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七年이라
秦建元十八年이라
秦東海公陽及王皮, 周虓 謀反事覺하여 收下廷尉注+① 皮, 猛之子也.하다
秦王堅 問其反狀한대 陽曰 臣父哀公 死不以罪 臣爲父復讐耳注+② 穆帝升平元年, 秦太后苟氏遊宣明臺, 見東海公法之第門, 車馬輻湊, 恐終不利於秦王堅, 乃與李威謀, 賜法死. 堅與法訣於東堂, 慟哭歐血, 謚曰獻哀公. 爲, 去聲, 下嘗爲同.니이다
泣曰 哀公之死 事不在朕이로라 皮曰 臣父丞相 有佐命之勳이어늘 而臣不免貧賤하니 欲圖富貴耳니이다
堅曰 丞相 臨終託卿 以十具牛 爲治田之資 未嘗爲卿求官하니 知子莫若父 何其明也注+③ 風俗通云 “北俗, 三牛爲一具, 以荷一犁. 十具, 三十牛也.”
虓曰 世荷晉恩호니 生爲晉臣하고 死爲晉鬼 復何問乎리오
先是 虓屢謀反이라 左右請殺之한대 堅曰 孟威 烈士 秉志如此하니 豈憚死乎리오 殺之 適足成其名耳라하다
皆赦不誅하여 徙陽高昌皮虓朔方之北하고 以皮兄永 淸修好學이라하여 擢爲幽州刺史하다
◑ 秦 以符融爲征南大將軍하다
謀伐晉也
夏五月 幽州蝗하다
蝗生廣袤千里 秦王堅 遣使하여 發民撲除之하다
秋八月 秦以裴元略으로 爲巴西梓潼太守注+① 巴西․梓潼, 二郡也.하다
爲伐晉故 使密具舟師也
九月 遣將軍呂光하여 將兵擊西域하다
車師, 鄯善 入朝于秦하여 請爲鄉導하여 以伐西域之不服者하고 因如漢法 置都護以統理之어늘
秦王堅 以呂光爲都督하여 總兵十萬하여 以伐西域하니 陽平公融 諫曰 西域 荒遠하여 得其民이라도 不可使 得其地라도 不可食이라 漢武征之 得不補失하니 臣竊惜之하노이다 不聽하다
桓沖 遣將軍朱綽하여 擊襄陽하여 焚踐沔北屯田하고 掠六百餘戶而還하다
冬十月 會群臣于太極殿하다
秦王堅 會群臣于太極殿하고 議曰 今四方略定하되 唯東南一隅 未霑王化 計吾士卒하면 可得九十七萬이니 欲自將討之하노니 何如
左僕射權翼曰 昔 紂爲無道호되 三仁在朝어늘 武王 猶爲之旋師注+① 史記 “武王卽位九年, 東觀兵, 至于孟津, 諸侯不期而會者八百, 皆曰 ‘紂可伐矣’, 武王曰 ‘未可也’, 乃還師. 居二年, 紂暴虐滋甚, 殺王子比干, 囚箕子, 微子奔周, 武王告諸侯曰 ‘殷有重罪, 不可不伐’, 遂滅之.”하니이다 今晉雖微弱이나 未有大惡이요 謝安桓沖 皆江表偉人이라 君臣輯睦하니 未可圖也니이다
太子左衛率石越曰 今歲鎭 守斗하니 福德在吳 伐之 必有天殃注+② 歲, 木星. 鎭, 土星. 斗․牛․女, 吳․越․揚州分.이요 且彼處長江之險하고 民爲之用하니 殆未可伐也니이다
堅曰 天道幽遠하니 未易可知 以吾之衆으로 投鞭於江이면 足斷其流 又何險之足恃乎
於是 群臣 各言利害하여 久之不決이러니 堅曰 此所謂築室道旁이면 無時可成이라 吾當内斷於心耳라하다
群臣 皆出이어늘 獨留陽平公融하여 問之한대 對曰 今伐晉 有三難하니 天道不順하고 晉國無釁하고 我數戰兵疲하여 民有畏敵之心하니 群臣言晉不可伐者 皆忠臣也 願陛下 聽之하소서
作色曰 汝亦如此하니 吾復何望이리오
泣曰 晉未可滅 昭然甚明하고 且臣之所憂 不止於此니이다 陛下寵育鮮卑, 羌, 羯하여 布滿畿甸하니 太子獨與弱卒 留守京師 臣懼變生肘腋하여 不可悔也
臣之頑愚 誠不足采어니와 王景略 一時英傑이라 陛下常比之諸葛武侯하시니 獨不記其臨没之言乎잇가 不聽하다
於是 朝臣進諫者衆이어늘 堅曰 以吾撃晉 猶疾風之掃秋葉이어늘 而内外皆言不可 何也
太子宏曰 今歲在吳分하고 又晉君無罪하니 若大擧不捷이면 恐威名外挫하고 財力内竭耳니이다
堅曰 昔吾滅燕 亦犯歲而捷하고 秦滅六國 豈皆暴虐乎
冠軍慕容垂 獨言於堅曰
陛下神武注+① 冠軍, 卽冠軍將軍也.하사 威加海外어시늘 而蕞爾江南 獨違王命하니 豈可復留之하여 以遺子孫哉리오
詩云 謀夫孔多 是用不集이라하니 陛下斷自聖心 足矣니이다
晉武平吳 所仗者 張․杜二三臣而已注+② 張․杜, 謂張華․杜預也. 若從衆言이면 豈有混壹之功乎리잇가
大悅曰 與吾共定天下者 獨卿而已라하다
銳意欲取江東하여 寢不能旦이어늘 復諫曰 自古窮兵極武 未有不亡者 江東雖微弱이나 然中華正統이라 天意必不絶之리이다
堅曰 帝王歷數 豈有常邪 惟德之所在耳니라
素信重沙門道安이라 群臣 使乗間進言이러니
與遊東苑할새 曰 朕將與公南遊吳越하고 泛長江하여 臨滄海하노니 不亦樂乎
安曰 陛下應天御世하여 居中土而制四維하시니 自足以比隆堯舜이라 何必櫛風沐雨하여 經略遐方이리잇고 不聽注+① 櫛, 梳也. 衝疾風而梳頭, 冒驟雨而沐髮.하다
所幸張夫人 諫曰 天地之生萬物 聖王之治天下 皆因其自然而順之 功無不成하나니 黄帝服牛乗馬 因其性也注+① 言因牛馬之性, 故可引重而致遠. 禹濬九川障九澤 因其勢也注+② 言因高下之勢, 故可滌源而陂澤. 后稷 播殖百榖 因其時也注+③ 因天時而播殖, 則百穀成. 湯武率天下而攻桀紂 因其心也注+④ 因人心而用兵, 則天下服.
今朝野 皆言晉不可伐이어늘 陛下獨決意行之하시니 妾不知何所因也니이다 自秋冬以來 鷄夜鳴하고 犬哀噑하고 廐馬多驚하고 武庫兵器自動하니 皆非出師之祥也注+⑤ 噑, 音豪.니이다 堅曰 軍旅之事 非婦人所當預니라
幼子詵 最有寵注+① 詵, 所臻切.이러니 亦諫曰 國之興亡 繫賢人之用捨하니 今陽平公 國之謀主어늘 而陛下違之하시고
晉有謝安, 桓沖이어늘 而陛下伐之하시니 臣竊惑焉하노이다 堅曰 天下大事 孺子安知리오하다
秦劉蘭 討蝗不能滅이어늘 有司請徵下廷尉한대
秦王堅曰 災降自天하니 非人力所能除 此由朕之失政이니 蘭何罪乎리오
是歲 大熟하니 蝗不食麻豆러라


【綱】 晉나라(東晉) 烈宗 孝武皇帝 太元 7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18년이다.
【綱】 봄 3월에 秦나라(前秦) 司農 符陽과 侍郞 王皮, 尙書郞 周虓가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변방으로 귀양 갔다.
【目】 秦나라 東海公 符陽과 王皮, 周虓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 체포되어 廷尉에게 회부되었다.注+① 王皮는 王猛의 아들이다.
秦王 符堅이 배반한 이유를 묻자, 부양은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 哀公(符法)이 죽을 적에 죄로 죽지 않았습니다. 신은 아비를 위하여 복수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니,注+② 穆帝 升平 원년(357)에 秦나라 太后 苟氏가 宣明臺에 놀러가서 東海公 符法의 집 문 앞에 수레와 말이 輻湊한 것을 보고는 끝내 秦王 符堅을 불리하게 할까 염려해서 李威와 모의하고 부법에게 사약이 내려지게 하였다. 부견은 형 부법과 東堂에서 결별할 적에 慟哭하여 피를 토하고는 시호를 ‘獻哀公’이라 하였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 ‘嘗爲’의 爲도 이와 같다.
부견이 울면서 말하기를 “애공이 죽은 것은 책임이 짐에게 있지 않다.” 하였다. 왕피는 말하기를 “승상을 지낸 신의 아비(王猛)가 佐命의 공훈이 있는데, 신이 가난하고 천함을 면치 못하니, 富貴를 도모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승상이 임종할 적에 卿에게 10具의 소를 내려주어 田地를 경작하는 밑천으로 삼게 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일찍이 경을 위하여 관직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자식을 아는 것은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다. 어쩌면 그리도 현명한가.” 하였다.注+③ ≪風俗通≫에 이르기를 “북쪽 지방의 풍속에는 세 마리 소를 1具라 하여 한 보습을 메었으니, 10具는 30마리의 소이다.
주효는 말하기를 “나는 대대로 晉나라(東晉)의 은혜를 입었으니, 살아서는 晉나라의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晉나라의 귀신이 될 것이니, 다시 무엇을 묻습니까.” 하였다.
【目】 이보다 앞서 周虓가 여러 번 반역을 도모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그를 죽일 것을 청하자, 符堅이 말하기를 “孟威(주효)는 烈士이다. 지조를 지킴이 이와 같으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를 죽이면 다만 그의 명예를 이루어줄 뿐이다.” 하였다.
부견은 이들을 모두 용서하여 죽이지 않고, 부양을 高昌으로, 왕피와 주효를 朔方 북쪽으로 귀양 보내었다. 왕피의 형 王永은 행실이 깨끗하고 학문을 좋아한다 하여 幽州刺史로 발탁하였다.
【綱】 秦나라(前秦)가 鄴城에 있던 구리로 만든 낙타와 말, 飛廉, 翁仲(銅像)을 長安으로 옮겨왔다.
飛廉飛廉
【綱】 秦나라가 符融을 征南大將軍으로 삼았다.
【目】 晉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綱】 여름 5월에 幽州에 蝗蟲이 발생하였다.
【目】 蝗蟲이 발생하니, 너비와 길이가 천 리에 이르렀다. 秦王 符堅이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을 동원하여 박멸하게 하였다.
【綱】 가을 8월에 秦나라(前秦)가 裴元略을 巴西․梓潼太守로 삼았다.注+① 巴西와 梓潼은 두 郡이다.
【目】 晉나라(東晉)를 공격하기 위하여 裴元略으로 하여금 은밀히 水軍을 갖추게 한 것이다.
【綱】 9월에 秦나라(前秦)가 將軍 呂光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西域을 공격하게 하였다.
【目】 車師와 鄯善이 秦나라에 들어와 조회하면서 嚮導가 되어 西域 가운데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공격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漢나라 法처럼 都護府를 설치하여 통솔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秦王 符堅이 呂光을 都督으로 삼아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서역을 공격하게 하니, 陽平公 符融이 諫하기를 “서역은 매우 멀어서 그 백성을 얻더라도 부릴 수가 없고, 그 지역을 얻더라도 곡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漢나라 武帝가 정벌했을 적에 소득이 손실을 보충할 수 없었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부견은 듣지 않았다.
【綱】 〈晉나라(東晉)〉 桓沖이 군대를 보내어 襄陽을 공격하였다.
【目】 桓沖이 將軍 朱綽을 보내어 襄陽을 공격해서 沔水 북쪽의 屯田을 불태우고 파괴하고서 600여 가호를 노략질하고 돌아왔다.
【綱】 겨울 10월에 秦나라(前秦)가 여러 신하들을 太極殿에 모이게 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여러 신하들을 太極殿에 모아놓고 發議하기를 “지금 四方이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쪽 한 귀퉁이가 王者의 교화를 입지 못하고 있다. 나의 士卒들을 계산해보면 97만 명을 얻을 수 있으니, 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晉나라(東晉)를 토벌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이에 左僕射 權翼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紂王이 無道한 짓을 하였으나, 이 조정에 있으므로 武王은 오히려 군대를 되돌렸습니다.注+① ≪史記≫에 말하였다. “武王이 즉위한 지 9년에 동쪽으로 군대를 열병하여 孟津에 이르니, 諸侯들이 약속하지 않고 모인 자가 8백 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紂王은 공격할 만하다.’ 하자, 무왕이 말하기를 ‘아직 안 된다.’ 하고 마침내 회군하였다. 2년 뒤에 주왕의 포학함이 점점 더 심해져서, 王子 比干을 죽이고 箕子를 가두고, 微子가 周나라로 달아났다. 무왕은 제후에게 통고하기를 ‘주왕이 殷나라에 무거운 죄가 있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정벌하여 멸망하였다.” 지금 晉나라가 비록 微弱하나 큰 죄악이 있지 않고 謝安과 桓沖은 모두 江表의 偉人입니다. 군주와 신하가 화목하니,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箕子微子比干箕子微子比干
太子 左衛率 石越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歲星과 鎭星이 斗宿를 지키고 있으니, 福德이 吳 지방(東晉)에 있습니다. 오 지방을 정벌하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요,注+② 歲星은 木星이고 鎭星은 土星이다. 斗宿, 牛宿, 女宿는 吳․越과 揚州의 분야이다. 또 저들은 험한 長江이 있고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쓰이고자 하니, 아마도 공격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目】 符堅은 말하기를 “天道는 아득하고 요원하니,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 군대로 볼 때 채찍만 長江에 던져 넣어도 충분히 흐르는 강물을 차단할 수가 있는데, 晉나라가 또 어찌 험고한 지형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각각 利害를 말하며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부견이 말하기를 “이는 이른바 ‘길가에 집을 지으면 〈이래라저래라 말들이 많아〉 완성될 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니, 내가 홀로 마음속으로 결단하겠다.” 하였다.
【目】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홀로 陽平公 符融을 남게 하였다. 符堅이 그에게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지금 晉나라를 공격함에 세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하나는 天道에 順하지 못한 것이고, 하나는 晉나라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고, 하나는 우리가 자주 싸워 병사들이 피로하여 백성들이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 신하들 중에 晉나라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다 忠臣입니다. 원컨대 폐하는 그들의 말을 들으소서.”
부견은 얼굴빛을 붉히고 말하기를 “그대도 이와 같은 말을 하니, 내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부융이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晉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는 이유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이 우려하는 바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鮮卑와 羌族, 羯族을 총애하여 길러서 그들이 畿甸 지방에 가득 퍼져 있으니, 太子가 홀로 약한 병사들과 남아서 京師를 지키면 신은 변란이 매우 가까운 데에서 발생하여 후회막급할까 염려됩니다.
완악하고 어리석은 신의 말은 진실로 채택할 것이 못 되지만, 王景略(王猛)은 한때의 英傑이었습니다. 폐하는 항상 그를 諸葛武侯(諸葛亮)에 견주셨으니, 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부견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目】 이에 조정의 신하로서 간언을 올리는 자가 많자, 符堅은 말하기를 “우리의 군사력으로 晉나라를 공격함은 빠른 바람이 가을의 낙엽을 쓰는 것과 같은데, 안팎에서 모두 不可하다고 말함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太子 符宏이 말하기를 “금년 歲星이 吳 지방에 있고, 또 晉나라 군주가 죄가 없으니, 만약 크게 군대를 일으켰다가 승리하지 못하면 위엄과 명성이 밖으로 꺾이고 財力이 안으로 고갈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부견이 말하기를 “옛날 내가 燕나라(前燕)를 멸망시킬 적에도 또한 歲星을 범하고 싸워서 승리하였고, 〈戰國時代의〉 秦나라가 6국(齊․楚․燕․韓․趙․魏)을 멸망할 적에 6국의 군주가 어찌 모두 포악하였겠는가.” 하였다.
【目】 冠軍將軍 慕容垂만 홀로 符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훌륭한 무예와 용맹을 갖추시어注+① 冠軍은 바로 冠軍將軍이다. 위엄이 海外에까지 가해지고 있는데, 작은 江南 지방이 홀로 王命을 거역하니, 어찌 다시 그것을 남겨두어 자손에게 물려주겠습니까.
≪詩經≫에 이르기를 하였으니, 폐하께서 聖스러운 마음으로 결단하시면 충분합니다.
注+② 張․杜는 張華와 杜預를 이른다. 만약 그때 여러 사람의 말을 따랐으면 어찌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는 공이 있었겠습니까.”
부견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와 함께 천하를 평정할 자는 卿 하나뿐이다.” 하였다.
【目】 符堅이 江東 지방(東晉)을 점령하고자 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자, 符融이 간하기를 “예로부터 병력을 동원하여 무력을 끝까지 사용하면 망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강동 지방이 비록 미약하나, 中華의 正統입니다. 하늘의 뜻이 반드시 정통을 끊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부견이 말하기를 “帝王의 교체가 어찌 일정한 순서가 있겠는가. 오직 德이 있는 곳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目】 符堅은 평소 沙門인 道安을 믿고 소중히 여기므로 여러 신하들이 도안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말씀을 아뢰게 하였다.
부견이 도안과 함께 동쪽 동산에서 놀 적에 “짐이 장차 公과 함께 남쪽으로 吳․越 지방을 유람하고, 長江에 배를 띄우고서 滄海에 임하려 하노니, 이렇게 하면 즐겁지 않겠는가.” 하니,
도안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天命에 응하여 세상을 통치하시고 中原에 처하여 四維(四方)를 통제하시니, 자연히 융성함을 堯․舜에 견주기에 충분합니다. 어찌 반드시 빠른 바람에 빗질하고 빗물로 머리를 감으면서 먼 지방을 경영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부견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注+① 櫛은 빗질함이다. 빠른 바람과 부딪치면 머리가 저절로 빗질이 되고 소낙비를 무릅쓰면 머리를 감게 된다.
【目】 符堅의 총애하는 張夫人이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번식시키고 聖王이 천하를 다스림은 모두 자연을 순히 따름으로 인해 功을 이루지 않음이 없습니다. 黄帝가 소를 부리고 말을 탄 것은 소와 말의 성질을 따른 것이요,注+① 〈‘黄帝服牛乗馬 因其性也’는〉 소와 말을 그 성질을 따라 부렸으므로 무거운 짐을 끌어오고 먼 곳에 갈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禹임금이 9州의 냇물을 깊이 파고 9주의 못을 막은 것은 산천의 형세를 순히 따른 것이요,注+② 〈‘禹濬九川障九澤 因其勢也’는〉 산천의 높고 낮은 지세를 따랐기 때문에 근원을 깨끗하게 만들어 하류에 못을 만들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后稷이 百榖을 파종하여 번식시킨 것은 계절을 순히 따른 것이요,注+③ 天時를 순히 따라 곡식을 파종하고 번식시키면 百穀이 제대로 성숙하는 것이다. 湯王과 武王이 천하를 거느리고서 桀王과 紂王을 공격한 것은 민심을 따른 것입니다.注+④ 人心을 순히 따라 用兵을 하면 천하가 복종하는 것이다.
지금 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晉나라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폐하께서 홀로 결심하여 행하려 하시니, 첩은 무슨 이유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가을과 겨울 이래로 닭이 이른 밤에 울고 개가 슬피 울부짖고 마구간의 말이 많이 놀라고 武庫의 兵器가 저절로 움직이니, 이는 모두 출병할 때의 祥瑞가 아닙니다.”注+⑤ 噑(울다)는 음이 豪이다. 부견은 말하기를 “군대의 일은 부인이 관여할 바가 아니오.” 하였다.
【目】 符堅의 어린 아들 符詵(부신)이 부견에게 가장 큰 총애를 받았는데,注+① 詵은 所臻의 切이다. 또한 간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어진 사람을 등용하느냐 버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陽平公(符融)은 나라의 대사를 主謀하는 신하인데 폐하께서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계십니다.
반면에 晉나라에는 謝安과 桓沖이 있는데 폐하께서 그들을 공격하시니, 신은 삼가 곤혹스럽습니다.” 하니, 부견이 말하기를 “천하의 대사를 어린아이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綱】 秦나라(前秦)에 大豐이 들었다.
【目】 秦나라 劉蘭이 蝗蟲을 잡았으나 박멸하지 못하자, 有司가 그를 불러 廷尉에 회부하여 그 죄를 심리할 것을 청하니,
秦王 符堅이 말하기를 “天災가 발생하였으니, 人力으로 능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짐이 정사를 잘못해서이니, 유란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해에 大豐이 드니, 황충이 깨와 콩을 먹지 않았다.


역주
역주1 秦司農符陽……事覺徙邊 : “周虓는 晉나라 신하이다. 秦나라에 항복했을 때는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를 죄책한 것이다. 주효가 秦나라의 관직을 받지 않은 것은 의리이다. 그러므로 그가 항복한 것을 쓰지 않아서 그의 의리를 온전히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尙書郞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그는 秦나라의 신하이다. 애초에 다른 계책을 품었으니, 이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이에 배반했다고 써서 符陽 등과 죄가 똑같게 하였으니, 뜻을 지키는 것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자가 鑑戒로 삼을 만하다.[虓 晉臣也 降秦 不書 此 何以書 罪之也 虓不受秦官 義也 故不書其降以全之 至是 爲尙書郞 則秦臣矣 始復異謀 是二心也 於是以反書之 與符陽等同科 守志不終者可以鑑矣]” ≪書法≫
역주2 秦徙鄴銅駝……翁仲于長安 : “魏나라가 長安의 종 틀과 낙타를 옮겼을 때 그것을 쓰지 않고, 구리로 주조한 銅人만 옮겼다고 썼었다. 지금도 옮겼을 뿐인데 여기에 쓴 것은 어째서인가. 백성들을 수고롭게 함을 중함으로 여긴 것이다. 위나라가 구리로 만든 사람을 옮기고자 하였는데, 무거워서 가져갈 수가 없으니, 그런 뒤에 다시 주조하였다. 위나라는 옮기지 못했는데 秦나라는 옮겼으니, 그 백성을 돌아보지 않음이 심하다. 여기에 특별히 써서 진나라를 죄책한 것이다.[魏徙鍾簴槖駝 不書 書鑄銅人 此徙耳 則其書 何 重勞民也 魏嘗欲徙銅人矣 重不可致 然後更鑄 魏不能徙 而秦徙之 其不卹民 甚矣 特書罪之]” ≪書法≫ 魏나라가 長安의 종 틀과 동으로 만든 낙타 등을 洛陽으로 옮긴 것은 ≪資治通鑑綱目≫ 제15권 중 建興 15년(237) 10월 조에 보인다. 여기 ‘綱’에 金同人을 주조한 것만을 쓰고 나머지는 ‘目’에 기록하였다.
역주3 桓沖遣兵伐襄陽 : “나라일 경우 ‘伐’이라고 쓰는데, 襄陽은 한 城일 뿐인데도 伐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襄陽을 가지고 秦나라에 허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秦나라가 襄陽을 함락한 지가 4년이었다.[國而書伐 襄陽 一城耳 其書伐 何 不以襄陽予秦也 於是秦陷襄陽 四年矣]” ≪書法≫
역주4 三仁 : 殷나라의 세 仁者로, 比干과 箕子, 微子를 가리키는바, 비간과 기자는 紂王의 叔父이고 미자는 주왕의 庶兄이다.
역주5 어찌……말 : 본서 寧康 3년(375) 7월 조에 보인다. 王猛이 죽기 전에 符堅에게 晉나라를 도모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역주6 도모하는……않는다 : 이 내용은 ≪詩經≫ 〈小雅 小旻〉에 보인다.
역주7 晉나라……신하뿐이었으니 : 晉나라 武帝 때 益州刺史 王濬이 吳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리고 杜預 또한 그와 같은 내용의 表文을 올렸으나 무제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무제가 張華와 바둑을 두고 있을 때 마침 두예의 두 번째 표문이 올라왔는데, 장화가 바둑판을 물리고서 “폐하께서는 武德을 갖추신 데다 나라가 부강합니다. 반면에 吳主는 淫虐한 데다 어질고 재능 있는 신하를 죽이고 있으니, 지금 공격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오나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이러한 의견을 의심하지 마소서.”라고 건의하였다. 마침내 무제가 결정을 내리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오나라를 정벌하였다.(≪資治通鑑≫ 권80 〈晉紀 2〉)
역주8 秦大熟 : “이는 하늘이 秦나라를 교만하게 하여 멸망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大有年’이라고 쓴 것이 네 번이고, ‘有年’이라고 쓴 것이 두 번이고, ‘大熟’이라고 쓴 것이 한 번이고, ‘大稔’이라고 쓴 것이 네 번이고, ‘稔’이라고 쓴 것이 한 번이다.(漢나라 明帝 永平 9년(166)에 자세히 보인다.)[此 天所以驕秦而滅之也 故特書之 終綱目 書大有年四 有年二 大熟一 大稔四 稔一(詳漢明帝永平九年)]” ≪書法≫ ‘大有年’, ‘有年’, ‘大熟’, ‘大稔’, ‘稔’은 모두 풍년이 든 것을 말한다.“앞에서는 東夷와 西域 62개국이 秦나라에 朝貢했다고 쓰고, 여기에서는 진나라에 곡식이 크게 잘 익었다고 썼으니, 이는 찬미한 것이 아니요, 바로 하늘이 진나라의 악을 조장하여 교만하게 해서 전복하고 패망하는 화에 빠지게 했는데도 진나라가 스스로 알지 못하였음을 드러낸 것이다.[前書東夷西域六十二國朝貢于秦 此書秦大熟 非美之也 正以著天稔其惡而驕之 使陷於覆亡之禍 而不自知爾]” ≪發明≫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