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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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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甲子齊武帝永明二年 魏孝文帝太和八年하여 盡丙子齊明帝建武三年 魏孝文帝太和二十年이라 凡十三年이라
齊永明二年이요 魏太和八年이라
春正月 齊以竟陵王子良爲司徒하다
子良 齊主之子也 少有淸尙하여 傾意賓客하여 開西邸하고 多聚古人器服以充之注+據子良傳, 西邸在雞籠山.어늘 范雲蕭琛任昉王融蕭衍謝朓沈約陸倕竝以文學見親하니 號曰八友注+琛, 惠開之從子. 融, 僧達之孫. 衍, 齊太祖族弟順之之子. 朓, 述之孫. 約, 璞之子也. 倕, 音垂. 柳惲王僧孺江革范縝孔休源亦預焉注+惲, 元景之從孫. 僧孺, 雅之曾孫. 縝, 雲之從兄也.이러라
子良篤好釋氏하여 招致名僧講論할새 或親爲賦食行水하니 世頗以爲失宰相體注+爲, 去聲. 賦, 分畀也.러라 范縝盛稱無佛한대
子良曰 君不信因果 何得有富貴貧賤注+釋氏有困緣果報之說.이리오
縝曰 人生如樹花同發하여 隨風而散하니 或拂簾幌하여 墜茵席之上하고 或關籬墻하여 落糞溷之中注+幌, 呼廣切, 帷幔也.하니 墜茵席者 殿下是也 落糞溷者 下官是也 貴賤雖殊 因果何在 子良 無以難이러라
縝又著神滅論하니 以爲形者 神之質이요 神者 形之用也 神之於形 猶利之於刀 未聞刀沒而利存하니 豈容形亡而神在哉
子良使王融謂之曰 卿才美하니 何患不至中書郎而故乖剌爲此 甚可惜也 宜急毀之注+刺, 來曷切, 謂相違背也.하라
縝大笑曰 使縝賣論取官이면 已至令僕矣리라
蕭衍 好籌略有文武才幹하니 王儉 深器異之曰 蕭郎 出三十 貴不可言이니라
子良啓以范雲爲郡한대 齊主曰 聞其恒相賣弄하니 朕不復窮法이라 當宥之以遠이니라
子良曰 不然하니 雲動相規誨하여 諫書具存이라하고 遂取以奏하니 凡百餘紙 辭皆切直이라
齊主嘆息謂子良曰 不謂雲能爾 方使弼汝 何宜出守
文惠太子嘗出東田觀穫注+文惠太子, 長懋也. 時太子作東田於東宮之東, 綿亘華遠, 壯麗極目. 又齊紀 “太子立樓館於鍾山下, 號曰東田.”이러니 顧謂衆賓曰 刈此亦殊可觀이로다 衆皆曰唯唯호되
雲獨曰 三時之務 實爲長勤하니 伏願殿下知稼穡之艱難하여 無徇一朝之宴逸注+三時之務, 謂春耕夏耘秋穫也.하소서
夏六月 齊以茹法亮으로 爲中書舍人注+茹, 人諸切, 姓也.하다
時中書舍人四人 各住一省하여 謂之四戶 以法亮及呂文顯等爲之하니 權傾朝廷하여 餉遺 歲數百萬이라 法亮語人曰 何須求外祿이리오 此一戶中 年辦百萬이라하니 蓋約言之也이러라
後因天文有變하여 王儉 極言文顯等專權徇私所致호되 齊主不能改러라
秋魏始班祿하다
魏舊制 戶調帛二匹絮二斤絲一斤穀二十斛注+調, 謂計發也.하고 又入帛一匹二丈委之州庫하여 以供調外之費호되
所調各隨土之所出이러니 至是始班俸祿하여 而戶增調帛三匹穀二斛九斗以給之하고 調外 亦增二匹하고 祿行之後 贓滿一匹者死
舊律 枉法十匹 義贓二十匹 罪死注+枉法, 謂受賕枉法而出入人罪者. 義贓, 謂人私情相饋遺, 雖非乞取, 亦計所受論贓.어늘 至是하여 義贓一匹 枉法無多少皆死하다
秦益刺史李洪之 以外戚貴顯이러니 遂以贓敗賜死注+魏顯祖高祖皆李氏出也.하고 餘守宰死者 四十餘人이라 受祿者 無不跼蹐하여 賕賂殆絕注+跼, 音局. 蹐, 音脊.이러라
然吏民犯他罪者 魏主率寬之하고 疑罪奏讞 多減死徙邊하니 都下決大辟 歲不過五六人이요 州鎭亦簡이러라
久之 淮南王佗奏請依舊斷祿한대 太后召群臣議之하니 中書監高閭以爲飢寒切身하면 慈母 不能保其子 今給祿則廉者足以無濫이요 貪者足以勸慕어니와 不給則貪者得肆其姦하고 廉者不能自保리이다하니 詔從閭議하다
◑閭又表以爲北狄所長者野戰이요 所短者攻城注+北狄, 指蠕蠕也.이니 若以狄以所短으로 奪其所長이면 則雖衆이나 不能成患이요 雖來 不能深入이라
又狄散居野澤하여 隨逐水草하니 戰則與家業竝至하고 犇則與畜牧俱逃하여 不齎資糧而飲食自足하니 是以 歷代 能爲邊患이라 六鎭勢分하여 倍衆不鬪하고 互相圍逼하니 難以制之注+胡三省曰 “魏世祖破蠕蠕, 列置降人於漠南, 東至濡源, 西暨五原․陰山, 竟三千里. 分爲六鎭, 今武川․撫冥․懷朔․懷荒․柔玄․禦夷也. 下云 ‘六鎭東西不過千里.’ 則當自代都北塞而東至濡源耳.” 杜佑曰 “後魏六鎭竝在馬邑․雲中․單于府界.” 倍衆不鬪, 謂敵人衆力加倍則鎭人不敢鬪也.
請依秦漢故事하여 於六鎭之北築長城하고 擇要害地하여 하고 置兵捍守하면 狄旣不攻城하고 野掠無獲하여 草盡則走 終必懲艾
計六鎭하면 東西不過千里 一夫一月之功이면 可城三步之地 彊弱相兼하여 不過用十萬人 一月可就 雖有暫勞 可以永逸이라
凡長城 有五利하니 罷遊防之苦 一也 北部放牧 無抄掠之患 二也 登城觀敵하여 以逸待勞 三也 息無時之備 四也 歲常遊運하여 永得不匱 五也니이다하니 魏主優詔答之注+遊, 行也, 行運芻糧以實塞下.하다
冬十月 齊以長沙王晃으로 爲中書監하다
太祖臨終 以晃屬齊主하여 使處輦下近藩하여 勿令遠出注+輦下, 輦轂之下, 謂京師也. 藩, 謂藩屛也.하고 且曰 宋氏若非骨肉相殘이면 他族豈得乘其弊리오 汝深誡之하라
舊制 諸王在都 唯得置捉刀四十人注+捉刀, 執刀以衛左右者也.이러니 至是하여 晃自南徐刺史罷還 私載數百人仗하니 齊主聞之大怒하여 將糾以法하니
豫章王嶷叩頭流涕曰 晃罪誠不足宥이어니와 陛下當憶先朝니이다 齊主垂泣而罷호되 然終不被親寵이러라
武陵王曄 多才藝而疏婞하여 亦無寵注+婞, 直也, 狠也.이라 嘗侍宴醉伏地하니 貂抄肉柈注+侍中․中常侍之冠以貂尾爲飾. 抄, 平聲, 略拂過也. 柈, 與槃通.이라
帝笑曰 肉汚貂注+汚, 去聲.로다 對曰 陛下愛羽毛而疏骨肉하노이다하니 帝不悅이러라
高麗王璉 入貢於魏하고 亦入貢於齊하다
高麗方彊하니 魏置諸國使邸 齊使第一이요 高麗次之러라
十一月 齊以始興王鑑으로 爲益州刺史하다
益州自晉以來 皆以名將爲刺史러니 至是하여 大度獠恃險驕恣注+寰宇記 “大度河, 自吐蕃界經雅州諸部落, 至黎州東界, 流入通望界.”하니 刺史陳顯達 遣使責其租賧한대 獠殺其使注+租, 田賦也. 賧, 吐濫切, 夷人以財贖罪曰賧.
顯達分部將吏하여 聲言出獵하고 夜襲斬之하니 男女無少長皆死러라 而劫帥韓武方 亦聚黨爲暴하니 郡縣不能禁注+劫, 謂劫盜也.이라 乃以鑑爲刺史한대 鑑至上明하니 武方出降注+通典註云 “上明今江慶松滋縣.”이어늘
長史請殺之하니 鑑曰 殺之失信이요 無以勸善이라하고 乃啓宥之하니 於是 蠻夷爲寇者 皆望風降附러라
道路或云 陳顯達不肯就徵이어늘 而顯達使至하니 咸勸鑑執之한대 鑑曰 顯達立節本朝하니 必自無此리라 居二日 聞顯達已遷家出城矣러라
鑑時年十四 喜文學하고 器服如素士하니 蜀人悅之러라
齊增封豫章王嶷四千戶하다
宋元嘉之世 諸王入齋閤 得白服帬帽하고 唯出太極四廟 乃備朝服이러니 自後此制遂絕注+帬帽, 皆燕居所服. 帬, 古裙字, 下裳也. 四廟, 通鑑作四廂.이라
齊主於嶷友愛하여 聽依元嘉故事한대 嶷固辭하여 唯車駕至其第 乃白服烏帽侍宴하고 至於器服制度 動皆陳啓하여 務從減省이라
又嘗求解揚州하니 以授竟陵王子良한대 齊主曰 畢汝一世하리니 無所多言하라
嶷長七尺八寸이요 美修容範하니 出人殿省 見者肅然이러라 太祖嘗欲以爲太子로되 而嶷事齊主愈謹이라 故友愛不衰러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제28권은 갑자년甲子年(484) 나라 무제武帝 영명永明 2년과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8년에서 시작하여 병자년丙子年(496) 나라 명제明帝 건무建武 3년과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20년까지이니, 모두 13년이다.
나라 세조世祖 무제武帝 소색蕭賾 영명永明 2년이며,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태화太和 8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가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사도司徒로 삼았다.
[] 소자량蕭子良제주齊主(소색蕭賾)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맑고 고상하여 손님들에게 마음을 쏟아 서쪽의 저택을注+① ≪南齊書≫ 〈蕭子良傳〉에 의거하면, 서쪽의 저택은 雞籠山에 있었다. 열고 옛사람이 쓰던 기물과 의복을 많이 수집하여 가득 채웠는데, 범운范雲, 소침蕭琛, 임방任昉, 왕융王融, 소연蕭衍, 사조謝朓, 심약沈約, 육수陸倕 등이注+② 蕭琛은 蕭惠開의 從子이고, 王融은 王僧達의 손자이며, 蕭衍은 齊 太祖의 族弟인 蕭順之의 아들이며, 謝朓는 謝述의 손자이며, 沈約은 沈璞의 아들이다. 倕는 음이 垂이다. 모두 문학文學으로 가깝게 지냈으니, 이름하여 ‘팔우八友’라고 하였다. 유운柳惲, 왕승유王僧孺, 강혁江革, 범진范縝, 공휴원孔休源注+③ 柳惲은 柳元景의 從孫이고, 王僧孺는 王雅之의 曾孫이며, 范縝은 范雲의 從兄이다. 여기에 참여하였다.
소자량이 석씨釋氏(부처)를 몹시 좋아하여 이름난 승려들을 초빙하고 강론할 적에 직접 승려들을 위해 음식을 나누어주고注+④ 〈“爲賦”의〉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賦는 나누어준다는 뜻이다. 물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너무 재상宰相의 체통을 잃은 것이라 생각하였다. 범진이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극구 말하자,
소자량이 말하기를 “그대가 인과응보因果應報注+⑤ 佛家에 困緣果報의 설이 있다. 믿지 않는다면 어찌 부귀와 빈천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범진이 말하기를 “인생은 마치 나무에 꽃이 함께 피어 바람에 흩어지는 것과 같으니, 주렴과 장막을注+⑥ 幌은 呼廣의 切이니, 장막이라는 뜻이다. 스쳐 방석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울타리와 담장에 걸려 뒷간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방석 위에 떨어진 것은 전하殿下와 같은 경우이고, 뒷간에 떨어진 것은 소관小官(범진)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귀와 빈천이 비록 다르지만 여기에 과연 무슨 인과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소자량이 따질 수가 없었다.
범진이 또 〈신멸론神滅論〉을 지어 “형체는 의 바탕이며, 은 형체의 쓰임이다. 과 형체의 관계는 마치 날카로움이 칼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칼이 없는데 날카로움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니, 어찌 형체가 없는데 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자량이 왕융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의 재주가 훌륭한데 어찌 중서랑中書郎에 오르지 못할까 염려하여 일부러 이런 터무니없고 그릇된注+⑦ 刺는 來曷의 切이니, 서로 위배되는 것을 말한다. 설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참으로 애석하오. 속히 이러한 을 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범진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만일 제가 논의를 내세워 높은 관직을 차지하려고 했다면 이미 이나 복야僕射의 지위에 올랐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소연蕭衍이 계책과 책략을 좋아하였고 문무文武의 재간을 지니고 있었는데, 왕검王儉이 그를 몹시 소중히 여겨 말하기를 “소랑蕭郎이 서른 살을 넘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소자량蕭子良이 아뢰어 범운范雲군수郡守로 삼으려고 하니,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말하기를 “듣자하니 그가 늘 속임수와 농간을 종용한다고 한다. 내가 다시 끝까지 형벌을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니, 용서하여 멀리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觀穫進規(수확하는 광경을 보면서 規諫을 올리다)觀穫進規(수확하는 광경을 보면서 規諫을 올리다)
소자량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범운이 늘 올바른 말로 인도하는 일을 도우니, 간언한 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가져다 올리니 백 장이 넘는 종이에 적혀 있는 말이 모두 간절하고 솔직하였다.
제주齊主가 탄식하며 소자량에게 말하기를 “범운이 이런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그대를 보필하게 할 것이니, 어찌 군수郡守로 내보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문혜태자文惠太子가 한번은 동전東田으로 나가 수확하는 광경을 구경하고는注+① 文惠太子는 蕭長懋이다. 당시에 태자가 東宮의 동쪽에 東田을 만들었는데, 너무 화려하여 눈앞에 보이는 것마다 웅장하고 사치스러웠다. ≪南史≫ 〈齊紀 下 廢帝郁林王紀〉에 “太子가 鍾山 아래에 누각을 만들어 東田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러 빈객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곡식을 베는 광경도 제법 볼만하오.”라고 하였다. 빈객들이 모두 “네네.”라고 말하였는데,
범운范雲만은 말하기를 “봄, 여름, 가을 농사철에는注+② “三時之務”는 봄에 밭 갈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을 말한다. 실로 오래도록 노동을 해야 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아 하루아침의 연회를 즐기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 여름 6월에 나라가 여법량茹法亮注+① 茹는 人諸의 切이니, 성씨이다.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삼았다.
[] 당시에 중서사인中書舍人 4명이 각각 이를 ‘사호四戶’라고 하였다. 여법량茹法亮여문현呂文顯 등을 이 관직에 임명하니 권세가 조정을 좌지우지하여 주위에서 선물로 보내는 금품이 해마다 수백만 전이었다. 여법량이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어찌 외부에서 봉록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일호一戶 안에서 해마다 백만 전을 마련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대략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 후에 천문天文에 나타난 변고로 인해 왕검王儉이 여문현 등이 권력을 좌지우지하여 사욕을 채운다고 극력하게 아뢰었으나, 제주齊主(소색蕭賾)가 바꿀 수 없었다.
[] 가을에 북위北魏가 처음으로 등급에 따라 봉록을 나누어주었다.
[] 북위北魏의 옛 제도에 마다 비단 2필, 솜 2근, 실 1근, 곡식 20곡을 세금으로 거두고注+① 調는 계산해내는 것을 말한다. 또 비단 1필 2장을 받아 의 창고에 위임하여 세금 이외의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세금으로 거두는 것은 각각 토지의 소출에 따라 내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등급에 따라 봉록을 나누어주게 하여 이를 위해 마다 세금을 늘려서 비단 3필, 곡식 2곡 9두를 더 내도록 하고 세금 이외에 또 비단 2필을 더 부과하였으며, 봉록을 시행한 뒤에 뇌물로 받은 물품이 1필이 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였다.
옛 법률에 왕법枉法으로 비단 10필은 받은 자와 의장義贓으로 비단 20필을 받은 자는 사형에 처했는데注+② “枉法”은 뇌물을 받고 법을 왜곡하여 사람의 죄를 바꾸는 것이다. “義贓”은 사심을 가지고 뇌물을 주는 것으로, 비록 요구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도 역시 받은 것을 계산하여 뇌물죄로 논한다., 이때에 이르러 의장義贓으로 비단 1필을 받은 자와 왕법枉法으로 수수한 자는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사형시켰다.
진익이주자사秦益二州刺史 이홍지李洪之가 외척으로 존귀하고 현달하였는데注+③ 北魏 顯祖(拓跋弘)와 高祖(拓跋宏)는 모두 李氏의 소생이다., 마침내 뇌물을 받아 일을 그르쳐 사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 수령들 중에 죽은 사람이 40여 명이었다. 봉록을 받는 자들이 두려움에 움츠려들어注+④ 跼(구부리다)은 음이 局이다. 蹐(살금살금 걷다)은 음이 脊이다. 뇌물을 받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관리와 백성들 중에 다른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대부분 관대하게 대하였고, 죄가 의심스런 옥사에 대해 평의할 것을 아뢰면 대부분 사형에서 감형을 시켜 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니, 도성에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이 한 해에 5, 6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에도 그 수가 적었다.
오랜 뒤에 회남왕淮南王 탁발타拓跋佗가 상주하여 옛날처럼 봉록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하자, 풍태후馮太后가 신하들을 불러 의논을 하였다. 중서감中書監 고려高閭가 말하기를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실하면 자애로운 어머니도 자식을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봉록을 주면 청렴한 자는 넘치도록 욕심을 내지 않기에 충분하고, 탐욕스러운 자는 권면하고 사모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봉록을 주지 않으면 탐욕스러운 자는 간사한 마음을 제멋대로 부리고, 청렴한 자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조서를 내려 고려高閭의 논의를 따르도록 하였다.
[] 고려高閭가 또 다음과 같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북적北狄(유연柔然)의注+① 北狄은 蠕蠕(柔然)을 가리킨다. 장점은 들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며, 단점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니, 만일 북적의 단점으로 그들의 장점을 빼앗는다면 비록 무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걱정거리가 못 되고, 비록 공격해온다고 하더라도 깊이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북적이 들판과 늪지에 흩어져 살면서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하니 전투를 하게 되면 생계를 꾸려 모두 쳐들어오고, 도망을 치게 되면 기르는 가축과 모두 도망쳐서 군량을 가져오지 않아도 먹을거리가 절로 풍부하여 역대로 변경의 근심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육진六鎭의 형세가 분산되어 있어 적의 수가 배가 되어 싸울 수 없고 서로 포위되어 핍박을 받으니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注+② 胡三省이 말하기를 “北魏 世祖(太武帝 拓跋燾)가 蠕蠕을 격파하고 漠南에 항복해온 사람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는데, 동쪽으로는 濡源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五原과 陰山에 이르렀으니, 경계가 3천 리였다. 이곳을 나누어 六鎭으로 만들었으니, 지금의 武川, 撫冥, 懷朔, 懷荒, 柔玄, 禦夷 지역이다. 아래에서 ‘六鎭은 동서로 천 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代都의 북쪽 변방에서부터 동쪽으로 濡源에 이르는 곳에 해당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杜佑가 말하기를 “後魏(北魏)의 六鎭은 아울러 馬邑, 雲中, 單于府의 경계에 있다.”라고 하였다. “倍衆不鬪”는 적들의 수와 힘이 갑절이 되어 鎭에 있는 사람들이 감히 싸우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바라건대 나라와 나라의 고사故事에 따라 육진六鎭의 북쪽에 장성長城을 쌓고 요해처를 선택하여 〈이따금 장성의〉 문을 열어 〈그 옆에 작은〉 성을 축조하고 병력을 두어서 막아 지키게 하면 북적이 이미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들판에서 약탈을 해도 얻을 것이 없어 풀이 다 떨어지면 달아날 것이니, 결국에는 반드시 징계하여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육진六鎭을 계산해보면 동서로 천 리를 넘지 않으니, 한 명의 장정이 한 달 동안 힘을 들이면 3보의 땅에 성을 쌓을 수 있으니, 힘이 센 사람과 약한 사람을 합쳐 10만 명 정도를 투입하면 한 달에 완성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잠시 동안은 힘이 들겠지만 영원히 평안할 수 있습니다.
장성長城에는 다섯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쓸데없이 방비하는 괴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이고, 북부北部에서 가축을 방목해도 노략질 당할 근심이 없는 것이 둘째이며, 성에 올라 적을 바라보면서 편안한 상태로 지친 적을 기다리는 것이 셋째이며, 수시로 전투를 대비해야 하는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넷째이며, 매년 식량을 운송하여注+③ 遊는 옮긴다는 뜻이니, 건초와 양식을 운송하여 변방 지역에 충당하는 것이다. 영원히 모자라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다섯째입니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예우하는 조서로 답을 내렸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장사왕長沙王 소황蕭晃중서감中書監으로 삼았다.
[] 예전에 태조太祖(소도성蕭道成)가 임종하면서 소황蕭晃제주齊主(소색蕭賾)에게 부탁하여 도성이나 가까운 번진藩鎭에 거처하게 하여注+① “輦下”는 輦轂의 아래라는 뜻으로, 도성을 말한다. 藩은 藩鎭을 말한다. 먼 곳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씨宋氏가 만일 형제간에 살육하는 일이 아니었다면 다른 종족이 어찌 그들이 와해된 틈을 엿볼 수 있었겠느냐. 너는 이를 깊이 경계하여라.”라고 하였다.
옛날의 제도에 여러 왕들이 도성에 있을 때에는 오직 검을 휴대한注+② “捉刀”는 검을 잡고 좌우에서 지키는 사람이다. 40명만을 좌우에 두도록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소황蕭晃남서자사南徐刺史를 그만두고 돌아올 적에 사적으로 수백 명이 쓸 무기를 싣고 오니, 제주齊主가 듣고서 크게 화를 내어 법으로 다스리려고 하자,
예장왕豫章王 소억蕭嶷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소황의 죄는 진실로 용서받을 수 없지만, 폐하께서는 선조先朝(소도성)의 유언을 기억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제주齊主가 눈물을 흘리며 그만두었지만, 결국 가까이 두고 총애하지 않았다.
무릉왕武陵王 소엽蕭曄이 재주와 기예가 많았으나 거칠고 강직하여注+③ 婞은 올곧다는 뜻이며, 사납다는 뜻이다. 역시 총애를 받지 못했다. 한번은 모시고 연회를 열다가 취하여 땅에 엎어졌는데, 초선관貂蟬冠의 담비 꼬리가 고기 국이 담긴 그릇에 닿았다.注+④ 侍中과 中常侍의 冠은 담비의 꼬리로 장식한다. 抄는 平聲이니, 살짝 스친다는 뜻이다. 柈(쟁반)은 槃과 통용한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담비 꼬리가 고기 국물에 더럽혀졌구나.”注+⑤ 汚(더럽히다)는 去聲이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새와 짐승의 깃털은 아끼시지만, 골육을 나눈 형제는 멀리하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 고구려高句麗의 왕 고련高璉(장수왕長壽王)이 북위北魏에 조공을 바치고 또 나라에도 조공을 바쳤다.
[] 당시에 고구려高句麗가 한창 강성하였기에 북위北魏가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마련할 적에 나라 사신을 제일 우선시하였고, 고구려를 그 다음으로 하였다.
[] 11월에 나라가 시흥왕始興王 소감蕭鑑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았다.
[] 익주益州나라 이후로 모두 이름난 장군을 자사刺史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대도수大度水注+① ≪太平寰宇記≫에 “大度河는 吐蕃의 경계에서 발원하여 雅州의 여러 부락을 거쳐 黎州의 동쪽 경계에 이르러 通望의 경계에 유입된다.” 하였다. 이 험준한 지형을 믿고 교만 방자하자, 자사刺史 진현달陳顯達이 사신을 보내어 조세를 바쳐 속죄하기를 요구하였는데注+② 租는 땅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賧(속죄하다)은 吐濫의 切이니, 夷族이 재물로 속죄하는 것을 賧이라고 한다., 대도수大度水요족獠族이 그 사신을 죽였다.
진현달陳顯達장리將吏를 나누어 거느리고 사냥을 나간다고 말을 퍼뜨리고는 밤에 급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도적의注+③ 劫은 위협하는 도적을 말한다. 수괴 한무방韓武方이 역시 무리들을 모아 난폭하게 굴자, 군현郡縣에서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감蕭鑑자사刺史로 삼았는데, 소감이 상명上明注+④ ≪通典≫의 註에 이르기를 “上明은 지금의 江慶의 松滋縣이다.” 하였다. 이르자 한무방韓武方이 나와서 항복하였다.
장사長史가 죽이라고 청하자 소감이 말하기를 “그를 죽이면 신의를 잃을 뿐이지, 을 권면할 수 없다.”라고 하고, 대성臺省에 아뢰어 용서하니, 이에 도적질을 하던 만이蠻夷들이 풍문만 듣고서도 항복하여 귀순하였다.
도로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진현달이 부름에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진현달의 사신이 이르자, 모두 소감에게 그를 붙잡아 두라고 권하였다. 소감이 말하기를 “진현달이 우리 조정에 충절을 세웠으니, 필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틀이 지난 뒤에 진현달이 벌써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성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감의 당시 나이가 열 넷이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착용한 기물과 의복이 선비와 같아 촉인蜀人들이 좋아하였다.
[] 나라가 예장왕豫章王소억蕭嶷봉읍封邑을 4천 로 늘려주었다.
[] 나라 에 여러 왕들이 에 들어갈 때에는 백복白服 차림에 치마[]를 입고 오직 태극전太極展 곁에 있는 사묘四廟를 나가서야 조복朝服을 갖추었는데注+① 帬과 帽는 모두 평상시에 착용하는 것이다. 帬은 裙의 古字이니, 하의이다. 四廟는 ≪資治通鑑≫에는 四廂으로 되어 있다., 이후로는 이 제도가 드디어 폐지되었다.
제주齊主(소색蕭賾)가 소억蕭嶷과 우애가 돈독하여 원가元嘉 연간의 고사故事를 따르라고 허락하였는데, 소억이 극구 사양하고 오직 거가車駕가 그 집에 이르면 백복白服 차림에 오모烏帽를 착용하고 시중을 들며 잔치를 열었다. 기물과 의복 제도와 관련된 일은 걸핏하면 모두 아뢰어 간략하게 줄이는 데 힘썼다.
또 한번은 양주자사揚州刺史에서 해직시켜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에게 이를 줄 것을 청하였는데, 제주齊主가 말하기를 “네가 죽을 때까지 맡길 것이니, 여러 소리 할 것 없다.”라고 하였다.
소억은 키가 7척 8촌이며 용모와 법도를 잘 겸비하여 궁궐이나 관서를 드나들 때 바라보는 자들이 엄숙하게 대했다. 태조太祖(소도성蕭道成)가 과거에 소억을 태자太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소억이 제주齊主를 섬기는 데 더욱 삼갔기 때문에 우애가 변함없었다.


역주
역주1 한……머물렀는데 : 각각의 省은 尙書省, 中書省, 門下省, 集書省을 말한다.
역주2 開門造城 : ≪資治通鑑≫에는 “往往開門 造小城於其側”으로 되어 있다.
역주3 大度水의 獠族 : 大度水는 지금의 泗川省 樂山市에서 岷江으로 유입되는 강으로, 강 연안에는 蠻族이 살고 있는데, 이들을 大度獠라고 하였다.
역주4 元嘉 연간 : 宋 文帝가 통치했던 元嘉 원년(424)부터 元嘉 30년(453)까지를 말한다.
역주5 齋閤 : 황제의 서재를 말한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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