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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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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年(289)
十年이라 夏四月 太廟成하다
◑慕容廆降이어늘 以爲鮮卑都督하다
廆謁見東夷校尉何龕할새 以士大夫禮하여 巾衣詣門注+東夷校尉, 蓋帝所置, 治遼東. 龕, 口含切. 巾衣, 士大夫衣冠, 魏‧晉間, 士大夫謁見尊貴, 以巾褠爲禮.이러니 嚴軍以見之어늘 廆乃改服戎衣而入하다
人問其故한대 廆曰 主人 不以禮待客하니 客何爲哉리오하니 聞之하고 甚慙이러라
鮮卑段國單于 以女妻廆하여 生皝, 仁, 昭注+慕容‧段氏, 遂爲婚姻之國. 皝, 胡廣切. 皝‧仁‧昭, 廆之三子名.하다 廆以遼東僻遠이라하여 徙居徒河之靑山注+徒河縣, 前漢屬遼西, 後漢屬遼東屬國, 魏‧晉省倂, 入昌黎郡界, 後慕容氏復置徒河縣.하다
冬十月 復明堂及南郊‧五帝位하다
◑十一月 尙書令荀勗하다
勗有才思하여 善伺人主意注+思, 相吏切. 以是 能固其寵하여 久在中書하여 專管機事러니 及遷尙書 甚罔悵注+罔, 與惘通. 悵或作𢠵. 惘𢠵, 失志貌.이러라
人有賀之者한대 勗曰 奪我鳳凰池하니 諸君何賀邪注+中書, 近禁地, 故云鳳凰池.오하니라
遣諸王하여 假節之國하여 하고 封子孫六人爲王하다
帝極意聲色하여 遂至成疾하니 楊駿 忌汝南王亮하여 以爲大司馬하여 都督豫州諸軍事하여 使鎭許昌하고
又徙皇子南陽王柬하여 爲秦王하여 都督關中하고 瑋爲楚王하여 都督荊州하고
允爲淮南王하여 都督揚, 江二州諸軍事호되 竝假節之國注+按惠帝元康元年, 有司奏 “荊‧揚二州, 疆土曠遠, 統理尤難.” 於是割揚州之豫章‧鄱陽‧廬陵‧臨川‧南康‧建安‧晉安, 荊州之桂陽‧安成‧武昌合十郡, 置江州, 則此時未有江州也. 疑江二二字衍, 更俟博考. 晉制, 都督諸軍事, 有使持節, 有持節, 有假節. 使持節, 得殺二千石以下. 持節, 殺無官位人, 若軍事, 與使持節同. 假節, 惟軍事得殺犯軍令者.하고
立皇子乂爲長沙王하고 穎成都王하고 晏吳王하고 熾豫章王하고 演代王하고 孫遹廣陵王하다
帝以才人謝玖 賜太子하여 生遹注+帝採漢‧魏之制, 三夫人‧九嬪之下 有美人‧才人‧中才人, 爵視千石以下. 玖, 擧有切.하다 宮中 嘗夜失火어늘 帝登樓望之한대
遹年五歲러니 牽帝裾하여 入闇中하고 曰 暮夜倉猝 宜備非常이니 不可令照見人主니이다
帝奇之하여 嘗稱遹似宣帝 故天下咸歸仰之러라 帝知太子不才 然恃遹明慧 故無廢立之心하고
復用王佑謀하여 以太子母弟柬, 瑋, 允으로 分鎭要害注+佑, 濟從兄也. 要害, 謂雍‧荊‧揚之地.하고 又恐楊氏之偪하여 以佑爲北軍中候하여 典禁兵注+北軍中候, 漢官, 掌北軍五營, 魏省. 泰始四年, 罷中軍將軍, 置北軍中候, 七年又罷, 中領軍倂焉.하다
◯帝爲遹하여 高選僚佐하니 以散騎常侍劉寔 志行淸素라하여 命爲之傅注+自魏以來, 王國置師‧友, 晉避景帝諱, 改師爲傅.하다
以時俗 喜進趣하고 少廉讓이라하여 嘗著崇讓論하여 欲令初除官通謝章者 必推賢讓能注+通, 進也. 謝章, 謂謝除官之章表也.하여
一官闕이면 則擇爲人所讓多者하여 用之 以爲人情 爭則欲毁己所不如하여 而優劣難分하고
讓則競推於勝己하여 而賢智顯出이니 當此時也하여 能退身修己하면 則讓之者多矣
馳騖進趣而欲人見讓이면 猶却行而求前也라하니라
◯時 又封宗室數人하니 淮南相劉頌 上疏하여 曰 陛下以法禁素寛하여 未可遽革이니이다
이나 矯時救弊 亦宜以漸이니 譬猶行舟 雖不橫截迅流 當漸靡而往하여 稍向所趨然後 得濟也注+此, 引濟川爲譬也. 靡, 順也. 濟大川者, 雖曰 橫絶大川, 亂流而渡, 然必因水勢漸靡而行舟向其所趨, 以登陸之路, 然後汔濟. 否則爲水勢所使, 不能制舟以向所趨, 不得登岸矣.니이다
臣聞爲社稷計 莫如封建親賢이라하니이다이나 宜審量事勢하여 使諸侯率義而動者 其力 足以維帶京邑하고
包藏禍心者 其勢不足獨以有爲 其齊此甚難하니이다
陛下 宜與達古今之士 深共籌之하소서 周之諸侯 有罪 身誅而國存하고
漢之諸侯 有罪어나 或無子者 國隨以亡注+身誅而國存, 如周烹齊哀公而立其弟靜, 宣王誅魯侯伯御而立孝公之類.하니 今宜反漢循周하면 則下固而上安矣리이다
天下至大하고 萬事至衆이라 是以 聖王 執要於己하고 委務於下하니 非憚勞而好逸이요 誠以政體宜然也니이다
夫居事始以別能否 甚難也 因成敗以分功罪 甚易也어늘
今陛下精於造始하고 而略於考終하시니 此政功所以未善이니이다
人主誠能居易執要하여 考功罪於成敗之後하면 則群下無所逃其誅賞矣리이다
古者 六卿分職하여 冢宰爲師하고 秦, 漢以來 九列執事하여 丞相都總注+此, 西都以前制也.이러니
今尙書制斷하고 諸卿奉成하니 於古制 爲太重注+自漢光武以來, 以吏事責尙書, 事歸臺閣, 諸卿奉成而已.이라
可出衆事付外寺하여 使得專之注+外寺, 謂諸卿寺.하고 尙書統領大綱하여 歲終 課功校簿而行賞罰이면 斯亦可矣리이다
今動皆受成於上이라 上之所失 不得復以罪下하니 歲終 事功不建이라도 不知所責也니이다
夫細故繆妄 人情之所必有 而悉糾以法이면 則朝野無立人矣니이다
近世爲監司者 類大綱不振하고 而微過必擧하니 蓋由畏避豪彊하고 而又懼職事之曠이면
則謹密網以羅微罪하여 使奏劾相接하니 狀似盡公이나 實則撓法이라
是以 聖王 不善碎密之案하고 必責凶猾之奏하니 則害政之姦 自然禽矣니이다
夫創業之勳 在於立敎定制하여 使遺風繫人心하고 餘烈匡幼弱하여
後世憑之하여 雖昏猶明하고 雖愚若智라야 乃足尙也注+言法制修明, 雖後嗣昏愚, 有所據依, 則其治猶若明智之爲也. 此言, 蓋指太子不能克隆堂構, 而帝又無典則以貽子孫也.니이다
至夫修飾官署 凡諸作役 此將來所不須於陛下而自能者也注+須, 待也.어늘
今勤所不須하고 以傷所憑하시니 竊以爲過矣라하노이다 帝不能用하다
以劉淵爲匈奴北部都尉注+時, 改匈奴五部帥, 爲五部都尉.하다
輕財好施하고 傾心接物하니 五部豪傑 幽, 冀名儒 多往歸之러라


己酉年(289)
[] 나라 世祖 武皇帝 太康 10년이다. 여름 4월에 太廟가 완성되었다.
[] 慕容廆가 항복하자, 그를 鮮卑都督으로 삼았다.
[] 慕容廆東夷校尉 何龕(하감)을 알현할 적에 士大夫를 따라 두건과 의복을 입고 에 이르렀다.注+東夷校尉 武帝가 설치한 것이니, 遼東治所를 두었다. 口含이다. “巾衣(두건과 의복)”는 사대부의 의관이니,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대부들이 존귀한 분을 알현할 때에 巾褠(두건과 홑옷)를 입는 것을 예의로 삼았다. 하감이 군대를 무장하고 그를 만나보자, 모용외가 마침내 군복으로 갈아입고 들어갔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모용외가 말하기를 “주인이 로써 손님을 대하지 않으니, 손님이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하감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鮮卑段國單于가 딸을 모용외에게 시집보내어 慕容皝(모용황), 慕容仁, 慕容昭를 낳았다.注+慕容氏段氏는 마침내 혼인한 나라가 되었다. 胡廣이니, 慕容皝, 慕容仁, 慕容昭는 모용외의 세 아들 이름이다. 모용외는 遼東이 궁벽하고 멀다 하여 徒河靑山으로 거처를 옮겼다.注+徒河縣前漢 때에는 遼西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遼東 屬國에 속하였으며, 나라와 나라 때에는 없애어 昌黎郡의 경계로 편입하였다가 뒤에 慕容氏가 다시 도하현을 설치하였다.
[] 겨울 10월에 明堂南郊五帝의 자리를 회복하였다.
[] 11월에 尙書令 荀勗하였다.
[] 荀勗은 재주가 있고 생각이 깊어서 군주의 뜻을 잘 살폈다.注+(생각함)는 相吏이다. 이 때문에 능히 총애를 견고히 하여 오랫동안 中書에 있으면서 중요한 기무를 전담하였는데, 尙書로 옮기고 나서는 큰 실의에 빠졌다.注+하고 은 𢠵으로 쓴 데도 있으니, 𢠵은 실의에 빠진 모양이다.
어떤 사람이 그를 축하하자, 순욱은 말하기를 “나의 鳳凰池를 빼앗았는데, 諸君들은 어찌 축하하는가.”注+中書는 궁중에서 가까우므로 鳳凰池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여러 왕을 내보내어 을 주어 封國으로 가서 여러 軍事를 감독하게 하고 아들과 손자 6인을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 황제가 음악과 여색에 마음을 다하여 마침내 병이 들었다. 楊駿汝南王 司馬亮을 시기하여 그를 大司馬로 삼아 豫州의 여러 軍事를 도독하게 하고 許昌에 진주하게 하였다.
皇子南陽王 司馬柬을 옮겨 秦王으로 삼아 關中을 도독하게 하고, 司馬瑋楚王으로 삼아 荊州를 도독하게 하고,
司馬允淮南王으로 삼아 揚州江州의 여러 군사를 도독하게 하였는데, 모두 을 주어 封國으로 가게 하였다.注+살펴보건대 惠帝 元康 원년(291)에 有司가 아뢰기를 “荊州揚州는 강토가 매우 넓어서 다스리기가 더욱 어렵다.” 하였다. 이에 揚州豫章, 鄱陽, 廬陵, 臨川, 南康, 建安, 晉安荊州桂陽, 安成, 武昌 등 도합 10을 떼어 江州를 설치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때에는 아직 강주가 있지 않았다. 의심컨대 “江二” 두 글자는 연문인 듯하니, 다시 널리 상고하기를 기다린다. 나라 제도에 都督諸軍事使持節이 있고, 持節이 있고, 假節이 있다. 사지절은 二千石 이하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고, 持節은 관직이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軍事의 경우에는 使持節과 같고, 假節의 경우에는 軍事에 한하여 軍令을 범한 자를 죽일 수 있다.
그리고 황자인 司馬乂長沙王, 司馬穎成都王, 司馬晏吳王, 司馬熾豫章王, 司馬演代王으로 삼고 손자 司馬遹(사마휼)을 廣陵王으로 삼았다.
[] 처음에 황제가 才人 謝玖(사구)를 태자에게 하사하여 司馬遹을 낳았다.注+황제는 의 제도를 채택하여 3명의 夫人과 9명의 아래에 美人才人, 中才人을 두었으니, 품계는 千石 이하에 비하였다. 擧有이다. 궁중에 일찍이 밤에 화재가 났는데, 황제가 누대에 올라 이것을 바라보았다.
이때 사마휼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황제의 옷소매를 잡아당겨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한밤중에 창졸간에는 마땅히 비상사태에 대비하셔야 하니, 불빛에 의해 군주를 보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황제는 그를 기특히 여겨 항상 사마휼이 宣帝(司馬懿)와 닮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마음이 돌아가고 우러렀다. 황제는 태자가 재주가 없음을 알았으나 사마휼의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믿었기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다시 세우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王佑의 계책에 따라 태자의 同母弟 司馬柬司馬瑋, 司馬允을 나누어 요해처에 진주시켰다.注+王佑王濟從兄이다. 요해처는 雍州, 荊州, 揚州의 지역을 이른다.楊氏의 핍박을 염려해서 왕우를 北軍中候로 삼아 禁軍을 관장하게 하였다.注+北軍中候나라 관직이니, 北軍五營을 관장했는데, 나라에서 없앴다. 泰始 4년(268)에 中軍將軍을 파하고 북군중후를 설치하였는데, 7년에 또다시 파하고 中領軍에 합병되었다.
[] 황제는 司馬遹을 위하여 동료와 보좌관을 엄선할 적에, 散騎常侍劉寔이 뜻과 행실이 청렴하고 검소하다 하여 명하여 皇孫로 삼았다.注+나라 이래로 제후왕의 나라에 를 설치하였는데, 나라는 景帝(司馬師)의 를 피하여 로 바꿨다.
유식은 당시 세속이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고, 청렴하고 겸양하는 자가 적다해서 일찍이 〈崇讓論〉을 지어 처음 관직에 제수되어 사례하는 글을 올리고자 하는 자로 하여금 반드시 어진 이를 추천하고 유능한 이에게 사양하게 하여,注+은 올림이다. “謝章”은 황제가 관직을 제수해준 것에 사례하는 奏章을 이른다.
한 관직에 결원이 생기면 사람들에게 양보를 많이 받은 자를 가려 등용하게 하려고 하였다. 〈숭양론〉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정상 다투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보다 나은 자를 훼방하여 우열을 구분하기 어렵고,
사양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앞 다투어 추천해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가 드러나게 되니, 이러한 때에 능히 뒤로 물러나 몸을 닦는다면 겸양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다.
출세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사람들이 사양해주기를 바라면, 이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전진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 이때에 또다시 宗室의 여러 사람을 봉하니, 淮南相 劉頌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폐하께서는 法禁을 평소 너그럽게 시행하여 갑자기 개혁할 수 없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로잡고 폐단을 구제함을 또한 마땅히 점진적으로 하여야 합니다. 비유하건대 배를 운행할 적에 비록 급류를 곧바로 가로질러 건너가지는 못하나, 마땅히 점점 물결을 순히 따라가서 차츰 나갈 곳으로 향한 뒤에야 물을 건널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注+이것은 냇물을 건넘을 끌어와 비유한 것이다. 함이다. 큰 냇물을 건너가는 자는 비록 “큰 냇물을 건널 적에 가로질러 건너간다.”고 하나, 반드시 물살이 점점 약해지는 곳을 따라서 갈 곳을 향하여 배를 몰아 육지에 오른 뒤에야 다 건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물살에 휩쓸려서 나갈 곳을 향해 배를 제어하지 못하여 江岸으로 오를 수 없다.
신이 듣건대 ‘社稷을 위한 계책에는 친족과 어진 이를 봉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사세를 자세히 살펴 제후 중에 를 따라 행동하는 자로 하여금 그 힘이 충분히 서울을 보호할 수 있게 하고,
를 일으킬 마음을 가슴속에 품은 자로 하여금 그 세력이 독단적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없게 하여야 하는데, 이것을 질서정연하게 시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고금을 통달한 현명한 선비와 함께 깊이 계책을 세우소서. 나라의 제후들은 죄가 있을 경우 몸은 죽임을 당했으나 나라는 보존되었고,
나라의 제후들은 죄가 있거나 자식이 없는 경우에 나라가 따라서 망하였으니,注+자신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나라가 보존된 경우는 지금 마땅히 나라 제도를 뒤집고 나라 제도를 따른다면 아랫사람이 견고하고 윗사람이 편안할 것입니다.
천하는 지극히 크고 萬事는 지극히 많습니다. 이 때문에 聖王이 자신은 요점만 잡고 사무는 아랫사람에게 맡겼으니, 이는 수고로움을 꺼리고 편안함을 좋아해서가 아니요 진실로 정사하는 체통이 그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처음 일을 처리할 때에는 능력이 있고 없음을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고, 뒤에 成敗에 따라 를 분별함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일의 처음에는 정밀하시고 일의 결과를 살필 때에는 소략하시기 때문에 정사의 효과가 좋지 못한 것입니다.
군주가 진실로 능히 평이한 곳에 거하여 요점을 잡아 성패가 분명해진 뒤에 공과 죄를 고찰하면, 아랫사람들이 誅罰에서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六卿이 관직을 나누어 담당해서 冢宰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나라와 나라 이후로는 九卿이 사무를 집행하여 丞相이 총괄하였습니다.注+〈“古者……丞相都總”은〉 西漢 이전의 제도이다.
지금은 尙書가 통제하고 결단하며 여러 들은 이루어놓은 것을 받들어 시행하니, 옛날 제도에 비하여 권한이 너무 큽니다.注+나라 光武帝 이래로 관리의 일을 尙書에게 책임지워 일이 臺閣으로 돌아가니, 여러 들은 이루어놓은 것을 받들어 시행할 뿐이었다.
여러 사무를 밖으로 外寺에게 맡겨 전담하게 하고注+外寺는 여러 를 이른다. 상서는 큰 강령을 통솔하여 연말에 功績을 고과하고 장부를 상고하여 상과 벌을 시행하면, 이 또한 좋을 것입니다.
지금 〈外寺에서는〉 모두 걸핏하면 이루어놓은 것을 윗사람(상서)에게 받기 때문에 위에서 잘못한 것을 다시 아랫사람에게 죄줄 수가 없으니, 연말에 공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책임지울 곳을 알 수 없습니다.
[] 자잘한 사고와 잘못은 인정상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이것을 모두 법으로 다스리면 조정과 초야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근세의 監司들은 대체로 큰 강령은 진작시키지 못하고 하찮은 잘못은 반드시 들추어내니, 이것은 豪強들을 두려워하여 피하고 또 자신이 맡은 일이 잘못될까 두려워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法網을 삼가 치밀하게 하여 하찮은 죄까지 망라하여 탄핵하는 주청을 이어지게 하니, 겉보기에는 공정함을 다한 듯하나 실은 법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聖王은 자질구레한 일을 지적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흉악하고 교활한 주청을 책망하니, 이렇게 하면 정사를 해치는 간악함이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創業功勳은 교화를 세우고 법제를 정해서 遺風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마음을 결속하고, 남은 功烈로 하여금 幼弱한 군주를 바로잡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후세의 군주가 이것에 의지하여 비록 혼암한 군주라도 현명한 군주처럼 행하고 어리석은 군주라도 명철한 군주처럼 행해야 비로소 숭상할 만합니다.注+〈“後世憑之……雖愚若智”는〉 法制를 닦고 밝게 하여 비록 후사가 昏愚하더라도 의거할 바가 있게 하면, 정치가 오히려 밝고 지혜로운 사람이 하는 것처럼 잘됨을 말한 것이다. 이 말은 太子가 선조의 遺業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皇帝도 자손에게 물려줄 법도가 없음을 가리킨 것이다.
官署를 수리하는 일과 모든 부역의 경우에는 장래에 굳이 폐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도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것입니다.注+는 기다림이다.
그런데 이제 폐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부지런히 하고 후세에 의지하여 믿을 것들은 손상시키시니, 삼가 잘못이라고 여깁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 劉淵匈奴北部都尉로 삼았다.注+이때에 匈奴五部帥를 고쳐 五部都尉라 하였다.
[] 劉淵이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마음을 다하여 사람들을 대하니, 五部의 호걸과 幽州冀州에 유명한 학자들이 대부분 그에게 가서 귀의하였다.


역주
역주1 督諸州軍事 : 都督諸州諸軍事를 가리킨다. 都督諸州諸軍事는 都督, 督州, 都督諸軍事, 督諸州軍事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는데, 보통 관할 지역을 넣어 都督某州諸軍事의 형태로 쓰인다. 본서에서는 글의 구조상 都督이 동사로 쓰일 경우 都督諸州諸軍事를 번역한 경우가 있다. 督은 後漢 光武帝 시기에 督軍御史라는 직명이 보이나 後漢 말기에서 三國時代에 집중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당시 혼란으로 인해 刺史를 중심으로 한 지방통치체제가 한계를 나타내고, 또한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주둔군의 사령관이 그 지방의 민정까지 통할하게 되어 都督諸州諸軍事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吳나라와 蜀나라는 군사적 요지에 督이나 都督을 두어 그 지역의 민정까지 통할하였으며, 魏나라의 경우 文帝 黃初 初期에 정식으로 都督諸軍事를 두었다고 보고 있다. 黃初 3년(222)에 설치된 都督中外諸軍事는 지역의 군사적 통치보다 국가 차원의 중요한 군사적 임무에 있어서 총사령관을 의미한다.
역주2 周나라가……따위이다 : 춘추시대 때 紀侯가 齊 哀公을 周나라 천자에게 참소하여 천자가 애공을 烹殺하고 애공의 아우 靜(胡公)을 세운 것과 伯御가 魯나라 懿公을 시해하여 지위를 찬탈한 후 즉위 11년째에 周나라 宣王이 魯나라를 정벌하여 백어를 죽이고 懿公의 아우 稱(孝公)을 세운 것을 말한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권33 〈魯周公世家〉)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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