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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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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泰始七年이요 魏高祖孝文帝拓跋宏延興元年이라
春二月 宋主殺其弟晉平王休祐하고 以巴陵王休若으로 爲南徐州刺史하다
宋主爲諸王 寬和有令譽하여 獨爲世祖所親이러라 即位之初 義嘉之黨 多蒙寬宥하여 隨才引用하여 有如舊臣이러니
及晩年 更猜虐하여 好鬼神多忌諱하니 文書 有禍敗凶喪疑似之言應回避者 數百千品이라 有犯必戮하니 左右忤意 往往刳斮注+刳, 屠也. 斮, 斬也.이라
淮泗用兵하여 府藏空竭하니 百官絶祿이나 而奢費過度하여 每造器用 必爲正御副御次副各三十枚注+自失靑․徐之後, 宋․魏交兵於淮泗之間.러라
至是寢疾하니 以太子幼弱으로 深忌諸弟러라 晉平王休祐剛狠數忤旨하니 宋主積不能平이러니
引其從出射雉하여 陰遣壽寂之等하여 拉殺之하여 陽言落馬라하고 贈葬如禮하다 旣又忌寂之勇健하여 亦殺之하다
建康民間 訛言荊州當出天子라하니 刺史巴陵王休若有貴相이라 宋主召爲南徐州刺史한대 休若憂懼하고 將佐皆謂還朝 必不免禍라하니
參軍王敬先曰 荊州帶甲十萬이요 地方數千里 上可以匡天子除姦臣이요 下可以保境土全一身이니 孰與賜劍邸第하여 使臣妾飲泣而不敢葬乎注+泣, 淚也, 淚入口曰飲. 休若以白宋主而誅之하다
魏西部勅勒叛이어늘 討之不克注+自魏世祖破柔然, 高車․勅勒皆來降, 其部落附塞下而居, 自武周塞外之西謂之西部, 以東謂之東部, 依漠南而居者謂之北部.하다
◑夏五月 宋主殺其弟建安王休仁하다
晉平刺王既死 休仁益不自安注+刺, 來達切, 諡也.이러니 宋主亦病하여 與楊運長等爲身後之計하니 運長等又慮宋主晏駕 休仁秉政이면 己不得專權하여 彌贊成之하니
於是 召休仁入宿尙書下省하고 遣人齎藥賜死하니 休仁罵曰 上得天下 誰之力邪 孝武以誅鋤兄弟 子孫滅絕이어늘 今復爲爾하니 宋祚 其能久乎注+誅鋤兄弟謂殺南平王鑠․竟陵王誕․海陵王休茂也.
宋主慮有變하여 力疾乘輿出端門하여 休仁死 乃入下詔稱호되 休仁謀反이라가 懼罪引決하니 降爲始安縣王하고 聽其子伯融襲封이라하다
宋主與休仁素厚 雖殺之 每謂人曰 我與建安으로 年時相隣하여 少便款狎注+年時相隣, 謂年齒不相遠也.하고 艱難之中 勳誠實重이러니 事計交切하여 不得不除하니 痛念之至 不能自已라하고 因流涕不自勝이러라
宋以袁粲爲尙書令하고 褚淵爲僕射하다
初宋主在藩 與褚淵相善이라 旣即位 深委仗之러니 及寢疾 淵守吳郡이라 急召入見하니 宋主流涕曰 吾近危篤이라 故召卿著黃𧟌耳 黃𧟌者 乳母服也注+著, 則略切. 𧟌, 力賀切, 女人上衣也. 宋主欲褚淵補佐太子, 如乳母之哺養小兒也.
因與淵謀誅休仁하니 淵以爲不可라한대 宋主怒曰 卿癡人이니 不足與計事로다하니 淵懼而從命하다
休若至京口하여 聞建安王死하고 益懼러니 宋主以休若和厚能得物情으로 恐其將來傾奪幼主하여 欲遣使殺之호되 慮不奉詔하여 乃手書召之하여 使赴七月七日宴하여 及至賜死하고
而以桂陽王休範으로 刺江州하니 宋主諸弟俱盡하고 唯休範以人才凡劣 不見忌 故得全하다
沈約曰 太祖之於義康 以呵訓之微行으로 成滅親之大禍하여 開端樹隙하여 垂之後人注+呵, 怒也. 行, 去聲. 滅親謂誅義康也. 言義康之罪, 文帝當呵而訓之, 不當遂殺之也.이라
太宗因易隙之情하고 據已行之典하여 翦落洪枝 不待顧慮注+洪, 大也. 枝, 兄弟也. 嫡統爲本, 支庶爲枝. 謂據文帝已行之典而翦除兄弟也.하니 旣而幼主孤立하여 神器傾移하니 履霜堅冰 所由來遠矣로다
裴子野曰 太宗保字螟蛉하고 剿拉同氣하여 旣迷在原之天屬하고 未識父子之自然하니 宋德告終 非天廢也注+保, 養. 字, 愛也. 詩曰 “螟蛉有子, 蜾臝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 故世俗謂抱養者爲螟蛉. 太宗先以人賜李道兒, 已復迎還而生昱, 故云螟蛉也. 剿, 子小切, 絕也. 迷在原之天屬, 謂迷失兄弟之親也. 詩曰 “脊令在原, 兄弟急難.”
夫危亡之君 未嘗不先棄本枝하고 嫗煦旁孼하며 推誠嬖狎하고 疾惡父兄하니前乘覆車 後來倂轡注+旁孼, 旁枝之庶子也.
借使叔仲有國이면 猶不失配天이나 而它人入室 將七廟絕祀어늘 曾是莫懷하고 甘心揃落注+孝經 “郊祀后稷以配天.” 揃, 通作翦.이라
晉武背文明之託하니 而覆中州者賈后注+文明, 晉武帝之母王皇后也. 將崩流涕謂帝曰 “桃符性急, 而汝为兄不慈, 我若不起, 必不相容, 以是属汝.” 其後武帝爲子孫計, 聽讒欲出攸於外, 攸歐血薨. 桃符, 攸小字也. 賈后, 晉惠帝之后也. 性酷虐, 嘗手殺人, 弑皇太后楊氏, 殺皇太子遹, 致趙王倫率兵入宮, 廢殺, 遷惠帝于金墉. 太祖棄初寧之誓하니 而登合殿者元凶注+宋太祖文皇帝就其姉會稽公主宴, 主起再拜悲泣曰 “車子歲暮, 必不爲陛下所容, 今特請其命.” 文帝指蒋山曰 “若違今誓, 便是負初寧陵.” 初寧陵武帝陵墓也. 車子, 義康小字也. 後江夏王義恭奏 “義康有怨言.” 被殺. 元凶, 謂太子劭也. 劭引張超之等, 馳入齋閤, 弑文帝於合殿.이라 禍福無門하니 奚其豫擇이리오 友于兄弟 不亦安乎
吳喜之討會稽也 言於宋主曰 得諸賊帥 皆即戮之어늘 既而生送子房하고 釋顧琛等하니 宋主以新立功으로 不問而心銜之러니
至是하여 以其多計數得人情으로 恐其不能事幼主하여 乃召入賜死하고 又詔劉勔等曰 喜輕狡萬端하고 苟取物情하니 非忘其功이라 勢不獲已耳라하더라
宋以蕭道成爲散騎常侍하다
道成被徵 所親以朝廷方誅大臣으로 多勸勿行한대 道成曰
諸卿殊不見事로다 主上自以太子稚弱으로 翦除諸弟하니 何預它人이리오 今唯應速發이니 不且見疑 且骨肉相殘 自非靈長之祚 禍難將興이니 方與卿等으로 戮力耳라하더라 既至 拜散騎常侍하다
魏主聰睿夙成하고 剛毅有斷이나 而好黃老浮屠之學하여 常有遺世之心注+浮屠, 通作浮圖. 釋典云 “僧曰浮圖, 塔亦曰浮圖.”이러니 以叔父京兆王子推 沈雅仁厚라하여 欲禪以位하여 乃會公卿大議하니 皆莫敢言이어늘
子推兄任城王子雲對曰注+兄, 通鑑作弟.陛下方隆太平 臨四海하시니 豈得上違宗廟하고 下棄兆民이리잇고 必欲遺棄塵務 則皇太子宜承正統이라
夫天下者 祖宗之天下 若更授旁支 恐非先聖之意 啓姦亂之心이니 不可不愼也니이다
太尉源賀尙書陸馛 皆附子雲議한대 魏主怒變色이어늘 中書令高允曰 臣不敢多言이라 願陛下 上思宗廟託付之重하고 追念周公抱成王之事하소서
魏主乃曰 然則立太子하고 群公輔之하라 又曰 陸馛 直臣이니 必能保吾子라하고 以爲太保하여 與源賀持節奉璽綬하여 傳位於太子宏하니
時宏生五年矣 有至性하니 前年 魏主病癰 親吮之러니 及是하여 悲泣不自勝이어늘 魏主問其故한대 對曰 代親之感 內切於心이로이다
宏卽位 群臣奏曰 漢高祖稱皇帝하고 而尊其父爲太上皇하니 明不統天下也 今皇帝幼沖하니 萬機大政 陛下猶宜總之 謹上尊號曰太上皇帝라한대
從之하고 徙居北苑崇光宮하여 采椽土階하고 國大事 乃以聞하고 又建鹿野浮圖於苑中하여 與禪僧居之注+釋子相傳, 以爲 “尸迦國波羅柰城東北十里許有鹿野苑, 本辟支佛住此, 常有野鹿, 故以名苑.” 今倣西國而建浮圖也. 又據魏書, 道武帝天興二年, 破高車, 以其眾起鹿苑於南臺陰, 北距長城, 東苞白登, 屬之西山, 廣輪數百里, 蓋因代都鹿苑之舊名, 附合西國鹿野之事而建此浮圖也.하다
冬十月 魏勅勒叛이어늘 討破之하다
魏沃野統萬二鎭勅勒叛注+沃野, 即漢朔方郡沃野縣也. 統萬, 即赫連故都, 魏以爲鎭, 置鎭將. 沃野鎭去統萬八百餘里.이어늘 遣太尉源賀討之하니 皆降이라 追擊餘黨하여 俘獲甚衆하니 詔賀督三道諸軍하여 屯漠南하다
先是 每歲秋冬 發軍三道竝出하여 以備柔然하여 春中乃罷러니 賀以爲往來疲勞하여 不可支久 請募諸州鎭武健者三萬人하여 築三城以處之하여 使三時務農하고 冬則講武라한대 不從하다
宋人侵魏어늘 魏人擊却之하다
宋主命北琅邪蘭陵太守垣崇祖하여 經略淮北하니 崇祖自郁洲將數百人하여 入魏境七百里하여 據蒙山이어늘 魏人擊却之注+此指言舊琅邪․蘭陵郡也, 本屬徐州. 彭城既沒, 崇祖率部曲據郁洲, 使領二郡太守, 未能有其地也. 魏收志 “蒙山在東安郡新泰縣東南.”하다
宋主以故第爲湘宮寺하여 備極壯麗注+始封湘東王, 故以故第爲湘宮寺.러니 新安太守巢尙之罷還이어늘 宋主謂曰 卿至湘宮寺未 此是我大功德이니라
散騎侍郎虞愿侍側曰 此皆百姓賣兒貼婦錢所爲 佛若有知 當慈悲嗟愍이라 罪高浮圖 何功德之有注+貼婦, 謂夫先有婦, 苦於上之征求而不能贍, 縱之外求淫夫, 貼以贍之. 又, 亦賣也.리오
侍坐者皆失色하니 宋主怒하여 使人驅下殿하니 愿徐去無異容이러라
宋主棋品甚拙이어늘 而每與第一品王抗對奕注+當時圍棋之品, 抗爲第一.하니 抗紿曰 皇帝飛棋 臣不能斷注+飛, 猶非也. 圍棋之勢, 聯屬不斷, 然後可以勝, 若爲人斷之, 則爲所勝.이라호되 宋主終不悟하고 好之愈篤하니
愿又曰 堯以此教丹朱하시니 非人主所宜好也注+博物志 “堯造圍棋以教子丹朱, 或云 ‘舜以子商均愚, 故作圍棋以教之.’ 其法非智者不能也.”니이다 宋主怒甚호되 以其舊臣으로 優容之注+宋主爲湘東王, 愿爲國常侍.하다


나라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태시泰始 7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연흥延興 원년이다.
[] 봄 2월에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자신의 아우 진평왕晉平王 유휴우劉休祐를 죽이고,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삼았다.
[] 너그럽고 온화하며 훌륭한 명성이 있어 홀로 세조世祖(효무제孝武帝)에게 칭찬을 받았다. 즉위 초기에는 이 대부분 용서를 받아 재능에 따라 등용되어 옛 신하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시기하고 잔학해져 귀신을 좋아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져서 문서에 화패禍敗하고 흉상凶喪하거나 혐의스런 말 중에 회피할 것이 수백 수천 가지가 되어 범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였으니, 좌우에서 뜻을 거슬러 이따금 도륙하거나 목을 베이기도 하였다.注+① 刳은 도륙한다는 뜻이고, 斮은 목을 벤다는 뜻이다.
회수淮水사수泗水에서 전쟁이 일어나注+② 靑州와 徐州를 잃은 뒤로 宋나라와 北魏는 淮水와 泗水 사이에서 교전하였다. 나라의 곳간이 텅 비게 되자, 모든 관원이 녹봉이 끊어졌으나 지나치게 사치하고 낭비를 하여 늘 기물을 만들 때 를 각기 30매씩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들어 눕게 되었는데, 태자太子가 유약하였기에 여러 아우들을 깊이 꺼렸다. 진평왕晉平王 유휴우劉休祐가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자주 황제의 뜻을 거르자 송주宋主가 마음에 쌓아두어 편안하지 못했는데,
그가 꿩 사냥을 따라 나선 때를 이용하여 몰래 수적지壽寂之 등을 보내 그를 때려죽이게 하고는 말에서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예법에 맞게 추증하고 장사를 지냈다. 그 후에 또 수적지 등이 굳세고 용맹스러운 것을 꺼려하여 역시 죽였다.
건강建康의 민간에서 형주荊州에서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는데, 자사刺史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이 귀한 관상이 있었다. 송주宋主가 불러서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삼았는데, 유휴약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자, 장수와 보좌들이 모두 조정으로 돌아가면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참군參軍 왕경선王敬先이 말하기를 “형주荊州에는 군사 10만이 있고, 땅은 사방으로 수천 리입니다. 위로는 천자를 바로잡고 간신을 제거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영토를 보전하고 한 몸을 온전할 수 있으니, 칼을 저택으로 보내어 가신家臣과 처첩들에게 눈물을 삼키면서도注+③ 泣은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니, 눈물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飲이라 한다. 감히 장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휴약이 송주宋主에게 발고하여 그를 죽였다.
[] 북위北魏 서부칙륵西部勅勒注+① 北魏 世祖가 柔然을 격파한 뒤로 高車와 勅勒이 모두 와서 항복하였고, 그 부락은 변방지역에 붙어 살았다. 武周로부터 변방의 서쪽을 西部라고 하고, 동쪽을 東部라고 하였으며, 漠南에 의지하여 살던 곳을 北部라고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는데, 토벌하였으나 평정하지 못했다.
[] 여름 5월에 송주宋主(유욱劉彧)가 그의 아우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을 죽였다.
[] 注+① 刺는 來達의 切이니, 시호이다. 죽은 뒤로 유휴인劉休仁이 더욱 불안해하였는데, 송주宋主(유욱劉彧)도 병이 들어 양운장楊運長 등과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계획하였다. 양운장 등이 또 송주宋主가 죽은 뒤에 유휴인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더욱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유휴인을 궁궐로 불러들여 상서하성尙書下省에 숙박하게 하고 사람을 보내어 독약을 가지고 가서 죽음을 내리니, 유휴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께서 천하를 얻은 것이 누구 덕택입니까. 효무제孝武帝가 형제를 죽인注+② “誅鋤兄弟”는 南平王 劉鑠, 竟陵王 劉誕, 海陵王 劉休茂를 죽인 일을 말한다. 뒤로 자손이 끊어졌는데, 지금 다시 그런 일을 하려고 하시니, 나라의 운명이 오래 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송주宋主는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신속히 수레를 타고 단문端門을 나갔다가 유휴인이 죽고 나서야 들어와 조서를 내리기를 “유휴인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자결을 하였으니, 직위를 낮추어 시안현왕始安縣王으로 삼고, 그의 아들 유백융劉伯融이 습봉하게 하노라.”라고 하였다.
송주宋主가 유휴인과 평소 사이가 좋았으므로 비록 그를 죽였지만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과 나이가 비슷하여注+③ “年時相隣”은 연령이 차이가 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공훈이 진실로 컸었는데 사태가 긴박하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너무나 비통한 마음을 그칠 수가 없소.”라고 하며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 나라가 원찬袁粲상서령尙書令으로 삼고 저연褚淵복야僕射로 삼았다.
[] 예전에 송주宋主(유욱劉彧)가 번왕藩王으로 있을 때 저연褚淵과 사이가 좋았기에 즉위하고 나서는 많은 일을 위임하고 의지하였다. 송주宋主의 병세가 심해지자 저연이 오군吳郡의 태수로 있었는데, 속히 불러들여 알현하게 하니 송주宋主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짐이 근래에 병이 위독해졌기에 경을 불러 황라𧟌를 입히게 하려고 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황라𧟌는 유모乳母의 옷이다.注+① 著(입다)은 則略의 切이고, 𧟌(비단옷)는 力賀의 切이니, 여자의 윗도리이다. 宋主는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처럼 褚淵을 太子의 보좌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송주宋主가 이로 인해 저연과 함께 유휴인을 죽이려고 모의하니 저연이 불가하다고 하자, 송주宋主가 화를 내며 말하기를 “은 어리석은 사람이니,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하오.”라고 하니 저연이 두려워 그 명을 따랐다.
[] 가을 7월에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자신의 아우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을 죽이고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았다.
[] 유휴약劉休若경구京口에 도착하여 건안왕建安王(유휴인劉休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두려워하였다.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유휴약이 온화하고 후덕하여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장래에 어린 군주의 대권을 쟁탈할까 두려워 사신을 보내어 죽이려 하였는데, 조서를 받들지 않을까 염려하여 손수 편지를 써서 7월 7일의 연회에 참석하도록 하여 도착하자 죽음을 내렸다.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강주자사江州刺史로 삼았으니, 당시에 송주宋主의 여러 형제가 모두 죽고 오직 유휴범이 재주가 평범하고 졸렬한 것으로 인해 미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다.
[] 심약沈約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태조太祖(유의륭劉義隆)는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에 대해 화를 내고 훈계해야 마땅한 작은 행동으로 친 아우를 죽이는 큰 재앙을 저질러 실마리를 열고 틈을 만들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注+① 呵는 화를 낸다는 뜻이다. 行(행실)은 去聲이다. “滅親”은 劉義康을 죽인 것을 말한다. 〈“以呵訓之微行 成滅親之大禍”는〉 유의강의 죄에 대해 文帝가 화를 내고 훈계해야지, 죽이는 것은 부당함을 말한 것이다.
태종太宗(유욱劉彧)이 형제간에 쉽게 벌어진 마음을 따르고 이미 행한 전거에 근거하여 홍기洪枝를 자르는 일에 대해 다시 고려를 하지 않았다.注+② 洪은 크다는 뜻이다. 枝는 형제이다. 嫡統이 근본이 되고, 支子와 庶子가 가지가 된다. 〈“據已行之典 翦落洪枝”는〉 文帝가 이미 시행한 일에 근거하여 형제를 제거함을 말한 것이다. 이윽고 어린 군주는 고립되어 는 기울어졌으니, 이 그 유래가 멀다.”
[] 배자야裴子野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태종太宗명령螟蛉을 보호하고 사랑하면서 형제들을 죽여서 이미 어려움을 겪은 형제의 친밀한 관계를 의혹하고 부자간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알지 못하였으니, 나라의 운명이 끝난 것은 하늘이 폐한 것이 아니다.注+① 保는 기른다는 뜻이고, 字는 사랑한다는 뜻이다. ≪詩經≫ 〈小雅 小宛〉에 “螟蛉(뽕나무 벌레)의 새끼를 蜾臝(나나니벌)가 업어 데리고 가서 키우니, 그대도 아들을 잘 가르쳐서, 좋은 방향으로 닮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세속에서는 데리고 와서 키우는 양자를 螟蛉이라고 한다. 太宗이 먼저 宮人을 李道兒에게 내려주고 이미 다시 돌아오게 하여 劉昱을 낳았으므로, 螟蛉이라고 한 것이다. 剿는 子小의 切이니, 끊는다는 뜻이다. “迷在原之天屬”은 형제의 친한 관계를 의혹함을 말한다. ≪詩經≫ 〈小雅 常棣〉에, “할미새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을 구한다.” 하였다.
위기에 처하고 패망에 이른 군주 중에 친족들을 먼저 버리고 방계의 서자庶子注+② “旁孼”는 방계의 庶子이다. 사랑하고 돌보며, 총애하고 친한 사람에게 정성을 미루고 아버지와 형제를 미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앞서가던 수레가 전복되었는데 뒤따르던 수레가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가령 형제들이 나라를 소유한다면 오히려 종묘에 제사하는 것을 잃지 않고 이어갈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궁궐에 들어와 옥좌를 차지할 경우 의 제사가 끊어질 것인데, 일찍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이 후련하게 잘라냈다.注+③ ≪孝經≫에 “郊祭祀를 지낼 때면 后稷을 함께 제사하여 하늘과 合祀한다.”라고 하였다. 揃(자르다)은 翦과 통용한다.
무제武帝문명황후文明皇后의 부탁을 어겼으니, 중주中州(중원中原)를 전복시킨 사람은 가후賈后였으며注+④ 文明은 晉 武帝의 모친인 王皇后이다. 崩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말하기를 “桃符(司馬攸)는 성격이 급하고, 너는 인자하지 못한 형이니, 내가 만약 죽으면 반드시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니, 이 일을 너에게 부탁한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무제가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워 참소를 듣고는 사마유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니 사마유가 피를 토하고 薨하였다. 桃符는 사마유의 어릴 때 字이다. 賈后는 晉 惠帝의 황후이다. 성격이 잔혹하고 포학하여 사람을 죽인 적이 있고, 皇太后 楊氏를 시해하였으며, 皇太子 司馬遹을 죽였으며, 趙王 司馬倫을 불러 궁궐로 병사를 끌고 들어오게 하여 폐하여 죽이고, 惠帝를 金墉으로 보내버렸다., 태조太祖초녕初寧의 맹세를 저버렸으니, 합전合殿에 오른 사람은 원흉元凶이었다.注+⑤ 宋 太祖 文皇帝가 그의 누이 會稽公主의 연회에 나아갔는데, 공주가 일어나 재배하고 슬피 울며 말하기를 “車子(劉義康)는 나이가 들면 필시 폐하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이니, 지금 특별히 그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文帝가 蒋山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만약 지금의 맹세를 저버린다면 바로 初寧陵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初寧陵은 武帝의 능이다. 車子는 유의강의 어릴 때 자이다. 그 후에 江夏王 劉義恭이 “유의강이 원망하는 말이 있다.”라고 아뢰어 유의강이 피살되었다. 元凶은 太子 劉劭를 말한다. 유소가 張超之 등을 이끌고 齋閤으로 달려 들어가 合殿에서 문제를 시해하였다. 화와 복은 문이 없으니, 어찌 미리 선택할 수 있겠는가. 형제간이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편안하지 않겠는가.”
[]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예주도독豫州都督 오희吳喜를 죽였다.
[] 예전에 오희吳喜회계會稽를 토벌할 때에 송주宋主(유욱劉彧)에게 말하기를 “도적 떼의 수괴를 잡으면 모두 곧장 죽이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유자방劉子房을 생포하여 후송하고 고침顧琛 등을 풀어주었다. 송주宋主가 그가 막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 일을 문책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유감을 품었다.
이때에 이르러 오희가 계략이 많고 인심을 얻은 것으로 인해 그가 어린 군주를 섬길 수 없을 것이라고 염려하여 불러들여 죽음을 내리고, 또 유면劉勔 등에게 조서를 내려 “오희가 경박하고 교활하기가 끝이 없고 구차히 인심을 얻었으니, 그의 공로를 잊은 것이 아니라, 정황상 부득이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 나라가 소도성蕭道成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았다.
[] 소도성蕭道成송주宋主(유욱劉彧)의 부름을 받았을 적에 그와 친한 자들이 조정에서 대신大臣을 죽이려 한다고 하여 대부분 가지 말라고 권하자, 소도성이 말하기를
“여러 경들은 전혀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주상께서는 태자太子가 어리고 유약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아우들을 제거한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지금 신속히 명에 응하여 출발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것이요, 게다가 골육 사이에 서로를 죽이는 일이 오래갈 국운이 아니기에 재앙과 난리가 앞으로 일어날 것이니, 지금 경들과 힘을 모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착하고 나자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 8월에 위주魏主 탁발홍拓跋弘태자太子 탁발굉拓跋宏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고 자신을 태상황제太上皇帝라 일컬었다.
[]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는 총명하고 예지가 있으며 조숙하였고, 강직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나 황로黃老부도浮屠注+① 浮屠는 浮圖와 통용해 쓴다. 釋典(佛經)에 “승려를 浮圖라 하고, 불탑도 浮圖라 한다.”라고 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늘 세상을 등질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숙부叔父경조왕탁발자추京兆王拓跋子推가 몹시 고아하고 인자하고 후덕하다고 여겨 제위帝位를 선양하고자 하여 공경公卿들을 모아서 크게 논의하였으나 모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탁발자추의 형인注+② 兄이 ≪資治通鑑≫에는 弟로 되어 있다. 임성왕任城王 탁발자운拓跋子雲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융성하고 태평한 때에 사해四海에 군림하셨으니, 어찌 위로 종묘宗廟를 배반하고 아래로 백성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세속의 일을 버리려고 하신다면 황태자가 마땅히 정통을 계승해야 합니다.
천하는 조종祖宗의 천하이니, 만약 방계의 친족에게 대신 전수하려 한다면 옛 성인들의 뜻이 아니고, 간사하고 난리를 일으키려는 자들의 마음을 열어줄까 두려우니, 신중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고 하였다.
태위太尉 원하源賀상서尙書 육발陸馛이 모두 탁발자운의 논의에 동의하자, 위주魏主가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다. 중서령中書令 고윤高允이 말하기를 “신이 감히 많은 말을 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위로는 종묘에서 부탁한 막중한 임무를 생각하시고, 주공周公성왕成王을 안고 보살폈던 일을 생각하십시오.”라고 하니,
魏高祖魏高祖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태자를 세우고 여러 공들이 보필하시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육발은 올곧은 신하이니, 반드시 나의 아들을 보필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고는 태보太保로 삼아 원하와 함께 부절符節을 가지고 옥새와 인끈을 받들어 태자 탁발굉拓跋宏에게 제위帝位를 전하게 하였으니,
당시에 탁발굉은 다섯 살이었다. 태자가 지극한 성품이 있어 지난해에 위주魏主가 종기가 났을 적에 직접 입으로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슬피 울며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자, 위주魏主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버지를 대신하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절실합니다.”라고 하였다.
탁발굉이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 고조高祖는 황제라 칭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높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았으니, 천하를 통솔하지 않음을 밝힌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어리니, 만기萬機의 큰 정사는 폐하께서 오히려 총괄하셔야 합니다. 삼가 존호를 올려 태상황제太上皇帝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르고 북원北苑숭광궁崇光宮으로 거처를 옮겨 다듬지 않은 서까래와 흙 계단으로 꾸미고, 나라의 큰일을 보고 받고 또 안에 녹야부도鹿野浮圖를 세워 선승禪僧과 함께 거처하였다.注+③ 승려가 서로 전하기를 “尸迦國 波羅柰城 동북쪽 10리쯤에 鹿野苑이 있다. 본래 辟支佛이 이곳에 머물렀는데, 늘 野鹿이 있었기 때문에 정원의 이름을 鹿野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西國을 본떠서 浮圖를 건립하였다. 또 ≪魏書≫에 의거하면 道武帝(拓跋珪) 天興 2년(399)에 高車를 격파하고 고차의 무리들로 南臺의 북쪽에 鹿苑을 세웠으니, 북쪽으로는 長城과 떨어져 있고, 동쪽으로는 白登을 둘렀으며, 西山에 이어져 있어 넓이가 수백 리였다. 이는 代都 鹿苑의 舊名을 따서 西國 鹿野의 일에 부합시켜 이 浮圖를 건립한 것이다.
[] 겨울 10월에 북위北魏 칙륵勅勒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여 격퇴하였다.
[] 북위北魏 옥야진沃野鎭통만진統萬鎭注+① 沃野는 漢나라 朔方郡 沃野縣이다. 統萬은 赫連氏의 故都인데, 北魏가 鎭으로 삼아 鎭將을 두었다. 沃野鎭과 統萬과의 거리는 8백여 리이다. 살고 있던 칙륵勅勒이 반란을 일으키자, 태위太尉 원하源賀를 파견하여 토벌하니 모두 항복하였다. 잔당을 추격하여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조서를 내려 원하를 도독삼도제군都督三道諸軍으로 삼아 막남漠南에 주둔시켰다.
이에 앞서 북위北魏는 매년 가을과 겨울에 군사를 파견할 적에 세 길로 나누어 함께 출동시켜 유연柔然의 침략에 대비하여 봄이 반쯤 지나서야 철수하였다. 원하가 왕래하는 일이 피로하여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다고 여겨 여러 의 굳세고 건장한 장정 3만 명을 모집하여 세 곳의 성을 쌓아 그곳에 머물게 하여 세 계절은 농사일에 종사하게 하고 겨울이 되면 무예를 강습할 것을 청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 나라 사람들이 북위北魏를 침략하자 북위北魏 사람들이 격퇴하였다.
[] 송주宋主(유욱劉彧)가 북낭야난릉태수北琅邪蘭陵太守 원숭조垣崇祖에게 명을 내려 회북淮北 지역을 경략하도록 하니 원숭조가 욱주郁洲에서 수백 명을 거느리고 북위北魏와 경계 지역에서 700리를 들어가 몽산蒙山을 점거하자, 북위北魏 사람들이 격퇴하였다.注+① 이는 옛 琅邪郡과 蘭陵郡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본래는 徐州에 속하였다. 彭城이 함락되고 나서 垣崇祖가 部曲을 거느리고 郁洲를 점거하자, 두 郡의 태수를 맡게 하였으니, 아직 그 지역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蒙山은 東安郡 新泰縣 동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 나라가 상궁사湘宮寺를 건립하였다.
[]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옛날 집을 상궁사湘宮寺로 만들어注+① 처음 湘東王에 봉해졌으므로, 옛날 집을 湘宮寺로 만들었다. 몹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신안태수新安太守 소상지巢尙之가 직임을 그만두고 돌아오자, 송주宋主가 말하기를 “상궁사湘宮寺에 가본 적이 있는가. 이는 나의 큰 공덕이오.”라고 하였다.
산기시랑散騎侍郎 우원虞愿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이는 모두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저당 잡힌 돈으로 만들어진 것이니注+② “貼婦”는 먼저 아내를 소유한 남편이 위의 요구에 괴로워하다가 낼 수 없으면 아내를 놓아서 밖에서 淫夫를 구하여 아내를 저당 잡혀서 내는 것을 말한다. 또 貼도 판다는 뜻이다., 부처가 만일 지각이 있다면 응당 자비로움으로 탄식할 것입니다. 그 죄가 탑보다도 더 높이 쌓였는데,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모시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빛이 변하니, 송주宋主가 화가 나서 사람을 시켜 전각 아래로 내치자, 우원은 천천히 떠나면서 얼굴색도 변하지 않았다.
송주宋主의 바둑 실력이 아주 형편없었는데 늘 최상의 실력을 갖춘 왕항王抗과 대국을 벌이자注+③ 당시에 바둑 실력은 王抗이 제일이었다., 왕항이 일부러 져주면서 말하기를 “황제의 바둑 실력이 출중하여 이 막지 못하겠습니다.”라고注+④ 飛는 非와 같다. 바둑의 형세는 연속되어 끊어지지 않은 뒤에야 승리할 수 있다. 만일 상대편에 의해 끊기게 되면 상대편이 승리하게 된다. 하니 송주宋主가 끝내 깨닫지 못하고 더욱더 좋아하였다.
그러자 우원이 또 말하기를 “임금이 바둑을 단주丹朱에게 가르쳤지만, 황제께서 즐기실 일이 아닙니다.”注+⑤ ≪博物志≫에 “堯임금이 바둑을 두면서 아들 丹朱를 가르쳤는데, 혹자는 ‘舜임금이 그의 아들 商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바둑을 두어 가르쳤다.’고 한다. 그 방법은 지혜롭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였다. 하였다. 송주宋主가 비록 매우 화가 났지만, 구신舊臣이라는 이유로 관대하게 용납해주었다.注+⑥ 宋主가 湘東王이었을 때, 虞愿은 國常侍를 지냈다.


역주
역주1 예전에……때에 : 劉彧이 湘東王이었을 때를 말한다.
역주2 義嘉의 당여 : 晉安王 劉子勛이 明帝에 대항하여 황제에 올라 선포한 年號로, 그의 부하와 관원들을 통칭하여 ‘義嘉의 당원’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3 正御와……次副 : 正御는 正用, 副御는 備用, 次副는 여분의 備用을 말한다.
역주4 晉平刺王 : 晉平王 劉休祐로, 죽은 뒤에 諡號를 刺王이라고 하였다.
역주5 建安王 : 劉休仁을 말한다.
역주6 어려움을……때 : 景和(465)와 泰始(465~471) 연간을 말한다.
역주7 宋主殺……爲江州刺史 : “湘東王(劉彧)이 애초에 관대하고 온화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이 劉子業의 재앙에 걸려서 벗어난 것이 겨우 털끝과 같았을 뿐인데 얼마 후 劉子勛의 변고를 겪었으니, 그때에 자기 조카들을 다 죽인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지금 다시 여러 아우들을 죽인 것은 어째서인가. 唐․虞의 밝은 덕으로 ‘九族과 親睦하였다.’고 하지 않고 ‘九族을 돈독하게 폈다.’고 말하였고, 周나라는 안으로 九族과 화목하고 아울러 蕃屏(제후)을 세웠는데 30代를 예견하였으나 그 연수가 이를 넘어 내려갔다. 宋主 劉彧이 後嗣를 위한 계책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그 枝葉을 다 잘라내었다. 그러나 蕭道成을 꺼리면서 제거하지 못해 뒷날 국가가 옮겨가게 되었으니, 진실로 형제 우애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자세히 기록하여 劉休祐․劉休仁․劉休若의 죽음에 첫 번째에도 宋主가 그 아우를 죽였다고 하고, 두 번째에도 宋主가 그 아우를 죽였다고 하여 大書特筆하였으니,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 악행을 이루 다 폄하할 수 없으니 後嗣가 끊어지고 없어진 것이 마땅하다.[湘東始以寛和得譽 身罹子業之禍 得脫 僅若毫芒 既更子勛之變 於是盡殺其猶子 亦可已矣 今乃復殺諸弟 何也 唐虞明德 不曰親睦九族 則曰厚敍九族 周家内睦九族 竝建蕃屏 卜世三十 年過其歴 宋主彧欲爲後嗣計 反乃盡剪其枝葉 然而忌道成而不能去 他日移國 固非失於友于之愛也 綱目備而書之 休祐休仁休若之死 一則曰宋主殺其弟 二則曰宋主殺其弟 大書特書 不一而足 其惡不可勝貶 後嗣絶滅宜哉]” ≪發明≫
역주8 神器 : 帝位를 말한다.
역주9 서리를……것 : ≪周易≫ 坤卦 初六爻辭에 “서리를 밟게 되면 두꺼운 얼음이 곧 얼게 된다.[履霜堅氷至]”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미세한 조짐을 보고서도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역주10 七廟 : 황제는 7명의 조상을 사당에 모시므로, 七廟는 종묘를 말한다.
역주11 (富)[宮] : 저본에는 ‘富’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宮’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2 宋主殺其豫州都督吳喜 : “宋 明帝의 篇에 親戚을 죽이지 않으면 임금을 지적해 기록하지 않았는데(泰豫 원년(472)에 王景文을 다만 ‘宋殺(宋나라가 죽였다.)’이라고 기록한 것에 의거한 것이다.) 여기에서 宋主를 지적한 것은 어째서인가. 마음을 주벌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吳喜가 會稽를 토벌했을 적에 劉子房을 생포하여 후송하자 宋主는 마음에 유감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임을 당하였다. 오희를 죽이는 마음은 바로 유자방을 죽일 마음인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마음을 주벌하였으므로 親戚을 죽인 경우로 으레 기록하였으니, 그 뜻이 깊다.[明帝之篇 非殺其親戚 不斥書主(據泰豫元年 王景文止書宋殺) 此其斥宋主 何 誅心也 先是喜討會稽 生送子房 宋主銜之 至是見殺 殺吳喜之心 即殺子房之心也 綱目誅心 故以殺親戚例書之 其旨深矣]” ≪書法≫
역주13 魏主弘……自稱太上皇帝 : “賀善의 贊에 이르기를 ‘이보다 앞서 아버지를 높여 太上皇을 삼은 것은 천하를 통치하지 않음을 밝힌 것인데, 지금 北魏에서 아들에게 傳位하고 太上皇帝라고 칭한 것은 여전히 모든 정무를 총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賀善賛曰 前此有尊其父爲太上皇者 明不統天下也 今魏傳位於其子 稱太上皇帝者 猶總乎萬幾也]” ≪書法≫“大位는 큰 간사함을 불러온다. 옛사람이 조심조심하며 하루에 모든 정무를 다스렸으니, 어찌 逸樂을 싫어하면서 勤勞를 좋아했겠는가. 있는 곳은 天位이고 다스리는 것은 天職인데 祖宗의 사업을 부탁받고 천하의 백성들이 떠받들어 정사에 부지런하여 일찍 일어나 옷을 입고 늦게 저녁을 먹으면서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어찌 사람 위에 높이 있으면서 번잡한 노고를 싫어해 버릴 것인가. 반드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편안하고 담박하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진 인재를 가려 등용해서 임무를 맡기고 성공을 책임 지워 자신이 그 大綱을 총괄한다면 오히려 혹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후사가 한창 어린데, 마침내 맡기고서 떠나려 함은 어째서인가. ≪資治通鑑綱目≫에서는 ‘魏主傳位太子 自稱太上皇帝’라고 기록하여 그 결정이 자기에게서 나왔지 진실로 타인이 하게 한 것이 아님을 보였다. 뒷날 鴆毒에 은밀히 독살당하여 자기 몸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大權이 손에서 떠나 힐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魏主(拓跋弘)는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속세 밖에서 초연하였으니, 사치하여 욕심을 부린 것과는 그 차이가 어찌 다만 십 배와 백 배일뿐이겠는가. 그런데도 神仙 王子喬와 赤松子의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멸망시키는 화를 끼쳤으니, 그렇다면 浮屠와 黃老의 학문이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아, 슬프다.[大位 大姦之招也 古人兢兢業業 一日萬幾 豈固厭逸樂而好勤勞哉 所居天位 所治天職 祖宗基業之付託 海宇民物之歸仰 宵衣旰食 猶懼弗勝 烏有尊居人上 而厭棄塵勞者哉 必若淸虛恬淡 毋亦擇賢而用 委任責成 總其大綱 猶或庶幾 況嗣子方穉 乃欲委而去之 何耶 綱目書魏主傳位太子 自稱太上皇帝 以見其斷出於己 固非他人使之 異時鴆毒潜行 其身不保 亦以大權去手 莫能致詰故爾 尙誰咎哉 雖然 魏主屏去聲色 超然物外 其與奢侈縱慾 相去 何止什百 然而不享喬松之壽 反貽覆身之禍 然則浮屠黄老之學 果何益哉 噫]” ≪發明≫
역주14 宋作湘宮寺 : “앞에서 佛法 精舍를 지은 것을 기록하였고 寺(절)을 지은 것을 기록한 적은 없었다. 절을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北魏에는 永明寺․閑居寺를 기록하고(梁나라 己丑年(509)), 永寧寺를 기록하고(梁나라 丙申年(516)), 唐나라에는 章敬寺를 기록하고(代宗 大曆 2년(767)), 8개 절을 세움을 기록하고(武宗 會昌 6년(846)), 閩나라에는 白龍寺를 기록하여(五代 丁酉年(937))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절을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이 6번인데 精舍는 포함되지 않는다.[前書立佛精舍矣 未有書作寺者 書作寺始此 自是魏書永明閑居(梁己丑年) 書永寧(梁丙申年) 唐書章敬(代宗大曆二年) 書八寺(武宗會昌六年) 閩書白龍(五代丁酉年) 不可勝書矣 終綱目書作寺六 精舍不與焉]” ≪書法≫“선행을 하면 백 가지 상서로움을 내려주고 不善을 행하면 백 가지 재앙을 내려주며, 선행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많은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재앙이 있다. 宋主 劉彧은 종족을 죽이고 지나친 형벌과 살육을 하며 시기하고 잔인하게 학대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다. 안으로는 음탕하고 방자하며 밖으로는 사치를 극도로 하고 嬖倖들이 횡행하여 백성을 해치며 국가를 좀먹었다. 그 불선을 쌓은 것이 이와 같으면서 한창 절을 크게 지어 스스로 福田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 멸망되어 남은 것이 없으니 예전에 이른바 ‘大功德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이다. 君子가 ≪資治通鑑綱目≫에서 ‘宋作湘宮寺’라고 기록한 것을 본 뒤에 그가 누린 보답을 증험하면 그 시비와 득실이 명료해질 것이다.[作善降之百祥 作不善降之百殃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宋主彧剿拉宗支 淫刑濫殺 猜忌忍虐 人不自保 内則淫汙肆慾 外則極侈窮奢 嬖倖縱横 殘民蠧國 其不善之積如此 方且大營梵宇 自謂福田 然不閱歲而告殞 勦滅無餘 向之所謂大功德者 果安在哉 君子觀綱目書宋作湘宮寺 然後驗其所享之報 而是非得失瞭然矣]” ≪發明≫
역주15 (帖)[貼] : 저본에는 ‘帖’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貼’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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