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신선술神仙術을 구하게 하였고, 회수淮水를 건너고 양자강揚子江에서 배를 타고 가 남군南郡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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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진秦시황始皇이 동쪽으로 가 군현郡縣들을 순행하면서 추역산鄒嶧山에 올라가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注+행行(순행)은 거성去聲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노魯나라 추현鄒縣이 있으며, 역산嶧山이 그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동쪽으로 순행하는 진秦 시황제始皇帝
그때 노魯나라의 유생儒生이 봉선封禪에 대해서 의논하였는데,注+봉封은 흙을 쌓는 것이다. 하늘은 높아서 닿을 수가 없으므로 태산 위로 흙을 져 날라서 단壇을 만들어 제사한 것이니, 이는 신령과 가까워지기를 기대해서이다. 선禪은 땅을 깎는 것이다. 본래 선墠인데, 뒤에 선禪으로 고쳤으니, 신령스럽게 여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에 봉선封禪을 할 때 부들로 수레를 감싸서 산의 흙과 돌, 풀과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注+“포거蒲車”는 부들로 수레바퀴를 싸는 것이다.
그리고 땅을 쓸고서 제사를 지내되, 띠풀과 짚으로 자리를 깔게 하였습니다.”注+저葅는 본래 조蒩로, 종소宗蘇의 절切이니, 띠풀을 까는 것이다. 개稭은 갈秸과 통용하여 쓰이며, 흘힐訖黠의 절切이니, 짚을 말한다. 저葅는 천신薦新을 하기 위해서 까는 것이고, 개稭은 사람이 앉기 위해서 까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의논이 각자 달라 일치되지 않았다.
그러자 진秦시황始皇이 그 의논을 쓰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드디어 유생들을 쫓아내고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내었다.注+제除는 열고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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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그런 다음 태산泰山의 남쪽으로부터 산을 올라가 꼭대기에 이르러 비석을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그러고는 태산 북쪽의 길을 통하여 내려와서 양보梁父에서 선禪을 행하였는데,注+산의 남쪽을 양陽이라 하고, 산의 북쪽을 음陰이라 한다. 전顚은 꼭대기이다. 부父는 음이 보甫이다. 양보梁父는 태산泰山 아래에 있는 작은 산의 이름이다.
이 있고, 또 석검石檢 열 개를 돌의 모퉁이에 늘어놓는다. 옥검玉檢과 석검石檢은 금승金繩으로 다섯 번을 두르고, 수은水銀과 금金을 섞어서 금니金泥를 만들어 봉하고, 수명지새受命之璽의 도장으로 찍는다. 또 옥궤玉匱가 있는데, 한쪽 면의 크기가 1척 2촌이며, 여기에는 상제上帝의 옥책玉冊을 담아놓는다. 또 금궤金匱 두 개가 있는데, 황제의 옥책玉冊을 담아놓는다.
에서 제사 지내고, 일곱 번째는 일주日主로 성산成山에서 제사 지내고, 여덟 번째는 사시주四時主로, 낭야琅邪에서 제사 지낸다.”고 하였다. 그 주에 “천제天齊는 샘의 이름으로, 하늘의 배꼽과 같은 것이다. 치우총蚩尤冢은 동평군東平郡수장현壽張縣에 있다. 삼산三山은 동래東萊곡성曲成의 참산參山으로, 바다 속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라가 층대를 만들고 돌에 새겼다.注+《사기정의史記正義》에 “낭야산琅邪山은 밀주密州제성현諸城縣의 동남쪽에 있으니, 진秦시황始皇이 산 위에 층대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에 이르기를 “이미 죽었는데도 형체가 산 사람과 같은 경우도 있고, 이미 죽었는데도 발이 푸르게 변하지 않고 피부가 쭈글쭈글해지지 않고, 눈빛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있고, 염습殮襲을 하기 전에 시신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형신形神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시해尸解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齊나라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燕나라 소왕昭王 등이 모두 그것을 믿어,注+위선威宣은 제齊나라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을 말한다. 사람들을 시켜 바다를 건너가서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瀛洲를 찾게 하였다.
삼신산三神山을 찾으러 갔던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 삼신산三神山은 발해渤海의 바다 가운데 있어 사람들이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곳에 도착하면 바람이 일어나서 배를 끌어가 도착할 수 없는 것이 걱정이다.
일찍이 그곳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러 신선들과 불사약이 모두 있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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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때에 이르러서 방사方士서불徐巿 등이 글을 올려,注+서불徐巿이 일본一本에는 서복徐福으로 되어 있다. “목욕재계하고서 아주 어린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찾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진秦시황始皇이 서불을 보내어 아주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수천 명을 뽑아 데리고 가서 그것을 구하게 하였다.
이에 배가 바다를 오갔는데, 모두들 바람이 불어서 그곳에 도착할 수 없었다고 해명하면서 말하기를,注+모두 바람을 만나 삼신산三神山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능히 그곳에 다다르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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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진秦시황始皇이 돌아오다가 팽성彭城을 지날 때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초楚나라에 팽성현彭城縣이 있으니, 옛날에 팽조국彭祖國이 있던 곳이다.”고 하였다. 목욕재계하고 사당에 기도한 다음,
을 사수泗水에서 건져내고자 하여, 사람 1,000명을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서 찾아보게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注+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송宋나라의 태구太丘에서 지내는 제사가 없어져서 주정周鼎이 사수泗水 속으로 사라졌다.”라고 하였으므로, 사수泗水에 제사를 지내어 주정周鼎을 건져내고자 한 것이다.
에 이르러注+《시경집전詩經集傳》 〈주남周南한광漢廣〉에 이르기를 “강수江水는 영강군永康軍민산岷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한수漢水와 합해진 다음, 동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황릉묘黃陵廟가 악주岳州의 상음현湘陰縣 북쪽에 있는데, 순舜임금의 두 비妃의 신을 모신다. 두 비妃의 무덤이 상음현湘陰縣청초산靑草山 위에 있다.”라고 하였다.
의 《형주기荊州記》에 이르기를, “청초호靑草湖의 남쪽에 청초산靑草山이 있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상산湘山은 바로 이 산을 가리킨다. 산이 상수湘水에 가까이 있고, 황릉묘가 산의 남쪽에 있으므로 상산사湘山祠라고 한 것이다. 큰바람을 만나 거의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상이 묻기를, “상군湘君은 어떤 신인가?”注+상上이란 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는 곳이다. 단지 상上이라고만 말하고, 감히 존호를 칭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자, 박사博士가 대답하기를, “요堯임금의 딸이고 순舜임금의 아내인데, 이곳에 장사 지냈습니다.”注+박사博士는 유학儒學으로 관직에 임용된 사람이니, 고금의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니, 진 시황이 크게 노하여 그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게 하였다.注+자赭는 음이 자者이며, 붉은색을 말한다.
역주14形解銷化의 術法 :
사람이 죽으면 형체는 분해되어 없어지고 정신은 날아가서 신선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역주15白澤圖 :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책이다. 黃帝가 蚩尤를 멸망시킨 뒤 동해에 이르러 桓山에 머물고 있을 때 白澤이란 요괴가 나타나 11,520종이 넘는 고대의 精氣가 요괴로 변한 사실을 말해 주었는데, 黃帝가 白澤이 말한 내용을 기초로 하여 요괴의 형상을 그려 《백택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역주16尸解 :
신선술의 하나로, 身體만 남겨두고 魂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즉 신선이 되어간 것을 의미한다.
역주17集仙錄 :
唐나라 말기의 道士인 杜光庭이 저술한 《墉城集仙錄》을 말한다.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주18周鼎 :
禹임금이 九州의 쇠를 모아 만든 아홉 개의 솥을 말한다. 秦나라 昭襄王 52년(B.C. 255)에 西周를 공격하여 이 九鼎을 탈취하였는데, 하나가 泗水에 빠졌으므로 여덟 개만 秦나라로 들여왔다고 한다. 그 뒤에 秦 始皇이 사수의 周鼎을 꺼내려고 1천 명을 동원해서 물속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역주19湘山祠 :
湖南省 岳陽縣 동쪽의 洞庭湖 가운데 있는 산인 君山에 있는 사당으로, 舜임금의 두 妃인 娥皇과 女英을 제사 지냈다.
역주20盛弘之 :
南朝 宋나라 때 사람으로, 貫籍과 생애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당대의 문장가인 鮑照와 친하게 지냈으며, 《荊州記》 3권을 편찬했는데,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