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정월에 태산泰山의 돌이 서고 상림원上林苑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나 살아났다.
目
[目] 태산泰山의 큰 돌이 스스로 일어나 서고, 상림원上林苑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나 살아났으며, 벌레가 버들잎을 갉아먹었는데 그 모양이 “공손병이립公孫病已立(공손公孫인 병이病已가 즉위한다.)”注+태산泰山내무산萊蕪山 남쪽에 흉흉匈匈하게 수천 명이 떠드는 소리가 있는 듯하여 백성들이 보니, 큰 돌이 스스로 섰는데, 높이가 한 길 5척이고 크기가 48아름이었으며 세 돌이 발이 되었다. 강僵은 기량紀良의 절切이니, 쓰러짐이다. 말라죽어 쓰러져 땅에 누워 있던 버드나무가 또한 스스로 서서 살아났음을 말한 것이니, 이는 선제宣帝가 민간에서 흥왕할 조짐인 것이다. 병이病已는 선제宣帝의 이름이다.이었다.
부절령符節令휴홍眭弘(수홍)이 상서上書하여 아뢰기를注+부절령符節令은 소부少府에 속하였다. 휴眭는 식수息隨의 절切이니, 휴홍眭弘(수홍)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큰 돌이 스스로 서고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섰으니, 필부匹夫의 서민庶民이 천자天子가 될 징조입니다.
마땅히 어진 사람을 구하여 황제의 자리를 선양禪讓해서 천명天命에 순응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는 끝내 ‘요망한 말을 하여 사람들을 미혹시킨 죄’에 걸려 복주伏誅 당하였다.
綱
[綱] 소부少府서인徐仁은 자살하고, 정위廷尉왕평王平은 요참腰斬하였다.
目
[目] 연왕燕王과 개장공주蓋長公主의 난리에 상홍양桑弘羊의 아들 상천桑遷이 도망하면서 아버지의 옛 부하 관리인 후사오侯史吳를 방문하였는데,注+망亡은 도망함이고, 과過는 지나다가 방문하는 것이다. 후사侯史는 복성複姓이고 오吳는 이름이다. 뒤에 상천을 체포하여 법에 따라 복주伏誅하였다.
마침 사면령이 내리자, 후사오가 스스로 나와 옥에 갇히니, 정위廷尉왕평王平은 소부少府서인徐仁과 함께 죄를 다스리면서 모두 말하기를 “후사오는 반란을 일으킨 자를 숨겨준 것이 아니요, 바로 따라 연좌된 자를 숨겨준 것이다.” 하고, 즉시 사면령에 따라 후사오의 죄를 면제하였다.注+“잡치雜治”는 서로 함께 죄를 다스림을 이른다. “위수爲隨”는 상천桑遷이 다만 연좌되었을 뿐이요, 직접 모반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뒤에 시어사侍御史가 이 일을 다시 다스릴 적에注+“치실治實”은 거듭 그 일을 조사하는 것이다. “상천은 경학經學에 통달하였지만 아버지가 모반하는 것을 알았는데도 간쟁諫諍하지 않았으니, 반역을 한 자와 신분이 다름이 없다.
그리고 후사오는 옛 삼백석三百石의 관리로 앞장서서 계책을 세워 상천을 숨겨주었으니, 서인庶人이 연좌된 자를 숨겨준 것과 똑같지 않다.
후사오를 사면할 수 없다.” 하고, 번복하여 다스릴 것을 아뢰고,注+“수닉首匿”이란 자신이 도모하는 괴수가 되어서 사람을 감춰주고 숨겨줌을 이른다. 복覆은 번복함(뒤집다)이다.정위廷尉(왕평王平)와 소부少府(서인徐仁)가 모반한 자를 석방한 죄를 탄핵하였다.注+종縱은 풀어줌이다.
서인徐仁은 승상丞相전천추田千秋의 사위였다.
전천추가 중이천석中二千石과 박사博士들을 불러 공거문公車門에 모여 의논해서 후사오의 법法 적용을 자문하였다.注+〈“의문오법議問吳法”은〉 법률 가운데에 후사오侯史吳가 어느 죄에 해당하는가를 자문한 것이다.
곽광霍光은 이에 전천추가 제멋대로 중이천석中二千石 이하를 부르고 외조外朝와 내조內朝의 말이 다르다 하여, 마침내 왕평과 서인을 하옥시키니,注+외내外內는 외조外朝와 내조內朝를 이른다. 조정에서는 모두 승상(전천추)이 죄에 연루될까 염려하였다.
目
[目] 두연년杜延年이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서면으로 진술하여 곽광霍光에게 올렸다.注+주奏는 올림이고, 기記는 글로 쓰는 것이다.
“옥리獄吏가 죄인을 풀어주는 데에는 떳떳한 법이 있으니, 지금 다시 후사오侯史吳를 무함하여 부도不道라고 질책하는 것은 법에 너무 가혹할 듯합니다.注+저詆는 무함하는 것이다.
승상丞相(전천추田千秋)은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었고 선제先帝 때에 용사用事하였으니,注+〈“승상丞相구고久故급선제용사及先帝用事”는〉 지위에 있은 지 이미 오래이니 이는 고구故舊(친구)이고, 또 일찍이 선제先帝의 정승이 되어서 일을 맡았음을 말한 것이다. 큰 연고가 있지 않으면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 백성들은 ‘옥사獄事가 까다로워 옥리獄吏들이 너무 준엄하다.’고 자못 비난하는데, 지금 승상을 의논하는 것이 또 옥사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형벌이 승상에게 미친다면,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하지 못해서 아랫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서인庶人들이 은밀히 비난하여 유언비어가 사방으로 퍼질까 두렵습니다.
저는 장군이 천하에서 이 명성을 잃는 것을 삼가 중대重大하게(어렵게) 여깁니다.”注+중重은 난難과 같으니, 이 일을 중重한 일로 여기는 것이다.
곽광은 왕평王平과 서인徐仁이 법을 농간했다 하여 끝내 하옥시키니, 서인은 자살하고 왕평은 요참腰斬을 당하였으나 형벌이 승상丞相에게는 미치지 아니하여 종신토록 서로 잘 지냈다.注+〈“종여상경終與相竟”는〉 전천추田千秋와 함께 일하여 그 몸을 마침을 말한 것이다.
두연년杜延年은 의논이 공평함을 유지하여 조정을 화합시킨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注+합合(합하다)과 화和(화하다)는 모두 본음대로 읽는다.
綱
[綱] 겨울에 요동遼東의 오환烏桓이 배반하였으므로 장군將軍범명우范明友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目
[目] 이전에 묵특冒頓이 동호東胡를 격파하니, 동호의 남은 무리가 흩어져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을 확보하고 두 종족으로 나뉘어져 대대로 흉노匈奴에 예속되어 부역하였다.注+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두 산山 이름이니, 이 산山을 확보함으로 인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았다.
무제武帝가 흉노의 좌방左方의 지역을 격파하고 인하여 오환烏桓을 상곡上谷과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과 요동遼東의 변방 밖으로 이주시켜 흉노의 동정動靜을 정찰하게 하고,注+정偵은 축정丑正의 절切이니, 엿보는 것이다.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를 설치하여 이들을 감독하고 거느려서 흉노匈奴와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부족의 무리가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배반하였다.
한漢나라에서는 항복한 흉노족을 사로잡았는데, 말하기를 “흉노가 2만 명의 기병騎兵을 동원하여 오환을 공격한다.” 하였다.
곽광霍光이 흉노를 요격하고자 하여 호군도위護軍都尉조충국趙充國에게 물으니,注+“요격지邀擊之”는 흉노匈奴를 맞이하여 공격함을 이른다. 호군도위護軍都尉는 진秦나라의 관직이다. 무제武帝가 이것을 대사마大司馬에 소속시켰었는데, 이때 대장군大將軍에 소속되었다. 조충국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환이 근래에 자주 변방을 침범하였으니, 지금 흉노가 이들을 공격하는 것은 한漢나라에 편리합니다.注+간間은 바로 중간이니, 근일近日이라는 말과 같다. 삭數(자주)은 음이 삭朔이다.
또 흉노가 중국을 침략하고 도둑질하는 일이 드물어서 북쪽 변경에 다행히 일이 없으니, 오랑캐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는데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여 흉노를 요격해서 적을 불러들여 일을 만드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곽광이 다시 중랑장中郞將범명우范明友에게 물으니, 범명우는 공격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범명우를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제수하여 2만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출동하게 하니, 흉노가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注+요동遼東은 유주幽州 지역에 있다. 도료장군度遼將軍은 그로 하여금 요수遼水를 건너가서 오환烏桓을 정벌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마침내 장군將軍의 칭호로 삼아서 흉노匈奴를 감호監護하였다.
目
[目] 이전에 곽광霍光은 범명우范明友에게 경계하기를 “군대는 헛되이 출동해서는 안 되니, 만일 흉노匈奴보다 뒤늦거든 오환烏桓을 공격하라.”注+“후흉노後匈奴”는 군대가 뒤늦어서 흉노匈奴를 요격함에 미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범명우는 오환이 피폐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수급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흉노가 이로 말미암아 한漢나라를 두려워해서 감히 다시는 출병出兵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泰山石立 :
“이는 宣帝가 나올 상서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돌이 섰다.[石立]’고 쓴 것이 두 번이다.[宣帝之祥也 綱目書石立二]” 《書法》
역주2(睦)[眭] :
저본에는 ‘睦’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訓義와 함께 ‘眭’로 바로잡았다.
역주3(燕)[蕪] :
저본에는 ‘燕’으로 되어 있으나, 《漢書》 및 《御批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蕪’로 바로잡았다.
역주4少府徐仁……腰斬廷尉王平 :
“자살에는 이유를 쓰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유를 쓰지 않은 것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는 것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으니, 이때 그 잘못을 책임질 자(황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관직을 쓴 것이다. 무릇 ‘腰斬’이라고 쓴 것은 昭帝의 행위를 너무 심하게 여긴 것이다.[自殺未有不書故者 不書故 無故也 無故者必有其故 於是有任其咎者矣 故二子書官 凡書腰斬 甚之也]” 《書法》 “分注에 기재된 것을 살펴보면 徐仁과 王平이 옥사를 의논한 일이 매우 분명하여 법률을 까다롭게 적용하는 자들도 너무 심하다고 비방하였다. 그런데도 서인과 왕평이 極刑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漢나라 법의 혹독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資治通鑑綱目》에서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그 관직을 쓰고 그 죄를 쓰지 않은 것이다.[案分注所載 仁平議獄之事甚明 而深文者 詆之甚曲 然且不免極刑 此漢法之酷可知 綱目所以於二人之死 書其官而不書其罪也]” 《發明》
역주5(反)[及] :
저본에는 ‘反’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及’으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