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봄 정월에 북위北魏가 수령守令들에게 조서를 내려 농사를 권장하고 도적을 없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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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북위北魏가 수령들에게 조서를 내려 농사를 권장하도록 하였으며, 같은 부部 안에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서로 변통하도록 하여 집에 소 두 마리가 있으면 없는 사람에게 빌려주게 하였다.
그리고 현령縣令 중에 하나의 현에서 도적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두 개의 현을 겸하여 다스려 그 봉록을 받게 하고, 두 개의 현을 평정平靜할 수 있는 사람은 세 개의 현을 겸하여 다스려 3년이 되면 승진하여 군수郡守로 삼고, 군수가 또한 현령처럼 두 개의 군을 평정하고 세 개의 군까지 다스리게 하여 3년이 되면 승진시켜 자사刺史로 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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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2월에 송宋나라가 진희왕晉熙王유섭劉燮을 영주자사郢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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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송宋나라 계양왕桂陽王유휴범劉休範이 평소에 평범하고 말주변이 없는데다 지식과 이해가注+① 知는 본음대로 읽는다. 解는 이해함이다. 부족하여 세상 사람들의 인심이 그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태종太宗(유욱劉彧)의 말년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존귀한 황제의 친척 중에 둘도 없는 사람이니注+② 宋主(劉彧)의 諸父가 모두 죽어서 劉休範만이 살아있었으므로, 존귀한 황제의 친척 중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들어가서 재상이 되어야겠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원망과 분통함이 제법 심했다.
전첨典籤허공여許公輿가 모주謀主가 되어 유휴범이 하사下士에게 허리를 굽히도록 시키니, 원근의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용감한 무사들을 수용하여 양성하였으며, 무기를 잘 수리하니 조정에서 그 사실을 알고 은밀히 대비를 하였다.
마침 하구夏口의 진장鎭將 자리에 결원이 생겼는데 그 땅이 심양尋陽의 상류上流에 있어 〈조정에서 황제의〉 심복을 시켜 그 자리를 맡기려 하여 진희왕晉熙王유섭劉燮을 자사刺史로 삼고, 왕환王奐을注+③ 奐(빛나다)은 음이 喚이다.장사長史로 삼아 일을 대행하게 하였는데, 유섭은 막 네 살이니, 송주宋主의 아우였다.
다시 그가 심양을 지나다가 유휴범에게 억류당할까 염려하여 태보太洑에서부터注+④ ≪南史≫ 〈劉休範傳〉에 太子洑이라고 되어 있으니, 劉胡가 江外에서 沔口로 나아갔던 길이다. 지름길로 가게 하였는데, 유휴범이 크게 화가 나서 몰래 허공여와 건강建康을 습격하기로 모의하였다. 왕환은 왕경문王景文의 형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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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토욕혼吐谷渾이 북위北魏를 침략하자, 북위北魏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여 항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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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가 공승孔乘을 숭성대부崇聖大夫로注+① 先聖인 孔子를 존숭하는 뜻을 가지고 관명을 삼은 것이다.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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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공승孔乘은 공자孔子의 28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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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북위北魏가 하남河南 6주州에注+① 6州는 靑州, 徐州, 兗州, 豫州, 齊州, 東徐州이다. 세금을 징수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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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호구户口마다 견絹 1필, 면綿 10근, 조租 30석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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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무도왕武都王양승사楊僧嗣가 졸卒하니 아우 양문도楊文度가 즉위하여 북위北魏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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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송宋나라 상서령尙書令원찬袁粲이 모친상으로 직책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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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서를 내려 위군장군衛軍將軍으로 관직을 대리하라고 하였으나 원찬袁粲이 사직하였다.
역주2宋尙書令袁粲 以母喪去職 :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이를 기록한 것이 없었는데 여기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禮를 지킨 일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이때에 袁粲에게 조서를 내려 衞將軍을 겸직하게 하였는데 원찬이 굳이 사양하였다. 이때에 원찬과 같은 이가 적었으므로 기록하여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劉湛(劉宋 시대 사람)이 일찍이 모친상으로 물러난 것은 어찌하여 기록하지 않았는가. 유담은 관직을 다투는 자이니, 그가 물러난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뿐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모친상으로 물러난 것을 기록한 것은 2번이다(이해(473) 袁粲, 唐 德宗 貞元 21년(805) 王叔文).[未有書母喪去職者 此其書 何 嘉守禮也 於是詔粲以衞將軍攝職 粲固辭 當時如粲者 蓋鮮矣 故書嘉之 然則劉湛嘗以母憂去 則曷爲不書 湛競者也 其去 不得已焉耳 終綱目書以母喪去二(是年袁粲 (唐憲宗元和)[唐德宗貞元]二十一年王叔文)]” ≪書法≫ 저본에 ‘唐憲宗元和’로 되어 있는 것을 해당 연도의 記事를 살펴 바로잡았다.“모친상으로 관직을 떠난 것은 이보다 예전에 기록한 적이 없었다. 이때 임금은 어리고 국가가 의혹에 쌓여 姦雄들이 틈을 엿보았는데, 袁粲은 자신이 태자를 부탁한 임무를 받아 관계된 것이 매우 소중하였으니, 그가 일상적인 禮를 지키는 것에 구애받을 수 있는가. 특별히 기록한 것은 아름답게 여긴 것이 아니라, 바로 일의 기미에 어두움을 나무란 것이다.[母喪去職 前此未有書者 是時主少國疑 姦雄伺隙 粲躬受託孤之任 所繫甚重 其可拘常守禮者哉 特筆書之 非美之也 正所以譏其暗於機事爾]”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