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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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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齊建武二年이요 魏太和十九年이라
齊遣將軍王廣之蕭坦之沈文季督諸軍以拒魏러니 魏徐州刺史拓跋衍攻鍾離어늘 齊徐州刺史蕭惠休拒守하고 間出襲擊破之注+惠休, 惠明之弟也.하다
魏大將軍劉昶將軍王肅攻義陽이어늘 齊司州刺史蕭誕拒之러니 肅屢破誕兵하다
昶性褊躁하여 御軍嚴暴로되 人莫敢言注+褊躁, 謂褊狹急躁.이어늘 參軍陽固苦諫하니 昶怒하여 欲斬之라가 使當攻道어늘
固志意閑雅하고 臨敵勇決하니 昶始奇之注+攻道, 攻城之道, 矢石之所集也.하더라
二月 魏主至壽陽하니 衆號三十萬이라 道遇甚雨하여 命去蓋하고 見軍士病者 親撫慰之하다 遣使呼城中人한대 齊豫州刺史豐城公遙昌使參軍崔慶遠出問師故注+遙昌, 遙欣之弟也.어늘
魏主曰 齊主何故廢立 慶遠曰 廢昏立明 古今非一이니 未審何疑
魏主曰 卿主若不忘忠義인댄 何以不立近親하고 而自取之乎 慶遠曰 霍光亦捨近親而立宣帝하니 唯其賢也
魏主曰 霍光何以不自立 慶遠曰 非其類也이라 主上正可比宣帝耳 安可比光이리오 且若然者 武王伐紂而不立微子하니 亦爲貪天下乎 魏主大笑하고 賜慶遠酒殽衣服而遣之하다
魏主循淮而東하니 民皆安堵 租運屬路러라 遂至鍾離注+民, 謂淮北之民어늘 齊遣將軍崔慧景救之러니
劉昶王肅衆號二十萬하고 塹柵三重하여 并力攻義陽하니 王廣之不敢進하다 黄門侍郎蕭衍間道夜發하여 徑上賢首山하니 魏人不敢逼注+水經 “溮水南出大潰山北, 逕賢首山西, 又北出, 東南屈, .”이러니
黎明 城中望見援軍하고 遣長史王伯瑜出攻魏柵하여 因風縱火하고 衍等自外擊之하니 魏解圍去어늘 追擊破之注+黎, 棃字通. 棃, 黑色也. 黑與明相雜, 欲曉未曉之交也. 猶曰昧爽也. 昧, 暗也. 爽, 明也. 亦明暗相雜也. 遲明即未及乎明也. 厥明․質明則已曉也.하다
魏主欲南臨江이러니 會司徒馮誕卒이라 乃遣使臨江하여 數齊主罪惡而還하다 魏主欲築城置戍於淮南하고 賜相州刺史高閭璽書問之한대 閭表對曰
昔世祖以回山倒海之威 歩騎數十萬 南臨瓜歩하니 諸郡盡降이어늘 而盱眙小城 攻之不克이러니
班師之日 兵不戍一城하고 土不闢一廛注+廛, 一畝半, 一家之居地.하니 夫豈無人이리오 以爲大鎭未平하니 不可守小故也注+宋時淮上以壽陽․廣陵爲大鎭.러라
夫壅水者 先塞其原하고 伐木者先斷其本하나니 本原尙在 而攻其末流하면 終無益也
壽陽盱眙淮陰 淮南之本原也注+壽陽․盱眙․淮陰, 皆淮津之要地, 齊皆以重兵守之, 故云本原.이니 三鎭不克其一하여 而留守孤城하여 少置兵則不足以自固 多置兵則糧運難通이라
大軍旣還하면 士心孤怯하고 夏水盛漲하면 救援甚難이라 以新擊舊하며 以勞禦逸하니 若果如此이면 必爲敵擒注+久於屯戍, 魏師已老, 齊以生兵攻之, 是之謂以新擊舊. 魏以孤軍守孤城, 勞於備禦, 齊師迭出而攻之, 士有餘力, 是之謂以勞禦逸.하리라
天時向熱하고 雨水方降하니 願陛下踵世祖之成規하여 旋轅洛邑하여 蓄力觀釁하시고 布德行化하여 中國旣和하면 遠人自服矣리이다
尙書令陸叡上表하여 以爲長江浩蕩하니 彼之巨防이요 南土欝蒸하여 夏多疾病하고 遷鼎草創하여 庶事甫爾하니 兵徭竝擧 聖王所難이라
驅罷弊之兵하여 討堅城之虜 將何以取勝乎注+罷讀曰疲. 願早還洛邑하여 使根本深固 然後命將出師하시면 何憂不服이리오 魏主從之하다
齊人據渚하여 邀斷津路어늘 魏軍主奚康生 縛筏積柴하여 因風縱火하고 依煙直進하여 飛刀亂斫하니 齊兵遂潰하다
魏主使前將軍楊播 將步卒三千騎五百爲殿이러니 時春水方長이라 齊兵大至하여 戰艦塞川注+長, 知兩切.이어늘
播結陳於南岸以禦之하고 諸軍盡濟 齊兵四集圍播어늘 播爲圓陳以禦之하고 身自搏戰하여 所殺甚衆이러라
相拒再宿 軍中食盡하고 圍兵愈急한대 魏主在北岸하여 以水盛不能救러니 旣而水減이어늘 播引精騎歴齊艦大呼曰 我今欲渡하니 能戰者來하라하고 遂擁衆而濟하다 樁之兄也
時魏使者盧昶等 猶在建康注+昶, 淵之弟也. 上年使於齊.이러니 齊人飼以蒸豆한대 昶懼食之注+飼以蒸豆, 馬牛待之.하고 謁者張思寧 辭氣不屈하여 死於館下러니
及還 魏主讓昶曰 人誰不死완대 何至自同牛馬하여 屈身辱國이리오 縱不遠慙蘇武 獨不近愧思寧乎아하고 乃黜爲民하다
魏太師馮熙卒하다
熙卒于平城하니 平陽公丕 不樂南遷이라 與陸叡表請魏主還臨熙葬注+丕․叡, 時留守平城.이어늘
魏主曰 開闢以來 安有天子遠奔舅喪者乎 今經始洛邑하니 豈宜妄相誘引하여 陷君不義리오 付法官貶之라하고 仍迎熙柩하여 葬洛陽注+法官, 謂御史.하다
夏四月 魏圍齊南鄭이라가 不克而還하다
魏主之在鍾離也 梁州刺史拓跋英請以州兵會擊漢中이어늘 許之注+魏梁州刺史治仇池, 齊梁州刺史治南鄭.하니 齊梁州刺史蕭懿遣部將尹紹祖等將兵據險하여 立五柵以拒之注+據蕭子顯齊書 “時據角弩谷․白馬․沮水立五柵.”어늘
英曰 彼帥賤하여 莫相統壹하니 我選精卒并攻一營하면 彼必不相救하리니 若克一營이면 四營皆走矣리라하고
乃急攻一營하여 拔之하니 四營俱潰어늘 乗勝長驅하여 進逼南鄭한대 懿遣其將姜脩擊英이어늘 英掩擊하여 盡獲之하다
將還 齊軍繼至하니 將士已疲 大懼欲走하다 英故緩轡徐行하며 神色自若하고 登高望敵하여 東西指麾하여 狀若處分하고 然後整列而前하니
齊軍疑有伏하여 遷延引退어늘 英追擊破之하고 遂圍南鄭하여 禁將士毋得侵暴하니 遠近悅附하여 爭供租運하니
城中恟懼어늘 參軍庾域封題空倉數十하여 指示將士曰 此粟皆滿하니 足支二年이라 但努力堅守하라 衆心乃安이러니
會魏主召英還이어늘 英使老弱先行하고 自將精兵爲後拒하고 遣使與懿别注+殿軍後以拒追兵曰後拒.한대 懿以爲詐어늘 英去二日 乃遣將追之어늘
英下馬與戰하니 懿兵不敢逼而反하다 英入斜谷 會天大雨 士卒截竹貯米하고 執炬火於馬上炊之러니
先是 懿遣人誘説仇池諸氐하여 使起兵斷英運道及歸路하다 英勒兵奮擊하여 且戰且前하여
矢中英頰하되 卒全軍還仇池하여 討叛氐하여 平之하다 楨之子 衍之兄也
英之攻南鄭也 魏主詔雍涇岐州하여 發兵六千人戍南鄭호되 俟克城則遣之注+魏雍州治長安, 領京兆․馮翊․扶風․咸陽․北地等郡. 太和中, 置涇州, 治臨涇城, 領安定․隴東․新平․平涼․平原等郡. 十一年, 置岐州, 治雍城鎭, 領平秦․武功․武都郡.어늘 李沖諫曰
秦川險阨하여 地接羌夷하니 西師出後 氐胡叛逆注+通鑑, 西師上有自字.하여 運糧擐甲 迄兹未已
今復豫差戍卒하여 懸擬山外注+漢中之地在關中南山之南, 故曰山外.하니 脫攻不克이면 徒動民情이요 連結胡夷 事或難測이라 輒依旨密下刺史하여 待克鄭城 然後差遣注+鄭城, 謂南鄭城.하다
然西道險阨하여 單徑千里注+謂褒․斜之道也. 今欲深戍絶界之外하여 孤據群賊之中하니 敵攻不可猝援이요 食盡不可運糧이라
古人有言호되 雖鞭之長이나 不及馬腹注+左傳宣十五年文註 “言非所擊.”이라하니 南鄭於國 實馬腹也 今鍾離壽陽密邇未拔하고 赭城新野跬歩不降注+赭城, 卽赭陽城也.하니
東道旣未可以近力守커늘 西藩寧可以遠兵固注+李沖, 蓋謂淮․漢之地爲東道, 謂南鄭爲西藩. 若果欲置者인댄 臣恐終以資敵也일까하노라 魏主從之하다
魏主如魯城하여 親祠孔子하고 拜孔氏四人顔氏二人官하고 仍選諸孔宗子一人하여 封崇聖侯하여 奉孔子祀하고 命修其墓하고 更建碑銘注+大宗之子爲宗子.하다
將如碻磝할새 命謁者僕射成淹具舟楫하여 欲自泗入河하여 泝流還洛이어늘 淹諫以河流悍猛하니 非萬乘所宜乘이라한대
魏主曰 我以平城無漕運之路 故京邑民貧이라 今遷洛陽 欲通四方之運호되 而民猶憚河流之險이라 故朕有此行하니 所以開百姓之心也니라
魏攻齊赭陽이어늘 齊擊敗之하다
魏城陽王鸞等攻赭陽하여 圍守百餘日注+鸞, 景穆之孫也.이라 諸將欲不戰以疲之호되 李佐獨晝夜攻擊하여 士卒死者甚衆注+佐, 寶之子也.이라
齊遣右衛率垣歴生救之注+歷生, 榮祖之從弟也.하니 諸將欲退호되 佐獨逆戰而敗어늘 歴生追擊하여 大破之하니
魏主降封鸞爲定襄縣王하고 削戸五百하니 佐削官爵하고 徙瀛州注+魏太和十一年, 分定州河間․高陽, 冀州章武․浮陽, 置瀛州, 治趙都軍城.하다
五月 魏廣川王諧卒하다
諧卒 魏主曰 古者大臣之喪 有三臨之禮러니 魏晉以來 王公之喪 哭於東堂하니
自今諸王之喪 期親三臨하고 大功再臨하고 小功緦麻一臨하고 罷東堂之哭하라 廣川王於朕 大功也니라 將大斂 素服深衣往哭之注+諧父, 廣川王略, 顯祖之弟. 諧於魏主, 從兄弟也, 其服大功.하다
魏主至洛陽하다
魏主欲變北俗하여 謂群臣曰 卿等 欲朕遠追商周 爲欲不及漢晉邪 咸陽王禧對曰 群臣願陛下度越前王耳니이다
魏主曰 然則當變風易俗 當因循守故邪 對曰 願聖政日新하노이다
魏主曰 爲止於一身 爲欲傳之子孫邪 對曰 願傳之百世하노이다
魏主曰 然則必當改作이니 卿等不得違也니라 對曰 上令下從이니 其誰敢違이리잇고
魏主曰 夫名不正하고 言不順이면 則禮樂不可興이니라 於是下詔하여 斷諸北語하고 一從正音호되 違者免官注+正音, 華言也.하라
又詔求遺書한대 祕閣所無 而有益於時用者 加以優賞注+漢時書府, 在外則有太常․太史․博士掌之, 內則有延閣․廣內․石渠之藏. 後漢則藏之東觀, 晉有中外三閤經書. 陸機謝表云 “身登三閣.” 謂爲祕書郞掌中外三閣祕書也, 此祕閣之名所由始.하고 又詔改用長尺大斗한대 其法依漢志爲之注+漢律曆志 “以子穀秬黍中者, 一黍之廣, 度之九十分, 黃鍾之長. 一爲一分, 十分爲寸, 十寸爲尺. 又以子穀秬黍中者千有二百實其龠, 十龠爲合, 十合爲升, 十升爲斗.”하다
齊殺其領軍蕭諶及西陽王子明等하다
齊主之廢欝林王也 許蕭諶以揚州러니 旣而除南徐州刺史한대 諶恃功干政하여 所欲選用 輒命尙書申論하니
齊主聞而忌之한대 以其弟誕弟誄方將兵拒魏 隠忍不發이러니 至是殺之하고 幷其諸弟 及西陽王子明南海王子罕邵陵王子貞注+三王皆世祖子.하다
秋八月 하다
凡十五萬人이러라
魏立國子太學四門小學注+四門學始此.하다
◑魏以薛聰爲直閤將軍하다
魏主遊華林園하여 觀故景陽山注+華林園及景陽山, 皆魏明帝所築.할새 侍郎郭祚請復修之어늘 魏主曰 魏明帝已失之於前하니 朕豈可襲之於後乎
魏主好讀書하여 手不釋卷하고 又善屬文하여 詔策皆自爲之하고 好賢樂善하여 情如飢渇하고
所與遊接 常寄以布素之意注+言寄以布衣雅素相與之意.하니 如李沖李彪高閭王肅之徒皆以文雅見親하여 貴顯用事하니 制禮作樂 欝然可觀하여 有太平之風焉이러라
治書侍御史薛聰 彈劾 不避彊禦注+聰, 辯之曾孫也. 魏主或欲寛貸라도 聰輒爭之하니
魏主毎曰 朕見聰 不能不憚이어든 況諸人乎 自是貴戚斂手러라
累遷直閤將軍하여 魏主外以德器遇之하고 内以心膂爲寄하여 親衛禁兵 委聰管領하니 時政得失 動輒匡諫而厚重沈密하여 外莫窺其際러라 毎欲進以名位 輒苦讓不受하니
魏主亦雅相體悉이라 謂之曰 卿天爵自高이니 固非人爵之所能榮也라하더라
九月 魏六宮文武遷于洛陽注+六宮, 后妃․夫人․嬪御也. 文武, 內外文武百官也.하다
◑魏以高陽王雍爲相州刺史하다
魏主戒雍曰 作牧亦易亦難하니 其身正이면 不令而行이니 所以易 其身不正이면 雖令不從이니 所以難이니라
冬十月 魏詔州牧考其官屬得失하여 品第以聞하다
◑十一月 魏主祀圜丘하다
魏主引諸儒議圜丘禮할새 李彪建言호되 魯人將有事于上帝 必先有事于泮宮하니 請前一日告廟라한대 從之하다
十二月 魏班品令하고 賜冠服注+賜冠服以易胡服.하다
魏主見群臣於光極堂하고 宣下品令注+品令, 九品之令也.하다 光祿勲于烈子登 引例求遷官이어늘
烈表曰 聖明之朝 理宜廉讓하여 而登引人求進하니 是臣素無教訓이라 乞行黜落注+引人, 謂引他人之例也. 黜落, 謂黜官․落職也.하노이다
魏主曰 此乃有識之言이니 不謂烈能辦此라하고 乃引見登하고 謂曰 以卿父有謙遜之美直士之風하여 進卿校尉라하다
魏主謂群臣曰 國家從來有一事可歎하니 臣下莫肯公言得失是也 夫人君 患不能納諫이요 人臣 患不能盡忠이니
自今朕擧一人 如有不可어든 卿等直言其失하고 若有才能而朕所不識이어든 卿等亦當擧之 得人有賞이요 不言有罪리라
注+此晉諸陵, 謂在江南者.하다
先是 魏人未嘗用錢이러니 魏主始命鑄之하니 是歳 鼓鑄粗備 詔公私用之注+當鑄冶之時, 扇熾其火, 謂之鼓鑄.하다


나라 고종高宗 명제明帝 소란蕭鸞 건무建武 2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19년이다.
[] 봄 2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종리鍾離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강가에서 제주齊主(소란蕭鸞)의 를 조목조목 열거하고 돌아왔다.
[] 나라는 장군將軍 왕광지王廣之소탄지蕭坦之심문계沈文季를 보내서 여러 군대를 감독시켜서 북위北魏를 막았다. 북위北魏 서주자사徐州刺史 탁발연拓跋衍종리鍾離를 공격하였는데, 나라 서주자사徐州刺史 소혜휴蕭惠休注+① 蕭惠休는 蕭惠明의 동생이다. 막아 지키고 몰래 나가서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북위北魏 대장군大將軍 유창劉昶장군將軍 왕숙王肅의양義陽을 공격하였는데, 나라 사주자사司州刺史 소탄蕭誕이 막았다. 왕숙이 누차 소탄지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유창은 성품이 편협하고 조급해서注+② “褊躁”는 편협하고 조급한 것을 말한다. 군대를 다스리는 데에 엄하고 포학하였지만 사람들 중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참군參軍 양고陽固가 굳이 애써서 간언을 하였다. 유창이 하여 그를 참수하려 하다가 그에게 성의 도로를 공격하는 것을注+③ “攻道”는 城의 길을 공격하는 것이니, 화살과 돌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다. 맡도록 하였다.
양고의 마음이 한아閑雅하고 적군을 만나서는 용감하고 과감하니, 유창이 비로소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 2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수양壽陽에 이르러 군대가 30이라고 일컬었다. 길에서 심한 비를 만나 위주魏主가 자신의 산개傘蓋를 치우라고 명령하고 군사들 중에 병든 자를 보면 직접 어루만져 위로하였다. 위주魏主가 사람을 보내 수양성壽陽城 내부의 제인齊人을 불러오게 하자 나라 예주자사豫州刺史 풍성공豐城公 소요창蕭遙昌注+① 蕭遙昌은 蕭遙欣의 동생이다. 참군參軍 최경원崔慶遠을 시켜서 군사들이 온 이유를 따졌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제주齊主는 무슨 이유로 군주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는가?”라고 하니, 최경원崔慶遠이 말하기를 “못난 군주를 폐위하고 밝은 군주를 세우는 일은 고금에 한두 번이 아니니, 무엇을 의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의 임금이 만약 충의忠義을 잊지 않았다면 어찌 이전 황제의 근친近親을 세우지 않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취하였는가?”라고 하니, 최경원이 말하기를 “곽광霍光 무제武帝근친近親을 버리고 선제宣帝를 세웠으니, 오직 현명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곽광은 어찌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최경원이 말하기를 “곽광은 황제의 친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상主上은 바로 나라 선제宣帝에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니, 어찌 곽광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만약 그렇다면 무왕武王주왕紂王을 정벌하고서 〈주왕의 서형庶兄미자微子를 세우지 않았으니, 또한 천하天下를 탐낸 것입니까.”라고 하니, 위주魏主가 크게 웃고 최경원에게 술․안주․의복을 내려주어서 그를 보냈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회하淮河를 따라서 동쪽으로 나아가니, 백성들이注+① 民은 淮北의 백성을 말한다. 모두 안도하고 양식을 운반하여 바치는 행렬이 길에 이어졌다. 마침내 종리鍾離에 이르렀는데, 나라가 장군將軍 최혜경崔慧景을 보내 구원하였다.
유창劉昶왕숙王肅은 군사가 20이라 일컫고 참호와 목책을 3중으로 만들어 병력을 합해 의양義陽을 공격하니, 왕광지王廣之가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황문시랑黄門侍郎 소연蕭衍이 사잇길로 밤에 출발하여 곧장 현수산賢首山注+② ≪水經註≫에 “溮水는 남쪽으로 가서 大潰山 북쪽에서 발원하여, 賢首山 서쪽을 경유하고, 또 북쪽으로 나와서 동남쪽으로 굽이돌아 仁順城 남쪽을 경유한다. 仁順城은 옛 義陽郡의 치소이다.” 하였다. 올라가니, 북위北魏 군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동이 트는 새벽에注+③ 黎는 棃字와 통용하니, 棃는 黑色이다. 어둠과 밝음이 서로 섞여서 환함과 어둠이 교차한다. 昧爽이라는 말과 같으니, 昧는 어둠이고, 爽은 밝음으로, 또한 밝음과 어둠이 서로 섞인 것이다. 遲明(새벽) 곧 밝기 전이고, 厥明(해돋이 전)과 質明(동틀 녘)은 이미 환하다. 의양성 안에서 멀리 원군을 바라보고 장사長史 왕백유王伯瑜를 보내 나가서 북위北魏의 목책을 공격하여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고 소연 등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밖에서 공격하자, 북위北魏가 포위를 풀고 떠나니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남쪽으로 장강長江에 가려 하였는데 마침 사도司徒 풍탄馮誕하였다. 마침내 사람을 보내 장강長江으로 가게 하여 제주齊主(소란蕭鸞)의 죄악罪惡을 꾸짖고 돌아오게 하였다. 위주魏主회남淮南을 쌓아 수비병을 두어 지키게 하려고 상주자사相州刺史 고려高閭에게 새서璽書를 내려서 물으니, 고려가 표문表文을 올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세조世祖(태무제太武帝)께서는 산을 돌려놓고 바다를 뒤집을 위세로 보병歩兵기병騎兵 수십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과보瓜歩에 도착하니, 나라 여러 이 전부 항복하였는데, 작은 성 우이盱眙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회군하는 날에 병사들이 하나의 성도 수비하지 못하고 땅을 1注+① 廛은 1畝 半이니, 한 집이 사는 땅이다. 개척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겠습니까. 대진大鎭注+② 宋나라 때에 淮河 가에 壽陽․廣陵으로 大鎭을 만들었다. 평안하지 못하면 작은 지방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을 막는 자는 먼저 그 근원을 막고, 나무를 베는 자는 먼저 그 뿌리를 자르는 법이니, 뿌리와 근원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말류末流를 공격하면 끝내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양壽陽우이盱眙회음淮陰회남淮南의 뿌리이자 근원이니注+③ 壽陽․盱眙․淮陰이 모두 淮河 나루터의 요충지이고, 齊나라는 모두 막강한 군대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므로 本原이라고 한 것이다., 3 중에 하나의 을 함락시키지 못하여 외로운 성에 남아 지키면서 적은 수의 병사를 둔다면 스스로 굳게 지킬 수 없고, 많은 병사를 둔다면 군량을 운반하여 통과하기 어렵습니다.
대군大軍이 이미 돌아가고 나면 군사들의 마음이 외롭고 두려움에 떨고, 여름에 물이 크게 불어나면 구원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나라의 새로운 군대로 우리의 오래된 군대를 공격하면 피로함으로 편안함을 막는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반드시 적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注+④ 주둔해 수비하는 기간이 오래되어 北魏의 군사가 이미 피로해졌고, 齊나라는 生兵(처음 전쟁에 투입되는 부대)으로 공격하니, 이를 새로운 군대로 오래된 군대를 공격한다고 말한 것이다. 北魏는 외로운 군대로 외로운 성을 지켜서 방어에 피로하였고 齊나라 군사는 교대로 나와서 공격하여 군사들의 여력이 있었으니, 이를 수고로움으로 편안함을 막는다고 말한 것이다.
날씨는 더워지고 비도 지금 내리고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陛下께서는 세조世祖께서 만드신 규범을 따라서 어가御駕낙읍洛邑으로 돌려서 힘을 쌓고 틈을 엿보면서 을 펴고 교화를 행하시어 중국中國이 화목해지고 나면 먼 곳의 사람들이 저절로 복종할 것입니다.”
상서령尙書令 육예陸叡표문表文을 올려서 말하기를 “장강長江이 넓어 저들의 큰 방어선이 되고, 남방 풍토가 찌는 듯이 더워서 여름에 질병疾病이 많으며, 도읍을 옮긴 초창기여서 여러 가지 일이 시작되니, 병역兵役요역徭役을 함께 거행하는 것은 성왕聖王도 어려워하는 일입니다.
피폐한注+⑤ 罷(피로하다)는 疲(피)로 읽는다. 병사를 내몰아 견고한 을 지키는 오랑캐들을 토벌하면 장차 어떻게 승리를 거두겠습니까. 바라건대 일찍 낙읍洛邑으로 돌아가서 근본根本을 깊고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장수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움직이시면 어찌 저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위주魏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 나라 사람이 회하淮河의 작은 섬을 점거하고 나루터 길을 차단하였는데, 북위北魏 군주軍主(일군一軍주장主將) 해강생奚康生이 뗏목을 묶고 땔나무를 쌓아서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고 연기에 의지하여 곧장 전진하여 칼을 휘둘러 난도질을 하니 나라 병사들이 마침내 궤멸되었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전장군前將軍 양파楊播에게 보졸步卒 3,000명과 기병騎兵 500명을 지휘하여 후군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당시 봄물이 한창 늘어났기注+① 長(불어나다)은 知兩의 切이다. 때문에 나라 병사들이 많이 와서 전함戰艦으로 하천을 막았다.
양파가 남안南岸에서 을 만들어 나라를 막고 여러 군대를 모두 건너게 할 때 나라 병사들이 사방에 모여 양파를 포위하니, 양파가 원진圓陳을 만들어 그들을 막고 자신이 친히 대적하여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서로 대치하며 이틀 밤이 지나자, 군중軍中에 식량이 다 떨어졌고 포위한 병사들이 더욱 급하게 몰아치니, 위주魏主북안北岸에 있으면서 물이 불이나 구원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물이 줄어들자 양파가 정예 기병을 이끌고 나라 전함戰艦을 지나가며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내가 지금 건너가려고 하니 싸울 수 있는 자는 나와라.”라고 하고,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건너갔다. 양파는 양춘楊樁의 형이다.
[] 당시에 북위北魏의 사자 노창盧昶 등이 아직 건강建康에 있었는데注+① 盧昶은 盧淵의 동생이다. 지난해에 齊나라에 사신을 갔다. 나라 사람이 〈짐승 사료인〉 찐 콩을 먹이자注+② 찐 콩을 먹여 마소로 그를 대우한 것이다., 노창이 두려워 찐 콩을 먹었고 알자謁者 장사녕張思寧은 말투를 굽히지 않고서 관사에서 죽었다.
돌아왔을 때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노창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사람이 누구나 죽기 마련인데, 어찌 스스로 마소와 같은 짓을 하여 몸을 굽혀 나라를 욕보였는가. 비록 먼 옛날의 소무蘇武에게 부끄럽지 않더라도 근래의 장사녕張思寧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쫓아내어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 북위北魏 태사太師 풍희馮熙하였다.
[] 풍희馮熙평성平城에서 하였다. 평양공平陽公 탁발비拓跋丕가 남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예陸叡표문表文을 올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에게 평성平城으로 돌아와 풍희를 장사하는 데 참석할 것을 청하였다.注+① 拓跋丕․陸叡가 당시에 平城에 머물러 지키고 있었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어찌 멀리 외삼촌의 분상奔喪하는 일이 있는가. 지금 낙읍洛邑을 경영하는데 어찌 경망스럽게 서로 유인하여 군주를 불의不義에 빠뜨리는가. 그들을 법관法官에게注+② 法官은 御史를 말한다. 보내어 벼슬을 깎아내리도록 하겠다.”라고 하고, 이어서 풍희馮熙영구靈柩를 맞이하여 낙양洛陽에 장사 지내도록 하였다.
[] 여름 4월에 북위北魏나라 남정南鄭을 포위했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종리鍾離에 있을 때에 양주자사梁州刺史 탁발영拓跋英양주梁州의 병사를 모아注+① 北魏 梁州刺史는 仇池에 治所를 두었고, 齊나라 梁州刺史는 南鄭에 치소를 두었다. 한중漢中을 공격하기를 청하였는데, 위주魏主가 허락하였다. 나라 양주자사梁州刺史 소의蕭懿부장部將 윤소조尹紹祖 등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험한 곳을 점거하여 다섯 곳에 목책을 세우고注+② 蕭子顯의 ≪南齊書≫에 의거하면 “당시에 角弩谷․白馬․沮水에 의지해서 5개의 목책을 세웠다.” 하였다. 그들을 막았는데,
탁발영이 말하기를 “저 장수들이 미천하여 서로 의견을 통일할 수 없으니, 내가 정예 군졸을 뽑아서 1개의 군영을 아울러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서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1개의 군영을 이긴다면 4개의 군영은 모두 달아날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급하게 1개의 군영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4개의 군영이 모두 무너졌는데 승리의 기세를 타고 멀리까지 몰아 쫓아가서 남정南鄭을 압박하였다. 소의가 그의 장수 강수姜脩를 보내어 탁발영을 공격하였는데 탁발영이 습격하여 모두 사로잡았다.
돌아가려 할 때에 나라 군대가 계속해서 이르자, 장사將士들이 이미 피로하였기 때문에 크게 두려워하여 달아나려고 하였다. 탁발영이 일부러 말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천천히 가며 신색神色이 태연자약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적군을 바라보고서 동서를 지휘하여 상황에 맞게 처리하고, 그런 뒤에 군대를 정렬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였다.
나라 군대가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망설이다가 병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탁발영이 추격하여 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마침내 남정南鄭을 포위하여, 장사將士들에게 침포侵暴하지 않도록 금지하니, 원근遠近에서 기뻐하며 귀부하여 다투어 군량을 운반하였다.
성안에서는 두려워하였는데 참군參軍 유역庾域이 텅 빈 창고 수십 곳에 봉하고서 장사將士들에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여기에는 모두 곡식이 가득하니 족히 2년은 버틸 수 있다. 다만 노력하여 견고하게 지키기만 하면 된다.”라고 하니, 병사들의 마음이 마침내 편안해졌다.
[] 마침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탁발영拓跋英을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는데, 탁발영은 노약자를 먼저 가게하고 자신이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후군後軍注+① 殿軍(후미 부대)이 뒤에서 추격해오는 병사를 막는 것을 “後拒”라고 한다. 되었고, 사신을 보내서 소의蕭懿에게 이별을 알렸다. 소의는 속임수라고 생각하다가 탁발영이 떠난 지 2일 만에 마침내 장수를 보내어 추격하였다.
탁발영이 말에서 내려 함께 싸우고자 하니, 소의의 병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탁발영이 야곡斜谷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큰 비가 내렸다. 사졸士卒들이 대나무를 잘라 쌀을 넣고 말 위에서 횃불을 잡고 밥을 지어 먹었다.
이에 앞서 소의가 사람을 보내서 구지仇池의 여러 저족氐族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탁발영이 운송하는 길과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탁발영이 군대를 정돈시켜 분발해서 공격하여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전진하였다.
화살이 탁발영의 뺨을 맞혔지만 끝내 군대를 온전히 하여 구지仇池로 돌아와 반란한 저족氐族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탁발영은 탁발정拓跋楨의 아들이고 소의蕭懿소연蕭衍의 형이다.
[] 탁발영拓跋英남정南鄭을 공격할 때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조서를 내려 옹주雍州경주涇州기주岐州注+① 北魏 雍州는 長安에 治所를 두고 京兆․馮翊․扶風․咸陽․北地 등 郡을 관할하게 하였다. 太和(477~499) 연간에는 涇州를 설치하고 臨涇城에 治所를 두고 安定․隴東․新平․平涼․平原 등 郡을 관할하게 하였다. 11년(487)에 岐州를 설치하고, 雍城鎭에 治所를 두고 平秦․武功․武都郡을 관할하게 하였다. 명하여 병사 6,000명을 출동하여 남정南鄭을 지키게 하되 남정성南鄭城을 함락하기를 기다려서 그들을 보내게 하였는데, 이충李沖이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진천秦川은 지세가 험하고 좁으며 강족羌族이족夷族과 접경 지역입니다. 서쪽의 탁발영의 군대가 정벌하러 나간 뒤에注+② ≪資治通鑑≫에는 “西師” 위에 自자가 있다. 저족氐族호족胡族이 반란을 일으켜 양식을 운반하고 군사를 보내는 것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남정의 수비병을 미리 차출하여 남산南山 밖에注+③ 漢中 땅이 關中 南山 남쪽에 있기 때문에 “山外”라고 한 것이다. 준비시켰으니, 만약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면 공연히 백성들의 마음만 동요시키게 되고, 호족胡族이족夷族과 연결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일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성지聖旨에 따라 비밀리 〈3자사刺史에게 명을 내려 남정성南鄭城注+④ 鄭城은 南鄭城을 말한다. 함락시키기를 기다린 뒤에 군대를 파견하여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서쪽 길은 지세가 험준하여 좁은 외길이 천리 길이기 때문에注+⑤ 褒谷과 斜谷의 길을 말한다. 지금 멀리 떨어진 외부까지 깊이 들어가 지켜서 여러 적들의 가운데 외로이 웅거하려 하니, 적이 공격해도 갑자기 구원하지 못하고 식량이 다 떨어져도 식량을 운송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비록 채찍이 길어도 말의 배에는 미치지 못한다.’注+⑥ ≪春秋左氏傳≫ 宣公 15년 글의 註에 “칠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남정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실제로 말의 배입니다. 지금 종리鍾離수양壽陽이 이곳에서 가까운데 아직 빼앗지 못하였고, 자성赭城注+⑦ 赭城은 곧 赭陽城이다. 신야新野가 반걸음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인데 항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도東道가 가까운 데도 힘써 지키지 못하는데, 서번西藩을 어찌 멀리 보낸 병사들로 견고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注+⑧ 李沖은 대개 淮水․漢水 지역을 東道라고 한 것이고, 南鄭을 西藩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남정에 지키는 병사를 두려고 한다면 은 끝내 적을 돕게 될까 두렵습니다.” 위주魏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노성魯城에 가서 공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의 후손을 봉하여 숭성후崇聖侯로 삼았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노성魯城에 가서 직접 공자孔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씨孔氏 4명과 안씨顔氏 2명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이어서 여러 공씨孔氏 중에 종자宗子(대종大宗의 아들)注+① 大宗의 아들이 宗子가 된다. 1명을 선발하여 숭성후崇聖侯로 봉하여 공자孔子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명령을 내려서 공자의 를 수리하도록 하고 다시 비명碑銘을 세우도록 하였다.
확오碻磝로 가려할 때에 알자복야謁者僕射 성엄成淹에게 배를 준비하라고 명령하여 사수泗水에서 황하黃河로 들어가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낙양洛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성엄成淹이 간언하기를 “황하黃河의 흐름이 거세니 천자께서 타기에 적합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내가 생각건대 평성平城조운漕運하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경읍京邑의 백성들이 가난하였다. 지금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것은 사방四方의 운송을 통하게 하려 하는 것인데, 백성들이 여전히 황하黃河의 험난한 물길을 꺼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곳으로 가려고 하니, 백성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북위北魏나라 자양성赭陽城을 공격하였는데 나라가 그들을 쳐서 패퇴시켰다.
[] 북위北魏 성양왕城陽王 탁발란拓跋鸞注+① 拓跋鸞은 拓跋景穆의 손자이다. 등이 자양성赭陽城을 공격하여 포위하고 지킨 것이 100여 일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 장수들이 피로하여 싸우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좌李佐만이注+② 李佐는 李寶의 아들이다. 밤낮으로 공격하여 사졸士卒 중에 전사한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는 우위솔右衛率 원역생垣歴生注+③ 垣歷生은 垣榮祖의 從弟이다. 보내서 구원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철수하려고 하였는데 이좌만이 맞서 싸워 패배하였다. 이에 원역생垣歴生이 추격하여 북위北魏를 크게 격파하였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탁발란의 봉작을 강등하여 정양현왕定襄縣王으로 삼고, 500를 삭감하였다. 이좌는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영주瀛州注+④ 北魏 太和 11년(487)에 定州의 河間과 高陽, 冀州의 章武와 浮陽을 나누어서, 瀛州를 설치하여 趙都軍城에 치소를 두었다. 귀양 보냈다.
[] 5월에 북위北魏 광천왕廣川王 탁발해拓跋諧하였다.
[] 탁발해拓跋諧할 때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말하기를 나라와 나라 이래로 왕공王公동당東堂에서 을 하였으니,
지금부터 여러 에는 기년복期年服일 경우에는 세 번 친림하고, 대공大功의 경우에는 두 번 친림하고, 소공小功시마緦麻의 경우에는 한 번 친림하고, 동당東堂에서 곡하는 것을 폐지하라. 광천왕廣川王에게는 대공大功에 해당한다.”注+① 拓跋諧의 아버지는 廣川王 拓跋略이니 顯祖(拓跋弘)의 동생이다. 拓跋諧는 魏主에게 從兄弟이니, 해당하는 상복은 大功服이다.라고 하였다. 대렴大斂을 하려 할 적에는 소복素服심의深衣를 입고 가서 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 북위北魏용관冗官(쓸데없는 관원)의 녹봉을 삭감하였다.
[] 6월에 북위北魏호어胡語의 사용을 금지하고 유서遺書(산실된 책)를 구하고 도량度量을 제정하였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북쪽의 풍속을 바꾸려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 등은 이 멀리 나라와 나라를 따르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나라와 나라에 미치지 못하기를 바라는가?”라고 하니, 함양왕咸陽王 탁발희拓跋禧가 대답하기를 “신하들이 폐하陛下께서 전왕前王보다 탁월하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풍속을 바꿔야 하는가? 구태의연하게 옛것을 고수해야 하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聖上의 정치가 나날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내 한 몸에 그치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손子孫에게 전하기를 바라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백세百世에 전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고쳐야 하니, 등은 어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명령하시면 아래에서는 명령을 따를 뿐이니,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북어北語(선비어鮮卑語)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한결같이 정음正音注+① 正音은 華言(중국어)라는 뜻이다. 따르도록 하되, 어기는 자는 관직을 파면하라.”라고 하였다.
[] 또 조서를 내려 〈민간에서〉 유서遺書를 구하였는데 비각祕閣注+① 漢나라 때에는 書府는 밖은 太常․太史․博士가 담당하고 안에는 延閣․廣內․石渠의 藏書가 있었다. 後漢 때에는 東觀에 책을 보관하고, 晉나라 때에는 中外에 三閣의 經書가 있었다. 陸機 〈謝平原內史表〉에 “제가 三閣에 올랐습니다.” 하였으니, 祕書郞이 中外 三閣의 祕書를 관장하였음을 말한 것이니, 이것이 祕閣의 이름이 유래한 바이다. 없는 것 중에 당시 사용하는 데 유익한 것은 넉넉하게 상을 내려주었고, 또다시 조서를 내려 장척長尺(길이)․대두大斗(용량)를 고쳐서 사용하게 하였는데 그 법을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의거하여 만들었다.注+② ≪漢書≫ 〈律曆志〉에 “子穀 중에 검은 기장의 중간치를 가지고 한 기장의 너비가 90分인 것을 기준으로 삼으니, 黃鍾의 길이이다. 1개가 1分이 되고, 10分은 1寸이 되고, 10寸은 1尺이 된다. 또 子穀 중에 검은 기장의 중간치 1,200개를 가지고 그 竹管[龠]을 채우니, 10龠은 1合이 되고, 10合은 1升이 되고, 10升은 1斗가 된다.” 하였다.
[] 나라가 영군領軍 소심蕭諶서양왕西陽王 소자명蕭子明 등을 죽였다.
[] 제주齊主(소란蕭鸞)가 울림왕欝林王(소소업蕭昭業)을 폐위할 적에 소심蕭諶에게 양주자사揚州刺史를 맡기겠다고 허락하였다. 얼마 후에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임명하니, 소심이 〈화가 나서〉 공을 믿고 정사에 관여하여 선발하고 등용하려고 하는 사람을 번번이 상서尙書에게 명령하여 거듭 논의하게 하였다.
제주齊主가 이 일을 듣고 그를 꺼렸는데 그의 동생 소탄蕭誕소뇌蕭誄가 막 군사를 거느리고 북위北魏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숨기고 참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소심을 죽이고 아울러 그의 여러 동생들과 서양왕西陽王 소자명蕭子明, 남해왕南海王 소자한蕭子罕, 소릉왕邵陵王 소자정蕭子貞注+① 세 왕은 모두 世祖(蕭賾)의 아들이다. 죽였다.
[] 가을 8월에 북위北魏우림군羽林軍호분군虎賁軍을 설치하였다.
[] 모두 15만 명이었다.
[] 북위北魏낙양洛陽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소학四門小學注+① 四門學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세웠다.
[] 북위北魏설총薛聰직합장군直閤將軍으로 삼았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화림원華林園을 유람하여 옛날 경양산景陽山을 관람할 때注+① 華林園과 景陽山은 모두 魏나라 明帝가 축조한 것이다. 시랑侍郎 곽조郭祚가 다시 수리하기를 청하였는데,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나라 명제明帝(조예曹叡)가 이미 앞에서 잘못하였으니, 이 어찌 뒤에서 이어받겠는가.”라고 하였다.
위주魏主는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또 글짓기를 잘하여 조령詔令책문策文을 모두 직접 지었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굶주리고 목마를 때에 음식과 물을 구하는 것처럼 간절하였고,
더불어 교유하는 사람들에게 평소 평민들이 서로 친애하는 뜻으로 대하니注+② 〈“寄以布素之意”는〉 布衣(평민)가 평소에 서로 교제하는 뜻을 붙임을 말한 것이다., 이충李沖이표李彪고려高閭왕숙王肅 같은 무리들이 모두 문아文雅로 친애를 받아 존귀하고 현달하여 정사를 담당하여 예악禮樂을 제정한 것이 매우 볼만하여 태평太平의 풍광이 있었다.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설총薛聰注+③ 薛聰은 薛辯의 曾孫이다. 탄핵을 할 때에 강한 자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주魏主가 관대하게 용서하려고 하여도 설총이 번번이 쟁론을 하였다.
위주魏主가 매번 말하기를 “설총薛聰을 볼 때에 꺼리지 않을 수 없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귀척貴戚이 모두 손을 여미고 경외하였다.
설총이 여러 차례 승진하여 직합장군直閤將軍이 되어서 위주魏主가 밖으로는 덕행德行재기才器로 대우하고 안으로는 심복으로 의탁하여 자신을 지키는 금병禁兵을 설총에게 맡겨서 관장하도록 하니, 당시 정치의 득실을 걸핏하면 바로잡고 간언하였으나, 중후하고 침착한 성격을 지녀 겉으로는 그의 속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그의 관직과 품위를 올려주려고 할 때면 번번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위주魏主도 평소에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설총에게 말하기를 “천작天爵(덕행처럼 하늘이 내린 작위)은 스스로 높으니, 진실로 인작人爵(사람이 내려준 작위)이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려.”라고 하였다.
[] 9월에 북위北魏육궁六宮문무백관文武百官注+① 六宮은 后妃․夫人․嬪御이다. 文武는 內外 文武百官이다.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 북위北魏고양왕高陽王 탁발옹拓跋雍상주자사相州刺史로 삼았다.
[]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가 탁발옹拓跋雍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주목州牧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 몸가짐이 바르면 시키지 않아도 행해지니, 쉬운 까닭이고, 어려운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 겨울 10월에 북위北魏가 조서를 내려 주목州牧에게 관속官屬의 잘잘못을 고과하여 품평의 등급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 11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원구圜丘에서 제사를 지냈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여러 유학자를 이끌어 원구圜丘에서 제사 지내는 를 토론하게 할 적에, 이표李彪가 건의하기를 “노인魯人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을 때, 반드시 먼저 반궁泮宮에서 기도를 하였으니, 하루 전에 태묘太廟에 고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위주魏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 12월에 북위北魏품령品令(구품九品으로 이루어진 관리의 선발 규정)을 반포하고 관복冠服을 내려주었다.注+① 冠服을 내려주어 胡服을 바꾼 것이다.
[]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여러 신하들을 광극당光極堂에서 접견하여 품령品令注+① 品令은 九品에 대한 令이다. 선포하였다. 광록훈光祿勲 우렬于烈의 아들 우등于登이 사례를 인용하여 관직을 올려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우렬이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성명聖明의 조정에서는 이치상 마땅히 청렴하고 겸양해야 하는데, 우등이 다른 사람의 를 인용하여 진급을 요구하였으니, 이는 이 평소에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니, 그를 강등하거나 파직해주소서.”注+② “引人”은 다른 사람의 例를 인용한 것을 말한 것이다. “黜落”은 黜官(관직을 강등함)과 落職(파직함)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이는 바로 유식有識한 사람의 말이니, 우렬이 이런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고, 우등을 인견引見하여 말하기를 “부친父親겸손謙遜한 아름다움과 강직한 선비의 풍모가 있어서 을 진급시켜 교위校尉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국가國家에는 예전부터 탄식할 만한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신하들이 조정의 잘잘못을 공개적으로 담론하려 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 임금은 간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신하는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해야 한다.
지금 이 1명을 천거할 때에 만약 옳지 않으면 들은 그 잘못을 직언하고, 만약 재능이 있는데 이 모르는 자가 있으면 들은 또한 그를 천거해야 하니, 사람을 얻으면 을 내릴 것이고, 말하지 않으면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 나라가 나라의 여러 능묘陵墓注+① 여기에서 말하는 晉나라의 여러 陵墓는 江南에 있는 것을 말한다. 수리하고 을 지키는 군사를 증치하였다.
太和五銖錢太和五銖錢
[] 북위北魏태화오수전太和五銖錢을 사용하였다.
[] 이에 앞서 북위北魏 사람은 동전을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처음으로 명을 내려 동전을 주조하였다. 이해에 동전의 주조[고주鼓鑄]가注+① 제련하여 주조할 때를 당하여 불에 부채질하여 불길을 세게 하는 것을 “鼓鑄”라고 말한다. 대략 갖추어졌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동전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魏主攻鍾離……數齊主之罪而還 : “敵國이 상대의 죄를 조목조목 든 것이 많았는데 기록하지 않았다. 이때에 특별히 기록한 것은 蕭鸞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伐’이라고 기록하고 여기서 ‘罪’라고 기록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亂臣賊子를 주벌함이 엄하다.[敵國相數以罪多矣 不書 於是特書 惡鸞也 前書伐 此書罪 綱目之誅亂賊嚴矣]” ≪書法≫“南北이 서로 공격한 것이 한 차례가 아닌데 죄를 묻는 전쟁은 없었다. 지금 蕭鸞이 시해하고 황제가 즉위하자 魏主(拓跋宏)가 이를 빙자하여 군사를 출동시켰고 이윽고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비로소 그 죄를 꾸짖고 돌아갔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들어 기록하였으니 魏主가 전쟁을 끝까지 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齊主의 죄를 지목할 수 있는 실상을 밝힌 것이다.[南北交攻非一 未嘗有問罪之師 今蕭鸞弑立 魏主借是擧兵 旣而攻城不克 始數其罪而還 綱目掲而書之 不獨見魏主不遂窮兵之美 亦所以彰齊主有罪可名之實]” ≪發明≫
역주2 (汴)[注] : 저본에는 ‘汴’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注’로 바로잡았다.
역주3 (逕義陽縣郡城南)[逕仁順城南 故義陽郡治] : 저본에는 ‘逕義陽縣郡城南’으로 되어 있으나, ≪水經註≫에 의거하여 ‘逕仁順城南 故義陽郡治’로 바로잡았다.
역주4 魏主如魯城……封其後爲崇聖侯 : “魏主 拓跋燾에게 일찍이 ‘進至魯郡 祠孔子(魯郡에 나아가서 孔子를 제사했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때에 다시 ‘如魯城 祠孔子’라고 하였는데, ‘如’를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전일하다는 말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孔子를 제사한 것을 기록한 것이 5번인데 北魏가 그 2번을 차지하고(漢 高帝 12년(B.C.195)에 자세하다.) 게다가 한 번은 ‘進至(나아가다)’라고 기록하고 한 번은 ‘如(가다)’라고 기록하였으니, 모두 그 전일함을 인정해준 말이다.[魏主燾嘗書進至魯郡 祠孔子矣 於是復書如魯城 祠孔子焉 如者何 專辭也 終綱目書祠孔子五 魏居其二(詳漢高帝十二年) 而又一書進至 一書如 皆予其專之辭也]” ≪書法≫“魏主는 이때에 숭상할 대상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聖人은 天地와 그 德을 합하는데, 시대에 盛衰는 있으나 道는 더럽혀지거나 높아짐이 없으니, 어찌 반드시 人主에게 요구할 것이 있겠는가. 人主가 스승(孔子)을 높이고 道를 중시하여 天下에 표시하는 것은 모두 스승으로 받들면서 본받을 것을 알게 한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風化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때 異端이 한창 번성하여 이때의 임금들은 오직 불교에 돈독하게 뜻에 두고 黄老를 숭상할 줄만 알았는데, 北魏 孝文帝는 유독 우리 儒道를 알았으니, 이것이 어찌 拓跋氏로서 그를 대할 수 있겠는가. ‘如魯城 祠孔子 封其後爲崇聖侯’라고 기록하였으니, 魏主는 이때에 존숭할 것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魏主於是乎可謂知所尊尙矣 聖人與天地合其德 時有升降 道無汚隆 豈必有求於人主哉 人主尊師重道 所以表示天下 使皆知所師法 此固風化之本 是時異端方熾 時君惟知篤意浮屠 崇尙黄老 而魏孝文乃獨知有吾道 是烏可以拓跋氏待之 書如魯祠孔子 封其後爲崇聖侯 魏主於是乎可謂知所尊尙者矣]” ≪發明≫
역주5 옛날에……있었다 : “옛날에는 賢君이 신하에 대해서……죽으면 가서 조문하여 哭을 하였고, 小斂과 大斂에 갔다.[古之賢君於其臣也……死則往弔哭之 臨其小歛大斂]”(≪漢書≫ 권51 〈賈山列傳〉)
역주6 魏減冗官之祿 : “무릇 ‘減俸(녹봉을 삭감하였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나무란 것이다. 冗官을 감봉한 것은 마땅하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減俸’을 기록한 것은 5번인데(漢 桓帝 延熹 4년(161)에 자세하다.) 오직 여기에서만 나무라는 말이 아니다.[凡書減俸 譏也 冗官而減之 宜矣 終綱目書減俸五(詳漢桓帝延熹四年) 惟此非譏辭]” ≪書法≫
역주7 魏禁胡語……法度量 : “胡服과 胡語는 北魏의 옛 풍속이다. 孝文帝가 한 번 변화시키니 北魏가 이에 빛났다. 遺書를 구한 것은 漢나라 成帝 河平 3년(B.C.26)에 1번 기록한 뒤로 이때에 이르러 500여 년이 지난 뒤에 다시 보이니, 기록하여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胡服胡語 魏故俗也 文帝一變 魏於是彬彬矣 求遺書 自漢成河平三年一書之 至是五百餘年 然後復見 書嘉之也]” ≪書法≫“北魏는 본래 胡人인데 그 胡俗을 능히 바꾸었습니다. 후세에 中國 사람 중에 胡語와 胡服을 하고는 마치 그 武勇을 본받으려는 자가 있었으니 부끄러움을 모름이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앞에서 ‘北魏禁胡服(北魏가 胡服을 금지시켰다.)’이라고 기록하고 여기서는 ‘北魏禁胡語(北魏가 胡語를 금지시켰다.)’라고 기록하였으니, 모두 인정해준 말입니다. 아, 變夷를 中夏로 만든 것을 臣은 北魏 孝文帝에게서 보았습니다.[魏本胡人 而能改其胡俗 後世乃有中國之人 胡語胡服 若欲效其武勇者 可謂不知愧恥之甚矣 綱目前書魏禁胡服 此書魏禁胡語 皆予之之詞也 嗚呼 用夏變夷 臣於魏文見之]” ≪發明≫
역주8 명분이……법이다 : ≪論語≫ 〈子路〉에 “이르기를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타당하지 않고, 형벌이 타당하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이 때문에 군자가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을 할 수 있으며, 말을 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다.[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라고 하였다.
역주9 魏置羽林虎賁 : “羽林은 漢나라 武帝에게서 시작되었다. 기록하지 않다가 여기에 어찌 기록하였는가. 나무란 것이다. 이에 15만 명을 두었다.[羽林自漢武始矣 不書 此何以書 譏也 於是置凡十五萬人]” ≪書法≫
역주10 그……않으니 : ≪論語≫ 〈子路〉에 “그 몸가짐이 바르면 시키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시키더라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라고 하였다.
역주11 齊修晉諸陵 增置守衛 : “≪資治通鑑綱目≫은 蕭鸞에게서 취한 것이 없는데 이때에 특별히 기록한 것은 작은 선행을 기록한 것이다.[綱目於蕭鸞無取焉 於是特書 錄小善也]” ≪書法≫
역주12 魏行太和五銖錢 : “〈이를 기록한 것은〉 北魏가 비로소 처음 동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北魏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두 번 모두 五銖錢을 주조하였으니, 輕重의 중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己酉年(529)에 永安五銖를 주조하였다.).[魏始用錢也 終魏之世 再鑄皆五銖 可謂得輕重之中矣(己酉年 鑄永安五銖)]”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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