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殷琰
이 使劉順
으로 督諸將據宛唐
한대 而以皇甫道烈
은 土豪
요 柳倫
은 臺使
로 不受節度
注+宛唐, 按水經註作死雩. 云 “肥水過九江成德縣西北, 入芍陂, 又北, 右合閻潤水, 水積爲陽湖. 陽湖水自塘西北, 逕死雩亭, 宋泰始初, 劉順據之以拒劉勔.” 杜佑通典作死虎, 曰 “死虎, 地名, 在壽州壽春縣東四十餘里.” 通鑑 “時琰所遣諸軍, 竝受順節度, 而以皇甫道烈土豪, 柳倫臺之所遣, 順本卑微, 唯不使統督二軍.”러니
劉勔始至하여 塹壘未立에 順이 欲擊之한대 道烈與倫不可라하니 順이 不能獨進하여 乃止하니 勔營既立에 不可復攻이라 因相持守러니 順等糧盡하니 琰將杜叔寳 載米餉之어늘
呂安國曰 順精甲八千
이로되 而我衆不能居半
하니 所頼者
는 彼糧行竭
이요 我食有餘耳
注+行, 猶將也.라 若使米至
면 難可復圖
니 今可間道襲其米車
하여 出彼不意
니 若能制之
면 將不戰而走矣
리라
勔이 以爲然하여 以疲弱守營하고 簡精兵千人配安國하여 使從間道抄之하여 斬其前行五百人한대 叔寳 棄米走하니
五月에 順이 衆潰走어늘 於是에 勔이 鼓行向壽陽하여 與諸軍分營城外諸山하니
宋主遣人齎詔하여 宥琰罪하니 琰與叔寳欲降이나 而衆心不一하여 復嬰城固守하다
目
興世泝流
하여 上而復下
하여 如是累日
하니 劉胡笑曰 我尙不敢越彼下取揚州
어든 興世何物人
이 欲輕據我上
고하고 不爲之備
注+揚州, 謂建康.하다
一夕四更風便에 興世擧帆直前하여 過鵲尾하니 胡乃遣兵追之어늘 興世潜遣其將黄道標하여 帥七十舸하여 徑趣錢溪하여 立營寨하고 明日引兵據之하니
胡自將水歩二十六軍
하여 來攻
이어늘 將士欲迎擊之
한대 興世曰 賊來尙遠
하여 氣盛而矢驟
하니 驟易盡
하고 盛易衰
라 不如待之
注+易盡, 言矢易盡.니라
俄而요 胡來轉近하여 船入洄洑이어늘 興世命任農夫等하여 帥壯士擊之하고 衆軍繼進하니 胡敗走하다
建安王休仁이 以錢溪城未固로 命攸之等하여 攻濃湖하여 以分胡兵勢하니 胡果欲更攻興世하여 未至에 顗遽追之하니 城乃得立이라
胡遣人하여 傳唱錢溪已平이라하니 衆懼하니 攸之曰 若然이면 萬人中에 應有一人得還이니 此必彼戰失利하여 唱空聲以惑衆耳라하고
勒軍中不得妄動이러니 捷報尋至하니 攸之以所獲耳鼻로 示濃湖한대 顗大駭懼러라
目
宋徐州刺史薛安都와 益州刺史蕭惠開와 梁州柳元怙와 兗州畢衆敬과 豫章太守殷孚와 汝南太守常珍奇 竝遣使乞降于建康한대
宋主以南方已平으로 欲示威淮北하여 命張永沈攸之將兵五萬迎安都하니
蔡興宗曰 安都 歸順不虛라 正須單使니 今以重兵迎之면 勢必疑懼라 安都 外據大鎭하고 密邇邊陲하여 地險兵彊하니 尤宜馴養이라 如其外叛하여 招引北冦면 將爲朝廷旰食之憂리이다
宋主不從하고 謂蕭道成曰 吾今因此北討하노니 卿意以爲何如오 對曰 安都 狡猾有餘하니 以兵逼之면 非國之利리이다 亦不聽하다
安都 果懼而叛하고 常珍奇亦以懸瓠降魏하여 皆請兵自救하다
目
劉勔이 圍壽陽하여 戰無不捷하고 以寛厚得衆心이러니 尋陽既平에 宋主使中書爲詔하여 諭殷琰한대 蔡興宗曰
叛亂既定
하니 是琰思過之日
이니 宜賜手詔以慰引之
注+慰者, 安其心. 引者, 引使歸順.라 今直中書爲詔
면 彼必疑之
니 非所以速淸方難也
니이다 不從
注+方難, 謂一方之難.하니
琰이 果疑勔之詐하여 欲降於魏어늘 主簿夏侯詳曰 今日之擧 本效忠節이니 若社稷有奉이면 便當歸身朝廷이라 何可北面左衽乎아
且今魏軍
이 近在淮次
하고 官軍
이 未測吾之去就
注+魏軍, 謂西河公石之軍也. 淮次, 淮水之濱也.하니 若遣使歸欵
이면 必厚相慰納
이니 豈止免罪而已
리오
琰이 乃使詳出見勔曰 城中士民이 畏將軍之誅하여 皆欲自歸於魏하니 願將軍은 緩而赦之면 則莫不相帥而至矣리라 勔이 許諾하다
琰이 乃出降이어늘 勔이 悉加撫慰하고 不戮一人하고 約勒將士하여 秋毫無犯하니 壽陽人이 大悅이러라 魏軍將至에 聞琰已降하고 乃掠義陽而去하다
目
[
목目]
송宋나라가 안팎으로
계엄戒嚴을 하고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을
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로 삼고,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현모王玄謨를
부도독副都督으로 삼고,
심유지沈攸之를
심양태수尋陽太守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호함虎檻에
注+① 虎檻은 洲 이름이고, 赭圻 동북쪽 長江 안에 있으니, 蕪湖의 서남이다. 주둔하게 하였다.
왕현모의 선봉 부대 10군軍이 계속 도착하여 밤마다 각 군軍이 성호姓號(암구호暗口號)를 달리 사용하여 서로 연계되지 못하였다.
심유지가 제장諸將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여러 군軍의 성호姓號가 다르니, 만일 어떤 농부나 어부가 밤에 서로 소리치면 바로 군중軍中이 놀라 어지러워질 것이니 이는 패배를 자초하는 길이다. 청컨대 한 군軍의 성호姓號를 취하여 통일하였으면 한다.”라고 하니 모든 군대가 따랐다.
등완鄧琬이 노태후路太后의 새서璽書를 받았다고 사칭詐稱하고서 장군과 보좌관들을 거느리고 유자훈劉子勛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렸는데, 유자훈이 마침내 즉위即位하고 의가義嘉로 개원改元하였다.
그리고
등완鄧琬과
원의袁顗를
복야僕射로 삼고
장열張悅을
상서尙書로 삼으니,
서주자사徐州刺史 설안도薛安都․
기주자사冀州刺史 최도고崔道固․
청주자사靑州刺史 심문수沈文秀․
의양내사義陽内史 방맹규龎孟虯․
오군태수吳郡太守 고침顧琛․
오흥태수吳興太守 왕담생王曇生․
의흥태수義興太守 유연희劉延熙․
진릉태수晉陵太守 원표袁標가 모두 병사를 일으켜 호응하였다.
注+② 司州를 義陽에 설치하고, 義陽內史 龐孟虯를 司州刺史로 삼았다.
송주宋主(
유욱劉彧)가
유업庾業으로
유연희劉延熙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유업이 도착하여 도리어 유연희와 연합하였고,
송주宋主가
공조孔璪를 보내
회계會稽 지역을 위로하게 하였는데 공조는 도착하여 도리어 회계 사람들을 설득하여
심양尋陽(유자훈)의 정권을 따르도록 하였다.
注+③ 宋主(劉彧)가 尋陽王長史 行會稽郡事 孔覬를 불러 太子詹事로 삼고, 또 都水使者 孔璪를 보내어 동쪽으로 들어가서 慰勞하도록 하였다. 공조가 공기를 설득하기를 “建康이 허약하니 5郡을 포섭하여 袁覬와 鄧琬에게 호응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니. 공의는 마침내 병사를 출동하여 격문을 보내 尋陽을 받들었다.
그리고
익주자사益州刺史 소혜개蕭惠開도 장군과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
상동왕湘東王(유욱)은
태조太祖(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소昭(손자)이고
진안왕晉安王은
세조世祖(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목穆(형)이다.
당벽當璧(황제 자격)에 있어서 안 될 것이 없지만
注+④ ≪春秋左氏傳≫ 昭公 13년에 “楚共王에게 適子가 없고, 寵愛하는 庶子가 다섯이 있었으나, 태자로 적합한 자가 없었다. 이에 群望(명망 있는 산천)에게 성대하게 祭祀를 지내면서 祈願하기를 ‘神께서는 이 다섯 사람 중에서 하나를 選擇하여 社稷을 主管하게 하소서.’라고 하고, 곧 玉璧을 群望에 두루 보이고서 말하기를 ‘玉璧을 묻은 곳에 가서 절하는 자가 바로 神께서 태자로 세우는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巴姬와 함께 太室(宗廟)의 뜰에 玉璧을 묻고서 다섯 사람에게 齋戒하고서 연장자 순서로 들어와 절을 하게 하였다. 康王은 〈그 이마가〉 玉璧 상단을 지나갔고, 靈王은 팔꿈치가 玉璧에 닿았고, 子干과 子皙은 모두 玉璧과 거리가 멀었다. 平王은 어려서 안고 들어와서 再拜하였는데 두 번 모두 그 이마가 玉璧의 紐(끈을 매는 꼭지)에 닿으니, 그 뒤에 마침내 楚國을 소유하였다.”고 하였다. 厭(누르다)은 於甲의 切이다. 다만
경화景和(
유자업劉子業)는 본래
세조世祖의 아들로
사직社稷을 감당하지 못했으나 그의 형제들이 여전히 많다.
내가
세조世祖의 은혜를 받았으니 당연히
구강九江(유자훈)을 받들 것이다.”라고
注+⑤ 劉子業은 연호를 景和로 바꾸었다. 宋나라 이래로 대부분 江州를 九江이라고 불렀다. 劉子勛은 예전에 江州刺史를 지냈으므로, 九江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하고, 이에
파군태수巴郡太守 비흔수費欣壽를 보내어 5천 명을 지휘하여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이때에
상주행사湘州行事 하혜문何慧文․
광주자사廣州刺史 원담원袁曇遠․
양주자사梁州刺史 유원호柳元怙注+⑥ 柳元怙는 柳元景의 從兄이다.․
산양태수山陽太守 정천조程天祚가 모두 유자훈에게 붙었다.
目
[
목目] 사방의 공물과 회계 장부가 모두
심양尋陽으로 송부되니
조정朝廷이 보존한 곳은 오직
단양丹楊․
회남淮南의 몇
군郡이고, 동쪽의 반군이 또한 이미
영세永世에 이르니 〈
건강建康의〉
궁성宮省의 사람들이 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였다.
注+① 貢은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計는 上計(지방관이 매년 戶口, 賦稅, 獄訟 등의 항목을 적은 장부를 중앙에 보고하는 것)하는 장부이다. 吳나라 때에는 溧陽을 나누어 永平縣을 만들고, 晉 武帝 太康 원년(280)에 지명을 永世縣으로 바꾸고, 丹楊郡에 소속시켰다.
이에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신하들과 상의하였는데, 채흥종蔡興宗이 말하기를 “지금 온 천하가 함께 반란하여 사람마다 다른 마음이 있으니 마땅히 그들을 고요함으로써 진정시키고 지극한 믿음으로 그들을 대하여야 합니다. 배반자의 친척들이 궁성宮省에 널려 있으니 만약 그들을 법으로 다스린다면 땅이 무너질 형세가 바로 닥칠 것입니다.
마땅히 반역의 죄가 그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혀야 합니다.
注+② 父子와 兄弟 간에 죄가 서로 미치지 않는 것은 옛날의 도리이다. 민심이 안정되면 사람들이 싸울 마음이 있게 될 것이고,
육군六軍이 정예롭고 무기와 갑옷이 견고하고
注+③ 犀는 견고함이다. 예리하니 훈련되지 않은
반군叛軍을 상대하면 그 형세는 만 배나 차이가 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건무사마建武司馬 유순劉順이 예주자사豫州刺史 은염殷琰을 설득하여 심양尋陽의 정권에 호응하게 하였는데, 은염은 당초에 가족이 건강建康에 있었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다가 뒤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송주宋主가 다시 채흥종에게 말하기를 “여러 지역이 평정되기도 전에 은염이 이미 다시 역적들과 함께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채흥종이 말하기를 “반역과 순종은
신臣이 변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인이 단절되어 쌀이 매우 많이 남아 가격이 떨어지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인정人情이 다시 편안해졌으니, 이것으로 헤아린다면 반역의 무리를 깨끗이 없앨 수 있는 것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注+④ 湘東王(劉彧)이 황위를 찬탈한 것은 그의 本心이 아니고, 尋陽(劉子勛)에서 병사를 일으킨 것은 명분이 바르며 말이 순하므로, “반역과 순종은 臣이 변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인이 단절되어 쌀이 매우 많이 남아 가격이 떨어진 것은 이전 조정의 업적이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人情이 다시 편안해진 것은 狂暴한 임금에게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관대한 정치에 갑자기 즐거워한 것이다. 다만
신臣이 걱정하는 것은 다시 일이 끝난 뒤에
양호羊祜의 말과 같을 뿐입니다.”라고
注+⑤ 晉나라가 吳나라를 정벌하는데 이때 羊祜는 병이 깊었다. 晉 武帝는 양호를 시켜 諸将들을 누워서 지휘하게 하려 하자 양호가 말하기를 “吳나라를 빼앗는 것은 臣이 직접 갈 필요가 없고, 다만 吳나라를 평정한 이후에 聖上의 노고를 위로해야 할 뿐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송주宋主는 은염이 심양의 정부를 따른 것이 본심이 아닌 것을 알고 그의 가족들을 후하게 어루만져 그를 불러들이고,
원영조垣榮祖를 보내서
설안도薛安都를 설득하게 하였는데
注+⑥ 여러 垣氏들은 略陽에서 남쪽으로 와서 대물려 靑州․徐州에 살면서 공을 세워 土人들에게 신망을 얻었으므로, 그를 시켜 돌아가 薛安都를 설득하게 한 것이다. 桓榮祖는 桓護之의 從子(조카)이다.,
설안도가 말하기를 “나는
효무제孝武帝를 저버리고 싶지 않소.”라고 하니, 원영조가 말하기를 “효무제의 행적은 남은 재앙을 부르기에 충분하다.
注+⑦ 선행이 쌓이지 않으면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 孝武帝는 탐욕스럽고 음탕하고 사치와 학대를 이루어 人倫의 도리가 다 없어졌으므로 桓榮祖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 비록 천하가 부화뇌동하고 있으나
注+⑧ 우레가 소리를 내면 사물이 그때를 따라 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響應을 雷同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바로 죽음을 재촉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설안도는 따르지 않고 이어서 원영조를 억류하여 자신의 장수가 되게 하였다.
目
[
목目]
공의孔顗가 그의 장수를 보내어
진릉晉陵에 주둔하게
注+① 軍은 주둔하여 지킴을 말한다. 하였는데,
진용陣容이 매우 성대하니
심회명沈懐明 등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모두가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에게 물러나
파강破岡을
注+② 破岡은 曲阿 경내에 있는데, 秦 始皇帝가 뚫은 것이다. 지킬 것을 권하였는데, 유휴약이 명령을 내리기를 “감히 후퇴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하겠다.”라고 하니, 군사들이 마침내 조금 안정되었다.
전중어사殿中御史 오희吳喜가 송주宋主(유욱劉彧)에게 청하여 정예병 3백 명을 얻어 동쪽에서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바라였는데, 송주宋主가 우림군羽林軍의 용사勇士를 뽑아서 배속시켰다. 논의하는 이들은 오희가 문서를 담당하는 사람이여서 장수가 된 적이 없으니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소상지巢尙之가 말하기를 “오희는 옛날에 심경지沈慶之를 따라 여러 번 전쟁을 경험하여 용기 있게 결단하고 전투에 익숙하니 만약 그에게 맡길 수 있다면 반드시 공적을 이룰 것입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그를 파견하였다.
오희는 성품이
관후寛厚하여서 누차
동오東吳 지역에 사신 갔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사모하였다.
注+③ ≪資治通鑑≫에는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사모하였다.” 하였다. 이때 오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멀리서 그 모습만 보고도 항복하거나 흩어졌다.
국산國山에
注+④ 國山은 陽羨縣 경내에 있다. 晉나라 때에는 義興郡을 세우고, 陽羨縣을 나누어 國山縣을 두고 의흥군에 소속시켰다. 이르러
동군東軍(동쪽 지역의 반군)과 조우하여 격파하여 그 장군을 참수하고 전진하여
의흥義興을
注+⑤ 胡三省이 말하기를 “義興은 지금 常州의 宜興이다. 우리 宋나라 太平興國 원년(976)에 을 피하여 宜興으로 바꾸었다. 여기의 긴 다리는 荊溪의 상류에 있는 것이다. 지금 宜興縣 남쪽 20步에 荊溪가 있는데, 위로 1백 개의 개울을 이어받고 겸하여 몇 郡의 물을 받아들인다. 劉延熙는 木柵을 세우고 荊溪의 다리를 끊어서 자신을 보전한 것이다. ≪輿地志≫에 말하기를 ‘지금 常州 宜興縣 남쪽 30步에 긴 다리가 있는데 바로 곳이다.” 하였다. 압박하였다.
유연희劉延熙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긴 다리를 끊고서
의흥군義興郡을 직접 지켰다. 그러자 오희가 성책을 쌓아 포위하고 유연희와 서로 대치하였다.
유업庾業이
장당長塘에 성을 쌓아 유연희와 서로 호응하려 하였는데, 마침
송주宋主가 다시
독호督護 임농부任農夫를 파견하여 임농부가 여기에 이르러서
注+⑤ 여기에서 句를 뗀다. 유업의 성이 완성되기 전에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그들의 배와 병장기를 거두었다.
그러고 나서 의흥군을 향해 전진하여 오희를 도와서 의흥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반군의 여러 보루들이 모두 무너지자 유연희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目
[
목目] 이때에
유휴인劉休仁이
강방흥江方興 등을 보내어
자은赭圻에 나아가게 하였다.
심유지沈攸之는
은효조殷孝祖가 이미 죽었으니 다음 날 공격하지 않으면 허약함을 보이는 것이고, 강방흥의 명예와 지위가 서로 버금가서
注+① 沈攸之와 江方興은 모두 寧朔將軍이었으므로, 명예와 지위가 서로 버금간다고 한 것이다. 亞는 버금이다. 반드시 자신의 아래가 되지 않을 것이니 군대의
정령政令이 통일되지 않음은 패배를 초래하는 길이라 하고,
마침내 제군諸軍의 주장主將들을 이끌고서 강방흥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의 성공 여부는 오직 내일 아침 한 번의 전투에 달려 있으니 이기지 못하면 대세가 틀어질 것이다. 여러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내가 마땅히 통군統軍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 자신을 헤아려보면 재능이 적어 재간과 책략이 경卿보다 못하다. 지금 바로 그대를 추대할 것이니 다만 서로 함께 힘을 다할 뿐이다.”
강방흥은 매우 기뻐하여 허락하였는데, 제군諸軍의 주장들 중에 어떤 사람이 심유지를 책망하자 심유지가 말하였다. “나는 본래 난리를 함께 구제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살리려고 하는 것이니 어찌 명예와 지위의 높낮이를 따져서 스스로 분란을 조성하겠는가.”
다음 날에 강방흥이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나아가 전투하여
남군南軍(
심양尋陽의 반군)을 크게 격파하고
소호구巢湖口와
백수구白水口의 두 성을
注+② 孫沖之가 湖口․白口에 두 개 성을 쌓았다. 湖口와 白口는 巢湖口와 白水口를 말한다. 빼앗았는데, 황제(
유욱劉彧)가 조서를 내려서 심유지에게 선봉을 감독하게 하니,
도량陶亮이 크게 두려워하여
손충지孫沖之를 불러서
작미鵲尾로 돌아오게 하고
설상보薛常寳를 남겨서
자은赭圻를 지키게 하였다.
이때 전쟁이 크게 일어나 국가 재정이 부족하니, 백성을 모집하여 조정에 돈과 곡식을 바치게 하고 그들을 차등에 따라 관직에 보임하였는데도 군대에는 식량이 부족하였다.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장사將士들을 위로하면서 양식의 분배를 고르게 하고, 죽은 이를 조문하고 다친 이를 문병하면서 몸소 긍휼히
注+③ 隱은 헤아림이며 아파함이다. 恤은 근심함이며 가여워함이다. 여겼다. 이 때문에 10만 군사 중에 이반할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등완鄧琬이 유호劉胡를 보내어 군사 10여만 명을 통솔하여 작미에 주둔하게 하였다. 유호는 노숙한 장군이라, 용감하고 임기응변이 많아서 누차 전공戰功을 세우니 장사將士들이 경외하였다.
참군參軍 채나蔡那의 자제들이
양양襄陽에 있었다. 유호는 전투할 때마다 그들을 성 밖에 매달아 두었는데, 채나는 전진하여 싸우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注+④ 劉胡는 襄陽에서 동쪽으로 내려갈 적에 蔡那의 子弟를 구속하여 군대를 따르게 한 것이다. 오희吳喜 역시 휘하의 5천 명을 통솔하고 아울러 군수품을 운반하여 자기에 도착하였다.
目
[
목目]
은염殷琰이
유순劉順을 보내서
제장諸將을 감독하여
완당宛唐에 웅거하게 하였는데
황보도열皇甫道烈은 토착
호족豪族이고
유륜柳倫은
대성臺省(조정)의 사자이므로 지휘를 받지 않았다.
注+① 宛唐은 살펴보건대 ≪水經註≫에 死雩로 되어 있다. ≪수경주≫에 이르기를 “肥水는 九江 成德縣을 지나 서북으로 가서 芍陂로 들어가고, 또 북쪽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閻潤水와 합류하고, 물이 모여 陽湖가 되었다. 陽湖水는 제방에서 서북쪽으로 가서 死雩亭을 지나는데, 宋나라 泰始 초기에 劉順이 점거하여 劉勔에게 항거한 곳이다.” 하였다. 杜佑의 ≪通典≫에는 死虎로 되어 있고, 말하기를 “死虎는 地名이니, 壽州 壽春縣 동쪽 40여 里에 있다.” 하였다. ≪資治通鑑≫에는 “이때 殷琰이 보낸 諸軍이 모두 劉順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皇甫道烈은 토착 豪族이고, 柳倫은 臺省(조정)에서 파견한 인물인데 유순은 본래 한미한 출신이므로 오직 두 군대만은 통솔하고 감독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다.
유면劉勔이 막 도착하여 참호와 보루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에 유순이 공격하려 하였는데, 황보도열과 유륜柳倫이 안 된다고 하니 유순이 홀로 전진할 수 없어 마침내 중지하였다. 유면의 진영이 완성되고 나서는 다시 공격할 수 없어서 그대로 서로 굳게 지켰다. 유순 등의 양식이 바닥나자 은염의 장수 두숙보杜叔寳가 쌀을 실어서 수송하였다.
여안국呂安國이 말하기를 “유순은 정예병이 8천 명인데 우리 군대는 반도 되지 못하니, 의존할 것은 저들의 식량이 장차
注+② 行(장차)은 將과 같다. 고갈하는 것이요, 우리들의 식량이 넉넉한 것뿐입니다. 만일 쌀을 도착되게 하면 다시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샛길로 가서 저들의 쌀 수레를 습격하여 저들이 생각지 못한 곳을 공격해야 하니, 만약 이를 제압할 수 있으면 장차 싸우지 않고도 패주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유면은 옳다고 여기고 피로하며 허약한 자들로 군영을 지키게 하고 정예병 1천 명을 뽑아서 여안국에게 배속시켜서 샛길을 따라가서 쌀 수레를 빼앗게 하였다. 여안국이 그 선두 대열 5백 명을 참수하자 두숙보가 쌀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5월에 유순의 부대가 붕괴되어 도주하자 이에 유면이 북을 치며 행군하여 수양壽陽으로 가서 제군諸軍과 함께 성 밖 여러 산에 군영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사람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은염의 죄를 사면하니 은염은 두숙보와 함께 항복하려 하였으나 군심軍心이 일치하지 않아서 다시 성곽을 둘러싸고 굳게 수비하였다.
目
[
목目]
장흥세張興世가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는데, 이와 같이 며칠을 하였다.
유호劉胡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아직도 감히 저들을 뛰어넘어 하류로 내려가
양주揚州를
注+① 揚州는 建康을 말한다. 빼앗지 못하고 있는데, 장흥세가 뭐하는 사람이기에 경솔히 우리의 배후를 점거하려 하는가.”라고 하고는 이 때문에 대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4경更(오전 2시)에 바람이 유리해지자 장흥세가 돛을 올려 곧장 전진하여 작미鵲尾를 통과하였다. 유호가 군대를 보내 추격하자 장흥세는 그 장수 황도표黄道標를 몰래 보내 쾌선 70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전계錢溪로 향하여 영채營寨를 세우게 하고 다음 날 군사를 인솔하여 전계를 점거하였다.
유호는 직접
수군水軍과
보군步軍 26
군軍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자
장사將士들이 유호의 군대를 맞아 공격하려 하였는데, 장흥세가 말하기를 “적들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고 적의 기세가 왕성하고 화살처럼 빠르다. 빠르면 힘이 다하기 쉽고
注+② “易盡”은 화살이 쉽게 다함을 말한다. 왕성하면 쇠하기 쉬우니 저들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유호의 군대가 와서 가까이 다가왔다. 유호의 배가 소용돌이치는 곳으로 들어오자 장흥세가 임농부任農夫 등에게 명하여 장사壯士를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고, 여러 군대를 계속 전진시키니 유호가 패하여 도주하였다.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전계성錢溪城이 아직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유지沈攸之 등에게 명하여 농호濃湖를 공격하게 하여 유호의 병력을 분산시키게 하였다. 유호가 과연 다시 장흥세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유호의 군대가 전계성에 도착하기 전에 원의袁顗가 심유지 등의 군대를 급히 추격하니 전계성이 마침내 완성될 수 있었다.
유호가 사람을 보내어 “전계성이 이미 평정되었다.”라고 크게 외치게 하니, 대군臺軍들이 두려워하였다. 심유지가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만 명 중에 응당 한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왔을 것인데, 〈아직 돌아온 자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저들이 싸움에 불리하여 헛소리를 외쳐서 아군을 의혹시키려고 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
군중軍中을 신칙申飭하여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못하게 하니, 얼마 후 승첩이 도착하였다. 심유지는 포획한 적병의 귀와 코를 농호에 보이자 원의가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目
[목目] 8월에 농호濃湖의 군사들이 식량이 부족하니, 등완鄧琬이 물자와 식량을 대규모로 수송하는데 장흥세張興世를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유호劉胡가 다시 전계錢溪를 공격하려다가 이윽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젊어서 보전步戰에 익숙하고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니, 가령 보전步戰은 〈그 승패가〉 늘 수만의 군사 중에 달려 있지만 수전水戰은 한 척의 배 위에 있는 군사에 달려 있다. 이 때문에 배마다 각기 전진하여 다시 서로 상관하지 않고 〈그 처지가〉 바로 〈배 위의 군사〉 30명 중에 달려 있게 되니, 전계를 공격하는 것은 만전萬全의 계책 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
원의袁顗는 유호가 싸우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유호에게 말하기를 “군량의 운송이 막혔으니
注+① “鯁塞”은 물고기의 가시가 목구멍에 막힘과 같음을 말한다. 이러한 경우에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호는 마침내 병사를 보내어 도보로
남릉南陵으로 가게 하여 쌀 30만
곡斛과 돈․포목을 수십 척 배에 싣고 배 위에 목판을 세워서 성루를 만들어 전계를 돌파하여 지나갈 것을 꾀하다가 배들이
귀구貴口에 이르러 감히 전진하지 못하자
注+② 豎는 세움이고, 榜은 나무 조각이다. ≪水經註≫에 “江水가 石城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는 곳을 貴口라 한다.” 하였다., 장흥세가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게 하여 노획하였다.
〈장흥세의 군대가〉 전진하여 유호의 군영을 압박하니, 유호가 제압하지 못하여 마침내 도망가고 원의 역시 도주하자, 유휴인劉休仁이 군대를 정비하고 원의의 군영으로 들어가서 항복한 병사 10만 명을 받아들였다. 원의는 작두鵲頭에 이르러 어느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目
[목目] 등완鄧琬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계책을 세우지 못하자, 장열張悅이 병을 핑계로 등완을 불러 일을 상의하자고 하면서 측근들을 시켜 장막 뒤에 갑사甲士를 숨겨두고서 술을 내오는 것을 가지고 〈등완을 공격하는〉 신표信標로 삼았다. 등완이 도착하자 장열이 계책을 물으니,
등완이 말하기를 “바로 진안왕晉安王(유자훈劉子勛)을 참수하고 창고를 봉하여 사죄謝罪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열이 말하기를 “금일에 어찌 전하殿下(유자훈劉子勛)를 팔아서 살기를 구할 것인가.”라고 하고 이어서 술을 내오라고 하자, 복병이 나와서 등완을 참수하였다. 〈장열이〉 한 척의 배를 타고서 등완의 수급을 가지고 유휴인劉休仁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채나蔡那의 아들이
심양尋陽의
작부作部에
注+① 作部는 병기와 의장을 만드는 것을 주관하니 尋陽城 밖에 있다. 갇혀 있었는데, 〈심양이 혼란해지자〉 형틀을 풀고 탈출하여
심양성尋陽城에 들어가서
유자훈劉子勛을 가두자
심유지沈攸之의 여러 군대가 도착하여 유자훈을 참수하고 그의 수급을 파발마로
건강建康에 보내니, 이때 유자훈의 나이가 11세였다.
유자업劉子業의 시대에 관원들이 재앙을 두려워하여 모두 멀리 탈출하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외방의 난리에 유리되어 100명 중에 1명도 생존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채흥종蔡興宗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注+② 宋主 劉子業 景和 원년(465)에 袁顗가 雍州刺史로 나가기를 요구하였는데, 이때 그의 외삼촌 蔡興宗이 荆州長史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원의가 말하기를 “朝廷의 형세는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중앙에 있는 大臣들도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보장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니, 채흥종이 말하기를 “宮省 안팎의 사람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니 당연히 변란이 있을 것이다. 가령 중앙의 혼란은 그칠 수 있지만 외방의 혼란은 반드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외방에서 온전함을 구하려 하고 나는 중앙에서 재앙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휴인이 심양에 들어와서
오희吳喜 등을 보내어
형주荆州․
영주郢州․
옹주雍州․
상주湘州․
예장豫章으로 가서 남은
반군叛軍을 평정하게 하고,
유호劉胡가 도주하여
석성石城에
注+③ 여기의 石城은 竟陵의 石城이다. 이르자 그를 잡아 참수하였다.
目
[목目] 송宋나라 서주자사徐州刺史 설안도薛安都, 익주자사益州刺史 소혜개蕭惠開, 양주梁州 유원호柳元怙, 연주兗州 필중경畢衆敬, 예장태수豫章太守 은부殷孚, 여남태수汝南太守 상진기常珍奇가 모두 사신을 보내 건강建康에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송주宋主(유욱劉彧)는 남쪽 지역이 이미 평정된 것으로 회북淮北에 위엄을 보이고자 하여 장영張永․심유지沈攸之에게 명하여 병사 5만을 거느리고 설안도를 맞이하게 하였다.
채흥종蔡興宗이 말하기를 “설안도가 귀순하는 것은 허위가 아니니 바로 한 명 사신만 필요할 뿐입니다. 지금 많은 병사로 그를 맞이하면 형세상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설안도는 외방에서 큰 진영을 차지하고 있고 변경에 가까우면서 땅이 험준하고 병력이 강성하니 더욱 그를 길들여야 합니다. 만일 그가 외방에서 반란하여 북쪽의 적군(북위北魏)을 불러 끌어들이면 장차 조정(황제)이 이에 골몰하여 밥을 제때 먹지 못하는 우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송주宋主가 따르지 않고 소도성蕭道成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이를 이용하여 북쪽(설안도)을 토벌하고자 하니 경卿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설안도는 교활함이 많으니 병력으로 핍박하면 국가의 이익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송주宋主는 역시 따르지 않았다.
설안도는 과연 두려워하여 반란하고 상진기常珍奇도 현호懸瓠를 가지고 북위北魏에 투항하여 모두 자신들을 구하고자 북위北魏에 군사를 청하였다.
目
[목目] 유면劉勔이 수양壽陽을 포위하여 전투에 승리하지 않은 일이 없고 관후寛厚함으로 민심을 얻었다. 심양尋陽이 평정되고 나서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중서성中書省에게 조서를 짓게 하여 은염殷琰에게 유시하려 하였는데, 채흥종蔡興宗이 말하기를
“반란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바로 은염이 잘못을 반성할 때입니다. 마땅히 손수 쓰신 조서를 내려서 그를 위로하고 불러야 합니다.
注+① 慰는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함이고, 引은 인도하여 귀순하게 함이다. 지금 다만 중서성에서 조서를 지어 내리면 은염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니 한 지방의 난리를
注+② “方難”은 한 지방의 난리를 말한다. 속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나
송주宋主는 따르지 않았다.
은염이 과연 유면의 속임수라고 의심하여 북위北魏에 항복하려 하자, 주부主簿 하후상夏侯詳이 말하기를 “금일의 거사는 본래 나라에 충절忠節을 바치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사직社稷을 받드는 임금이 있으면 바로 조정에 귀순해야 합니다. 어찌 북위北魏에게 북면北面(칭신稱臣)하여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북위北魏 군대가 가까이
회수淮水 가에 있고
注+③ 北魏의 군대는 西河公 拓跋石의 군대를 이른다. “淮次”는 淮水의 물가이다.,
관군官軍은 아직 우리의 의향을 헤아리지 못하니, 만약 조정에 사자를 보내 귀순할 성심을 보이면 반드시 후하게 위로하고 받아들일 것이니 어찌 죄를 면할 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은염이 하후상으로 하여금 성을 나가서 유면을 만나게 하고 이르기를 “성안의 병사와 백성들은 장군의 주벌을 겁내어 모두 스스로 북위北魏에 귀순하려고 합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관대히 용서해주신다면 서로 이끌고 장군에게 투항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유면이 허락하였다.
은염이 성을 나와서 항복하자, 유면은 모두 위로하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장사將士들을 엄히 단속하여 조금도 침해하지 않으니 수양壽陽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북위北魏 군대가 도착할 쯤에 은염이 이미 조정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양義陽을 약탈하고서 떠났다.
目
[목目] 소혜개蕭惠開가 익주益州에 있으면서 마음대로 형벌하고 주벌하는 경우가 많으니 여러 군郡들이 배반하고 병사를 연합하여 성도成都를 포위하였는데, 심양尋陽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투어 성을 도륙하려 하였다.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소혜개의 아우 소혜기蕭惠基를 성도成都로 사신 보내어 소혜개를 사면하니, 소혜개가 항복하였고 성의 포위도 풀렸다.
소혜개를 건강建康으로 소환하여 송주宋主가 군대를 일으킨 상황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신臣이 오직 반역하거나 귀순할 줄만 알고,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송주宋主는 그를 사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