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錄尙書事勰尙書巒奏曰 琛之所陳이 坐談則理高로되 行之則事闕하니
古之善治民者는 必汚隆隨時하며 豐儉稱事하여 役養消息하여 以成其性命이라
是故로 聖人斂山澤之貨하여 以寛田疇之賦하고 收關市之稅하여 以助什一之儲하니 取此與彼가 皆非爲身이니 所謂資天地之産하여 惠天地之民也니이다
今鹽池之禁이 爲日已久라 積而散之하여 以濟軍國하니 非専爲供太官之膳羞하며 給後宮之服玩也로되
然自禁鹽以來로 有司多慢하여 出納之間에 或不如法하니 是使細民嗟怨하고 負販輕議라
此乃用之者無方이요 非作之者有失也니 竊謂宜如舊式하노이다하니 魏主卒從琛議하다
目
呂苟兒帥衆十餘萬하여 圍逼秦州어늘 元麗擊破降之하다
太僕卿楊椿이 别討陳瞻한대 瞻據險拒守하니 諸將或請伏兵山蹊하여 斷其出入하여 待糧盡而攻之하고 或欲斬木焚山然後進討어늘
椿曰 皆非計也라 自官軍之至로 所向輒克하니 賊所以深竄은 正避死耳라
今約勒諸軍하여 勿更侵掠하면 賊必謂我見險不前이라하리니 待其無備然後奮擊이면 可一擧平也리라하고 乃止屯不進한대
賊果出抄掠이어늘 椿復以馬畜餌之라가 久之陰簡精卒하여 銜枚夜襲斬之하니 二州皆平하다
目
【目】 예전에 北魏의 御史中尉 甄琛이 말하기를 “≪周禮≫에는 산림과 하천에 虞와 衡의 관리를 두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였습니다.
注+① ≪周禮≫ 〈地官〉에 “山虞, 澤虞, 林衡, 川衡을 두었는데, 각각 산림과 하천을 大ㆍ中ㆍ小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다수와 소수의 인원을 배치하여 산림과 하천에 대한 政令을 관장하였으니, 물산마다 울타리를 설치하여 경계를 삼았고,[物爲之厲] 지키는 자를 위하여 금령을 설치하였다.[爲之守禁]” 하였다. 그 注에 “虞는 헤아린다는 뜻이니, 산택의 크기와 생산되는 물산을 헤아려 아는 것이다. 衡은 다스린다는 뜻이니, 산림과 하천의 크기와 생산되는 물산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物爲之厲’는 물산마다 울타리를 설치하여 경계를 삼는 것이고, ‘爲之守禁’은 지키는 자를 위하여 금령을 설치하는 것이다. 지키는 자는 그 땅의 백성으로서 숲의 나무를 베는 것을 간수하는 자를 말한다.” 하였다. 이는 제때에 그것을 채취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을 뿐이니, 비록 有司를 두기는 했지만, 실제는 백성을 위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爲身”과 “專爲”의 爲도 같다
한 집안의 어른은 반드시 자손에게 은혜를 베풀어 기르고, 천하의 君主는 반드시 만백성을 은혜롭게 양육하는 법이니, 백성의 부모가 된 사람으로 자기가 담근 젓갈을 아까워하거나 부유함이 천하의 만물을 소유하고서 하나의 물건을 독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河東의 鹽池를 막아서 보호하고 그 이익을 거두어들이는데, 이는 오로지 입과 배만 봉양하는 것이라 四肢에는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천자는 부유하여 四海를 소유하셨는데, 어찌 가난함을 걱정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소금에 관한 禁令을 풀어주시어 백성들과 그것을 함께하소서.”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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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錄尙書事 元勰과 尙書 邢巒이 상주하기를 “甄琛이 아뢴 내용은 앉아서 말한다면 이치가 고상하지만, 그것을 시행한다면 일이 잘못될 것입니다.
옛날에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반드시 때에 따라 줄이고 늘렸으며, 일에 걸맞게 넉넉하게 하거나 검소하게 하였고, 변화에 따라 백성을 부리고 양육해주어서 생명을 이루어나가게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聖人은 산림과 택지의 재물을 거두어서 전답의 賦稅를 느슨히 하였고, 관문과 시장의 세금을 거두어서 십분의 일의 세금을 보조하였는데, 이쪽에서 취하여 저쪽에 주는 것이 모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니, 이른바 천지의 생산물을 밑천으로 하여 천지에 있는 백성에게 베푼 것입니다.
지금 鹽池의 금령을 내린지 오랜 시일이 지났고, 염지에서 거두어 쌓은 재물을 분산하여 군사와 국가의 비용을 해결하였으니, 오로지 太官의 음식으로 제공하고 後宮의 의복과 완호품으로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鹽池의 금령을 시행한 이후로 有司는 대부분 태만하여 출납할 때에 법대로 하지 않기도 하였으니, 이 일은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하게 만들었고, 상인들이 경솔히 논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관리하는 사람이 원칙을 없게 한 것이지, 만든 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니, 생각건대 마땅히 예전의 방식대로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元恪)가 결국 견침의 논의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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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가 中山王 元英을 征南將軍으로 삼아 都督揚․徐諸軍事로 삼아 군대 10여만 명을 이끌고 梁나라의 군대를 막도록 하고, 도착하는 곳에서 편의에 따라 일을 하게 하였다.
양나라 江州刺史 王茂가 河南城을 빼앗자,
注+① 蕭子顯의 ≪南齊書≫ 〈州郡志〉에 “雍州에 河南郡을 두어 5縣을 관할하는데, 棘陽만이 실제 관할 구역이다.” 하였으니, 河南郡은 南陽 棘陽縣의 경계에 있어야 한다. 북위에서는 장군 楊大眼을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漢水에 이르러 공격해서 다섯 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注+② 楊大眼은 楊難當의 손자이다.
5월에 양나라 右衛率 張惠紹가 宿預를 함락하였고,
注+③ 晉 安帝가 宿預縣을 설치하여 淮陽郡에 소속시켰는데, 北魏 高祖(元宏)가 南徐州의 治所로 삼았다. 北徐州刺史 昌義之가 梁城을 함락하였다.
注+④ 南徐州는 京口에 治所를 두었기 때문에 鍾離를 北徐州의 治所로 삼은 것이다. 昌은 성씨이다. 豫州刺史 韋叡가 小峴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여 소현을 둘러쌓은 목책을 순시하러 갔는데,
注+⑤ 行(순시하다)은 去聲이다. 북위에서 수백 명의 군사를 내보내어 문 밖에 진을 치게 하였다.
注+⑥ 陳(진을 치다)은 陣으로 읽는다.
위예가 그들을 공격하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앞서 軍裝을 가볍게 하고 와서 전투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천천히 돌아가 갑옷을 갖추어야 진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위예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북위는 성안에 있는 2천여 명으로 굳게 지키기에 충분한데, 지금 까닭 없이 밖으로 군대를 내보냈으니, 반드시 그들은 굳세고 용맹한 군사들일 것이다. 만일 그들을 꺾을 수 있다면 그 성은 절로 함락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대가 여전히 지체하며 의심하니, 위예가 부절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것을 나에게 준 것은 장식으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니, 나 위예의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진격하여 그들을 공격하여 병사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자, 북위의 병사들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이어서 급히 공격하여 밤중에 성을 함락하고 마침내 合肥에 이르렀다.
注+⑦ 中(반쯤)은 去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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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보다 앞서 司馬인 胡景略 등이 合肥를 공격하였으나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韋叡가 밤에 肥水를 막고 전함이 뒤이어서 도착하여 北魏의 작은 성을 공격하자,
注+① ≪資治通鑑≫에는 “제방을 쌓아 물길이 통하자, 전함이 뒤이어서 도착하였다.” 히였다. 북위의 장수인 楊靈胤이 군대 5만을 인솔하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무리들이 놀라서 군대를 증원해달라고 상주하기를 청하니, 위예가 웃으며 말하기를 “도적들이 성 아래에 이르렀으니, 군대를 증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우리가 군대를 증원하면 저들도 군대를 증원할 것이다. 전쟁은 기습을 이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어찌 군사의 숫자에 달려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양영윤을 격파하였다.
위예는 軍主인 王懐靜을 시켜서 성을 쌓고 제방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북위가 공격하여 함락하여 승세를 타고 제방 아래에 이르렀다. 군대의 위세가 아주 대단하여 여러 장군들이 퇴각하려고 하자, 위예가 화를 내며 儀仗으로 쓰는 일산과 부채 및 대장기와 깃발을 가져다가 제방 아래에 꽂아놓도록 명령하여 움직일 뜻이 없음을 보였다.
注+② 일산ㆍ부채ㆍ대장기ㆍ깃발 네 가지는 모두 刺史의 의장이다.
북위의 군사들이 와서 제방을 뚫자, 위예가 직접 그들과 싸우니, 북위의 군대가 물러났다. 그 틈을 타고 제방에 보루를 쌓아서 스스로 굳게 방비하고 전투함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는 合肥城과 비슷하여 사면에서 합비성을 핍박하니,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수비 장수 杜元倫이 쇠뇌에 맞아 죽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사로잡고 참수한 사람이 1만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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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韋叡의 몸은 평소 야위어서 말에 걸터앉은 적이 없었고 전투 때마다 늘 板輿를 타고서 장수와 병사를 독려하니, 그의 용기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낮에는 빈객을 접대하였고, 밤에는 군사 문서를 처리하느라 새벽까지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위예가 군사들을 돌보는 데에 항상 부족한가 하듯이 하였기에 모집에 응모하는 군사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위예가 도착하여 머무는 곳에서 건물의 울타리와 담장은 모두 국가의 기준을 따랐다.
注+① ≪南史≫ 〈韋叡傳〉에는 ‘館宇’ 위에 ‘修立’ 두 글자가 더 있다.
위예가 진격하여 東陵에 도착하니, 군대를 돌리라는 조서가 있었는데, 장수들이 적의 성이 가까워 적들이 뒤를 쫓아올까 두려워하자,
注+② 姚思廉의 ≪梁書≫에 의거하면 당시에 北魏가 甓城을 수비하였는데, 東陵과의 거리가 20리였다. 위예가 군수물자를 실은 수레를 행렬의 앞에 두고 자신은 작은 수레를 타고서 행렬의 가장 후미에 섰다.
북위의 군사들이 위예의 위엄과 명성에 탄복하여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자, 군대를 온전하게 해서 돌아왔다.
이때에 豫州의 治所를 合肥로 옮겼다.
注+③ 豫州의 治所를 晉熙에서 合肥로 옮긴 것이다.
廬江太守 裴䆳가 북위의 羊石城과 霍丘城을 함락하였고,
注+④ ≪水經註≫에 “曹魏 때에는 安豐都尉는 安豐津의 남쪽에 치소를 두었는데, 그 후에 그 故城이 있던 곳에 霍丘戍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隋나라 때에는 霍丘縣을 설치하였다. 6월에는 靑州․冀州刺史 桓和가 胊山城과 固城을 함락하였다.
注+⑤ 胊는 음이 劬이다. 固城은 抱犢固城인 듯한데, 抱犢固는 蘭陵의 경계에 있다. 張惠紹가 彭城으로 진격했는데 북위의 奚康生이 그를 공격하자, 장혜소의 군사들이 불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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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源懷는 성품이 너그럽고 소탈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貴人이 되어서는 마땅히 큰일을 거론해야지 어찌 반드시 일마다 세밀하게 따지겠는가.
비유하면 집을 짓는 일과 같아 밖에서 보면 높고 드러나며 기둥과 마룻대가 평평하고 바르며 집터와 벽이 견고하면 충분하니, 도끼를 댄 곳이 평평하지 않고 깎아낸 곳이 세밀하지 않은 것은 집의 흠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원회가〉 卒하자, 시호를 ‘忠’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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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呂苟兒가 10여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秦州를 포위하여 압박하였는데, 元麗가 격파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太僕卿 楊椿이 별도로 陳瞻을 토벌하였는데, 진첨이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대항하여 수비하자, 여러 장수들 가운데 어떤 이는 산길에 병사를 매복시켜 그들의 출입을 차단하여 군량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청하였고, 어떤 이는 나무를 베고 산을 불태운 뒤에 진격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양춘이 말하기를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官軍이 도착한 뒤로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승리하니, 도적이 깊숙이 숨은 것은 바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지금 諸軍과 약속을 하여 다시 들어가서 약탈을 하지 않도록 하면 도적은 반드시 우리가 그들의 험준한 지형을 보고 전진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무방비 상태가 되기를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공격하면 한 번에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주둔한 채 나아가지 않았다.
도적이 과연 나와서 노략질을 하였는데, 양춘이 다시 말과 가축으로 그들을 유인하고는 오랜 뒤에 몰래 날랜 군사를 뽑아서 재갈을 물려 밤에 기습하여 〈진첨의〉 목을 베니, 秦州와 涇州가 모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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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가 邢巒에게 조서를 내려 中山王 元英과 함께 梁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蕭宏이 두려워하여 諸將을 불러 군사를 돌리자는 논의를 하자, 呂僧珍이 말하기를 “곤란한 상황을 알고서 물러나는 것이 역시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굉이 말하기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柳惔이 말하기를 “大軍이 이르는 곳에 어느 성인들 항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곤란하다고 여기십니까.”라고 하였다.
裴䆳가 말하기를 “이번에 출정을 한 것은 본래 적을 찾기 위함인데, 어찌 곤란을 피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馬仙琕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어찌 나라를 망치는 말을 하십니까. 天子께서는 境內의 군사와 물자를 싹 쓸어서 왕에게 맡기셨으니, 한 자를 앞으로 나가다가 죽을지언정 한 치를 물러나 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注+① 屬(맡기다)은 之欲의 切이다.
昌義之는 화가 나서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뻣뻣해져 말하기를 “여승진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백만의 군대가 나가서 아직 적을 만나기도 전에 멀리서 적의 기세를 보고서 갑자기 후퇴하려고 하니, 무슨 면목으로 聖主를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注+② 磔은 음이 摘이니, 펼침며, 엶이다.
朱僧勇과 胡辛生이 검을 뽑고서 말하기를 “후퇴하고 싶으면 스스로 후퇴하십시오. 저희들은 진격하다가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논의하던 사람들이 나온 뒤에 여승진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제부터 風氣가 일어나서 의중이 군대에 있지 않으니, 크게 기세가 꺾일까 몹시 두렵기 때문에 군사를 온전히 보호하여 돌아가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注+③ “風動”은 蕭宏의 마음에 風氣가 일어 동요함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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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蕭宏이 군대를 멈추고 진격하지 않으니, 北魏의 군대가 두건과 머리 장식을 보내고 또 노래를 지어서 말하기를 “蕭娘(蕭宏)과 呂姥(呂僧珍)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合肥에 있는 韋虎를 두려워하네.”라고 하였는데, 위호란 韋叡를 말한 것이다.
注+① 娘은 尼良의 切로, 소녀의 호칭이고, 姥는 莫補의 切로, 늙은 부인이니, 부인과 처녀처럼 겁을 내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여승진이 裴䆳를 보내어 壽陽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소굉이 듣지 않고 軍中에 명령하기를 “앞으로 가는 자는 머리를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이 마음속에 분노를 품었다.
북위의 奚康生이 파발을 보내어 中山王 元英에게 말하기를 “梁나라 군대가 梁城에서 승리를 거둔 뒤로 오랫동안 진군하지 않으니, 필시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나아가 洛水를 점거하면 저들은 스스로 도망쳐 패배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원영이 말하기를 “臨川王 蕭宏이 비록 어리석지만 韋叡와 배수의 무리들은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형세를 관찰해야지 교전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張惠紹는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며 가는 곳마다 홀로 승리를 거두었다. 下邳에 진을 치자, 항복하려는 하비 사람들이 많았는데,
注+② 이전에 이미 張惠紹가 宿預를 버리고 달아나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숙예는 下邳의 동남쪽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하비에 주둔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숙예를 버리기 이전의 일이다. 李延壽가 이 일을 臨川王 蕭宏의 傳記에 실어놓았으니, ≪資治通鑑≫에서 이로 인해 역시 이어서 기록하였다.
장혜소가 그들을 타이르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성을 차지하게 되면 卿들은 모두 이 나라의 백성이 되겠지만, 만약 승리하지 못하면 다만 경들에게 고향을 잃도록 할 것이니, 조정이 백성을 위로하는 뜻이 아니다.
注+③ 國人은 王民(王의 백성)이라는 말과 같다. 지금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본업으로 돌아가서 함부로 자신을 고생스럽게 하지 말라.”라고 하니, 항복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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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마침 밤에 폭풍우가 쏟아져 軍中이 놀라자, 臨川王 蕭宏이 몇 명의 기병과 함께 도주하니, 장수와 병사가 모두 흩어져 돌아가면서 버린 갑옷과 내던진 무기가 강과 육지에 가득하였으며, 죽은 사람이 5만 명에 가까웠다. 소굉은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밤에 白石壘에 이르러 성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가기를 요구하였다.
臨汝侯 蕭淵猷가 성 위에 올라서 말하기를
注+① 蕭淵猷는 蕭淵藻의 아우이다. “백만의 군사가 하루아침에 새처럼 흩어졌으니, 나라의 존망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간악한 사람이 그 틈을 타고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우니, 밤중에 성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군대는 소굉이 도주하여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서 역시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魏主(元恪)는 元英에게 조서를 내려 승리한 기세를 타고 동남쪽을 평정하여 소탕하도록 하자, 北魏의 군대가 패퇴한 군사들을 추격하여 馬頭에 이르러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안에 저장되어 있던 양식을 모두 북쪽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논의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북위가 다시는 남쪽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니, 梁主(蕭衍)가 말하기를 “이는 군사를 전진시키려고 하면서 속임수를 쓴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명령하여 鍾離城을 보수하고 昌義之에게 칙령을 내려서 전투와 수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注+② 馬頭城은 鍾離의 서쪽에 있는데, 馬頭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北魏가 동쪽으로 鍾離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를 한 것이다.
目
【目】 10월에 元英이 나아가서 鍾離를 포위하자, 魏主(元恪)가 邢巒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대를 이끌고 그와 會合하라고 하니, 형만이 表文을 올리기를 “南軍은 비록 들판에서 전투를 치르는 데는 적수가 되지 않으나 성을 지키는 데는 넉넉하니, 지금 정예병을 모두 투입하여 종리를 공격해서 함락해도 거의 이득이 없고, 함락하지 못하면 손실이 아주 큽니다.
또 〈종리가〉 淮水 밖에 떨어져 있으니,
注+① 介는 사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가령 손을 묶고 귀순하더라도 오히려 양식이 없어서 지키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더구나 병사들을 죽이면서까지 이곳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병사들이 피로하고 지친 데다 죽거나 부상을 당해 쓸 수 있는 힘이 없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예전의 수자리를 보수하여 회복하고 여러 州를 안무하여 훗날의 거사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가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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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漢나라(成漢) 李勢 말년에 獠族들이 처음으로 출현하여, 북쪽으로 漢中에서 남쪽으로 卭 지역과 笮 지역에 이르기까지 산골짜기에 가득히 퍼져 살았다.
注+① 西晉 말기에 氐人 李雄이 蜀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李壽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여 국호를 漢이라고 고쳤다. 桓溫이 蜀을 정벌하자, 李壽의 아들 李勢가 항복하였다.
이세가 죽자, 蜀의 백성들은 대부분 동쪽으로 이동하였으니, 산골짜기에는 모두 요족이 점거하여 그 가운데 郡縣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제법 조세를 잘 바쳤으나, 멀리 있는 사람은 군현에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梁州와 益州에서는 해마다 요족을 정벌하여 스스로 윤택해져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를 이익으로 여겼다.
邢巒이 梁州刺史가 되자 요족 가운데 군현에 가까이 살던 사람들은 모두 안도하여 본업을 즐겼으며 먼 곳에 살던 사람들은 감히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형만이 파직되어 떠나고 나서 羊祉와 傅豎眼이 그를 대신하였는데, 양지는 성격이 잔혹하고 포학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요족이 梁나라의 군사를 끌어들여 노략질을 하자, 양지가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부수안은 은혜를 베풀고 신의를 펴서 크게 요족의 마음을 얻어 화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