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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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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年(317)
中宗元皇帝建武元年이라
漢麟嘉二年이라
◯涼元公張寔 稱建興五年하다
◯舊大國一이요 幷成小國一, 新小國一하여 凡三僭國이라
黃門郞史淑 自長安으로 犇涼州하여 稱愍帝出降前一日 使淑齎詔賜張寔하여 拜涼州牧하여 承制行事하고
且曰 朕已詔琅邪王하여 時攝大位하니 君其協贊하여 共濟多難하라하다
至姑臧하니 大臨三日하고 辭官不受注+姑臧縣, 屬武威郡, 在河西. 臨, 力鴆切.하다
寔叔父肅 爲西海太守注+王莽置西海郡, 光武中興, 棄之. 至獻帝興平二年, 武威太守張雅, 請置西海郡, 分張掖之居延一縣以屬之, 雖郡名同, 而非莽西海郡之地.러니 聞長安危逼이라하고 請爲先鋒入援한대 寔以其老弗許러니 及是 悲憤而卒하다
遣司馬韓璞等하여 帥步騎一萬하고 東擊漢할새 遺相國保書하여 曰 王室有事하니 不忘投軀하여
前遣賈騫하여 瞻公擧動이러니 中被符命하여 勅騫還軍注+符命, 蓋保符下寔也.이라
會聞朝廷傾覆하여 爲忠不遂하니 憤痛之深 死有餘責이라
今遣璞等하여 惟公命是從호리라 璞等 卒不能進而還하다
先是 長安謠曰 秦川中 血沒腕이어늘 唯有涼州倚柱觀注+觀, 去聲, 諦視也. 倚柱而觀, 閑雅貌, 猶言袖手傍觀.이라하더니
及漢兵覆關中하고 氐, 羌掠隴右하여 雍, 秦之民 死者什八九로되 獨涼州安全이러라
二月 寇滎陽이어늘 太守李矩擊敗之하다
漢劉暢 帥兵三萬하고 攻滎陽注+暢, 聰從弟.하니 矩未及爲備 乃遣使詐降한대 不復設備하다
矩欲夜襲之로되 士卒 皆恇懼注+恇, 音匡, 怯也.어늘 乃遣其將郭誦하여 禱於子産祠注+子産相鄭, 鄭人懷其惠, 爲之立祠.하고
使巫揚言曰 子産 有敎하니 當遣神兵相助라하니 衆皆踴躍爭進하여 掩擊暢營하니 僅以身免하다
三月 丞相睿卽晉王位하다
弘農太守宋哲 爲漢所攻하고 棄郡奔建康하여 稱受愍帝詔하고 令丞相睿 統攝萬機注+建康, 卽建業, 晉避愍帝諱改.하니
睿素服出次하여 擧哀三日注+出次, 避正寢.하고 官屬 上尊號호되 不許
固請不已한대 睿慨然流涕하고 曰 孤 罪人也 若見逼不已 當歸琅邪耳라하고 命駕將歸國이어늘
請依魏, 晉故事하여 稱晉王하니 乃許之하다 遂卽位하여 改元하고 置百官하고 立宗廟하고 建社稷하다
有司請立太子한대 愛次子宣城公裒하여 欲立之하여 謂王導曰 立子 當以德이니라
導曰 世子, 宣城 俱有朗雋之美어늘 而世子年長하니이다 從之하여 立世子紹爲王太子하고
封裒爲琅邪王하여 奉恭王後하여 鎭廣陵注+帝後大宗, 故以裒奉琅邪國祀.하고 以西陽王羕爲太保注+羕, 汝南王亮之子也. 太康末, 封西陽縣公, 及楚王瑋誅, 進爵爲王, 元康初, 進封郡王. 羕, 音漾.하고 封譙王遜之子氶爲譙王注+遜, 宣帝弟進之子也, 武帝初, 受封, 氶音拯.하다
王敦爲大將軍하고 王導爲揚州刺史, 領中書監, 錄尙書事하고
刁協爲僕射하고 周顗爲吏部尙書하고 賀循爲太常하다
承喪亂之後하여 江東 草創이러니 久宦中朝하여 諳練舊事하고
爲世儒宗하여 明習禮學하니 凡有疑議 皆取決焉注+諳, 烏含切, 悉也, 記也.이러라
劉琨, 段匹磾相與㰱血同盟하여 翼戴晉室할새 檄告華, 夷하고 遣右司馬溫嶠하여 奉表詣建康하여 勸進注+嶠, 羡之弟子也. 勸進, 言勸之升卽帝位也.하다
謂嶠曰 晉祚雖衰 天命未改하니 吾當立功河朔하여 使卿延譽江南하리니 行矣勉之注+延, 引也. 譽, 去聲. 延譽, 猶言傳名也. 行矣, 猶言好去也.하라
嶠至建康하니 王導, 周顗, 庾亮等 皆愛其才하여 爭與之交러라
王以慕容廆爲龍驤將軍, 大單于, 昌黎公하니 廆不受어늘
處士高詡曰 霸王之資 非義不濟 今晉室雖微 人心 猶附之하니
宜遣使江東하여 示有所尊이니 然後 杖大義以征諸部하면 不患無辭矣注+杖, 去聲, 持也.리라
廆從之하여 遣長史王濟하여 浮海詣建康하여 勸進하다
夏四月 漢主聰 殺其太弟義하다
相國粲 使其黨謂義曰 適奉中詔호니 云 京師將有變이라하니 宜衷甲以備注+甲在衣中, 爲衷甲.니라
义信之하고 命宮臣하여 皆衷甲하다 遣告靳準, 王沈하니 白漢主聰曰 太弟將爲亂하여 已衷甲矣니이다
於是 誅東宮官屬하고 阬士卒萬五千餘人注+所阬者, 東宮四衛之兵也.하고 廢义爲北部王이러니 尋使準殺之注+北部, 卽匈奴後部, 居新興.하다
义形神秀爽하고 寛仁有器度 故士心多附之러라
聞其死하고 哭之慟하여 曰 吾兄弟止餘二人이어늘 而不相容하니 安得使天下知吾心邪아하니라
五月 日食하다
◑六月 豫, 冀, 靑, 寧等州 皆上表勸進하다
豫州牧荀組 及冀州刺史邵續 靑州曹嶷 寧州王遜等 皆上表勸進하니 不許하다
祖逖 取譙城하니 漢石虎入寇어늘 擊走之하다
流民張平, 樊雅 各聚衆在譙하여 爲塢主어늘 王之爲丞相也 遣行參軍桓宣하여 說而下之하다
及逖屯蘆洲 使參軍殷乂 詣平, 雅한대 乂意輕平하여
視其屋하고 曰 可作馬廐로다 見大鑊하고 曰 可鑄鐵器注+無足曰鑊, 江‧淮人謂之鍋, 浙人謂之鑊.로다 平曰 此乃帝王鑊이니 天下淸平 方用之리라
乂曰 卿未能保其頭而愛鑊邪아하니 大怒하여 於坐斬乂하고 勒兵固守하니
攻之歲餘 不下 乃誘其部將하여 使殺之로되 雅猶據譙城이어늘 攻之不克하다
南中郞將王含 遣桓宣하여 將兵助逖이어늘 謂宣曰 卿 信義已著於彼하니 今復爲我說雅注+爲, 去聲.하라
乃單馬從兩人하고 詣雅하여 曰 祖豫州方欲平蕩劉, 石하여 倚卿爲援하니
前殷乂輕薄 非豫州意也니라 雅卽詣降注+劉‧石, 劉聰‧石勒.하다
旣入譙城 石勒 遣石虎圍譙어늘 復遣宣救之하니 虎解去하니 表宣爲譙國內史하다
晉王 傳檄天下하여 稱石虎敢帥犬羊하여 渡河縱毒하니
今遣琅邪王裒等하여 水陸四道 徑造賊場하노니 受逖節度하라 尋復召裒還建康이러니 數月而卒하다
秋七月 大旱, 蝗하고 河, 汾注+皆漢境也.하다
匹磾推琨爲大都督하고 檄其兄遼西公疾陸眷及叔父涉復辰 弟末柸等하여 共討石勒한대
末柸說眷, 辰曰 以父兄而從子弟 恥也라하고 各引兵還注+按懷帝永嘉六年, 石勒獲末柸, 不殺, 誓爲父子而遣還, 故柸爲之遊說也.하니 琨, 匹磾不能獨留하여 亦還薊하다
杜曾 攻陷揚口어늘 周訪 討破之하다
鄭攀等 相與拒王廙할새 衆心不一이라하여 請降하고 杜曾 亦請擊第五猗以自贖하다
廙將赴荊州할새 留長史하여 鎭揚口壘注+水經註 “龍陂水逕郢城, 東北流, 謂之揚水. 水北逕竟陵縣西, 又北注于沔, 曰揚口, 中夏口也.”하니
竟陵內史朱伺謂廙曰 曾 猾賊也 外示屈服하니 宜大部分이요 未可便西注+分, 扶問切. 言當大爲部分, 以備曾掩襲.니이다
廙矜厲自用하여 以伺爲老怯이라하고 遂行하니 曾等 果還攻揚口하여 陷之하고 乘勝徑造沔口하다
使豫章太守周訪擊之하니 有衆八千이라
進至沌陽注+沌, 音篆. 沈約曰 “沌陽縣, 江左立, 屬江夏郡.” 水經 “沔水逕沌陽縣北, 又東逕林障故城北.” 沌陽者, 沌水之陽也.하여 使將軍李恒督左甄하고 許朝督右甄하고 自領中軍注+甄, 音堅, 軍號也, 蓋晉人以左右翼爲左右甄.하다
先攻左右甄이어늘 於陳後 射雉하여 以安衆心注+陳, 讀曰陣.하고
令其衆曰 一甄敗어든 鳴三鼓하고 兩甄敗어든 鳴六鼓하라
自旦至申 兩甄 皆敗한대 選精銳八百人하여 自行酒飮之注+飮, 於禁切.하여 勅不得妄動하고 聞鼓音乃進하다
曾兵 未至三十步 親鳴鼓하니 將士皆騰躍犇赴하여 遂大潰
夜追之하니 諸將 請待明日이어늘 訪曰 曾 驍勇能戰하니 向者 彼勞我逸故 克之
宜及其衰하여 乘之 可滅也라하고 乃鼓行而進하여 遂定漢, 沔하다
走保武當하니 廙始得至荊州注+武當縣, 漢屬南陽郡, 晉屬順陽郡, 縣以武當山得名.하다 以功遷梁州刺史하여 屯襄陽하다
冬十一月朔 日食하다
◑以劉琨爲太尉하다
◑立太學하다
征南軍司戴邈 上疏하여 以爲世道久喪 禮俗日弊하니 猶火消膏하여 莫之覺也
今王業肇建하고 萬物權輿하니 謂宜篤道崇儒하여 以勵風化라한대 從之注+權輿, 始也.하다
十二月 漢主劉聰 弑帝於平陽注+壽, 十八.하니 하다
漢主聰 出畋할새 以愍帝行車騎將軍하여 戎服執戟하여 前導하니
見者指之하고 曰 此故長安天子也라하고 故老有泣者
太子粲 言於聰曰 昔 周武王 豈樂殺紂乎잇가 正恐同惡相求하여 爲患故也 不如早除之니이다
聰曰 前殺庾珉輩 而民心 猶如是하니 吾未忍也로라 且小觀之하라
十二月 饗群臣할새 使帝行酒洗爵하고 已而 又使執葢하니 晉臣 涕泣하고 有失聲者하고
尙書郞辛賓 起抱帝大哭이어늘 斬之하다
洛陽守將趙固 河內太守郭黙 侵漢河東하고 揚言曰 要當生縛劉粲하여 以贖天子라하다 帝遂遇害하니 諡曰孝愍이라하다
命課督農功하다
命課督農功하여 二千石長吏 以入穀多少爲殿最하고 諸軍 各自佃作하여 卽以爲稟注+佃, 治田也. 就耕, 謂之作. 禀, 給也.하다
河南王吐谷渾하다
吐谷渾者 慕容廆之庶兄也注+吐, 他骨切. 谷, 音欲. 渾, 胡昆切. 吐谷渾, 名也 父涉歸 分戶以隷之러니
及廆嗣位 二部馬鬪어늘 廆遣使讓之하여 曰 分建有別하니 何不相遠異注+遠異者, 言遠去以相別異.
怒曰 馬鬪 乃其常이니 何至怒人 欲遠別甚易 恐後會爲難耳라하고 遂帥其衆하고 西徙하다
廆遣長史하여 追謝之하니 遂西傅陰山而居注+傅讀曰附.러니
屬永嘉之亂 因度隴하여 據洮水之西하여 極于白蘭하니 地方數千里注+屬, 音燭, 會也. 沙州記曰 “洮水出嵹臺山, 東北流, 逕吐谷渾中, 又東北流入塞.” 此洮西, 塞外洮水之西也, 卽沙漒沓中之地. 白蘭, 山名, 羌所居也. 至唐時, 丁零羌居之, 左屬党項, 右與多彌接.
鮮卑謂兄爲阿干하니 廆追思之하여 爲之作阿干之歌하니라
有子六十人하니 長子吐延하다 吐延 有勇力하니 羌, 胡畏之러라


丁丑年(317)
[] 나라(東晉) 中宗 元皇帝 建武 원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麟嘉 2년이다.
나라 元公 張寔建興 5년이라고 칭하였다.
예전에 있던 큰 나라(나라(前趙))가 하나에 작은 나라 하나와 새로 생긴 작은 나라(나라) 하나를 합하여 모두 僭國(正統이 아닌 나라)이 셋이다.
[] 봄 정월에 張寔司馬 韓璞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前趙)를 정벌하게 하였다.
[] 黃門郞 史淑長安에서 涼州로 달려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愍帝가 나와 항복하기 하루 전에, 나 사숙으로 하여금 조서를 갖고 가서 張寔에게 내려서 涼州牧를 제수하여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일을 행하게 하시고는,
또 말씀하시기를 ‘이 이미 琅邪王에게 명하여 적당한 시기에 황제의 큰 직위를 대행하게 하였으니, 그대들은 그를 도와 함께 국가의 많은 어려움을 구원하라.’ 하셨다.”
사숙이 姑臧에 도착하니, 장식은 3일 동안 크게 통곡하고는 관직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注+姑臧縣武威郡에 속하였으니, 河西에 있다. (통곡하다)은 力鴆이다.
처음에 장식의 숙부 張肅西海太守로 있었는데,注+王莽西海郡을 설치하였는데, 光武帝中興하자 이를 버렸다. 獻帝 興平 2년(195)에 武威太守 張雅西海郡을 설치할 것을 청하자, 張掖居延縣 하나를 나누어 소속시켰으니, 비록 의 이름은 같으나 王莽이 설치했던 서해군의 지역이 아니다. 長安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는 선봉이 되어 들어가 구원할 것을 청하였으나, 장식은 그가 늙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장숙은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하였다.
[] 張寔司馬 韓璞 등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라(前趙)를 공격할 적에, 相國司馬保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皇室에 위태로운 일이 있으므로 몸을 바쳐 충성할 것을 잊지 아니하여,
지난번에 賈騫을 보내서 의 거동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중간에 내려보낸 符節을 받고서 가건에게 명하여 군대를 돌아오게 하였습니다.注+符命”은 司馬保張寔에게 符節을 내린 것이다.
마침 조정이 이미 전복되었다는 말을 들어 충성할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몹시 비분강개하여 죽어도 남은 죄책이 있습니다.
이제 한박 등을 보내어 오직 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한박 등은 끝내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 이보다 앞서 長安의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秦川에 피가 흘러 팔뚝이 빠질 지경인데, 오직 涼州만은 기둥에 기대어 관망한다.”注+去聲이니, 살펴보는 것이다. 기둥에 기대어 살펴보는 것은 한가로운 모양이니, 팔짱을 끼고 옆에서 구경한다는 말과 같다. 하였는데,
나라(前趙) 군대가 關中을 뒤엎고 氐族羌族隴右 지역을 노략질하여 雍州秦州 지역의 백성들 중에 죽은 자가 10 중에 8, 9명이었으나, 유독 양주만은 安全하였다.
[] 2월에 나라(前趙)가 滎陽을 침략하자, 太守 李矩가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 나라(前趙) 劉暢이 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滎陽을 공격하였는데,注+劉暢劉聰從弟이다. 李矩가 미처 대비하지 못하였다. 이구가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을 하자, 유창이 더 이상 대비하지 않았다.
이구가 밤중에 기습하려고 하였으나 士卒들이 모두 겁내고 두려워하므로注+이니, 겁냄이다. 마침내 장수 郭誦을 보내어 子産의 사당에 가서 기도하게 하고,注+子産나라의 정승이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를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
또 무당으로 하여금 “자산이 명을 내렸는데 神兵을 보내어 도와줄 것이다 하였다.”라고 크게 말하게 하였다. 이에 사졸들이 모두 기뻐 날뛰며 다투어 나가서 유창의 진영을 기습 공격하니, 유창이 겨우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였다.
[] 3월에 丞相 司馬睿晉王에 즉위하였다.
[] 弘農太守 宋哲나라(前趙)에게 공격을 받자, 을 버리고 建康으로 달려가서 말하기를 “愍帝의 조서를 받았는데, 丞相 司馬睿에게 국가의 모든 정사를 총괄하여 다스릴 것을 명하셨다.”注+建康建業이니, 나라는 愍帝(司馬業)를 피하여 이름을 建康으로 고쳤다.라고 하였다.
사마예는 素服을 입고 喪次로 나와 3일 동안 擧哀하고,注+出次”는 正寢을 피한 것이다. 官屬들이 尊號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관리들이 한사코 허락할 것을 청하자, 사마예는 서글피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罪人이다. 만일 그대들이 계속 나를 핍박한다면, 封國琅邪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고는 수레에 말을 멍에 할 것을 명하여 봉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신하들이 나라와 나라의 故事를 따라 晉王을 칭할 것을 청하니, 사마예가 이에 허락하였다. 마침내 즉위하여 改元하고 百官을 설치하고 宗廟를 세우고 社稷을 만들었다.
[] 有司太子를 세울 것을 청하자, 은 둘째 아들인 宣城公 司馬裒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여 王導에게 이르기를 “태자를 세울 때에는 마땅히 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하였다.
왕도가 말하기를 “세자와 선성공이 모두 총명하고 준걸스러운 美德이 있는데, 세자는 나이가 많습니다.” 하니, 이 그의 말을 따라서 세자 司馬紹를 세워 왕태자로 삼고,
사마부를 봉하여 琅邪王으로 삼아서 의 뒤를 이어 廣陵에 진주하게 하였으며,注+황제는 大宗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司馬裒琅邪國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다. 西陽王 司馬羕(사마양)을 太保로 삼고,注+司馬羕汝南王 司馬亮의 아들이다. 太康 말년에 西陽縣公에 봉해졌었는데 楚王 司馬瑋가 주살을 당하자 작위가 높아져서 이 되었으며, 元康 초기에 승진하여 郡王에 봉해졌다. 이다. 譙王 司馬遜의 아들 司馬氶(사마증)을 봉하여 譙王으로 삼았다.注+司馬遜 宣帝(司馬懿)의 아우인 司馬進의 아들로, 武帝 초년에 封地를 받았다. 이다.
王敦大將軍으로 삼고, 王導揚州刺史 領中書監 錄尙書事로 삼고,
刁協僕射로 삼고, 周顗吏部尙書로 삼고, 賀循太常으로 삼았다.
이때 군주가 죽고 나라가 혼란한 뒤를 이어 江東 지역에서 처음으로 政權이 세워졌는데, 조협은 오랫동안 중원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조정의 옛일을 잘 알았고,
하순은 대대로 이어온 儒學宗主로서 禮學을 밝게 익혔으니, 의심스러운 의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이들에 의해 결정되었다.注+烏含이니, 앎이고 기억함이다.
[] 劉琨慕容廆가 모두 사자를 보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 劉琨段匹磾가 입에 피를 바르고 함께 맹세하여 나라 황실을 떠받들기로 하였다. 이때 유곤이 격문을 돌려 중화와 오랑캐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 右司馬 溫嶠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建康에 가서 司馬睿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注+溫嶠溫羡의 아우의 아들이다. “勸進”은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함을 말한 것이다.
유곤이 온교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국운이 비록 쇠하였으나 天命이 아직 바뀌지 않았다. 내 마땅히 河朔 지역에서 을 세워 으로 하여금 江南에서 명성을 떨치게 할 것이니, 가서 힘쓸지어다.”注+은 이끎이요, (명성)는 去聲이니, “延譽”는 傳名(명성을 떨친다)이라는 말과 같다. “行矣”는 好去(잘 가라)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온교가 건강에 이르니, 王導周顗庾亮 등이 모두 그의 재주를 아껴서 다투어 교분을 맺었다.
[] 晉王(司馬睿)이 慕容廆龍驤將軍 大單于 昌黎公으로 삼았는데 모용외가 받지 않자,
處士 高詡(고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霸王의 바탕은 가 아니면 이루지 못합니다. 지금 나라 황실이 비록 쇠약해졌으나 민심이 여전히 그를 따르니,
마땅히 사자를 江東에 보내어서 높이는 바가 있음을 보여야 합니다. 이렇게 한 뒤에 大義를 가지고 여러 를 정벌하면, 정벌할 구실이 없음을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注+去聲이니, 가지고 있음이다.
모용외가 그의 말을 따라 長史 王濟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建康에 가서 晉王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도록 하였다.
[] 여름 4월에 漢主 劉聰太弟劉义를 죽였다.
[] 相國 劉粲이 자기 을 시켜 劉义에게 이르기를 “마침 궁중의 조령을 받았는데, ‘京師가 장차 변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마땅히 衷甲(옷 안에 갑옷을 입는 것)을 하고 대비하여야 한다.”注+옷 안에 갑옷을 입는 것을 衷甲이라 한다. 하였다.
유차가 이 말을 믿고 동궁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모두 충갑을 하게 하였다. 유찬이 사람을 보내어 靳準王沈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근준이 漢主 劉聰에게 아뢰기를 “太弟가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하여 이미 충갑을 했습니다.” 하였다.
유총이 이에 동궁의 관속들을 주살하고 동궁의 사졸 1만 5천여 명을 산 채로 묻어 죽이고,注+산 채로 묻어 죽인 자들은 東宮 四衛의 병사들이다. 유차를 폐하여 北部王으로 삼았는데, 얼마 후 유찬이 근준을 시켜 그를 죽이게 하였다.注+北部는 바로 匈奴後部이니, 新興에 있었다.
유차는 모습과 정신이 수려하고 명랑하고 너그럽고 인자하며 도량이 있어서, 선비들 중에 내심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유총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피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오직 두 사람이 남았는데도 내 그를 포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5월에 일식이 있었다.
[] 6월에 豫州, 冀州, 靑州, 寧州 등지에서 모두 표문을 올려 晉王(司馬睿)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 豫州牧荀組冀州刺史 邵續, 靑州曹嶷, 寧州王遜 등이 모두 표문을 올려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였는데, 晉王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祖逖譙城을 점령하니 나라(前趙) 石虎가 들어와 침략하였는데, 조적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 처음에 유민인 張平樊雅譙城에서 각자 병력을 모아 塢主(성채의 주인)가 되었는데, 晉王(司馬睿)이 丞相으로 있을 적에 行參軍桓宣을 보내어서 장평과 번아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다.
祖逖蘆洲에 주둔하자, 參軍殷乂로 하여금 장평과 번아를 찾아가게 하였다. 은예는 마음속으로 장평을 무시하여,
그의 집을 보고는 “마구간으로 쓰면 좋겠다.”라고 하고, 큰 솥을 보고는 “철물을 주조하면 되겠다.”注+발이 없는 솥을 이라 한다.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라 하고, 浙江 사람들은 이것을 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장평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제왕의 가마솥이니, 천하가 깨끗이 평정된 뒤에 비로소 쓰겠다.” 하였다.
은예가 말하기를 “은 자기 머리도 보존하지 못하면서 이 가마솥을 아끼는가.” 하니, 장평이 크게 노하여 앉은 자리에서 은예를 참수하고 군대를 무장하여 굳게 지켰다.
조적이 1년이 넘게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여, 마침내 部將을 유인하여 장평을 죽이게 하였다. 그러나 번아가 여전히 譙城을 점거하고 있었으므로 조적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 南中郞將 王含桓宣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祖逖을 돕게 하자, 조적이 환선에게 이르기를 “信義가 이미 저들에게 드러났으니, 지금 다시 나를 위하여 樊雅를 설득하라.”注+(위하다)는 去聲이다. 하였다.
환선이 마침내 두 사람을 대동하고 한 필의 말을 타고서 번아에게 찾아가 말하기를 “祖豫州(조적)가 막 劉聰石勒을 깨끗이 소탕하고자 하면서 을 의지하여 원조로 삼으려 한다.
예전에 殷乂가 경박하여 무례했던 것은 조예주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이에 번아가 즉시 찾아와서 항복하였다.注+, ”은 劉聰石勒이다.
[] 祖逖譙城으로 들어가자 石勒石虎를 보내어 초성을 포위하였는데, 王含이 또다시 桓宣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니, 석호가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조적은 표문을 올려 환선을 譙國內史로 삼았다.
晉王이 천하에 격문을 돌려서 말하기를 “석호가 감히 개와 양 같은 오랑캐들을 거느리고서 黃河를 건너와 멋대로 해독을 끼치니,
이제 琅邪王 司馬裒 등을 보내어 수로와 육로 네 길로 출동하여 곧바로 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하노니, 조적의 지휘를 받으라.” 하였다. 얼마 후 다시 사마부를 불러 建康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몇 달 만에 하였다.
[] 가을 7월에 크게 가물고 蝗蟲의 재해가 있었으며, 黃河汾水가 넘쳤다.注+모두 나라(前趙) 경내이다.
[] 나라(前趙)가 아들 劉粲太子로 세웠다.
[] 劉琨段匹磾石勒을 토벌하려 하였는데, 출발하기 전에 해산하였다.
[] 段匹磾劉琨을 추대하여 大都督으로 삼고는, 자기 형인 遼西公 段疾陸眷叔父段涉復辰과 아우 段末柸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함께 石勒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단말배가 단질륙권과 단섭복신을 설득하기를 “父兄으로서 子弟를 따르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하여 각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니,注+살펴보건대, 懷帝 永嘉 6년(312)에 石勒段末柸를 사로잡았는데 죽이지 않고 父子가 되기로 맹세하고 돌려보냈다. 그러므로 단말배가 이와 같이 설득한 것이다. 유곤과 단필제도 홀로 남아 지킬 수 없어서 薊城으로 돌아갔다.
[] 杜曾揚口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周訪이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周訪이 揚口에서 杜曾을 격파하다周訪이 揚口에서 杜曾을 격파하다
[] 鄭攀 등이 함께 王廙를 막을 적에, 사람들의 마음이 통일되지 못하였다. 정반이 두려워하여 왕이에게 항복을 청하고, 杜曾 또한 第五猗를 공격하여 스스로 속죄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가 荊州로 부임하려 할 적에 長史를 남겨두어 揚口의 보루를 鎭守하게 하니,注+水經註≫에 “龍陂水郢城을 지나 동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揚水라 한다. 이 물이 북쪽으로 竟陵縣의 서쪽을 지나서 또 북쪽으로 沔水에 주입되는데, 이곳을 ‘揚口’라 하니 中夏口이다.” 하였다.
竟陵內史 朱伺가 왕이에게 이르기를 “두증은 교활한 적입니다. 겉으로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니, 우리는 마땅히 부대를 크게 만들어 대비해야지 곧바로 서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注+(부대)은 扶問이니, 〈“宜大部分”은〉 마땅히 부대를 크게 만들어서 杜曾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왕이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여, 주사를 늙어서 겁이 많다 하고는 마침내 그대로 출동하였다. 두증 등이 과연 돌아와 揚口를 공격해서 함락시키고는 승세를 타고 곧바로 沔口에 이르렀다.
晉王(司馬睿)이 豫章太守 周訪으로 하여금 두증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주방은 8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바,
沌陽까지 진군하여注+이다. 沈約이 말하기를 “沌陽縣江東에서 세웠으니 江夏郡에 속하였다.” 하였고, ≪水經註≫에 “沔水沌陽縣 북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林障의 옛 북쪽을 지나간다.” 하였다. 沌陽沌水의 북쪽이다. 將軍 李恒으로 하여금 左甄을 감독하게 하고 許朝로 하여금 右甄을 감독하게 하고 자신은 中軍을 거느렸다.注+으로 군대의 칭호이니, 나라 사람은 左翼右翼左甄右甄이라 하였다.
[] 杜曾이 먼저 左甄右甄을 공격하자, 周訪이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자〉 진영의 뒤에서 화살로 꿩을 쏘아 잡아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注+(진영)은 으로 읽는다.
병사들에게 명령하기를 “좌견과 우견 중 한쪽이 패하면 3번 북을 울리고, 좌우 양쪽이 모두 패하면 6번 북을 울려라.” 하였다.
아침부터 申時(오후 3~5시)에 이르기까지 좌견과 우견이 모두 패하자, 주방은 정예 기병 8백 명을 선발하여 직접 술을 따라주어 마시게 하고서,注+(마시게 하다)은 於禁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북소리를 들은 뒤에 전진할 것을 명하였다.
두증의 군대와의 거리가 30보가 되기 전에 주방이 직접 북을 울리니, 장병들이 모두 뛰쳐나가 싸워서 마침내 두증의 군대가 크게 궤멸되었다.
주방이 밤중에 두증의 군대를 추격하니, 여러 장군들이 날이 밝기를 기다려 추격할 것을 청하였다. 주방이 말하기를 “두증은 날래고 용맹하여 전투에 능하다. 지난번에 저들은 피로하고 우리는 편안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마땅히 그의 기력이 쇠했을 때를 틈타 추격해야 하니, 이렇게 하면 멸망시킬 수 있다.” 하고는, 북을 치고 행군하여 전진해서 마침내 漢水沔水 지역을 평정하였다.
두증이 달아나 武當을 지키니, 王廙가 그제야 비로소 荊州에 부임할 수 있었다.注+武當縣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順陽郡에 속하였으니, 무당현은 武當山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다. 주방은 이 으로 梁州刺史로 승진하여 襄陽에 주둔하였다.
[] 겨울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劉琨太尉로 삼았다.
[] 太學을 세웠다.
[] 征南軍司 戴邈上疏하여 아뢰기를 “世道가 무너진 지 오래되어 禮儀의 풍속이 날로 피폐해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등불이 기름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제 王業이 처음 수립되고 만물이 막 시작되었으니, 마땅히 를 돈독히 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교화를 장려하여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注+權輿”는 시작함이다.
[] 12월에 漢主 劉聰平陽에서 황제( 愍帝)를 시해하니,注+ 愍帝는〉 향년이 18세였다. 辛賓이 이에 죽었다.
[] 漢主 劉聰이 나가 사냥할 적에, 愍帝車騎將軍을 대행하여 군복을 입고 창을 잡고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이 모습을 보는 자들이 민제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분은 옛 長安天子이다.” 하였고, 노인 중에는 눈물을 떨구는 자도 있었다.
太子 劉粲이 유총에게 말하기를 “옛날 나라 武王이 어찌 나라 紂王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였겠습니까. 바로 을 함께하는 자들이 서로 구하여 후환이 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속히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유총이 말하기를 “예전에 庾珉 등을 죽였는데도 민심이 아직도 이와 같으니, 내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 우선 다소 관망하라.” 하였다.
[] 12월에 劉聰이 신하들에게 연향을 베풀 적에 황제로 하여금 술을 따르고 술잔을 씻게 하고는 잠시 후 또 日傘을 잡게 하니, 나라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고 흐느껴 우는 자도 있었다.
尙書郞 辛賓이 일어나 황제를 안고 크게 통곡하자, 유총이 그를 참수하였다.
洛陽守將 趙固河內太守 郭黙나라(前趙)의 河東 지역을 침공하고 크게 말하기를 “마땅히 劉粲을 산 채로 포박하여 天子와 맞교환하겠다.” 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살해당하니, 시호를 孝愍이라 하였다.
[] 晉王(司馬睿)이 명하여 농사일을 독려하였다.
[] 晉王이 명하여 농사일을 독려해서 二千石(郡守)과 長吏(令長)들이 바친 곡식의 많고 적음으로 考課하고, 여러 군대는 각자 직접 밭을 경작하여 즉석에서 양식을 공급하게 하였다.注+은 밭을 다스림이다. 나아가 경작하는 것을 이라 한다. 은 지급함이다.
[] 河南王 하였다.
[] 慕容吐谷渾慕容廆庶兄이니,注+他骨이고, 이며 胡昆이니, 吐谷渾은 이름이다. 아버지 慕容涉歸戶口를 나누어 그에게 예속시켰다.
모용외가 지위를 계승한 뒤에, 모용외와 모용토욕혼의 두 부락의 말들끼리 싸웠는데, 모용외가 사자를 보내어 책망하기를 “부락을 나누어 세워 이미 分別이 있는데, 어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가.”注+遠異”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자,
모용토욕혼이 노하여 말하기를 멀리 떠나고자 하면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만, 뒤에 만나기가 어려울까 염려된다.” 하고는, 마침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옮겨갔다.
모용외가 長史를 보내어 쫓아가 사죄하니, 모용토욕혼이 마침내 서쪽으로 陰山 가까이에 거주하였다.注+(가깝다)는 로 읽는다.
마침 을 만나서 이를 틈타 지역을 지나 洮水의 서쪽부터 白蘭山에 이르기까지 점거하니, 땅이 사방 수천 리였다.注+이니, 마침이다. 에 “洮水嵹臺山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吐谷渾 가운데를 지나고 또 동북쪽으로 흘러 변방으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 洮西는 변방 밖에 있는 洮水의 서쪽으로, 바로 沙漒 沓中의 지역이다. 白蘭은 산 이름이니, 羌族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나라 때 이르러 丁零羌이 이곳에 거주하였는데, 왼쪽은 党項에 속하고 오른쪽은 多彌와 접하였다.
鮮卑族은 형을 일러 阿干이라 하니, 모용외는 형을 추념하여 그를 위해 阿干이라는 노래를 지었다.
모용토욕혼에게는 아들 60명이 있었는데, 長子 慕容吐延이 뒤를 이었다. 모용토연은 용맹과 힘이 있으니, 羌族胡族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역주
역주1 張寔遣司馬韓璞 將兵伐漢 : “이때에 韓璞 등이 끝내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漢나라를 정벌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張寔의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張氏 父子의 일을 ≪資治通鑑綱目≫에서 자세히 썼으니, 이는 의리를 권장하기 위해서이다.[於是 璞等竟不能進而還矣 書伐漢 何 予義也 張氏父子之事 綱目悉書之 所以勸義也]” ≪書法≫
“胡와 羯이 번갈아 중국을 어지럽힌 뒤로부터 懷帝와 愍帝가 蒙塵하였으나, 원근에서 勤王하는 군대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독 張寔의 경우에는 이전에 ‘군대를 들여보내 구원하였다.’고 썼고, 長安이 함락되자 여러 군대들이 도망하여 흩어질 때에 오직 涼州의 義兵이 죽음을 불사하고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장군을 보내어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비록 끝내 전진하지는 못했으나, ≪資治通鑑綱目≫에서 이 일을 참으로 漢나라를 정벌한 것처럼 쓴 것은, 그의 忠義의 절개를 인정한 것이니, 그 본래의 뜻을 이루어주려 한 것이다. 書法이 이와 같으니, 이 세상을 위하여 권면하는 뜻이 훌륭하다.[自胡羯交亂 懷愍蒙塵 未聞遠近有勤王之師 獨張寔前曰 遣兵入援 至於長安不守 諸軍逃散 惟涼州義衆 守死不移 今又遣將伐賊 雖卒不能進 然綱目書之 若眞能伐漢然者 蓋予其忠義之節 所以遂其本志云爾 書法若此 其爲斯世勸也 多矣]” ≪發明≫
역주2 恭王 : 司馬懿의 손자 琅邪恭王 司馬覲을 가리킨 것으로 司馬睿는 사마근의 아들이다.
역주3 劉琨慕容廆皆遣使勸進 : “‘勸進’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司馬睿가 正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직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나 특별히 원년이라고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勸進’이라고 쓴 것은 오직 晉나라 元帝와 漢主인 劉知遠뿐이다.[書勸進 何 正統也 故雖未卽帝位 特書元年 終綱目 書勸進者 惟晉元帝 漢主知遠而已]” ≪書法≫
“劉琨은 중국인이고 慕容廆는 오랑캐인데 합하여 쓴 것은, 모용외가 능히 군주를 높이고 의리를 앎을 가상히 여긴 것이니, 이른바 ‘오랑캐가 중국으로 나오면 중국으로 여긴다.’는 것이다.[琨 中國也 廆 夷狄也 合而書之者 嘉廆能尊主知義 所謂夷而進於中國 則中國之也]” ≪發明≫
역주4 (大)[而] : 저본에는 ‘大’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而’로 바로잡았다.
역주5 漢立子粲爲太子 : “晉나라 때 僭國(正統이 아닌 나라)에서 太子를 세운 것은 다 쓰지 않고 반드시 연고가 있어야 썼으니, 劉粲을 태자로 세운 것을 쓴 것은 靳準이 시해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晉世僭國立太子 不悉書 必有故而後書 書立粲 志準弑也]” ≪書法≫
역주6 劉琨……而罷 : “일을 끝마치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는데 여기서 쓴 것은 어째서인가. 庾袞과 段匹磾의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未卒事 不書 此其書 何 予義也]” ≪書法≫
역주7 漢主劉聰……辛賓死之 : “이때 漢나라(前趙)가 포악하게 황제(晉 愍帝)를 부리자 辛賓이 일어나 황제를 안고 크게 통곡하니, 劉聰이 죽였다. 趙固가 〈劉粲을 사로잡아〉 그와 天子를 맞교환하려 한다고 크게 말하여 황제가 마침내 살해당했으니, 이는 먼저 신빈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먼저 ‘황제를 시해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먼저 ‘황제를 시해했다.’라고 쓴 것은 신빈의 죽음이 황제 때문에 죽은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死之’라고 크게 썼으니, 절개와 충절을 위해 죽은 것을 권면하는 뜻이 깊다.[於是 漢暴使帝 賓起 抱帝大慟 聰殺之 趙固揚言欲贖天子 帝遂遇害 是先殺賓也 先書弑帝 何 先書弑帝 所以見賓之死爲帝而死也 大書死之 其爲死節之勸 深矣]” ≪書法≫
“무릇 僭國(정통이 아닌 나라)의 경우에는 ‘某王 某’라고 쓰는데, 지금 晉 懷帝와 晉 愍帝의 禍에 劉聰에게 두 번 모두 성을 쓰고 이름을 쓴 것은, 유총이 추악한 오랑캐로서 晉나라에게 신하로 복종하다가 마침내 때를 틈타 몰래 나와서 몸소 큰 죄악을 행하였으므로 성명을 게시하여 그가 弑逆한 죄를 주벌한 것이니, 어찌 僞國의 준례를 그에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한 글자 한 글자 사이에 깊은 뜻이 있다.[凡僞國書某王某 今懷愍之禍 劉聰兩書姓書名者 聰 裔夷之醜 臣服於晉 乃乘時竊發 躬行大惡 故揭姓名 以誅其弑逆之罪耳 豈得以僞國之例而比之哉 一字之間 蓋有深意矣]” ≪發明≫
역주8 慕容吐谷渾(모용토욕혼) : 吐谷渾의 시조이다. 토욕혼은 지금의 중국 靑海省에서 활동한 유목국가로, 모용토욕혼의 이름을 따서 부족명으로 삼았다가 나중에는 국명이 되었다.
역주9 말들이……노여워하는가 : ≪北史≫ 〈吐谷渾傳〉에 “慕容土谷渾이 말하기를 ‘말이 풀을 먹고 물을 마실 적에 春氣가 발동하여 다툰 것이니, 다툰 것은 말이 했는데 노여움이 사람에게 미친단 말인가.’ 하였다.[吐谷渾曰 馬食草飮水 春氣發動 所以鬪 鬪在馬而怒及人]” 하였다.
역주10 永嘉의 亂 : 永嘉는 懷帝의 연호로, 앞서 영가 5년(311) 6월에 漢나라(前趙) 군대가 洛陽으로 쳐들어와서 회제를 잡아간 일을 이른다.
역주11 沙州記 : 南朝 시대 宋나라의 段國이 편찬한 地理雜記이다.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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