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劉騰이 旣卒에 胡后及魏主左右防衛微緩하다 元叉가 亦自寛하여 時出遊不返이어늘
太后知之하고 對魏主하여 謂群臣曰 今隔絕我母子하여 不聽往來하니 復何用我爲리오 我當出家하여 修道於閑居寺耳라하고
因欲自下髪이어늘 魏主及群臣이 叩頭하여 泣涕苦請한대 太后聲色이 愈厲하다
魏主가 乃宿於嘉福殿하여 遂與太后密謀黜叉하다 然魏主深匿形迹한대 太后有忿恚言하여 皆以告叉하니 叉殊不以爲疑라 於是二宮無復禁礙하더라
丞相高陽王雍이 雖位居叉上而深畏憚之러니 會太后가 與魏主로 遊洛水어늘 雍邀二宮幸其第하여 相與定圖叉之計하다 於是에
太后가 謂叉曰 元郎若忠於朝廷하여 無反心이면 何故不去領軍하여 以餘官輔政가하니 叉甚懼하여 乃求解領軍이어늘 許之하다
目
淸河國郎中令韓子熙
가 上書爲淸河王懌訟寃
하고 乞誅叉等
注+① 子熙, 麒麟之孫也.한대 太后命發騰墓
하여 散其骨
하고 籍没家貲
하며 盡殺其養子
하고 侯剛亦坐黜
이라가 尋卒於家
하다 唯叉
가 以妹夫
라 故未忍誅
러라
先是에 黄門侍郎元順以剛直忤叉意하여 出爲齊州刺史러니 太后가 徵還爲侍中하니라
侍坐於太后라가 順이 曰 陛下奈何以一妹之故로 不正元叉之罪하여 使天下로 不得伸其怨憤이리잇고한대 太后가 嘿然하더라 順은 澄之子也라
未幾에 有告叉가 謀誘六鎭降戶하여 反於定州라한대 太后가 猶未忍殺이러니
群臣이 固執不已하고 魏主가 亦以爲言한대 乃賜叉死하다 江陽王繼가 廢於家病卒하다
太后
가 頗事粧飾
하고 數出遊
라 元順
이 面諫曰 禮
에 婦人
이 夫没
에 自稱未亡人
라하고 首去珠玉
하며 衣不文彩
어늘 陛下
가 母臨天下
하고 年垂不惑
이어늘 修飾過甚
하니 何以儀刑後世
注+② 論語 “四十而不惑.”리오
太后가 慚而還하여 召順責之曰 千里相徵이 豈欲衆中見辱邪아 順이 曰 陛下가 不畏天下之笑而恥臣之一言乎아
順
이 與穆紹同直
이러니 醉入其寝
한대 紹擁被而起
하여 正色讓順曰 身二十年侍中
에 與卿先君
으로 亟連職事
注+③ 亟, 數也.하니 縱卿
이 方進用
이나 何宜相排突也
요
目
初
에 鄭儼
이 爲胡國珍參軍
하여 私得幸於太后
注+① 儼, 羲之兄孫也.러니 至是
하여 拜中書舍人領嘗食典御
하여 晝夜禁中
하다
每休沐에 太后가 常遣宦者隨之하니 儼이 見其妻에 唯得言家事러라
徐紇이 先以諂事趙脩로 坐徙枹罕이러니 後又諂事淸河王懌라가 懌死에 復諂事元叉러니
太后가 以紇爲懌所厚라하여 亦召爲中書舍人하니 紇이 又諂事鄭儼하니
儼
이 以紇有智數
하여 仗以爲謀主
注+② 仗, 憑也.하고 紇
이 以儼
이 有内寵
이라하여 傾身承接
하니 共相表裏
하여 勢傾内外
라 號爲徐鄭
이라하더라
儼은 累遷至中書令하고 紇은 累遷至給事黄門侍郎하여 仍領舍人摠攝中書門下之事하여 軍國詔令이 莫不由之하더라
紇
이 有機辯彊力
하여 終日治事
에 略無休息
호되 不以爲勞
하다 時有急詔
에 令數吏執筆
하여 人别占之
하여 造次俱成
호되 不失事理
注+③ 占, 章艶切. 隱度其辭, 口以授人曰口占.러라
然無經國大體하고 專好小數하여 見人矯爲恭謹하니 遠近輻湊附之하더라
目
胡琛
이 據高平
하여 遣万俟醜奴宿勤明逹等
하여 冦魏涇州
注+① 高平, 鎭名. 万俟, 音墨, 其虜複姓, 醜奴其名, 其先匈奴之別也. 宿勤, 亦虜複姓, 明逹其名.어늘 將軍盧祖遷伊甕生
이 討之
라가 不克
하다
蕭寳寅崔延伯이 旣破莫折天生하고 引兵會祖遷等於安定하니 軍威甚盛이라
醜奴가 時以輕騎挑戰하여 兵未交에 輒委走하니 延伯이 恃勇하여 乘勝擊之러니
將戰에 有賊數百騎持文書詐降하니 寳寅延伯이 未及閲視에 宿勤明逹이 引兵至하여 與降賊腹背擊之하니 延伯이 大敗라 寳寅이 退保安定하다
延伯이 恥其敗하여 乃繕甲兵募驍勇하여 獨出襲賊하여 平其數柵이러니
於是에 賊勢가 益盛한대 而群臣自外來者가 皆言賊弱이라하여 以求悅媚하고 將帥求益兵者往往不與하다
目
綜
이 又遣腹心梁話迎悆
하여 密以意狀語之
注+① 意者, 傳綜欲降之意. 狀者, 告以詭與成景儁設謀之狀.하니
乃引至一所하여 令一人自室中出하여 爲元略致意曰 我昔相呼하여 欲聞鄉事러니 晚來疾作하여 不獲相見이라하니
悆曰 早奉音旨
하여 冒險祗赴
러니 不得瞻見
하니 内懷反側
이라하고 遂辭退
注+② 祗, 敬也. 反側, 不安也.하다
悆還할새 於路復與梁話申固盟約하니 綜이 遂與話夜投彧軍하다
及旦에 齋閤이 不開라 魏軍이 呼曰 汝豫章王이 昨夜已來하여 在我軍中하니 汝尙何오 爲城中求王不獲하니 軍遂大潰라
魏人이 入彭城하여 乘勝追擊梁兵復取諸城하고 至宿預而還하니 將士死者가 什七八러라 唯陳慶之帥所部還하니
梁主가 聞之하고 驚駭하더라 有司가 奏削綜爵土絶屬籍하니라
目
破六韓拔陵
이 圍魏廣陽王深於五原
이어늘 軍主賀拔勝
이 出戰
하니 賊
이 稍退
라 深
이 拔軍向朔州
할새 勝
이 常爲殿
注+① 魏以懷朔鎭爲朔州.이러라
雲州刺史費穆이 招撫離散하여 四面拒敵하니 時에 北境州鎭이 皆没호되 唯雲中一城이 獨存久之하다
援軍이 不至하고 糧仗이 俱盡이라 穆이 棄城하고 南奔爾朱榮於秀容하다
于謹言於深曰 今에 冦盗蠭起하니 未易専用武力勝也라 謹이 請奉大王之威命하여 諭以禍福하면 庶幾可離니이다하니 許之하다
謹이 通諸國語라 乃單騎詣叛胡營하여 見其酋長하고 開示恩信이니
於是
에 西部鐵勒酋長乜列河等
이 將三萬餘戶
하여 詣深降
注+② 乜, 母野切, 虜姓也.하니 深
이 欲引兵迎之
어늘
謹이 曰 破六韓拔陵이 兵勢甚盛이라 聞乜列河等來降하면 必引兵邀之하여 若先據險要면 未易敵也니
不若以乜列河餌之하고 而伏兵이 以待之면 必可破也하다 深이 從之러니
拔陵이 果引兵邀擊乜列河하여 盡俘其衆이어늘 伏兵發한대 拔陵이 大敗라 復得乜列河之衆而還하다
柔然頭兵可汗
이 大破破六韓拔陵
하니 拔陵
이 避柔然
하여 南徙渡河
할새 前後降附者
가 二十萬人
注+③ .이라
深이 與行臺元纂表호되 乞於恒州北에 别立郡縣하여 安置降戶하고 隨宜賑賫하여 息其亂心이라하다
不從
하고 詔分處之於冀定瀛三州
하여 就食
한대 深
이 謂纂曰 此輩復爲乞活矣
注+④ 乞活, 事見晉惠帝光熙元年.로다
目
【目】 莫折天生이 黑水에 주둔하였는데,
注+① ≪水經註≫에 “就水는 南山 就谷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黑水와 합한다. 흑수의 상류는 三泉과 합하는데, 취수의 右岸에서 三泉이 기이하게 발원하는데 하나의 큰 강으로 귀결되어 북쪽으로 흘러 취수에 모이고, 취수는 또 북쪽으로 흘러 渭水에 유입된다.” 하였다. 北魏는 崔延伯을 都督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할 때에 行臺 蕭寳寅과 함께 馬嵬에 주둔하였다.
注+② 嵬는 五回의 切이다. ≪輿地記≫에 “馬嵬陂는 京兆 興平縣 서쪽 23리에 있다.” 하였다.
최연백이 평소에 날래고 용감함이 있었기 때문에 소보인이 그에게 싸우라고 재촉하였는데,
注+③ 趣(재촉하다)은 促으로 읽는다. 최연백이 말하기를 “내일 새벽에 公을 위하여 적이 용맹한지 겁먹었는지 시험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정예 병사 수천 명을 선발하여 서쪽으로 黑水를 건너서 바로 막절천생의 군영 아래로 쳐들어갔다가 느긋이 병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막절천생이 군영을 열고 다투어 최연백을 추격하였는데 최연백의 군사의 열 배나 되었다. 최연백을 물가까지 쫓아오니, 소보인이 그것을 바라보고 안색을 잃었다.
최연백이 스스로 후군이 되어서 그들과 함께 싸우지 않고, 자기의 군대를 먼저 건너게 하였는데 군중의 대오가 엄정하니, 막절천생의 병사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소보인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崔君(최연백)의 용맹은 關羽와 張飛보다 낫다.”라고 하자,
注+④ 關․張은 關羽와 張飛를 말한다. 최연백이 말하기를 “이 賊은 저의 적수가 아니니, 明公께서는 다만 편안하게 앉아서 제가 적을 격퇴하는 것을 구경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정돈하고 출전하였는데, 자신이 사졸보다 앞장서서 적의 선봉을 무너뜨리고 將士들이 용기를 다하여 앞 다투어 전진하여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0만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는데 도망치는 자를 추격하여 小隴山에 이르니, 岐州ㆍ雍州와 隴山의 동쪽이 모두 평정되었다.
注+⑤ 隴山에는 大隴山과 小隴山이 있다. 大隴山은 淸水縣 동북쪽에 있고, 小隴山은 岐州 武都郡 南田縣 서북쪽에 있다.
將士들이 머뭇거리며 노략질을 하니, 막절천생이 드디어 隴西로 가는 길을 막았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군사들이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注+⑥ 稽는 머문다는 뜻이다.
目
【目】 北魏 劉騰이 卒한 뒤에 胡太后와 魏主(元詡)의 左右의 감시가 조금 완화되었다. 元叉 자신 또한 느긋해져서 때로 밖에 나가 유람하고 돌아오지 않자,
호태후가 이런 사실을 알고 魏主를 대면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 母子를 막아서 往來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다시 내가 어디에 쓸 데가 있겠는가. 나는 마땅히 出家하여 閑居寺에서 도를 닦을 뿐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스스로 삭발을 하려고 하였는데, 魏主와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서 눈물을 흘리며 애써 요청하자, 호태후의 말과 안색이 더욱 거세졌다.
魏主가 마침내 嘉福殿에 묵으면서 드디어 호태후와 함께 元叉를 쫓아낼 것을 은밀하게 모의하였다. 그러나 魏主는 자신의 내심을 깊이 숨기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원차는 전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二宮(胡太后와 魏主) 사이에 다시 금지하고 가로막음이 없었다.
丞相 高陽王 元雍이 비록 지위가 원차의 위에 있었지만 원차를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때마침 호태후가 魏主와 洛水에서 유람하였는데, 원옹이 二宮을 맞이하여 자기 집으로 모셔서 함께 원차를 도모할 계획을 정하였다.
이에 호태후가 원차에게 말하기를 “元郎(원차)이 만약 조정에 충성을 하여 反心이 없다면 어찌하여 領軍將軍을 사임하고 다른 관직으로 정사를 돕지 않는가.”라고 하니, 원차가 매우 두려워하여 마침내 영군장군에서 해임시켜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目
【目】 元叉가 비록 兵權을 놓았으나 여전히 조정 内外의 일을 총괄하였기 때문에 侍中 穆紹가 胡太后에게 원차를 신속하게 제거하도록 권하였다.
注+① 穆紹는 穆亮의 아들이다.
潘嬪이 魏主(元诩)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宦官이 반빈을 설득하기를 “원차가 반빈을 해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반빈이 울면서 魏主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원차가 妾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또 장차 陛下에게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그 말을 믿어서 원차가 출궁하여 자고 오는 때를 이용하여 원차를 侍中에서 해임시켰다. 다음 날 아침에 궁중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문지기가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호태후가 마침내 다시 조정에 나와 섭정하여 조서를 내려 劉騰의 官爵을 삭탈하고, 원차를 제명하고 平民으로 삼았다.
目
【目】 淸河國 郎中令 韓子熙가 上書하여 淸河王 元懌을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고 元叉 등을 주살하기를 청하였는데,
注+① 韓子熙는 韓麒麟의 손자이다. 胡太后가 명령하여 劉騰의 무덤을 파서 그의 뼈를 흩어버리고, 그의 家産을 몰수하고 그의 養子를 다 죽였다. 侯剛 역시 연좌되어 쫓겨났다가 곧이어 집에서 卒하였다. 오직 원차가 호태후의 妹夫이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黄門侍郎 元順이 剛直하였기 때문에 원차의 뜻을 거역하고 외직으로 나가 齊州刺史가 되었더니, 호태후가 불러 돌아오게 하여 侍中을 삼았다.
호태후를 모시고 앉아 있다가 원순이 말하기를 “陛下께서는 어찌하여 한 매부의 연고로 원차의 죄를 바로잡지 않아서 천하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원망함과 분통함을 펴지 못하게 하십니까.”라고 하자, 호태후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원순은 元澄의 아들이다.
얼마 안 되어 어떤 이가 “원차가 六鎭의 항복한 戶들을 유인하여 定州에서 반란을 모의한다.”고 고발하였는데, 호태후가 여전히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였다.
신하들이 원차를 죽여야 한다고 고집하기를 그치지 않고, 魏主(元詡)도 역시 〈원차를 죽여야 한다고〉 말을 하자, 마침내 원차에게 죽음을 내렸다. 江陽王 元繼(元叉의 부친)가 폐위당하여 집에서 병으로 卒하였다.
호태후는 粧飾하는 일을 자못 일삼고 자주 밖으로 나가 놀았다. 원순이 얼굴을 맞대어 간언하기를 “禮에는, 婦人은 남편이 죽으면 스스로 未亡人이라고 칭하고, 머리에는 珠玉을 제거하며, 옷에는 무늬와 채색을 하지 않는 것을 입는데, 陛下께서는 國母로서 天下를 다스리시고, 연세가 거의 不惑(40세)에 가까우신데, 修飾함이 너무 심하시니, 무엇으로 後世 사람들을 본받게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注+② ≪論語≫ 〈爲政〉에 “마흔 살에 의혹되지 않는다.” 하였다.
호태후가 부끄러워하며 궁중으로 돌아가서 원순을 불러 꾸짖기를 “내가 너를 천 리 밖에서 불러 온 것이 어찌 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욕보이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라고 하니, 원순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天下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면서 臣의 한마디 말은 부끄러워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원순이 穆紹와 함께 숙직을 하였는데, 원순이 술에 취하여 목소의 침실에 들어가자 목소가 이불을 끌어안고 일어나서 正色하며 원순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내가 20년 동안 侍中을 지내면서 卿의 先君과 자주 職務를 함께하였소.
注+③ 亟는 자주이다. 비록 卿이 한창 重用되고 있으나 어찌 사람을 대할 때에 당돌하게 군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직책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호태후가 조서를 내려 권유하기를 오래하자 목소가 직책에 나왔다.
目
【目】 예전에 鄭儼이 胡國珍의 參軍이 되어서 사사로이 胡太后에게 총애를 받았다.
注+① 鄭儼은 鄭羲의 형의 손자이다. 이때에 이르러 中書舍人으로 임명하고, 嘗食典御를 겸하여 밤낮으로 궁중에 머물러 있었다.
휴가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호태후가 항상 환관을 보내 그를 따르게 하니, 정엄은 처를 볼 때에 오직 집안일을 말할 뿐이었다.
徐紇이 먼저 趙脩를 아첨해 섬긴 것으로 연좌되어 枹罕으로 귀양을 갔다. 뒤에 또 淸河王 元懌을 아첨해 섬기다가 원역이 죽자 다시 元叉를 아첨해 섬겼다.
호태후는 서흘이 원역에게 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여 또한 불러서 중서사인으로 삼으니, 서흘이 또 정엄을 아첨해 섬겼다.
정엄은 서흘이 지모와 술수가 있다고 하여 그를 의지하여 謀主로 삼고,
注+② 仗은 의지한다는 뜻이다. 서흘은 정엄이 호태후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몸을 굽혀 받들어 모시니, 서로 함께 表裏가 되어서 권세가 內外를 휩쓸었으므로 사람들이 부르기를 徐ㆍ鄭이라고 하였다.
정엄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中書令에 이르렀고, 서흘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給事黄門侍郎에 이르러서 중서사인을 겸직하고 中書省과 門下省의 일을 總攝하여 軍國에 관한 詔令이 그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서흘은 機智와 말재주가 있고 정력이 왕성하여 종일 사무를 처리하는 데에 조금도 휴식하지 않았지만 피로하다 여기지 않았다. 급한 조서가 있을 때에는 몇 사람의 관리에게 붓을 잡도록 명하여 사람마다 분별하여 조서의 내용을 구두로 말해주어 잠깐 동안에 모두 문서가 작성되었는데 事理를 잃지 않았다.
注+③ 占은 章艶의 切이니, 마음속으로 그 말을 헤아려서 입으로 남에게 말해주는 것을 ‘口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라를 경영하는 大體가 없고 오로지 작은 술수를 좋아하여 사람을 볼 적에는 거짓으로 공손하고 신중한 척하니, 원근 사람들이 바퀴통에 바큇살이 모이듯이 그에게 의탁하였다.
目
【目】 胡琛이 高平을 점거하여 万俟醜奴와 宿勤明逹 등을 보내서 北魏의 涇州를 침입하였는데
注+① 高平은 鎭의 이름이다. 万俟는 〈万의〉 음이 墨이고, 오랑캐의 複姓이고, 醜奴는 이름이니, 그 조상은 匈奴의 별종이다. 宿勤은 역시 오랑캐의 複姓이고, 明逹은 이름이다. 將軍 盧祖遷과 伊甕生이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蕭寳寅과 崔延伯이 莫折天生을 격파하고 나서 병사를 이끌고 노조천 등과 安定에서 회합하니 군의 위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묵사추노가 이때에 輕騎兵으로 싸움을 걸어와서 병사들이 交戰하기 전에 번번이 버리고 달아나니, 최연백이 용맹을 믿어 승세를 타고 공격하였다.
막 싸움을 하려고 할 때에 적의 수백 명의 기병이 文書를 가지고 와서 거짓으로 최연백에게 항복하였다. 소보인과 최연백이 아직 죽 훑어보지도 않았는데, 숙근명달이 병사를 이끌고 이르러서 항복한 적들과 함께 앞뒤로 공격하니, 최연백이 대패하였다. 이에 소보인은 물러나서 安定을 지켰다.
최연백은 대패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홀로 나가 적을 습격하여 몇 개의 목책을 평정하였다.
적이 돌아와 공격하니, 북위 병사들이 대패하여 최연백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卒하였다.
이에 적의 형세가 더욱 성대해졌는데 외방에서 조정으로 들어온 신하들이 모두 적의 병력이 미약하다고 말하여 〈호태후를〉 기쁘게 하며 아첨하기만을 구하고, 조정에 增兵을 요청하는 장수에게 이따금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다.
目
【目】 梁나라 益州刺史 臨汝侯 蕭淵猷가 그의 장수 樊文熾와 蕭世澄 등을 보내서 병사를 거느리고 北魏 長史 和安을 小劔에서 포위하였는데, 북위 益州刺史 邴虯가 統軍 胡小虎를 보내서 구원하였다.
注+① 邴虯는 음이 丙求이니, 姓名이다.
번문치가 습격하여 호소호를 사로잡고, 호소호에게 화안을 설득하여 항복하도록 하였는데, 호소호가 멀리에서 화안에게 말하기를 “내가 대비하지 못하여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들의 병력을 보건대 매우 말할 거리도 못 되니, 노력하여 견고하게 지켜라. 魏行臺의 구원병이 이미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注+② 魏行臺는 魏子建이다. 호소호의 말이 아직 끝나기 전에 양나라 軍士들이 그를 죽였다.
북위 軍司 淳于誕이 소검을 구원하니, 번문치가 목책을 龍鬚山에 설치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았다. 순우탄이 몰래 壯士를 모집하여 밤에 번문치의 목책에 불을 지르자 양나라 군대는 돌아가는 길이 끊어진 것을 바라보고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순우탄이 승세를 타고 공격하니, 번문치가 대패하여 간신히 자신만 탈출하여 벗어났다.
소세징 등 12명의 장군을 사로잡으니, 목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目
【目】 蕭綜이 彭城에 있을 때 北魏의 臨淮王 元彧이 군사로 팽성을 압박하여 勝負가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았다. 梁主(蕭衍)는 소종이 패망할 것을 염려하여 소종에게 칙령을 내려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게 하였다.
소종은 다시 북쪽 변방으로 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원욱에게 항복한다는 문서를 보내니, 북위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믿지 못하였다.
원욱이 사람을 뽑아서 소종의 군대에 들어가서 虛實을 조사하여 밝히려고 하였는데, 감히 가겠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監軍御史 鹿悆가 가기를 청하고
注+① 悆는 음이 預이며, 鹿悆는 姓名이다. 單騎로 곧바로 彭城을 향하여 달려가다가 소종의 군대에게 붙잡혔다. 〈梁나라 사람들이〉 오게 된 상황을 물었는데, 녹여가 말하기를 “임회왕께서 나를 보낸 것은 交易하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소종이 듣고 成景儁 등에게 말하기를
注+② 規는 도모함이다. 反(회복하다)은 음이 飜이다. 장차 그 虛實을 살피려 했기 때문에 측근을 원략의 使者라 하여 북위의 軍中에 들어가서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렀다.
지금 그 사람이 과연 왔으니,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원략이 질병으로 深室에 있다고 하고, 북위에서 온 사람을 불러 문 밖에 오게 하여 사람을 시켜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目
【目】 蕭綜이 또 심복 梁話를 보내 鹿悆를 맞이하여 은밀히 자신의 의도와 상황을 녹여에게 말해주었다.
注+① 意는 蕭綜이 항복하려는 뜻을 전하는 것이다. 狀은 成景儁과 함께 속여서 도모한 상황을 고하는 것이다.
양화는 마침내 녹여를 어떤 곳에 데리고 가서 한 사람(成景儁)을 방 안에서 나오게 하여, 元略을 가장하여 뜻을 전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그대를 불러서 고향의 일을 듣고자 하였는데, 저녁에 병이 나서 만나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녹여가 말하기를 “일찍 통지를 받들어서 험난함을 무릅쓰고 삼가 달려왔는데 뵙지를 못하니, 마음속으로 불안했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작별하고 물러갔다.
注+② 祗는 공경한다는 뜻이다. “反側”은 불안하다는 뜻이다.
녹여가 돌아갈 때 길에서 다시 양화와 함께 盟約을 鞏固히 하니, 소종이 마침내 양화와 함께 밤에 원욱의 군대로 가서 투항하였다.
아침이 되자 소종의 殿閣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北魏 군대가 호통치기를 “너의 豫章王(소종)이 어젯밤에 이미 와서 우리 軍中에 있으니, 너희들은 아직도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하였다. 성안에서 소종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니, 군사들은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북위 사람이 彭城에 들어가서 승세를 타고 梁나라 군사를 추격하여 다시 여러 개 성을 빼앗고 宿預에 이르렀다가 돌아오니, 장수와 士卒 중에 죽은 자가 열 명 가운데 7, 8명이 되었고, 오직 陳慶之가 거느린 부대만 돌아왔다.
梁主(蕭衍)는 소종이 항복했다는 것을 듣고 놀라워하였다. 有司가 아뢰어 소종의 爵位와 封土를 빼았고
에서 제명하였다.
目
【目】 西豐侯 蕭正德이 뜻과 행실을 고치지 않고, 蕭綜의 북벌을 따라갈 적에 군대를 버리고 갑자기 돌아오자, 또한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작위를 깎았지만 얼마 뒤에 모두 사면하였다.
소종이 洛陽에 이르러서 魏主(元詡)를 뵙고 다시 관사에 나가서 東昏侯(蕭寶卷)를 위하여 애도하는 예를 거행하고 斬衰 三年服을 입었다. 소종을 司空에 임명하고 丹楊王에 봉하고 이름을 고쳐 蕭贊이라고 하였다.
소종의 長史 江革과 司馬 祖暅之가 모두 북위에 포로로 잡혔는데, 安豐王 元延明이 그들의 才名을 듣고 그들을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자 강혁이 발에 병이 있다고 핑계 대고 절하지 않았다. 원연명이 조긍지에게 〈欹器銘〉을 지으라고 하였는데 강혁이 조환지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注+① ≪孔子家語≫에 “孔子가 魯나라 桓公의 사당에 欹器(한쪽으로 기울게 만든 그릇)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자가 사당지기에게 묻기를 ‘저것은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입니다.’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도 宥坐의 그릇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속이 비면 기울고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서며, 가득 채우면 엎어진다고 합니다. 明君이 지극한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항상 좌석의 곁에 비치해두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원연명이 강혁에게 寺碑를 지으라고 하였는데 강혁이 사양하자 원연명이 막 그를 때리려고 하였다.
강혁이 엄한 얼굴빛을 하고 말하기를 “나 강혁은 나이가 60이라, 〈지금〉 죽는 것이 다행이다. 맹세하건데 남을 위하여 붓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자, 원연명은 굽힐 수 없는 것을 알고 마침내 중지하였다.
강혁에게 매일 현미 세 되를 지급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하게 할 뿐이었다.
注+② “脫粟”은 좁쌀[粟米]의 거친 것인데 겨우 그 껍질을 벗긴 것을 말한다. 梁主가 은밀히 夏侯亶을 불러 돌아오게 하여 合肥에서 전쟁을 그치고 淮河의 방죽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다시 進攻하게 하였다.
目
【目】 破六韓拔陵이 五原에서 北魏의 廣陽王 元深을 포위하였는데 軍主 賀拔勝이 출전하니 賊이 조금 후퇴하였다. 원심이 군사를 거두어 朔州로 향하게 할 때에 하발승이 항상 후군이 되었다.
注+① 北魏는 懷朔鎭을 朔州로 삼았다.
雲州刺史 費穆이 離散한 군인들을 불러 按撫하여 사면으로 적을 막았다. 당시 북위 북쪽 변경의 州鎭이 모두 함몰되었는데 오직 雲中 한 城이 홀로 오래 보존되었다.
援軍이 오지 않고 양식과 무기가 모두 떨어졌기 때문에 비목이 城을 버리고 남쪽 秀容에 있는 爾朱榮에게로 도주하였다.
于謹이 원심에게 말하기를 “지금에 도적들이 봉기하니 오로지 무력을 사용하여 이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 우근이 청하오니 大王의 威命을 받들어 적들에게 禍福으로 타이르면 거의 離間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원심이 허락하였다.
우근이 여러 나라 말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單騎로 배반한 胡人의 陣營에 나아가서 그 酋長을 만나보고 은덕과 신의를 열어 보였다.
이에 西部 鐵勒 酋長 乜列河(먀열하) 등이 3만여 戶를 거느리고서 원심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注+② 乜는 母野의 切이니, 오랑캐 姓이다. 원심이 군대를 이끌고 먀열하를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우근이 말하기를 “파륙한발릉의 병력이 매우 성대하기 때문에 먀열하 등이 와서 항복한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병사를 이끌고 邀擊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먼저 險要한 곳을 점거하면 대적하기 쉽지 않습니다.
먀열하를 그에게 먹이로 주는 것만 못하고 복병을 두어 그를 기다리게 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원심이 그의 말을 따랐다.
파륙한발릉이 과연 병사를 이끌고 먀열하를 요격하여 먀열하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는데, 〈원심의〉 복병이 발동하자 파륙한발릉이 대패하였다. 이에 〈원심이〉 먀열하의 部衆을 얻어 다시 돌아갔다.
柔然의 頭兵可汗이 파륙한발릉을 크게 격파하니 파륙한발릉이 유연의 두병가한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서 黃河를 건너갈 적에 前後로 항복하여 귀부하는 자가 20만 명이었다.
注+③ 이 河는 北河를 말한다.
원심이 行臺 元纂과 함께 조정에 表를 올리기를 “恒州 북쪽에 따로 郡縣을 세워서 降戶를 安置하고 편의에 따라 진휼해주어 그들의 반란하려는 마음을 평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북위 조정에서 따르지 않고 조서를 내려 冀州ㆍ定州ㆍ瀛州 3州에 나누어 살게 하고 나아가 생활을 하게 하자, 원심이 원찬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다시 乞活(流民)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注+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