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主聰睿夙成
하고 剛毅有斷
이나 而好黃老浮屠之學
하여 常有遺世之心
注+浮屠, 通作浮圖. 釋典云 “僧曰浮圖, 塔亦曰浮圖.”이러니 以叔父京兆王子推 沈雅仁厚
라하여 欲禪以位
하여 乃會公卿大議
하니 皆莫敢言
이어늘
子推兄任城王子雲對曰
注+兄, 通鑑作弟.陛下方隆太平
에 臨四海
하시니 豈得上違宗廟
하고 下棄兆民
이리잇고 必欲遺棄塵務
면 則皇太子宜承正統
이라
夫天下者는 祖宗之天下니 若更授旁支면 恐非先聖之意요 啓姦亂之心이니 不可不愼也니이다
太尉源賀尙書陸馛이 皆附子雲議한대 魏主怒變色이어늘 中書令高允曰 臣不敢多言이라 願陛下는 上思宗廟託付之重하고 追念周公抱成王之事하소서
魏主乃曰 然則立太子하고 群公輔之하라 又曰 陸馛은 直臣이니 必能保吾子라하고 以爲太保하여 與源賀持節奉璽綬하여 傳位於太子宏하니
時宏生五年矣라 有至性하니 前年에 魏主病癰에 親吮之러니 及是하여 悲泣不自勝이어늘 魏主問其故한대 對曰 代親之感이 內切於心이로이다
宏卽位에 群臣奏曰 漢高祖稱皇帝하고 而尊其父爲太上皇하니 明不統天下也라 今皇帝幼沖하니 萬機大政은 陛下猶宜總之라 謹上尊號曰太上皇帝라한대
從之
하고 徙居北苑崇光宮
하여 采椽土階
하고 國大事
를 乃以聞
하고 又建鹿野浮圖於苑中
하여 與禪僧居之
注+釋子相傳, 以爲 “尸迦國波羅柰城東北十里許有鹿野苑, 本辟支佛住此, 常有野鹿, 故以名苑.” 今倣西國而建浮圖也. 又據魏書, 道武帝天興二年, 破高車, 以其眾起鹿苑於南臺陰, 北距長城, 東苞白登, 屬之西山, 廣輪數百里, 蓋因代都鹿苑之舊名, 附合西國鹿野之事而建此浮圖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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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目]
너그럽고 온화하며 훌륭한 명성이 있어 홀로
세조世祖(
효무제孝武帝)에게 칭찬을 받았다. 즉위 초기에는
이 대부분 용서를 받아 재능에 따라 등용되어 옛 신하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시기하고 잔학해져 귀신을 좋아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져서 문서에
화패禍敗하고
흉상凶喪하거나 혐의스런 말 중에 회피할 것이 수백 수천 가지가 되어 범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였으니, 좌우에서 뜻을 거슬러 이따금 도륙하거나 목을 베이기도 하였다.
注+① 刳은 도륙한다는 뜻이고, 斮은 목을 벤다는 뜻이다.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서 전쟁이 일어나
注+② 靑州와 徐州를 잃은 뒤로 宋나라와 北魏는 淮水와 泗水 사이에서 교전하였다. 나라의 곳간이 텅 비게 되자, 모든 관원이 녹봉이 끊어졌으나 지나치게 사치하고 낭비를 하여 늘 기물을 만들 때
를 각기 30매씩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들어 눕게 되었는데, 태자太子가 유약하였기에 여러 아우들을 깊이 꺼렸다. 진평왕晉平王 유휴우劉休祐가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자주 황제의 뜻을 거르자 송주宋主가 마음에 쌓아두어 편안하지 못했는데,
그가 꿩 사냥을 따라 나선 때를 이용하여 몰래 수적지壽寂之 등을 보내 그를 때려죽이게 하고는 말에서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예법에 맞게 추증하고 장사를 지냈다. 그 후에 또 수적지 등이 굳세고 용맹스러운 것을 꺼려하여 역시 죽였다.
건강建康의 민간에서 형주荊州에서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는데, 자사刺史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이 귀한 관상이 있었다. 송주宋主가 불러서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삼았는데, 유휴약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자, 장수와 보좌들이 모두 조정으로 돌아가면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참군參軍 왕경선王敬先이 말하기를 “
형주荊州에는 군사 10만이 있고, 땅은 사방으로 수천 리입니다. 위로는 천자를 바로잡고 간신을 제거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영토를 보전하고 한 몸을 온전할 수 있으니, 칼을 저택으로 보내어
가신家臣과 처첩들에게 눈물을 삼키면서도
注+③ 泣은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니,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飲이라 한다. 감히 장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휴약이
송주宋主에게 발고하여 그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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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예전에 오희吳喜가 회계會稽를 토벌할 때에 송주宋主(유욱劉彧)에게 말하기를 “도적 떼의 수괴를 잡으면 모두 곧장 죽이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유자방劉子房을 생포하여 후송하고 고침顧琛 등을 풀어주었다. 송주宋主가 그가 막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일을 문책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유감을 품었다.
이때에 이르러 오희가 계략이 많고 인심을 얻은 것으로 인해 그가 어린 군주를 섬길 수 없을 것이라고 염려하여 불러들여 죽음을 내리고, 또 유면劉勔 등에게 조서를 내려 “오희가 경박하고 교활하기가 끝이 없고 구차히 인심을 얻었으니, 그의 공로를 잊은 것이 아니라, 정황상 부득이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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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도성蕭道成이 송주宋主(유욱劉彧)의 부름을 받았을 적에 그와 친한 자들이 조정에서 대신大臣을 죽이려 한다고 하여 대부분 가지 말라고 권하자, 소도성이 말하기를
“여러 경들은 전혀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주상께서는 태자太子가 어리고 유약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아우들을 제거한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지금 신속히 명에 응하여 출발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것이요, 게다가 골육 사이에 서로를 죽이는 일이 오래갈 국운이 아니기에 재앙과 난리가 앞으로 일어날 것이니, 지금 경들과 힘을 모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착하고 나자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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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주魏主(
탁발홍拓跋弘)는 총명하고 예지가 있으며 조숙하였고, 강직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나
황로黃老와
부도浮屠의
注+① 浮屠는 浮圖와 통용해 쓴다. 釋典(佛經)에 “승려를 浮圖라 하고, 불탑도 浮圖라 한다.”라고 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늘 세상을 등질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숙부叔父인
경조왕탁발자추京兆王拓跋子推가 몹시 고아하고 인자하고 후덕하다고 여겨
제위帝位를 선양하고자 하여
공경公卿들을 모아서 크게 논의하였으나 모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탁발자추의 형인
注+② 兄이 ≪資治通鑑≫에는 弟로 되어 있다. 임성왕任城王 탁발자운拓跋子雲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융성하고 태평한 때에
사해四海에 군림하셨으니, 어찌 위로
종묘宗廟를 배반하고 아래로 백성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세속의 일을 버리려고 하신다면 황태자가 마땅히 정통을 계승해야 합니다.
천하는 조종祖宗의 천하이니, 만약 방계의 친족에게 대신 전수하려 한다면 옛 성인들의 뜻이 아니고, 간사하고 난리를 일으키려는 자들의 마음을 열어줄까 두려우니, 신중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고 하였다.
태위太尉 원하源賀와
상서尙書 육발陸馛이 모두 탁발자운의 논의에 동의하자,
위주魏主가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다.
중서령中書令 고윤高允이 말하기를 “신이 감히 많은 말을 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위로는 종묘에서 부탁한 막중한 임무를 생각하시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안고 보살폈던 일을 생각하십시오.”라고 하니,
魏高祖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태자를 세우고 여러 공들이 보필하시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육발은 올곧은 신하이니, 반드시 나의 아들을 보필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고는 태보太保로 삼아 원하와 함께 부절符節을 가지고 옥새와 인끈을 받들어 태자 탁발굉拓跋宏에게 제위帝位를 전하게 하였으니,
당시에 탁발굉은 다섯 살이었다. 태자가 지극한 성품이 있어 지난해에 위주魏主가 종기가 났을 적에 직접 입으로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슬피 울며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자, 위주魏主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버지를 대신하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절실합니다.”라고 하였다.
탁발굉이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한漢 고조高祖는 황제라 칭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높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았으니, 천하를 통솔하지 않음을 밝힌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어리니, 만기萬機의 큰 정사는 폐하께서 오히려 총괄하셔야 합니다. 삼가 존호를 올려 태상황제太上皇帝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르고
북원北苑의
숭광궁崇光宮으로 거처를 옮겨 다듬지 않은 서까래와 흙 계단으로 꾸미고, 나라의 큰일을 보고 받고 또
원苑 안에
녹야부도鹿野浮圖를 세워
선승禪僧과 함께 거처하였다.
注+③ 승려가 서로 전하기를 “尸迦國 波羅柰城 동북쪽 10리쯤에 鹿野苑이 있다. 본래 辟支佛이 이곳에 머물렀는데, 늘 野鹿이 있었기 때문에 정원의 이름을 鹿野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西國을 본떠서 浮圖를 건립하였다. 또 ≪魏書≫에 의거하면 道武帝(拓跋珪) 天興 2년(399)에 高車를 격파하고 고차의 무리들로 南臺의 북쪽에 鹿苑을 세웠으니, 북쪽으로는 長城과 떨어져 있고, 동쪽으로는 白登을 둘렀으며, 西山에 이어져 있어 넓이가 수백 리였다. 이는 代都 鹿苑의 舊名을 따서 西國 鹿野의 일에 부합시켜 이 浮圖를 건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