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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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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年(A.D.50)
경술년庚戌年(A.D.50)
二十六年이라 春正月 詔增百官俸하다
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 건무建武 26년이다. 봄 정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백관百官의 봉급을 올려주었다.
千石已上 減於西京舊制하고 六百石已下 增於舊秩하다
천석千石 이상은 서경西京(전한前漢)의 옛 제도보다 줄이고, 육백석六百石 이하는 옛 질록秩祿보다 더하였다.
注+壽陵, 卽原陵也. 在臨平亭東南, 去雒陽十五里. 初作陵, 未有名, 故號壽陵, 蓋取久長之義也.하다
】 처음으로 수릉壽陵을 만들었다.注+수릉壽陵은 바로 원릉原陵이다. 임평정臨平亭 동남쪽에 있었으니, 낙양雒陽과 15리 떨어져 있다. 처음으로 을 만들어서 아직 명칭이 없으므로 수릉壽陵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장구한 뜻을 취한 것이다.
帝曰 古者帝王之葬 皆陶人瓦器 木車茅馬하여 使後世之人으로 不知其處注+陶人, 陶瓦爲人之形也. 茅馬, 束茅爲馬也.
】 황제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제왕帝王의 장례에는 모두 흙으로 만든 용인俑人과 질그릇을 사용하였으며, 나무로 수레를 만들고 띠풀로 말을 만들어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장소를 알지 못하게 했었다.注+도인陶人”은 흙을 구워서 사람의 형체를 만든 것이고, “모마茅馬”는 띠풀을 묶어 말을 만든 것이다.
太宗 識終始之義하시고 景帝能述遵孝道하사 遭天下反覆 而霸陵 獨完受其福하니 豈不美哉注+謂赤眉入長安, 唯霸陵不掘.리오
태종太宗(문제文帝)께서는 사람이 죽고 사는 의리를 아시고, 경제景帝께서는 효도를 잘 따르셔서 천하가 뒤집어져 어지러울 때에 패릉霸陵만 홀로 완전하여 그 을 받았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注+적미赤眉장안長安에 쳐들어왔을 적에 오직 〈문제文帝인〉 패릉霸陵만 도굴당하지 않은 것을 이른다.
今所制 地不過二三頃이요 無爲山陵하고 陂池하여 裁令流水而已하여 使迭興之後 與丘隴同體注+陂池, 讀如坡陁, 猶言靡迤也. 言不須高作山陵, 但令小隆起坡陁然, 裁得流泄水潦耳. 迭興, 謂易姓而王者. 丘, 小山, 隴, 大阪也.하라하다
지금 만드는 능은 땅은 2, 3을 넘지 않게 하고 산릉山陵을 만들지 말고 조금 높게 하여 겨우 물을 흐르게 해서, 다음 왕조가 일어난 뒤에는 구롱丘隴과 같아지게 하라.”注+파타陂池”는 파타坡陁(파타)와 같이 읽으니, 미이靡迤란 말과 같다. 굳이 높게 산릉山陵을 만들지 않고 다만 조금 높게 해서 겨우 장맛물이 흘러 빠지게 할 뿐임을 말한 것이다. “질흥迭興”은 역성易姓하여 왕 노릇 하는 자를 이른다. 는 작은 산이고, 은 큰 비탈이다.
胡氏曰 光武幸南陽 宗戚 丐復十年한대 帝曰 天下至重이라 日復一日하니 敢望許久邪아하고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광무제光武帝남양南陽에 행차했을 적에 종족과 친척들이 10년 동안 조세租稅를 면제해줄 것을 청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천하는 지극히 소중하므로 〈내 항상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날마다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하니, 감히 오랫동안 허락하기를 바라겠는가.’ 하였고,
及壽陵初作 卽有迭興之念하니 此皆理所必至로되 而人所諱言者
수릉壽陵을 처음 만들 적에 곧바로 다음 왕조가 차례로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이는 모두 이치상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나 사람들이 말하기 꺼려하는 것이다.
明達如是하니 宜其永終天祿하고 享國久長也로다
황제의 밝고 통달함이 이와 같았으니, 마땅히 그 천록天祿을 영원히 누리고 장구하게 나라를 향유할 만하다.”
立南單于庭하고 置使匈奴中郞將以領之하다
남선우南單于의 왕정을 세우게 하고,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을 설치하여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遣中郞將段郴 副校尉王郁하여 使南匈奴하여 立其庭하니 去五原西部塞八十里注+郴, 丑林切. 地理志 “五原西部都尉, 治田辟.”
중랑장 단침中郞將 段郴(단침)과 부교위 왕욱副校尉 王郁남흉노南匈奴에 사신으로 보내 남흉노의 왕정을 세우게 하니, 오원五原서부새西部塞와 80리 떨어져 있었다.注+축림丑林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오원五原서부도위西部都尉전벽田辟을 치소로 했다.” 하였다.
詔聽南單于入居雲中하고 始置使匈奴中郞將하여 將兵衛護之하다
조령詔令을 내려 남선우가 운중雲中에 들어와 사는 것을 허락하고 처음으로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을 설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남선우를 보호하게 하였다.
南單于遣子入侍하다
】 가을에 남선우南單于가 아들을 보내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詔賜單于冠帶璽綬 車馬金帛 甲兵仗器注+仗器, 通鑑作什器.하고 又轉河東米糒牛羊以贍給之하다
조령詔令을 내려 선우單于에게 관과 띠, 옥새와 인수, 수레와 말, 금과 비단, 갑옷과 병기, 집기什器(집기) 등을 하사하고注+장기仗器”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집기什器로 되어 있다.하동河東의 쌀과 말린 밥, 소와 양을 수송하여 공급하였다.
令中郞將으로 將弛刑五十人하여 隨單于所處하여 參辭訟하여 察動靜注+有赦令, 罪人去其鉗赭衣, 謂之弛刑, 卽輸贖徒作者.하다 單于歲盡 輒遣奉奏하고 送侍子入朝어늘
중랑장中郞將으로 하여금 이형弛刑 50명을 거느리고 가서 선우가 거처하는 곳을 따라다니며 송사訟事에 참여하여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注+사면령이 있어서 죄인 중에 칼과 차꼬와 붉은 수의囚衣를 제거한 자를 이형弛刑이라 이르니, 바로 곡식을 바치고 부역을 하는 자이다. 선우가 연말에 매번 사람을 보내 글을 올려서 아뢰고 시자侍子를 보내 조회하자,
遣謁者하여 送前侍子하여 還單于庭하고 賜單于及閼氏 左右賢王以下繒綵合萬匹하여 歲以爲常하다
나라에서는 알자謁者를 보내 예전의 시자侍子를 선우의 왕정에 돌려보내고 선우單于연지閼氏(연지),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 이하에게 도합 1만 의 채색 비단을 하사하고서, 매년 이와 같이 하였다.
於是 雲中, 五原, 朔方, 北地, 定襄, 雁門, 上谷, 代八郡民 歸於本土注+前此避匈奴內者, 令皆歸復本土.어늘 遣謁者하여 分將弛刑하여 補治城郭하고
이에 운중雲中, 오원五原, 삭방朔方, 북지北地, 정양定襄, 안문雁門, 상곡上谷, 등 8개 의 백성들이 본래 살던 땅으로 돌아가자注+이보다 앞서 흉노匈奴를 피하여 내지內地로 이주시킨 자들을 모두 본래 살던 땅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알자謁者를 보내서 이형弛刑을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성곽을 보수하게 하고,
發遣邊民在中國者하여 布還諸縣하여 皆賜以裝錢하고 轉給糧食하니 城郭丘墟하여 掃地更爲 乃悔前徙之하다
중국中國에 살고 있는 변방 백성들을 징발하여 변방의 여러 으로 나누어 돌려보내면서 모두 행장과 돈을 하사하고 양식을 수송하여 공급하니, 이때 성곽이 폐허가 되어서 전부 다시 만들었다. 이 이에 예전에 백성들을 이주시킨 것을 후회하였다.
徙南單于하여 居西河美稷하다
】 겨울에 남선우南單于서하西河미직美稷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였다.
南單于五骨都侯子 復將其衆三千人하여 歸南部注+通鑑 “夏, 南單于所獲北虜薁鞬左賢王, 將其衆及南部五骨都侯合三萬餘人畔歸, 去北庭三百餘里. 自立爲單于, 月餘, 日更相攻擊, 五骨都侯皆死, 左賢王自殺, 諸骨都侯子各擁兵自守.”한대 北單于使騎追擊하여 悉獲其衆하다
】 겨울에 남선우南單于의 다섯 골도후骨都侯의 아들이 또다시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남부南部로 돌아오자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여름에 남선우南單于가 사로잡았던 북쪽 오랑캐의 욱건좌현왕薁鞬左賢王이 그 무리와 남부南部의 다섯 골도후骨都侯 도합 3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선우北單于를 배반하고 돌아가니, 북선우의 왕정과의 거리가 300여 리였다. 스스로 서서 선우單于라 하였는데, 한 달 남짓에 북선우와 날마다 번갈아 서로 공격하여 다섯 골도후가 모두 죽고 좌현왕左賢王이 자살하니, 여러 골도후의 아들들이 각각 병력을 보유하고 스스로 지켰다.” 하였다., 북선우北單于는 기병으로 이들을 추격해서 그 무리를 모두 사로잡았다.
南單于遣兵拒之러니 逆戰不利 於是 復詔單于하여 徙居西河美稷注+美稷, 縣名.하고 因使段郴, 王郁으로 留西河擁護之하고
남선우가 병력을 파견하여 북선우를 막았는데, 맞아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다시 남선우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서하西河미직美稷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고注+미직美稷의 이름이다., 인하여 단침段郴왕욱王郁으로 하여금 서하西河에 머물면서 이들을 보호하게 하였으며,
令西河長史 歲將騎二千 弛刑五百人하여 助中郞將하여 衛護單于호되 冬屯夏罷하니 自後以爲常하다
서하장사西河長史로 하여금 해마다 기병 2천 명과 이형弛刑 5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중랑장中郞將을 도와 남선우를 보호하게 하되, 겨울에는 주둔하고 여름에는 파하게 하니, 이후로 이를 상례로 삼았다.
南單于旣居西河 亦列置諸部王하고 助漢하여 扞戍北地, 朔方, 五原, 雲中, 定襄, 雁門, 代郡하여 皆領部衆하여 爲郡縣偵邏耳目注+南匈奴傳 “使韓氏骨都侯屯北地, 右賢王屯朔方, 當于骨都侯屯五原, 呼衍骨都侯屯雲中, 郞氏骨都侯屯定襄, 左南將軍屯雁門, 粟籍骨都侯屯代郡.” 邏, 郞佐切, 巡也. 偵邏, 猶言探候也.하니
남선우가 서하西河에 거주하게 되자, 또한 여러 부왕部王을 나열하여 배치해서 나라를 도와 북지北地, 삭방朔方, 오원五原, 운중雲中, 정양定襄, 안문雁門, 대군代郡을 막아 지키게 해서 모두 의 무리를 거느리고 군현郡縣의 정탐하는 세작細作[이목耳目]이 되게 하였다.注+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에 “한씨골도후韓氏骨都侯북지北地에 주둔하게 하고, 우현왕右賢王삭방朔方에 주둔하게 하고, 당우골도후當于骨都侯오원五原에 주둔하게 하고, 호연골도후呼衍骨都侯운중雲中에 주둔하게 하고, 낭씨골도후郞氏骨都侯정양定襄에 주둔하게 하고, 좌남장군左南將軍안문雁門에 주둔하게 하고, 속적골도후粟籍骨都侯대군代郡에 주둔하게 했다.” 하였다. 랑좌郞佐로 순찰함이니, “정라偵邏”는 정탐하고 살핀다는 말과 같다.
北單于惶恐하여 頗還所略漢民하여 以示善意하고 鈔兵 每到南部下라가 還過亭候하면
이에 북선우가 두려워하여 노략질한 나라의 백성들을 많이 돌려주어 한 뜻을 보였으며, 침략하는 군대들이 매번 남부南部에 이르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정후亭候를 지나게 되면
輒謝曰 自擊亡虜薁鞬日逐耳 非敢犯漢民也注+薁鞬日逐王, 於二十四年附漢, 故稱亡虜.라하니라
번번이 사례하기를 “우리는 본래 도망한 오랑캐인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욱건일축왕)을 공격할 뿐, 감히 나라 백성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注+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이 지난 건무建武 24년(A.D.48)에 나라에 귀의하였으므로 망로亡虜라 칭한 것이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初作壽陵 : “皇帝가 즉위하자마자 즉시 陵邑을 일으키는 것은 漢나라의 오래된 제도이다. 이때에 황제가 즉위한 지 2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壽陵을 만들고 능의 제도를 간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특별히 ‘初’라고 썼으니, 찬미한 것이다. 이 때문에 宣帝가 杜陵을 만들 적에 ‘初’라고 썼고, 光武帝가 수릉을 만들 적에 ‘初’라고 썼고, 明帝가 수릉을 만들 적에 ‘初’라고 썼으니, 모두 즉위한 지 오랜 뒤에 능을 만든 경우이다.[皇帝踐阼 卽起陵邑 漢舊制也 於是帝卽位二十六年矣 始作壽陵 制度簡易 故特書初 美之也 是故宣帝作杜陵 書初 光武作壽陵 書初 明帝作壽陵 書初 皆久而後作者也]다” ≪書法≫
역주2 (鈇)[釱] : 저본에는 ‘鈇’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 註에 의거하여 ‘釱’로 바로잡았다.
역주3 (徒)[徙] : 저본에는 ‘徒’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徙’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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