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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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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年(263)
炎興元年이라
魏景元四年이요 吳永安六年이라 ◑是歲 漢亡하다
亮初亡 所在各求爲立廟注+爲, 去聲.한대 朝議以禮秩不許하니 百姓遂因時節하여 私祭之於道陌上이러니
至是하여 校尉習隆等請호되 近其墓立一廟於沔陽하여 以時賜祭하고
其故臣吏欲奉祠者 皆至其廟케하고 斷其私祠하여 以崇正禮하소서한대 從之하다
夏五月 吳交阯殺其太守以降魏하다
吳交阯太守孫諝貪暴注+諝, 私呂切.이러니 會吳主遣使至郡이어늘 又擅調孔雀三十頭하여 送建業注+調, 徒弔切.하니
民憚遠役하여 遂作亂이어늘 郡吏呂興 殺諝及使人하고 而請吏於魏하니
九眞日南 皆應이어늘 魏以興爲將軍都督이러니 尋爲其下所殺하다
魏遣鄧艾鍾會하여 將兵入寇關口하니 守將傅僉 死之하고 姜維戰敗하여 하다
魏遣鄧艾督三萬餘人하여 自狄道趣甘松沓中하여 以綴姜維注+甘松, 地名, 諸羌之地, 有甘松嶺.하고
雍州刺史諸葛緖 督三萬餘人하여 自祁山趣武街橋頭하여 絶維歸路注+曰 “下辨縣屬武都郡, 今城州同谷縣, 舊名武街城.” 水經註 “濁水逕武街城南.” 又曰 “白水, 出臨洮縣西傾山東南, 逕陰平故城南, 又東北逕橋頭.”하고
鍾會 統十萬餘衆하여 分從斜谷駱谷子午谷趣漢中하고 以衛瓘으로 持節監軍事行鎭西軍司注+瓘, 覬之子也. 鍾會時爲鎭西將軍, 瓘旣監艾‧會軍, 又行會軍司.하다
會過幽州刺史王戎하여 問計注+戎, 雄之孫也.한대 戎曰 道家有言호되 爲而不恃注+老子道經之言.라하니 非成功難이라 保之難也니라
以問參相國軍事劉寔曰 鍾鄧 其平蜀乎注+相國有參軍事, 妙選時賢, 參預謀議. 寔漢濟北惠王壽之後. 寔曰 破蜀必矣 而皆不還하리라 客問其故한대 寔笑而不答하더라
八月 軍發洛陽할새 陳師誓衆이러니 將軍鄧敦 謂蜀未可討라한대 司馬昭斬以徇하다
漢人 遣廖化爲姜維繼援하고 張翼董厥 詣陽安關口하여 爲諸圍外助하고
大赦改元하고 勅諸圍不得戰하고 退保漢樂二城케하다 會平行至漢中注+平行, 安然而行也.하여 使兵圍二城하고
徑趣陽安口하여 遣人祭諸葛亮墓하고 使護軍胡烈爲前鋒하여 攻關口어늘 守將傅僉拒守러니 其下蔣舒率衆迎降注+僉, 肜之子也. 初漢武興督蔣舒, 在事無稱, 漢朝令人代之, 使助將軍傅僉, 守關口, 舒由是恨.하니
烈乘虛襲城이어늘 僉格鬪而死하니 會遂長驅而前하여 大得藏庫積穀注+長驅, 猶言直進也. 謂無禦之者. 藏, 徂浪切.하다
維聞會已入漢中하고 引兵還이러니 艾遣兵追躡於彊川口하여 大戰注+彊川口, 在嵹臺山南. 嵹臺山, 卽臨洮之西傾山.하니
維敗走하여 還至陰平하여 合衆欲赴關城이라가 聞其已破하고 遇化翼厥等하여 合兵守劍閣以拒會注+劍閣, 在利州綿谷‧葭萌二縣. 諸葛亮相蜀, 於此立劍縣. 水經註 “小劍戍西去大劍山三十里, 連山絶險, 飛閣通衢, 故謂之劍閣.”하다
冬十月 하다
遣使告急於吳한대 吳使大將軍丁奉으로 向壽春하고 丁封孫異 向沔中하여 救漢注+沔中, 時爲魏境, 吳兵未能至也, 擬其所向耳.하다
魏司馬昭始稱相國晉公하고 受九錫하다
昭累辭進位爵賜러니 至是하여 蜀捷交至어늘 詔復授之한대 昭乃受命하다 辟魏舒爲相國參軍하다
舒少時 遲鈍質朴하여 不爲鄕親所重注+鄕親, 鄕里親戚也.이러니 從叔父衡 有名當世注+從, 才用切.호되
亦不知之하여 使守水碓하고 每嘆曰 舒堪數百戶長이면 我願畢矣注+碓, 都內切, 舂也. 爲碓水側, 寘輪碓後, 以橫木貫輪, 橫木之兩頭, 復以木長二尺許, 交午貫之, 正直碓尾. 木激水灌輪, 輪轉則交午木戛擊碓尾木而自舂, 不煩人力, 謂之水碓. 長, 展兩切. 漢制萬戶以上爲令, 千戶以上爲長. 數百戶長, 謂小邑長也.로다
舒亦不以介意하고 不爲皎厲之事注+皎者, 求以暴白於世. 厲, 危行也.한대 唯太原王乂謂舒曰 卿終爲台輔라하고 常振其匱乏하니 舒受而不辭注+振, 與賑通, 救也.하더라
年四十餘 郡擧하여 察孝廉하니 宗黨以舒無學業으로 勸令不就하여 可以爲高라한대
舒曰 若試而不中이면 其負在我注+中, 去聲. 安可竊不就之高하여 以爲己榮乎리오하고
於是 自課하여 百日習一經하여 對策升第하고 累遷後將軍鍾毓長史하니 毓每與參佐射 舒常爲畫籌而已注+參佐, 參軍及諸佐吏也. 爲, 去聲, 下徐爲同. 射之畫籌, 猶投壺之釋算也.러니
後遇朋人不足하여 以舒滿數注+朋, 輩也. 凡射者分爲兩朋, 朋人均敵, 以較勝負. 偶遇其朋, 乏一人, 遂以舒補數.하니 舒容範閑雅하고 發無不中하니 擧坐愕然하고 莫有敵者어늘
毓歎而謝曰 吾之不足以盡卿才 有如此射矣로다 及爲參軍 府朝碎務 未嘗是非注+府朝, 猶言府庭也.하고
至廢興大事 衆人莫能斷者 舒徐爲籌之하니 多出衆議之表이라 昭深器重之하더라
衛將軍諸葛瞻 及鄧艾戰於綿竹敗績하여 及其子尙皆死之하다
鄧艾進至陰平하여 欲與諸葛緖 自江油趣成都注+江油, 本漢之廣漢剛氐道地, 後因置縣, 蜀之邊要也. 三國魏得其地, 置江油郡.한대 緖以西行 非本詔라하여 遂引兵與鍾會合하니
會欲專軍勢하여 密白緖畏懦不進이라하니 檻車徴還하고 軍悉屬會하다
姜維列營守險하니 會攻之不能克하고 糧道險遠하니 軍食乏하여 欲引還이러니
艾上言호되 賊已摧折하니 宜遂乘之 若從陰平由邪徑하여 經漢德陽亭趣涪하여 出劍閣西百里하면 去成都三百餘里
奇兵 衝其腹心하면 劍閣之守 必還赴涪 則會方軌而進하고 如不還則應涪之兵 寡矣注+按前漢無德陽縣. 後漢志 “廣漢郡始有德陽縣, 蓋因漢故亭而置縣也.” 自蜀分廣漢置梓潼郡之後, 劍閣縣屬梓潼, 德陽縣屬廣漢. 續漢志以爲 “德陽縣有劍閣.” 今姜維守劍閣拒鍾會, 而鄧艾欲從德陽亭趣涪, 則此時分爲兩縣明矣. 然德陽亭亦非此時德陽縣治, 蓋前漢德陽亭故處也.라하니
遂自陰平으로 行無人之地七百餘里하여 鑿山通道하며 造作橋閣한대 山高谷深하고 又糧運將匱하여 瀕於危殆注+瀕, 際也.러라
艾以氊自裹하여 推轉而下하고 將士皆攀木緣崖하여 魚貫而進注+推, 通回切, 推轉推墮而流轉也. 魚貫而進, 山崖險 單行相繼而進, 如貫魚然.하여 先登至江油하니 守將馬邈降하다
諸葛瞻 督諸軍拒艾한대 至涪不進이어늘 尙書郞黃崇 屢勸瞻速行據險하여 無令敵得入平地호되 瞻不從注+崇, 權之子也.이라
艾遂長驅而前이어늘 退住綿竹하니 艾以書誘瞻曰 若降者 表爲琅邪王注+諸葛氏, 本琅邪人, 故以此誘之.호리라
瞻斬其使하고 列陳以待注+陳, 讀曰陣, 下同.어늘 艾大破之하여 斬瞻及崇하니
瞻子尙曰 父子荷國重恩하여 不早斬黃皓하여 使敗國殄民하니 用生何爲리오하고 策馬冒陳而死하다
漢人 不意魏兵卒至하여 不爲城守調度注+卒, 讀曰猝.러니 聞艾已入平地하고 帝使群臣會議하니 或勸奔吳하고 或勸入南中이어늘
譙周以爲호되 自古無寄他國爲天子者 魏能幷吳 吳不能幷魏하니 等爲稱臣인댄 爲小孰與爲大 再辱 何與一辱注+爲小‧爲大之爲, 竝去聲. 今降魏, 一辱而已. 若奔吳稱臣, 是一辱矣. 與吳俱亡. 又將臣服於魏, 是爲再辱.이리오
若欲奔南컨대 當早爲計어늘 今大敵已近하니 群心無可保者 恐發足之日 其變不測注+謂衆心已離, 旣行之後, 中道潰散, 必不能至南中.이요
就能至南인댄 遠夷平常無所供爲로되 猶數反叛注+無所供爲, 言其民旣不出稅租以供上用, 又不出力爲上有所施爲.하니
今外當拒敵이요 內供服御 耗損諸夷 其叛必矣니이다
乃遣使奉璽綬하여 詣艾降하니 北地王諶 怒曰注+諶, 景耀二年受封. 若理窮力屈하여 禍敗將及이면
便當父子君臣 背城一戰하여 同死社稷하여 以見先帝 可也 奈何降乎리오
帝不聽한대 諶哭於昭烈之廟하고 先殺妻子而後自殺하다
帝別勅姜維하여 使降鍾會하고 又送士民簿於艾하니
戸二十八萬이요 口九十四萬이요 甲士十萬二千이요 吏四萬人注+簿, 籍也.이러라
艾至成都城北이어늘 帝率群臣하고 面縛輿櫬하여 詣軍門注+櫬, 棺也. 輿櫬, 示將受死.하니
艾持節하여 解縛焚櫬延見하고 禁將士無得擄掠하고 輒依鄧禹故事하여 承制拜漢帝以下官注+依鄧禹承制授隗囂故事也. 通鑑 “拜漢禪行驃騎將軍, 太子奉車, 諸王駙馬都尉, 漢群司各隨高下拜爲王官, 或領艾官屬.”하고
收黃皓將殺之러니 皓賂左右以免하다 維等及諸郡縣圍守 得勅放仗詣會降하니
將士咸怒하여 拔刀斫石注+圍守, 卽魏延所置漢中諸圍之守兵也.이러라 會厚待維等하고 皆權還其印綬節蓋하다
吳兵하다
吳聞漢亡하고 乃罷兵하니 中書丞華覈 詣宮門上表曰注+魏有中書監‧令, 無中書丞, 此官蓋吳置也. 伏聞成都不守하여 社稷傾覆하니 臣以草芥 竊懐不寧注+芥, 萊也, 其實至細. 言草芥者, 自喩至微至賤也.하니
陛下聖仁 必垂哀悼 臣不勝忡悵之情하여 謹拜表以聞注+忡悵, 謂憂忡而悵惘也. 蜀, 吳之與國, 蜀亡, 吳之君臣不知懼, 故覈拜表以儆之.하노이다
魏之伐蜀也 吳人 或謂襄陽張悌曰 司馬氏得政以來 大難屢作하고 百姓未服이어늘 今又遠征하니 何以能克注+大難屢作, 謂王淩毌丘儉諸葛誕擧兵也.이리오
悌曰 不然하다 曹操雖功蓋中夏 民畏其威而不懐其德也 丕叡承之하여 刑繁役重하고 東西驅馳하여 無有寧歲이러니
司馬懿父子 累有大功하여 除其煩苛而布其平惠하고 爲之謀主而救其疾苦하니 民心歸之 亦已久矣
淮南 三叛하되 腹心 不擾注+延熙十二年王淩叛, 十八年毌丘儉叛, 二十年諸葛誕叛.하고 曹髦之死 四方不動하고
任賢使能하여 各盡其心하니 其本根固矣 姦計立矣
今蜀 閹宦專朝하고 國無政令而玩戎黷武하여 民勞卒敝하니 因危而伐이면 殆無不克이니
彼之得志 我之憂也라하니 吳人笑其言이러니 至是乃服하다
吳以鍾離牧爲武陵太守하다
吳以武陵五溪夷與蜀接界하니 蜀亡 懼其叛亂하여 乃以牧爲太守하니
魏已遣郭純誘動諸夷하고 進攻酉陽하니 郡中震懼注+酉陽縣, 屬武陵郡, 縣在酉溪之陽.러라
朝吏以爲호되 諸夷阻兵하니 不可以軍驚擾 宜遣恩信吏하여 宣敎慰勞注+朝, 郡朝也.라한대
牧曰 不然하다 外境內侵하면 誑誘人民하리니 當及其根柢未深而撲取之 此救火貴速之勢也라하고
卽率所領하여 晨夜進道하여 緣山險行垂二千里하여 斬惡民懐異心者 凡千餘人이라 純等散走하니 五溪皆平하다
◑魏以鄧艾爲太尉하고 鍾會爲司徒하다


癸未年(263)
[] 나라(蜀漢) 後主 炎興 원년이다.
[] 나라 元帝 曹奐 景元 4년이고, 나라 景帝 孫休 永安 6년이다. 이해에 나라(蜀漢)가 멸망하였다.
[] 봄에 詔書를 내려 丞相 諸葛亮의 사당을 沔陽에 세웠다.
[] 諸葛亮이 막 죽었을 때에 각 지역마다 그를 위하여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하자注+(위하다)는 去聲이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禮法品級 문제로 허락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마침내 절기를 따라 사사로이 도로 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校尉 習隆 등이 청하기를 “묘지에 가까운 곳인 沔陽에 사당 하나를 세워서 四時에 제사를 내려주고,
옛 신하와 관리들 중에 제사를 올리고자 하는 자는 모두 사당에 오도록 하고, 사사로이 祭祀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여 正禮를 존중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後主가 그것을 따랐다.
[] 여름 5월에 나라 交阯 사람이 太守를 죽이고 나라에 항복하였다.
[] 나라 交阯太守 孫諝가 탐욕스럽고 포악하였다.注+私呂이다. 마침 吳主 孫休가 사신을 파견하여 交阯郡에 이르렀는데, 사신이 또 제멋대로 공작 30마리를 징발하여 建業으로 보내려고 하였다.注+調(징발하다)는 徒弔이다.
백성들이 먼 길에 노역하는 것을 꺼려서 마침내 난을 일으키자, 郡吏 呂興은 손서와 사신을 죽이고 나라에 관리를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九眞日南이 모두 호응하니, 나라가 여흥을 將軍都督으로 삼았는데 얼마 뒤에 여흥은 그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가을에 나라가 鄧艾鍾會를 파견하여 군사들을 지휘하여 關口에 침입하였다. 守將 傅僉이 죽고 姜維가 패배하여 돌아와 劍閣을 수비하였다.
[] 나라는 鄧艾를 파견하여 3만여 명의 병사를 감독하고 狄道에서 甘松沓中으로 나아가서 姜維를 묶어놓게 하고,注+甘松地名으로 여러 羌族의 땅이며 甘松嶺이 있다.
雍州刺史 諸葛緖에게는 3만여 명의 병사를 감독하고 祁山에서 武街橋頭로 나아가서 강유의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게 하고,注+李賢이 말하기를 “下辨縣武都郡에 속하였는데 지금의 城州 同谷縣이고 옛 이름은 武街城이다.”라고 하였다. ≪水經註≫에 “濁水武街城 남쪽을 지난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白水臨洮縣 西傾山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陰平 故城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가서 橋頭를 지난다.”라고 하였다.
鍾會에게는 10여만 명을 통솔하여 斜谷(야곡)‧駱谷子午谷을 따라 나누어 漢中으로 나아가게 하고, 衛瓘으로 持節軍事를 감독하고 鎭西를 겸직하게 하였다.注+衛瓘衛覬의 아들이다. 鍾會는 당시 鎭西將軍이 되었다. 위관은 이미 鄧艾鍾會의 군사를 감독하였는데 또다시 종회의 軍司를 겸직하게 되었다.
[] 鍾會幽州刺史 王戎에게 들러서 계책을 물었는데注+王戎王雄의 손자이다. 왕융이 말하기를 “道家의 말에 ‘일을 하고 자랑하지 말라.’注+〈“爲而不恃”는〉 老子의 ≪道德經≫의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를 보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劉寔에게 묻기를 “鍾會鄧艾蜀漢을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注+相國參軍事가 있는데, 당시의 賢人을 뽑아서 참모회의에 참여시켰다. 劉寔나라 濟北惠王 劉壽(章帝의 아들)의 후손이다.라고 하니, 유식이 말하기를 “蜀漢을 격파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모두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빈객이 그 까닭을 물었는데, 유식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 8월에 군사들이 洛陽을 출발할 적에 군사를 정렬시키고 맹세하였는데 장군 鄧敦이 “蜀漢을 토벌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司馬昭는 그를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蜀漢廖化를 파견하여 姜維의 후원이 되게 하고 張翼董厥陽安關口로 가서 외변의 요새를 돕도록 하였다.
大赦免令을 내리고 〈炎興이라고〉 改元하고, 외변의 요새에 칙령을 내려 싸우지 말고 물러나서 漢城樂城 두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鍾會는 평안하게 행군하여 漢中에 도착해서注+平行”은 편안하게 행군한다는 뜻이다. 병사를 시켜서 두 성을 포위하도록 하고,
곧바로 陽安口에 나아가서 사람을 보내 諸葛亮의 묘소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종회는 護軍 胡烈로 하여금 선봉으로 삼아서 關口를 공격하게 하자, 守將 傅僉이 항거하고 수비하였는데 부하 蔣舒가 그 무리를 이끌고 〈호렬을〉 맞이하여 항복하였다.注+傅僉傅肜(부융)의 아들이다. 예전에 蜀漢 武興督 蔣舒가 일을 할 때 걸맞지 않아서 蜀漢 조정에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게 하고 將軍 傅僉을 도와서 關口를 지키게 하니 장서는 이로 말미암아 한을 품었다.
호렬이 빈틈을 이용하여 성을 습격하자, 부첨이 싸우다가 죽었다. 종회는 마침내 계속 전진하여 창고에 쌓인 곡식을 많이 획득하였다.注+長驅”는 直進한다는 말과 같으니, 막는 자가 없음을 이른다. (창고)은 徂浪이다.
[] 姜維鍾會의 군대가 이미 漢中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니, 鄧艾가 병사를 보내 彊川口까지 추격하여 크게 싸웠다.注+彊川口嵹臺山(강대산) 남쪽에 있다. 嵹臺山은 곧 臨洮縣西傾山이다.
강유가 패주하여 陰平으로 돌아와서 병사들을 모아 關城으로 가려고 하다가 그 이 이미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廖化張翼董厥 등을 만나서 군사를 합쳐 劍閣을 지키면서 종회를 막았다.注+劍閣利州綿谷葭萌에 있다. 諸葛亮蜀漢에 재상이 되어 이곳에 劍閣縣을 세웠다. ≪水經註≫에 “小劍戍에서 서쪽으로 大劍山까지 거리가 30리인데, 산이 연이어 매우 험하고 높은 閣道(棧道)에 사방 길이 통하므로 劍閣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겨울 10월에 나라 사람들이 와서 지원하였다.
[] 사신을 보내 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는데, 나라는 大將軍 丁奉으로 하여금 壽春으로 나아가게 하고, 丁封孫異로 하여금 沔中으로 나아가서 蜀漢을 구원하게 하였다.注+沔中은 당시에 나라의 境內이어서 나라 병사가 이를 수 없으니 그곳으로 향하려고 할 뿐이었다.
[] 나라 司馬昭가 비로소 相國 晉公을 칭하고
[] 예전에 司馬昭가 누차 職位의 승진과 爵位의 하사를 사양하였다. 이때에 와서 蜀漢에서 승첩이 교대로 이르자 조서를 내려 다시 수여하니, 사마소가 을 받았다. 魏舒를 불러서 相國參軍으로 삼았다.
위서는 어렸을 때 느리고 질박하여 향리 친척들에게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았다.注+鄕親”은 鄕里에 사는 親戚이다. 從叔父 魏衡은 당시 세상에 유명하였는데도注+(방계 친속)은 才用이다.
또한 위서를 알아보지 못하여 위서에게 물레방아를 맡아보게 하고 매번 탄식하여 말하기를 “위서가 수백 을 담당한다면 내 소원을 다 풀 수 있겠다.”注+(방아)는 都內이니, 방아라는 뜻이다. 방아를 물가에 만들어 바퀴를 방아 뒤에 설치하고 橫木(가로로 된 나무)으로 바퀴를 관통하고 橫木 양쪽 끝에 다시 나무 길이 2쯤 되는 것을 교차해서 관통하여 곧바로 방아 꼬리에 만나게 한다. 나무가 물에 격동되고 바퀴에 물이 흘러가서 바퀴가 돌면 교차된 나무가 방아 꼬리의 나무를 쳐서 스스로 방아 찧게 되어 번거롭게 사람의 힘을 쓸 필요가 없으니 이를 水碓(물레방아)라고 한다. (우두머리)은 展兩이다. 나라 制度에 1만 가구 이상에는 〈책임자로〉 縣令을 두고, 1천 가구 이상에는 縣長을 두었다. “數百戶長”은 小邑長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 魏舒는 또한 개의치 않고 고상한 일을 하지 않았다.注+는 세상에 드러내려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는 고상한 행위이다. 오직 太原 사람 王乂만이 위서에게 말하기를 “은 끝내 台輔(재상)가 될 것이다.”라고 하고, 항상 그의 가난함을 구휼해주니, 위서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注+과 통용하니, 구휼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40여 세가 되어 에서 上計掾으로 선발하여 孝廉에 천거하였다. 친척들이 위서가 학업이 없으므로 그에게 벼슬에 나가지 않아서 이를 고매함으로 삼으라고 권하였는데,
위서가 말하기를 “만약에 시험을 쳐서 합격하지 못하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注+(맞다)은 去聲이다. 어찌 벼슬에 나가지 않는 고매함을 훔쳐서 자신의 영광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스스로 학업을 하여 백 일 동안에 하나의 경전을 익혀서 對策에서 합격하였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나중에는 將軍 鍾毓長史가 되었다. 종육이 매번 參軍과 보좌관들과 활쏘기를 할 때마다 위서는 늘 점수를 계산할 뿐이었다.注+參佐”는 參軍과 여러 보좌관이다. (위해서)는 去聲으로 아래 “徐爲”의 도 같다. 활쏘기의 점수를 계산하는 것은 投壺의 점수를 계산하는 것과 같다.
그 후에 편이 부족하게 되어 위서로 인원수를 채우니,注+은 편이다. 무릇 활쏘기를 하는 이는 두 편으로 나누는데 편의 인원을 균등히 하여 승부를 겨룬다. 그 편을 짝을 맞추는데 한 사람이 부족하여 마침내 魏舒로 숫자를 메꾼 것이다. 위서는 용모와 태도가 여유 있고 단아하였으며 활을 쏘아서 맞추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 온 좌중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종육이 감탄하고 사과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경의 재주를 다 쓰지 못한 것이 이 활쏘기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參軍이 되어서는 府朝(相國府)의 번잡한 업무를 시비한 적이 없었고,注+府朝府庭(관부 뜰)이라는 말과 같다.
국가의 흥폐와 관련된 큰일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을 위서가 여유롭게 헤아리니, 대부분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뛰어넘었다. 司馬昭는 그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 衛將軍 諸葛瞻綿竹에서 鄧艾와 싸워 대패하여 그의 아들 諸葛尙과 함께 전사하였다.
[] 鄧艾가 진격해 陰平에 도착하여 諸葛緖와 함께 江油에서 成都로 나아가려 하는데,注+江油는 본래 나라의 廣漢 剛氐道 지역으로 후에 이어서 을 설치해서 蜀漢의 변방 요새가 되었다. 三國時代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고 江油郡을 설치했다. 제갈서는 서쪽으로 가는 것이 본래 詔書의 뜻이 아니라고 여겨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鍾會와 합류하였다.
종회는 군권을 독차지하고자 하여 비밀리에 아뢰어 제갈서가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않는다고 하니, 제갈서를 檻車에 실어 소환하고, 그의 군사들은 모두 종회에게 소속시켰다.
姜維가 군영을 배치해 험준한 곳을 지키니, 종회가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험하고 머니, 군량이 부족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鄧艾上言하기를 “적은 이미 사기가 꺾였으니 마땅히 이를 틈타 공격해야 합니다. 만약에 陰平에서 샛길을 경유해서 蜀漢德陽亭을 거쳐 涪縣으로 나아가서 劍閣에서 서쪽으로 100리쯤 되는 곳으로 진출하면 成都까지 거리가 300여 리 정도입니다.
奇兵이 그들의 심장부를 공격하면 〈蜀漢의〉 劍閣을 지키는 군대가 반드시 돌아와서 涪縣으로 달려갈 것이니, 종회의 군대가 길을 나란히 하여 〈검각을 넘어〉 전진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검각의 군대가 부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부현에서 대응할 군대가 적을 것입니다.”注+살펴보건대, 前漢 때에는 德陽縣이 없었다. ≪後漢書≫ 〈郡國志〉에 “廣漢郡에 처음 德陽縣을 두었으니, 나라의 옛 으로 인하여 을 설치한 것이다.” 하였다. 蜀漢 때에 廣漢을 나누어 梓潼郡을 설치한 후로 劍閣縣梓潼에 속하였고 덕양현은 廣漢에 속하였다. ≪續漢志≫에 “德陽縣劍閣에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 姜維劍閣을 지키면서 鍾會에게 대항하고, 鄧艾德陽亭에서 涪縣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니, 이때 두 현으로 나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덕양정은 역시 이때 덕양현의 治所가 아니고 예전 前漢 때의 덕양정의 옛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음평에서부터 인적이 없는 땅 700여 리를 행군하여 산을 깎아 길을 통하며 橋閣(棧道)을 만들었는데, 산은 높고 골짜기가 깊고 또 군량 운반도 장차 끊기려 하여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注+은 만난다는 뜻이다.
등애가 털 담요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험한 곳을 굴러 내려가고 장병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벼랑을 올라서 물고기를 꿴 듯이 일렬로 전진하여注+(밀다)는 通回이니, 〈“推轉而下”는〉 밀어 굴리고 밀어 떨어져서 굴러가는 것이다. “魚貫而進”은 산애가 험준하고 좁아서 한 줄로 서로 이어서 나아가니 마치 물고기를 꿰어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선두 부대가 江油에 도착하니, 蜀漢의 수비 장수인 馬邈이 항복하였다.
鄧艾가 산에 길을 뚫어 西川을 습격하다鄧艾가 산에 길을 뚫어 西川을 습격하다
[] 諸葛瞻은 여러 부대를 감독하여 鄧艾를 막았는데 涪縣에 이르러 나아가지 않았다. 尙書郞 黃崇이 누차 제갈첨에게 신속하게 나아가 험한 곳을 점거하여 적들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제갈첨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注+黃崇黃權의 아들이다.
鄧艾가 마침내 계속 전진하여 나아가자 제갈첨은 綿竹으로 퇴각하여 머물렀다. 등애가 편지를 써서 제갈첨을 꾀어 말하기를 “만약 항복한다면 표문을 올려 琅邪王으로 삼겠다.”注+諸葛氏는 본래 琅邪人이므로 이로써 그를 유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갈첨은 使者의 목을 베고 진을 치고서 등애를 기다렸다.注+(진을 치다)은 이라고 읽으니, 아래에도 동일하다. 등애가 크게 격파하고 제갈첨과 황숭의 목을 베니
제갈첨의 아들 諸葛尙이 말하기를 “우리 父子가 나라의 큰 은혜를 받고서 일찍 黃皓의 목을 베지 못하여 나라를 패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죽게 하였으니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고, 말에 채찍질하여 적진에 쳐들어가서 죽었다.
[] 鄧艾成都에 도착하니 황제(後主)가 나와서 항복하였다. 皇子 北地王 劉諶이 죽자 나라(蜀漢)가 망하였다.
蜀 後主가 수레에 관을 싣고 나아가 항복하다蜀 後主가 수레에 관을 싣고 나아가 항복하다
[] 蜀漢 사람들은 뜻밖에 나라 병사들이 갑자기 도착하여 성곽을 지킬 준비를 하지 못하였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鄧艾가 이미 평지까지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劉禪)가 여러 신하들에게 회의를 열게 하니, 어떤 이는 나라로 달아나자고 권하였고 어떤 사람은 南中으로 들어가자고 권하였다.
譙周가 말하기를 “예부터 다른 나라에 寄生하여 천자 노릇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나라는 나라를 병합할 수 있지만 나라는 나라를 병합할 수 없으니 똑같이 신하를 칭한다면 작은 나라를 위해 칭하는 것이 어찌 큰 나라를 위해 칭하는 것만 하겠으며, 두 번 당하는 수치가 어찌 한 번 당하는 치욕만 하겠습니까.注+爲小爲大”의 (위하다)는 모두 去聲이다. 지금 나라에게 항복하면 한 번의 치욕을 당할 뿐이다. 만약 나라로 도망해 신하를 칭해서 한 번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와 함께 망하게 되면 또다시 나라에게 항복해 신하가 되니, 이는 두 번 치욕을 당하는 것이다.
만약에 남쪽으로 도망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조속히 계책을 세웠어야 합니다. 지금 강대한 적이 이미 가까이에 있으니, 대중들의 인심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출발하는 날 그 변고를 예측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注+〈“發足之日 其變不測”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떠나서 행군을 하고 난 후에 中道에서 뿔뿔이 흩어져 반드시 南中에 도착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南方으로 간다면 먼 곳의 이적들은 평상시에 공물 바침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자주 반란하였습니다.注+無所供爲”는 南中의 백성들이 이미 조세를 내어 조정의 용도에 제공하지 않고 있고, 또다시 노동력을 제공하여 조정을 위해 시행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지금 밖으로 적에 대항하여야 하고 안으로 服飾車馬를 바쳐야 하는데 여러 이적들의 재력을 소모하게 하면 그들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황제(劉禪)는 곧바로 사신을 파견하여 玉璽와 인끈을 받들고 가서 鄧艾에게 항복하게 하니, 北地王 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注+劉諶景耀 2년에 北地王해졌다. “만약에 계책이 다하고 힘이 모자라서 재앙과 실패가 닥치려 하면
마땅히 부자와 군신이 성곽을 등지고 한 번 싸워 社稷을 위하여 같이 죽어서 먼저 先帝(昭烈帝)를 뵙는 것이 옳으니, 어찌 항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따르지 않자, 유심은 소열제의 사당에서 통곡하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나서 자살했다.
황제는 姜維에게 별도로 칙령을 내려서 鍾會에게 항복하도록 하고 또한 士民名籍簿를 등애에게 보내니,
戶數는 28만 가구이고 인구는 94만 명이었으며, 갑사는 10만 2천 명이었고 관리는 4만 명이었다.注+簿는 문서(장부)이다.
鄧艾成都城 북쪽에 도착하자 황제가 여러 신하들을 인솔하고 군문에 나아갔다.注+이니, “輿櫬”은 장차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이다.
등애가 부절을 가지고 결박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인견하고 장병들에게 엄명하여 노략질하는 일이 없게 하고 곧바로 나라(蜀漢) 황제 이하 관리들에게 벼슬을 주었다.注+鄧禹承制하여 隗囂에게 제수한 故事에 의거한 것이다. ≪資治通鑑≫에 “漢王 劉禪行驃騎將軍을 삼고, 太子奉車都尉로 삼고, 여러 왕들은 駙馬都尉로 삼고 蜀漢의 여러 관리들은 각각 지위의 고하에 따라 나라 王朝의 관원에 임명하고 혹은 鄧艾官屬을 겸직하게 하였다.”라고 했다.
黃皓를 잡아서 장차 죽이려고 하였는데, 황호가 등애의 측근에게 뇌물을 주어서 죽음을 면하였다. 강유 등과 여러 郡縣의 요새를 수비하던 자들은 황제(유선)의 칙령을 받고서 무기를 내려놓고서 종회에게 가서 항복하니,
장병들은 모두 화가 나서 칼을 뽑아 돌을 쳤다.注+圍守”는 바로 魏延이 설치한 漢中의 여러 요새의 수비 병사이다. 종회는 강유 등을 후하게 대해주고 그들의 印綬符節車蓋를 모두 임시로 돌려주었다.
[] 나라 병사들이 돌아갔다.
[] 나라는 蜀漢이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철수하니, 中書丞 華覈(화핵)이 궁전의 문에 나와서 표문을 올리기를注+나라에는 中書監中書令만 있고 中書丞은 없으니, 중서승은 나라에 설치한 것이다. “삼가 소식을 듣건대 成都를 지키지 못하여 社稷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草芥 같은 존재로서 가만히 편치 못한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注+는 풀이니, 그 열매가 아주 작다. 草芥는 자신이 지극히 작고 지극히 천함을 비유함을 말한 것이다.
성스럽고 인자한 폐하께서는 반드시 哀悼하는 마음을 내리실 것입니다. 은 근심과 서글픈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삼가 절하면서 表文을 올립니다.”注+忡悵”은 매우 근심하여 슬픔에 젖어 멍하게 있음을 말한다. 蜀漢나라의 동맹국이니 蜀漢이 망하였는데도 나라 君臣들이 두려워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華覈를 올려 경계시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 나라가 蜀漢을 정벌할 때에 나라 사람 중에 어떤 이가 襄陽 사람 張悌에게 말하기를 “司馬氏가 정권을 얻은 이후로 큰 환난이 누차 일어났고, 백성들은 아직도 복종하지 않았는데, 지금 또다시 遠征을 하니,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注+大難屢作”은 王淩毌丘儉諸葛誕 등이 擧兵한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張悌張悌
[] 張悌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曹操가 공로가 비록 中夏를 뒤덮었다고 하나 백성들은 그의 위엄만을 두려워하고 그 덕을 가슴에 품지는 않았다. 曹丕曹叡가 계승하여 형벌은 번거로우며 부역은 가중되었고 동서로 백성들을 몰고 다녀서 편안한 세월이 없었다.
司馬懿 부자는 누차 큰 공로를 세워 번잡하고 가혹한 정무를 없애고 공평함과 은혜를 베풀었으며 謀主가 되어 일을 계획하여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였으니, 민심이 司馬氏에게 귀의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淮南 지역에서 세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심장부는 혼란하지 않았고,注+延熙 12년(249)에 王淩叛亂을 일으켰고, 18년(255)에 毌丘儉叛亂을 일으켰으며, 20년(257)에 諸葛誕이 반란을 일으켰다. 曹髦가 죽었는데도 사방에서 동요하지 아니하였다.
현인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려서 각각 마음을 다하니, 그 근본이 확고해지고, 간사한 계획은 성립되었다.
지금 蜀漢宦官들이 조정을 전횡하고 국가에 政令이 없으면서 무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은 피곤하고 병졸들은 지쳤으니, 나라가 위태로움을 이용하여 정벌하면 거의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아, 저들(사마씨)이 뜻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는 걱정거리이다.” 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비웃었는데, 이때에 와서 수긍하였다.
[] 나라에서 鍾離牧武陵太守로 삼았다.
[] 나라는 武陵五溪 夷族蜀漢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 蜀漢이 망하였으니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된다 하여 마침내 鍾離牧武陵太守로 삼았다.
이때에 나라는 이미 郭純을 파견하여 여러 夷族들을 유인하고 선동하여 酉陽으로 진격하게 하니, 내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注+酉陽縣武陵郡에 속하는데, 酉溪의 북쪽에 있다.
[] 朝吏(의 관리)들이 말하기를 “여러 夷族들이 무력에 의지하고 있으니 군대를 써서 그들을 놀라게 하여 소요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은혜롭고 믿을 수 있는 관리를 파견하여 교화를 베풀고 위로해야 합니다.”注+郡朝(郡廳 또는 郡守)이다.라고 하자,
鍾離牧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국경 밖의 적이 내침하면 백성들을 속여 유혹할 것이니, 마땅히 그들의 뿌리가 아직 깊지 않을 때 습격하여 그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불을 끌 때처럼 신속함을 귀하게 여길 상황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자기의 소속 군사들을 인솔하여 밤낮으로 길을 달려서 험한 산을 따라 거의 2천 리를 가서 악한 백성과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참수하였는데, 모두 1천여 명이었다. 郭純 등이 흩어져 도망을 치니, 五溪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 나라가 益州赦免令을 내리고, 租稅의 반을 5년 동안 면제해주었다.
[] 나라가 鄧艾太尉로 삼고 鍾會司徒로 삼았다.


역주
역주1 詔立故丞相亮廟於沔陽 : “사당을 세운 것을 기록한 것은 功臣을 追錄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功臣의 사당을 세운 것을 기록한 것이 두 번이니(이해와 唐 玄宗 天寶 4년(745)의 李靖, 李勣), 武氏의 崇恩廟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書立廟 錄功臣也 終綱目 功臣書立廟二(是年 唐玄宗天寶四載(李)[靖]勣) 武氏之崇恩不與焉]” ≪書法≫ 저본에 ‘李勣’으로 되어 있는 것을 ≪資治通鑑綱目≫ 唐 玄宗 天寶 4년(745)의 “立李靖李勣廟”에 의하여 바로잡았다.
역주2 還守劍閣 : “돌아와 劍閣을 지킨 것을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漢壽로 물러나 지킨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 蜀漢의 멸망은 姜維가 한 짓이다.[還守劒閣 何 著退屯漢壽之失也 漢之滅 姜維爲之]” ≪書法≫
역주3 軍司 : 軍司馬의 약칭으로 병사를 관장하였는데 秦漢時代에 이후에도 이어졌다. 兩漢時代에는 校尉의 속관이 되었으며, 교위가 없는 곳에서는 長이 되었다.
역주4 : ≪後漢書≫를 주석한 唐 章懷太子 李賢이다.
역주5 參相國軍事 : ≪晉書≫ 〈劉寔傳〉에는 ‘參文帝相國軍事’로 되어 있다. 參軍事는 參軍으로 약칭되는데, 後漢 말 車騎將軍의 막료로 설치되어 참모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曹操가 丞相으로 있었을 때에 軍政을 총람하게 하였다. 특히 조조가 자신의 막료 중에 參丞相軍事를 두었는데, 직임이 매우 중하였다. 이후 參相國軍事로 바뀌었는데, 相國參軍이라고도 한다. 상국참군은 본서 189쪽에도 보인다.
역주6 (門)[閣] : 저본에는 ‘門’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閣’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吳人 來援 : “‘人’이라고 기록한 것은 미천한 자들이라 여긴 것이고, ‘來援’이라고 기록한 것은 늦었다는 말이다. 이때 蜀漢은 거꾸로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이었으니, 吳나라 사람들이 진실로 환난을 구원하며 재난을 나누어 가지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당연히 장군을 보내서 군사를 이끌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여 전진하기를 마치 불을 끄며 물에 빠진 이를 건져내듯이 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 듯이 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겨우 丁奉 등에게 명하여 壽春으로 향하게 하고 沔中으로 향하게 했을 뿐이니, 이것이 과연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것이 ‘救’라고 기록하지 않고 ‘援’이라고 기록하고, 또 ‘人’이라고 기록하여 미천하게 여긴 이유이다. 비록 그러나 吳나라 사람들이 의리를 행함에 힘쓰지 않고, 자신이 행한 것이 또한 자신에게 똑같이 미쳐서 虢나라가 망하자 虞나라가 멸망하는 꼴을 당하였으니,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슬프다.[書人 微者也 書來援 緩詞也 是時 漢有倒垂之急 吳人苟有救患分災之意 則當遣將師師 鼓行而進 如救焚拯溺 猶恐弗及 今乃僅命丁奉輩 向壽春 向沔中而已 是果何益於事哉 此所以不書救而書援 而又書人以微之也 雖然吳人爲義不力 行亦自及 虢亡虞擧 可勝惜哉 吁]” ≪發明≫
역주8 九錫을 받았다 : 九錫을 내린 것은 曹髦 甘露 3년(258)의 일인데 5년이 지난 이제야 받아들인 것이다.
역주9 上計掾 : 上計는 지방 관청에서 호구, 조세, 소송 등을 장부로 작성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일이며, 上計掾은 이를 담당하는 관리이다.
역주10 (匱)[陿] : 저본에는 ‘匱’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陿’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鄧艾至成都……漢亡 : “‘帝出降’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社稷을 위하여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劉諶에게는 작위를 기록하고 ‘死之’라고 기록하였으며, 傅僉과 諸葛瞻 父子에게는 관직을 기록하고 ‘死之’라고 기록하였다. 나라가 멸망했을 때 ‘死之’라고 기록하는 것은 멸망한 나라에 대한 훌륭한 말이니, 나라가 비록 멸망했어도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死之’라고 기록한 것이 54번이니(孺子 嬰 居攝 원년(6)에 자세하다.) 그런데 나라가 멸망하여 ‘死之’라고 기록한 것은 三國의 蜀漢의 멸망에 傳僉, 諸葛瞻, 北地王을 기록하고, 吳나라의 멸망에 張悌를 기록하고, 涼의 멸망에 掌據를 기록하였으니, 모두 멸망한 나라에 대한 훌륭한 말이다. 周나라와 秦나라의 멸망에 ‘亡’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漢亡’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昭烈帝를 高祖와 光武帝에 이었기 때문이다. 獻帝가 〈魏나라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漢나라는 아직 멸망하지 않은 것이고, 여기에 이르러서 멸망한 것이니 특별히 들어 기록하여 드러낸 것이다.[書帝出降 何 不死社稷也 故諶書爵書死之 傅僉諸葛瞻父子書官書死之 凡國滅書死之 亡國之善辭也 以爲國雖亡 不爲無人焉耳 終綱目 書死之五十四(詳孺子嬰居攝元年) 而國滅書死之者 三國漢之亡也 書傳僉諸葛瞻北地王 吳之亡也 書張悌 涼之亡也書掌據 皆亡國之善辭也 周秦亡 不書亡 此其書漢亡 何 所以紹昭烈於高光也 獻帝之廢 漢未亡也 至此而亡矣 特揭書著之]” ≪書法≫
“姜維는 자신이 장군과 재상을 도맡고서 군사를 잃고 변경을 위급하게 하였으며, 黃皓는 총애가 한 시대에 으뜸이면서 백성을 피폐시키고 나라를 그르쳐서 漢나라의 운명이 전복되자 구차하게 살아 구질구질하게 죽음에서 벗어났다. 절개를 바쳐 죽은 신하는 傅僉, 諸葛瞻 父子, 北地王 劉諶뿐이었다. 이때 鄧艾가 단독의 군대로 깊이 들어갔는데, 만일 蜀漢의 임금과 신하들이 힘을 다하여 죽도록 지켰다면 반드시 갑자기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後主의 용렬한 재주로는 이미 임금이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하는 의리를 알지 못했고, 譙周 등 여러 사람들은 또 경솔하게 나라를 역적에게 내주었으니, 유심의 사직을 위해 함께 죽자는 말과 昭烈帝의 사당에서 크게 통곡하고 죽은 절개와 비교해보면 개돼지만도 못한 것이다. 아! 유심은 비록 이미 죽었으나 그 말이 지금까지 늠름하여 마치 살아 있는 기운이 있는 듯하다. 後主 劉禪은 이와 같은 아들을 두고서 그 말을 따라 쓰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그의 아버지에게 부끄럽고 아래로는 그의 아들에게 부끄럽다고 하겠다. 부첨과 제갈첨은 관직을 기록하고, 유심은 皇子라고 기록하고, 그 아들까지도 여전히 모두 ‘死之’라고 기록하였으니, 매우 포상하고 지극하게 허여해주어 萬代에 이르도록 절개를 위해 죽은 臣子들의 권면이 된다. 그리고 등애에게 ‘至成都’라고 기록하자마자 바로 ‘帝出降’이라고 기록한 것은 後主 劉禪이 죽음으로 지키지 못한 죄를 꾸짖은 것이고, ‘漢亡’이라고 기록한 것은 蜀漢이 스스로 멸망한 것이고 등애의 무리가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書法의 깊은 뜻이니, 아! 은미하다.[姜維身都將相 喪師蹙境 黃皓寵冠一時 殄民誤國 漢祚顚覆 偷生苟免 至於死節之臣 乃在傅僉諸葛瞻父子及北地王諶而已 是時鄧艾孤軍深入 使漢之君臣 能竭力死守 未必遽爾滅亡 後主庸才 旣不知國君死社稷之義 譙周諸人 又輕以其國予賊 其視諶同死社稷之言 與大哭於昭烈之廟而死之節 曾犬彘之不若 嗚呼 諶雖已死 其言至今凜凜 猶有生氣 帝禪有子如此 而不能聽用其言 可謂上愧乃父 下愧乃子矣 傅葛書爵 諶書皇子 及其子尙皆書死之 所以深褒亟予 爲萬世臣子死節者之勸也 若夫鄧艾方書至成都, 卽書帝出降 所以責帝禪不能死守之罪 書漢亡 所以見漢之自亡 而非艾輩所能滅之也 此皆書法之深旨也 嗚呼微矣]” ≪發明≫
역주12 劉諶 : 蜀漢 後主 劉禪의 다섯째 아들이다.
역주13 손을……싣고 : 面縛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손을 뒤로 묶은 것이고, 輿櫬은 관을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항복의 표시이다. 蜀漢 劉備는 後漢 獻帝 建安 19년(214)에 蜀을 얻어 魏 文帝 黃初 2년(221)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문제 황초 4년(223)에 죽었고 그 아들 劉禪이 즉위하였으며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는데, 이 기사는 ≪資治通鑑≫ 권70에 실려 있다. 촉한의 멸망은 유선이 즉위한 지 40년 만이고, 그의 나이가 57세였으며, 蜀漢이 칭제한 후 43년 만이다.
역주14 鄧禹의……承制하여 : 承制는 大臣이 지방에서 특별히 황제 이름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鄧禹는 後漢 光武帝의 開國功臣인데, 광무제의 이름으로 隴西의 군벌 隗囂를 西州大將軍을 임명하였다.(≪資治通鑑≫ 後漢 光武帝 建武 원년(25))
역주15 (主)[王] : 저본에는 ‘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魏赦益州 復(복)半租五年 : “魏나라가 잘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멸망한 나라에 그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준 것은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모두 두 번이다.(이해(263)와 隋 文帝 開皇 9년(589)에 陳나라 지역에 10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주었다.)[書善魏也 滅國復其民 終綱目 凡再書(是年 隋文帝開皇九年 復陳境十年)]” ≪書法≫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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