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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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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이라
趙建武十二年이라 ◑漢嘉寧元年이라
春正月 揚州刺史都鄉侯何充하다
有器局하여 臨朝正色하고 以社稷爲己任하여 所選用 皆以功効하고 不私親舊러니하니 謚曰文穆이라하다
襲夫餘拔之하고 虜其王玄以歸하다
◑二月 以光禄大夫蔡謨領司徒하다
◑三月 以顧和爲尚書令하고 殷浩爲揚州刺史하다
褚裒薦顧和, 殷浩한대 詔以和爲尚書令하고 浩爲揚州刺史하다
和有母喪이라 固辭不起하고 謂所親曰 古人有釋衰絰從王事者 以其才足幹時故也어니와 如和者 正足以虧孝道하고 傷風俗耳니라
浩亦固辭하니 會稽王昱 與浩書曰 屬當厄運하여 危弊理極하니 足下沈識淹長하여 足以經濟注+屬, 之欲切, 會也. 三國魏紀評曰 “明帝沈毅斷識.” 晉謝鯤傳云 “鯤, 識量淹遠.”
若復深存挹退하여 茍遂本懐하면 吾恐天下之事 於此去矣注+挹, 損也.로라 足下去就 即時之廢興也 家國不異하니 宜深思之하라 浩乃就職注+言國興則家亦與之俱興, 國廢則家亦與之俱廢也.하다
夏四月朔 日食하다
◑五月 涼王張駿하니 世子重華立하다
◑趙殺其尚書朱軌하고 立私論朝政法하다
趙中黄門嚴生 惡朱軌注+惡, 烏路切.러니 久雨 譖軌不修道路하고 謗訕朝政이라한대 趙王虎囚之어늘
蒲洪 諫曰 陛下德政不修하여 天降淫雨하여 七旬乃霽하니이다 霽方二日이니 雖有鬼兵百萬이라도 亦未能去道路之塗潦어든 而況人乎잇가
願止作徒하고 罷苑囿하고 出宫女하고 赦朱軌하여 以副衆望하소서 虎雖不悦이나 亦不之罪하고 爲之罷長安, 洛陽作役이로되 而竟誅軌하다
又立私論朝政之法하여 聽吏告其君하고 奴告其主하니 公卿以下朝覲以目하여 不敢相過談語注+過, 古禾切, 經, 過也.러라
趙攻涼州어늘 張重華遣主簿謝艾하여 將兵逆戰하여 大破之하다
後趙遣將軍王擢, 麻秋하여 擊涼州注+張重華傳 “季龍使王擢․麻秋․孫伏都等, 侵寇不輟, 金城太守張沖, 降于秋, 於是涼州振動.어늘 張重華悉發境内兵하여 使裴恒將以禦之러니 久而不戰하다
司馬張躭曰 國之存亡 在兵이요 兵之勝敗 在將이라
今議者舉將 多推宿舊하니 夫韓信之舉 非舊德也注+謂起於微賤也. 蓋才之所堪 則授以事하니이다 主簿謝艾 兼資文武하니 可用也니이다
重華召艾하여 問以方略한대 艾願請兵七千人하여 必破趙以報하리이다 重華拜艾中堅將軍하여 給步騎五千注+中軍, 曰中堅, 謂居中以堅銳自輔.하니 艾引兵出하다
夜有二梟鳴於牙中注+牙中, 卽牙門也.이어늘 艾曰 六博 得梟者勝하니 今梟鳴牙中 克敵之兆也라하고 進與趙戰하여 大敗之하다
麻秋之克金城也 縣令車濟不降하고 伏劍而死하며 秋又遣書하여 誘致宛戍都尉宋矩注+宛戍, 南陽郡宛城之屯戍者.한대
矩曰 爲人臣하여 功旣不成하니 唯有死節耳라하고 先殺妻子而後 自刎하니 秋曰 皆義士也라하고 收而葬之하다
漢主勢驕淫하여 不恤國事하여 罕接公卿하고 信任左右하니 讒諂竝進하고 刑罰苛濫이라 由是 中外離心이러라
太保李奕 自晉壽舉兵反하니 衆至數萬注+葭萌縣, 漢屬廣漢郡, 蜀改爲漢壽縣, 屬梓潼郡, 晉又改漢壽曰晉壽.이라 勢登城拒戰하여 射殺之하다
蜀土先無獠注+獠, 魯皓切, 西南夷名.러니 至是始出하여 自巴西 至犍爲, 梓潼 布滿山谷하여 十餘萬落 不可禁制 大爲民患하고 加以饑饉하여 四境蕭條러라
十一月 하다
桓溫 將伐漢하니 將佐皆以爲不可한대 江夏相袁喬曰注+喬, 瓌之子也.
夫經略大事 固非常情所及이라 智者 了於胷中하니 不必待衆言皆合也 今爲天下患者 胡, 蜀二宼而已
蜀雖險固 比胡爲弱하니 將欲除之인댄 宜先其易者 李勢無道하여 臣民不附하고 且恃其險遠하여 不修戰備하니 宜以精兵萬人으로 輕齎疾趨하여 比其覺之 我已出其險要 可一戰擒也注+謂已踰險而出平地也.리이다
蜀地富饒하고 戸口繁庶하니 諸葛武侯用之하여 抗衡中夏 若得而有之 國家之大利也니이다
論者恐大軍旣西 胡必闚𨵦라하니 此似是而非 胡聞我萬里遠征하면 以爲内有重備라하여 必不敢動이요
縱有侵軼이라도 緣江諸軍 足以拒守하니 必無憂也注+軼, 突也.리이다
拜表卽行하고 委長史范汪以留事하니 朝廷 以蜀道險遠하고 温衆少而深入이라하여 皆以爲憂로되 惟劉惔 以爲必克하다
或問其故한대 惔曰 以博知之로라 善博者也 不必得이면 則不爲注+戰國時, 蘇代謂魏王曰 “博之所以貴梟者, 便則食, 不便則止.” 卽此意也. 但恐克蜀之後 專制朝廷耳로라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영화永和 2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12년이다.한주漢主(성한成漢) 이세李勢 가령嘉寧 원년이다.
[] 봄 정월에 양주자사揚州刺史 도향후都鄉侯 하충何充하였다.
[] 하충何充기국器局이 있어 조정朝廷에 임해서는 얼굴빛을 엄숙하게 하고 국가의 사직社稷을 보존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니, 그가 선발하여 등용한 자들이 모두 공적功績으로써 하였고 친척과 친구에게 사사로운 을 베풀지 않았다. 졸하자, 시호를 문목文穆이라 하였다.
[] 나라(전연前燕)가 부여夫餘를 기습하여 함락하고 부여의 왕 부여현夫餘玄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 2월에 〈나라(동진東晉)가〉 광록대부光禄大夫 채모蔡謨에게 사도司徒를 겸하게 하였다.
[] 3월에 〈나라(동진東晉)가〉 고화顧和상서령尚書令으로 삼고 은호殷浩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 저부褚裒고화顧和은호殷浩를 천거하자, 조령을 내려 고화를 상서령尚書令으로 삼고 은호를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고화는 이때 모친상이 있었는데, 굳게 사양하여 나오지 않고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옛사람 중에 상복喪服을 벗고 군왕을 위해 종사從事한 자가 있었으니, 이는 그의 재주가 당시의 일을 충분히 주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자는 바로 효도를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게 할 뿐이다.” 하였다.
은호 또한 굳게 사양하니,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이 은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지금 마침 국가의 운명이 곤액을 당하여 위험하고 피폐함이 이치상 극에 달하였으니, 족하足下는 식견이 풍부하여 충분히 경세제민經世濟民할 수가 있다.注+① 屬은 之欲의 切이니, 만남이다. ≪三國志≫ 〈魏書 明帝紀〉의 評에 “明帝는 침착하고 굳세고 결단력이 있고 식견이 있었다.” 하였고, ≪晉書≫ 〈謝鯤傳〉에 “謝鯤은 지식과 도량이 깊고 원대하다.” 하였다.
만약 또다시 겸손한注+② 挹은 겸손함이다. 마음을 깊이 품고서 본래의 소회를 구차히 이루려고 한다면 나는 이에 천하의 일이 잘못될까 두렵다. 족하의 거취에 바로 시운의 흥폐興廢가 달려 있다. 나라와 집안이 다르지 않으니,注+③ 〈“家國不異”는〉 나라가 일어나면 집안도 함께 일어나고, 나라가 피폐해지면 집안도 함께 피폐해짐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니, 은호가 마침내 직책에 나아갔다.
[] 여름 4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5월에 양왕涼王(전량前涼) 장준張駿하니, 세자世子 장중화張重華가 즉위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상서尚書 주궤朱軌를 죽이고 조정의 정사를 사사로이 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 나라 중황문中黄門 엄생嚴生주궤朱軌를 미워하였는데,注+① 惡(미워하다)는 烏路의 切이다. 마침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주궤가 도로를 닦지 않고 조정을 비방했다고 엄생이 모함하자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그를 가두었는데,
포홍蒲洪이 간하기를 “폐하가 덕스러운 정치를 닦지 아니하여 하늘이 지나친 비를 내려서 7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개었습니다. 비가 갠 지가 이제 막 이틀이 되었으니, 비록 귀신의 군대 백만이 있더라도 또한 도로의 흙탕물을 제거할 수 없을 텐데, 하물며 〈귀신이 아닌〉 사람이겠습니까.
원컨대 궁중의 노역勞役을 중지하고 원유苑囿를 없애고 궁녀를 내보내고 주궤를 사면하여 여러 사람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석호는 비록 그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또한 그에게 죄를 주지 않고 이 때문에 장안長安낙양洛陽의 노역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끝내 주궤를 주살하였다.
또 조정의 정사를 사사로이 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서 속리屬吏가 그 장관長官을 고발하고 노복奴僕이 그 주인主人을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니, 공경公卿 이하가 조회에서 만났을 적에 서로 곁눈질만 하고 감히 왕래하며注+② 過는 古禾의 切이니, 지나감이고, 방문함이다. 담론하지 못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양주涼州(전량前涼)를 공격하자, 장중화張重華주부主簿 사애謝艾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맞이하여 싸우게 하여 나라를 대파하였다.
[] 후조後趙장군將軍 왕탁王擢마추麻秋를 보내어 양주涼州를 공격하자,注+① ≪晉書≫ 〈張重華傳〉에 “石季龍(계룡은 石虎의 자)이 王擢과 麻秋, 孫伏都 등으로 하여금 쉬지 않고 침략하게 하자, 金城太守 張沖이 마추에게 항복하니, 이에 涼州가 진동했다.” 하였다. 장중화張重華경내境內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여 배항裴恒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는데, 오랫동안 싸우지 않았다.
사마司馬 장탐張躭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군대에 달려 있고 군대의 승패는 장수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장수를 천거함에 대부분 경험이 풍부한 장수를 추대하는데, 옛날에 한신韓信이 등용되었던 것은 오랜 덕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으니,注+② 〈“夫韓信之舉非舊德也”는〉 韓信이 미천한 신분에서 발탁됨을 이른다. 임무를 감당할 재주가 있으면 즉시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주부主簿 사애謝艾는 자품이 문무文武재질才質을 겸하였으니, 등용할 만합니다.” 하였다.
장중화가 사애를 불러 방략方略을 묻자, 사애가 대답하기를 “병력 7천 명을 배속시켜 주시면 기필코 나라를 격파하여 보답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謝艾帥衆擊麻狄謝艾帥衆擊麻狄
장중화가 사애를 중견장군中堅將軍으로注+③ 中軍을 中堅이라고 하니, 중앙에서 견고하고 예리한 병력을 가지고 직접 大將을 보필함을 이른다. 임명하여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지급해주니, 사애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밤에 올빼미 2마리가 아문牙門注+④ 牙中은 바로 牙門이다. 안에서 울자, 사애가 말하기를 “에서 올빼미를 얻은 자가 승리하니, 지금 올빼미가 우리 아문 안에서 우는 것은 적을 이길 조짐이다.” 하고 전진하여 나라와 싸워서 대파하였다.
[] 마추麻秋금성金城을 점령했을 적에 현령 차제車濟가 항복하지 않고 칼로 자살하였다. 마추가 또다시 편지를 보내어 완수도위宛戍都尉注+① 宛戍는 南陽郡 宛城에 주둔하여 수비하는 자들이다. 송구宋矩를 유인하여 데려오려 하자,
송구가 말하기를 “나는 남의 신하가 되어서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오직 충절忠節을 지켜 죽을 뿐이다.” 하고는 먼저 처자를 죽인 뒤에 목을 찔러 자결하니, 마추가 말하기를 “두 사람 모두 의로운 선비이다.” 하고는 거두어 장례하였다.
[] 겨울에 나라(성한成漢) 이혁李奕이 군대를 일으켜 성도成都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 한주漢主 이세李勢가 교만하고 음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여 공경公卿들을 접견하는 일이 드물고 좌우의 측근들을 신임하니,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가 함께 등용되고 형벌이 가혹하고 넘쳐났다. 이로 말미암아 중외中外의 모든 사람의 마음이 떠났다.
[] 태보太保 이혁李奕진수晉壽에서注+① 葭萌縣(가맹현)은 漢나라는 廣漢郡에 속하였는데, 蜀漢은 이를 고쳐 漢壽縣으로 만들어 梓潼郡에 소속시켰고 晉나라는 또 다시 한수현을 고쳐 晉壽縣이라 하였다.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니,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세李勢가 성에 올라가 항거하여 싸우면서 화살로 그를 맞혀 죽였다.
지역에는 예전에 서남쪽의 오랑캐가注+② 獠(료)는 魯皓의 切이니, 서남쪽 오랑캐의 이름이다. 없었는데, 이때에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파서巴西로부터 건위犍爲재동梓潼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산골짜기에 가득 퍼져 있어서 10여만 부락을 금하고 통제할 수가 없으니, 백성의 큰 우환꺼리가 되었고 게다가 기근까지 들어서 사방 국경이 쓸쓸하였다.
[] 11월에 환온桓温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성한成漢)를 정벌하였다.
[] 환온桓溫이 장차 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장수將帥보좌輔佐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였으나, 강하상江夏相 원교袁喬注+① 袁喬는 袁瓌의 아들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략하는 큰일은 진실로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는 경략하는 일이 가슴속에 분명하니, 굳이 중론이 일치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천하의 우환이 되는 것은 (전조前趙)와 (성한成漢) 두 오랑캐일 뿐입니다.
이 비록 험고險固하나 에 비하면 약하니, 장차 이들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쉬운 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이세李勢가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따르지 않고 또 길이 험하고 먼 것을 믿고서 전쟁에 대비하지 않으니, 마땅히 정예병 만 명에게 경무장輕武裝을 시켜 급히 달려가면 그들이 깨달을 때쯤에는 우리는 이미 험한 요새를 빠져나온 뒤일 것이니,注+② 〈“已出其險要”는〉 이미 험한 곳을 넘어가서 평지로 나옴을 이른다. 그리하면 한 번 싸워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지역은 재물이 풍요롭고 호구戶口가 많으니,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이들을 사용하여 중국에 대항하였습니다. 만약 이곳을 얻어 우리가 소유한다면 국가의 큰 이익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우리 대군이 이미 서쪽으로 가면 가 반드시 틈을 엿볼까 두려워하는데, 이것은 옳은 말인 듯하지만 잘못된 말입니다. 는 우리가 만 리 먼 곳을 정벌하러 간다는 말을 들으면 내부에 엄중한 방비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섣불리 출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침략하여 습격하는注+③ 軼은 충돌함이다. 일이 발생하더라도 강가의 여러 군대가 충분히 막고 지킬 수 있으니 반드시 우려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 환온桓溫이 절하고 표문을 올리고는 즉시 길을 떠나고 장사長史 범왕范汪에게 이곳에 남아 뒷일을 맡게 하니, 조정에서는 지방의 길이 험하고 먼데 환온이 병력이 적으면서 깊이 쳐들어간다 하여 모두 우려하였으나, 오직 유담劉惔만은 환온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하였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묻자 유담이 말하기를 “장기 두는 것을 가지고 알 수 있다. 환온은 장기를 잘 두는 자이다.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공격하지 않을 것이니,注+ 바로 이 뜻이다. 다만 지방을 이긴 뒤에 환온이 조정을 전제專制할까 두렵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六博 놀이 : 六博은 六簙과 같은 말로 장기나 주사위 따위로 내기를 하는 놀이이다.
역주2 漢李奕……不克而死 : “배반하였는데 ‘反’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李勢가 무도하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은 근원을 깨끗이 하고 근본을 바로잡았다. 그러므로 攻이라고 쓰고 反이라고 쓰지 않았으며, 死라고 쓰고 伏誅라고 쓰지 않은 것이다.[反也 不書反 何 勢無道也 綱目澄源正本 故書攻 不書反 書死 不書伏誅]” ≪書法≫
“分注(目)에는 李奕이 군대를 일으켜 배반했다고 썼는데 ≪資治通鑑綱目≫(綱)에서는 다만 成都를 공격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李特이 晉나라를 배반한 뒤로부터 李雄이 뒤를 이어 한쪽 지방을 몰래 점거해서 한쪽 지방에서 참람한 칭호를 썼는데, 李勢에 이르러 교만하고 음탕하고 부도덕하여 蜀 지방 무리의 마음이 떠났다. 이혁이 때를 타고서 무리를 움직였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 그가 배반했다고 쓰지 않은 이유는 참람하고 거짓된 자를 억제하고 음탕하고 어두운 자를 경계한 것이니, 이혁을 용서함은 이세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書法이 이와 같으니, 그 뜻이 엄격하다.[分注載李奕舉兵反 而綱目止書攻成都 何哉 自李特反晉 李雄繼之 竊據土宇 僭號一方 至勢 驕淫不道 蜀衆離心 李奕乗時動衆 綱目所以不書其反者 抑僭偽 戒淫昏 恕奕所以惡勢也 書法若此 其旨嚴矣]” ≪發明≫
역주3 桓温帥師伐漢 : “庾亮이 趙나라를 정벌할 적에 ‘表請’이라고 썼는데(咸康 5년(339)), 이때 桓溫 또한 절하고 표문을 올렸는데도 ‘표청’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삭제한 것이다. 어찌하여 삭제하였는가. 절하고 표문을 올린 것은 順從이나, 답이 내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출동했다면 이것은 專行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전행을 미워하여 곧바로 ‘환온이 군대를 거느리고 출동했다.’고 썼으니, 일의 조짐을 보고 앞으로 닥칠 근심을 미리 대비하는 경계가 매우 절실하다.[庾亮伐趙 書表請(咸康五年) 於是 溫亦拜表 其不書表請 何 削之也 曷爲削之 拜表 順也 不待報而卽行 則專也 綱目惡專 直書曰桓溫帥師 其爲履霜之戒 深切矣]” ≪書法≫
“살펴보건대 ≪春秋≫ 隱公 4년에 ‘翬가 군대를 거느리고 회합해서 鄭나라를 정벌했다.’고 썼는데, ≪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宋公이 군대를 청하였으나 공이 허락하지 않자, 羽父(翬의 자)가 굳이 청하여 갔다.’ 하였고, 君子가 이르기를 ‘휘가 이미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춘추≫에 公子라는 말을 삭제하여 폄하함을 보였다.’ 하였다. 그리고 은공 10년에 이르러 또다시 ‘휘가 군대를 거느리고 회합하여 宋나라를 쳤다.’고 썼는데, 先儒가 이르기를 ‘우보가 기일보다 먼저 가서 군주의 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춘추≫에 氏를 쓰지 아니하여 폄하해서 兵權이 아래(신하)로 옮겨간 잘못을 경계했다.’ 하였다. 얼마 후에 과연 鍾巫氏 집에서 隱公을 시해하는 변고가 있었다. 이는 聖人이 經書에 가르침을 남긴 것이니, 후세 사람들에게 혼란해지기 전에 다스려서 조기에 분변하도록 경계한 것이다.
지금 晉나라 桓溫이 군대를 출동하여 蜀을 정벌하였으니, 한때의 利害로 계산해보면 잘못된 계책이 아니다. 그러나 절하고 表文을 올리자마자 즉시 떠나서 조정의 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으니, 이미 정벌은 천자로부터 나온다는 뜻이 아니다. 翬가 굳이 청하고 군주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은 것에 비하면 더 심하다. 더구나 그가 한 번 군대를 일으켜 성공하자, 병권을 專制하고 跋扈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 ‘환온을 보내어 漢나라를 정벌했다.’고 쓰지 않고, 곧바로 ‘환온이 군대를 거느리고 漢나라를 정벌했다.’고 썼으니, 專制하여 군주를 무시한 것이 이미 여기에서 드러난 것이다. 어찌 후일에 병권을 잡고 조정을 통제해서 황제를 폐하고 신하 노릇 하지 않기를 기다린 뒤에 나타나겠는가. 그러나 晉나라의 方鎭들이 대부분 모두 그러하였는데 어찌 유독 환온에게서만 폄하하였는가. 晉나라의 權綱이 제대로 거행되지 못해서 끝내 중원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벌은 천자의 큰 권한인데 人臣으로 하여금 이 권한을 잡고 밖에서 제멋대로 행하게 하여, 자기의 사사로움을 따라 나아가고 물러갔으나 조정의 의논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겼다. 이 때문에 성공하면 환온과 劉裕가 되고 패하면 褚裒와 殷浩가 되는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에서는 모두 이것을 正色하고서 썼고 애당초 인정하는 뜻이 없었다. 그렇다면 軍國의 큰 권세를 진실로 단 하루도 삼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자는 부디 이것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按春秋隱四年書翬帥師會伐鄭 左氏謂宋公乞師 公弗許 羽父固請而行 君子謂翬已有無君之心 故春秋削去公子 以示貶 至隱十年 又書翬帥師會伐宋 先儒謂羽父先期而往 不待君命 故春秋不氏以貶之 以戒兵柄下移之失 未幾 果有鍾巫之變 此聖人垂訓於經 所以戒後世制治未亂 辨之於早者也 今焉晉之桓溫 舉兵伐蜀 以一時利害計之 未爲失策 然拜表輙行 不待朝命之及 已非征伐自天子出之意 其與翬之固請 不待君命 殆又甚之 況其一舉成功 則專兵跋扈 蓋自此始 綱目不書遣溫伐漢 而直書桓溫帥師伐漢 則其專輙無君 已見於此 何待他時擁兵制朝 廢立不臣而後見邪 雖然 晉之方鎮 大率皆然 何獨於溫而貶之 曰 此晉之權綱不舉 所以終於不能克復者 正坐此爾 夫征伐 天子之大權 而使人臣執之 得以專行于外 其進其退 率徇己私 而朝議若無與焉者 是以 成則爲桓溫劉裕 敗則爲褚裒殷浩 綱目 皆正色書之 初未嘗有予之之意 然則軍國大柄 固不可一日不謹 有天下國家者 尚鑑之哉]” ≪發明≫
역주4 戰國時代에……하였으니 : 이 내용은 周나라 赧王 43년에 보이는데, “博이라는 것은 장기이니, 곧 陸博이다. 5개의 윷짝으로 주사위를 만드는데, 梟․盧․雉․犢․塞의 다섯 가지가 승부의 패가 된다. 梟는 맞이한다는 뜻이다. 육박에서는 맞이하게 되는 자가 이긴다. 便은 마땅하다는 뜻이다. 梟을 얻으면 말을 마땅히 움직여야 하나, 만약 편치 않으면 움직임을 미룬다. ≪戰國策≫에 ‘움직이고 싶으면 움직이고, 가만히 있고 싶으면 가만히 있는다.[欲食則食 欲握則握]’ 하였는데, 그 주에 ‘食이라는 것은 말을 움직이는 것이고, 握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라고 주하였다.(≪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卷1下)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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