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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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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十九年이요 魏太平眞君三年이라
魏寇謙之言於魏主曰 陛下以眞君御世하여 建靜輪天宮之法하니 開古以來未之有也 應登受符書하여 以彰聖德이니이다 魏主從之하니 自是每世即位 皆受符籙注+胡三省曰 “此所受者, 今道士所謂法籙也. 隋志曰 ‘道士受道之法, 初受五千文籙, 次受三洞籙, 次受洞玄籙, 次受上淸籙. 籙皆素書, 紀諸天曹官屬佐吏之名. 又有諸符錯在其間, 文章詭怪, 世所不識.’”하다
謙之又奏作靜輪宮호되 必令其高不聞鷄犬하여 欲以上接天神注+水經註 “靜輪宮在道壇東北, 道壇在平城東灅水之左.”하니 崔浩亦勸爲之러니 功費萬計하되 經年不成이라
太子晃諫曰 天人道殊하고 卑高定分하니 不可相接 理在必然注+分, 扶問切.이어늘 今耗府庫하고 疲百姓하여 爲無益之事하니 將安用之리잇고하니 不聽하다
夏四月 沮渠無諱西據鄯善하니 李寳入據敦煌하다
沮渠無諱將萬餘家하여 棄敦煌하고 西據鄯善하니 其士卒經流沙渴死者太半이라 鄯善王比龍 將其衆犇且末注+且, 子餘切. 且末, 西域國, 都於且末城, 因以爲號. 在鄯善國西, 西北有流沙數百里.하고
李寳自伊吾帥衆二千人하여 據敦煌하고 繕修城府하여 安集故民하고 而奉表于魏하다
沮渠牧犍之亡也 涼州人闞爽 據高昌이어늘 唐契爲柔然所迫하여 擁衆西趨高昌하여 欲奪其地注+宋主義符景平元年, 契與李寶同奔伊吾.러니
契死 弟和收餘衆하여 犇車師前部하여 拔高寧白力二城하고 遣使請降于魏注+李延壽曰 “高昌國有四十六鎭, 交河․田地․高寧․白刃․橫截等, 餘不具載.” 白力, 當作白刃.하다
裴方明等 至漢中하여 與劉眞道 分兵하여 攻武興下辯白水皆取之注+武興, 漢武都郡之沮縣也. 蜀以其地當衝要, 置武興督以守之. 宋立東益州. 下辯, 漢書作下辨. 白水, 地名.하다 楊難當遣符弘祖하여 守蘭皐하고 以其子和爲後繼注+符, 恐當作苻. 元豐九域志 “階州將利縣有蘭皐鎭.” 按五代志 “將利縣, 後魏武興郡之石門縣也.”러니
方明與戰大破之하여 斬弘祖하니 和退走하고 難當犇上邽어늘 獲其兄子保熾하고 又獲其子虎하여 送建康斬之하니 仇池平注+保熾, 楊玄之子.하다
以胡崇之爲北秦州刺史하여 鎭其地하고 立保熾爲楊玄後하여 守仇池하다 魏人迎難當하여 詣平城하니라
眞道方明 竟坐匿金寳善馬하여 下獄死하다
秋七月晦 日食하다
◯九月 沮渠無諱襲據高昌이어늘 宋以無諱爲河西王하다
唐契之攻闞爽也 爽遣使詐降于沮渠無諱하여 欲與之共擊契러니
八月 無諱將其衆하여 趨高昌하니 比至 契已死 爽閉門拒之하다
九月 無諱夜襲高昌하여 屠其城하니 爽奔柔然하고 無諱據高昌하여 遣使奉表于宋하니 以無諱爲河西王하다
冬十月 柔然遣使如宋하다
◑十二月 하다
詔魯郡하여 修孔子廟及學舎하고 蠲墓側五戸課役하여 以供灑掃하다
魏以李寳爲敦煌公하다
◑宋雍州蠻反하다
宋雍州刺史劉道産 善爲政하니 民安其業하여 小大豐贍이라 由是 民間 有襄陽樂歌注+樂, 音洛. 本傳 “雍州刺史領寧蠻校尉兼襄陽太守.”하고
山蠻前後不可制者皆出하여爲村落하니 戸口殷盛이러라 道產卒 蠻追送至(河)[沔]口러니 未幾 群蠻大動하니
征西司馬朱脩之討之하고 不利어늘 詔將軍沈慶之伐之하여 殺虜萬餘人하다
魏尚書李順 有罪誅하다
魏主使李順으로 差次群臣賜以爵位할새 順受賄하여 品第不平이어늘 魏主怒하고 且以順保庇沮渠氏하여 面欺誤國이라하여 賜死注+先順使涼, 受涼王金, 言涼無水草, 不可伐, 故云保庇.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19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平眞君 3년이다.
[綱] 봄 정월에 魏主가 道敎 祭壇에 나아가 符籙을 받았다.
[目] 北魏 사람 寇謙之가 魏主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眞君으로 세상을 다스려서 靜輪天宮의 술법을 세우시니 천지개벽 이래로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마땅히 祭壇에 오르셔서 符書를 받아 聖德을 밝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이를 따르니, 이로부터 대대로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모두 符籙을 받았다.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받은 것이 지금 道士들이 말하는 이다. ≪隋書≫ 〈經籍志〉에 ‘道士가 道를 받는 法은 처음에 ≪五千文籙≫을 받고, 다음으로 ≪三洞籙≫을 받고, 다음으로 ≪洞玄籙≫을 받고, 다음으로 ≪上淸籙≫을 받는다. 籙은 모두 素書(흰 비단에 쓴 글)이니, 모든 天曹의 관직과 보좌 관리들의 이름을 기록하였고, 또 그 사이에 여러 符籍이 섞여 있는데 문장이 奇怪하여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目] 寇謙之가 또 靜輪宮을注+① ≪水經註≫에 “靜輪宮은 道敎 祭檀의 동북쪽에 있으며, 道敎 祭檀은 平城의 동쪽에 있는 灅水의 왼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짓도록 주청하였는데, 반드시 그 높이가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여 위로 天神과 접하게 하고자 하였다. 崔浩가 또한 황제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하였는데, 공사 비용이 1만 錢을 헤아렸으나 1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太子 拓跋晃이 간언하기를 “하늘과 사람의 도는 다르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의 분수가注+② 分(분수)은 扶問의 切이다. 정해져 있으니 서로 접할 수가 없는 것이 이치상 필연적인 것입니다. 지금 국고를 소비하고 백성을 피로하게 하여 무익한 일이 되니, 장차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려 하십니까.”라고 하니, 魏主가 따르지 않았다.
[綱] 여름 4월에 沮渠無諱가 서쪽으로 가서 鄯善을 점거하니, 李寶가 들어와 敦煌을 점거하였다.
[目] 沮渠無諱가 장차 1만여 가를 거느려서 敦煌을 버리고 서쪽으로 가서 鄯善을 점거하였다. 그 병사들이 流沙를 지나갈 적에 목말라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鄯善王 比龍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注+① 且는 子餘의 切이다. 且末은 西域의 나라이며 도읍이 且末城에 있으므로 且末이라 불렀다. 鄯善國 서쪽에 있으며 서북쪽에는 流沙가 수백 리에 걸쳐 있다. 달아났다.
李寶는 伊吾에서 무리 2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敦煌을 점거하고 성곽과 관청을 수리하여 현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北魏에 표문을 올렸다.
[目] 沮渠牧犍이 멸망할 때에 涼州 사람 闞爽(감상)이 高昌을 점거하였다. 唐契가 柔然에게 압박을 받아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高昌으로 가서 그 땅을 탈취하려고 하였다.注+① 宋主(少帝) 劉義符 景平 원년(423)에 唐契와 李寶가 같이 伊吾로 달아났다.
당계가 죽자 그 아우 唐和가 남아 있던 무리들을 거두어 로 달아나서 高寧과 白刃 두 城을注+② 李延壽가 말하기를 “高昌國에는 46鎭이 있는데 交河․田地․高寧․白刃․橫截 등이니, 나머지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白力은 마땅히 白刃으로 써야 한다. 함락시키고 北魏에 사신을 파견하여 투항하겠다고 청하였다.
[綱] 5월에 宋나라가 楊難當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北魏 사람이 그를 구원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目] 裴方明 등이 漢中에 도착하여 劉眞道와 군사를 나누어 武興․下辯․白水를注+① 武興은 漢나라 武都郡의 沮縣이다. 蜀漢 때에 그 지역이 요충지에 해당한다고 여겨서 武興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宋나라 때에 東益州를 세웠다. 下辯은 ≪漢書≫에 下辨으로 되어 있다. 白水는 地名이다. 공격하여 모두 빼앗았다. 楊難當이 苻弘祖를 파견하여 蘭皐를 지키게 하고注+② 符는 苻로 되어야 할 듯하다. ≪元豐九域志≫에 “階州 將利縣에 蘭皐鎭이 있다.”라고 하였다. ≪五代志≫를 살펴보면 “將利縣은 後魏(北魏) 武興郡의 石門縣이다.”라고 하였다. 그 아들 楊和에게 그 뒤를 받치게 하였다.
배방명이 부홍조와 싸워서 크게 격파하여 부홍조의 목을 베니 양화가 후퇴하여 달아났고 양난당은 上邽로 달아났는데, 그 조카 楊保熾를注+③ 楊保熾는 楊玄의 아들이다. 사로잡고 또한 그 아들 楊虎를 사로잡아 建康으로 압송해 목을 베니 仇池가 평정되었다.
胡崇之를 北秦州刺史로 임명하여 그 지역을 鎭守하도록 하고, 楊保熾를 세워서 〈武道王〉 楊玄의 후계자로 삼아 仇池를 지키게 하였다. 北魏 사람이 양난당을 맞이하여 平城으로 가게 하였다.
〈훗날〉 유진도와 배방명은 결국 금은보화와 좋은 말을 숨긴 것에 연좌되어 옥에 갇혀 죽었다.
[綱] 가을 7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綱] 9월에 沮渠無諱가 高昌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는데 宋나라가 저거무휘를 河西王으로 삼았다.
[目] 唐契가 闞爽을 공격할 적에 감상이 沮渠無諱에게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투항하여 그와 함께 당계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8월에 저거무휘가 무리를 거느리고 高昌으로 향했는데 도착할 때쯤에 당계가 이미 죽었으므로 감상이 성문을 닫고 저거무휘를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9월에 저거무휘가 밤에 高昌을 습격하여 성을 도륙하니 감상이 柔然으로 달아났다. 저거무휘가 高昌을 점거하여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니 宋나라가 저거무휘를 河西王으로 삼았다.
[綱] 겨울 10월에 柔然이 사신을 파견하여 宋나라에 보냈다.
[綱] 12월에 宋나라가 孔子廟를 수리하였다.
[目] 魯郡에 조서를 내려 孔子廟와 學舍를 수리하도록 하고, 孔子墓 옆에 사는 다섯 戶에게 부세와 徭役을 면제하고 그곳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綱] 北魏가 李寶를 敦煌公으로 삼았다.
[綱] 宋나라 雍州의 蠻族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目] 宋나라 雍州刺史 劉道産이 정치를 잘하니 백성들이 본업에 편안하여 家戶가 적든 많든 생활이 넉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民間에서 가 생기게 되었다.注+① 樂(즐겁다)은 음이 洛이다. ≪宋書≫ 〈劉道産列傳〉에 “〈劉道産은〉 雍州刺史가 되어 寧蠻校尉를 겸하고 襄陽太守를 겸하였다.”라고 하였다.
전후로 통제하지 못한 山蠻들이 모두 내려와 沔水의 강가를 따라 村落을 형성하니, 戶口가 크게 증가하였다. 유도산이 죽자, 蠻族들이 靈柩를 뒤따라 沔口까지 전송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蠻族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征西司馬 朱脩之가 그들을 토벌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는데 將軍 沈慶之에게 조서를 내려 토벌하도록 하여 1만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綱] 北魏의 尚書 李順이 죄가 있어 주살되었다.
[目] 魏主가 李順을 시켜서 여러 신하들의 등급을 평가하여 爵位를 내려주도록 할 때에 이순이 뇌물을 받아 등급이 공평하지 못하였다. 魏主가 진노한데다 이순이 北涼 沮渠氏를 비호하여 면전에서 황제를 속이고 국사를 그르쳤다고 하여 賜死하였다.注+① 일찍이 李順을 北涼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北涼王에게 황금을 받고는 〈돌아와서〉 北涼에는 水草가 없으니 토벌할 수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비호하였다고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魏主詣道壇 受符籙 : “漢나라 明帝가 孔子의 故宅에 행차하자 ‘詣’라고 기록하였으니, 선생을 높이는 뜻이다. 여기에서 魏主가 道敎 祭壇에 나아간 것을 또한 ‘詣’라고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가 높이지 않아야 할 것을 높인 것을 드러낸 것이니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같은 말로 기록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이다. 符籙을 받음을 기록한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임금이 符籙을 받은 것을 기록한 것은 세 번이다(이해(442), 唐나라 會昌 元年(841) 武宗, 會昌 6년(846) 宣宗).[漢(章)[明]帝幸孔子宅 則書詣 尊師也 此道壇也 亦書詣 何 以見其尊非所尊也 美惡不嫌同辭 書受籙始此 終綱目 人主書受籙者 有三(是年 唐會昌元年武宗 會昌六年宣宗)]” ≪書法≫“≪資治通鑑綱目≫에서 漢나라 顯宗(明帝)이 魯나라에 이르러 孔子의 집에 간 것[詣孔子宅]을 기록한 것은 글을 변화시켜 의리를 일으킨 것이니, 흘러가는 세속을 따르지 않고서 선생을 높이고 도리를 중시한 것을 보인 것이다. 〈여기에서〉 ‘魏主詣道壇 受符籙’이라 기록한 것은 情理에 따라 의리를 정하고 세속에서 일컫는 것을 따라서 이단을 숭상함을 보인 것이다. 또 符籙의 일은 이전에 듣지 못하였는데, 여기에서 처음 보인다. 魏主가 경건히 이 부록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본디 神物이 앞뒤에서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자신의 몸도 보전하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뒤에 道籙을 높이 받들려는 이들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綱目書漢(肅)[顯]宗至魯詣孔子宅者 變文起義 不徇流俗 以示尊師重道也 書魏主詣道壇受符籙者 因情定義 隨俗所稱 以見崇尙異端也 且夫符籙之事 前所未聞 而始見於此 魏主虔恭受之 自宜神物後先 而乃其身不保 然則果何益哉 後之欲尊奉道籙者 可以觀矣]” ≪發明≫ 〈資治通鑑綱目凡例〉에 황제가 官府나 第宅에 갈 때 ‘幸’이라 하는데, 여기서 ‘詣’라 쓴 것은 어떤 의미를 보이고자 해서이다.≪書法≫과 ≪發明≫의 원문에는 ‘漢章帝’와 ‘漢肅宗’이라고 되어 있으나, 漢 章帝는 孔子의 집에 행차한 기록이 없다. ≪資治通鑑綱目≫ 제9권 하 漢 明帝 永平 15년(72)에 “三月 至魯詣孔子宅”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에 의거하여 ‘章帝’는 ‘明帝’로, ‘肅宗’는 ‘顯宗’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法籙 : 귀신을 쫓고 邪氣를 누르는 丹書나 부적이다.
역주3 且末(저말) : 역사학에서는 보통 ‘차말’로 읽는다. 西域諸國의 하나이다.
역주4 車師前部 : 車師는 西域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漢나라 宣帝 때 투르판 지역에 屯田을 실시하면서 이 지역에 영향을 미쳤는데, 匈奴가 이 지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漢나라의 車師前國과 匈奴의 車師後國으로 나누어지고 각각 交河城과 務涂谷을 다스렸다.
역주5 宋討楊難當平之 魏人救之不克 : “‘討’라고 기록하였는데 ‘救’라고 기록한 것은 구원한 자를 죄준 것이다.[書討而救 罪救者也]” ≪書法≫
역주6 宋修孔子廟 : “東晉 시기에 ‘李遼가 孔子廟를 수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승인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을 기록한 것(392)으로부터 여기(442)에 이르기까지 또 50년의 기간이 지났다. 처음으로 ‘宋修’라고 기록한 것은 아름답게 여긴 것이고, 또 서글퍼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孔子廟’를 기록한 것이 세 번이다.(晉나라 孝武帝 太元 17년(392)에 자세하다.)[自晉書李遼請修孔子廟不報 至是又五十年矣 始書宋修 嘉之也 亦傷之也 終綱目 書孔子廟三(詳晉孝武帝太元十七年)]” ≪書法≫
역주7 襄陽樂歌 : 민간에서 劉道產의 정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노래이다.
역주8 (河)[沔] : 저본에는 ‘河’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沔’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동일하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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