗廟에 보관하고 令典(법전)에 드러내어라.”注+金策簡策이다. 魏主가 자식이 없으니, 반드시 支孽(庶子)로 후사를 삼아야 할 것임을 알았으므로 미리 詔令을 내려서 남의 자식이 된 자와 남의 신하가 된 자를 申飭한 것이다.
】 9월에 나라가 建業으로 遷都하고, 上大將軍 陸遜으로 하여금 太子 孫登을 보필하여 武昌를 지키게 하였다.
吳主 孫權建業으로 천도하였는데 모두 옛 관부의 건물을 따라서 다시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않았으며, 注+나라는 大將軍 위에 다시 上大將軍을 두었다. 九官九卿이다.
南陽 劉廙(유이)가 일찍이 〈先刑後禮論〉을 지었는데 같은 의 사람인 謝景이 그를 陸遜에게 칭찬하자,
육손이 사경을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가 형벌보다 우선임이 오래되었다.注+(우선하다)은 展兩이니, 〈“禮之長於刑”은〉 마땅히 로써 우선을 삼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유이가 하찮은 변론으로 先聖의 가르침을 어기니,注+는 어김이다. 그대는 東宮를 모시면서 마땅히 仁義를 따라 德音(덕스러운 말)을 밝혀야 할 것이다. 저와 같은 말은 강론할 것이 못 된다.”
】 〈나라〉 太子西陵都督 步隲(보즐)에게 편지를 보내어 계도와 가르침을 받을 것을 청하자,注+나라는 江南 지방을 보유하고서 변방의 요지에 모두 을 설치하였는데 유독 西陵에는 都督을 두었으니, 이는 西陵이 국가의 西門으로 중요한 지역을 총괄하기 때문이었다. 보즐이 荊州의 경내에 벌어지고 있는 時事와 여러 관료들의 행실과 재능을 조목조목 적어서 보고하고
또 다음과 같이 上疏하였다. “人君은 작은 일을 직접 처리하지 아니하여 百官有司(담당관)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직책을 맡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아홉 명의 현자에게 관직을 명함에 마음을 쓰신 바가 없어서 廟堂을 내려가지 않고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습니다.注+임금이 아홉 명의 관원을 임명하였으니, 임금은 〈司空이 되어〉 水土를 고르게 다스리고, 는 〈后稷이 되어〉 百穀을 파종하고, (설)은 〈司徒가 되어〉 를 펴고, 皐陶는 〈가 되어〉 을 밝히고, 共工이 되고, 가 되고, 伯夷는 〈秩宗이 되어〉 를 주관하고, 는 〈典樂이 되어〉 음악을 주장하고, 納言이 되어 〈王命出納하였다.〉
賢人이 있는 곳에는 만 리 밖에서 을 꺾을 수 있으니, 현인은 참으로 국가의 利器이고 나라의 융성과 침체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거듭 이것을 유념하시면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注+(거듭)은 直用이다.
】 겨울 10월에 나라는 聽訟觀을 세우고 律博士를 두었다.
魏主 曹叡가 항상 말하기를 “刑獄天下 사람들의 목숨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平望觀을 고쳐 聽訟觀이라 하고, 매번 큰 옥사를 결단할 때에 청송관에 가서 직접 訟事를 다스렸다.注+(樓觀)은 古玩이다. ≪水經注≫에 “平望觀華林園 동남쪽에 있는데 天淵池의 물이 평망관 남쪽을 경유한다.” 하였다.
】 처음에 文侯의 스승인 李悝(이회)가 ≪法經≫ 6을 저술하였고 蕭何가 ≪漢律≫을 정할 적에 3편을 보태어 9편으로 만들었는데 뒤에 차츰 증가하여 60편에 이르렀고,注+晉書≫ 〈刑法志〉에 “ 文侯의 스승이 李悝였는데, 이회가 여러 나라의 법을 차례로 엮어서 ≪法經≫을 지었다.” 하였다.
또 ≪≫ 300여 편과 ≪決事比≫ 906권이 있고注+는 준례로 삼아 서로 비교하는 것이니, ≪決事比≫는 세 가지 斷例와 같은 것이다. 馬融鄭玄 등 여러 儒者들의 章句(주석)가 또 10여 이니,注+, ”은 馬融鄭玄이다. 이때에 이르러 마땅히 사용해야 할 것이 2만 6천여 조항에 770여만 였다.
】 이에 詔令을 내려 오직 鄭氏(鄭玄)의 章句만을 사용하게 하니, 尙書 衛覬(위기)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注+는 음이 이다. “형법은 국가에서는 소중히 여기나 사사로이 의논하는 자들은 가볍게 여기고 천시하는 바이며,
獄吏는 백성들의 목숨이 달려 있으나 관직을 選用하는 자는 낮게 여기는 바이니,注+(매다)은 으로 읽는다. 王政의 폐해가 반드시 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律博士를 설치할 것을 청합니다.” 魏主는 그의 말을 따랐다.注+晉書≫ 〈職官志〉에 “律博士廷尉에 속했다.” 하였다.
】 또 司空 陳群 등에게 詔令을 내려 나라의 법률을 삭제하고 요약하여 ≪新律≫ 18편과 ≪州郡令≫ 45편,
尙書官令≫과 ≪軍中令≫ 180여 편을 제정하게 하니,注+州郡令≫은 刺史太守에게 사용하고, ≪尙書令≫은 나라에서 사용하고, ≪軍中令≫은 군대에서 사용하였다. 正律 9편에 대해서는 더 늘렸고, 부속 법률과 條令에 대해서는 줄였다.
】 12월에 〈나라(蜀漢)가〉 漢城樂城을 쌓았다.
丞相 諸葛亮丞相府南山 아래로 옮기고는 漢城沔陽에 쌓고 樂城成固에 쌓았다.注+沔陽成固은 모두 漢中郡에 속하였다.


역주
역주1 일이……보인다 : 漢 文帝 前 6년에 匈奴의 冒頓單于(묵특선우)가 편지를 보내 화친을 청하자, 문제가 이를 받아들이는 답서를 보낸 일과, 宗室의 딸인 옹주를 시집보내 閼氏(연지)로 삼은 일을 이른다.
역주2 紂王은……마셨다 : 위 내용은 ≪韓詩外傳≫ 등에 보인다.
역주3 上大將軍……하였다 : ≪資治通鑑≫에는 “太子 孫登과 尙書 九卿을 武昌에 머물게 하고 上大將軍 陸遜으로 하여금 태자를 보필하게 하고 아울러 荊州와 豫章 3郡의 일을 관장하고 軍事와 國事를 감독하게 하였다.[留太子登及尙書九官於武昌 使上大將軍陸遜輔太子 幷掌荊州及豫章三郡事 董督軍國]”라고 하였다.
역주4 五敎 : 다섯 가지 윤리 도덕에 관한 가르침으로,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父子有親], 군신간에는 의리가 있고[君臣有義],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고[夫婦有別], 장유간에는 질서가 있고[長幼有序], 붕우간에는 信實함이 있는 것[朋友有信]이다. ≪書經≫ 〈虞書 舜典〉에 “舜임금이 契에게 말씀하기를 ‘百姓들이 친목하지 않으며 五品이 順하지 못하기에 너를 司徒로 삼노니, 공경히 五敎를 펴되 너그러움에 있게 하라.’ 하였다.[帝曰 百姓不親 五品不遜 汝作司徒 敬敷五敎 在寛]”라고 보이는바, 五品은 父子, 君臣, 夫婦, 長幼, 朋友 다섯 가지의 명칭과 지위에 따른 등급이다.
역주5 五刑 : 옛날 시행하였던 다섯 가지 肉刑으로, 첫째는 얼굴에 자자하는 墨刑, 둘째는 코를 베는 劓刑(의형), 셋째는 발을 베는 剕刑(비형), 넷째는 생식기를 제거하는 宮刑, 다섯 번째는 死刑인 大辟이다.
역주6 魏立聽訟觀 置律博士 : “‘蜚廉觀과 桂觀을 만들었다.’라고 썼고(武帝 元封 2년(B.C.109)) 또 400尺의 觀을 일으켰다고 썼으니(靈帝 光和 5년(182)), 이는 모두 비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聽訟觀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찬미한 것이니, 魏主가 이때 형벌을 잘 삼갔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 觀을 쓴 것이 7번인데, 魏나라의 聽訟觀과 秦나라의 聽訟觀, 宋나라의 總明觀과 北周의 通道觀은 모두 찬미한 것이요, 蜚廉觀‧桂觀과 400尺의 觀과 望僊觀은 모두 비난한 것이다. 律博士를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律博士를 쓴 것이 2번이다(이해와 隋나라 癸卯年(583)).[書作蜚廉桂觀矣(武帝元封二年) 又書起四百尺觀矣(靈帝光和五年) 皆譏也 此其書聽訟觀 何 美之也 魏主於是能愼罰矣 綱目書觀七 魏聽訟 秦聽訟 宋總明 周通道 皆美也 蜚廉 桂觀 四百尺觀 望僊觀 皆譏也 書律博士始此 終綱目 書律博士二(是年 隋癸卯年)]” ≪書法≫
역주7 三斷例 : 獄事를 결단한 세 가지 判例로 보이나 자세하지 않다.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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