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天監五年이요 魏正始三年이라
春正月 魏邢巒 討武興氐滅之하고 置東益州하다
楊集義圍魏關城注+① 此即陽平關城也.이어늘 邢巒使傅竪眼으로 討之하여 克武興하고 執楊紹先하여 送洛陽하니
集起集義亡走어늘 遂滅其國하여 以爲東益州하다
魏秦涇二州亂하다
魏秦州屠各王法智聚衆二千하여 推呂苟兒爲主하고 涇州民陳瞻亦聚衆稱王이어늘 魏遣將軍元麗討之注+① 魏置涇州, 治臨涇城, 領安定․隴東․新平․趙平․平涼․平原等郡. 麗, 魏文成弟小新成之子也.하다
二月 魏求直言하다
侍御史陽固上表曰 當今之務 宜親宗室하고 勤庶政하며 貴農桑하고 賤工賈하며 絶談虛窮微之論하고 簡桑門無用之費하여 以救飢寒之苦니이다하다
時魏主委任高肇하고 疏薄宗室하며 好桑門之法하여 不親政事 故固言及之하다
三月朔 日食하다
臨川王宏爲書遺陳伯之曰 尋君去就之際하니 非有它故 直以不能内審諸己하고 外受流言하여 沈迷猖蹶하여 以至於此
主上屈法申恩하여 吞舟是漏注+① 前漢刑法志 “網漏吞舟之魚.” 言法寬也.하니 將軍松柏不翦하며 親戚安居하고 高臺未傾하며 愛妾尙在로되
而將軍魚遊於沸鼎之中하고 鷰巢於飛幕之上하니 不亦惑乎 想早勵良圖하여 自求多福注+② 松柏不翦, 謂不毀夷其先世墳墓也. 親戚安居, 謂其親戚在江南者, 皆不以叛黨連坐, 安居自若也. 高臺未傾, 謂居第未嘗汙瀦, 池臺如故也. 愛妾尙在, 謂其婢妾猶守其家, 不沒于官及流落于他家也.하라하니
伯之遂自壽陽梁城으로 擁衆降梁한대 梁以爲通直散騎常侍러니 久之而卒注+③ 晉孝武太元中, 僑立梁郡於淮南․壽春界, 故有梁城, 其地在壽陽東北, 鍾離西南.하다
夏四月 魏罷鹽池之禁하다
魏御史中尉甄琛言 周禮 山林川澤 有虞衡之官하여 爲之厲禁注+① 周禮地官 “有山虞․澤虞․林衡․川衡, 各以山林川澤之大中小三等, 置人有多寡, 掌山林川澤之政令, 物爲之厲而爲之守禁.” 注 “虞, 度也, 度知山澤之大小及所生者. 衡, 平也, 平其林川之大小及所生者. 物爲之厲, 每物有藩界也. 爲之守禁, 爲守者設禁令也. 守者, 謂其地之民占伐林木者也.”하니 蓋取之以時하여 不使戕賊而已 雖置有司 實爲民守之也注+② 爲, 去聲, 下爲身專爲同.
夫一家之長 必惠養子孫하고 天下之君 必惠養兆民하나니 未有爲人父母而吝其醯醢하고 富有群生而搉其一物者也
今縣官鄣護河東鹽池而收其利하니 是専奉口腹而不及四體也
天子富有四海하니 何患於貧이리오 乞弛鹽禁하여 與民共之하소서하다
錄尙書事勰尙書巒奏曰 琛之所陳 坐談則理高로되 行之則事闕하니
古之善治民者 必汚隆隨時하며 豐儉稱事하여 役養消息하여 以成其性命이라
是故 聖人斂山澤之貨하여 以寛田疇之賦하고 收關市之稅하여 以助什一之儲하니 取此與彼 皆非爲身이니 所謂資天地之産하여 惠天地之民也니이다
今鹽池之禁 爲日已久 積而散之하여 以濟軍國하니 非専爲供太官之膳羞하며 給後宮之服玩也로되
然自禁鹽以來 有司多慢하여 出納之間 或不如法하니 是使細民嗟怨하고 負販輕議
此乃用之者無方이요 非作之者有失也 竊謂宜如舊式하노이다하니 魏主卒從琛議하다
魏遣中山王英하여 督諸軍以拒梁師러니 五月 梁取宿預梁城小峴合肥等城하다
魏以中山王英으로 爲征南將軍하여 都督揚徐諸軍事하여 帥衆十餘萬하여 以拒梁軍하고 所至 以便宜從事하다
梁江州刺史王茂 取河南城注+① 蕭子顯齊志 “雍州有河南郡, 所領五縣, 惟棘陽爲實土.” 則河南郡當在南陽棘陽縣界. 魏遣將軍楊大眼하여 擊敗之하고 追至漢水하여 攻拔五城注+② 大眼, 難當之孫也.하다
五月 梁右衛率張惠紹 拔宿預注+③ 晉安帝立宿預縣, 屬淮陽郡, 魏高祖以爲南徐州治所.하고 北徐州刺史昌義之 拔梁城注+④ 南徐治京口, 故以鍾離爲北徐. 昌, 姓也.하고 豫州刺史韋叡 攻小峴未拔하여 出行圍柵注+⑤ 行, 去聲. 魏出數百人하여 陳於門外注+⑥ 陳, 讀曰陣.러니
叡欲擊之한대 諸將皆曰 向者輕來하여 未有戰備하니 徐還授甲이라야 乃可進耳라하니
叡曰 不然하다 魏城中二千餘人 足以固守로되 今無故出人於外하니 必其驍勇者也 苟能挫之 其城自拔하리라하다
衆猶遲疑어늘 叡指其節曰 朝廷授此 非以爲飾이니 韋叡法不可犯也라하고
遂進擊之하니 士皆殊死戰이라 魏兵敗走어늘 因急攻之하여 中宿而拔하고 遂至合肥注+⑦ 中, 去聲.하다
先是 司馬胡略等 攻合肥久未下 叡夜堰肥水하고 舟艦繼至하여 攻魏小城注+① 通鑑 “堰成水通, 舟艦繼至.”이러니 魏將楊靈胤帥衆五萬奄至하니
衆懼하여 請奏益兵한대 叡笑曰 賊至城下하니 益兵何及이리오 且吾益兵이면 彼亦益兵하리니 兵貴用奇 豈在衆也리오하고 遂擊破之하다
叡使軍主王懐靜으로 築城以守堰이러니 魏攻拔之하여 乘勝至堤下하니 兵勢甚盛이라 諸將欲還이어늘 叡怒命取繖扇麾幢하여 樹之堤下하여 示無動志注+② 繖ㆍ扇ㆍ麾ㆍ幢四者, 皆刺史之儀仗.한대
魏人來鑿堤어늘 叡親與之爭하니 魏兵却이라 因築壘於堤하여 以自固하고 起鬪艦하니 高與合肥城等이라 四面臨之하니 城中人皆哭이러라
守將杜元倫 中弩死하니 城遂潰 俘斬萬餘級하다
叡體素羸하여 未嘗跨馬하고 毎戰常乘板輿하여 督厲將士하니 勇氣無敵이라
晝接賓旅하고 夜筭軍書하여 張燈達曙하고 撫其衆常如不及이라 故投募之士 爭歸之하고
所至頓舍 館宇藩牆 皆應準繩注+① 叡本傳, 館宇上有修立二字.이러라
進至東陵하여는 有詔班師 諸將以城近恐其追躡注+② 據思廉梁書, 時魏守甓城, 去東陵二十里.이어늘 叡悉遣輜重居前하고 身乘小輿殿後하니
魏人服叡威名이라 望之不敢逼하니 全師而還하다
於是 遷豫州治合肥注+③ 豫州自晉熙遷合肥.하다
廬江太守裴䆳 克魏羊石霍丘城注+④ 水經註 “曹魏安豐都尉治安豐津南, 後以其故城立霍丘戍.” 隋立霍丘縣.하고 六月 靑冀刺史桓和 克胊山固城注+⑤ 胊, 音劬. 固城, 疑即抱犢固城也, 抱犢固在蘭陵界.하고 張惠紹進彭城한대 魏奚康生擊之하니 惠紹兵不利하다
魏以邢巒으로 都督東討軍事하다
◑ 魏驃騎大將軍馮翊公源懷卒하다
懷性寛簡하여 常曰 爲貴人 當擧綱維하니 何必事事詳細리오
譬如爲屋 外望高顯하여 楹棟平正하고 基壁完牢 足矣 斧斤不平하며 斵削不密 非屋之病也라하다
하니 諡曰惠이라하다
秋七月 魏討秦涇二州하여 平之하다
呂苟兒帥衆十餘萬하여 圍逼秦州어늘 元麗擊破降之하다
太僕卿楊椿 别討陳瞻한대 瞻據險拒守하니 諸將或請伏兵山蹊하여 斷其出入하여 待糧盡而攻之하고 或欲斬木焚山然後進討어늘
椿曰 皆非計也 自官軍之至 所向輒克하니 賊所以深竄 正避死耳
今約勒諸軍하여 勿更侵掠하면 賊必謂我見險不前이라하리니 待其無備然後奮擊이면 可一擧平也리라하고 乃止屯不進한대
賊果出抄掠이어늘 椿復以馬畜餌之라가 久之陰簡精卒하여 銜枚夜襲斬之하니 二州皆平하다
九月 하다 冬十月 魏徵邢巒還하고 遣齊王蕭寳寅하여 與元英으로 圍鍾離하다
魏發定冀瀛相并肆六州十萬人하여 以益南行之兵한대
梁主遣將軍角念屯蒙山하고 蕭及屯固城하고 桓和屯孤山注+① 角, 姓也. 魏收志 “南青州東安郡新泰縣東南有蒙山. 蓋蒙山即古所謂東蒙也, 與固城․孤山皆近魏兗州東界, 故梁連兵據之, 以招兗州之民.” 魏收志 “蘭陵郡蘭陵縣有石孤山, 又昌慮縣有孤山.”이러니 魏都督邢巒 遣軍攻하니 皆走之하고
又敗梁將軍藍懐恭于睢口하고 進圍宿預하여 斬懷恭注+② 藍, 姓也. 水經註 “睢水過睢陵縣故城北而東南流, 逕下相縣故城南, 又東南流, 入于泗, 謂之睢口.”하니 張惠紹蕭昞棄宿預淮陽하고 遁還注+③ 通鑑 “張惠紹棄宿預, 蕭昞棄淮陽遁還.”하다 臨川王宏 以梁主弟 將兵하여 軍容甚盛이라 北人以爲百餘年來所未有也라하다
次洛口하여 前軍克梁城注+④ 即謂昌義之克梁城也.하니 諸將欲乘勝深入호되 宏性懦怯하고 部分乖方이라
魏詔邢巒하여 與中山王英으로 合攻梁城한대 宏懼하여 召諸將議旋師할새 呂僧珍曰 知難而退 不亦善乎아하니 宏曰 然이라하다
柳惔曰 大衆所臨 何城不服이완대 何謂難乎아하고
裴䆳曰 是行也固敵是求 何難之避리오하고
馬仙琕曰 王安得亡國之言 天子掃境内以屬王하니 有前死一尺이요 無郤生一寸注+① 屬, 之欲切.이라
昌義之怒하여 須髪盡磔曰 呂僧珍可斬也로다 百萬之師 出未逢敵하여 望風遽退하니 何面目見聖主乎注+② 磔音摘, 張也, 開也.아하다
朱僧勇胡辛生拔劍曰 欲退自退하라 下官當前向取死호리라하다
議者出 僧珍曰 殿下昨來風動하여 意不在軍하니 深恐大致沮喪이라 故欲全師而返耳注+③ 風動, 謂宏心風發動也.로라
宏停軍不前하니 魏人遺以巾幗하고 且歌之曰 不畏蕭娘與呂姥 但畏合肥有韋虎라하니 虎謂叡也注+① 娘, 尼良切, 少女之號. 姥, 莫補切, 耆母也. 言其怯懦, 如婦人女子也.
僧珍欲遣裴䆳하여 取壽陽한대 宏不聽하고 令軍中曰 前行者斬호리라하니 於是 將士人懷憤怒러니
魏奚康生馳謂中山王英曰 梁人自克梁城으로 久不進軍하니 必畏我也 王若進據洛水 彼自奔敗리라
英曰 蕭臨川 雖騃 韋裴之屬 未可輕也 宜觀形勢 勿與交鋒이니라
張惠紹號令嚴明하여 所至獨克이라 軍于下邳하니 下邳人多欲降者注+② 前已言張惠紹棄宿預遁還矣. 宿預在下邳東南百餘里. 此言軍于下邳, 是未棄宿預之前事. 李延壽以此事載之臨川王宏傳, 通鑑因亦連而書之.어늘
惠紹諭之曰 我若得城이면 諸卿皆是國人이어니와 若不能克이면 徒使諸卿으로 失鄉里 非朝廷弔民之意也注+③ 國人, 猶言王民也. 今且安堵復業하고 勿妄自辛苦라하니 降人咸悅이러라
會夜暴風雨하여 軍中驚이라 臨川王宏與數騎逃去하니 將士皆散歸하여 棄甲投戈하여 塡滿水陸하고 死者近五萬人이라 宏乘小船濟江하여 夜至白石壘하여 叩門求入한대
臨汝侯淵猷 登城謂曰注+① 淵猷, 淵藻之弟也. 百萬之師 一朝鳥散하니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姦人乘間爲變하니 城不可夜開
諸軍聞宏逃歸하고 亦皆引退하다 魏主詔英乘勝하여 平蕩東南한대 魏人逐北至馬頭攻拔之하고 城中糧儲 悉遷之北하니
議者曰 魏不復南向矣리라하다 梁主曰 此欲進兵하여 爲詐計耳라하고 乃命修鍾離城하고 敇昌義之하여 爲戰守之備注+② 馬頭城在鍾離之西, 馬頭旣陷, 魏必東攻鍾離, 故預爲之備.러라
十月 英進圍鍾離어늘 魏主詔邢巒引兵會之한대 巒上表曰 南軍雖野戰非敵而城守有餘하니 今盡銳攻鍾離하여 得之則所利無幾 不得則虧損甚大하고
且介在淮外注+① 介, 隔也.하니 借使束手歸順이라도 猶恐無糧難守어든 況殺士卒以攻之乎
又士卒疲弊死傷하여 懼無可用之力하니 謂宜修復舊戍하고 撫循諸州하여 以俟後擧니이다하니 不聽하다
巒又表曰 若不顧萬全하고 直襲廣陵하여 出其不備 或未可知어니와 若正欲以八十日糧으로 取鍾離城者 臣未之前聞也注+① 英期以八十日糧取鍾離, 故巒云然.로소이다
鍾離 天險이라 必無克狀이니 臣寧荷怯懦不進之責이언정 不受敗損空行之罪也注+② 荷, 上聲, 負也.니이다 魏主乃以將軍蕭寳寅으로 代巒이라
侍中盧昶 素惡巒이라 與侍中元暉 共譖之하여 使中尉崔亮으로 彈巒注+① 通鑑 “與侍中領右衛將軍元暉共譖之, 使御史中尉崔亮彈巒在漢中掠人爲奴婢.”이어늘 巒以漢中所得美女 賂暉한대
暉言於魏主曰 巒新有大功하니 不當以赦前小事案之니이다하니 遂不問注+② 是年正月, 魏于后生子昌, 大赦.하다
暉昶恃寵貪縱하니 時人謂之餓虎將軍飢鷹侍中이라하다
暉尋遷吏部尙書하여 官有定價하니 選人謂之市曹注+③ 以選曹貨賂爲市, 因謂之市曹.라하다
十一月 梁主詔將軍曹景宗都督諸軍二十萬하여 救鍾離할새 敇景宗頓道人洲하여 俟衆軍俱進注+④ 道人洲在邵陽洲之東.한대
景宗固求先據卲陽洲尾어늘 不許러니 景宗違詔而進이라가 値風復還注+⑤ 謂還守道人洲也.하니
上聞之曰 景宗不進 蓋天意 若孤軍獨往이면 必至狼狽리니 今破賊必矣로다
柔然庫者可汗死하니 子佗汗可汗伏圖立注+① 佗汗, 魏言緒也.하다
改元始平하고 請和于魏不許하다
魏以羊祉 爲梁州刺史하고 傅豎眼으로 爲益州刺史하다
漢李勢之末 群獠始出하여 北自漢中으로 南至卭笮 布滿山谷注+① 西晉末, 氐人李雄稱尊號於蜀, 壽嗣位, 改國號曰漢. 桓溫伐蜀, 壽子勢降.이러니
勢亡 蜀人多東徙하니 山谷皆爲獠所據하여 其近郡縣者 頗輸租賦하고 遠者 郡縣不能制
梁益 歲伐獠以自潤하여 公私利之러니
及邢巒爲梁州 獠近者 皆安堵樂業하고 遠者 不敢爲寇러니
巒旣罷去 祉及豎眼代之한대 祉性酷虐하여 不得物情이라
獠引梁兵爲寇어늘 祉擊破之하고 豎眼 施恩布信하여 大得獠和하다


梁 高祖 武帝 蕭衍 天監 5년이고, 北魏 世宗 宣武帝 元恪 正始 3년이다.
【綱】 봄 정월에 北魏의 邢巒이 武興氐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東益州를 설치하였다.
【目】 楊集義가 北魏의 關城을 포위하자注+① 이는 陽平關城이다. 邢巒이 傅竪眼을 시켜서 토벌하도록 하여 武興에서 승리하고, 楊紹先을 잡아서 洛陽으로 보냈다.
楊集起와 楊集義가 도주하자,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東益州로 삼았다.
【綱】 北魏 秦州와 涇州에서 난을 일으켰다.
【目】 北魏 秦州에서 인 王法智가 무리 2천을 모아 呂苟兒를 추대하여 主君으로 삼고, 涇州 사람 陳瞻 역시 무리를 모아 王이라고 칭하니, 北魏가 장군 元麗를 보내어 토벌하였다.注+① 北魏에서 涇州를 설치하였는데, 臨涇城에 治所를 두었고, 安定, 隴東, 新平, 趙平, 平涼, 平原 등의 郡을 관할하였다. 元麗는 北魏 文成帝의 아우인 小新成의 아들이다.
【綱】 2월에 北魏에서 직언을 구하였다.
【目】 侍御史 陽固가 表文을 올리기를 “지금 힘써야 할 일은 마땅히 宗室을 가까이하고 모든 정치에 부지런하며, 농사와 양잠을 귀하게 여기고,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며, 를 끊고, 桑門(僧侶)의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고통을 구제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魏主(元恪)가 高肇에게 일을 위임하고 종실을 소홀히 하고 박대하였으며, 桑門의 법을 좋아하여 정사를 친히 처리하지 않았기에 양고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綱】 3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北魏의 豫州刺史 陳伯之가 배반하여 다시 梁나라로 귀순하였다.
【目】 臨川王 蕭宏이 陳伯之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그대가 선택한 거취를 생각해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안으로는 자기를 살피지 못하고, 밖으로는 유언비어의 영향을 받아서 깊이 미혹되고 경솔히 행동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主上께서는 법을 어겨가며 은혜를 베풀어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를 그물에서 빠져나가도록 해주셨으니,注+① ≪漢書≫ 〈刑法志〉에 “배를 삼킬 만한 큰 고기가 그물에서 빠져나간다.” 하였으니, 법망이 느슨한 것을 말한 것이다. 장군의 〈先塋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잘려나가지 않았고, 친척은 편안히 살며, 높은 누각은 아직 기울어지지 않았으며 애첩도 아직 그대로 있다.
그러나 장군은 물고기가 끓는 솥에서 헤엄치듯이 하고, 제비가 수시로 치우는 장막 위에 둥지를 틀듯이 하니, 역시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여 일찌감치 좋은 계책을 내도록 힘써서 스스로 多福한 길을 찾기 바라오.”라고 하였다.注+② “松柏不翦”은 선대의 묘소를 훼손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親戚安居”는 江南에 있는 친척들이 모두 逆黨에 연좌되지 않고서 편안히 지냄을 말한다. “高臺未傾”은 집을 웅덩이로 만든 적이 없어 연못과 누각이 여전히 있음을 말한다. “愛妾尙在”는 여종과 첩이 여전히 집을 지키고 있어 官衙로 넘어가거나 다른 집으로 넘어가지 않았음을 말한다.
진백지가 드디어 壽陽의 梁城에서 무리들을 데리고 梁나라에 투항하니, 梁나라에서 通直散騎常侍로 삼았는데, 오랜 뒤에 卒하였다.注+③ 晉 孝武帝 太元 연간에 淮南과 壽春의 경계에 梁郡을 僑置하였다. 그러므로 梁城이 있었으니, 그 지역은 壽陽의 동북쪽이고, 鍾離의 서남쪽이다.
【綱】 여름 4월에 北魏에서 鹽地에 대한 禁法을 철폐하였다.
【目】 예전에 北魏의 御史中尉 甄琛이 말하기를 “≪周禮≫에는 산림과 하천에 虞와 衡의 관리를 두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였습니다.注+① ≪周禮≫ 〈地官〉에 “山虞, 澤虞, 林衡, 川衡을 두었는데, 각각 산림과 하천을 大ㆍ中ㆍ小의 세 등급으로 나누어 다수와 소수의 인원을 배치하여 산림과 하천에 대한 政令을 관장하였으니, 물산마다 울타리를 설치하여 경계를 삼았고,[物爲之厲] 지키는 자를 위하여 금령을 설치하였다.[爲之守禁]” 하였다. 그 注에 “虞는 헤아린다는 뜻이니, 산택의 크기와 생산되는 물산을 헤아려 아는 것이다. 衡은 다스린다는 뜻이니, 산림과 하천의 크기와 생산되는 물산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物爲之厲’는 물산마다 울타리를 설치하여 경계를 삼는 것이고, ‘爲之守禁’은 지키는 자를 위하여 금령을 설치하는 것이다. 지키는 자는 그 땅의 백성으로서 숲의 나무를 베는 것을 간수하는 자를 말한다.” 하였다. 이는 제때에 그것을 채취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하였을 뿐이니, 비록 有司를 두기는 했지만, 실제는 백성을 위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의 “爲身”과 “專爲”의 爲도 같다
한 집안의 어른은 반드시 자손에게 은혜를 베풀어 기르고, 천하의 君主는 반드시 만백성을 은혜롭게 양육하는 법이니, 백성의 부모가 된 사람으로 자기가 담근 젓갈을 아까워하거나 부유함이 천하의 만물을 소유하고서 하나의 물건을 독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河東의 鹽池를 막아서 보호하고 그 이익을 거두어들이는데, 이는 오로지 입과 배만 봉양하는 것이라 四肢에는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천자는 부유하여 四海를 소유하셨는데, 어찌 가난함을 걱정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소금에 관한 禁令을 풀어주시어 백성들과 그것을 함께하소서.”라고 하였다.
【目】 錄尙書事 元勰과 尙書 邢巒이 상주하기를 “甄琛이 아뢴 내용은 앉아서 말한다면 이치가 고상하지만, 그것을 시행한다면 일이 잘못될 것입니다.
옛날에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반드시 때에 따라 줄이고 늘렸으며, 일에 걸맞게 넉넉하게 하거나 검소하게 하였고, 변화에 따라 백성을 부리고 양육해주어서 생명을 이루어나가게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聖人은 산림과 택지의 재물을 거두어서 전답의 賦稅를 느슨히 하였고, 관문과 시장의 세금을 거두어서 십분의 일의 세금을 보조하였는데, 이쪽에서 취하여 저쪽에 주는 것이 모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니, 이른바 천지의 생산물을 밑천으로 하여 천지에 있는 백성에게 베푼 것입니다.
지금 鹽池의 금령을 내린지 오랜 시일이 지났고, 염지에서 거두어 쌓은 재물을 분산하여 군사와 국가의 비용을 해결하였으니, 오로지 太官의 음식으로 제공하고 後宮의 의복과 완호품으로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鹽池의 금령을 시행한 이후로 有司는 대부분 태만하여 출납할 때에 법대로 하지 않기도 하였으니, 이 일은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하게 만들었고, 상인들이 경솔히 논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관리하는 사람이 원칙을 없게 한 것이지, 만든 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니, 생각건대 마땅히 예전의 방식대로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元恪)가 결국 견침의 논의를 따랐다.
【綱】 北魏에서 中山王 元英을 보내어 諸軍을 감독하여 梁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는데, 5월에 梁나라가 宿預, 梁城, 小峴, 合肥 등의 城을 취하였다.
【目】 北魏가 中山王 元英을 征南將軍으로 삼아 都督揚․徐諸軍事로 삼아 군대 10여만 명을 이끌고 梁나라의 군대를 막도록 하고, 도착하는 곳에서 편의에 따라 일을 하게 하였다.
양나라 江州刺史 王茂가 河南城을 빼앗자,注+① 蕭子顯의 ≪南齊書≫ 〈州郡志〉에 “雍州에 河南郡을 두어 5縣을 관할하는데, 棘陽만이 실제 관할 구역이다.” 하였으니, 河南郡은 南陽 棘陽縣의 경계에 있어야 한다. 북위에서는 장군 楊大眼을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漢水에 이르러 공격해서 다섯 개의 성을 함락하였다.注+② 楊大眼은 楊難當의 손자이다.
5월에 양나라 右衛率 張惠紹가 宿預를 함락하였고,注+③ 晉 安帝가 宿預縣을 설치하여 淮陽郡에 소속시켰는데, 北魏 高祖(元宏)가 南徐州의 治所로 삼았다. 北徐州刺史 昌義之가 梁城을 함락하였다.注+④ 南徐州는 京口에 治所를 두었기 때문에 鍾離를 北徐州의 治所로 삼은 것이다. 昌은 성씨이다. 豫州刺史 韋叡가 小峴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여 소현을 둘러쌓은 목책을 순시하러 갔는데,注+⑤ 行(순시하다)은 去聲이다. 북위에서 수백 명의 군사를 내보내어 문 밖에 진을 치게 하였다.注+⑥ 陳(진을 치다)은 陣으로 읽는다.
위예가 그들을 공격하려고 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앞서 軍裝을 가볍게 하고 와서 전투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니, 천천히 돌아가 갑옷을 갖추어야 진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위예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북위는 성안에 있는 2천여 명으로 굳게 지키기에 충분한데, 지금 까닭 없이 밖으로 군대를 내보냈으니, 반드시 그들은 굳세고 용맹한 군사들일 것이다. 만일 그들을 꺾을 수 있다면 그 성은 절로 함락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대가 여전히 지체하며 의심하니, 위예가 부절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것을 나에게 준 것은 장식으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니, 나 위예의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진격하여 그들을 공격하여 병사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자, 북위의 병사들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이어서 급히 공격하여 밤중에 성을 함락하고 마침내 合肥에 이르렀다.注+⑦ 中(반쯤)은 去聲이다.
【目】 이보다 앞서 司馬인 胡景略 등이 合肥를 공격하였으나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韋叡가 밤에 肥水를 막고 전함이 뒤이어서 도착하여 北魏의 작은 성을 공격하자,注+① ≪資治通鑑≫에는 “제방을 쌓아 물길이 통하자, 전함이 뒤이어서 도착하였다.” 히였다. 북위의 장수인 楊靈胤이 군대 5만을 인솔하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무리들이 놀라서 군대를 증원해달라고 상주하기를 청하니, 위예가 웃으며 말하기를 “도적들이 성 아래에 이르렀으니, 군대를 증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우리가 군대를 증원하면 저들도 군대를 증원할 것이다. 전쟁은 기습을 이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어찌 군사의 숫자에 달려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양영윤을 격파하였다.
위예는 軍主인 王懐靜을 시켜서 성을 쌓고 제방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북위가 공격하여 함락하여 승세를 타고 제방 아래에 이르렀다. 군대의 위세가 아주 대단하여 여러 장군들이 퇴각하려고 하자, 위예가 화를 내며 儀仗으로 쓰는 일산과 부채 및 대장기와 깃발을 가져다가 제방 아래에 꽂아놓도록 명령하여 움직일 뜻이 없음을 보였다.注+② 일산ㆍ부채ㆍ대장기ㆍ깃발 네 가지는 모두 刺史의 의장이다.
북위의 군사들이 와서 제방을 뚫자, 위예가 직접 그들과 싸우니, 북위의 군대가 물러났다. 그 틈을 타고 제방에 보루를 쌓아서 스스로 굳게 방비하고 전투함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는 合肥城과 비슷하여 사면에서 합비성을 핍박하니,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였다.
수비 장수 杜元倫이 쇠뇌에 맞아 죽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사로잡고 참수한 사람이 1만여 명이었다.
【目】 韋叡의 몸은 평소 야위어서 말에 걸터앉은 적이 없었고 전투 때마다 늘 板輿를 타고서 장수와 병사를 독려하니, 그의 용기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낮에는 빈객을 접대하였고, 밤에는 군사 문서를 처리하느라 새벽까지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위예가 군사들을 돌보는 데에 항상 부족한가 하듯이 하였기에 모집에 응모하는 군사들이 앞 다투어 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위예가 도착하여 머무는 곳에서 건물의 울타리와 담장은 모두 국가의 기준을 따랐다.注+① ≪南史≫ 〈韋叡傳〉에는 ‘館宇’ 위에 ‘修立’ 두 글자가 더 있다.
위예가 진격하여 東陵에 도착하니, 군대를 돌리라는 조서가 있었는데, 장수들이 적의 성이 가까워 적들이 뒤를 쫓아올까 두려워하자,注+② 姚思廉의 ≪梁書≫에 의거하면 당시에 北魏가 甓城을 수비하였는데, 東陵과의 거리가 20리였다. 위예가 군수물자를 실은 수레를 행렬의 앞에 두고 자신은 작은 수레를 타고서 행렬의 가장 후미에 섰다.
북위의 군사들이 위예의 위엄과 명성에 탄복하여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자, 군대를 온전하게 해서 돌아왔다.
이때에 豫州의 治所를 合肥로 옮겼다.注+③ 豫州의 治所를 晉熙에서 合肥로 옮긴 것이다.
廬江太守 裴䆳가 북위의 羊石城과 霍丘城을 함락하였고,注+④ ≪水經註≫에 “曹魏 때에는 安豐都尉는 安豐津의 남쪽에 치소를 두었는데, 그 후에 그 故城이 있던 곳에 霍丘戍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隋나라 때에는 霍丘縣을 설치하였다. 6월에는 靑州․冀州刺史 桓和가 胊山城과 固城을 함락하였다.注+⑤ 胊는 음이 劬이다. 固城은 抱犢固城인 듯한데, 抱犢固는 蘭陵의 경계에 있다. 張惠紹가 彭城으로 진격했는데 북위의 奚康生이 그를 공격하자, 장혜소의 군사들이 불리해졌다.
【綱】 北魏가 邢巒을 都督東討軍事에 임명하였다.
【綱】 北魏의 驃騎大將軍 馮翊公 源懷가 卒하였다.
【目】 源懷는 성품이 너그럽고 소탈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貴人이 되어서는 마땅히 큰일을 거론해야지 어찌 반드시 일마다 세밀하게 따지겠는가.
비유하면 집을 짓는 일과 같아 밖에서 보면 높고 드러나며 기둥과 마룻대가 평평하고 바르며 집터와 벽이 견고하면 충분하니, 도끼를 댄 곳이 평평하지 않고 깎아낸 곳이 세밀하지 않은 것은 집의 흠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원회가〉 卒하자, 시호를 ‘忠’이라고 하였다.
【綱】 가을 7월에 北魏가 秦州와 涇州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呂苟兒가 10여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秦州를 포위하여 압박하였는데, 元麗가 격파하여 그들을 항복시켰다.
太僕卿 楊椿이 별도로 陳瞻을 토벌하였는데, 진첨이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대항하여 수비하자, 여러 장수들 가운데 어떤 이는 산길에 병사를 매복시켜 그들의 출입을 차단하여 군량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청하였고, 어떤 이는 나무를 베고 산을 불태운 뒤에 진격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양춘이 말하기를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官軍이 도착한 뒤로 향하는 곳마다 번번이 승리하니, 도적이 깊숙이 숨은 것은 바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지금 諸軍과 약속을 하여 다시 들어가서 약탈을 하지 않도록 하면 도적은 반드시 우리가 그들의 험준한 지형을 보고 전진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무방비 상태가 되기를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공격하면 한 번에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주둔한 채 나아가지 않았다.
도적이 과연 나와서 노략질을 하였는데, 양춘이 다시 말과 가축으로 그들을 유인하고는 오랜 뒤에 몰래 날랜 군사를 뽑아서 재갈을 물려 밤에 기습하여 〈진첨의〉 목을 베니, 秦州와 涇州가 모두 평정되었다.
【綱】 9월에 北魏의 邢巒이 梁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다시 宿預를 빼앗으니, 梁나라의 蕭宏이 도주하여 돌아갔다. 겨울 10월에 북위가 형만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齊王 蕭寳寅을 보내어 元英과 함께 鍾離를 포위하게 하였다.
【目】 北魏가 定州, 冀州, 瀛州, 相州, 并州, 肆州 여섯 州에서 10만 명을 징발하여 남쪽으로 가는 병력을 증원하였다.
梁主(蕭衍)가 장군 角念을 보내어 蒙山에 주둔하도록 하고, 蕭及은 固城에 주둔하도록 하고, 桓和는 孤山에 주둔하도록 하였다.注+① 角은 성씨이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南青州 東安郡 新泰縣의 동남쪽에 蒙山이 있다. 몽산은 바로 옛날에 이른바 東蒙이니, 固城과 孤山이 모두 北魏 兗州의 동쪽 경계에 가깝기 때문에 梁나라가 병력을 연합하여 이곳을 점거하여 兗州의 백성을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수의 ≪위서≫ 〈지형지〉에 “蘭陵郡 蘭陵縣에 石孤山이 있고, 또 昌慮縣에 孤山이 있다.” 하였다. 북위의 都督 邢巒이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자 모두 달아났다.
또 梁나라 장군 藍懐恭을 睢口에서 패배시키고, 진격하여 宿預를 포위하여 남회공의 목을 베자,注+② 藍은 성씨이다. ≪水經註≫에 “睢水는 睢陵縣의 故城 북쪽을 지나서 동남쪽으로 흘러 下相縣의 故城 남쪽을 경유하며, 또 동남쪽으로 흘러 泗水로 유입되니, 이곳을 睢口라고 한다.” 張惠紹와 蕭昞이 宿預와 淮陽을 버리고 달아나 돌아왔다.注+③ ≪資治通鑑≫에는 “張惠紹는 宿預를 버리고, 蕭昞은 淮陽을 버리고 달아나 돌아왔다.” 하였다. 臨川王 蕭宏은 梁主의 동생으로서 군사를 거느렸는데 군대의 위용이 몹시 성대하여 북방의 사람들이 백여 년 사이에 그런 군대는 아직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군대가 洛口에 주둔하여 선봉부대가 梁城을 함락하자,注+④ 〈“前軍克梁城”은〉 昌義之가 梁城을 함락한 것을 말한다. 여러 장수들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서 깊이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소굉은 성품이 나약하고 겁이 많았으며, 부대를 제대로 배치하지 못하였다.
【目】 北魏가 邢巒에게 조서를 내려 中山王 元英과 함께 梁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蕭宏이 두려워하여 諸將을 불러 군사를 돌리자는 논의를 하자, 呂僧珍이 말하기를 “곤란한 상황을 알고서 물러나는 것이 역시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소굉이 말하기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柳惔이 말하기를 “大軍이 이르는 곳에 어느 성인들 항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곤란하다고 여기십니까.”라고 하였다.
裴䆳가 말하기를 “이번에 출정을 한 것은 본래 적을 찾기 위함인데, 어찌 곤란을 피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馬仙琕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어찌 나라를 망치는 말을 하십니까. 天子께서는 境內의 군사와 물자를 싹 쓸어서 왕에게 맡기셨으니, 한 자를 앞으로 나가다가 죽을지언정 한 치를 물러나 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注+① 屬(맡기다)은 之欲의 切이다.
昌義之는 화가 나서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뻣뻣해져 말하기를 “여승진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백만의 군대가 나가서 아직 적을 만나기도 전에 멀리서 적의 기세를 보고서 갑자기 후퇴하려고 하니, 무슨 면목으로 聖主를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② 磔은 음이 摘이니, 펼침며, 엶이다.
朱僧勇과 胡辛生이 검을 뽑고서 말하기를 “후퇴하고 싶으면 스스로 후퇴하십시오. 저희들은 진격하다가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논의하던 사람들이 나온 뒤에 여승진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제부터 風氣가 일어나서 의중이 군대에 있지 않으니, 크게 기세가 꺾일까 몹시 두렵기 때문에 군사를 온전히 보호하여 돌아가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注+③ “風動”은 蕭宏의 마음에 風氣가 일어 동요함을 말한 것이다.
【目】 蕭宏이 군대를 멈추고 진격하지 않으니, 北魏의 군대가 두건과 머리 장식을 보내고 또 노래를 지어서 말하기를 “蕭娘(蕭宏)과 呂姥(呂僧珍)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合肥에 있는 韋虎를 두려워하네.”라고 하였는데, 위호란 韋叡를 말한 것이다.注+① 娘은 尼良의 切로, 소녀의 호칭이고, 姥는 莫補의 切로, 늙은 부인이니, 부인과 처녀처럼 겁을 내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여승진이 裴䆳를 보내어 壽陽을 빼앗으려고 하였는데 소굉이 듣지 않고 軍中에 명령하기를 “앞으로 가는 자는 머리를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이 마음속에 분노를 품었다.
북위의 奚康生이 파발을 보내어 中山王 元英에게 말하기를 “梁나라 군대가 梁城에서 승리를 거둔 뒤로 오랫동안 진군하지 않으니, 필시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나아가 洛水를 점거하면 저들은 스스로 도망쳐 패배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원영이 말하기를 “臨川王 蕭宏이 비록 어리석지만 韋叡와 배수의 무리들은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형세를 관찰해야지 교전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張惠紹는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며 가는 곳마다 홀로 승리를 거두었다. 下邳에 진을 치자, 항복하려는 하비 사람들이 많았는데,注+② 이전에 이미 張惠紹가 宿預를 버리고 달아나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숙예는 下邳의 동남쪽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하비에 주둔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숙예를 버리기 이전의 일이다. 李延壽가 이 일을 臨川王 蕭宏의 傳記에 실어놓았으니, ≪資治通鑑≫에서 이로 인해 역시 이어서 기록하였다.
장혜소가 그들을 타이르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성을 차지하게 되면 卿들은 모두 이 나라의 백성이 되겠지만, 만약 승리하지 못하면 다만 경들에게 고향을 잃도록 할 것이니, 조정이 백성을 위로하는 뜻이 아니다.注+③ 國人은 王民(王의 백성)이라는 말과 같다. 지금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본업으로 돌아가서 함부로 자신을 고생스럽게 하지 말라.”라고 하니, 항복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目】 마침 밤에 폭풍우가 쏟아져 軍中이 놀라자, 臨川王 蕭宏이 몇 명의 기병과 함께 도주하니, 장수와 병사가 모두 흩어져 돌아가면서 버린 갑옷과 내던진 무기가 강과 육지에 가득하였으며, 죽은 사람이 5만 명에 가까웠다. 소굉은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밤에 白石壘에 이르러 성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가기를 요구하였다.
臨汝侯 蕭淵猷가 성 위에 올라서 말하기를注+① 蕭淵猷는 蕭淵藻의 아우이다. “백만의 군사가 하루아침에 새처럼 흩어졌으니, 나라의 존망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간악한 사람이 그 틈을 타고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우니, 밤중에 성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군대는 소굉이 도주하여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서 역시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魏主(元恪)는 元英에게 조서를 내려 승리한 기세를 타고 동남쪽을 평정하여 소탕하도록 하자, 北魏의 군대가 패퇴한 군사들을 추격하여 馬頭에 이르러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안에 저장되어 있던 양식을 모두 북쪽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논의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북위가 다시는 남쪽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니, 梁主(蕭衍)가 말하기를 “이는 군사를 전진시키려고 하면서 속임수를 쓴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명령하여 鍾離城을 보수하고 昌義之에게 칙령을 내려서 전투와 수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注+② 馬頭城은 鍾離의 서쪽에 있는데, 馬頭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北魏가 동쪽으로 鍾離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를 한 것이다.
【目】 10월에 元英이 나아가서 鍾離를 포위하자, 魏主(元恪)가 邢巒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대를 이끌고 그와 會合하라고 하니, 형만이 表文을 올리기를 “南軍은 비록 들판에서 전투를 치르는 데는 적수가 되지 않으나 성을 지키는 데는 넉넉하니, 지금 정예병을 모두 투입하여 종리를 공격해서 함락해도 거의 이득이 없고, 함락하지 못하면 손실이 아주 큽니다.
또 〈종리가〉 淮水 밖에 떨어져 있으니,注+① 介는 사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가령 손을 묶고 귀순하더라도 오히려 양식이 없어서 지키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더구나 병사들을 죽이면서까지 이곳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병사들이 피로하고 지친 데다 죽거나 부상을 당해 쓸 수 있는 힘이 없을까 두려우니, 마땅히 예전의 수자리를 보수하여 회복하고 여러 州를 안무하여 훗날의 거사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가 따르지 않았다.
【目】 邢巒이 또 表文을 올리기를 “만약 만전을 기하지 않고 곧바로 廣陵을 습격하여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곳으로 나간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만약 바로 80일 치의 군량을 가지고 鍾離城을 탈취하려는 계획은 臣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습니다.注+① 元英이 80일치 군량으로 鍾離城을 탈취하려고 기약하였기 때문에 邢巒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종리성은 천연의 요새라 필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니, 臣은 차라리 겁을 먹어서 출정하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을지언정 공연히 나아가 패배하고 손해를 보았다는 罪名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注+② 荷는 上聲이니, 짊어짐이다. 魏主(元恪)가 마침내 장군 蕭寳寅으로 邢巒을 대신하게 하였다.
【目】 侍中 盧昶이 평소에 邢巒을 미워하여 侍中 元暉와 함께 그를 참소하여 中尉 崔亮을 시켜서 형만을 탄핵하게 하였다.注+① ≪資治通鑑≫에는 “〈盧昶이〉 侍中 領右衛將軍 元暉와 함께 참소를 하여 御史中尉 崔亮에게 邢巒이 漢中에 있을 때 良人을 약탈하여 노비로 삼은 일을 탄핵하게 하였다. 그러자 형만이 漢中에서 얻은 미녀를 원휘에게 뇌물로 주니,
원휘가 魏主(元恪)에게 말하기를 “형만이 새로 큰 공을 세웠으니, 사면하기 이전에 있었던 작은 일을 조사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그의 죄를 묻지 않았다.注+② 이해(506) 정월에 北魏의 于后가 아들 元昌을 낳아 크게 사면하였다.
원휘와 노창이 魏主의 총애를 믿고서 탐욕을 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러 이라고 하였다.
원휘는 얼마 뒤에 吏部尙書로 승진하여 관직에 정해진 가격을 매기니, 관리로 선발된 사람들은 그를 ‘市曹’라고 하였다.注+③ 〈관리를 뽑는〉 選曹에서 뇌물을 받아 관직을 사고파는 것을 시장의 장사꾼처럼 하니 그로 인해 ‘市曹’라고 한 것이다.
11월에 梁主(蕭衍)가 장군 曹景宗에게 여러 군대 20만을 감독하여 鍾離城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梁主가 조경종에게 칙령을 내려 道人洲에 주둔하고서 많은 군대가 모이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라고 하였는데,注+④ 道人洲는 邵陽洲의 동쪽에 있다.
조경종이 먼저 卲陽洲의 후미를 점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梁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조경종이 명령을 어기고 진격하다가 폭풍을 만나서 다시 돌아오니,注+⑤ 〈“復還”은〉 道人洲로 되돌아와 지켰다는 말이다.
梁主가 그 소식을 듣고서 말하기를 “조경종이 진격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이리라. 만약 고립된 군대로 홀로 갔다면 반드시 낭패를 당했을 것이니, 지금에는 틀림없이 도적을 격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綱】 柔然의 庫者可汗이 죽자, 아들 佗汗可汗 郁久閭伏圖가 즉위하였다.注+① “佗汗”은 北魏의 말로 실마리를 뜻한다.
【目】 始平으로 연호를 고치고 北魏에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綱】 北魏가 羊祉를 梁州刺史로 삼고, 傅豎眼을 益州刺史로 삼았다.
【目】 예전에 漢나라(成漢) 李勢 말년에 獠族들이 처음으로 출현하여, 북쪽으로 漢中에서 남쪽으로 卭 지역과 笮 지역에 이르기까지 산골짜기에 가득히 퍼져 살았다.注+① 西晉 말기에 氐人 李雄이 蜀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李壽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여 국호를 漢이라고 고쳤다. 桓溫이 蜀을 정벌하자, 李壽의 아들 李勢가 항복하였다.
이세가 죽자, 蜀의 백성들은 대부분 동쪽으로 이동하였으니, 산골짜기에는 모두 요족이 점거하여 그 가운데 郡縣의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제법 조세를 잘 바쳤으나, 멀리 있는 사람은 군현에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梁州와 益州에서는 해마다 요족을 정벌하여 스스로 윤택해져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를 이익으로 여겼다.
邢巒이 梁州刺史가 되자 요족 가운데 군현에 가까이 살던 사람들은 모두 안도하여 본업을 즐겼으며 먼 곳에 살던 사람들은 감히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형만이 파직되어 떠나고 나서 羊祉와 傅豎眼이 그를 대신하였는데, 양지는 성격이 잔혹하고 포학하여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요족이 梁나라의 군사를 끌어들여 노략질을 하자, 양지가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부수안은 은혜를 베풀고 신의를 펴서 크게 요족의 마음을 얻어 화친하였다.


역주
역주1 屠各 : 匈奴의 別種이다.
역주2 공허함과……논의 : ≪新譯資治通鑑≫(張大司 等 注釋, 三民書局, 2017)에 南朝 士大夫의 淸談이 유행한 것으로 老莊과 佛法, ≪周易≫ 등을 주로 논한 것이다.
역주3 魏豫州刺史陳伯之叛 復歸梁 : “‘다시 梁나라로 귀순했다.[復歸梁]’라고 기록한 것은 옳으나 ‘배반[叛]’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무란 것이다. 어째서 나무랐는가. 陳伯之는 이때에 反覆함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常珍奇가 반복했을 때에는 귀순함에 ‘배반[叛]’이라고 기록하였고(宋나라 丁未年(467)), 陳伯之의 反覆에는 귀순함을 ‘배반[叛]’이라고 기록하고(이해((506)), 趙匡贊ㆍ侯益이 반복했을 때에는 귀순함에 ‘배반[叛]’이라고 기록하여(五代 戊申年(948)), 반드시 孟達과 같이 한 뒤에야 ‘와서 귀순하였다[來歸]’(漢後主 建興 5년(227))라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書復歸梁 可矣 書叛 何 譏也 何譏 伯之於是反覆甚矣 故常珍奇反覆 則歸書叛(宋丁未年) 陳伯之反覆 則歸書叛(是年) 趙匡贊侯益反覆 則歸書叛(五代戊申年) 必若孟達 然後可以書來歸(漢後主建興五年)]” ≪書法≫ 孟達은 삼국시대 蜀漢의 장수로, 관우가 죽자, 魏나라에 항복해서 曹丕의 총애를 받아 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후에 그가 촉한을 배반한 척하였지만 실제로는 吳나라와 연결하고 촉한과 굳게 맺고서 中國을 도모하고자 하다가, 諸葛亮이 북벌을 시작하면 내응하기로 한 밀약이 탄로 나자, 다시 위나라를 배반하였고, 후에 司馬懿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역주4 [景] : 저본에는 ‘景’이 없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景’을 보충하였다.
역주5 (取)[趣] : 저본에는 ‘取’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趣’로 바로잡았다.
역주6 (挑)[姚] : 저본에는 ‘挑’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姚’로 바로잡았다.
역주7 魏邢巒……梁蕭宏逃歸 : “무릇 ‘도망함[逃]’은 나무란 것이다. 오직 정벌에 ‘逃’라고 기록함은 심한 것이므로 그 관작을 삭제하고 蕭宏이라고 지척한 것이다(앞에 ‘臨川王 蕭宏’이라고 기록한 것에 의거한 것이다.).[凡逃 譏也 唯伐書逃爲甚 故削其爵而斥蕭宏(據前書臨川王宏)]” ≪書法≫
“지난겨울에 ‘蕭宏을 파견하여 北魏를 정벌하게 하면서 洛口에 주둔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이미 소굉이 겁먹어 나약하여 전진하지 못하는 뜻을 보였다. 梁主는 명분이 없는 전쟁을 일으켰고 또 사랑하는 자제들로 감독시켜서 장군의 전략이 잘되지 못하고 군사를 잃어 국가를 욕보였으며 심지어 군사를 버리고 도주하였는데도 또한 즉시 주륙으로 바로잡지 못하였으므로 ≪資治通鑑綱目≫은 여기에서 이미 臨川王을 삭제하고 다시 ‘도주해 돌아왔다[逃歸]’라고 기록하였다. ‘逃’는 匹夫의 일인데 三軍의 元帥가 도주하였으니 천함이 극심하다. 슬프다.[去冬書遣宏伐魏 次于洛口 已見其有畏懦不進之意矣 梁主無名興師 又以所愛子弟督之 將略非長 喪師辱國 甚至棄軍而逃 又不能即正其誅 故綱目於此 旣削去其臨川王 而復以逃歸書之 逃者 匹夫之事 以三軍之元帥而逃 賤之甚也 噫]” ≪發明≫
역주8 餓虎將軍과 飢鷹侍中 : ‘餓虎將軍’은 굶주린 호랑이와 같은 장군을 뜻하고, ‘飢鷹侍中’은 배고픈 매와 같은 시중이라는 뜻이다.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