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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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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中大通三年이요 魏節閔帝恭普泰元이고 主郞中興元年이라
春二月 魏樂平王爾朱世隆 廢其主曄하고 而立廣陵王恭하다
爾朱世隆兄弟 密議하여 以魏主曄 疎遠無人望이라하여 欲立近親이러라 廣陵王恭 羽之子也 好學有志度 以元叉擅權으로 陽得瘖疾注+① 瘖, 音陰, 不能言也.이러니
郎中薛孝通 説爾朱天光曰注+② 孝通, 聰之子也. 廣陵 高祖猶子 夙有令望이나 沈晦不言 多歴年所하니 若奉以爲主 則天人允協矣注+③ 禮曰 “兄弟之子, 猶子也.” 廣陵王羽, 高祖之弟, 恭則猶子也.리라커늘
天光 使爾朱彥伯으로 潜往脇之注+④ 彦伯, 世隆之兄也. 通鑑, 天光與世隆等謀之, 疑其實瘖, 使爾朱彦伯潛往, 敦諭且脅之.하니 乃曰 天이어늘 何言哉리오하니 世隆等 大喜하여 乃廢曄하고 而立之하다
邢子才 爲赦文할새 敍敬宗枉殺爾朱榮之狀注+⑤ 子才, 名邵, 以字行, 巒之族弟也.한대 魏主曰 永安 手剪彊臣 非爲失德이라 直以天未厭亂이라 故逢成濟之禍耳注+⑥ 永安, 魏敬宗年號. 成濟, 弑高貴鄕公.라하다
魏主 閉口八年이라가 至是乃言하니 中外欣然하여 以爲明主라하다
詔以三皇稱皇하고 五帝稱帝하고 三代稱王하여 遞爲沖挹이어늘 自秦以來 競稱皇帝하니 今但稱帝 亦已褒矣注+⑦ 遞, 更易也. 沖挹, 謙沖退挹也. 謂皇降稱帝, 帝降稱王, 蓋遞爲謙下也.라하다
敬宗 使史仵龍으로 守太行注+⑧ 仵, 五故切.이러니 及爾朱兆南向 仵龍 先降하니 遂乘勝入洛이러라 至是하여 世隆 論仵龍功하여 封千户侯한대 魏主曰 於王 有功이나 於國 無勲이라하여 竟不許하다
魏幽州行臺劉靈助하다
靈助 推筭하여 知爾朱氏將衰하고 乃起兵하여 云 劉氏當王이라하니 幽瀛滄冀之民 多從之注+① 魏熙平二年, 分瀛․冀二州, 置滄州, 治饒安城, 領浮陽․樂陵․安德三郡.러라
與前河内太守封隆之等으로 襲信都하여 奉隆之行州事하고 爲敬宗擧哀하니 將士 皆縞素러라 升壇誓衆하고 移檄州郡하여 共討爾朱氏한대
殷州刺史爾朱羽生 襲之하니 髙敖曹 不暇擐甲하고 將十餘騎馳擊之하니 羽生 敗走하다 敖曹 馬矟絶世하고 左右 無不一當百이러라
髙歡 屯壺關하고 聲言討信都하니어늘 高乾 曰 吾聞高晉州 雄略蓋世하니 其志不居人下注+① 爾朱榮, 用歡爲晉州刺史, 故稱之.
且爾朱 無道하여 弑君虐民하니 正是英雄立功之會 今日之來 必有深謀 吾當輕馬迎之하리니 諸君 勿懼하라
乃潜謁歡於滏口하여 說之曰 爾朱 酷逆하여 痛結人神하니 凡曰有知 莫不思奮이라 明公 威德素著하여 天下傾心하니 若兵以義立하면 則屈彊之徒 不足爲明公敵矣注+② 屈彊之徒, 指爾朱氏之黨也.
鄙州 雖小 户口 不減十萬이요 穀秸之稅 足濟軍資 願熟思之하라 大悅하여 與同帳寢注+③ 秸, 工八切, 藁也.하다
趙郡李顯甫 喜豪俠하여 集諸李數千家하여 居殷州西山하니 方五六十里注+① 殷州西山, 廣阿之西山也.
顯甫커늘 子元忠 繼之하니 家素富하여 多出貸求利러니 元忠 悉焚契免責하니 鄉人 敬之注+② 契, 約也, 卽古所謂券也. 免責, 不責其償也.러라
盗賊 蠭起하여 淸河人 西戍還 經趙郡할새 以路梗으로 共投元忠注+③ 梗, 塞也.하니 元忠 遣奴爲導하니 皆避之러라
及葛榮起 元忠 帥宗黨作壘以自保하여 賊至 輒擊却之한대 乃悉衆攻圍執之러니 拜南趙郡太守하니 好酒無政績注+④ 賊平, 謂葛榮滅後也. 魏太和之十一年, 分趙郡之平鄕․栢人․中丘, 鉅鹿之南蠻․鉅鹿․廣阿爲南鉅鹿郡, 後改爲南趙郡, 屬殷州.이러라
及爾朱兆 弑敬宗 元忠 棄官歸하여 謀擧兵討之러니 高歡 東出이어늘 元忠 乘露車하고 載素筝濁酒以迎歡注+⑤ 箏, 樂器, 秦蒙恬所造.한대 未即見이러라
元忠 下車獨酌하여 謂門者曰 今聞國士到門하되 不吐哺輟洗하니 其人 可知 還吾刺勿通也注+⑥ 洗, 先典切, 以周公․漢祖之事責歡也.하라
門者 已告하여 遽見之하고 引入이러니 再行 取筝鼓之하여 長歌慷慨할새
歌闋 謂歡曰 天下形勢 可見이로되 公猶事爾朱邪注+⑦ 闋, 終也. 曰 富貴 皆彼所致 敢不盡節
元忠 曰 非英雄也로다 曰 趙郡 醉矣라하고 使人扶出한대
孫騰曰 此君 天遣來하니 不可違也로라 乃復留與語할새 元忠 慷慨流涕하니 亦悲不自勝이러라
元忠 因進策曰 殷州하고 無糧仗하니 不足以濟大事 若向冀州하면 髙乾邕兄弟 必爲明公主人하리니 殷州 便以賜委注+⑧ 乾邕, 乾字. 魏冀州治信都, 高乾邕兄弟據之, 故云必爲明公主人.하라 冀殷 既合하면 滄瀛幽定 自當弭服矣리라 急握元忠手하여 而謝焉하다
至山東하여 約勒士卒하여 絲毫不犯하니 遠近 聞之하고 亦歸心焉이러라 至信都하니 封隆之髙乾 納之러니
髙敖曹 時在外略地라가 聞之하고 以乾爲婦人하여 遺以布裙注+① 裠, 婦人下裳也.하다 使子澄으로 以子孫禮見之하니 敖曹 乃與俱來하다
封其故主曄하여 爲東海王하다
◯ 魏 以爾朱世隆爲太保하다
天光 專制關右하고 奄有并汾하고 仲遠 擅命徐兗하고 世隆 居中用事하여 競爲貪暴한되
而仲遠 爲尤甚하여 所部富室 多誣以謀反하여 没其婦女財物하고 而投其男子於河하니 畏之如豺狼이러라 由是 四方 皆惡爾朱氏 而憚其彊하여 莫敢違也러라
以高歡爲渤海王하다
封歡爲渤海王하여 徵之호되 不至어늘 乃以爲東道大行臺冀州刺史注+① 高歡之先, 本勃海人, 爾朱氏爵之爲本郡王, 欲以誘致之. 東道, 謂太行․恒山以東也.하다
魏都督侯淵 討劉靈助하여 誅之하다
魏都督侯淵 叱列延慶 討劉靈助하여 至固城注+① 叱列, 虜姓. 固城, 當在中山城東北, 安國城西南.할새 畏其衆하여 欲據關拒險하여 以待其變이어늘
延慶 曰 不如出營城外하여 詐言西歸하면 靈助聞之하고 必自寛縱하리니 然後潜軍擊之하여 往則成擒矣리라 從之하여
出頓城西하여 聲云 欲還하고 簡精騎一千하여 夜發直抵其壘하니 靈助 戰敗斬之하다
靈助 起兵自占曰 三月之末 我必入定州 爾朱氏 不久當滅이라터니 至是하여 首函 入定州하여 果如其期注+② 函, 匱也. 首函, 置首於函中.러라
夏四月 梁太子統하다
自加元服으로 梁主 使省錄朝政하니 辨析詐謬하여 秋毫必睹하되 但令改正하고 不加案劾하며
斷獄 多所全宥하고 寛和容衆하며 喜慍 不形於色하고 好讀書屬文注+① 屬, 音燭.하여 引接才俊하고 不蓄聲樂하며 每霖雨積雪 遣左右周行閭巷하여 視貧者賑之注+② 行, 去聲.러라
天性 孝謹하여 在東宮 坐起恒西向注+③ 必西向者, 不敢背上臺也.하고 母丁貴嬪 水漿 不入口하여 腰帶十圍 減削過半注+④ 一圍五寸, 又一圍三寸. 或云 “兩手合而圍之, 爲一圍.”이러라
及寢疾 恐貽梁主憂하여 敕參問 輒自力手書注+⑤ 言梁主出敕候問, 太子輒力疾手書, 自爲奏答.러라 及卒 朝野 惋愕이러라 諡曰昭明注+⑥ 惋愕, 音腕鄂, 驚嘆也.이라하다
昭明太子 葬丁貴嬪할새 有道士云 此地不利長子하니 請厭之라하여 乃爲蠟鵝及諸物하여 埋於墓側注+① 厭, 鎭也. 下同.이러니
監鮑邈之 有寵於太子라가 晚而見疎하여 乃密啓梁主云 太子有厭禱注+② 五代志, 梁制, 東宮有外監殿局․內監. 宮監者, 即唐內直局之職也.라한대 梁主 遣檢하여 掘得鵝物하고 大驚하여 將窮其事어늘 徐勉 固諫而止하여 但誅道士하니
由是 太子 終身慙憤하여 不能自明이러라 及卒 梁主 欲立其長子華容公歡爲嗣라가 銜其舊事하여 猶豫久之하여 竟不立注+③ 銜, 包含在心.이러라
司馬公曰 君子之於正道 不可少頃離也 不可跬歩失也注+① 離, 去聲. 司馬法曰 “一擧足曰跬, 跬三尺. 兩擧足曰步, 步六尺.”
以昭明之孝 武帝之慈로도 一染嫌疑之迹하여 身以憂死하고 罪及後昆하여 求吉得凶하여 不可湔滌이니 可不戒哉 是以 詭誕之士 奇邪之術 君子遠之注+② 湔滌, 音煎狄, 皆洗濯也. 詭, 詐也. 誕, 欺也. 邪, 本作衺. 奇衺, 譎詭非常也.
◑ 旣而立太子母弟晉安王綱爲太子하니 朝野 多以爲不順注+① 立世適孫爲順.이러라
侍郎周弘正 以嘗爲綱主簿 乃奏記曰注+② 弘正, 捨之兄子也. 謙讓道廢 多歴年所하니 願殿下抗目夷之義하고 執子臧之節하여 改澆競之俗하여 以大吳國之風하소서하되 不能從注+③ 抗, 擧也. 目夷, 卽司馬子魚. 春秋宋桓公庶子, 而太子玆父庶兄也. 桓公疾, 茲父固請曰 “目夷長且仁, 君其立之.” 公命子魚. 子魚辭曰 “能以國讓, 仁孰大焉, 臣不及也.” 遂走而退. 子臧, 春秋曹宣公庶子, 乃負芻之兄. 宣公卒, 負芻殺其太子, 而自立, 晉厲公執之. 諸侯以子臧賢, 欲立之, 子臧辭而犇宋. 澆, 薄也. 吳太伯及弟仲雍, 皆周太王子, 而王季歷之兄也. 季歷有聖子昌, 太王欲立季歷以及昌, 於是太伯ㆍ仲雍皆奔荊蠻以避季歷 自太伯十九世至壽夢有子四人, 幼曰季札. 季札賢, 壽夢欲立之, 季札讓不可, 遂弃其室而耕.이러라
以徐摛爲家令하고 兼管記하니 摛文體輕麗 春坊 學之하니 時人 謂之宮體注+④ 摛, 丑之切. 管記, 職同公府記室. 東宮, 謂之春宮. 宮坊, 謂之春坊. 通典云 “太子官屬, 置左․右春坊, 以領諸局.”러라
梁主 聞之하고 怒召摛欲加誚責注+⑤ 誚責, 以辭相責也.이러니 及見應對明敏하고 意更釋然하여 因問經史及釋教注+⑥ 見, 賢遍切.한대 摛商較從横하니 梁主 深嘆異之하여 寵遇日隆注+⑦ 商較, 猶商榷也.이어늘
朱异不悅하여 謂所親曰 徐叟 漸來見逼하니 我須早爲之所라하고 遂乘間白梁主曰 摛 老愛泉石하니 意在一郡이니이다한대
梁主 謂摛眞欲之라하여 乃謂曰 新安 大好山水라하고 遂出爲守러니
尋以人言不息注+⑧ 謂不順.이어늘 封歡譽詧等하여 以慰其心注+⑨ 譽․詧, 皆歡之弟也. 詧與察同.이러라 久之 鮑邈之坐事하여 法不至死로되 追思昭明之寃하고 揮淚誅之하다
將起兵討爾朱氏할새 斛律金庫狄干 與婁昭段榮으로 皆勸成之注+① 庫狄, 代北複姓. 昭, 歡之妻弟. 榮, 歡妻之娣夫也. 乃詐爲書하여 稱爾朱兆 將以六鎭人으로 配契胡爲部曲하니 衆皆憂懼러라
又爲并州符하여 徵兵討歩落稽라하여 乃發萬人하여 將遣之注+② 爾朱兆, 擅命并ㆍ汾, 此亦高歡僞爲兆符也. 步落稽, 即稽胡. 蓋匈奴別種, 劉元海五部之苗裔也. 或云 “山戎ㆍ赤狄之後. 居離石以西, 安定以東.”할새 孫騰 尉景 爲請留五日호되 如此者再注+③ 爲, 去聲. 孫騰․尉景既爲鎭人請留, 必又因其願留之情, 扇動之於下也. 親送之郊하여 雪涕執别注+④ 雪, 拭也.하니 衆號慟이어늘
乃諭之曰 與爾 俱爲失鄉客하니 義同一家注+⑤ 歡, 亦鎭戶, 故云然. 不意在上徵發 乃爾 今直西向하면 已當死 後軍期하면 又當死 配國人하면 又當死 奈何注+⑥ 自信都赴幷ㆍ汾爲西向. 爾朱, 契胡種也, 故謂契胡爲國人. 曰 唯有反耳로라 曰 然하다 當推一人爲主인댄 誰可者 推歡한대
曰 爾不見葛榮乎 雖有百萬之衆이라도 曾無法度하여 終自敗滅하니 今以吾爲主인댄 當與前異 毋得陵漢人犯軍令하라 生死任吾 則可어니와 不然이면 不能爲天下笑
皆頓顙曰 死生唯命注+⑦ 頓顙, 俯其首額也.하리라하다 乃椎牛饗士하고 起兵信都할새 亦未敢顯言叛爾朱氏也注+⑧ 椎, 音鎚, 擊殺也.러라
李元忠 擧兵逼殷州어늘 令髙乾救之한대 輕騎入見刺史爾朱羽生하여 因斬之하여 持首謁歡하니 撫膺曰 今日 反决矣注+⑨ 撫, 與拊同. 撫膺, 拍胸也.라하고 乃以元忠爲殷州刺史하고 抗表罪狀爾朱氏하다
斛律金 敕勒酋長也 嘗爲懷朔軍主하여 行兵 用匈奴法하여 望塵 知馬歩多少하고 嗅地 知軍遠近이러라
魏廣宗王爾朱天光 殺侍中楊侃하다 秋七月 爾朱世隆 殺司空楊津太保楊椿하고 夷其族하니 津子愔 奔信都하다
魏楊播及弟椿津 皆有名德하니 剛毅하고 椿津 謙恭이라
家世孝友하여 緦服同㸑하여 男女百口 人無間言이라 椿津 至三公하고 一門 七太守三十二刺史러라
敬宗之誅爾朱榮也 播子侃 預其謀 爾朱兆 入洛 乃逃歸華陰이러니 至是하여 天光 殺之러라
椿 以太保致仕在華陰하고 爲司空在洛이라 爾朱世隆 誣奏楊氏謀反하여 請收治之하되 魏主不許한대 世隆 苦請하니 不得已命有司檢案以聞이어늘
世隆 遂遣兵圍津第하고 天光 亦遣兵掩椿家하여 東西之族 皆滅하니 魏主惋悵久之하고 朝野 無不痛憤注+① 居華陰者爲西族, 居洛者爲東族. 惋悵, 驚惋惆悵也.이러라
唯津子愔 適出獲免하여 往見髙歡하여 泣訴家禍하고 因爲言討爾朱氏之策하니 甚重之하여 以爲行臺郎中하다
賜其宗戚沐食鄉亭侯 有差注+① 婦人賜湯沐邑, 男子封鄉侯ㆍ亭侯, 而衣食之, 隨服屬之遠近以爲等差.하다
◑ 冬十一月 魏髙歡 立渤海太守元朗하고 自爲丞相하여 敗爾朱兆等軍于廣阿하다
爾朱仲遠度律等 聞髙歡起兵하고 不以爲慮하되 獨世隆憂之注+① 度律, 榮之從弟也.어늘
孫騰 説歡曰 今朝廷隔絶하고 號令無所稟하니 不權有所立하면 衆將沮散이리라하여 乃立渤海太守元朗爲帝注+② 朗, 融之子也.하니 以歡爲丞相都督中外諸軍事하고 髙乾爲侍中司空하여 封拜有差하다
爾朱仲遠 軍陽平하고 兆軍廣阿어늘 縱反間云 世隆兄弟 謀殺兆라하고 復云 兆與歡 同謀하여 殺仲遠等이라하니 由是 迭相猜貳하여 徘徊不進이러라
仲遠等 屢使斛斯椿賀拔勝으로 往諭兆注+③ 斛斯, 代北複姓.한대 兆執之하니 仲遠等하여 引兵南遁하다
畏兆衆彊하여 以問段韶注+④ 韶, 榮之子也.한대
曰 所謂衆者 得衆人之死 所謂彊者 得天下之心이어늘 爾朱氏 上弑天子하고 中屠公卿하고 下暴百姓하니 以順討逆 如湯沃雪이니 何衆彊之有注+⑤ 沃, 灌也.리오 曰 恐無天命하여 不能濟耳로라
曰 爾朱 暴亂하여 人心 已去矣 天意 安得有不從者哉리오 遂進戰하여 大破兆軍하다
魏南兗州民 刼刺史하여 擧州降梁이어늘 梁主 以世明爲征西大將軍한대 不受하고 因請北歸할새
至洛陽하여 奉送所持節하고 歸鄉里하여 不仕而卒注+① 世明, 芳之族子也. 劉氏世居彭城.하다


梁나라 高祖 武帝 萧衍 中大通 3년이고 北魏 節閔帝 元恭 普泰 원년이고 魏主 元朗 中興 원년이다.
【綱】 봄 2월에 北魏 樂平王 爾朱世隆이 君主 元曄을 폐출하고 廣陵王 元恭을 옹립했다.
【目】 爾朱世隆의 형제가 은밀히 魏主 元曄이 황실과 먼 친척일 뿐더러 명망도 없다고 하여 가까운 친척을 군주로 옹립하려고 했다. 廣陵王 元恭은 元羽의 아들인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포부도 갖췄다. 元叉가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자, 〈원공은〉 말 못하는 병이 있는 척했다.注+① 瘖은 음이 陰이며 말을 못하는 것이다.
郎中 薛孝通이 爾朱天光을 설득하기를,注+② 孝通은 薛聰의 아들이다. “광릉왕은 高祖(孝文帝)의 조카로 일찍이 촉망을 받고 있었었으나 조용히 지내고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그를 추대하여 군주로 삼으면 하늘과 사람이 모두 진실로 호응할 것입니다.”라고 했다.注+③ ≪禮記≫ 〈檀弓〉에서 “兄弟의 아들은 아들과 같은 사람(조카)이다.”라고 했다. 廣陵王 元羽는 高祖의 아우이므로 元恭은 조카이다.
이주천광이 爾朱彥伯에게 살며시 찾아가게 해서 위협조로 권유하자,注+④ 爾朱彦伯은 爾朱世隆의 형이다. ≪資治通鑑≫에 의하면, 爾朱天光이 爾朱世隆 등과 모의할 때 정말 벙어리인 것으로 의심하여, 爾朱彦伯에게 살며시 찾아가 권유하고 위협하게 했다. 원공이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거늘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라고 하니, 이주세륭 등이 크게 기뻐하여 원엽을 폐위시키고 원공을 옹립했다.
邢子才가 사면 문서를 만들 때 敬宗(孝莊帝)이 爾朱榮을 죄없이 죽인 내용을 서술하자,注+⑤ 邢子才의 이름은 邵인데 字를 사용하였으며, 邢巒의 族弟이다. 魏主(節閔帝 元恭)가 말하기를, “永安(孝莊帝)이 힘이 강한 신하를 손수 처단한 것은 덕을 잃은 것이 아니라, 成濟의 재앙을 만났을 뿐이다.”라고 했다.注+⑥ 永安은 北魏 敬宗의 年號이다. 成濟는 高貴鄕公을 시해하였다.
魏主가 8년 동안 입을 닫고 지내다가 이때 비소로 말을 하니, 조정 내외가 모두 기뻐하여 ‘훌륭한 군주’라고 했다.
내린 조칙에서, “三皇은 皇이라 칭하고 五帝는 帝라 칭하고 三代는 王이라 칭하여 후대로 교체되어 오면서 겸손하게 표현되었는데, 秦나라 이래로 앞 다투어 皇帝라 칭했으니, 지금 帝라 칭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표창한 것이다.”라고 했다.注+⑦ 遞는 바꿔가는 것이고, ‘沖挹’은 겸손하여 물러나는 것이다. 皇을 帝라 내려 칭하고 帝를 王이라 내려 칭한 것은 바꿔갈수록 겸손한 것을 말한다.
예전에 敬宗이 史仵龍에게 太行山을 지키게 했는데,注+⑧ 仵는 五故의 切이다. 爾朱兆가 남쪽으로 향할 때 사오룡이 먼저 항복하니 이주조가 그 승세를 타고 洛陽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이주세륭이 사오룡의 공적을 논하여 千戶侯에 책봉하려 하자, 魏主가 말하기를, “〈사오룡이〉 왕에게는 공이 있으나 국가에는 공훈이 없다.”고 하여,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綱】 北魏 幽州行臺 劉靈助가 반란을 일으켰다.
【目】 劉靈助는 운수를 예측하여 爾朱氏가 쇠퇴할 것을 알아차리고 병사를 일으키며 ‘劉氏가 王이 될 것이다.’라고 하자 幽州ㆍ瀛州ㆍ滄州ㆍ冀州의 많은 백성들이 이에 호응했다.注+① 北魏 熙平 2년(517)에 瀛州와 冀州 2州를 나눠 滄州를 설치하고 饒安城을 治所로 삼아 浮陽郡ㆍ樂陵郡ㆍ安德郡 3郡을 관할하게 했다.
【綱】 北魏 河北大使 髙乾이 信都에서 병사를 일으켜 冀州城을 통해 髙歡을 맞이했다.
【目】 髙乾이 前 河内太守 封隆之 등과 함께 信都를 습격한 뒤 봉융지를 추대해서 州의 업무를 대행하게 하고, 敬宗(孝莊帝 元子攸)을 위해 喪事를 거행하자 將士들이 모두 素服을 입었다. 〈봉륭지가〉 壇에 올라 군중 앞에 서약하고 州郡에 檄文을 보내 함께 爾朱氏를 치자고 했다.
殷州刺史 爾朱羽生이 신도를 습격하니 高敖曹가 미처 갑옷도 걸치지 않고 10여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공격하자 이주우생이 패해 달아났다. 고오조가 말 타고 창 쓰는 솜씨가 제일이고 부하들도 모두 일당백이었다.
髙歡이 壺關에 주둔하고 신도를 공격할 것을 외치니, 신도 사람들이 두려워하자, 고건이 이르기를, “듣자하니 高晉州(고환)의 웅대한 계략이 세상에 으뜸이라 하니 그의 포부가 결코 남의 밑에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注+① 爾朱榮이 高歡을 晉州刺史로 삼았으므로 高晉州라 칭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爾朱氏가 無道하여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니 이때야말로 영웅이 공을 세울 때이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반드시 깊은 생각이 있어서일 터이니, 내가 輕騎를 이끌고 그를 맞이할 것이다. 그대들은 두려워 말라.”라고 한 뒤,
살며시 滏口에서 고환을 알현하여 설득하기를, “爾朱氏가 혹독하고 거역하여 그 고통이 사람과 신에게 깊이 얽혀서, 사리를 판단할 줄 아는 모든 이들은 분기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明公께선 본디 위엄과 덕망이 높아 세상이 마음을 기울이고 있으니 만일 병사를 일으킬 때 정의에 근거한다면 저 몹쓸 무리들은 명공의 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注+② 屈彊한 무리는 爾朱氏 도당을 가리킨다.
저희 州가 작긴 해도 호구 수가 10만 이하가 아니고 곡물 등에 대한 세금이 군자금으로 삼기에 충분하니 부디 잘 생각하소서.”라고 하자, 고환이 크게 기뻐하여, 그와 한 군막 안에서 잠을 자며 지냈다.注+③ 秸은 工八의 切이며 볏짚이다.
【目】 예전에 趙郡 李顯甫가 호걸과 협객들을 좋아하여 수천 명의 李氏들을 모아 殷州 西山에서 살았는데 그 땅의 범위가 사방 5, 60리였다.注+① 殷州 西山은 廣阿의 西山이다.
이현보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李元忠이 그 뒤를 이었는데, 집안이 평소 부유해서 자금을 많이 대출해주고 이자를 받으며 지냈다. 이원충이 대출 문서를 모두 불태워 채무를 면제해주자 마을 사람들이 존경했다.注+② 契는 계약서이니 옛날에 이른바 債券이다. ‘免責’은 원금 상환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에 도적들이 봉기하여 淸河 사람들이 서쪽 변방을 수비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趙郡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길이 순탄치 않자 모두 이원충에게 모두 투항했다.注+③ 梗은 막힘이다. 이원충이 노비들을 보내 그들을 인도하자 도적들이 모두 이들을 피하여 통과케 하였다.
葛榮이 병사를 일으키자 이원충이 종친들을 이끌고 堡壘를 만들어 스스로 지키며 적들이 오면 이내 공격해 퇴각시키자 갈영이 군사를 모두 동원해 그를 공격하여 체포했다. 적들이 평정된 뒤 이원충을 南趙郡太守에 임명했으나 술만 즐기며 별다른 공적이 없었다.注+④ ‘賊平’은 葛榮이 멸망된 다음을 말한다. 北魏 太和 11년(487)에 趙郡의 平鄕ㆍ栢人ㆍ中丘와 鉅鹿의 南蠻ㆍ鉅鹿ㆍ廣阿를 나눠 南鉅鹿郡으로 만들었는데 뒤에 南趙郡으로 바꾸고 殷州에 소속하였다.
箏
爾朱兆가 敬宗을 시해하자, 이원충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병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려 했는데, 마침 高歡이 동쪽으로 나오자 이원충이 露車(덮개 없는 수레)를 타고 素箏(치장하지 않은 箏)과 濁酒를 싣고 고환을 맞이했으나注+⑤ 箏은 악기이니 秦나라 蒙恬이 만들었다. 고환이 바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원충이 수레에서 내려 혼자 술잔을 기울인 뒤 문지기에게 이르기를, “지금 國士가 문 앞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않으니 사람 됨됨이를 알 만하다. 내 명함을 되돌려주고 알리지 말라.”라고 했다.注+⑥ 洗은 先典의 切이니 周公과 漢 高祖의 고사로 高歡을 추궁한 것이다.
문지기가 보고하고 나서 고환이 이내 그를 만나보고 안으로 인도해 들였다. 술잔이 두 순배쯤 돌자 아쟁을 가져와 연주하여 유장한 노래를 불러 강개함을 나타냈다.
노래가 끝나자, 고환에게, “천하의 형세를 알 만한데도 공께선 아직도 爾朱氏를 섬기려는거요.”라고 하니,注+⑦ 闋은 끝남이다. 고환이 “부귀가 모두 저들에게서 나오니 신하의 직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원충이 “영웅이 아니시군요.”라고 하자, 고환이 “趙郡(이원충)이 취했군.”이라고 하며, 사람을 시켜 부축해 밖으로 나가게 하니,
孫騰이 “이 사람을 하늘이 보내주었으니 그 뜻을 어겨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여, 고환이 다시 그를 붙들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원충이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자 고환도 스스로 슬픔을 감내하지 못했다.
이때 이원충이 대책을 건의하기를, “殷州는 작고 양식과 병기가 부족하므로 큰일을 이루기엔 조건이 충분치 못합니다. 하지만 冀州로 향하게 되면 髙乾邕 형제가 반드시 明公의 주인 노릇을 잘해 공급해줄 것입니다. 殷州를 제게 맡겨두십시요.注+⑧ 乾邕은 高乾의 字이다. 北魏 冀州가 信都를 治所로 삼고 있었는데, 高乾邕 형제가 이를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반드시 明公의 주인 노릇을 잘해 공급해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冀州와 殷州가 하나로 되면 滄州, 瀛州, 幽州, 定州는 저절로 항복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고환이 급히 이원충의 손을 잡아 감사해하였다.
【目】 高歡이 山東에 도착한 뒤 士卒들을 엄히 단속해서 털끝 하나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자, 그 소식을 들은 원근 사람들이 모두 귀의했다. 信都에 이르자 封隆之와 髙乾이 그를 받아들였다.
髙敖曹가 당시에 밖에서 공략을 일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고건을 여인네로 여겨서 여인의 치마를 보냈다.注+① 裠은 여인의 치마이다. 高歡이 아들 高澄을 시켜서 子孫의 예로 고오조를 찾아뵙게 하자, 고오조가 그와 함께 신도로 찾아왔다.
【綱】 北魏가 이전 군주 元曄을 東海王에 책봉했다.
【綱】 北魏가 爾朱世隆을 太保로 삼았다.
【目】 당시에 爾朱天光이 關右를 전담하여 통치하고 爾朱兆가 并州와 汾州를 점유하고 爾朱仲遠이 徐州와 兗州를 독차지하고 爾朱世隆이 중앙에서 권력을 행사하여 앞다투어가며 탐욕과 포학을 일삼았다.
그 가운데 이주중원이 더욱 심하여, 管內 부자들을 반란자로 무고하여 여인들과 재물을 몰수하고 남자들을 황하로 내던지자 사람들이 승냥이와 이리처럼 무서워했다. 이 때문에 사방이 모두 爾朱氏를 미워했으나 그 기세를 두려워해서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綱】 北魏가 高歡을 渤海王으로 삼았다.
【目】 北魏가 高歡을 渤海王으로 봉한 뒤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자, 마침내 東道大行臺 冀州刺史로 삼았다.注+① 高歡의 선조는 본디 勃海 사람인데 爾朱氏가 本郡의 王으로 작위를 내려, 그를 유혹해 불러들이려 했다. 東道는 太行山과 恒山 동쪽을 말한다.
【綱】 北魏 都督 侯淵이 劉靈助를 토벌하여 죽였다.
【目】 北魏 都督 侯淵과 叱列延慶이 劉靈助를 토벌하러 固城에 도착했는데,注+① 叱列은 오랑캐의 複姓이다. 固城은 中山城 동북과 安國城 서남쪽에 있을 것이다. 후연은 적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해서 關門을 점거해 험준한 곳을 굳게 지킨 채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려 하자,
질렬연경이 이르기를, “성 밖에 나가 군영을 설치해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리면 이 말을 들은 劉靈助가 반드시 느슨해질 터이니 그러한 뒤에 몰래 군사를 움직여 공격하여 전진하면 그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후연이 그 말을 따랐다.
성 서쪽으로 나가 주둔하여 ‘돌아가겠다’고 소문을 내고는 精騎 1천을 추려 한밤중에 곧장 유영조의 군영으로 직진하니 유영조가 패배하여 참수되었다.
예전에 유영조가 병사를 일으킬 때 점을 쳤는데 이르기를, “3월 말에 내가 반드시 定州로 들어가고 爾朱氏는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때 首級을 담은 함이 정주로 들어와서 과연 〈3월의〉 그 시기대로 되었다.注+② 函은 匱이니, ‘首函’은 首級을 함 속에 넣은 것이다.
【綱】 여름 4월에 梁나라 太子 蕭統이 卒하였다.
【目】 蕭統이 元服(冠禮服)을 입고 나서 梁主(梁 武帝)가 소통에게 조정의 政事를 살피고 처리하게 하자 진위와 오류를 분석하여 미세한 것까지도 반드시 파헤치되, 다만 고쳐 바로잡게만 하고 죄를 추궁하진 않았다.
昭明太子昭明太子
재판을 진행할 때 보전해주며 용서해주는 것이 많았고 관대함과 온화함으로 대중을 용서하였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드러내지 않고, 독서와 글짓기를 좋아하면서注+① 屬(글자를 連綴하다)은 음이 燭이다. 뛰어난 인재를 이끌어 만나고, 歌妓와 樂工을 기르지 않았으며, 장마철이나 눈이 많이 내릴 때마다 측근들을 서민들의 마을에 두루 보내 가난한 사람을 살펴서 구휼하게 했다.注+② 行(순시하다)은 去聲이다.
천성이 효도하고 근신하여, 東宮에 있을 적에는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언제나 서쪽을 향하였고,注+③ 반드시 서쪽을 향하는 것은 감히 皇上이 계신 곳을 등지지 않는 것이다. 생모 丁貴嬪이 세상을 떠나자 입에 물 한 모금도 대지 않아 10圍의 허리띠가 절반이나 줄었다.注+④ 1圍는 5寸인데, 또 1圍는 3寸이라 하기도 한다. 혹자는 “두 손을 맞잡아 감싸는 것이 1圍이다.”라고 하였다.
병이 깊어질 때 梁主에게 걱정을 끼칠까 싶어, 문안을 묻는 敕書에 대해 번번이 직접 애써가며 답장을 썼다.注+⑤ 梁 武帝가 안부를 묻는 敕書를 보내면 太子가 번번이 병중에 애쓰며 직접 써서 奏答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을 떠나자 朝野가 애석하고 참담해했다. 시호를 昭明이라 했다.注+⑥ ‘惋愕’은 음이 腕鄂이며 깜짝 놀라는 것이다.
【綱】 梁主(梁 武帝)가 아들 蕭綱을 太子로 삼고, 6월에 손자 蕭歡을 豫章王으로, 蕭譽를 河東王으로, 蕭詧(소찰)을 岳陽王으로 삼았다.
【目】 예전에 昭明太子가 丁貴嬪의 장례를 치를 때 어떤 道士가, “이곳은 長子에게 이롭지 못하니 地氣를 누르십시요.”라고 해서 밀랍으로 만든 거위와 기타 물건들을 무덤 옆에 묻었다.注+① 厭은 진압하다는 뜻이며, 아래 글자도 같다.
宮監 鮑邈之가 太子로부터 총애를 받다가 뒤에 소원해졌다. 그가 梁主에게 은밀히 “태자가 저주의 呪術을 했습니다.”라고 하자注+② ≪五代志≫에 의하면, 梁나라 제도에는 東宮에 外監殿局ㆍ內監이 있다. 宮監은 바로 唐나라 內直局의 직책이다. 梁主가 사람을 보내 검사하게 하여 무덤 속에서 밀랍 거위와 기타 물건들이 발굴됐다. 크게 놀란 梁主가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려 하자 徐勉이 적극 간언하여 중지되고 道士만 처형했다.
이로 인해 태자가 일생 동안 수치와 울분 속에 해명하지 못한 채 지냈다. 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梁主가 소명태자의 長子 華容公 蕭歡을 계승자로 삼으려 하다가 〈소명태자가 呪術한〉 지난 일이 마음에 걸려 한동안 유예하다가 끝내 세우지 않았다.注+③ 銜은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말하였다. “君子는 正道에서 잠시도 떠나선 안 되고 반걸음도 벗어나선 안 된다.注+① 離(떠나다)는 去聲이다. ≪司馬法≫에 의하면, “한 걸음이 跬인데 跬는 3척이다. 두 걸음이 步인데 步는 6척이다.”라고 하였다.
昭明太子 같은 효성과 梁主 같은 慈愛로도 한 번 嫌疑를 둔 입김에 물들어 태자 자신은 우환으로 죽고 죄가 후손에게까지 미쳐서, 吉事를 구하려다 凶事를 얻어 이를 씻어내지 못했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허황된 말을 일삼는 사람과 기기묘묘한 邪術을 君子가 멀리하는 것이다.”注+② ‘湔滌’은 음이 煎狄이며 두 글자 모두 씻는다는 뜻이다. 詭는 사기 치다는 뜻이고. 誕은 기만하다는 뜻이다. 邪는 一本에 衺로 쓰였으며, ‘奇衺’는 크게 속임이다.
【目】 얼마 뒤에 太子의 同母弟 晉安王 蕭綱을 太子로 삼자 朝野의 사람들이 대부분 정상 순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注+① 代 이을 適孫을 세우는 것이 순리가 된다.
일찍이 蕭綱의 主簿를 역임했던 侍郎 周弘正이 소강에게 아뢰기를,注+② 周弘正은 周捨의 형의 아들이다. “겸양의 도가 망가진 지 오래이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目夷의 의리를 중시하고 子臧의 절의를 실천하여 야박하고 경쟁을 일삼는 풍속을 바로잡아 저 〈태자 자리를 양보한〉 吳나라의 기풍을 넓게 펼치소서.”라고 했지만 소강이 따르지 못하였다.注+③ 抗은 들다는 뜻이다. 目夷는 바로 司馬子魚이며, 春秋時代 宋 桓公의 庶子이고, 太子 玆父의 庶兄이다. 환공이 위중하자 太子 자보가 굳건하게 요청하기를, “목이는 윗사람이고 인덕이 있으니 임금님께선 그를 세우소서.”라고 했다. 환공이 子魚에게 이를 명하자, 자어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능히 국가를 양보하니 이보다 더 큰 인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은 미칠 수 없습니다.”라고 한 뒤 결국 달아나 물러났다. 子臧은 春秋時代 曹 宣公의 庶子이자 負芻의 형이다. 선공이 세상을 떠난 뒤 부추가 태자를 살해하고 스스로 임금에 오르자 晉 厲公이 그를 체포했다. 諸侯들은 자장이 어질다고 하여 그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자 자장이 사양하여 宋나라로 달아났다. 澆는 야박함이다. 吳太伯과 아우 仲雍은 모두 周 太王의 아들이자 王季歷의 형이다. 季歷에게 훌륭한 아들 昌이 있어, 태왕이 계력을 후계자로 세워 창에게까지 이어지게하려 하자, 이에 태백과 중옹이 모두 荊蠻으로 달아나서 계력을 피하였다. 태백으로부터 19世가 되는 壽夢에게 네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그 가운데 가장 어린 아들이 季札이다. 계찰이 똑똑해서 수몽이 그를 임금으로 삼으려 하자 계찰이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한 뒤 결국 집안을 버리고 농부로 살았다.
소강이 徐摛를 으로 삼고 管記를 겸하게 했는데, 서리의 문체가 가벼우며 미려하였고 春坊의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 배우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宮體라 불렀다.注+④ 摛는 丑之의 切이다. 管記는 직책이 公府의 과 같다. 東宮은 春宮을 말하고, 宮坊은 春坊을 말한다. ≪通典≫에 의하면, “太子의 官屬으로 左春坊ㆍ右春坊을 두는데 諸局을 거느린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서리를 불러 엄하게 꾸짖으려 했는데,注+⑤ ‘誚責’은 말로 꾸짖는 것이다. 그를 만났을 때 대답이 명쾌하고 민첩한 것을 보고 노여운 마음이 풀려서, 이어서 經史와 불교 등에 대해 물었을 때注+⑥ 見(보이다)은 賢遍의 切이다. 서리는 토론을 자유자재로 하자 梁主가 대단히 탄복하여 그 총애가 나날이 깊어졌다.注+⑦ ‘商較’는 商榷(토론)와 같다.
朱异가 이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徐氏 노인이 점차 압박해오니 내 반드시 그 방안을 마련할 것이다.”라고 한 뒤 결국 틈을 내어 梁主에게 아뢰기를, “서리가 나이가 들어 자연을 사랑하니 군수 자리 하나 얻는 데 뜻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梁主는 서리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라 여겨, “新安이 산수가 아주 좋다.”라고 하며 결국 군수로 내보냈다.
얼마 후에 사람들의 뒷말이 계속되자注+⑧ 〈‘不息’은〉 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蕭歡ㆍ蕭譽ㆍ蕭詧을 책봉하여 그들을 달래주었다.注+⑨ 蕭譽와 蕭詧은 모두 蕭歡의 아우이다. 詧은 察과 같다. 한참 뒤에 鮑邈之가 사건에 연루됐는데 법으로 사형에 해당되진 않았지만 소강이 昭明太子의 억울함을 떠올리고 눈물을 머금고 그를 죽였다.
【綱】 北魏 冀州刺史 髙歡이 병사를 일으켜 爾朱氏를 토벌했다.
【目】 高歡이 병사를 일으켜 爾朱氏를 토벌하려 할 때, 斛律金과 庫狄干이 婁昭, 段榮과 함께 모두 적극 권유했다.注+① 庫狄은 代北의 複姓이다. 婁昭는 高歡의 처남이고 段榮은 고환의 손아랫동서이다. 고환이 허위로 글을 만들어, ‘爾朱兆가 六鎭의 백성을 契胡와 결합해 을 만들려 한다.’라고 하자 무리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또 허위로 并州의 이주조의 명령서를 만들어, ‘병사를 징집해 歩落稽를 토벌하겠다.’고 하며 병사 일만을 징발해 파견하려 할 때,注+② 爾朱兆가 幷州와 汾州에 마음대로 명을 내렸는데, 이 또한 高歡이 허위로 爾朱兆의 명령서를 만든 것이다. 步落稽는 바로 稽胡인데, 匈奴의 別種으로, 五部의 후예이다. 혹자는 “山戎ㆍ赤狄의 후예이며 離石 서쪽, 安定 동쪽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孫騰과 尉景이 六鎭 사람들을 위해 5일 정도 머물기를 요청했는데, 이렇게 두 번을 했다.注+③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孫騰과 尉景이 이미 六鎭 사람들을 위해 머물게 할 것을 요청했었는데, 반드시 또다시 머물게 하기를 원하는 감정을 이용하여 아랫사람들을 선동한 것이다. 고환이 직접 교외까지 전송하며 눈물을 닦으며 악수하고 작별하자,注+④ 雪은 닦는 것이다. 무리들이 모두 소리쳐 통곡했다.
고환이 달래며 말하기를, “너희들과 함께 모두 실향객이 되었으니 의리로 보면 한 집안이다.注+⑤ 高歡 또한 같은 鎭 사람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위에서 이렇게 징발하는 일이 발생하여 이렇게 되었다. 지금 곧장 서쪽으로 가게 되면 의당 죽게 될 것이고, 軍令의 시기를 놓치면 또 죽게 될 것이고, 契胡에 배속되면 또 죽게 될 것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자,注+⑥ 信都에서 幷州와 汾州로 가는 것은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 된다. 爾朱는 契胡의 種이므로 契胡를 國人이라 한 것이다. 무리들이 말하기를, “오직 배반하는 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고환이 말하기를, “그렇다. 한 사람을 추대하여 주장으로 삼는다면 누가 좋겠는가?”라고 하자, 무리들이 고환을 추대하였다.
고환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葛榮을 보지 못했는가.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 해도 일찍이 법도가 없어 결국 스스로 패망하고 말았다. 지금 나를 주장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이전과 달라야 할 것이니 漢人들을 능욕하거나 군령을 어기지 말라. 목숨을 내게 맡기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무리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살고 죽는 것을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注+⑦ ‘頓顙’은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고환이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고 信都에서 병사를 일으킬 적에 감히 爾朱氏를 배반한다고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注+⑧ 椎는 음이 鎚이며 쳐서 죽이는 것이다.
때마침 李元忠이 병사를 일으켜 殷州를 압박하자 고환이 高乾에게 구원토록 하니, 고건이 輕騎를 이끌고 刺史 爾朱羽生을 만나고서 그대로 그를 참수해 그 首級을 가지고 고환을 알현하였다. 고환이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오늘 반란이 결정되었다.”라고 하고注+⑨ 撫는 拊(치다)와 같으니, ‘撫膺’은 가슴을 치는 것이다. 이원충을 殷州刺史로 삼고 表文을 올려 이주씨의 죄상을 거론했다.
곡률금은 敕勒의 추장인데 일찍이 懷朔軍主가 되어 병사를 운용할 때 흉노의 법을 사용하여 먼지만 바라보고도 馬兵과 步兵의 숫자를 알고 땅 냄새만을 맡고도 군사들이 얼마만큼 멀리 있는지 예측했다.
【綱】 北魏 廣宗王 爾朱天光이 侍中 楊侃을 살해했다. 가을 7월에 爾朱世隆이 司空 楊津과 太保 楊椿을 살해하고 그 일족을 몰살하자 양진의 아들 楊愔이 信都로 도주했다.
【目】 北魏 楊播와 그의 아우 楊椿과 楊津은 모두 명성과 덕망이 있었으니 양파는 힘차고 굳세며 양춘과 양진은 겸손하고 공손했다.
집안 대대로 효도하고 우애가 있어 을 입는 친척들이 한 솥밥을 먹으며 살면서 백 명에 이르는 남녀 식구들에 대해 누구도 나쁘다는 이견이 없었다. 양춘과 양진은 三公에 이르렀고, 한 가문 안에 太守가 일곱이고 刺史가 서른 둘이었다.
敬宗(孝莊帝)이 爾朱榮을 죽일 적 때 楊播의 아들 양간이 그 도모에 참여했었다. 爾朱兆가 洛陽으로 쳐들어오자 楊侃이 華陰으로 도망갔었는데 이때에 爾朱天光이 그를 살해했다.
당시 양춘이 太保의 신분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화음에 있었고, 양진은 司空으로서 낙양에 있었는데 爾朱世隆이 楊氏가 반란을 책동했다고 모함하고 상주하여 그들을 체포해 다스려야 한다고 요청했으나 魏主(節閔帝)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이주세륭이 강하게 간청하자 어쩔 수 없이 담당관에게 해당 사항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이주세륭이 결국 병사를 파견해 양진의 집을 포위하고 이주천광 역시 병사를 파견해 양춘의 집을 에워싸 동서 양가의 집안 식구들을 모두 살해하자, 魏主가 오랫동안 애석해하고 朝野가 모두 애통하고 분노했다.注+① 華陰에 사는 사람이 西族이고 洛陽에 사는 사람이 東族이다. ‘惋悵’은 크게 실망하는 것이다.
마침 밖에 있었던 양진의 아들 楊愔만이 화를 모면해서 고환을 찾아와 집안의 재앙을 읍소한 뒤 이어서 爾朱氏를 토벌할 계책을 이야기하니, 고환이 매우 중시하여 그를 行臺郞中으로 삼았다.
【綱】 梁나라가 황실 친척들에게 차등을 두어 湯沐邑과 鄉侯와 亭侯를 하사했다.注+① 婦人에게는 湯沐邑을 하사하고 男子에게는 鄉侯와 亭侯를 봉해주어 입고 먹게 했는데 親屬의 친소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綱】 겨울 11월에 北魏 髙歡이 渤海太守 元朗을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丞相이 된 뒤 廣阿에서 爾朱兆 등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目】 爾朱仲遠과 爾朱度律 등은 高歡이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는데 爾朱世隆만 이를 걱정하였다.注+① 爾朱度律은 爾朱榮의 從弟이다.
孫騰이 高歡에게 권유하기를, “지금 조정과 끊어져 있고 명령을 받을 곳이 없으니 임시로 통솔자를 세우지 않으면 무리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고환이 渤海太守 元朗을 황제로 삼았다.注+② 元朗은 元融의 아들이다. 원랑이 고환을 丞相 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高乾을 侍中 司空으로 삼는 등 차등을 두어 책봉하고 임명했다.
이주중원이 陽平에 주둔하고 爾朱兆가 廣阿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고환이 첩자를 풀어, ‘이주세륭 형제가 이주조의 살해를 도모한다.’라는 소문을 내고, 이어서 다시 ‘이주조와 고환이 공모하여 이주중원 등을 살해하려 한다.’ 라고 하자, 이로 말미암아 爾朱氏들이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배회한 채 전진하지 못했다.
이주중원 등이 여러 차례 斛斯椿과 賀拔勝에게 이주조에게 가서 의견을 조율하게 했는데,注+③ 斛斯는 代北의 複姓이다. 이주조가 그들을 체포하니 이주중원 등이 무서워서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고환은 이주조가 병력이 많고 세력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段韶에게 계책을 묻자,注+④ 段韶는 段榮의 아들이다.
단소가 말하기를, “이른바 많음이란 뭇사람들의 사력을 다하는 마음을 얻는 것이고, 이른바 강함이란 천하의 인심을 얻는 것입니다. 爾朱氏가 위로는 천자를 시해하고 가운데로는 公과 卿을 죽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학대했으니, 대왕께서 순리로 거역을 토벌하는 것은 끓는 물을 눈에 붓는 것과 같은데, 〈이주조의〉 군사가 많고 세력이 강함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注+⑤ 沃은 물을 대는 것이다. 고환이 말하기를, “天命이 없어 성공하지 못할까 싶다.”라고 하자,
단소가 말하기를, “이주씨가 포악하고 혼란을 일으켜 민심이 이미 떠났습니다. 하늘의 뜻이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고환이 결국 진격하여 이주조의 병사를 크게 격파했다.
【綱】 北魏 南兗州 사람들이 刺史 劉世明을 붙잡아 梁나라에 투항하자, 양나라가 북위로 돌려보냈다.
【目】 北魏 南兗州 백성들이 刺史를 겁박해서, 남연주 전체가 梁나라에 투항하자, 梁主(蕭衍)가 劉世明을 征西大將軍으로 삼았으나, 유세명이 받아들이지 않고 북쪽으로 돌려보낼 줄 것을 요청했다.
洛陽에 도착해서 갖고 있던 符節을 돌려보내고 향리로 돌아와 벼슬하지 않은 채 생을 마쳤다.注+① 劉世明은 劉芳의 族子이다. 劉氏는 대대로 彭城에 살았다.


역주
역주1 하늘이……않았기에 : 이는 하늘이 아직 태평성대가 출현하기를 생각지 않는다는 뜻이다.(≪新譯資治通鑑≫)
역주2 魏河北大使髙乾……以冀州迎髙歡 : “‘병사를 일으켰다[起兵]’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爾朱氏를 미워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爾朱氏를 토벌했다.[討爾朱氏]’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爾朱를 토벌한 이는 髙歡이므로, 여기서는 ‘冀州城을 통해 고환을 맞이했다.[以冀州迎髙歡]’라고 기록하고, 아래에서는 ‘고환이 병사를 일으켜 爾朱氏를 토벌했다.[髙歡起兵討爾朱氏]’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髙乾의 공이 고환을 맞이하는 데에서 끝났을 뿐이니 어찌 토벌을 그에게 인정해줄 수 있겠는가.[書起兵 何 惡爾朱也 然則曷爲不書討爾朱氏 討爾朱者 髙歡也 故此書以冀州迎髙歡 下書髙歡起兵討爾朱氏 是乾之功 止於迎歡而已 安得以討予之]” ≪書法≫
역주3 먹던……멈추지 : 인재를 맞이하는 데에 시급해함을 말한다. ‘吐哺握沐’ 또는 ‘吐哺握髮’의 준말로, 周公이 머리를 한 번 감는 동안에 세 번이나 젖은 머리를 움켜쥐고 나갔고, 밥 한 끼를 먹는 동안에 입안의 음식을 세 번이나 뱉어냈다.[一沐三握髮 一飯三吐哺]”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史記≫ 권33 〈魯周公世家〉)
역주4 (復)[複] : 저본에는 ‘復’으로 되어 있으나, 오자이므로 ‘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梁主立子綱爲太子……詧爲岳陽王 : “‘梁主’라고 지적해 표현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무란 것이다. 어째서 나무랐는가. 이에 앞서서 梁主가 참소를 믿었고 太子 蕭統이 종신토록 치욕과 울분 속에 스스로 아뢰지 못하였다. 태자가 죽게 되자 梁主는 소통의 아들을 세우려 하였으나 과거 일을 마음에 담아 태자로 세우지 않고 蕭綱을 세웠다. 이를 梁主의 사사로움으로 여기고 天下의 공정함으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主’라고 지적하여 기록하였다. 이로부터 梁나라에서 太子를 세운 것을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다.(太子가 大器인 것에 의거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太子를 세운 것에 ‘主’라고 지적하여 기록한 것은 4번이다.(宋나라 병신년(456)에 자세하다.)[斥梁主 何 譏也 何譏 先是梁主信讒 太子統終身慙憤 不能自白 及卒 梁主欲立統子 衘其舊事不立 立綱 以是爲梁主之私 而非天下之公也 故斥書主 自是梁立太子不悉書(據太子大器) 終綱目立太子 斥書主者四(詳宋丙申年)]” ≪書法≫
역주6 (官)[宮] : 저본에는 ‘官’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宮’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家令 : 漢나라 때 皇室 소속 관리로, 皇家의 일을 관장했는데 諸侯國에서도 이 직책을 설치했다. 후대에는 太子家令으로 계승됐다.
역주8 記室 : 漢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檄文의 작성, 문서의 기록 등을 담당하였다.
역주9 魏冀州刺史髙歡起兵 討爾朱氏 : “‘氏’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온 종족이 주살될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장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漢나라 霍光의〉 霍氏가 온 종족이 모두 반란한 것에는 氏를 기록하였고, 爾朱氏가 온 종족이 주살될 만한 것에는 氏를 기록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의 1자의 筆削이 엄격하다.[氏者 何 擧族可誅也 故不書主名 是故霍氏擧族皆反 則書氏 爾朱氏擧族可誅 則書氏 綱目一字之筆削嚴矣]” ≪書法≫“爾朱의 弑逆은 殺戮을 자행하여 죄악이 귀신과 사람에게 통해서 누구나 모두 주살할 수 있는 것이다. 髙歡은 비록 옛 部曲 사람이었으나 의리상 그 사사로움을 다시 따를 수 없어서 토벌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군사들이 도리어 ‘反’이라고 말하고 고환도 ‘反’으로 자처하였으니 大義가 밝지 않고 曲直이 顚倒됨이 이와 같아 마침내 허위를 설정하여 그 무리들을 겁주고 爾朱가 시해한 죄를 밝히지 못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또한 잘못이 아닌가. ≪資治通鑑綱目≫에서 ‘병사를 일으켰다[起兵]’라고 기록하고 ‘토벌했다[討]’라고 기록하였으니, 진실로 고환이 자처한 것이 아니어서 그 명분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曲直의 준칙이다.[爾朱弑逆 恣行殺戮 罪貫幽明 人皆得而誅之 髙歡雖故部曲 義不得復狥其私 討之宜矣 然其兵衆顧謂之反 而歡亦以反自處 大義不明 曲直顚倒如此 遂至設詐以恐其衆 不能顯明爾朱弑殺之罪 不亦過乎 綱目書起兵 書討 固不以歡之所自處者 不正其名也 此曲直之繩墨也]” ≪發明≫
역주10 部曲 : 魏晉南北朝 시기에 지방의 토호들이 사적으로 운영한 군대 조직이다.
역주11 劉元海 : 劉淵을 가리킨다. 흉노족으로, 16國 시대 漢의 건국자이다. 308년 漢帝라 일컫고 平陽에 도읍했다. 시호는 光文, 묘호는 高祖이다.
역주12 緦麻服 : 喪禮의 五服 중에 가장 낮은 상복이다. 형제의 증손, 종증조부모의 상을 당하여 입는 상복으로 3개월간 입는다.
역주13 魏南兗州人……梁遣歸魏 : “‘잡았다[執]’는 훌륭한 말이니, ‘힘이 부쳐서 잡혔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복은 모두 나무라는 말이지만 오직 잡힌 것은 항복을 나무랄 것이 아니다. 변란에 대처한 것이 劉世明과 같은 이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수 있으므로 ‘돌려보냈다[歸]’라고 기록하였다. 元略ㆍ元彧도 일찍이 梁나라에서 北魏로 돌려보냈으나 ‘보냈다[遣]’라고 기록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遣’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梁主를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사람이 잡혀 온 것과 도망 온 것은 다른데 잡혀 온 자의 뜻을 빼앗지 않고 용서해 보내주었으니 梁主가 이에 임금의 도량이 있었다. 기록하기를 ‘양나라가 북위로 돌려보냈다.[梁遣歸魏]’라고 하였으니 양나라를 아름다워한 것이다.[執 善辭 曰力屈而被執也 故降皆譏辭 惟執以降爲非譏 處變如世明者 可以無愧矣 故書其歸 元略元彧 嘗自梁歸魏矣 不書遣 此書遣歸 何 善梁主也 人執以來 與來奔者異矣 而能不奪其志 宥而遣之 梁主於是有君人之度焉 書曰梁遣歸魏 美梁也]” ≪書法≫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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