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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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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辰年(260)
三年이라
魏元帝曹奐景元元年이요 吳永安三年이라
春正月朔 日食하다
◑夏五月
魏司馬昭 弑其主髦於南闕下注+壽, 二十.하니 尙書王經 死之
하다
魏主髦 見威權日去하고 不勝其忿하여 召侍中王沈 尙書王經 散騎常侍王業하여 謂曰 司馬昭之心 路人所知也
吾不能坐受廢辱이니 今日 當與卿自出討之니라 經曰 昔 魯昭公 不忍季氏하여 敗走失國하여 爲天下笑하니
今權在其門 爲日久矣 朝廷四方 皆爲之致死하니 不顧逆順之理 非一日也
且宿衛寡弱하니 陛下何所資用이완대 而一旦如此 無乃欲除疾而更深之邪 禍殆不測이리이다
髦出懐中黃素詔投地曰 行之決矣 正使死인들 何懼리오 況不必死邪注+素, 白緻繒也. 黃素詔者, 蓋以白緻繒染爲黃色以書詔.
於是 入白太后하니 沈業奔走告昭하고 呼經欲與俱어늘 經不從하니
髦遂拔劍升輦하여 率殿中宿衛蒼頭官僮하고 鼓譟而出하니 中護軍賈充入하여 與戰南闕下러니
髦自用劍하니 衆欲退어늘 太子舍人成濟 問充曰 事急矣 當云何注+時未立太子, 不應置東宮官屬, 濟本昭之私人, 授以是官耳.
充曰 司馬公畜養汝等 正爲今日이라 今日之事 無所問也니라 濟卽抽戈하여 前刺髦하여 殞于車下하니
昭聞之하고 大驚하여 自投於地러라 太傅孚奔往하여 枕之股而哭하여 甚哀曰 殺陛下者 臣之罪也注+枕, 職任切. 枕之股, 枕髦於股也.라하다
昭入殿中하여 召群臣會議할새 尙書僕射陳泰 不至어늘
昭使其舅尙書荀顗 召之한대 泰曰 論者 以泰方舅注+方, 比也.러니 今舅不如泰也注+言顗阿附司馬氏, 而己忠於魏室.로다
子弟逼之한대 乃入하여 見昭하고 悲慟하니 昭亦對之泣曰 玄伯 卿何以處我注+玄伯, 泰字.
泰曰 獨有斬賈充이라야 少可以謝天下耳니이다 昭久之曰 更思其次하라
泰曰 泰言 惟有進於此者 不知其次注+言當以弑君之罪罪昭.로이다 昭乃不復言하다 彧之子也
以太后下令으로 罪狀髦하여 廢爲庶人하고 葬以民禮하고 收王經及其家屬하여 付廷尉하니 經謝其母한대 母笑曰 人誰不死리오 正恐不得其所 以此幷命이면 何恨之有注+幷, 去聲. 幷命, 猶言竝死. 言以此而與其主竝死.리오 及就誅 故吏向雄 哭之하여 哀動一市러라 王沈 以功封安平侯하다 太傅孚等 請以王禮葬髦한대 許之하고 昭言成濟大逆不道라하여 夷三族하다
六月 하다
燕王宇之子也 本名璜이라 封常道鄕公이러니注+甘露二年, 封安次縣常道鄕公. 司馬昭迎立之하고 更名奐이라하니 年十五矣러라
吳作浦里塘하다
吳都尉嚴密 建議作浦里塘注+據范書方術傳, 浦里塘在丹陽郡宛陵縣界.하니 群臣 皆以爲難호되 唯將軍濮陽興 力主之注+濮陽, 複姓. 興, 其名.하니 功費不可勝數 士卒 多死하니 民大愁怨하더라
吳會稽王亮 自殺하다
會稽謡言王亮 當還爲天子라하여 而亮宮人 告王禱祠有惡言이라한대 吳主 遂黜亮爲候官侯하니 亮自殺注+晉志曰 “建安郡, 故秦閩中郡, 漢高祖以封閩越王. 及武帝滅之, 徙其人, 名爲東冶, 後漢改爲候官都尉. 吳置建安郡, 以候官爲縣屬焉.” 宋白曰 “漢武帝元鼎六年, 立都尉, 居候官以禦兩越, 하다
魏以王沈爲豫州刺史하다
沈初到下曰 有能陳長吏可否說百姓所患者 給穀五百斛하고 言刺史得失朝政寛猛者 給穀千斛하리라
主簿陳廞褚䂮 入白曰注+廞, 許今切. 䂮, 力灼切, 通作略. 敎旨思聞苦言하여 示以勸賞하니
竊恐拘介之士 或憚賞而不言하고 貪昧之人 將慕利而妄擧注+拘, 執守也. 介, 廉潔也.
苟言不合宜 不加以賞하면 則遠聽者 又未知當否之所在注+當, 丁浪切. 徒見言之不用하고 因謂設而不行이리라
告下之事 可小須後注+須, 待也.니라 沈曰 興益於上하며 受分於下 斯乃君子之操 何不言之有注+興益, 謂進言有益於上也. 受分, 謂受賞也.리오
䂮曰 堯舜周公 所以能致忠諫者 以其款誠之心 著也 氷炭 不言而冷熱之質 自明者 以其有實也
若好忠直 如氷炭之自然이면 則諤諤之言 將不求而自至 若其不然이면 雖懸重賞이나 忠言 未可致也니라 沈乃止하다


庚辰年(260)
[] 나라(蜀漢) 後主 景耀 3년이다.
[] 나라 元帝 曹奐 景元 원년이고, 나라 景帝 孫休 永安 3년이다.
[] 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여름 5월에 나라 司馬昭가 그의 임금 曹髦를 남쪽 궁궐 아래에서 시해하니注+曹髦는〉 향년이 20세였다. 尙書 王經이 피살되었다.
司馬昭가 曹髦를 시해하다司馬昭가 曹髦를 시해하다
[] 魏主 曹髦는 위엄과 권세가 날로 사라짐을 보고 그 분노를 견디지 못하여 侍中 王沈, 尙書 王經, 散騎常侍 王業을 불러서 말하기를 “司馬昭의 야심은 길 가는 사람도 아는 것이다.
나는 앉아서 폐위당하는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오늘 마땅히 경들과 함께 스스로 나아가 토벌해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王經이 말하기를 “옛날에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권력이 사마소의 집안에 있는 것이 시일이 오래되었습니다. 조정과 사방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반역과 순응의 이치를 돌아보지 않은 지가 하루이틀이 아닙니다.
宿衛하는 군대가 허약하니, 폐하께서 무엇을 의지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와 같이 하면 병을 제거하려다가 더욱 깊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도 재앙을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모는 품속에서 황색 비단에 쓴 조칙을 꺼내어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토벌을 시행하기를 결정하였다. 바로 죽는다 한들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하물며 꼭 죽는 것만이 아닌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注+白緻繒(백색의 세밀한 비단)이다. “黃素詔”는 白緻繒을 황색으로 염색하여 조서를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 이에 內宮으로 들어가서 太后께 아뢰었다. 王沈王業이 달려가 司馬昭에게 고하면서 王經을 불러 그와 함께하려고 하였으나 왕경이 따르지 않았다.
曹髦는 마침내 검을 뽑아 들고 가마에 올라, 殿中宿衛軍, 蒼頭(노복)와 官僮(하인)을 인솔하고,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나아갔다. 中護軍 賈充이 밖에서 들어와 황제와 남쪽 성문 아래에서 싸웠다.
조모가 스스로 칼을 휘두르니 가충의 무리들이 물러나려 하자 太子舍人 成濟가 가충에게 묻기를 “사태가 급박합니다. 마땅히 어찌해야 합니까?”注+이때 아직 太子를 세우지 않아서 東宮官屬을 두어서는 안 되는데, 成濟는 본래 司馬昭의 사사로운 사람이어서 이 관직에 임명하였다.라고 하니,
가충이 말하기를 “司馬公(司馬昭)께서 너희들을 기른 것이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 오늘의 일은 물을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성제가 즉시 창을 뽑아 전진하여 조모를 찔러, 조모가 수레 아래에서 죽었다.
사마소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절로 땅에 쓰러졌다. 太傅 司馬孚가 달려가서 조모를 자기 다리에 베어놓고 곡하여 매우 슬퍼해 하며 말하기를 “폐하를 죽게 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注+(베다)은 職任이다. “枕之股”는 曹髦를 다리에 베어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마소가 殿閣 안으로 들어가서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할 적에 尙書僕射 陳泰가 오지 않았다.
사마소가 진태의 외삼촌 尙書 荀顗를 시켜서 진태를 부르게 하였는데 진태가 말하기를 “논하는 이들이 저를 외삼촌과 견주었는데,注+은 견주다는 뜻이다. 이제 외삼촌은 저만 못합니다.”注+荀顗司馬氏에게 아부하였으나, 자기는 나라 황실에 충성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태의 자제들이 진태를 압박하자 마침내 궁중에 들어가서 사마소를 만나고 비통해하였다. 사마소 역시 진태를 대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玄伯(진태)아, 은 여기 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注+玄伯陳泰이다.라고 하니,
진태가 말하기를 “다만 가충을 참수해야 조금 천하에 사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마소가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다시 그 다음 방법을 생각하라.”라고 하니,
진태가 말하기를 “저의 말은 오직 이것을 진언할 뿐이니, 그 다음 방법은 모릅니다.”注+〈“不知其次”는〉 마땅히 임금을 시해한 죄로 司馬昭에게 죄를 주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자 사마소는 마침내 다시 말하지 않았다. 순의는 荀彧의 아들이다.
[] 太后의 명으로 曹髦의 죄상을 공포하고, 폐위하여 庶人으로 삼고, 백성의 예법으로 장사 지내고, 王經과 그 가족을 잡아 廷尉에게 회부하였다. 왕경이 그 어머니에게 사과하였는데,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죽지 않겠느냐. 바로 온당하게 죽을 곳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였는데, 이것으로 〈임금과〉 함께 죽는다면 무슨 한이 있겠느냐.”注+(함께)은 去聲이다. “幷命”은 竝死(함께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此幷命”은〉 이것으로 그 임금과 함께 죽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죽임을 당할 적에 故吏向雄(상웅)이 통곡하자 저잣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애통해하였다. 王沈이 공적으로 安平侯에 봉해졌다, 太傅 司馬孚 등이 의 예법으로 조모를 장사 지낼 것을 청하였는데 허락하였고, 司馬昭成濟大逆不道라고 말하여 三族을 멸하였다.
[] 6월에 魏主 曹奐이 즉위하였다.
[] 曹奐燕王 曹宇의 아들이니 본명은 이다. 常道鄕公에 봉해졌는데注+曹奐은〉 甘露 2년(257)에 安次縣 常道鄕公에 봉해졌다. 司馬昭가 맞이하여 황제에 즉위시키고 이름을 바꾸어 이라 하니, 나이가 15세였다.
[] 나라는 浦里塘(제방의 이름)을 修築하였다.
[] 나라 都尉 嚴密浦里塘을 수축하자고 건의하였다.注+後漢書≫ 〈方術傳〉에 의하면 浦里塘丹陽郡 宛陵縣 경계에 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어렵다고 하였으나 오직 將軍 濮陽興이 힘써 그것을 주장하였는데,注+濮陽複姓이고 은 그 이름이다. 공사 비용을 헤아릴 수 없었다. 士卒들이 많이 죽으니 백성들이 크게 근심하고 원망하였다.
[] 나라 會稽王 孫亮이 자살하였다.
[] 會稽에 떠도는 풍문에 “會稽王 孫亮이 마땅히 조정으로 돌아가 천자가 되리라.”라고 하여, 孫亮의 궁녀가 회계왕이 祈禱하면서 악담을 하였다고 고발하였는데 吳主(孫休)가 마침내 손량을 강등하여 候官侯로 삼으니 손량이 자살하였다.注+晉書≫ 〈地理志 〉에 이르기를 “建安郡은 옛날 나라 閩中郡이고, 高祖閩越王을 봉하였다. 武帝 때에 와서 閩越을 멸망시키고서 그 사람들을 옮겨 명칭을 東冶라고 하고, 後漢 때에 고쳐서 候官都尉라 하였다. 나라 때에 建安郡을 두고 候官으로 만들고 건안군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였다. 宋白이 말하기를 “ 武帝 元鼎 6년(B.C. 111)에 都尉를 세우고, 候官을 두어서 兩越을 방어하였으니, 이른바 南北 1이다.”라고 하였다.
[] 겨울에 나라가 王沈豫州刺史로 삼았다.
[] 王沈이 처음 豫州에 부임하여 敎令을 내리기를 “長吏(郡縣의 높은 관리)의 옳고 그름을 진술하거나 백성의 근심하는 것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곡식 5백 을 주고, 刺史의 잘잘못과 조정 정사의 관대함과 가혹함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곡식 1천 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主簿 陳廞(진흠)과 褚䂮(저략)이 왕침에게 가서 아뢰기를注+許今이다. 力灼이니, 과 통용하여 쓴다.敎令의 뜻은 苦言을 듣기를 생각하여 권면과 포상을 보인 것입니다.
청렴한 人士가 혹은 포상을 꺼려서 말하지 않고 탐욕스런 사람이 이익을 추구하여 망령되이 거론할까 우려됩니다.注+는 잡아서 지킨다는 뜻이다. 는 청렴결백하다는 뜻이다.
만약 말이 적합하지 않을 때에 상을 주지 않으면 멀리서 듣는 이들은 또다시 마땅한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므로注+(마땅하다)은 丁浪이다. 다만 명령이 쓰이지 않는 것만을 보고 인하여 敎令만 내리고 시행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아랫사람들에게 포고하는 일은 조금 뒷날을 기다리십시오.”注+는 기다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왕침이 말하기를 “윗사람에게 유익함이 생기며 아랫사람에게 상을 받게 하는 것이 군자의 품행이니 어찌 말을 하지 않겠는가.”注+興益”은 進言이 윗사람에게 유익함이 있음을 말한다. “受分”은 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저략이 말하기를 “, , 周公이 충성스러운 간언을 이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성스러운 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얼음과 숯불이 말하지 않아도 차고 뜨거운 성질이 자명한 것은 그 실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충성과 정직을 좋아하기를 얼음과 숯불이 절로 그러하듯이 하면 바른말이 구하지 않아도 절로 이를 것이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비록 큰 상을 걸어도 충직한 말을 이르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침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역주
역주1 魏司馬昭……尙書王經 死之 : “‘남쪽 궁궐 아래[南闕下]’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맞이하여 시해한 것이다. 司馬氏의 간사한 도모는 예정이 되었고, 간사한 도당은 많았다. 이에 王經이 사마소에게 갖추어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피살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死之(피살되다)’라고 기록하여 온 조정이 모두 간사한 도당임을 나타낸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死之’라고 기록된 것이 55번이다.(漢나라 孺子嬰 居攝 원년(6)에 자세하다.) 임금이 시해되어 피살된 자는 5명인데, 王經, 庾珉, 王雋, 辛賓, 顔見遠, 宋令詢이다.[書南闕下 何 迎而弑之也 司馬氏之姦謀豫矣 其姦黨衆矣 於是經以不俱報昭被殺耳 綱目特書死之 以見擧朝皆姦黨也 終綱目 書死之五十五(詳孺子嬰居攝元年) 君弑而死之者五 王經也 庾珉王雋也 辛賓也 顔見遠也 宋令詢也]” ≪書法≫ 庾珉, 王雋은 晉 愍帝 建興 원년(313), 辛賓은 晉 元帝 建武 원년(317), 顔見遠은 梁 武帝 天監 원년(502), 宋令詢은 唐 閔帝 應順 원년(934)에 보인다.
“曹髦의 죽음은 본래 경거망동하여 무모하게 굴다가 재앙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물며 반역을 이끈 자는 賈充이고 창을 빼어서 시해한 자는 成濟인데 지금 다만 죄를 司馬昭에게만 돌리고 조금도 다른 이에게 돌리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趙穿이 직접 桃園의 난리를 일으켰는데, ≪春秋≫에서 올바른 표현으로 趙盾(조돈)이 죽였다고 기록하였다. 하물며 사마소는 오래도록 국가의 명령을 쥐고 있어서 다만 성제의 손을 빌렸을 뿐이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비록 조모를 王의 禮로 장사 지내고 성제의 삼족을 멸하였어도 천하 사람들을 어찌 글로 속일 수 있겠는가. 만약 상황이 바뀌어 사마소를 주벌하였다면 임금이 시해되었지만 역적이 토벌되어 비로소 禮에 맞는 장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王經이 비로소 자기 임금에게 간언하고 결국 그 재앙에 걸려 죽음이 온당하게 되었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온전한 절개로 허여해준 것이 마땅하다.[曹髦之殞 本以輕擧無謀而見及 況唱逆者賈充 而抽戈者成濟 今但歸獄於昭 略不他及 何哉 趙穿親擧桃園之難 而春秋正色書盾 況昭久操國命 特借成濟之手而已 雖葬以王禮 夷濟三族 天下豈可以文欺哉 若移以誅昭 則君弑賊討 始可以成禮葬矣 王經始諫其主 終罹其禍 死得其所 宜乎綱目以全節予之也]” ≪發明≫ ‘趙穿親擧桃園之難 而春秋正色書盾’은 ≪春秋左氏傳≫ 宣公 2년 조에 실린 내용이다. 이 당시에 晉나라 靈公이 趙盾을 죽이려고 하자 조돈이 도망하여 망명하려고 하다가 국경을 넘지 않고 돌아왔다. 그때 마침 조돈의 사촌 아우 趙穿이 桃園에서 영공을 시해하였다. 그러자 太史 董狐가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써서 조정에서 내보이니, 조돈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이에 동호가 말하기를 “그대가 正卿의 신분으로 망명하려다 국경을 넘지 않고 돌아와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그대가 임금을 시해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니, 조돈이 자기 죄라고 인정한 故事이다. 또 ≪春秋≫에서는 임금이 시해당하고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임금의 장례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정에 신하다운 신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조모가 죽고 綱에 조모의 장례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마소를 토벌하지 못한 조정 신하들을 탓한 것이다.
역주2 魯나라……잃어 : 春秋時代 때 魯나라 季氏가 전횡을 하자 昭公이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昭公 25년에 出奔하여 齊나라로 갔다가 28년에 晉나라로 가서 乾侯에 머물렀고, 32년에 그곳에서 죽었다.(≪春秋左氏傳≫ 昭公 25~32년)
역주3 魏主奐 立 : “이때에 司馬昭가 曹奐을 맞이하여 세웠는데 ‘迎立’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조환에게 죄를 준 것이다. 나라의 임금이 막 시해되었는데 조환은 즉위하여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평상시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평상시의 말로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魏主 拓拔濬는 어찌하여 ‘濬立(탁발예가 즉위하였다.)’으로 기록하였는가.(宋나라 壬辰年(452)) 탁발예는 嫡孫이기 때문이다. 탁발예가 즉위하여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立’으로 쓰는 데 문제가 없는 것이다.[於是昭迎立奐 不書迎立 何 罪奐也 國君新弑 奐立不討賊 則與平時 奚辨矣 故以恒辭書之 然則魏主濬 曷爲書濬立(宋壬辰年) 濬嫡孫也 立而討賊 則無嫌乎立矣]” ≪書法≫ ‘魏主濬 曷爲書’는 宋나라 元嘉 29년(452)에 “겨울 10월에 魏나라(北魏) 宗愛가 그 임금 余를 시해했다. 魏主 拓拔濬가 즉위하여 종애를 토벌하여 주살하였다.[冬十月 魏宗愛弑其君余 魏主濬立 討愛誅之]”라고 하여,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참수한 일이 보인다.
역주4 所謂南北一候也 : ≪太平御覽≫ 권170에는 “이른바 동북쪽에 尉가 하나이고 서남쪽에 候가 하나이다.[所謂東北一尉 西南一候也]”로 되어 있다. 그런데 ≪漢書≫ 〈律歷志〉의 注에 “東南一尉 西北一候”라고 하였는데, 이 글은 ≪漢書≫ 〈揚雄傳〉에 나오는 말로, 〈양웅전〉에는 “지금 漢나라는 왼쪽에 東海가 있고 오른쪽 渠搜(西戎의 나라)가 있고 앞(남쪽)에는 畨禺(남월왕의 도읍)가 있고 뒤(북쪽)에는 陶塗(북방의 나라)가 있고 동남에는 하나의 都尉(會稽 東部都尉)가 있고 서북쪽에는 하나의 關候(敦煌 玉門關候)가 있다.[今大漢 左東海 右渠搜 前畨禺 後陶塗 東南一尉 西北一候]”라고 하였다. 訓義의 글은 〈揚雄傳〉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5 :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1권 중 漢 桓帝 建和 3년(144) 訓義에 “郡守가 내는 命을 敎라 한다.[郡守所出命曰敎]”라 한다 하였다.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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