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悌曰 不然하다 曹操雖功蓋中夏나 民畏其威而不懐其德也요 丕叡承之하여 刑繁役重하고 東西驅馳하여 無有寧歲이러니
司馬懿父子가 累有大功하여 除其煩苛而布其平惠하고 爲之謀主而救其疾苦하니 民心歸之 亦已久矣라
故
로 淮南
이 三叛
하되 腹心
이 不擾
注+延熙十二年王淩叛, 十八年毌丘儉叛, 二十年諸葛誕叛.하고 曹髦之死
에 四方不動
하고
任賢使能하여 各盡其心하니 其本根固矣며 姦計立矣라
今蜀은 閹宦專朝하고 國無政令而玩戎黷武하여 民勞卒敝하니 因危而伐이면 殆無不克이니
噫라 彼之得志는 我之憂也라하니 吳人笑其言이러니 至是乃服하다
目
[
目]
鄧艾가 진격해
陰平에 도착하여
諸葛緖와 함께
江油에서
成都로 나아가려 하는데,
注+江油는 본래 漢나라의 廣漢 剛氐道 지역으로 후에 이어서 縣을 설치해서 蜀漢의 변방 요새가 되었다. 三國時代에 魏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고 江油郡을 설치했다. 제갈서는 서쪽으로 가는 것이 본래
詔書의 뜻이 아니라고 여겨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鍾會와 합류하였다.
종회는 군권을 독차지하고자 하여 비밀리에 아뢰어 제갈서가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않는다고 하니, 제갈서를 檻車에 실어 소환하고, 그의 군사들은 모두 종회에게 소속시켰다.
姜維가 군영을 배치해 험준한 곳을 지키니, 종회가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험하고 머니, 군량이 부족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鄧艾가 上言하기를 “적은 이미 사기가 꺾였으니 마땅히 이를 틈타 공격해야 합니다. 만약에 陰平에서 샛길을 경유해서 蜀漢의 德陽亭을 거쳐 涪縣으로 나아가서 劍閣에서 서쪽으로 100리쯤 되는 곳으로 진출하면 成都까지 거리가 300여 리 정도입니다.
奇兵이 그들의 심장부를 공격하면 〈
蜀漢의〉
劍閣을 지키는 군대가 반드시 돌아와서
涪縣으로 달려갈 것이니, 종회의 군대가 길을 나란히 하여 〈검각을 넘어〉 전진할 수 있을 것이고, 만일 검각의 군대가 부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부현에서 대응할 군대가 적을 것입니다.”
注+살펴보건대, 前漢 때에는 德陽縣이 없었다. ≪後漢書≫ 〈郡國志〉에 “廣漢郡에 처음 德陽縣을 두었으니, 漢나라의 옛 停으로 인하여 縣을 설치한 것이다.” 하였다. 蜀漢 때에 廣漢을 나누어 梓潼郡을 설치한 후로 劍閣縣은 梓潼에 속하였고 덕양현은 廣漢에 속하였다. ≪續漢志≫에 “德陽縣에 劍閣에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 姜維가 劍閣을 지키면서 鍾會에게 대항하고, 鄧艾는 德陽亭에서 涪縣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니, 이때 두 현으로 나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덕양정은 역시 이때 덕양현의 治所가 아니고 예전 前漢 때의 덕양정의 옛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음평에서부터 인적이 없는 땅 700여 리를 행군하여 산을 깎아 길을 통하며
橋閣(
棧道)을 만들었는데, 산은 높고 골짜기가 깊고 또 군량 운반도 장차 끊기려 하여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注+瀕은 만난다는 뜻이다.
등애가 털 담요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험한 곳을 굴러 내려가고 장병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벼랑을 올라서 물고기를 꿴 듯이 일렬로 전진하여
注+推(밀다)는 通回의 切이니, 〈“推轉而下”는〉 밀어 굴리고 밀어 떨어져서 굴러가는 것이다. “魚貫而進”은 산애가 험준하고 좁아서 한 줄로 서로 이어서 나아가니 마치 물고기를 꿰어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선두 부대가
江油에 도착하니,
蜀漢의 수비 장수인
馬邈이 항복하였다.
鄧艾가 산에 길을 뚫어 西川을 습격하다
目
[
目] 황제(
劉禪)는 곧바로 사신을 파견하여
玉璽와 인끈을 받들고 가서
鄧艾에게 항복하게 하니,
北地王 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注+劉諶은 景耀 2년에 北地王에 封해졌다. “만약에 계책이 다하고 힘이 모자라서 재앙과 실패가 닥치려 하면
마땅히 부자와 군신이 성곽을 등지고 한 번 싸워 社稷을 위하여 같이 죽어서 먼저 先帝(昭烈帝)를 뵙는 것이 옳으니, 어찌 항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따르지 않자, 유심은 소열제의 사당에서 통곡하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나서 자살했다.
황제는 姜維에게 별도로 칙령을 내려서 鍾會에게 항복하도록 하고 또한 士民의 名籍簿를 등애에게 보내니,
戶數는 28만 가구이고 인구는 94만 명이었으며, 갑사는 10만 2천 명이었고 관리는 4만 명이었다.
注+簿는 문서(장부)이다.
鄧艾가
成都城 북쪽에 도착하자 황제가 여러 신하들을 인솔하고
군문에 나아갔다.
注+櫬는 棺이니, “輿櫬”은 장차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이다.
등애가 부절을 가지고 결박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인견하고 장병들에게 엄명하여 노략질하는 일이 없게 하고 곧바로
漢나라(
蜀漢) 황제 이하 관리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注+鄧禹가 承制하여 隗囂에게 제수한 故事에 의거한 것이다. ≪資治通鑑≫에 “漢王 劉禪은 行驃騎將軍을 삼고, 太子는 奉車都尉로 삼고, 여러 왕들은 駙馬都尉로 삼고 蜀漢의 여러 관리들은 각각 지위의 고하에 따라 魏나라 王朝의 관원에 임명하고 혹은 鄧艾의 官屬을 겸직하게 하였다.”라고 했다.
黃皓를 잡아서 장차 죽이려고 하였는데, 황호가 등애의 측근에게 뇌물을 주어서 죽음을 면하였다. 강유 등과 여러 郡縣의 요새를 수비하던 자들은 황제(유선)의 칙령을 받고서 무기를 내려놓고서 종회에게 가서 항복하니,
장병들은 모두 화가 나서 칼을 뽑아 돌을 쳤다.
注+“圍守”는 바로 魏延이 설치한 漢中의 여러 요새의 수비 병사이다. 종회는 강유 등을 후하게 대해주고 그들의
印綬‧
符節‧
車蓋를 모두 임시로 돌려주었다.
目
[目] 張悌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曹操가 공로가 비록 中夏를 뒤덮었다고 하나 백성들은 그의 위엄만을 두려워하고 그 덕을 가슴에 품지는 않았다. 曹丕와 曹叡가 계승하여 형벌은 번거로우며 부역은 가중되었고 동서로 백성들을 몰고 다녀서 편안한 세월이 없었다.
司馬懿 부자는 누차 큰 공로를 세워 번잡하고 가혹한 정무를 없애고 공평함과 은혜를 베풀었으며 謀主가 되어 일을 계획하여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였으니, 민심이 司馬氏에게 귀의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淮南 지역에서 세 번이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심장부는 혼란하지 않았고,
注+延熙 12년(249)에 王淩이 叛亂을 일으켰고, 18년(255)에 毌丘儉이 叛亂을 일으켰으며, 20년(257)에 諸葛誕이 반란을 일으켰다. 曹髦가 죽었는데도 사방에서 동요하지 아니하였다.
현인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려서 각각 마음을 다하니, 그 근본이 확고해지고, 간사한 계획은 성립되었다.
지금 蜀漢은 宦官들이 조정을 전횡하고 국가에 政令이 없으면서 무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은 피곤하고 병졸들은 지쳤으니, 魏나라가 위태로움을 이용하여 정벌하면 거의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아, 저들(사마씨)이 뜻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는 걱정거리이다.” 吳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비웃었는데, 이때에 와서 수긍하였다.
目
[
目]
朝吏(
郡의 관리)들이 말하기를 “여러
夷族들이 무력에 의지하고 있으니 군대를 써서 그들을 놀라게 하여 소요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은혜롭고 믿을 수 있는 관리를 파견하여 교화를 베풀고 위로해야 합니다.”
注+朝는 郡朝(郡廳 또는 郡守)이다.라고 하자,
鍾離牧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국경 밖의 적이 내침하면 백성들을 속여 유혹할 것이니, 마땅히 그들의 뿌리가 아직 깊지 않을 때 습격하여 그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불을 끌 때처럼 신속함을 귀하게 여길 상황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자기의 소속 군사들을 인솔하여 밤낮으로 길을 달려서 험한 산을 따라 거의 2천 리를 가서 악한 백성과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참수하였는데, 모두 1천여 명이었다. 郭純 등이 흩어져 도망을 치니, 五溪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