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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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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年(273)
晉泰始九年이요 吳鳳凰二年이라
夏四月朔 日食하다
鄧艾之死 人皆冤之 而無爲之辨者注+爲, 去聲, 下樂爲同.러니 及晉主卽位
議郞段灼 上疏曰 艾本屯田掌犢人注+艾本義陽棘陽人, 魏太祖破荊州, 徙汝南, 爲農民養犢.이러니 寵位已極하고 功名已成하니 七十老公 復何所求리오
正以劉禪 初降 遠郡未附 矯令承制하여 權安社稷이라
鍾會有悖逆之心호되 畏艾威名하여 因其疑似하여 構成其事하니 艾被詔書 卽束身就縛하니 誠知奉見先帝 必無當死之理也
會受誅之後 艾將吏愚戇하여 自共追艾하여 解其囚執하니
艾在困地하여 未嘗與謀 而獨受腹背之誅하니 豈不哀哉注+腹在前, 背在後, 謂前後皆不免於誅.
謂宜聽艾歸葬하고 還其田宅하며 繼封定諡 則艾死無所恨이요
而天下徇名之士 思立功之臣 必投湯火하여 樂爲陛下死矣리이다
晉主善其言而未能從也러니 至是하여 問給事中樊建以諸葛亮之治蜀하고 曰 吾獨不得如亮者而臣之乎注+建故蜀臣.
建稽首曰 陛下知鄧艾之冤이로되 而不能直하시니 雖得亮이라도 得無如馮唐之言乎注+言不能用也.
晉主笑曰 卿言起我意라하고 乃以朗爲郞中하다
吳殺其侍中韋昭하다
吳人多言祥瑞者러니 吳主以問昭한대 昭曰 此家人筐篋中物耳注+言祥瑞而謂之家人筐篋中物者, 蓋稱引圖緯以言祥瑞之應, 故謂其書爲家人筐篋中物也.니이다
昭領國史 吳主欲爲其父作紀注+爲, 去聲. 紀者, 記也, 本其事而記之, 故曰本紀. 又紀, 理也, 絲縷有紀. 而帝王書稱紀者, 言爲後代綱紀也.어늘 昭曰 文皇不登極位하니 當爲傳注+吳主諡其父和曰文皇帝. 傳, 直戀切. 列傳者, 謂敍列人臣事迹, 令可傳於後世, 故曰列傳.이니이다 吳主不悅이어늘 昭求去不聽이러니
吳主飮群臣酒할새 不問能否하고 率以七升爲限注+飮, 於禁切.호되 至昭獨以茶代러니 後更見強注+強, 巨兩切.하고
又酒後 常使侍臣으로 嘲弄公卿하여 發摘私短以爲歡注+摘, 與擿通.호되 昭但難問經義而已注+難, 去聲. 吳主積怒하여 遂誅之하다
秋七月朔 日食하다
晉主詔選公卿以下女備六宮 有蔽匿者어든 以不敬論注+以律不敬論罪也.하고
采擇未畢 權禁天下嫁娶하여 公卿女中選者 爲三夫人九嬪하고 二千石將校女 補良人以下注+中, 去聲. 東漢皇后紀 “秦幷天下, 宮備七國, 爵列八品.” 注 “正嫡稱皇后, 妾皆稱夫人, 又有美人‧良人‧八子‧七子‧長使‧少使之號.”하다
九月 吳殺其司市陳聲하다
吳主愛姬遣人至市奪民物이어늘 聲繩之以法하니 吳主怒하여 假他事燒鋸斷聲頭하여 投其身於四望之下注+據晉書溫嶠傳 “嶠討蘇峻於石頭, 結壘於四望磯.” 又據南史 “石頭有四望山.” 蓋山下有磯也.하다


癸巳年(273)
나라 世祖 武皇帝 司馬炎 泰始 9년이고, 吳主 孫皓 鳳凰 2년이다.
[] 여름 4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나라가 鄧艾의 손자 鄧郞郞中으로 삼았다.
[] 예전에 鄧艾의 죽음을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으나, 그를 위해 변명하려는 자가 없었는데,注+(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 “樂爲”의 도 같다. 晉主가 즉위하자
議郞 段灼이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등애는 본래 屯田을 하는 곳에서 소 기르는 일을 담당하던 사람이었는데,注+鄧艾는 본래 義陽 棘陽 사람으로, 나라 太祖荊州를 격파했을 때, 汝南으로 이주하여 농민이 되어 소를 길렀다. 총애와 지위가 이미 지극하고 功名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일흔 살 된 노인이 다시 무엇을 구하였겠습니까.
바로 劉禪이 처음 항복하였을 때 멀리 있는 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아 명령을 사칭하고 承制하여 임시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鍾會悖逆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등애의 威名을 두려워하여 그의 의심스런 일을 이용하여 그런 일을 꾸며대자, 등애가 조서를 펴보고는 즉시 자기 몸을 결박하였으니, 진실로 先帝(司馬昭)를 받들어 알현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마땅히 죽어야 할 이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회가 주살된 뒤에 등애의 장령과 관리들이 어리석어 함께 등애를 쫓아가서 갇힌 등애를 풀어주니,
등애가 곤경에 처하여 아직 더불어 모의한 적이 없었는데, 홀로 앞뒤로 주벌을 받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注+배는 앞에 있고 등은 뒤에 있으니, 앞뒤에서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땅히 등애를 歸葬하도록 허락하시고 그의 田宅을 돌려주시며 후손들이 封爵을 잇게 하고 諡號를 정해주시면 등애가 죽었지만 한스러워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천하에서 명예를 좇는 선비와 공로를 세울 것을 생각하는 신하들이 반드시 펄펄 끓는 물과 타는 불속에도 뛰어들어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즐거워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晉主가 그 말을 좋게 여겼지만, 아직 따를 수는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給事中 樊建에게 諸葛亮蜀漢을 다스린 상황을 묻고서 말하기를 “나만 제갈량과 같은 신하를 얻어 신하로 삼을 수 없단 말인가.”注+樊建은 옛날 蜀漢의 신하이다.라고 하니,
번건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등애가 원통하게 죽은 사실을 아시면서도 바로잡을 수 없으셨는데, 비록 제갈량과 같은 자를 얻는다 하더라도 注+〈“得無如馮唐之言乎”는〉 등용하지 못함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晉主가 웃으며 말하기를 “의 말이 나의 생각을 일깨워주었다.”라고 하고, 鄧郞郞中으로 삼았다.
[] 나라가 侍中 韋昭를 죽였다.
[]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자, 吳主(孫皓)가 韋昭에게 물었는데, 위소가 말하기를 “이는 집안사람들의 광주리에 든 물건일 뿐입니다.”注+상서로운 징조를 말하였는데, 그것을 가지고 집안사람들의 광주리에 든 물건이라고 한 것은 圖讖緯書를 칭술하여 상서로운 조짐의 응험을 말하였기 때문에 그 글을 집안사람들의 광주리에 든 물건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소는 國史를 겸직하고 있었는데, 吳主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帝紀를 써주기를 바라자注+(위하다)는 去聲이다. 는 기록한다는 뜻이니, 일에 의거하여 기록하기 때문에 本紀라고 한다. 또 는 다스린다는 뜻이니, 실 가닥에는 ‘실마리[]’가 있다. 제왕에 대한 글을 라고 칭하는 것은 후대에 기강이 됨을 말한 것이다. 위소가 말하기를 “文皇帝(孫和)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니, 마땅히 列傳에 기록해야 합니다.”注+吳主는 그의 아버지 孫和諡號文皇帝라 하였다. (전기)은 直戀이다. 列傳은 신하의 사적을 차례하고 나열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는 것을 이르기 때문에 列傳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吳主가 기뻐하지 않자, 위소가 사직하기를 원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吳主가 여러 신하들에게 술을 마시게 할 적에 마실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지 않고 일률적으로 7을 한정하여 마시도록 하였는데,注+(마시게 하다)은 於禁이다. 위소가 홀로 로 대신하자 뒤에 다시 강제로 마시게 되었다.注+(억지로)은 巨兩이다.
또 술을 마신 뒤에는 늘 侍臣들을 시켜서 公卿들을 조롱하게 하여 개인적인 단점을 드러내는 것을 즐겼는데,注+(들춰내다)은 과 통용된다. 위소는 다만 經義를 논란하여 물을 뿐이었다.注+(논란하다)은 去聲이다. 그러자 吳主는 분노가 쌓여 드디어 그를 죽였다.
[] 가을 7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나라가 公卿의 딸을 선발하여 六宮을 충당하였다.
[] 晉主(司馬炎)가 조령을 내려 公卿 이하 관원들의 딸을 선발하여 六宮을 충당할 적에 숨기는 자가 있으면 불경으로 논죄하고,注+〈“以不敬論”은〉 不敬의 법률로 죄를 논한 것이다.
채택이 끝나기 전에는 시집가거나 장가가는 일을 임시로 금하여 公卿의 딸 중에 선발된 이는 으로 삼고 二千石將校의 딸은 良人 이하에 보충하게 하였다.注+(맞히다)은 去聲이다. ≪後漢書≫ 〈皇后紀序〉에 “나라가 천하를 겸병하여 後宮에 7국의 미녀를 갖추게 하고 后妃爵位를 8등급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李賢에 “正嫡皇后라 칭하고, 은 모두 夫人이라 칭하며, 또 美人, 良人, 八子, 七子, 長使, 少使의 호칭이 있다.”라고 하였다.
[] 9월에 나라가 陳聲을 죽였다.
[] 吳主(孫皓)의 애첩이 사람을 보내어 시장에 가서 백성의 물건을 빼앗아오게 하였는데, 陳聲이 그를 잡아서 법률로 처벌하자 吳主가 진노하여 다른 일을 빌미로 불에 달군 톱으로 진성의 머리를 잘라서 그의 몸을 四望山 아래에 던져버렸다.注+晉書≫ 〈溫嶠傳〉에 의거하면 “溫嶠石頭에서 蘇峻을 토벌하고 四望磯堡壘를 쌓았다.”라고 하였으며, 또 ≪南史≫ 〈宋宗室及諸王 〉에 의거하면 “石頭四望山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산 아래에 (물가 여울)가 있는 것이다.


역주
역주1 晉以鄧艾孫郞爲郞中 : “관직을 임명하는 데에 아직 아무개의 손자라고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鄧艾孫’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공로를 기록한 것이다. 이 때문에 ‘鄧艾孫朗’이라고 기록하였으니, 晉 武帝가 공을 기록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劉裕가〉 桓冲의 손자 桓胤을 죽였다고 기록한 것은 유유가 善을 해침을 기록한 것이다.(安帝 義熙 3년(407))[拜官 未有書某孫者 書鄧艾孫 何 記功也 是故書用鄧艾孫朗 所以志晉武之記功 書殺桓冲孫胤 所以志劉裕之賊善(安帝義熙三年)]” ≪書法≫
역주2 馮唐의……않겠습니까 : 漢나라 文帝가 郞署를 지나다가 늙은 郞官인 馮唐을 만나 그의 고향을 물으니 趙나라라고 하였다. 문제는 당시에 匈奴의 강성함을 걱정하여 趙나라의 옛날 장수 李齊의 이야기를 하며 감탄하였다. 풍당이 趙나라의 옛날 장수 廉頗와 李牧의 장한 점을 말하니, 문제는 엉덩이를 치며 “어찌하면 나도 그런 사람을 장수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풍당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염파와 이목을 만나도 등용하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당시에 魏尙이란 장수를 조그만 과실로 옥에 가둔 것을 비난하였는데, 문제가 깨닫고 즉시 풍당을 시켜 위상을 석방시켰다.(≪史記≫ 〈馮唐列傳〉)
역주3 晉選公卿女備六宮 : “딸을 뽑아 入宮시키는 것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선발하여 入宮시킨 것은 다섯 번인데(이해(273), 甲午年(274), 太康 2년(281), 唐 太宗 貞觀 13년(639), 後唐 乙酉年(925)) 오직 貞觀 13년에 쓴 것은 ‘詔’라고 허여한 말이다.[書選女入宮始此 綱目書采選入宮五(是年 甲午年 太康二年 唐太宗貞觀十三年 後唐乙酉年) 唯貞觀書詔 爲豫辭]” ≪書法≫
역주4 三夫人과 九嬪 : 天子가 두는 後宮을 말한다. ≪禮記≫ 〈昏義〉에 “옛적에 천자의 皇后는 六宮‧三夫人‧九嬪‧二十七世婦‧八十一御妻를 세운다.”고 하였다.
역주5 司市 : 저자의 政令, 도량형 등 禁令을 관장하는 관리이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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