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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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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辛卯宋文帝元嘉二十八年 魏太武帝太平眞君十二年하여 盡乙巳宋明帝泰始元年 魏文成帝和平六年이라 凡十五年이라
宋元嘉二十八年이요 魏太平眞君十二年이라
春正月 魏師還하다
正月朔 魏主大會群臣於瓜歩山上하여 班爵行賞有差하다
魏人縁江舉火어늘 右衞率尹弘言於宋主曰 六夷如此하니 必走라하다 明日 果掠居民하고 焚廬舍而去注+北兵欲退, 慮南兵之追截, 故擧火以示威. 尹弘習知北人軍情, 因言於上. 自晉氏失馭, 劉石以來, 始有六夷之名.하다
胡誕世之反也 江夏王義恭等奏義康數有怨言하여 揺動民聽이라 故不逞之族 因以生心하니 請徙義康廣州注+不逞之族, 謂廢放之家不得逞志於時者也.라하다
宋主先遣使語之한대 義康曰 人生會死 吾豈愛生이리오 必爲亂階인댄 雖遠何益이리오 請死於此 恥復屢遷이라하고 竟未及往이러라
魏師在瓜步 人情恟懼 宋主慮不逞之人奉義康爲亂이러니
太子劭及武陵王駿 僕射何尙之 屢啓宜早爲之所注+駿時在彭城, 蓋馳密啓言之也.라한대 宋主乃遣中書舍人嚴龍就殺之하다
魏復取碻磝하다
宋江夏王義恭 以碻磝不可守라하여 召王玄謨還歴城이어늘 魏人追擊敗之하고 遂取碻磝하다
魏主攻盱眙하니 宋將軍臧質拒之한대 魏師退走하다
宋主聞有魏師하고 命廣陵太守劉懐之하여 逆燒城府船乗하고 盡帥其民渡江注+敵未至而先燒, 故曰逆. 乘, 去聲, 車乘也.하다
山陽太守蕭僧珍斂民入城하니 臺送粮仗하여 詣盱眙及滑臺者 以路不通하니 皆留山陽하다 僧珍又蓄陂水令滿하여 須魏人至하여 决以灌之注+須, 待也.하니 魏人過山陽 不敢留하여 因攻盱眙하다
魏主就臧質求酒한대 質封溲便與之注+溲, 疎鳩切. 便, 毗連切.하니 魏主怒하여 築長圍하여 一夕而合하고 運東山土石以填塹하고 作浮橋於君山하여 絶水陸道하고 遺質書曰
吾今所遣闘兵 盡非我國人이라 城東北是丁零與胡 南是氐羌注+國人, 謂與拓拔氏同出北荒之子孫也. 凡九十九姓.하다
設使丁零死라도 正可減常山趙郡賊注+丁零, 自翟眞叛慕容, 皆投常山․趙郡界, 阻山而居, 故云然.이요 胡死 減并州賊注+自後漢納南匈奴, 分居幷州界, 其地率皆雜處胡漢, 西河離石以西, 則皆稽胡據之爲寇.이요 氐羌死 減關中賊注+自苻․姚據關中, 其種類蕃滋, 雖其國已滅, 而其種實繁.이니 卿若殺之 無所不利注+言於魏國無所不利.라하니
質復書曰 省示하여 具悉奸懐注+省示, 省來書所示也. 悉, 詳也, 盡也.하라 爾自恃四足하여 屢犯邊境注+四足, 謂馬也.하니 王玄謨退於東하고 申坦散於西하니 爾知其所以然邪注+按王玄謨自滑臺敗退, 蕭斌使申坦據淸口. 戴延之所謂淸口在壽張縣西界安民亭南, 以水經注考之, 其地不在滑臺之西. 此當謂梁坦出上蔡之師至虎牢潰散耳.
爾獨不聞童謡之言乎 蓋卯年未至 故以二軍開飲江之路耳
寡人受命相滅 期之白登하노니 師行未遠 爾自送死 豈容復令爾生全하여 饗有桑乾哉注+古者諸侯自稱曰寡人. 質自以當藩方之任, 自稱寡人之任也. 白登山桑乾川皆在平城左右. 質言本期直指白登, 師行至淮而逢魏兵, 要當勦滅, 不容令魏主生歸, 饗有桑乾之地也.
我本不圖全이라 若天地無靈하여 力屈於爾 韲之하고 粉之하며 屠之하고 裂之라도 猶未足以謝本朝注+韲, 牋西切. 細切薑蒜謂之韲, 䃺碎米麥謂之粉. 䃺省作磨.하니
爾智識及衆力 豈能勝苻堅邪 今春雨已降하고 兵方四集하니 爾但安意攻城하고 糧乏見語하라 當出廩相貽하리라
得所送劒刀하니 欲令我揮之爾身邪
魏主大怒하여 作鐵하고 於其上施鐵鑱曰 破城得質이면 當坐之此上注+鑱, 士衫․士懺二切, 刺也, 錐也.이라하노라
質又與魏衆書曰 中諸士庻호되 佛狸見與書한대 相待如此라하라
爾等正朔之民으로 何爲自取糜滅하고 豈可不知轉禍爲福邪注+中原之民, 本稟漢晉正朔, 故謂之正朔之民. 幷冩臺格以與之云
斬佛狸首 封萬戶侯하여 賜布絹各萬匹注+臺格, 宋臺所立賞格也.하리라하다
魏人以鉤車鉤城樓어늘 城内繫以彄絙하여 數百人唱呼引之하니 車不能退 既夜 縋桶懸卒出하여 截其鉤獲之注+鉤, 鉤梯也, 所以鉤引上城者. 彄, 恪侯切, 弓弩端弦所居也. 絙, 居登切, 大索也. 謂以大索爲彄, 如弓弩彄之彄. 縋, 馳僞切, 謂置兵卒於桶中, 以繩縋之懸下城也.하다
明日 又以衝車攻城하되 城土堅密하여 毎至注+句. 頽落不過數升注+至, 謂衝車至著城身也.이라
魏人乃肉薄登城하고 分番相代하여 墮而復升하고 莫有退者하니 殺傷萬計 尸與城平이러라 凡攻之三旬하여 不拔이러니
會魏軍中多疾疫하고 或告以建康遣水軍하여 自海入淮하고 又勅彭城斷其歸路注+水軍自建康下江, 自江出海, 轉料角則入淮.라하다
二月朔 魏主燒攻具退走하다 盱眙人欲追之한대 沈璞曰 今兵不多하여 雖可固守 不可出戰이라 但整舟楫하여 示若欲北渡者하여 以速其走 計不須實行也注+示若欲北渡者, 謂示若欲自盱眙渡淮而北以追截其後者.니이다
臧質以璞城主하여 使之上露板이어늘 璞固辭하고 歸功於質하니 宋主聞하고 益嘉之注+上, 時掌切. 露板者, 書獲捷之狀, 露板上聞, 使天下悉知之也. 益嘉之, 謂已嘉璞之功, 又益嘉其讓.러라
魏師過彭城 宋江夏王義恭震懼하여 不敢擊이어늘 或告虜驅南口萬餘어늘 夕應宿安王陂 去城數十里하니 今追之 可悉得이라한대 諸將皆請行이어늘 義恭不許하다
明日 驛使至하여 勅義恭悉力急追하니 魏師已遠이라 義恭乃遣司馬檀和之向蕭城하니 魏人先已聞之하고 盡殺所驅者而去하다
注+稅, 賦也. 調, 計發也.하다
魏人凡破南兗徐兗豫青冀六州 殺掠不可勝計 丁壯者即加斬截하고 嬰兒貫于槊上하여 盤舞以爲戲하니 所過郡縣 赤地無餘
春燕歸巢於林木하다 魏之士馬死傷亦過半이라 國人皆尤之하니라
宋主毎命將出師 常授以成律交戰日時하니 是以將帥趑趄하고 莫敢自决하다
又江南白丁 輕進易退하니 此其所以敗也 自是邑里蕭條하고 元嘉之政衰矣
詔降太尉義恭爲驃騎將軍하고 鎭軍將軍駿爲北中郎將하다
魏主過彭城하여 遣語城中曰 食盡且去하니 麥熟更來라하다 及期 江夏王義恭議欲芟麥入保어늘
參軍王孝孫曰 虜不能復來 既自可保 如其更至라도 此議亦不可立이라
百姓飢饉日久하여 方春野採自資하니 一入保聚 餓死立至하리니 民知必死어늘 何可制邪 虜若必來라도 芟麥無晚이라하니
長史張暢曰 孝孫之議 實有可尋注+尋, 繹理也, 用也.이라하다
典籖董元嗣進曰 王錄事議不可奪이라하니 别駕王子夏曰 此論誠然이라하다
暢曰 芟麥移民 可謂大議 一方安危 事係於此어늘 子夏親爲州端하여 曾無異同注+親, 躬也. 州別駕居群僚之右, 故曰州端.이라가 及聞元嗣之言하얀 則懽笑酬答하여 阿意左右하니 何以事君이리오하고 請命孝孫彈之하니 義恭乃止注+録事參軍掌糾彈, 故云然.하다
三月 魏主還平城하다
魏主還平城하여 飲至告廟하고 以降民五萬餘家分置近畿注+飲至者, 告至于廟而飮酒也. 近畿, 謂環平城千里之地.하다
魏以盧度世爲中書侍郎하다
魏中書學生盧度世坐崔浩事亡命하여 匿髙陽鄭羆家注+度世, 玄之子也.하니 吏囚羆子하고 掠治之어늘 羆戒其子曰 君子殺身成仁이니 雖死不可言이니라
其子奉父命하여 吏以火爇其體호되 終不言而死러니 及魏主臨江 問宋使者曰 盧度世亡命하고 已應至彼리라 使者曰 不聞이로이다
魏主乃赦度世하니 度世自出이어늘 魏主以爲中書侍郎하다 度世爲其弟娶鄭羆妹以報德하니라
夏四月 魏荆州刺史魯爽及其弟秀奔宋하다
魯宗之奔魏 其子軌爲魏荆州刺史襄陽公하고 鎭長社하여 常思南歸호되 以昔殺劉康祖及徐湛之之父 故不敢來注+康祖父虔之, 湛之父逵之, 義熙十一年爲軌所殺.러라
軌卒 子爽襲父官爵하다 爽少有武幹하여 與弟中書郎秀 皆有寵於魏主러니 既而有罪하여 魏主詰責之注+爽麤中使酒多過失, 秀以檢校鄴人謀反事, 因病還遲, 竝爲魏主所詰責.하니
爽秀懼誅하여 殺魏戍兵하고 帥部曲千餘家奔汝南하여 請降于宋하다
宋主大喜하여 以爽爲司州刺史하여 鎭義陽하고 秀爲潁川太守注+沈約曰 “司州刺史, 漢之司隷校尉也. 晉江左以來, 淪沒戎寇. 雖永和․太元, 王化蹔及, 及太和隆安, 還復湮陷. 武帝北平關洛, 河南底定, 置司州刺史, 治虎牢, 領河南․滎陽․弘農實土三郡. 少帝景平初, 司州復沒, 元嘉末, 僑立, 治汝南, 是後遂治義陽, 領義陽․隨陽․安陸․南汝南郡.”하니 魏人毁其墳墓하다
徐湛之以爲廟筭遠圖하여 特所獎納이라하여 不敢茍申私怨하고 乞屏居田里호되 不許하다
宋以何尙之爲尙書令하고 徐湛之爲僕射하다
尙之以湛之國戚으로 任遇隆重이라하여 每事推之하니 朝事悉歸湛之注+湛之, 帝之甥, 會稽公主之子.러라
魏更定律令하다
魏主命太子少傅游雅中書侍郎胡方回等하여 更定律令하니 增損 凡三百九十一條러라
六月 魏太子晃卒하다
魏太子晃監國하여 頗信任左右하여 營園田하여 收其利하니
髙允諫曰 天地無私 故能覆載하고 王者無私 故能容養이라 今殿下國之儲貳하여 萬方所則이어늘 而營立私田하고 畜養雞犬하여 乃至酤販市廛하고 與民争利하니 謗聲流布 不可追掩注+廛, 市中空地. 一曰 “居也.”이라
夫天下者 殿下之天下 富有四海하니 何求而無이완대 乃與販夫販婦競此尺寸之利乎 昔虢之將亡 神賜之土田하고 漢靈帝私立府藏이어늘 皆有顚覆之禍하니 前鑑若此 甚可畏也注+左傳莊公三十二年 “有神降于莘, 虢公使祝史享焉. 神賜之土田. 史嚚曰 ‘虢其亡乎. 吾聞之, 國將興, 聽於民, 將亡, 聽於神.’” 其後晉伐虢滅之. 私立府藏事, 見光和元年.
武王愛周邵齊畢 所以王天下注+周․邵․齊․畢, 周公召公齊太公畢公也. 殷紂愛飛廉惡來 所以喪其國注+飛廉多力, 惡來善走, 父子俱以才力事紂. 惡來善毁讒, 諸侯以此益疏.이라 東宮儁乂不少한대 頃來侍御左右者 恐非在朝之選이니
願殿下斥去邪佞하고 親近忠良하며 所在田園 分給貧下하고 販賣之物 以時收散하소서 如此 休聲日至하고 謗議可除矣리이다 不聽注+收, 謂收藏其物. 散, 謂散與貧民. 一說 “以時收散者, 言穫斂之時, 民力可以償稱逋負則收之, 停滯居物, 至民所欲得之時則散之.”하다
太子爲政精察이어늘 而中常侍宗愛性險暴하여 多不法하니 晃惡之하다 給事中仇尼道盛有寵於晃한대 與愛不協注+仇尼, 複姓.이라
愛恐爲所糾하여 遂構其罪어늘 魏主怒하여 斬道盛於都街하니 東宮官屬多坐死 晃以憂卒하니 諡曰景穆이러니
魏主徐知其無罪하고 悔之하다 欲封其子濬爲髙陽王이라가 既而以皇孫世嫡으로 不當爲藩王이라하여 乃止하다
時濬生四年이어늘 聰逹過人하니 魏主愛之하여 常置左右注+按通鑑文帝十七年六月云 “魏皇孫濬生.” 至今十二歲矣. 據北史亦同, 後三年而已生子. 此云 “濬生四年.” 其誤明甚.하다
宋青冀刺史蕭斌將軍王玄謨以罪免하다
坐退敗也러라 宋主問沈慶之曰 斌欲斬玄謨而卿止之 何也 對曰 諸將奔退 莫不懼罪하니 自歸而死 將至逃散이라 故止之하다
宋魏復通好하다
宋以王僧綽爲侍中하다
僧綽 曇首之子也 幼有大成之度하여 衆皆以國器許之러라 好學有思理하고 練悉朝典이러라 爲吏部郎 諳悉人物하니 舉拔咸得其分注+思, 相吏切. 思理, 猶言思致也. 分, 扶問切, 言能隨其分量而授任也.이러라
及爲侍中 年二十九 沈深有局度하되 不以才能髙人注+有局則能處事, 有度則能容物.하니 宋主以其年少 欲以後事託之하여 朝政大小 皆與參焉하다
宋主始親政事 委任王華王曇首殷景仁謝弘微劉湛이요 次則范曄沈演之庾炳之하고 最後江湛徐湛之何(瑀之)[尙之]及僧綽하니 凡十二人注+何瑀之, 恐當作何尙之.이러라


≪資治通鑑綱目≫ 제26권은 辛卯年(451) 宋나라 文帝 元嘉 28년과 北魏 太武帝 太平眞君 12년부터 乙巳年(465) 宋나라 明帝 泰始 원년과 北魏 文成帝 和平 6년까지이니, 모두 15년이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28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平眞君 12년이다.
[綱] 봄 정월에 北魏 군사가 돌아왔다.
[目] 정월 초하루에 魏主 太武帝가 瓜歩山 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연회를 베풀고 작위와 상을 등급에 따라 내렸다.
北魏 군대가 장강 북쪽 연안에 불을 지르자 右衞率 尹弘이 宋主에게 말하기를 “가 이와 같이 하니 반드시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北魏 군대가〉 과연 주민들을 노략질하고 집을 불사르고 떠나갔다.注+① 北兵이 퇴각하려고 하였는데 南兵이 추격하여 퇴로를 차단할 것을 염려하였으므로, 불을 질러 위엄을 보인 것이다. 尹弘은 北人의 군대의 사정을 익히 알아서 그것으로 인하여 宋主에게 말을 한 것이다. 晉氏로부터 나라를 잘못 통제하여 劉淵과 石勒 이후로 비로소 六夷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綱] 宋主가 동생 劉義康을 죽였다.
[目] 胡誕世가 반란을 일으킬 적에 江夏王 劉義恭 등이 상주하여 “劉義康이 자주 원망하는 말을 하여 백성들의 聽聞을 동요시킵니다. 이 때문에 폐출된 종족들이注+① “不逞之族”은 폐출당한 집안으로 당시에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이를 이용하여 모반을 일으킬 마음을 품은 것이니, 유의강을 廣州에 귀양 보낼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宋主는 먼저 사자를 파견하여 유의강에게 이를 전하였는데 유의강이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은 죽는 것이니 내가 어찌 살기를 탐하겠습니까! 〈내가〉 필시 반란의 원인이 된다면 비록 멀리 간다고 해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나는 이곳에서 죽기를 청하니 다시 자주 옮기는 것은 부끄럽습니다.”라고 하고, 결국 廣州로 가지 않았다.
北魏의 군대가 瓜步山에 있자 민심이 흉흉하였다. 宋主는 폐출된 종족들이 다시 유의강을 받들고 난을 일으킬까 염려하였다.
太子 劉劭와 武陵王 劉駿, 僕射 何尙之가 자주 아뢰어 빨리 유의강을 처치해야 한다고 하자注+② 武陵王 劉駿이 당시에 彭城에 있었는데, 역말로 은밀하게 장계를 올린 것이다., 宋主가 中書舍人 嚴龍을 보내 유의강 앞에 직접 나아가 죽이게 하였다.
[綱] 北魏가 다시 碻磝를 취하였다.
[目] 宋나라는 江夏王 劉義恭이 碻磝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 여겨서 王玄謨를 불러 歴城에서 돌아오게 하였는데, 北魏 사람들이 그를 추격하여 패퇴시키고 마침내 碻磝를 취하였다.
[綱] 魏主가 盱眙를 공격하니 宋나라 將軍 臧質이 막자, 北魏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2월에 〈北魏 군사가〉 彭城을 지나가니 宋나라 사람들이 추격을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目] 예전에 宋主는 北魏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廣陵太守 劉懐之에게 명하여 미리 성의 창고와 배와 수레를 불태워 버리고注+① 적이 오기 전에 미리 불태웠기 때문에 逆이라고 한 것이다. 乘(수레)은 去聲이니 수레이다., 廣陵의 백성들을 모두 통솔하여 長江을 건너게 하였다.
山陽太守 蕭僧珍이 백성을 모아 성에 들여보냈는데, 조정에서 盱眙와 滑臺에 도착하도록 보낸 식량과 무기가 길이 통하지 않아 모두 山陽에 머물고 있었고, 소승진이 또 둑을 쌓아 물을 가득 채웠다가 北魏 군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注+② 須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둑을 터서 물을 흘려보내니, 북위 군사들이 山陽을 지나갈 때에 감히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대로 盱眙를 공격하였다.
[目] 魏主가 사람을 보내 臧質에게 술을 요구하자 장질이 항아리에 오줌을注+① 溲(오줌)는 疎鳩의 切이다. 便(오줌)은 毗連의 切이다. 부어 그에게 주었다. 魏主가 노하여 성 주위에 길게 담장을 둘러쌓아서 하루저녁에 완성하고 東山의 흙과 돌을 운반해와서 해자를 메우고 君山에 부교를 만들어서 盱眙로 통하는 수로와 육로를 끊고, 장질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하였다.
“우리가 지금 파견하는 전투 병력은 다 우리의 國人이注+② 國人은 拓跋氏와 같이 北荒에서 나온 자손을 말한다. 모두 99개의 姓이다. 아니라, 성 동북쪽은 丁零人과 胡人(匈奴人)이고, 성 남쪽은 氐人과 羌人이다.
설령 丁零人이 죽더라도 바로 常山․趙郡의 적이 줄어드는 것이고注+③ 丁零은 翟眞이 慕容垂를 배반한 뒤로 모두 常山․趙郡의 지역에 의탁하여 산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胡人이 죽더라도 并州의 적이 줄어드는 것이고注+④ 後漢 때부터 南匈奴를 받아들여 幷州 지역에 나누어 살게 하니 그 땅은 대부분 匈奴와 漢人이 섞여 살았고, 西河와 離石의 서쪽은 모두 稽胡가 점거하여 침입을 하였다. 氐人과 羌人이 죽더라도 關中의 적이 줄어드는 것이니注+⑤ 氐族인 苻堅과 羌族인 姚萇이 關中을 점거하고부터 그의 종족들이 번성하였다. 비록 그 국가가 이미 멸망하였으나 그 종족들이 실제로 많았다., 경이 만약 그들을 죽여준다면 이롭지 않을 것이 없다.”注+⑥ 〈“無所不利”는〉 北魏에 이롭지 않은 것이 없음을 말한다.
장질이 다시 편지를 쓰기를 “편지를 살펴보고서 그대의 간사한 마음을 다 알았다.注+⑦ “省示”는 보내온 편지에 있는 내용을 살펴본 것이다. 悉은 자세하고 다한다는 뜻이며, 전부라는 뜻이다. 그대 스스로 戎馬를注+⑧ “四足”은 말을 말한다. 믿고서 자주 우리 국경을 침범하니 王玄謨가 동쪽에서 퇴각하고 申坦이 서쪽에서 흩어졌으니, 그대는 그 까닭을 아는가.注+⑨ 살펴보건대 王玄謨가 滑臺에서 패하여 퇴각하고, 蕭斌이 申坦을 시켜서 淸口를 점거하게 하였다. 戴延之가 말하는 淸口는 壽張縣 서쪽 지역과 安民亭 남쪽에 있다. ≪水經注≫에 의거하면 그 땅은 滑臺의 서쪽에 있지 않다. 이는 마땅히 梁坦이 上蔡의 군사를 내보내어 虎牢에 이르러 패하여 흩어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대는 다만 을 듣지 못하였는가. 〈왕현모 등이 후퇴했을 때는〉 아직 卯年(辛卯年)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두 군대에게 오랑캐 말이 장강의 물을 마실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한 것일 뿐이다.
寡人(臧質)이 명령을 받아 그대를 멸망시킬 것을 白登山에서 기약하였는데 행군을 한 지 오래지 않아 그대가 스스로 죽으러 왔으니 어찌 다시 그대를 온전히 살려 보내서 桑乾에서 그대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注+⑩ 옛날 제후가 스스로를 寡人이라고 일컬었다. 臧質은 스스로 藩方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스스로 寡人의 임무라고 일컬었다. 白登山과 桑乾川은 모두 平城의 左右에 있다. 장질이 본래 白登으로 곧바로 가기로 기약하였는데 행군하다가 淮水에 이르러 北魏 병사들을 만나자, 반드시 그들을 소멸시켜 魏主를 살려 보내 桑乾 땅에서 〈魏主를〉 제향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나는 본래 온전히 살아남을 것을 도모하지 않으니, 만약 천지에 신령이 없어 내가 힘으로 그대에게 굴복을 당한다면 잘게 썰어지고 가루가 되며注+⑪ 韲는 牋西의 切이다. 생강과 마늘을 잘게 썬 것을 韲라고 말하고, 쌀과 보리를 갈아 부순 것을 粉이라고 말한다. 䃺(갈다)는 생략하여 磨로 쓴다. 도륙을 당하고 사지가 찢어지더라도 오히려 本朝에 사죄함이 부족할 것이다.
그대의 지혜와 식견, 군대의 힘이 어찌 苻堅을 능하겠는가. 지금 봄비가 이미 내렸고 병사들이 한창 사방에서 집합하고 있다. 그대는 다만 편안한 마음으로 성을 공격하고, 양식이 모자라게 되면 말을 해달라. 마땅히 창고에서 양식을 내어서 줄 것이다.
그대가 보내준 칼을 가지고 있으니 나에게 그 칼을 그대에게 휘두르기를 원하는가.”라고 하였다.
魏主가 크게 노하여 鐵牀을 만들고 그 위에다 쇠 송곳을注+⑫ 鑱은 士衫과 士懺의 두 가지 切이니, 찌르고 뚫는다는 뜻이다. 꽂아놓고 말하기를 “성을 격파하여 장질을 잡으면 마땅히 이 송곳 위에 앉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중국의〉 正朔을 쓰는 백성으로注+⑬ 中原의 백성들이 본래 漢나라와 晉나라의 正朔을 받았기 때문에 “正朔之民”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찌 스스로 멸망을 취하고, 어찌 재앙을 돌려서 복으로 만드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라고 하고, 아울러 臺格을注+⑭ “臺格”은 宋나라 朝廷에서 정한 포상을 줄 조건이다. 베껴서 그들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佛狸의 머리를 베면 萬戶의 諸侯로 책봉하여 베와 명주 각각 萬匹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北魏 병사들이 鉤車(갈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실은 수레)로 성루에 갈고리를 걸었는데, 성안에서 굵은 줄을 갈고리에 매어서 수백 명이 큰 소리를 외치며 끌어당기니 수레가 물러나지 못하였다. 밤이 되자 〈성에서〉 통 속에 병졸을 숨겨 매달아 내려보내서 그 갈고리를 끊어서 획득하였다.注+① 鉤는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이니, 갈고리로 당겨 성에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彄(활고자)는 恪侯의 切로, 활이나 쇠뇌의 앞 끝머리에 시위를 거는 곳이다. 絙은 居登의 切로, 굵은 줄이다. 〈“彄絙”은〉 굵은 줄로 〈사다리의〉 갈고리[彄]에 거는 것을 이르니, 〈여기의 彄는〉 활이나 쇠뇌의 활고자에 시위를 건다는 彄와 같은 뜻이다. 縋(매달다)는 馳僞의 切이니, 병졸을 통 속에 넣어 밧줄로 매어서 성에서 매달아 내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다음 날에 〈北魏 군대가〉 또다시 衝車를 가지고 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을 쌓은 흙이 견고하고 치밀하여 衝車가 성벽에 부딪칠 때마다注+② 여기서 句를 뗀다.注+③ 至는 衝車를 성벽에 붙이는 것을 말한다. 무너지고 떨어지는 흙이 몇 되에 불과하였다.
北魏 병사들이 이에 육박하여 성을 올라가고 순번을 나누어 서로 교대하여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고서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죽고 다친 사람이 일만 명이나 되어 시체가 성의 높이와 같게 되었다. 성을 공격한 지 30일이 지났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北魏 군중에 전염병을 앓는 자가 많았고,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宋나라 建康에서 水軍을 보내 바다에서 淮水로 들어왔으며 또 彭城에 칙서를 보내서 북위 군대의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였다고 하였다.注+④ 水軍이 建康에서부터 長江으로 타고 내려가서 장강에서 바다로 나가는데 料角을 돌면 회수로 들어간다.
2월 초하루에 魏主가 공성무기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盱眙 사람들이 北魏 군사를 추격하려고 하자 沈璞이 말하기를 “지금 병사가 많지 않아서 비록 견고하게 지킬 수는 있으나 나아가 싸우지는 못한다. 다만 배와 노를 정리하여 북쪽으로 淮水를 건너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서注+⑤ “示若欲北渡者”는 盱眙에서 淮水를 건너서 북쪽으로 추격하여 그 뒤를 끊으려는 것처럼 보이게 함을 말한다. 저들이 빨리 도망가게 해야 한다. 다만 계획대로 〈淮水를 건너는 것을〉 실행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장질이 심박을 盱眙 城主로 여기고 그에게 露板을 올리게 하였는데 심박이 굳게 사양하고 공로를 장질에게 돌아가게 하니, 宋主가 듣고 심박을 더욱 가상히 여겼다.注+⑥ 上(올리다)은 時掌의 切이다. 露板은 노획하고 승리한 정상을 기록한 것이니, 露板(봉함하지 않고 드러내 보인 奏章)으로 보고를 올려서 천하 사람들이 다 알게 하는 것이다. “益嘉之”는 이미 沈璞의 공을 가상히 여기고 또 그가 사양한 것을 더욱 가상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目] 北魏 군사가 彭城을 지나갈 때에 宋나라 江夏王 劉義恭이 두려워 떨며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오랑캐들이 우리의 백성 만여 명을 잡아가고 있는데 저녁에 응당 安王陂에서 유숙할 것입니다. 팽성과의 거리가 수십 리 정도이니, 지금 추격하면 모두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가기를 청하였는데 유의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 조정에서 파발로 보낸 사자가 도착하여 칙서를 내려 유의공에게 힘을 다하여 급히 추격하라고 하였는데, 北魏 군사들은 이미 멀리 달아났다. 유의공이 마침내 司馬 檀和之를 보내 蕭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北魏 사람들이 미리 이 소식을 듣고 잡아가던 사람들을 다 죽이고 떠났다.
[綱] 宋나라가 조서를 내려 백성 중에 적의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조세를 거두는 것을注+① 稅는 조세라는 뜻이다. 調는 계산하여 징발하는 뜻이다. 면제하였다.
[目] 北魏 군대가 南兗州․徐州․兗州(北兗州)․豫州․靑州․冀州 등 6주를 격파할 때에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장정들은 즉시 목을 베이고 어린이들이 창끝에 꿰어 춤을 추면서 노리개로 삼으니, 이들이 지나가는 郡縣마다 황무지로 변해 버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집이 사라져〉 봄에 제비가 돌아와서 숲속의 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죽고 부상을 당한 北魏의 군사와 말이 또한 절반을 넘었다. 北魏의 國人들이 모두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宋主는 장수를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킬 적에 항상 작전과 교전하는 시일을 말해주었다. 이 때문에 장수들이 주저하고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또 江南의 白丁(兵籍에 없는 장정)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하여〉 가볍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니, 이것이 宋나라 군대가 패한 원인이었다. 이로부터 宋나라의 마을이 텅 비었고, 元嘉의 정사가 쇠퇴하였다.
〈宋主가〉 조서를 내려 太尉 劉義恭을 강등시켜 驃騎將軍으로 삼고 鎭軍將軍 劉駿을 강등시켜 北中郎將으로 삼았다.
[目] 예전에 魏主가 彭城을 지나가면서 사람을 보내어 성안에 말을 전하기를 “양식이 다하여 우선 떠나니 보리가 익으면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리가 익는〉 때가 되어 江夏王 劉義恭이 논의하여 보리를 베고 〈백성을〉 성안으로 들여보내 지키려 하였다.
參軍 王孝孫이 말하기를 “오랑캐는 다시 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 스스로 성을 보존할 수 있으니 만약 그들이 다시 온다하더라도 이 의논은 역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린 날이 오래되어 바야흐로 봄철에는 들나물을 채취하여 자급할 수 있습니다. 일단 백성들을 성에 들여보내 모아서 지키면 굶어 죽는 사람이 바로 나올 것입니다. 백성들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오랑캐가 만약 반드시 온다고 하면 그때 보리를 베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長史 張暢이 말하기를 “王孝孫의 의견은 진실로 쓸注+① 尋은 이치를 찾는다는 뜻이며, 쓴다는 뜻이다.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典籖 董元嗣가 나서서 말하기를 “王錄事(왕효손)의 의견은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别駕 王子夏가 말하기를 “이 논의는 진실로 그러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창이 말하기를 “보리를 베고 백성을 이주시키는 것은 큰 의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지방의 안위는 일이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데, 왕자하는 자신이 州端(別駕)이면서注+② 親은 자신이라는 뜻이다. 州의 別駕는 여러 屬僚의 위에 있으므로 州端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다른 의견이 없다가 동원사의 말을 듣고는 웃으면서 응답을 하여 측근들의 의견에 따르니, 어찌 君(유의강)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왕효손에게 명하여 왕자하를 탄핵하도록 청하니注+③ 録事參軍은 죄상을 규찰하고 탄핵하는 것을 담당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의공이 마침내 논의를 중지하였다.
[綱] 3월에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왔다.
[目]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와서 종묘에 이르러 고유하고 술을 마시고, 항복한 백성 5만 가구를 나누어 평성의 近畿 지역에 두었다.注+① 飲至는 종묘에 이르러 고유하고 술을 마시는 것이다. 近畿는 平城 주변 1,000리의 지역을 말한다.
[綱] 北魏가 盧度世로 中書侍郎을 삼았다.
[目] 예전에 北魏 中書學生 盧度世가注+① 盧度世는 盧玄의 아들이다. 에 연좌되어 망명하여 髙陽 사람 鄭羆(정비)의 집에 숨어 있었다. 〈高陽府〉 관리가 정비의 아들을 옥에 가두고서 매질하고 심문하였는데, 정비가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군자는 몸을 희생하여 仁을 이루니, 비록 죽을지라도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정비의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서 관리가 그의 몸을 불로 태웠으나 끝내 말하지 않고 죽었다. 魏主가 長江에 이르렀을 적에 宋나라 사신에게 묻기를 “노도세가 망명을 하여 이미 그곳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마침내 노도세를 사면하니 노도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魏主가 中書侍郎으로 삼았다. 노도세는 그의 동생을 정비의 누이에게 장가들여 은덕에 보답하였다.
[綱] 여름 4월에 北魏 荆州刺史 魯爽과 동생 魯秀가 宋나라로 달아났다.
[目] 에 그의 아들 魯軌는 北魏 荆州刺史 襄陽公이 되어 長社를 지키면서 항상 남방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는데, 예전에 劉康祖와 徐湛之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감히 돌아오지 못했다.注+① 劉康祖의 아버지는 劉虔之이고, 徐湛之의 아버지는 徐逵之인데 義熙 11년(415)에 魯軌에게 살해되었다.
노궤가 卒하자 아들 노상이 아버지의 官爵을 세습하였다. 노상은 젊어서부터 武略이 있어서 동생 中書郎 魯秀와 함께 魏主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이윽고 죄가 있어서 魏主가 그들을 힐책하였다.注+② 魯爽은 성품이 거친 중에 주정을 부리며 과실이 많았고, 魯秀는 鄴 사람이 모반한 일을 조사하다가 병으로 인하여 늦게 돌아왔는데 두 사람 모두 魏主에게 힐책을 당하였다.
노상과 노수는 주살될까 두려워서 北魏 수비병을 죽이고 部曲과 천여 가를 거느리고 汝南으로 도망쳐 宋나라에 항복을 청하였다.
宋主가 크게 기뻐하여 노상을 司州刺史로注+③ 沈約이 말하기를 “司州刺史는 漢나라의 司隷校尉이다. 晉나라가 江左로 내려온 이래로 司州는 戎寇에게 함락되었다. 비록 〈東晉의〉 永和(穆帝)․太元(孝武帝) 때에 왕의 교화가 잠시 동안 미쳤으나 太和(海西公)․隆安(安帝) 때에 미쳐서 다시 함락되었다. 宋 武帝는 북쪽으로 關中․洛陽을 평정하고, 河南을 안정시켜 司州刺史를 두어 虎牢에 治所를 두고 河南․滎陽․弘農 3郡의 실제 토지를 다스리게 하였다. 宋 少帝 景平 초에 사주가 다시 함몰되고 元嘉 말에 僑州를 세우고 汝南에 치소를 두었다. 이후로 마침내 義陽에 치소를 두어서 義陽郡․隨陽郡․安陸郡․南汝南郡을 다스리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삼아서 義陽을 지키게 하고, 노수를 潁川太守로 삼으니 북위 사람들이 노상 집안의 墳墓를 훼손하였다.
서담지는 조정의 계책이 원대하여 특별히 장려하고 받아들인 것이라 여겨서, 감히 구차하게 사사로운 원한을 말하지 않고 벼슬에서 물러나 田里에서 살겠다고 청하였으나 〈宋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綱] 宋나라가 何尙之를 尙書令으로 삼고 徐湛之를 僕射로 삼았다.
[目] 何尙之는 徐湛之가注+① 徐湛之는 황제(文帝)의 생질이니, 會稽公主의 아들이다. 皇帝의 姻戚으로 황제의 신임과 예우가 융숭하다 하여 매사를 그에게 미루어 처결하게 하니, 조정의 일이 모두 서담지에게 돌아갔다.
[綱] 北魏는 律令을 개정하였다.
[目] 魏主가 太子少傅 游雅, 中書侍郎 胡方回 등에게 명하여 律令을 개정하게 하니 율령을 增損한 것이 모두 391조였다.
[綱] 6월에 北魏 太子 拓跋晃이 卒하였다.
[目] 北魏 太子 拓跋晃이 監國하여 측근들을 상당히 신임하여, 그들에게 園田을 경영하여 利潤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髙允이 간언하기를 “하늘과 땅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하늘은 만물을 덮어주고 땅은 만물을 실어줄 수 있고, 왕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백성을 포용하고 양육할 수 있습니다. 지금 殿下께서는 국가의 太子가 되어서 萬方이 모범으로 삼는데 私田을 경영하고 닭과 개를 길러서 마침내 市廛에서注+① 廛은 시장 안의 빈 땅이데, 일설에 “거주지이다.” 하였다. 판매하고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데 이르렀으니, 비방하는 말이 널리 유포되면 추후에 덮을 수 없습니다.
天下는 전하의 천하입니다. 부유함이 四海를 소유하였으니 무엇을 구한들 없기에 마침내 장사하는 사내나 아낙네들과 함께 이런 작은 이익을 다투십니까. 옛날에 虢나라가 망하려고 할 적에 神이 土田을 하사하였고, 後漢 靈帝가 사적인 府庫를 세웠는데 모두 顚覆되는 재앙이 발생하였습니다.注+② ≪春秋左氏傳≫ 莊公 32년에 “神이 〈虢나라〉 莘 땅의 어떤 이에게 내려왔는데, 虢公이 大祝․太史를 보내어 神에게 祭享하게 하니, 神이 ‘土田을 하사하겠다.’라고 하였다. 太史 嚚이 말하기를 ‘虢은 아마도 망할 것이다. 내가 듣건대 「나라가 일어나려 할 때는 임금이 백성의 말을 따르고 망하려 할 때는 神의 말을 따른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晉나라가 虢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사사로이 府藏을 세운 일은 〈後漢 靈帝〉 光和 원년(178)에 보인다. 전대의 귀감이 이와 같으니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武王이 周公․召公․齊太公․畢公을注+③ 周․召․齊․畢은 周公․召公․齊太公․畢公이다. 총애한 것은 천하에 왕 노릇 하게 된 까닭이고, 殷나라 紂王이 飛廉․惡來를 총애한 것은 나라가 망하게 된 까닭입니다.注+④ 飛廉은 힘이 세고 惡來는 잘 달렸는데 父子가 모두 힘과 재주로 紂王을 섬겼다. 악래가 비방을 잘하니, 諸侯들이 이로써 더욱 멀어졌다. 東宮에는 준걸들이 적지 않은데 근래 측근에서 모시는 자들은 아마도 조정의 선발에 들지 않은 자인 듯합니다.
바라건대 殿下께서는 사악하고 아첨을 잘하는 사람을 물리치고 忠良한 사람을 친근히 하며 각 처에 소유한 田園은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판매하는 물건은 제때에 거두어 풀어주십시오.注+⑤ 收는 물건을 모아 보관하는 것을 말하고, 散은 가난한 백성에게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一說에 “‘以時收散’은 수확하여 거둘 때에 백성의 힘이 채납된 곡식을 갚을 수 있으면 거두어들이고, 물건이 정체되고 쌓여서 백성들이 얻고자 하는 때에 이르면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아름다운 명성이 날마다 이르고 비방하는 논의가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太子는〉 따르지 않았다.
[目] 太子 拓跋晃은 정사를 보는 것이 정밀하고 분명하였는데, 中常侍 宗愛는 성격이 음험하고 난폭하여 법을 어기는 일이 많으니, 탁발황이 종애를 싫어하였다. 給事中 仇尼道盛이注+① 仇尼는 複姓이다. 탁발황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종애와 화합하지 못하였다.
종애는 탄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구니도성을 죄에 엮었는데 魏主가 노하여 구니도성을 저잣거리에서 참수하니, 東宮의 官屬들이 대부분 연좌되어 죽었다. 탁발황이 근심하다 죽으니 諡號를 ‘景穆’이라고 하였다.
魏主가 나중에 탁발황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일을 후회하였다. 탁발황의 아들 拓跋濬을 髙陽王으로 책봉하려고 하다가 얼마 후에 世嫡皇孫을 藩王에 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이때 탁발준의 나이는 4세였는데注+② 살펴보건대 ≪資治通鑑≫ 宋 文帝 元嘉 17년(440) 6월에 “北魏 皇孫 拓跋濬이 출생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12세이다. ≪北史≫ 〈魏本紀〉에도 같다. 3년이 지난 뒤(443)에 또 아들(拓跋弘)을 낳았다. 여기에서 “탁발준이 나이가 4세이다.”라고 한 것은 오류가 분명하다. 남들보다 총명하고 영리하니 魏主가 그를 사랑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
[綱] 가을에 宋나라 青州冀州刺史 蕭斌, 將軍 王玄謨가 죄로 면직되었다.
[目] 어찌된 것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여러 장수들이 후퇴하여 달아날 적에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돌아가서 죽게 된다면 〈北魏로〉 도망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지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綱] 宋나라와 北魏가 다시 통하여 우호를 맺었다.
[綱] 宋나라 王僧綽을 侍中으로 삼았다.
[目] 王僧綽은 王曇首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에 크게 성공할 도량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두 국가의 棟梁이라고 인정하였다. 왕승작은 학문을 좋아하고 생각에 조리가 있고 조정의 전장제도를 잘 알았다. 吏部郎이 되었을 때에 조정의 인물에 대해 잘 알았으니 사람을 추천하고 선발하는 데 다 그 적임자를 얻었다.注+① 思(생각)는 相吏의 切이다. “思理”는 思致(생각을 지극히 함)와 같다. 分(분수)은 扶問의 切이니, 분수에 따라서 임무를 주는 것을 말한다.
侍中이 되었을 때 나이가 29세였다. 침착하면서 도량이 있었으나注+② 器局이 있으면 일을 처리할 수 있고, 度量이 있으면 남을 포용할 수 있다. 재능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지 않았다. 宋主는 왕승작이 젊었기 때문에 후일의 일을 부탁하려고 하여 조정의 크고 작은 일에 모두 참여하게 하였다.
宋主는 처음 직접 정사를 볼 때에 王華․王曇首․殷景仁․謝弘微․劉湛에게 맡기고, 그 다음은 范曄․沈演之․庾炳之에게 맡기고, 최후에는 江湛․徐湛之․何尙之注+③ 何瑀之는 何尙之가 되어야 할 듯하다. 및 王僧綽에게 맡기니, 모두 12사람이었다.


역주
역주1 六夷 : 西晉 말년 이후로 남방 사람이 북방의 匈奴․羯․鮮卑․氐․羌․賨人을 부르던 말이다.
역주2 宋主殺其弟義康 : “劉義康을 지난날 폐위하였을 때에 ‘國(宋)’을 기록하고 ‘彭城王’이라고 기록한 것은 실로 그 죄가 있으므로 國法으로 그를 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의강을 오늘날 죽였을 때에 ‘宋主殺其弟’라고 기록한 것은 죄가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오로지 宋主를 지목하여 심하게 여긴 것이다. 옛날에 ≪春秋≫ 隱公 원년에 ‘鄭伯이 共叔段을 鄢에서 이겼다.’라고 기록하였는데 君子는 鄭伯이 그 아우를 악행에 빠뜨린 것을 나무랐다. 지금 宋主가 유의강에게 애초에 너무 과도하게 맡겨서 小人에게 그를 좇고 따르게 하여 그가 죄를 짓게 하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이미 강등하며 폐위하고 또 따라서 멀리 축출하였으니, 이 역시 충분하다. 어찌 반드시 죽이고 나서야 그만둔 것인가. 〈舜임금은 이복동생〉 象의 근심을 역시 근심하고 象의 기쁨을 역시 기뻐하였는데 〈宋主의 행위는〉 과연 이와 같은가.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은 그를 매우 미워한 것이다.[義康前日之廢 書國書彭城王者 實有其罪 故以國法待之也 義康今日之死 書宋主殺其弟者 罪不至死 故專目宋主以甚之也 昔春秋書鄭伯克段于鄢 君子譏鄭伯陷其弟于惡 今宋主之於義康 始焉任之太過 至使小人趣附 以成其罪 然既貶之廢之 又從而遠逐之 是亦足矣 豈必殺之而後已 象憂亦憂 象喜亦喜 果如是乎 書法若此 深惡之也]” ≪發明≫
역주3 (後)[復] : 저본에는 ‘後’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復’로 바로잡았다.
역주4 魏主攻盱眙……不及 : “지난겨울에 ‘魏及宋平(北魏가 宋나라와 화친을 맺었다.)’이라고 기록하였으니, ≪春秋≫에서 화친[平]을 기록할 적에 ‘及’〈의 앞에 놓는 대상〉으로 주관을 삼는다. 이해 봄에 또 ‘魏師還’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北魏 사람들이 재앙을 뉘우쳐 전쟁을 정지하는 뜻이 있으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기록하여 허여한 것이다. 지금 盱眙를 다시 공격한 것은 어째서인가. 또 전날에 宋나라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을 때 北魏가 전쟁하여 승리하였으니 그 정도면 실로 충분하다. 그런데 사람을 희롱거리로 삼아 죽이고 노획하고 도륙하고서 게다가 사람들을 하나의 성 아래 개미처럼 붙어 올라가게 해서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못을 이루었으니, 과연 무슨 뜻인가.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魏主攻盱眙’라고 기록한 것은 國君의 후중함으로 자신이 지휘하여 하나의 성을 공격함을 보인 것이고, ‘宋將軍臧質拒之’라고 기록한 것은 大國으로서 한 부대의 장교에게 곤란을 당해 이기지 못함을 보인 것이며, ‘魏師退走’라고 기록한 것은 온전한 군대로서 힘이 궁하여 달아난 것을 보인 것이니, 이는 모두 北魏를 폄하하는 뜻이다. ≪孟子≫ 〈離婁 上〉에 “땅을 다투어 싸워서 죽은 시체가 들에 가득하며, 성을 다투어 싸워서 죽은 사람이 성에 가득하면 이는 이른바 토지로 하여금 사람의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니, 그 죄가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魏主를 두고 말한 것이다. 말년에 宗愛의 재앙이 미처 죽은 것이 마땅하다.[去冬 書魏及宋平 春秋書平 以及者為主 是春 又書魏師還 則是魏人有悔禍息兵之意 故綱目書以予之也 今乃復攻盱眙何哉 且前日宋以無名興師 魏既戰而勝之 是亦足矣 殺掠屠戮 以人為嬉 方且蟻附一城之下 積尸成山 流血成池 果何謂耶 故綱目書魏主攻盱眙 則見其以國君之重 自將而攻一城 書宋將軍臧質拒之 則見其以大國而困於一偏校 不能克也 書魏師退走 則見其以全師之衆 力屈而遁 是皆貶之之意也 孟子曰 争地以戰 殺人盈野 争城以戰 殺人盈城 此所謂率土地而食人肉 罪不容於死 其魏主之謂乎 末年宗愛之及 宜矣]” ≪發明≫ 宗愛가 太武帝를 시해한 일은 본서 341쪽에 보인다.
역주5 아이들이……말 : 본서 317쪽에 그 내용이 보인다. 오랑캐의 말이 長江의 물을 마시면 卯年에 佛狸가 죽는다는 내용이다. 佛狸는 太武帝의 어릴 때 字로 辛卯年(451)에 태무제가 죽는 것을 예견한 노래이다.
역주6 그대들……하였다 : 魏主가 보낸 편지에서 ‘본인들 이외의 種族은 宋나라 臧質이 죽이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한 내용을 전달하여 北魏 군대를 이간시키려 한 것이다.
역주7 (林)[牀] : 저본에는 ‘林’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牀’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爾語(處)[虜] : 저본에는 ‘處’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虜’로 바로잡았다. 또한 ‘爾’는 ≪宋書≫ 〈臧質傳〉에 ‘示’로 되어 있다.
역주9 宋令民遭冦者 蠲其稅調 : “宋主가 까닭 없이 흉포하게 전쟁을 일으켜 6州의 백성들에게 간과 뇌를 땅에 바르게 하였으니, 지금 그 조세 거두는 일을 면제해주었다고 한들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구나 봄 제비가 돌아와 숲에다 둥지를 틀었으니, 백성이 또한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조세를 또한 어디에서 거두겠는가. 기록한 것은 아름답게 여긴 것이 아니라 나무란 것이다.[宋主無故暴兵 使六州之民 肝腦塗地 今乃蠲其稅調 果何及耶 況春燕歸巢於林木 民且亡矣 稅調亦奚從出哉 書非美之 蓋譏之也]” ≪發明≫ 제비는 사람이 사는 집 처마에 둥지를 트는데, 전란으로 집이 불타 제비가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숲속에 깃든 것이다.
역주10 崔浩의 사건 : 國史筆禍 사건을 가리킨 것으로 본서 296쪽에 보인다.
역주11 예전에……때 : 晉 安帝 義熙 11년(415) 魯宗之는 襄陽에서 秦으로 도주하고, 13년(417)에 秦에서 北魏로 도주하였다.(≪資治通鑑≫ (胡三省注))
역주12 蕭斌이……중지시켰으니 : 본서 308쪽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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