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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4)

자치통감강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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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年(B.C. 105)
六年이라
作首山宮注+宮, 在河東蒲坂界.하다
◑ 遣郭昌하여 將兵擊昆明하다
欲通大夏하여 遣使호되 皆閉昆明하여 爲所殺하고 奪幣物이라
於是 赦京師亡命하고 遣郭昌하여 將以擊之注+將, 卽亮切.러니
後復遣使호되 竟不得通하니라
大旱하고하다
烏孫使者 見漢廣大하고 歸報其國한대 其國 乃益重漢이라
匈奴怒하여 欲擊之하니 烏孫하여 使使願得尙漢公主爲昆弟어늘
天子許之하여 以江都王建女細君으로 爲公主하여 往妻烏孫昆莫하여 以爲右夫人하니 匈奴亦遣女妻之하여 以爲左夫人注+建, 易王非之子. 妻, 去聲, 下同.하다
公主自治宮室居하고 歲時 再與昆莫會호되 昆莫年老하고 言語不通이라
公主悲愁思歸하여 作黃鵠之歌注+歌曰 “吾家嫁我兮天一方. 遠託異國兮烏孫王. 窮廬爲室兮旃爲墻. 以肉爲食兮酪爲漿. 居常土思兮心內傷, 願爲黃鵠兮歸故鄕.”하니 天子聞而憐之하여 間歲使人問遺注+間, 古莧切, 間歲者, 隔一歲也.하다
昆莫 欲使其孫岑娶 尙公主注+岑娶, 烏孫官號也, 名軍須靡.호되 公主不聽하고 上書言狀한대
天子方欲與烏孫共滅胡하여 詔報從其國俗하라하니
岑娶遂妻公主러니 昆莫死 代立爲昆彌注+彌, 音縻. 昆莫, 本是王號, 而其人名獵驕靡, 故書云昆彌. 昆取昆莫. 彌取驕靡. 彌靡, 音有輕重耳, 蓋本一也. 後遂以昆彌爲王號也.하니라
是時 漢使西踰蔥嶺하니 諸小國 皆隨漢使獻見이어늘
每巡狩海上할새 悉從外國客注+從, 才用切.하여 大都多人이면 則大角觝하여 聚觀者하고 散財帛賞賜하여 以示富厚注+觝, 與抵同. 觀, 工喚切, 下同. 聚都邑人, 令觀看以誇示之.하고 令徧觀名倉庫府藏之積하여 以傾駭之注+藏, 才浪切, 物所畜也. 積, 子智切, 委積之積.
이나 西域 以近匈奴 常畏匈奴使하여 待之 過於漢使焉이러라
匈奴烏維單于死하니 子兒單于烏師廬立하다
烏師廬年少하여 兒單于라하니
自此之後 單于益西北徙하니 左方兵直雲中하고 右方 直酒泉燉煌郡注+直, 當也. 匈奴左方兵, 本直上谷以東. 右方兵, 直上郡以西. 單于庭, 直代‧雲中. 今徙去而西北, 故左右方亦徙.하니라


병자년(B.C. 105)
[綱] 나라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원봉元封 6년이다.
봄에 수산궁首山宮을 지었다.注+궁은 하동河東 포판蒲坂의 경계에 있었다.
[綱] 곽창郭昌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곤명昆明을 공격하게 하였다.
[目] 나라가 대하大夏와 통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곤명昆明에 막혀 살해당하였고 폐백과 물건을 빼앗겼다.
이에 경사京師에 망명 와서 있는 자들의 죄를 사면하고 곽창郭昌을 보내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注+(거느리다)은 즉량卽亮이다.
뒤에 다시 대하大夏에 사신을 보냈으나 끝내 통할 수가 없었다.
[綱] 가을에 크게 가물고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었다.
[綱] 종실의 딸을 공주로 삼아 오손烏孫에게 시집보냈다.
[目] 오손烏孫의 사자가 나라의 영토가 넓고 큰 것을 보고는 돌아가 그 나라에 보고하자, 오손국烏孫國에서는 마침내 나라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이에 흉노匈奴가 노하여 오손을 공격하려 하니, 오손에서는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나라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어 형제가 되기를 원하였다.
천자天子가 이를 허락하여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인 유세군劉細君을 공주로 삼아 오손의 곤막昆莫에게 시집보내 우부인右夫人이 되게 하니, 흉노에서도 딸을 곤막昆莫에게 시집보내서 좌부인左夫人으로 삼게 하였다.注+유건劉建역왕易王 유비劉非의 아들이다. (시집보내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도 같다.
공주는 스스로 궁실을 아름답게 꾸며 거처하였고, 세시歲時의 명절에 한두 번 곤막과 만났는데, 곤막은 연로年老하고 언어가 통하지 못하였다.
공주가 슬퍼하고 근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황곡가黃鵠歌’를 지으니,注+그녀가 지은 노래는 다음과 같다.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쪽 먼 곳이라오. 멀리 이국에 의탁하니 오손烏孫왕국王國이라오. 천막을 쳐 방으로 삼고 털방석을 담장으로 삼으며, 고기를 양식으로 삼고 타락駝酪을 음료로 삼네. 내 항상 고향 땅을 그리워하여 마음속에 서글퍼하니, 원컨대 누런 고니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려 하노라.”천자天子가 그 말을 듣고 가엾게 여겨서 격년으로 사람을 보내 위로하고 선물하였다.注+(간격)은 고현古莧이니, “간세間歲”는 1년을 사이에 두는 것이다.
[目] 곤막昆莫이 그의 손자인 잠취岑娶로 하여금 공주에게 장가들게 하려고 하였으나,注+잠취岑娶오손烏孫의 관명이니, 이름은 군수미軍須靡이다. 공주가 허락하지 않고 글을 올려 사정을 말하였다.
천자天子는 이때 오손과 함께 흉노匈奴를 멸망시키고자 하여, 조령詔令을 내려 그 나라의 풍속을 따르라고 답하였다.
그리하여 잠취가 마침내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곤막이 죽자 잠취가 를 이어 곤미昆彌가 되었다.注+는 음이 이다. 곤막昆莫은 본래 왕의 칭호인데, 이 사람의 이름이 엽교미獵驕靡이므로 책에 곤미昆彌라고 썼으니, 곤막昆莫을 취하고 교미驕靡를 취한 것이다. 는 음에 가볍고 한 것이 있을 뿐이니, 〈뜻은〉 본래 똑같다. 뒤에는 마침내 곤미昆彌를 왕의 칭호로 삼았다.
[目] 이때에 나라 사신이 서쪽으로 총령蔥嶺을 넘어가니, 여러 소국小國들이 모두 나라 사신을 따라와 공물을 바치고 천자를 알현하였다.
그리하여 황제가 매번 해상海上으로 순수巡狩할 적에 모두 외국의 손님으로 수행시켰으며,注+(따르다)은 재용才用이다. 큰 도시로 사람이 많은 곳에는 각저角觝 놀이를 크게 벌여 구경꾼들을 모으고 재물과 비단을 흩어 을 하사해서 부유함을 과시하였으며,注+와 같다. (구경하다)은 공환工喚이니, 아래도 같다. 도읍(도성) 사람들을 모아 구경꾼들로 하여금 보게 해서 과시誇示한 것이다. 유명한 창고와 부장府藏에 쌓아둔 재물을 두루 구경시켜서 오랑캐들로 하여금 마음을 쏠리고 놀라게 하였다.注+재랑才浪이니, 물건을 저축한 것이다. (비축하다)는 자지子智이니, 위적委積(물건을 쌓아두다)의 이다.
그러나 서역西域흉노匈奴와 가까웠기 때문에 항상 흉노의 사신을 두려워해서 흉노의 사신을 대우하기를 나라 사신보다 후하게 하였다.
[綱] 흉노匈奴오유선우烏維單于가 죽으니, 아들인 아선우兒單于 오사려烏師廬(오사려, 흉노의 7대 선우)가 즉위하였다.
[目] 오사려烏師廬는 나이가 어려 아선우兒單于라 하였다.
이후로 선우單于가 더욱 서북쪽으로 옮겨가니, 좌방左方의 군대는 운중군雲中郡을 맡고 우방右方의 군대는 주천군酒泉郡돈황군燉煌郡을 맡았다.注+는 당함(맡다)이다. 흉노匈奴좌방左方의 군대는 본래 상곡上谷 이동以東을 맡았고 우방右方의 군대는 상군上郡 이서以西를 맡았으며, 선우單于왕정王庭대군代郡운중군雲中郡을 맡았는데, 지금 서북쪽으로 옮겨갔으므로 좌방左方우방右方 또한 옮긴 것이다.


역주
역주1 以宗室女爲公主 嫁烏孫 : “文帝의 세대(6년)에 宗室의 딸인 翁主를 보내어 單于의 閼氏(연지)를 삼았으나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공주를 소중히 여긴 것이다. 宗室의 딸을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괜찮지만, 공주라고 이름하였으면 진짜 공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드물다. 이 때문에 家人子(良家의 여식)를 취하여 長公主라고 이름하면 쓰지 않았고(高帝 9년), 宗室의 딸을 공주라고 하면 썼으니, 이는 황제와 가깝기 때문이다.[文帝之世 遣宗室女翁主 爲單于閼氏 不書 此何以書 重公主也 宗室女嫁單于 可也 以爲公主 則其不誠公主者 幾希矣 是故取家人子 名爲長公主則不書 以宗室女爲公主 則書 近也]” 《書法》
역주2 (十)[一] : 저본에는 ‘十’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一’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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