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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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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普通六年이요 魏孝昌元年이라
春正月 取魏南鄉郡及馬圈等城하다
◑ 魏徐州刺史元法僧反이어늘 魏發兵討之하니 遂降梁하다
法僧 素附元叉러니 見叉驕恣하고 恐及禍하여 謂中書舍人張文伯曰 吾欲與汝 去危就安하리니 能從我乎 文伯曰 吾寧死見文陵松柏이언정 安能去忠義而從叛逆乎注+① 文陵, 謂孝文帝陵.
法僧 殺之하고 遂殺行臺高諒하고 稱帝改元이어늘 魏發兵擊之한대 法僧 乃遣其子景仲하여 降梁하다
長史元顯和 舉兵與戰 法僧 擒之하고 執其手慰諭之하니 顯和曰 翁以地叛하니 獨不畏良史乎 我寧爲忠鬼언정 不能爲叛臣이라한대 法僧 殺之注+② 法僧, 陽平王熙之曾孫. 熙, 道武子也. 元麗, 小新城之孫. 小新成, 景穆之子. 顯和, 麗之子也, 以族屬長幼之次, 呼法僧為翁.하다
梁以元略爲大都督하여 與將軍陳慶之等으로 將兵應接하다
魏行臺蕭寳寅都督崔延伯 討莫折天生하여 敗之하니 岐雍隴東 皆平하다
莫折天生 軍於黑水注+① 水經註 “就水出南山就谷, 北流與黑水合. 黑水上合三泉, 於就水之右, 三泉奇發, 言歸一瀆, 北流會于就水. 就水又北流注于渭.”어늘 魏以崔延伯爲都督討之할새 與行臺蕭寳寅軍于馬嵬注+② 嵬, 五回切. 輿地記 “馬嵬陂在京兆平縣西二十三里.”하다
延伯 素驍勇이라 寳寅 趣之使戰注+③ 趣, 讀曰促.한대 延伯曰 明晨 爲公하여 參賊勇怯이라하고 乃選精兵數千하여 西度黑水하여 直抵天生營下라가 徐引兵還하니
天生開營爭逐之한대 其衆十倍 蹙延伯於水次하니 寳寅 望之失色이러니
延伯 自爲後殿하여 不與之戰하고 使其衆先度하여 部伍嚴整하니 天生兵 不敢擊이라
寳寅 喜曰 崔君之勇 關張不如注+④ 關張, 謂關羽․張飛也.라한대 延伯 曰 此賊 非老奴敵也 明公 但安坐하여 觀老奴破之하라
乃勒兵出戰호되 身先士卒하여 陷其前鋒하고 將士盡銳하여 競進大破之하니
俘斬十餘萬 追奔及小隴하니 岐雍及隴東 皆平注+⑤ 隴山有大隴山․小隴山. 大隴山在淸水縣東北, 小隴山在岐州武都郡南田縣西北.하다
將士 稽留採掠하니 天生 遂塞隴道 由是諸軍 不能前進注+⑥ 稽, 停也.하니라
寳寅 破宛川俘其民하여 以美女十人賞岐州刺史魏蘭根注+① 宛川, 鴛宛川, 卽岐州陳倉縣, 後魏改曰宛川. 蘭根從寳寅討破宛川.한대
蘭根 辭曰 此縣 介於彊寇하여 不能自立이라 故附從以救死注+② 介, 間也. 附從, 言民所以從賊.하니 官軍之至 宜矜而撫之 奈何助賊爲虐하고 剪以爲賤役乎
悉求其父兄而歸之하다
梁裴邃 敗魏師于壽陽하다
梁裴邃 拔魏新蔡郡注+① 魏收志 “新蔡郡治石母臺. 隋廢爲縣.”이어늘 梁主 詔西昌侯淵藻하여 將衆前驅하고 豫章王綜 與諸將繼進注+② 綜, 梁主子也.이러니
拔鄭城하니 汝潁之間 所在響應注+③ 水經注 “潁水過愼縣故城南而東, 南流逕蜩蟟郭東, 俗謂之鄭城, 又東南入淮.”하다 魏河間王琛等 憚邃威名하여 軍於城父하고 累月不進注+④ 父, 音甫. 城父縣, 漢屬沛郡, 魏․晉以來屬譙郡. 宋倂城父爲浚儀縣, 屬陳留郡, 郡寄治譙縣․長垣縣界.하다
魏朝遣使하여 齎齋庫刀以趣之注+⑤ 齋庫刀, 謂齋庫中之刀也. 所謂齋仗, 兵仗之精利, 貯于齋中者也. 胡三省註 “齋庫刀, 千牛刀也. 齎刀以趣其進, 言若復逗留, 將斬之也.”하니 至壽陽欲决戰이어늘 長孫稚 以爲未可라한대 不聽하고 引兵出擊하다
爲四甄以待之하고 使將軍李祖憐으로 先挑戰而僞退注+⑥ 甄, 音堅, 軍號也.한대 稚琛 悉衆追之어늘 四甄競發하니 魏師大敗 斬首萬餘級하다
走入城하고 勒兵而殿하여 遂閉門自固하고 不敢復出이러라
討徐州不克이라 以元法僧爲司空하다
魏安樂王鑒 將兵討元法僧할새 擊元略於彭城南하여 大敗하니 不設備어늘
法僧出擊하여 大破之하다 梁以法僧爲司空하고 封始安郡公하니
復遣安豐王延明臨淮王彧하여 擊之注+① 延明, 高宗子猛之子也.하다
二月 하다
魏劉騰 旣卒 胡后及魏主左右防衛微緩하다 元叉 亦自寛하여 時出遊不返이어늘
太后知之하고 對魏主하여 謂群臣曰 今隔絕我母子하여 不聽往來하니 復何用我爲리오 我當出家하여 修道於閑居寺耳라하고
因欲自下髪이어늘 魏主及群臣 叩頭하여 泣涕苦請한대 太后聲色 愈厲하다
魏主 乃宿於嘉福殿하여 遂與太后密謀黜叉하다 然魏主深匿形迹한대 太后有忿恚言하여 皆以告叉하니 叉殊不以爲疑 於是二宮無復禁礙하더라
丞相高陽王雍 雖位居叉上而深畏憚之러니 會太后 與魏主 遊洛水어늘 雍邀二宮幸其第하여 相與定圖叉之計하다 於是
太后 謂叉曰 元郎若忠於朝廷하여 無反心이면 何故不去領軍하여 以餘官輔政가하니 叉甚懼하여 乃求解領軍이어늘 許之하다
三月 遣豫章王綜하여 總督衆軍하여 攝徐州事하고 召元法僧等하여 還建康하다
法僧 至建康이어늘 梁主 寵待甚厚하니 元略 惡其爲人하여 與之言 未嘗笑러라
柔然阿那瓌 爲魏하여 討拔陵敗之하고 自稱敕連頭兵豆伐可汗注+① 爲, 去聲. 敕連頭兵豆伐, 魏言摠攬也.하다
◑ 夏四月 魏太后復臨朝하여 誅其尙書令元叉하고 以元順爲侍中하고 鄭儼徐紇李神軌爲中書舍人하다
雖解兵權이나 猶總内外 侍中穆紹 勸太后速去之注+① 紹, 亮之子也.하고
潘嬪 有寵於魏主 宦官 說之云 叉 欲害嬪이라한대
泣訴於魏主曰 叉 非獨欲殺妾이라 又將不利於陛下라하니
魏主 信之하여 因叉出宿하여 解叉侍中이러니 明旦 將入宮이어늘 門者不納하다
太后 遂復臨朝攝政하여 詔削劉騰官爵하고 除叉名爲民하다
淸河國郎中令韓子熙 上書爲淸河王懌訟寃하고 乞誅叉等注+① 子熙, 麒麟之孫也.한대 太后命發騰墓하여 散其骨하고 籍没家貲하며 盡殺其養子하고 侯剛亦坐黜이라가 尋卒於家하다 唯叉 以妹夫 故未忍誅러라
先是 黄門侍郎元順以剛直忤叉意하여 出爲齊州刺史러니 太后 徵還爲侍中하니라
侍坐於太后라가 曰 陛下奈何以一妹之故 不正元叉之罪하여 使天下 不得伸其怨憤이리잇고한대 太后 嘿然하더라 澄之子也
未幾 有告叉 謀誘六鎭降戶하여 反於定州라한대 太后 猶未忍殺이러니
群臣 固執不已하고 魏主 亦以爲言한대 乃賜叉死하다 江陽王繼 廢於家病卒하다
太后 頗事粧飾하고 數出遊 元順 面諫曰 禮 婦人 夫没 自稱未亡人라하고 首去珠玉하며 衣不文彩어늘 陛下 母臨天下하고 年垂不惑이어늘 修飾過甚하니 何以儀刑後世注+② 論語 “四十而不惑.”리오
太后 慚而還하여 召順責之曰 千里相徵 豈欲衆中見辱邪 曰 陛下 不畏天下之笑而恥臣之一言乎
與穆紹同直이러니 醉入其寝한대 紹擁被而起하여 正色讓順曰 身二十年侍中 與卿先君으로 亟連職事注+③ 亟, 數也.하니 縱卿 方進用이나 何宜相排突也
遂謝事還家하니 詔諭久之 乃起하다
鄭儼 爲胡國珍參軍하여 私得幸於太后注+① 儼, 羲之兄孫也.러니 至是하여 拜中書舍人領嘗食典御하여 晝夜禁中하다
每休沐 太后 常遣宦者隨之하니 見其妻 唯得言家事러라
徐紇 先以諂事趙脩 坐徙枹罕이러니 後又諂事淸河王懌라가 懌死 復諂事元叉러니
太后 以紇爲懌所厚라하여 亦召爲中書舍人하니 又諂事鄭儼하니
以紇有智數하여 仗以爲謀主注+② 仗, 憑也.하고 以儼 有内寵이라하여 傾身承接하니 共相表裏하여 勢傾内外 號爲徐鄭이라하더라
累遷至中書令하고 累遷至給事黄門侍郎하여 仍領舍人摠攝中書門下之事하여 軍國詔令 莫不由之하더라
有機辯彊力하여 終日治事 略無休息호되 不以爲勞하다 時有急詔 令數吏執筆하여 人别占之하여 造次俱成호되 不失事理注+③ 占, 章艶切. 隱度其辭, 口以授人曰口占.러라
然無經國大體하고 專好小數하여 見人矯爲恭謹하니 遠近輻湊附之하더라
神軌 亦得幸於太后 亦領中書舍人注+① 神軌, 崇之子也.이러니 嘗求婚於散騎常侍盧義僖한대 義僖不許하다
侍郎王誦 謂曰 昔人 不以一女易衆男하니 卿豈易之邪注+② 引樂廣事, 事見晉惠帝永興元年. 誦意謂義僖顧惜一女, 不許神軌爲婚, 神軌方有勢, 或爲所害, 則累及家族衆男, 故云 “一女易衆男.”
義僖曰 所以不從 正爲此耳 從之 恐禍大而速하리라 乃堅握義僖手曰 我聞有命이요 不敢以告人注+③ 詩唐國風揚之水之辭也.이라하다
女遂適他族이러니 婚夕 太后 遣中使하여 宣敕停之하니 内外惶怖호되 義僖 夷然自若하더라 義僖 度世之孫也
胡琛 遣其將万俟醜奴하여 寇魏涇州어늘 崔延伯 討之라가 敗死하다
胡琛 據高平하여 遣万俟醜奴宿勤明逹等하여 冦魏涇州注+① 高平, 鎭名. 万俟, 音墨, 其虜複姓, 醜奴其名, 其先匈奴之別也. 宿勤, 亦虜複姓, 明逹其名.어늘 將軍盧祖遷伊甕生 討之라가 不克하다
蕭寳寅崔延伯 旣破莫折天生하고 引兵會祖遷等於安定하니 軍威甚盛이라
醜奴 時以輕騎挑戰하여 兵未交 輒委走하니 延伯 恃勇하여 乘勝擊之러니
將戰 有賊數百騎持文書詐降하니 寳寅延伯 未及閲視 宿勤明逹 引兵至하여 與降賊腹背擊之하니 延伯 大敗 寳寅 退保安定하다
延伯 恥其敗하여 乃繕甲兵募驍勇하여 獨出襲賊하여 平其數柵이러니
賊還擊之하니 魏兵大敗하여 延伯 中流矢卒하니
於是 賊勢 益盛한대 而群臣自外來者 皆言賊弱이라하여 以求悅媚하고 將帥求益兵者往往不與하다
五月 梁豫州刺史夷陵侯裴邃卒하다
沈深有思略하여 爲政寛明하니 將吏愛而憚之注+① 思, 去聲. 及卒 以夏侯亶으로 代之하다
梁人 圍小劔이어늘 擊敗之하다
梁益州刺史臨汝侯淵猷 遣其將樊文熾蕭世澄等하여 將兵圍魏長史和安於小劔이어늘 魏益州刺史邴虯 遣統軍胡小虎하여 救之注+① 邴虯, 音丙求, 姓名.러니
文熾襲擒之하고 使小虎說和安降한대 小虎 遙謂安曰 我失備하여 爲賊擒하다 觀其兵力 殊不足言이니 努力堅守하라 魏行臺援兵已至注+② 魏行臺, 子建.니라 語未終 軍士殺之하다
軍司淳于誕 救小劔하니 文熾置柵於龍鬚山하여 以防歸路러니 密募壯士하여 夜燒其柵한대 梁軍 望見歸路絶하고 皆恟懼어늘 乘而擊之하니 文熾 大敗하여 僅以身免이라
虜世澄等十一將하니 斬獲 萬計러라
梁主 納齊東昏侯寵姬吳淑媛하여 七月而生綜하니 宮中 多疑之注+① 魏文帝置淑媛, 宋明帝以淑媛爲九嬪之首, 齊․梁因之.러니
淑媛寵衰怨望하여 謂綜曰 汝 七月生兒 安得比諸皇子 然汝 太子次第 幸保富貴하고 勿泄也하라하고 與綜相抱而泣注+② 第, 南史綜傳作‘弟’. 通鑑一本亦作弟.하니
由是自疑하여 夜於靜室 披髪席槁하여 私祭齊氏七廟注+③ 席, 薦也. 槁, 禾稈也. 用槁爲席者, 以示自貶也. 古有罪者, 席槁飮水.하고 微服至曲阿하여 拜齊太宗陵注+④ 齊無太宗, 當是高宗.하니라
俗說 割血瀝骨하여 滲則爲父子라하고 遂潜發東昏侯冢하고 并自殺一男하여 試之皆驗注+⑤ 瀝音歷, 滴也. 滲, 所禁切.이라 由是 常懷異志하여 專伺時變하더라
有勇力하여 能手制奔馬하고 輕財好士하여 屢求邊任호되 梁主 未之許
常於内齋 布沙於地하고 終日跣行하여 足下生胝하고 日能行三百里注+⑥ 胝, 音知, 皮厚也.러라 又使通問於蕭寳寅하여 謂之叔父라하니 人皆知之而不敢言이러라
及在彭城 魏臨淮王彧 兵逼彭城하여 勝負久未决이라 梁主慮綜 敗没하여 敕引軍還한대
恐不復得至北邊하여 乃密送降欵於彧하니 魏人 皆不之信이라
募人入綜軍하여 驗其虛實하니 無敢行者러니
監軍御史鹿悆請行注+① 悆, 音預. 鹿悆姓名.하여 單騎徑趣彭城이라가 爲綜軍所執하여 問其來狀한대 曰 臨淮王 使我來 欲有交易耳니라
聞之謂成景儁等曰 我常疑元略規欲反城注+② 規, 圖也. 反, 音飜.이라 將驗其虛實하여 故遣左右爲略使하여 入魏軍中하여 呼彼一人이러니
今其人 果來하니 可遣人詐爲略有疾在深室하고 呼至戶外하여 令人傳言謝之하라
又遣腹心梁話迎悆하여 密以意狀語之注+① 意者, 傳綜欲降之意. 狀者, 告以詭與成景儁設謀之狀.하니
乃引至一所하여 令一人自室中出하여 爲元略致意曰 我昔相呼하여 欲聞鄉事러니 晚來疾作하여 不獲相見이라하니
悆曰 早奉音旨하여 冒險祗赴러니 不得瞻見하니 内懷反側이라하고 遂辭退注+② 祗, 敬也. 反側, 不安也.하다
悆還할새 於路復與梁話申固盟約하니 遂與話夜投彧軍하다
及旦 齋閤 不開 魏軍 呼曰 汝豫章王 昨夜已來하여 在我軍中하니 汝尙何 爲城中求王不獲하니 軍遂大潰
魏人 入彭城하여 乘勝追擊梁兵復取諸城하고 至宿預而還하니 將士死者 什七八러라 唯陳慶之帥所部還하니
梁主 聞之하고 驚駭하더라 有司 奏削綜爵土絶屬籍하니라
西豐侯正德 志行不悛하고 從綜北伐 棄軍輒還하여 亦免官削爵이라가 尋皆赦之하다
至洛陽하여 見魏主하고 還就館하여 爲東昏侯擧哀하고 服斬衰三年하다 拜司空封丹楊王하고 更名贊하다
綜長史江革司馬祖暅之 皆爲魏所虜 安豐王延明 聞其才名厚遇之한대
稱足疾不拜하더라 延明 使暅之作欹器銘이어늘 革唾罵之注+① 家語 “孔子觀於魯桓公之廟, 有欹器焉. 夫子問於守廟者曰 ‘此爲何器.’ 對曰 ‘此蓋爲宥坐之器.’ 孔子曰 ‘吾聞宥坐之器, 虛則欹, 中則正, 滿則覆. 明君以爲至誡, 故常置之於坐側.’”하고 延明令革作寺碑어늘한대 延明 將箠之
革厲色曰 江革 行年六十이라 得死爲幸이니 誓不爲人執筆이라한대 延明 知不可屈하고 乃止하다
日給脫粟三升하여 僅全其生而已注+② 脫粟, 粟米之麤糲者, 言僅脫去其殼也.러라 梁主密召夏侯亶還하여 使休兵合肥俟淮堰成하여 復進하다
西部鐵勒 降魏하니 魏廣陽王深 擊拔陵破之하고 降其衆二十萬하다
破六韓拔陵 圍魏廣陽王深於五原이어늘 軍主賀拔勝 出戰하니 稍退 拔軍向朔州할새 常爲殿注+① 魏以懷朔鎭爲朔州.이러라
雲州刺史費穆 招撫離散하여 四面拒敵하니 北境州鎭 皆没호되 唯雲中一城 獨存久之하다
援軍 不至하고 糧仗 俱盡이라 棄城하고 南奔爾朱榮於秀容하다
于謹言於深曰 今 冦盗蠭起하니 未易専用武力勝也 請奉大王之威命하여 諭以禍福하면 庶幾可離니이다하니 許之하다
通諸國語 乃單騎詣叛胡營하여 見其酋長하고 開示恩信이니
於是 西部鐵勒酋長乜列河等 將三萬餘戶하여 詣深降注+② 乜, 母野切, 虜姓也.하니 欲引兵迎之어늘
曰 破六韓拔陵 兵勢甚盛이라 聞乜列河等來降하면 必引兵邀之하여 若先據險要 未易敵也
不若以乜列河餌之하고 而伏兵 以待之 必可破也하다 從之러니
拔陵 果引兵邀擊乜列河하여 盡俘其衆이어늘 伏兵發한대 拔陵 大敗 復得乜列河之衆而還하다
柔然頭兵可汗 大破破六韓拔陵하니 拔陵 避柔然하여 南徙渡河할새 前後降附者 二十萬人注+.이라
與行臺元纂表호되 乞於恒州北 别立郡縣하여 安置降戶하고 隨宜賑賫하여 息其亂心이라하다
不從하고 詔分處之於冀定瀛三州하여 就食한대 謂纂曰 此輩復爲乞活矣注+④ 乞活, 事見晉惠帝光熙元年.로다
秋八月 魏柔玄鎭民杜洛周 反于上谷이어늘 魏遣兵討之하다
洛周反하니 高歡蔡儁尉景段榮彭樂 皆從之 以常景爲行臺하여 與都督元譚討之注+① 景, 爽之孫也.하다
冬十二月 魏荆郢群蠻이어늘 魏討敗之러니 取魏順陽馬圈하다
魏方有事西北하니 二荆西郢群蠻 皆反注+① 西荊治上洛, 北荊治襄城, 西郢治汝南眞陽縣.하다 寇掠襄城하고 屯據險要하니 道路不通이라
引梁將曹義宗等하여 圍魏荆州注+② 此荊州治穰城.어늘 魏更以臨淮王彧으로 討魯陽蠻하고 辛雄爲行臺左丞하여 趣葉城注+③ 葉, 式涉切. 葉城時爲襄州治所, 此卽漢南陽郡之葉縣城也.하고 别遣裴衍王羆하여 自武關出救荆州러니
衍等 未至 彧軍已屯汝上이라 州郡被蠻寇者 爭來請救注+④ 汝上, 汝水之上也.한대 彧以處分道别라하여 不欲應之어늘
辛雄曰 王 秉麾閫外하시니 見可而進이니 何論别道리오
恐後有得失之責하여 邀雄符下注+⑤ 符, 尙書行臺符也.하니 遂符彧하여 令速赴擊하다
群蠻聞之하고 果散走하다
雄上疏曰 凡人所以臨陣하여 觸白刃而不憚者 一求榮名하고 二貪重賞이요 三畏刑罰하고 四避禍難이니 非此數者 雖聖라도 不能使其臣하고 慈父라도 不能厲其子矣
明主 深知其情이라 故賞必行하고 罰必信하여 使親疎貴賤勇怯賢愚聞鍾鼓之聲하며 見旌旗之列하여 莫不奮激하여 競赴敵場하니 豈懕久生而樂速死哉리오 利害懸於前하여 欲罷不能耳注+① 懕, 與厭同.
自秦隴逆節 蠻左亂常 已歴數年注+② 自宋以來, 豫部諸蠻率謂之蠻左, 所置蠻郡謂之左郡.호되 扞禦之師 敗多勝少하니 跡其所由한대 皆不明賞罰故也
陛下雖降明詔하여 賞不移時하나 然將士之勲 歴稔不决하고 亡軍之卒 晏然在家注+③ 歷稔, 猶言歷年, 一年五穀一稔, 故以年爲稔.하니
是故 節士無所勸慕하고 庸人無所畏懾하며 進而擊賊이면 死交而賞賒하고 退而逃散이면 身全而無罪注+④ 賖, 遠也.하니라 此其所以望敵奔沮하여 而莫肯盡力者也니이다
陛下 誠能號令必信하며 賞罰必行하면 則軍威必張하고 盗賊 必息矣니이다 疏奏不省注+⑤ 張, 音漲, 熾盛也.하다
曹義宗等取魏順陽馬圈하니라
梁邵陵王綸 有罪하여 免官削爵土하다
攝南徐州事注+① 綸, 梁主子.하여 肆行非法이라
遨遊市里러니 問賣䱇者曰 刺史何如注+② 䱇, 與鱓同, 市演切. 鱓魚似蛇. 對言躁虐하니이다 綸怒하여 令吞䱇而死하니 百姓 惶駭하여 道路以目하더라
甞逢喪車하여 奪孝子服而著之하고 匍匐號叫어늘 籖帥以聞한대 梁主 責之호되 不能改어늘 於是 遣代하다
乃取一老公短痩類梁主者하여 加以袞冕하고 置之高坐하여 朝以爲君하고 自陳無罪라가 就坐剝裭하여 捶之於庭注+③ 剝, 脫也. 褫, 敕紙切, 奪衣也.하니
梁主 恐其奔逸하여 以禁兵取之하여 將賜之死러니 太子統 流涕固諫한대 乃免綸官하고 削爵土하다
魏山胡劉蠡升反注+① 山胡, 卽汾州之稽胡.하다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普通 6년이고, 北魏 肅宗 孝明帝 元詡 孝昌 원년이다.
【綱】 봄 정월에 梁나라가 北魏의 南鄉郡과 馬圈城 등을 빼앗았다.
【綱】 北魏 徐州刺史 元法僧이 반란하자 북위에서 군대를 출동하여 토벌하니 원법승이 마침내 梁나라에 항복하였다.
【目】 元法僧이 평소에 元叉에게 아부하였는데, 원차의 교만 방자함을 보고 재앙이 미칠까 우려하여 中書舍人 張文伯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와 함께 위험을 버리고 편안함으로 나아가려 하니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장문백이 말하기를 “나는 차라리 죽어 文陵(孝文帝)의 松柏(先塋)을 볼지언정 어찌 忠義를 버리고 叛逆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① 文陵은 北魏 孝文帝 陵을 말한다.
원법승이 장문백을 죽이고, 마침내 行臺 高諒도 죽이고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바꾸었다. 北魏에서는 군사를 출동하여 공격하였는데 원법승이 마침내 아들 元景仲을 보내서 梁나라에 항복하였다.
북위의 長史 元顯和가 군사를 동원하여 함께 싸웠는데 원법승이 원현화를 사로잡고 그의 손을 잡고서 위로하며 타이르니, 원현화가 말하기를 “翁(원법승)께서는 맡으신 지역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시니 다만 훌륭한 史官이 겁나지 않으십니까. 나는 차라리 忠義의 귀신이 될지언정 반역을 꾀한 신하는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원법승이 원현화를 죽였다.注+② 元法僧은 陽平王 元熙의 曾孫이고, 元熙는 道武帝의 아들이다. 元麗는 元小新城의 손자이다. 元小新城은 景穆帝의 아들이다. 元顯和는 元麗의 아들인데, 종족 친속의 長幼 차례를 가지고 元法僧을 翁이라고 부른 것이다.
梁나라는 元略을 大都督으로 삼아 將軍 陳慶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원법승에 호응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綱】 北魏 行臺 蕭寳寅과 都督 崔延伯이 莫折天生을 토벌하여 물리치니, 岐州ㆍ雍州ㆍ隴州의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다.
【目】 莫折天生이 黑水에 주둔하였는데,注+① ≪水經註≫에 “就水는 南山 就谷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黑水와 합한다. 흑수의 상류는 三泉과 합하는데, 취수의 右岸에서 三泉이 기이하게 발원하는데 하나의 큰 강으로 귀결되어 북쪽으로 흘러 취수에 모이고, 취수는 또 북쪽으로 흘러 渭水에 유입된다.” 하였다. 北魏는 崔延伯을 都督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할 때에 行臺 蕭寳寅과 함께 馬嵬에 주둔하였다.注+② 嵬는 五回의 切이다. ≪輿地記≫에 “馬嵬陂는 京兆 興平縣 서쪽 23리에 있다.” 하였다.
최연백이 평소에 날래고 용감함이 있었기 때문에 소보인이 그에게 싸우라고 재촉하였는데,注+③ 趣(재촉하다)은 促으로 읽는다. 최연백이 말하기를 “내일 새벽에 公을 위하여 적이 용맹한지 겁먹었는지 시험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정예 병사 수천 명을 선발하여 서쪽으로 黑水를 건너서 바로 막절천생의 군영 아래로 쳐들어갔다가 느긋이 병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막절천생이 군영을 열고 다투어 최연백을 추격하였는데 최연백의 군사의 열 배나 되었다. 최연백을 물가까지 쫓아오니, 소보인이 그것을 바라보고 안색을 잃었다.
최연백이 스스로 후군이 되어서 그들과 함께 싸우지 않고, 자기의 군대를 먼저 건너게 하였는데 군중의 대오가 엄정하니, 막절천생의 병사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소보인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崔君(최연백)의 용맹은 關羽와 張飛보다 낫다.”라고 하자,注+④ 關․張은 關羽와 張飛를 말한다. 최연백이 말하기를 “이 賊은 저의 적수가 아니니, 明公께서는 다만 편안하게 앉아서 제가 적을 격퇴하는 것을 구경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정돈하고 출전하였는데, 자신이 사졸보다 앞장서서 적의 선봉을 무너뜨리고 將士들이 용기를 다하여 앞 다투어 전진하여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0만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는데 도망치는 자를 추격하여 小隴山에 이르니, 岐州ㆍ雍州와 隴山의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다.注+⑤ 隴山에는 大隴山과 小隴山이 있다. 大隴山은 淸水縣 동북쪽에 있고, 小隴山은 岐州 武都郡 南田縣 서북쪽에 있다.
將士들이 머뭇거리며 노략질을 하니, 막절천생이 드디어 隴西로 가는 길을 막았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군사들이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注+⑥ 稽는 머문다는 뜻이다.
【目】 蕭寳寅이 宛川을 격파하고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 美女 10명을 岐州刺史 魏蘭根에게 상으로 주었는데,注+① 宛川은 鴛宛川이니, 곧 岐州 陳倉縣이며, 後魏(北魏)가 宛川으로 개명하였다. 魏蘭根이 蕭寳寅을 따라 완천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위난근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宛川 縣은 강한 도적들 사이에 있어서 자립할 수 없으므로 백성들이 적을 따른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입니다.注+② 介는 사이이다. “附從”은 백성들이 적을 따른 것을 말한 것이다. 官軍이 이르러서는 그들을 마땅히 불쌍히 여기고 위무해주어야 하는데, 어찌 적을 도와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고 약탈하여 노예로 삼는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10명 모두 그의 父兄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綱】 梁나라 裴邃가 壽陽에서 北魏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目】 梁나라 裴邃가 北魏 新蔡郡을 함락시켰는데,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新蔡郡은 石母臺에 치소가 있는데, 隋나라가 폐하여 縣으로 삼았다.” 하였다. 梁主(蕭衍)가 西昌侯 蕭淵藻에게 조서를 내려 군대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게 하고, 豫章王 蕭綜이 여러 장수들과 이어서 전진하였다.注+② 蕭綜은 梁主(蕭衍)의 아들이다.
배수가 鄭城을 함락시키니, 汝水와 潁水 一帶에서는 곳곳마다 호응하였다.注+③ ≪水經註≫에 “潁水가 愼縣 故城의 남쪽을 지나서 동쪽으로 가고, 남쪽으로 흘러 蜩蟟 성곽 동쪽을 경유하니, 세속에서 鄭城이라고 말하고, 또 동남쪽으로 가서 淮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北魏 河間王 元琛 등이 배수의 威名을 꺼려하여 城父城(성보성)에 주둔하고 몇 달 동안 전진하지 못하였다.注+④ 父는 音이 甫이다. 城父縣은 漢나라 때에는 沛郡에 소속되었고, 魏나라와 晉나라 이래로 譙郡에 소속되었다. 宋나라는 城父縣을 아울러 浚儀縣으로 삼았고, 陳留郡에 소속시켰으며, 진류군은 譙縣과 長垣縣의 경계에 僑治하였다.
북위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면서 그에게 齋庫刀를 하사하여 그들을 재촉해 싸우게 하였다.注+⑤ 齋庫刀는 齋庫 안의 칼을 말하니, 이른바 齋仗은 병장기의 예리한 것으로 齋의 안에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胡三省 註에 “齋庫刀는 이다. 刀를 주어서 그 전진을 재촉하게 한 것이니, 만약 다시 머뭇거리면 장차 그들의 목을 베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원침이 壽陽에 이르러서 决戰하려고 하였는데 長孫稚가 아직 싸울 수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나가 공격하였다.
배수는 4개 부대를 편성하여 원침의 군대를 기다리게 하고, 將軍 李祖憐에게 먼저 싸움을 걸도록 한 후에 거짓으로 퇴각하게 하였는데,注+⑥ 甄은 音이 堅이니, 군대의 호칭이다. 장손치와 원침이 병사를 전부 내어 추격하자, 4개 부대가 다투어 출동하니, 북위 군사가 대패하였다. 이에 수만여 급을 참수하였다.
원침은 도주하여 성으로 들어가고 장손치는 군사들을 정비하여 후군이 되어 추격해오는 병사를 막아서 마침내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고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다.
【綱】 北魏가 徐州를 토벌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梁나라가 元法僧을 司空으로 삼았다.
【目】 北魏 安樂王 元鑒이 병사를 거느리고 元法僧을 토벌할 적에 彭城 남쪽에서 元略을 공격하여 대패시키니, 원감이 방비를 갖추지 않았다.
그러자 원법승이 나가 공격하여 원감을 크게 격파하였다. 梁나라는 원법승을 司空으로 삼고 始安郡公에 封하였다.
북위가 다시 安豐王 元延明과 臨淮王 元彧을 보내서 원법승을 공격하였다.注+① 元延明은 高宗(拓跋濬)의 아들 元猛의 아들이다.
【綱】 2월에 北魏의 元叉가 領軍將軍에서 해임되었다.
【目】 北魏 劉騰이 卒한 뒤에 胡太后와 魏主(元詡)의 左右의 감시가 조금 완화되었다. 元叉 자신 또한 느긋해져서 때로 밖에 나가 유람하고 돌아오지 않자,
호태후가 이런 사실을 알고 魏主를 대면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 母子를 막아서 往來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다시 내가 어디에 쓸 데가 있겠는가. 나는 마땅히 出家하여 閑居寺에서 도를 닦을 뿐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스스로 삭발을 하려고 하였는데, 魏主와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서 눈물을 흘리며 애써 요청하자, 호태후의 말과 안색이 더욱 거세졌다.
魏主가 마침내 嘉福殿에 묵으면서 드디어 호태후와 함께 元叉를 쫓아낼 것을 은밀하게 모의하였다. 그러나 魏主는 자신의 내심을 깊이 숨기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원차는 전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二宮(胡太后와 魏主) 사이에 다시 금지하고 가로막음이 없었다.
丞相 高陽王 元雍이 비록 지위가 원차의 위에 있었지만 원차를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때마침 호태후가 魏主와 洛水에서 유람하였는데, 원옹이 二宮을 맞이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서 함께 원차를 도모할 계획을 정하였다.
이에 호태후가 원차에게 말하기를 “元郎(원차)이 만약 조정에 충성을 하여 反心이 없다면 어찌하여 領軍將軍을 사임하고 다른 관직으로 정사를 돕지 않는가.”라고 하니, 원차가 매우 두려워하여 마침내 영군장군에서 해임시켜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綱】 3월에 梁나라가 豫章王 蕭綜을 보내서 여러 군대를 總督하게 하여 徐州 일을 대리하고 元法僧 등을 불러서 建康에 돌아오게 하였다.
【目】 元法僧이 建康에 이르렀는데 梁主(蕭衍)가 총애하고 우대함이 매우 후하였다. 元略이 원법승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그와 함께 말할 적에 웃은 적이 없었다.
【綱】 柔然 郁久閭阿那瓌가 北魏를 위하여 破六韓拔陵을 토벌하여 패퇴시키고, 스스로 敕連頭兵豆伐可汗을 칭하였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敕連頭兵豆伐은 北魏의 말로 모두 장악한다는 뜻이다.
【綱】 여름 4월에 北魏 胡太后가 다시 조정을 다스려서 尙書令 元叉를 죽이고 元順을 侍中으로 삼고 鄭儼ㆍ徐紇ㆍ李神軌를 中書舍人으로 삼았다.
【目】 元叉가 비록 兵權을 놓았으나 여전히 조정 内外의 일을 총괄하였기 때문에 侍中 穆紹가 胡太后에게 원차를 신속하게 제거하도록 권하였다.注+① 穆紹는 穆亮의 아들이다.
潘嬪이 魏主(元诩)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宦官이 반빈을 설득하기를 “원차가 반빈을 해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반빈이 울면서 魏主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원차가 妾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또 장차 陛下에게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그 말을 믿어서 원차가 출궁하여 자고 오는 때를 이용하여 원차를 侍中에서 해임시켰다. 다음 날 아침에 궁중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문지기가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호태후가 마침내 다시 조정에 나와 섭정하여 조서를 내려 劉騰의 官爵을 삭탈하고, 원차를 제명하고 平民으로 삼았다.
【目】 淸河國 郎中令 韓子熙가 上書하여 淸河王 元懌을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고 元叉 등을 주살하기를 청하였는데,注+① 韓子熙는 韓麒麟의 손자이다. 胡太后가 명령하여 劉騰의 무덤을 파서 그의 뼈를 흩어버리고, 그의 家産을 몰수하고 그의 養子를 다 죽였다. 侯剛 역시 연좌되어 쫓겨났다가 곧이어 집에서 卒하였다. 오직 원차가 호태후의 妹夫이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黄門侍郎 元順이 剛直하였기 때문에 원차의 뜻을 거역하고 외직으로 나가 齊州刺史가 되었더니, 호태후가 불러 돌아오게 하여 侍中을 삼았다.
호태후를 모시고 앉아 있다가 원순이 말하기를 “陛下께서는 어찌하여 한 매부의 연고로 원차의 죄를 바로잡지 않아서 천하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원망함과 분통함을 펴지 못하게 하십니까.”라고 하자, 호태후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원순은 元澄의 아들이다.
얼마 안 되어 어떤 이가 “원차가 六鎭의 항복한 戶들을 유인하여 定州에서 반란을 모의한다.”고 고발하였는데, 호태후가 여전히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였다.
신하들이 원차를 죽여야 한다고 고집하기를 그치지 않고, 魏主(元詡)도 역시 〈원차를 죽여야 한다고〉 말을 하자, 마침내 원차에게 죽음을 내렸다. 江陽王 元繼(元叉의 부친)가 폐위당하여 집에서 병으로 卒하였다.
호태후는 粧飾하는 일을 자못 일삼고 자주 밖으로 나가 놀았다. 원순이 얼굴을 맞대어 간언하기를 “禮에는, 婦人은 남편이 죽으면 스스로 未亡人이라고 칭하고, 머리에는 珠玉을 제거하며, 옷에는 무늬와 채색을 하지 않는 것을 입는데, 陛下께서는 國母로서 天下를 다스리시고, 연세가 거의 不惑(40세)에 가까우신데, 修飾함이 너무 심하시니, 무엇으로 後世 사람들을 본받게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注+② ≪論語≫ 〈爲政〉에 “마흔 살에 의혹되지 않는다.” 하였다.
호태후가 부끄러워하며 궁중으로 돌아가서 원순을 불러 꾸짖기를 “내가 너를 천 리 밖에서 불러 온 것이 어찌 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욕보이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라고 하니, 원순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天下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면서 臣의 한마디 말은 부끄러워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원순이 穆紹와 함께 숙직을 하였는데, 원순이 술에 취하여 목소의 침실에 들어가자 목소가 이불을 끌어안고 일어나서 正色하며 원순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내가 20년 동안 侍中을 지내면서 卿의 先君과 자주 職務를 함께하였소.注+③ 亟는 자주이다. 비록 卿이 한창 重用되고 있으나 어찌 사람을 대할 때에 당돌하게 군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직책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호태후가 조서를 내려 권유하기를 오래하자 목소가 직책에 나왔다.
【目】 예전에 鄭儼이 胡國珍의 參軍이 되어서 사사로이 胡太后에게 총애를 받았다.注+① 鄭儼은 鄭羲의 형의 손자이다. 이때에 이르러 中書舍人으로 임명하고, 嘗食典御를 겸하여 밤낮으로 궁중에 머물러 있었다.
휴가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호태후가 항상 환관을 보내 그를 따르게 하니, 정엄은 처를 볼 때에 오직 집안일을 말할 뿐이었다.
徐紇이 먼저 趙脩를 아첨해 섬긴 것으로 연좌되어 枹罕으로 귀양을 갔다. 뒤에 또 淸河王 元懌을 아첨해 섬기다가 원역이 죽자 다시 元叉를 아첨해 섬겼다.
호태후는 서흘이 원역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여 또한 불러서 중서사인으로 삼으니, 서흘이 또 정엄을 아첨해 섬겼다.
정엄은 서흘이 지모와 술수가 있다고 하여 그를 의지하여 謀主로 삼고,注+② 仗은 의지한다는 뜻이다. 서흘은 정엄이 호태후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몸을 굽혀 받들어 모시니, 서로 함께 表裏가 되어서 권세가 內外를 휩쓸었으므로 사람들이 부르기를 徐ㆍ鄭이라고 하였다.
정엄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中書令에 이르렀고, 서흘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給事黄門侍郎에 이르러서 중서사인을 겸직하고 中書省과 門下省의 일을 總攝하여 軍國에 관한 詔令이 그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서흘은 機智와 말재주가 있고 정력이 왕성하여 종일 사무를 처리하는 데에 조금도 휴식하지 않았지만 피로하다 여기지 않았다. 급한 조서가 있을 때에는 몇 사람의 관리에게 붓을 잡도록 명하여 사람마다 분별하여 조서의 내용을 구두로 말해주어 잠깐 동안에 모두 문서가 작성되었는데 事理를 잃지 않았다.注+③ 占은 章艶의 切이니, 마음속으로 그 말을 헤아려서 입으로 남에게 말해주는 것을 ‘口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라를 경영하는 大體가 없고 오로지 작은 술수를 좋아하여 사람을 볼 적에는 거짓으로 공손하고 신중한 척하니, 원근 사람들이 바퀴통에 바큇살이 모이듯이 그에게 의탁하였다.
【目】 李神軌도 역시 胡太后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또한 中書舍人을 겸직하였다.注+① 李神軌는 李崇의 아들이다. 이신궤가 散騎常侍 盧義僖에게 求婚한 적이 있었는데, 노의희가 허락하지 않았다.
侍郎 王誦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딸 하나를 아껴 여러 아들들의 목숨과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卿은 어찌하여 이를 바꾸려 하십니까.”라고 하니,注+ 王誦의 생각에는 盧義僖가 하나 있는 딸을 아깝게 여겨 李神軌의 혼담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이신궤가 바로 권세를 가지고 있어서 혹 이신궤에게 당하면 그 우환이 가족의 여러 아들들에게 미치게 되기 때문에 이르기를 “딸 하나로 여러 아들들과 바꾼다.” 하였다.
노의희가 말하기를 “구혼에 따르지 않은 까닭이 바로 이것 때문이니, 구혼을 따르게 되면 재앙이 크고 빨리 올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왕송이 노의희의 손을 굳게 잡고 말하기를 “내 명령이 있음을 듣고도 감히 남에게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注+③ 〈“我聞有命 不敢以告人”은〉 ≪詩經≫ 〈唐風 揚之水〉의 말이다.
노의희의 딸이 마침내 다른 성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혼인하는 날 저녁에 호태후가 中使를 보내 칙령을 선포하여 결혼을 중지하였다. 노의희의 집안의 안팎이 두려워하였지만 노의희는 태연자약하였다. 노의희는 盧度世의 손자이다.
【綱】 胡琛이 그의 장수 万俟醜奴(묵사추노)를 보내 北魏의 涇州를 침입하였는데 崔延伯이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目】 胡琛이 高平을 점거하여 万俟醜奴와 宿勤明逹 등을 보내서 北魏의 涇州를 침입하였는데注+① 高平은 鎭의 이름이다. 万俟는 〈万의〉 음이 墨이고, 오랑캐의 複姓이고, 醜奴는 이름이니, 그 조상은 匈奴의 별종이다. 宿勤은 역시 오랑캐의 複姓이고, 明逹은 이름이다. 將軍 盧祖遷과 伊甕生이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蕭寳寅과 崔延伯이 莫折天生을 격파하고 나서 병사를 이끌고 노조천 등과 安定에서 회합하니 군의 위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묵사추노가 이때에 輕騎兵으로 싸움을 걸어와서 병사들이 交戰하기 전에 번번이 버리고 달아나니, 최연백이 용맹을 믿어 승세를 타고 공격하였다.
막 싸움을 하려고 할 때에 적의 수백 명의 기병이 文書를 가지고 와서 거짓으로 최연백에게 항복하였다. 소보인과 최연백이 아직 죽 훑어보지도 않았는데, 숙근명달이 병사를 이끌고 이르러서 항복한 적들과 함께 앞뒤로 공격하니, 최연백이 대패하였다. 이에 소보인은 물러나서 安定을 지켰다.
최연백은 대패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홀로 나가 적을 습격하여 몇 개의 목책을 평정하였다.
적이 돌아와 공격하니, 북위 병사들이 대패하여 최연백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卒하였다.
이에 적의 형세가 더욱 성대해졌는데 외방에서 조정으로 들어온 신하들이 모두 적의 병력이 미약하다고 말하여 〈호태후를〉 기쁘게 하며 아첨하기만을 구하고, 조정에 增兵을 요청하는 장수에게 이따금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다.
【綱】 5월에 梁나라 豫州刺史 夷陵侯 裴邃가 卒하였다.
【目】 裴邃는 침착하고 지모와 책략이 있어서 정사를 함에 관대하고 밝으니, 將吏들은 그를 아끼면서도 꺼려하였다.注+① 思(思慮)는 去聲이다. 배수가 卒하자 梁나라가 夏侯亶을 裴邃의 후임을 삼았다.
【綱】 梁나라 사람이 小劔을 포위하였는데 北魏가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目】 梁나라 益州刺史 臨汝侯 蕭淵猷가 그의 장수 樊文熾와 蕭世澄 등을 보내서 병사를 거느리고 北魏 長史 和安을 小劔에서 포위하였는데, 북위 益州刺史 邴虯가 統軍 胡小虎를 보내서 구원하였다.注+① 邴虯는 음이 丙求이니, 姓名이다.
번문치가 습격하여 호소호를 사로잡고, 호소호에게 화안을 설득하여 항복하도록 하였는데, 호소호가 멀리에서 화안에게 말하기를 “내가 대비하지 못하여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들의 병력을 보건대 매우 말할 거리도 못 되니, 노력하여 견고하게 지켜라. 魏行臺의 구원병이 이미 이르렀다.”라고 하였다.注+② 魏行臺는 魏子建이다. 호소호의 말이 아직 끝나기 전에 양나라 軍士들이 그를 죽였다.
북위 軍司 淳于誕이 소검을 구원하니, 번문치가 목책을 龍鬚山에 설치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았다. 순우탄이 몰래 壯士를 모집하여 밤에 번문치의 목책에 불을 지르자 양나라 군대는 돌아가는 길이 끊어진 것을 바라보고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순우탄이 승세를 타고 공격하니, 번문치가 대패하여 간신히 자신만 탈출하여 벗어났다.
소세징 등 12명의 장군을 사로잡으니, 목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綱】 6월에 梁나라 豫章王 蕭綜이 배반하여 北魏에 투항하니, 북위의 군사가 彭城에 들어가서 蕭綜을 세워 丹楊王으로 삼고 이름을 고쳐 蕭贊이라고 하였다.
【目】 예전에 梁主(蕭衍)가 齊나라 東昏侯(蕭寶卷)의 寵姬 吳淑媛을 받아들여서 7개월 후에 蕭綜을 낳으니, 宮中에서 대부분 〈소종이 동혼후의 아들이라고〉 의심하였다.注+① 魏 文帝(曹丕)가 淑媛을 두었는데, 宋나라 明帝(劉彧)가 淑媛을 九嬪의 우두머리로 삼았고, 齊나라와 梁나라가 인습하였다.
오숙원이 총애가 쇠퇴하자 원망하여 소종에게 말하기를 “너는 7개월 만에 태어난 아이이니 어찌 여러 皇子들과 비교하겠는가. 그러나 너는 차례가 太子의 다음이니 행여 富貴를 보존하고 누설하지 말라.”라고 하고, 소종과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注+② 第는 ≪南史≫ 〈蕭綜傳〉에 ‘弟(동생)’로 되어 있다. ≪資治通鑑≫의 一本에도 또한 ‘弟’로 되어 있다.
소종이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의심하여 밤에 靜室(조용한 방)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적에 앉아서 사사로이 제나라의 七廟에 제사를 올리고注+③ 席은 거적이다. 槁는 볏짚이다. 볏짚으로 자리를 만드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을 보인 것이다. 옛날에 죄가 있는 자는 거적 위에 앉아서 물을 마셨다. 變服 차림으로 曲阿에 이르러서 제나라 太宗(蕭鸞)의 陵에 절을 하였다.注+④ 齊나라에는 太宗이 없으니, 마땅히 高宗(蕭鸞)이 되어야 한다.
俗說에 살을 베어낸 피를 죽은 사람의 뼈에 떨어뜨려서 피가 뼛속에 배어들면 이는 父子 관계라고 하였는데, 드디어 남모르게 동혼후의 무덤을 발굴하고, 아울러 자신이 한 남자를 죽여서 시험해보니, 〈자기 피는 배어들고 죽인 남자의 피는 배어들지 않아서〉 모두 속설이 검증되었다.注+⑤ 瀝은 음이 歷이니, 물방울이다. 滲(배다)은 所禁의 切이다. 이로 말미암아 항상 이반할 뜻을 품어서 오로지 시기의 변화를 엿보았다.
소종은 勇力이 있어서 손으로 달리는 말을 제압할 수 있었고, 재물을 경시하며 선비를 좋아하여 자주 변방에 임명해줄 것을 요구하자, 梁主가 아직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항상 内齋의 바닥에 모래를 펴놓고 종일 맨발로 다녀서 발바닥에 두꺼운 살가죽이 생기고 하루에 3백 리를 갈 수 있었다.注+⑥ 胝는 音이 知이니, 두꺼운 살가죽이다. 또 소종이 蕭寳寅에게 사자를 보내 안부를 묻고서 소보인을 叔父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알고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目】 蕭綜이 彭城에 있을 때 北魏의 臨淮王 元彧이 군사로 팽성을 압박하여 勝負가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았다. 梁主(蕭衍)는 소종이 패망할 것을 염려하여 소종에게 칙령을 내려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게 하였다.
소종은 다시 북쪽 변방으로 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원욱에게 항복한다는 문서를 보내니, 북위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믿지 못하였다.
원욱이 사람을 뽑아서 소종의 군대에 들어가서 虛實을 조사하여 밝히려고 하였는데, 감히 가겠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監軍御史 鹿悆가 가기를 청하고注+① 悆는 음이 預이며, 鹿悆는 姓名이다. 單騎로 곧바로 彭城을 향하여 달려가다가 소종의 군대에게 붙잡혔다. 〈梁나라 사람들이〉 오게 된 상황을 물었는데, 녹여가 말하기를 “임회왕께서 나를 보낸 것은 交易하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소종이 듣고 成景儁 등에게 말하기를 注+② 規는 도모함이다. 反(회복하다)은 음이 飜이다. 장차 그 虛實을 살피려 했기 때문에 측근을 원략의 使者라 하여 북위의 軍中에 들어가서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렀다.
지금 그 사람이 과연 왔으니,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원략이 질병으로 深室에 있다고 하고, 북위에서 온 사람을 불러 문 밖에 오게 하여 사람을 시켜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目】 蕭綜이 또 심복 梁話를 보내 鹿悆를 맞이하여 은밀히 자신의 의도와 상황을 녹여에게 말해주었다.注+① 意는 蕭綜이 항복하려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狀은 成景儁과 함께 속여서 도모한 상황을 고하는 것이다.
양화는 마침내 녹여를 어떤 곳에 데리고 가서 한 사람(成景儁)을 방 안에서 나오게 하여, 元略을 가장하여 뜻을 전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그대를 불러서 고향의 일을 듣고자 하였는데, 저녁에 병이 나서 만나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녹여가 말하기를 “일찍 통지를 받들어서 험난함을 무릅쓰고 삼가 달려왔는데 뵙지를 못하니, 마음속으로 불안했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작별하고 물러갔다.注+② 祗는 공경한다는 뜻이다. “反側”은 불안하다는 뜻이다.
녹여가 돌아갈 때 길에서 다시 양화와 함께 盟約을 鞏固히 하니, 소종이 마침내 양화와 함께 밤에 원욱의 군대로 가서 투항하였다.
아침이 되자 소종의 殿閣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北魏 군대가 호통치기를 “너의 豫章王(소종)이 어젯밤에 이미 와서 우리 軍中에 있으니, 너희들은 아직도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하였다. 성안에서 소종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니, 군사들은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북위 사람이 彭城에 들어가서 승세를 타고 梁나라 군사를 추격하여 다시 여러 개 성을 빼앗고 宿預에 이르렀다가 돌아오니, 장수와 士卒 중에 죽은 자가 열 명 가운데 7, 8명이 되었고, 오직 陳慶之가 거느린 부대만 돌아왔다.
梁主(蕭衍)는 소종이 항복했다는 것을 듣고 놀라워하였다. 有司가 아뢰어 소종의 爵位와 封土를 빼았고 에서 제명하였다.
【目】 西豐侯 蕭正德이 뜻과 행실을 고치지 않고, 蕭綜의 북벌을 따라갈 적에 군대를 버리고 갑자기 돌아오자, 또한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작위를 깎았지만 얼마 뒤에 모두 사면하였다.
소종이 洛陽에 이르러서 魏主(元詡)를 뵙고 다시 관사에 나가서 東昏侯(蕭寶卷)를 위하여 애도하는 예를 거행하고 斬衰 三年服을 입었다. 소종을 司空에 임명하고 丹楊王에 봉하고 이름을 고쳐 蕭贊이라고 하였다.
소종의 長史 江革과 司馬 祖暅之가 모두 북위에 포로로 잡혔는데, 安豐王 元延明이 그들의 才名을 듣고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자 강혁이 발에 병이 있다고 핑계 대고 절하지 않았다. 원연명이 조긍지에게 〈欹器銘〉을 지으라고 하였는데 강혁이 조환지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注+① ≪孔子家語≫에 “孔子가 魯나라 桓公의 사당에 欹器(한쪽으로 기울게 만든 그릇)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자가 사당지기에게 묻기를 ‘저것은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입니다.’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도 宥坐의 그릇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속이 비면 기울고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서며, 가득 채우면 엎어진다고 합니다. 明君이 지극한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항상 좌석의 곁에 비치해두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원연명이 강혁에게 寺碑를 지으라고 하였는데 강혁이 사양하자 원연명이 막 그를 때리려고 하였다.
강혁이 엄한 얼굴빛을 하고 말하기를 “나 강혁은 나이가 60이라, 〈지금〉 죽는 것이 다행이다. 맹세하건데 남을 위하여 붓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자, 원연명은 굽힐 수 없는 것을 알고 마침내 중지하였다.
강혁에게 매일 현미 세 되를 지급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하게 할 뿐이었다.注+② “脫粟”은 좁쌀[粟米]의 거친 것인데 겨우 그 껍질을 벗긴 것을 말한다. 梁主가 은밀히 夏侯亶을 불러 돌아오게 하여 合肥에서 전쟁을 그치고 淮河의 방죽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다시 進攻하게 하였다.
【綱】 西部 鐵勒이 北魏에 항복하니 북위의 廣陽王 元深이 破六韓拔陵을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그의 군사 20만 명을 항복시켰다.
【目】 破六韓拔陵이 五原에서 北魏의 廣陽王 元深을 포위하였는데 軍主 賀拔勝이 출전하니 賊이 조금 후퇴하였다. 원심이 군사를 거두어 朔州로 향하게 할 때에 하발승이 항상 후군이 되었다.注+① 北魏는 懷朔鎭을 朔州로 삼았다.
雲州刺史 費穆이 離散한 군인들을 불러 按撫하여 사면으로 적을 막았다. 당시 북위 북쪽 변경의 州鎭이 모두 함몰되었는데 오직 雲中 한 城이 홀로 오래 보존되었다.
援軍이 오지 않고 양식과 무기가 모두 떨어졌기 때문에 비목이 城을 버리고 남쪽 秀容에 있는 爾朱榮에게로 도주하였다.
于謹이 원심에게 말하기를 “지금에 도적들이 봉기하니 오로지 무력을 사용하여 이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 우근이 청하오니 大王의 威命을 받들어 적들에게 禍福으로 타이르면 거의 離間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원심이 허락하였다.
우근이 여러 나라 말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單騎로 배반한 胡人의 陣營에 나아가서 그 酋長을 만나보고 은덕과 신의를 열어 보였다.
이에 西部 鐵勒 酋長 乜列河(먀열하) 등이 3만여 戶를 거느리고서 원심에게 나아가 항복하니,注+② 乜는 母野의 切이니, 오랑캐 姓이다. 원심이 군대를 이끌고 먀열하를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우근이 말하기를 “파륙한발릉의 병력이 매우 성대하기 때문에 먀열하 등이 와서 항복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병사를 이끌고 邀擊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먼저 險要한 곳을 점거하면 대적하기 쉽지 않습니다.
먀열하를 그에게 먹이로 주는 것만 못하고 복병을 두어 그를 기다리게 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원심이 그의 말을 따랐다.
파륙한발릉이 과연 병사를 이끌고 먀열하를 요격하여 먀열하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는데, 〈원심의〉 복병이 발동하자 파륙한발릉이 대패하였다. 이에 〈원심이〉 먀열하의 部衆을 얻어 다시 돌아갔다.
柔然의 頭兵可汗이 파륙한발릉을 크게 격파하니 파륙한발릉이 유연의 두병가한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서 黃河를 건너갈 적에 前後로 항복하여 귀부하는 자가 20만 명이었다.注+③ 이 河는 北河를 말한다.
원심이 行臺 元纂과 함께 조정에 表를 올리기를 “恒州 북쪽에 따로 郡縣을 세워서 降戶를 安置하고 편의에 따라 진휼해주어 그들의 반란하려는 마음을 평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북위 조정에서 따르지 않고 조서를 내려 冀州ㆍ定州ㆍ瀛州 3州에 나누어 살게 하고 나아가 생활을 하게 하자, 원심이 원찬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다시 乞活(流民)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注+
【綱】 가을 8월에 北魏의 柔玄鎭 백성 杜洛周가 上谷에서 반란하였는데, 북위가 군대를 보내 토벌하였다.
【目】 杜洛周가 반란을 일으키니, 高歡ㆍ蔡儁ㆍ尉景ㆍ段榮ㆍ彭樂(팽락)이 모두 그를 따랐다. 北魏는 常景을 行臺로 삼아서 都督 元譚과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注+① 常景은 常爽의 손자이다.
【綱】 겨울 12월에 北魏 荆州ㆍ郢州의 여러 蠻族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북위가 토벌하여 물리쳤다. 梁나라가 북위의 順陽과 馬圈을 빼앗았다.
【目】 北魏는 한창 西荆州ㆍ北荆州와 西郢州의 여러 蠻族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注+① 西荊은 上洛에 치소가 있고, 北荊은 襄城에 치소가 있고, 西郢은 汝南 眞陽縣에 치소가 있다. 襄城을 침략하고 險要한 곳을 주둔하여 점거하니, 도로가 통하지 않았다.
만족들은 梁나라 장군 曹義宗 등을 인도하여 북위의 荆州를 포위하였는데,注+② 이 荊州는 穰城에 치소가 있다. 북위가 臨淮王 元彧으로 교체하여 魯陽의 만족을 토벌하고 辛雄을 行臺左丞으로 삼아 葉城(섭성)으로 가게 하였다.注+③ 葉은 式涉의 切이다. 葉城은 당시에 襄州의 치소가 되었으니, 이는 바로 漢나라 南陽郡 葉縣城이다. 그리고 별도로 裴衍과 王羆를 보내어 武關에서 출병해 荆州를 救援하게 하였다.
배연 등이 아직 도착하기 전에 원욱의 군대가 이미 汝水 가에 주둔하였다. 만족의 침입을 당한 州郡에서 다투어 찾아와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자注+④ “汝上”은 汝水의 가이다. 원욱은 황제께서 지시한 노정과는 다르다고 하여 그것에 응답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신웅이 말하기를 “왕께서 閫外(대궐 밖)에서 대장기를 잡으셨으니 〈장군이 오로지 결정해야 합니다.〉 승리할 가능성을 보면 진군해야 하니, 어찌 길이 다름을 논한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원욱이 후에 득실의 책임을 염려하여 신웅에게 尙書行臺의 符令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注+⑤ 符는 尙書行臺의 符令이다. 신웅이 마침내 원욱의 군대에 부령을 내려서 속히 가서 蠻人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여러 만족들은 원욱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과연 흩어져 달아났다.
【目】 辛雄이 상소하기를 “무릇 사람이 전쟁에 임해 자신을 잊고서 시퍼런 칼날을 맞아도 거리낌이 없는 것은, 첫째는 榮華로운 이름을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큰 포상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고, 셋째는 刑罰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넷째는 화란을 피하는 것이니, 이 몇 가지 일이 아니면 비록 聖王이라도 신하를 부릴 수 없고, 자애로운 아비라도 자식을 격려할 수 없습니다.
明主는 깊이 그 실정을 잘 알기 때문에 상을 반드시 행하고 벌을 반드시 확실하게 하여 親疎ㆍ貴賤ㆍ勇怯ㆍ賢愚로 하여금 鍾鼓의 소리를 듣고 줄지어 선 旌旗를 보고 奮激하여 敵陣으로 다투어 달려가게 하니, 〈이 적진으로 달려가는 군사들이〉 어찌 오래 살기를 싫어하고 빨리 죽기를 즐겨서 그러하겠습니까. 利害가 눈앞에 걸려 있어서 그만두려고 해도 할 수 없을 뿐입니다.注+① 懕(싫어하다)은 厭과 같다.
과 남쪽 蠻左 지역의 반란이 이미 數年을 지냈는데注+② 宋나라 이래로 豫部의 여러 蠻族을 대체로 ‘蠻左’라고 하고, 설치한 蠻郡을 ‘左郡’이라고 하였다. 적을 막아내는 군사는 패배가 많고 승리가 적으니, 그 이유를 살펴보면 모두 賞罰이 분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陛下께서 비록 밝은 조서를 내려서 상을 주는 때를 늦추지는 않으셨지만 將士의 공훈이 일 년이 지나도록 결정되지 않았고 군대에서 도망간 군졸은 편안히 집에 있습니다.注+③ “歷稔”은 歷年이라는 말과 같으니, 1년에 다섯 가지 곡식이 한 번 익으므로, 年으로 稔을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절의가 있는 선비는 권면해 사모할 것이 없고 용렬한 무리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군사들은 전진하여 적을 공격하면 죽음은 가까이 있고 포상은 멀리 있으며, 후퇴하여 도망해 흩어지면 몸은 온전히 할 수 있고 죄는 없습니다.注+④ 賖는 멀다는 뜻이다. 이것이 적을 바라보고 도망해 흩어져서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號令을 반드시 확실하게 하고 賞罰을 반드시 시행하게 하시면 군대의 위엄이 반드시 매우 성대해질 것이고 盗賊이 반드시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갔으나, 살피지 않았다.注+⑤ 張은 음이 漲이며, 매우 성대함이다.
曹義宗 등이 北魏의 順陽과 馬圈을 빼앗았다.
【綱】 梁나라 邵陵王 蕭綸이 죄가 있어서 관직을 파면하고 작위와 봉지를 삭탈하였다.
【目】 蕭綸이 南徐州의 일을 대행하여注+① 蕭綸은 梁主(蕭衍)의 아들이다. 불법을 자행하였다.
소륜이 시장과 마을에서 노닐었는데, 䱇魚를 파는 자에게 묻기를 “刺史는 어떠한가?”라고 하자,注+② 䱇은 鱓과 같고, 市演의 切이다. 鱓魚는 뱀과 비슷하다. 대답하기를 “포학하고 조급합니다.”라고 하였다. 소륜이 노하여 그에게 䱇魚를 삼키게 하여 죽이니,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길에서 만나면 곁눈질을 하였다.
소륜이 일찍이 喪車를 만났을 적에 소륜이 孝子(喪主)가 입고 있는 옷을 빼앗아 입자 효자가 포복하며 울부짖었다. 가 소륜의 일을 보고하자 梁主(蕭衍)가 소륜을 질책하였는데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 이에 후임을 보냈다.
그러자 소륜이 梁主와 비슷한 작고 메마른 노인 한 명을 잡아와서 곤룡포와 면류관을 씌우고 그를 높은 곳에 앉게 하여 임금으로 삼아 조회를 하고 스스로 죄가 없다고 진술하다가 그를 자리에서 나오게 하여 그의 옷을 벗기고 뜰 위에서 그를 때렸다.注+③ 剝은 벗긴다는 뜻이다. 褫는 敕紙의 切이니, 옷을 벗김이다.
梁主는 소륜이 도망갈까 염려하여 禁衛兵을 보내 소륜을 잡아오게 하여 죽음을 내리려 하였는데, 太子 蕭統이 눈물을 흘리며 굳게 간언하자, 마침내 소륜의 관직을 파면하고 작위와 봉지를 빼앗았다.
【綱】 北魏의 山胡인 劉蠡升이 반란하였다.注+① 山胡는 곧 汾州의 稽胡이다.


역주
역주1 (典)[興] : 저본에는 ‘典’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興’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千牛刀 : 제왕이 사용하는 칼로, ≪莊子≫ 〈養生主〉의 천 마리의 소를 해체해도 칼날이 무뎌지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역주3 魏元叉 解領軍 :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領軍將軍에서 해임되자 元叉의 伏誅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霍氏(霍光 가문)를 복주하려 할 적에 먼저 ‘그의 주둔 군대를 해산하였다.[罷其屯兵]’라고 기록하였고(漢 宣帝 地節 3년(B.C. 67)) 元叉를 복주하려 할 적에 먼저 ‘영군장군에서 해임하였다.[解領軍]’라고 기록하였으니(이해(525)) 모두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特筆也 領軍解 而叉之伏誅决矣 是故霍氏之將誅也 先書罷其屯兵(漢宣帝地節三年) 元叉之將誅也 先書解領軍(是年) 皆特筆也]” ≪書法≫
역주4 호태후가……고하니 : 저본의 원문에는 “太后有忿恚言 皆以告叉”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는 “태후가 분개하는 마음이 있어서 〈황제가 常住하는〉 顯陽殿에 왕래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모두 元叉에게 고하였고, 황제가 원차를 대면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태후가 출가하기를 원하니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매일 네댓 번은 든다고 말하였다.[太后有忿恚 欲得往來顯陽之言 皆以告叉 對叉流涕 敍太后欲出家 憂怖之心日有數四]”라고 되어 있다.
역주5 樂廣의……보인다 : 樂廣의 딸이 成都王 司馬穎의 왕비가 되었는데, 혹자가 악광을 太尉 司馬乂에게 참소하자, 사마예가 악광에게 물으니, 악광이 정신과 얼굴빛을 조금도 변치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내 어찌 다섯 아들로 한 딸을 바꾸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딸 하나의 목숨 때문에 사마영에게 붙어서 자기 다섯 아들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사마예가 여전히 의심하자 악광은 근심하다 죽었다.(≪資治通鑑綱目≫ 晉 孝帝 永興 원년(304))
역주6 梁豫章王綜……更名贊 : “梁主는 德에 힘쓰지 않고 멀리 침략함에 힘써서 반란한 신하를 불러들이고 또 자기 아들을 總師(최고 지휘관)로 삼아 변방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 아들도 반란하여 적국의 경내로 들어갔으니 얼마나 그 응보가 빠른 것인가. 또 대중을 통솔하는 데에는 반드시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해야 하는데 어찌 아끼는 자를 사사로이 써서 타인을 쓸 수 없다고 의심할 수 있는가. 마침내 叛心을 품은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니,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사실에 의거하여 기록하여 후세의 사람들 중에 자기 자제들을 사사로이 등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살펴볼 수 있게 한 것이다.[梁主不務德而勤遠略 招納叛臣 又使其子總師臨邊 其子亦叛入敵境 何其報效之速耶 且夫統率大衆 必銓擇人才而用之 烏可私其所愛 而疑他人之不可用乎 卒之持叛之人 乃其所愛之子 綱目據事書之 後之人欲私其子弟者 可以觀矣]” ≪發明≫
역주7 나는……의심하였는데 : 北魏 正光 원년(520)에 북위 相州刺史 中山王 元熙가 병사를 일으켜 元叉를 토벌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자 원희의 아들 元略이 梁나라로 도망가니, 양나라는 원략을 중산왕에 봉하였다. 普通 6년(525)에 원략이 彭城 남쪽에서 북위 安樂王 元鑒을 공격하였는데 패하였고 이틈을 노리고 元法僧이 원감을 격파하였다. 이후 梁나라가 豫章王 蕭綜을 보내서 원법승을 대신해서 徐州를 담당하게 하였고 원법승 등은 모두 建康으로 갔다. 지금 소종은 원략이 남쪽으로 간 것을 틈타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8 屬籍 : 왕실의 족보이다.
역주9 宥坐의 그릇 : 옛날의 임금들이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좌석의 오른쪽에 비치해두고 항상 보던 그릇이다.
역주10 (列)[此]河謂(此)[北]河也 : 저본에는 ‘列河謂此河也’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此河謂北河也’로 바로잡았다.
역주11 乞活……보인다 : 光熙 원년(306)에 幷州에 기근이 들어서 북쪽 오랑캐(胡寇)에게 자주 침략을 당하니, 관리와 백성 만여 명이 司馬騰을 따라 冀州로 가서 먹고 살 길을 모색하니, 이들을 ‘乞活’이라고 하였다.
역주12 西北……있으니 : 서쪽에는 莫折念生의 반란이 있고, 북쪽에는 破六韓拔陵의 반란이 있었다.
역주13 秦ㆍ隴의 지역 : 莫折念生이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다.
역주14 (亡)[忘] : 저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忘’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5 (主)[王] : 저본에는 ‘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籖帥 : 官名으로, 典簽 혹은 典簽帥라고도 한다. 南朝 때에 諸王이 외방으로 나가면 朝廷에서 典簽을 파견하여 보좌케 하면서 諸王의 행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權力이 매우 크기 때문에 簽帥라고 일컬었다.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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