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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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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이라
秦永興二 燕光壽二年이라
春二月秦王堅 撃張平하여 降之하다
秦王堅 自將擊平할새 以鄧羌爲前鋒하여 軍于汾上注+汾上, 汾水之上也.이러니 使養子蚝 禦之注+蚝, 本姓弓, 上黨人也. 蚝, 七吏切.하니
蚝多力趫捷하여 能曵牛却走하고 超越高城注+趫, 丘妖切, 善走也.이라 募人生致之한대 鄧羌 禽之以獻하니 平衆 大潰
乃降이어늘 拜右將軍하고 以蚝爲虎賁中郎將하여 常置左右하니 秦王 稱羌, 蚝皆萬人敵이러라
秋八月 以謝萬監司․豫等州軍事注+司․豫所統, 皆僑郡也.하다
會稽王昱 欲以桓溫弟雲으로 爲豫州刺史러니 僕射王彪之曰
溫居上流하여 已割天下之半이어늘 其弟復處西藩이면 兵權 萃於一門이니 非深根固蔕之宜也注+東晉豫州鎭江西, 建康在江東, 故以豫州爲西藩.니이다
乃更以謝萬代之하다
王羲之與溫牋曰 謝萬 才流經通하니 使主廊廟하면 固是後來之秀注+才流經通, 言其才具可以經世, 於時人流輩中, 爲通達也.어니와 今以之俯順荒餘하면 則違才易務矣注+言邊郡兵民, 皆兵荒之餘, 彫未蘇, 而獷悍難調, 當俯就而柔順之, 今萬非其才而用之, 則爲違才. 務, 事也. 以萬之才可以處廊廟, 而使之處邊鄙, 則爲易事.리이다
又遺萬書曰 以君邁往不屑之韻으로 而俯同群 誠難爲意也注+邁, 遠也, 言其矜高, 不屑軍中之細務也. 리이다
然所謂通識 正當隨事行藏耳 願君 每與士卒之下者 同甘共苦하시면 則盡善矣리이다 不能用이러라
大旱하다
秦王堅 減膳徹樂하고 命后妃以下하여 悉去羅紈하고 開山澤之利하며 息兵養民하니 旱不爲災러라
王猛 日親幸用事하니 勲舊多疾之 樊世 本氐豪 佐秦主健하여 定關中이러니
謂猛曰 吾輩耕之어늘 君食之邪 猛曰 非徒使君耕之 又將使君炊之라한대
世大怒曰 要當懸汝頭於長安城門이리니 不然이면 吾不處世리라
猛以白堅한대 堅曰 必殺此老氐然後 百寮可肅이라하다
世入言事하여 與猛争論於堅前할새 世欲起擊猛한대하여 斬之하니 於是 群臣 見猛 皆屏息注+屛息, 謂屛藏其氣息, 言懼甚也.이러라
擊張平하니 復降燕하다
◑冬 陷河南하다
泰山太守諸葛攸 攻燕東郡하여 入武陽注+後漢東郡治東武陽, 武帝咸康二年, 封子允, 以東不可爲國名, 而東郡有濮陽縣. 改曰濮陽國, 允改封淮南, 還曰東郡. 趙王倫, 簒位, 廢太孫臧爲濮陽王, 東郡遂名濮陽. 此蓋燕復名東郡. 晉志 “武陽縣, 分屬陽平郡.”한대 燕王儁 遣大司馬恪하여 擊之하니 攸敗走하여 還泰山하다
遂度河略地하여 分置守宰하다
欲遂經營秦, 晉하여 令州郡校實見丁하여 户留一丁하고 餘悉發爲兵하여 欲使歩卒滿一百五十萬하여 期來春集洛陽注+校實, 檢校其實數也. 見丁, 謂見在民丁也.하다
劉貴上書하여 極陳百姓凋弊하니 發兵非法이라 必致土崩之變注+法未有戶留一丁而悉發爲兵者.이리이다
善之하여 乃更令三五發兵하여 以來冬集鄴하다
燕調發繁數注+數, 音朔.하니 官司各遣使者하여 道路旁午
郡縣 苦之注+一縱一橫, 謂之旁午, 言使者之多也.러니 太尉封奕 奏請非軍期嚴急이면 不得遣使하고 自餘賦發 皆責成州郡하니 從之하다
荀羨 伐燕이라가 不克而還하니 以郗曇督徐, 兗軍事하다
燕泰山太守賈堅 屯山茌어늘 引兵擊之注+茌, 仕疑切. 山茌, 卽前漢之茌縣, 屬泰山郡, 後漢改曰山茌.하니 堅所將 纔七百餘人이요 羨兵十倍
歎曰 吾自結髪 志立功名이로되 而毎值窮阨하니 豈非命邪 與其屈辱而生으론 不若守節而死라하고
乃開門直出하니 羨兵 四集하여 擒之하고 遂拔山茌하다
謂堅曰 君父祖世爲晉臣이어늘 奈何背本不降
堅曰 晉 自棄中華 非吾叛也 民既無主하여 彊則託命이라 既已事人하니 安可改節이리오
吾束脩自立하여 涉趙歴燕하여 未嘗易志하니 君何怱怱相謂降乎注+束脩自立, 謂從師就學, 便有志於自立. 脩, 脯也, 十脡爲束. 古者從師, 必以束脩爲禮. 或曰 “謂自檢束修飭而立身也.”
하여 執置雨中하니 數日 憤惋而卒하다
燕青州刺史慕容塵 遣司馬悦明하여 救泰山하니 羨兵 大敗 復取山茌하니 燕主以堅子活 爲任城太守하다
疾篤하여 徵還하고 以郗曇督徐兗軍하여 鎮下邳注+曇, 鑒之子也.하다
使慕容垂 守遼東하다
燕吳王垂 娶段末柸女하여 生子令, 寳注+令․寶, 二人名.하다 段氏才高性烈하여 自以貴姓이라하여 不尊事可足渾后하니 后衘之注+段與慕容, 本抗衡之國, 故自以爲貴姓. 可, 音榼. 渾, 胡昆切. 可足渾, 北方三字姓. 后, 燕主儁妃也.러라
中常侍涅皓希旨하여 告段氏爲巫蠱하여 欲以連汚垂注+涅, 奴結切, 姓也. 皓, 其名.하니 收下廷尉考驗호되 終無撓辭 垂得免禍로되 而段氏竟死獄中하다
出垂爲平州刺史하여 鎮遼東하다 垂以段氏女弟 爲繼室이러니 可足渾后黜之하고 以其妹妻垂하니 垂不悦이라 由是 益惡之러라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승평升平 2년이다.
[] 진주秦主(전진前秦) 부견苻堅 영흥永興 2년이고 연주燕主(전연前燕) 모용준慕容儁 광수光壽 2년이다.
[] 봄 2월에 진왕秦王 부견苻堅장평張平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장평張平을 공격할 적에 등강鄧羌을 선봉으로 삼아 분수汾水 가에注+① “汾上”은 汾水 가이다.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장평이 양자인 장자張蚝(장자)로注+② 蚝는 本姓이 弓이니, 上黨 사람이다. 蚝는 七吏의 切이다. 하여금 부견을 막게 하였다.
장자는 힘이 세고 민첩하여注+③ 趫는 丘妖의 切이니, 달리기를 잘하는 것이다. 능히 소를 끌어 뒤로 달리게 하고 높은 성을 뛰어넘었다. 부견이 사람들을 모집하여 그를 생포하려 하자, 등강이 사로잡아 바치니, 장평의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장평이 마침내 항복하자 우장군右將軍에 임명하고 장자를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으로 삼아서 항상 좌우에 배치하니, 진왕은 등강과 장자를 모두 만인적萬人敵이라고 칭하였다.
[] 가을 8월에 사만謝萬으로 사주司州, 예주豫州 등의注+ 군사軍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환온桓溫의 아우 환운桓雲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고자 하였는데, 복야僕射 왕표지王彪之가 말하기를
“환온이 상류에 있어서 이미 천하(강동江東 지역)의 절반을 차지하였는데, 그 아우가 다시 서쪽 번진藩鎭注+① 東晉의 豫州는 長江의 서쪽에 진영을 두었고, 建康은 장강의 동쪽에 있으므로 예주를 西藩이라 한 것이다. 처하면 병권이 한 가문에 몰리게 되니, 뿌리를 깊게 하고 꼭지를 튼튼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였다.
사마욱은 마침내 다시 사만謝萬으로 환운을 대신하게 하였다.
왕희지王羲之가 환온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사만은 재주가 뛰어나 세무世務에 통달하니,注+② “才流經通”은 그의 재주가 세상을 경륜할 만하여 당시의 同流 중에 世務에 통달한 자가 됨을 말한 것이다. 그로 하여금 낭묘廊廟(조정)를 주관하게 하면 이는 진실로 후생 중에 빼어난 자이어서 적합하지만, 이제 그로 하여금 몸을 굽혀 병란이 난 뒤의 번진藩鎭을 다스리게 한다면 재주에 맞지 않는 일을 바꾸어 시키는 것입니다.”注+③ 〈“今以之俯順荒餘 則違才易務矣”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邊郡의 병사와 백성들이 모두 병란을 겪은 뒤에 피폐하고 병들어 소생하지 못해서 난폭하고 사나워 다스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고개를 숙이고 나아가 유순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謝萬은 그러한 재주가 아니니, 그를 등용한다면 재주를 어김이 되는 것이다. 務는 일이다. 사만은 廊廟에 처할 수 있는 재주를 가졌는데 그로 하여금 변방 고을에 처하게 함은 일을 바꾸어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왕희지는〉 또다시 사만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그대가 고매한 재간才幹과 하찮은 일을 좋아하지 않는 기품氣品를 가지고 몸을 굽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자들과 일을 함께하면 진실로 마음을 쓰기가 어려울 것이다.注+④ 邁는 멂이다. 〈“以君邁往不屑之韻……誠難爲意也”는〉 그가 고매함을 自矜하여 軍中의 자잘한 사무를 좋게 여기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群辟”은 여러 관료와 모든 제후들이다.
그러나 이른바 통달한 지식이란 것은 바로 일에 따라 자신의 뜻을 행하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는 것이니, 원컨대 그대는 항상 사졸士卒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하면 지극히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사만은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 나라(전진前秦)에 큰 가뭄이 들었다.
[]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철거하고 후비后妃 이하에게 명하여 모두 비단옷을 제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산과 못의 이익을 개발하였으며 군대를 쉬게 하고 백성을 양육養育하니, 가뭄이 재앙이 되지 않았다.
[] 나라(전진前秦)가 본국의 특진特進번세樊世를 죽였다.
[] 왕맹王猛이 날로 친애와 총애를 받아 권력을 행사하니, 훈구勳舊들이 그를 많이 미워하였다. 번세樊世는 본래 저족氐族의 호걸로 진주秦主 부건苻健을 보좌하여 관중關中을 평정하였는데,
왕맹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밭을 갈아놓자 그대가 그 곡식을 먹는가.” 하니, 왕맹이 말하기를 “다만 그대로 하여금 밭을 갈게 할 뿐만이 아니요, 또 그대로 하여금 밥을 짓게 하여 먹겠다.” 하였다.
번세가 크게 노하여 “마땅히 너의 머리를 장안성長安城 성문에 매달아놓을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 살지 않겠다.” 하였다.
왕맹이 이 사실을 부견에게 아뢰자, 부견이 말하기를 “반드시 이 늙은 저족氐族을 죽인 뒤에야 백관百官을 엄숙히 할 수 있다.” 하였다.
마침 번세가 들어가 일을 말하면서 왕맹과 부견의 앞에서 논쟁을 벌였다. 번세가 일어나 왕맹을 공격하려고 하자, 부견이 노하여 번세를 참수하니, 이에 여러 신하들이 왕맹을 볼 적에 모두 숨을 죽였다.注+① “屛息”은 숨을 거두어 감춤을 이르니, 몹시 두려워함을 말한 것이다.
[] 나라(전연前燕)가 장평張平을 공격하니, 장평이 다시 나라에 항복하였다.
[] 겨울에 나라(전연前燕)가 하남河南을 함락하였다.
[] 태산태수泰山太守 제갈유諸葛攸나라의 동군東郡을 공격하여 무양武陽으로 쳐들어가자,注+① 後漢의 東郡은 東武陽을 치소로 삼았다. 晉 武帝 咸康 2년(276)에 아들 司馬允을 封하면서 東은 국명으로 삼을 수 없다 하고는 동군에 濮陽縣이 있으므로 地名을 고쳐 濮陽國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司馬允을 淮南王으로 고쳐 봉하고는 다시 東郡이라 하였다. 趙王 司馬倫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고는 太孫인 司馬臧을 폐하여 濮陽王으로 삼으니, 동군을 마침내 濮陽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아마도 燕나라가 다시 동군이라고 이름한 듯하다. ≪晉書≫ 〈地理志〉에 “武陽縣을 나누어 陽平郡에 소속시켰다.” 하였다.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대사마大司馬 모용각慕容恪을 보내어 제갈유를 공격하게 하니, 제갈유가 패주敗走하여 태산泰山으로 돌아갔다.
모용각이 마침내 황하를 건너 땅을 경략經略하여 수령들을 나누어 배치하였다.
[] 모용준慕容儁은 마침내 나라(전진前秦)와 나라(동진東晉)를 경영하고자 해서 주군州郡들로 하여금 현재 있는 장정壯丁의 실제 수를 조사하여注+① “校實”은 그 실제 수를 상고하는 것이다. “見丁(현정)”은 현재 있는 백성의 장정을 이른다. 가호마다 한 장정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징발하여 병사로 삼게 하였는데, 보병이 150만이 되도록 하여 내년 봄에 낙양에서 크게 모이기를 기약하였다.
유귀劉貴상서上書하여 “백성들이 몹시 피폐한 이때에 군대를 징발하는 것이 법에 맞지 않으니,注+② 〈“發兵非法”은〉 가호마다 한 장정을 남겨두고 모두 징발하여 군대로 삼는다는 법은 있지 않으므로 말한 것이다. 반드시 민란이 일어나 흙이 무너지는 변고가 이를 것입니다.”라고 지극히 아뢰었다.
모용준이 그의 말을 좋게 여겨 마침내 다시 5명 중에 3명을 징발하게 하여 내년 겨울에 업성鄴城에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 이때 나라는 부역을 시키고 세금을 거두는 것이 잦으니,注+① 數은 음이 朔이다. 관사官司들이 각기 사자를 보내어 도로에서 빈번하게 왕복하였다.注+② 한 번은 縱으로 하고 한 번은 橫으로 함을 “旁午”라 하니, 왕래하는 使者가 많음을 말한 것이다.
군현郡縣에서는 이를 괴로워하였는데, 태위太尉 봉혁封奕이 아뢰어 군령軍令의 기한이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사신을 보내지 못하게 하고 그 나머지 부역을 징발함은 모두 주군州郡이 책임지게 하도록 주청하니, 이를 따랐다.
[] 순선荀羨나라(전연前燕)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니, 치담郗曇(치담)을 도독서주都督徐州연주제군사兗州諸軍事로 삼았다.
[] 나라 태산태수泰山太守 가견賈堅산치山茌(산치)에注+
荀羨集兵獲賈堅荀羨集兵獲賈堅
① 茌는 仕疑의 切이니, 山茌는 前漢의 茌縣으로 泰山郡에 속하였는데, 後漢이 이름을 산치로 고쳤다.
주둔하자, 순선荀羨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를 공격하였다. 가견은 거느린 병력이 겨우 7백여 명이고 순선은 군대가 그보다 10배나 많았다.
가견이 탄식하기를 “내가 머리를 묶어 상투한 뒤로부터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에 뜻을 두었으나, 매번 곤궁함을 만나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굴욕을 당하여 살기보다는 절개를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하고는
마침내 성문을 열고 곧바로 나오니, 순선의 군대가 사방으로 모여서 그를 사로잡고 마침내 산치를 함락하였다.
[] 순선荀羨가견賈堅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대대로 나라의 신하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근본을 배반하고 항복하지 않는가?” 하자,
가견이 말하기를 “나라가 제 스스로 중화를 버린 것이지 우리가 배반한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이미 주인이 없으니, 강하면 그에게 목숨을 의탁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남을 섬겼으니, 어찌 절개를 바꾸겠는가.
나는 어려서 속수束脩를 행하여 스스로 뜻을 세우고서注+① “束脩自立”은 스승을 따라 就學하면서 곧 자립함에 뜻을 둠을 말한 것이다. 脩는 脯이니, 포 10마리를 束이라 한다. 옛날 스승을 따라 배울 적에 반드시 束脩를 가지고 예를 표하였다. 혹자는 “자신을 검속하고 修飭하여 몸을 세움을 이른다.” 하였다. 나라(후조後趙)와 나라(전연前燕)를 지나오면서 일찍이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이 어찌 나에게 급박하게 항복하라고 말하는가.” 하자,
순선이 노하여 그를 붙잡아 빗속에 버려두니, 며칠 만에 분노하다가 하였다.
[] 나라 청주자사青州刺史 모용진慕容塵사마司馬열명悦明을 보내어 태산泰山을 구원하니, 순선荀羨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나라가 다시 산치山茌를 점령하니, 연주燕主가견賈堅의 아들 가활賈活임성태수任城太守로 삼았다.
순선이 병이 위독하여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치담郗曇(치담)으로注+① 郗曇은 郗鑒의 아들이다. 서주徐州연주兗州의 군대를 도독하여 하비下邳에 진주하게 하였다.
[] 나라(전연前燕)가 모용수慕容垂로 하여금 요동遼東을 지키게 하였다.
[] 나라 오왕吳王 모용수慕容垂단말배段末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모용령慕容令모용보慕容寳注+① 令과 寶는 두 사람의 이름이다. 낳았다. 단씨段氏는 재주가 뛰어나고 성품이 맹렬한데, 스스로 자신이 귀한 성씨라 해서 합족혼후可足渾后(합족혼후)를 높여 섬기지 않으니,注+② 段氏와 慕容氏는 본래 대등한 나라였으므로 스스로 귀한 姓이라고 여긴 것이다. 可은 음이 榼이고 渾은 胡昆의 切이니, 可足渾은 북방의 세 글자의 성이다. 합족혼후는 燕主 慕容儁의 妃이다. 합족혼후가 원한을 품었다.
중상시中常侍 열호涅浩(열호)가注+③ 涅은 奴結의 切이니, 姓이다. 皓는 그의 이름이다. 그녀의 뜻에 맞추어 “단씨가 무술巫術을 사용하여 사람을 해친다.”고 무고誣告하니, 이는 모용수까지 연좌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모용준慕容儁이〉 그녀를 체포하여 정위廷尉에 내려 고문拷問하였으나 끝내 흔들리는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용수는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단씨는 끝내 옥중에서 죽었다.
모용수를 보내어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삼아 요동遼東에 진주하게 하였다. 모용수는 단씨의 여동생을 계실繼室로 삼았는데, 합족혼후가 그녀를 내치고 자기의 여동생을 모용수에게 시집보내니, 모용수는 기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모용수를 더욱 미워하였다.


역주
역주1 司州와……郡이다 : 僑置란 행정구역을 다른 지역에 옮겨 임시로 붙인 것이다. 東晉과 南朝 시대에 북방민족이 난을 일으켜 중원을 차지하자 그 지역 백성들이 강남으로 피해오자 중원의 행정구역을 옮겨 僑郡․僑縣을 둔 것이다. 司州와 豫州는 모두 江北 지역으로, 晉나라가 이들 지역을 관할하지 못하고, 다만 이들 지역에서 피난하여 江東 지역으로 이주하여 寓居하는 백성을 관장한 것이다.
역주2 (察)[瘵] : 저본에는 ‘察’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瘵’로 바로잡았다.
역주3 (辟)[碎] : 저본에는 ‘辟’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碎’로 바로잡았다.
역주4 群辟 群寮百辟也 : 이는 ≪資治通鑑綱目集覽≫의 내용을 訓義에서 가져다 쓴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群辟’을 ‘群碎’로 보고 번역하였다.
역주5 秦殺其特進樊世 : “殺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秦나라(前秦)를 심하게 여긴 것이다. 樊世의 죽음에 대해 세상에서는 어진 이를 임용하여 의심하지 않는 군주가 혹 취할 점이 있다고 말하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殺이라고 썼으니, 이는 勲舊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書殺 何 甚秦也 樊世之死 世稱任賢不貳者 或取焉 綱目以殺書之 所以存勲舊也]” ≪書法≫
역주6 (六)[大] : 저본에는 ‘六’으로 되어 있으나, ≪자치통감≫에 의거하여 ‘大’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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