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檀道濟 등이 淸水로부터 滑臺를 구원하러 가서 壽張에 이르렀는데, 北魏의 安平公 乙旃眷과注+① 乙旃은 代北 지역의 複姓이고, 眷은 그 이름이다. 조우하였다. 단도제가 王仲德과 段宏을 지휘하여 떨쳐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이동하며 전투를 하여 高梁亭에注+② 살펴보건대, ≪史記≫ 〈齊世家〉에 “齊 桓公이 晉나라의 난리를 토벌하러 高梁에 갔다.” 하였는데, 〈≪史記集解≫에〉 服虔이 말하기를 “〈高梁은〉 晉나라 땅이다.”라고 하고, 杜預가 말하기를 “平陽縣 서남에 있다.”라고 하였다. 〈≪史記索隱≫에〉 顏師古가 말하기를 “平陽은 東郡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資治通鑑≫ 註에〉 胡三省이 말하기를 “北魏 明元帝 泰常 8년(423)에 濟州를 설치하였는데, 碻磝城에 治所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이르러서 北魏의 濟州刺史 悉煩庫結을 참수하였다.
綱
[綱] 夏나라가 西秦을 멸망시키고 秦王 乞伏暮末을 데리고 돌아가서 그를 죽였다.
目
[目] 夏主(赫連定)가 西秦의 장수 姚獻을 공격하여 그를 패퇴시키고 드디어 그의 숙부인 赫連韋伐을 파견하여 南安을 공격하게 하였다. 성곽 안에는 크게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西秦의 出連輔政注+① 出連은 오랑캐의 복성이고, 輔政은 이름이다. 등이 夏나라로 달아나니, 西秦王 乞伏暮末이 궁색하여 관을 수레에 싣고 나와서 투항하자, 上邽로 호송하였다.
西秦의 太子司直 焦楷가 廣寧으로 달아나서 울며 그의 아버지 焦遺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나라의 총애를 입어 藩鎭의 중요한 직임을 맡고 있습니다. 지금 本朝가 뒤엎어졌으니, 어찌 현재 남은 무리들을 인솔하여 大義를 창도하여 원수를 섬멸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注+② 太子司直은 官僚의 糾彈과
초유가 말하기를 “지금 主上께서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으니, 내가 죽음을 아끼고 대의를 망각한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많은 군사로 추격을 하면 이는 주상의 목숨을 재촉해注+③ 趣(재촉하다)은 促으로 읽는다. 끊는 셈이 된다. 왕족 가운데 현명한 인사를 선택해서 받들어 주군으로 삼아 저들을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그나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초해가 마침내 제단을 쌓고 무리들과 맹세하니, 20일 동안에 달려온 사람들이 1만여 명이었다. 마침 초유가 병으로 卒하자, 추해는 혼자서 거사를 하지 못하고 도망하여 河西로 달아났다.
夏主는 마침내 걸복모말을 죽이고 그 종족을 멸하였다.
綱
[綱] 2월에 北魏가 滑臺에서 승리하였다.
目
[目] 檀道濟 등이 濟水 가에 이르러 北魏와 20여 차례 싸웠는데, 단도제가 대부분 승리하였다. 歷城에 도착해서는 叔孫建 등이 경무장을 한 기병을 보내 단도제 군대의 앞뒤를 끊고서 풀과 양식을 태워버리자, 단도제의 군대는 식량이 부족하여 전진할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安頡․司馬楚之 등이 전력으로 滑臺를 공격할 수 있었고, 魏主가 다시 장군 王慧龍을注+① 王慧龍은 王愉의 손자이다. 보내 원조하게 하였다.
朱脩之가 역성을 견고하게 몇 개월 동안 지켰으나 양식이 다하여 병사들과 함께 쥐를 구워서 먹었다. 北魏는 마침내 활대에서 승리하여 주수지를 잡았는데, 그의 절개를 아름답게 여겨 侍中으로 삼았다.
綱
[綱]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가 境内에 1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目
[目]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가 크게 향연을 열어 종묘에 고하고, 장수와 백관들은 모두 상을 받았으며, 전사들은 10년간 부역을 면제 받았다.注+① 북쪽으로 柔然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夏나라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宋나라를 방어한 공로를 포상하였다.
이때에 北魏의 남쪽 변경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 劉絜이 魏主에게 말하기를 “郡國의 백성들이 비록 토벌에 출정하지는 않았지만 농업과 잠업에 애써 노력하여 軍國에 공급하였으니, 실로 세상을 경륜하는 큰 근본이고 국고의 밑바탕입니다.
지금 太行山 동쪽으로부터 두루 수해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서 널리 감싸서 길러주십시오.”라고 하니, 魏主가 이를 따라서 경내에 1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綱
[綱] 宋나라 檀道濟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니 青州刺史 蕭思話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唱籌量沙(큰 소리로 숫자를 세면서 모래를 헤아리다)
目
[目] 檀道濟 등은 식량이 다하여 歷城에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올 적에 宋나라 군사들 가운데 도망하여 北魏에 투항한 자가 이러한 사정을 모두 고하였다. 北魏 군사들이 이를 추격하니 〈宋나라〉 무리들은 무섭고 두려워서 무너질 지경이었다.
단도제는 밤에 큰 소리로 숫자를 세어가면서 곡식처럼 모래를 마질하고 얼마 안 되는 남은 쌀을 가지고 그 위를 덮었다. 아침이 되자 北魏의 군사들은 그것을 보고 단도제의 양식이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투항한 자가 속이려 했다고 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당시에 단도제는 병사가 적었고 北魏의 병사는 매우 많았다. 단도제는 병사들에게 명하여 모두 갑옷을 입으라고 하고 자신은 흰옷을 입고서 수레를 타고 병사를 이끌고 천천히 나아갔다.
北魏 군인들은 복병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조금씩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후퇴하니, 단도제는 병사를 온전히 보존한 채 귀환하였다.
青州刺史 蕭思話는 東陽을 버리고 平昌으로 달아났고注+① 宋나라 靑州는 東陽城에 치소를 두었다. 平昌縣은 前漢에는 琅邪에 속하였고, 後漢에는 北海에 속하였고, ≪晉太康地志≫에는 城陽에 속하였는데 惠帝가 나누어 平昌郡을 설치하였다., 參軍 劉振之는 下邳를 수비하다가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北魏의 군대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으나 東陽에 쌓아 모아놓은 곡식은 이미 백성들에게 불태워졌다. 소사화는 죄에 연루되어 소환을 당해
에서 노역형을 받았다.注+② 罪에 연루되어 소환을 받아 尙方에 구금되어 노역을 한 것을 말한다.
綱
[綱] 北魏가 王慧龍을 滎陽太守로 삼았다.
目
[目] 北魏의 司馬楚之가 말하기를 “여러 지역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대규모로 宋나라를 정벌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병사들이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사마초지를 불러서 散騎常侍로 삼고, 王慧龍을 滎陽太守로 삼았다.
왕혜룡은 滎陽郡에 10년 동안 있으면서 농업과 군사를 모두 정비하여 크게 명성과 업적이 드러나니 귀의한 자가 1만여 家였다. 宋主는 北魏에다 간첩을 놓아 이간하기를 “왕혜룡은 자신이 공로는 높으나 지위가 낮다고 하여 宋나라 사람을 끌어들여 침입하게 하고 이를 틈타 사마초지를 사로잡아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注+① 司馬楚之는 이때 潁川에 주둔하고 있었다.라고 하니,
魏主가 이를 듣고 왕혜룡에게 璽書를 내려 말하기를 “劉義隆이 장군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중상모략하려고注+② 中(맞다)은 去聲이다. 하나 짐이 그것을 알고 있으니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 宋主가 다시 자객 吕玄伯을 보내어 왕혜룡을 살해하게 하였다.
여현백이 항복하는 사람으로 속여서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말할 것이 있다고 요청하자, 왕혜룡이 이를 의심하여 사람들에게 그의 품안을 뒤지게 하여 한 자나 되는 칼을 찾아냈다.
여현백이 머리를 조아리며 죽여주기를 청하니, 왕혜룡이 말하기를 “각기 자신의 주군을 위한 것뿐이다.”라고 하고, 여헌백을 풀어주었다. 측근들이 간언하기를 “여현백을 죽이지 않으면 장래에 벌어질 일을 제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왕혜룡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렸으니 저들이 또한 어찌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내가 인의를 가지고 울타리로 삼고 있으니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여헌백을 놓아주었다. 뒤에 왕혜룡이 卒하자 여현백은 그 묘소를 지켜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綱
[綱] 여름 6월에 夏主(赫連定)가 北涼을 공격하였다. 吐谷渾이 夏나라 군사들을 습격하여 패퇴시키고 혁련정을 붙잡아 데리고 돌아갔다.
目
[目] 夏主는 北魏 군사들의 압박을 겁내어 西秦의 백성注+① 秦民은 乞伏氏(西秦)에게서 잡은 백성이다. 10여만 명을 데리고 冶城에서 황하를 건너 北涼王 沮渠蒙遜을 공격하여 그 땅을 빼앗으려 하였다.
吐谷渾의 왕 慕容慕璝가 기병 3만 명을 보내어 그들이 반쯤 물을 건넜을 때를 이용하여 맞아 쳐서 夏主를 붙잡아 데리고 돌아갔다.
綱
[綱] 윤6월에 柔然이 北魏에 화평을 청하였다.
目
[目] 北魏의 변방 관리가 柔然의 순라병 20여 명을 포획하였는데, 魏主가 의복을 주어서 돌려보냈다. 유연이 감격해 기뻐하여 이에 〈유연의〉 勅連可汗이 사신을 보내 北魏에 이르자 魏主가 후하게 예우하였다.
綱
[綱] 北魏에서 사신을 보내 宋나라에 가게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目
[目] 魏主가 周紹를 보내어 宋나라에 聘問하게 하고 또 혼인을 청하자, 宋主가 모호하게 답변하였다.
綱
[綱] 宋나라가 劉湛을 太子詹事 給事中으로 삼았다.
目
[目] 荊州刺史 江夏王 劉義恭이 해마다 점점 자라서 정무를 독단하려 하였는데, 長史 劉湛이 늘 그것을 억제하자 마침내 유담과 사이가 벌어졌다.注+① 宋나라 제도에 어린 제후왕이 州에 부임하면 대개 長史가 府州의 일을 대행하여 일이 모두
황제는 손수 쓴 조서를 내려서 채납하고 장소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작위와 봉토를 삭감하였다.
사술이 그의 아들 謝綜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장소의 평소 충정을 긍휼히 여겨서 특별히 용서를 해주셨지만 내가 말씀드린 것이 마침 주상의 뜻에 맞았기 때문에注+③ “謬會”는 마침 그 뜻에 맞았다는 말과 같다. 특별히 채납된 것이다. 만약 이러한 행적이 널리 알려지면 주상의 은덕을 침탈하는 것이 되니 이것은 크게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하고, 사종을 시켜 면전에서 그것을 불태우게 하였다.
에 “말의 진흙 가리개를 韂(말다래)이라 한다. 韂은 昌豔의 切이다.”라고 하였다. ≪蜀註≫에 “진흙을 차단해 막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를 수십 년 동안 바꾸지 않았다. 魏主가 樂工을 시켜서 여러 신하들을 두루 칭송하게 하였는데 “崔浩처럼 지혜로워야 하고, 장손도생처럼 청렴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綱
[綱] 北魏가 사신을 보내서 北涼王 沮渠蒙遜에게 官爵을 수여하였다.
目
[目] 魏主가 사신을 뽑아 北涼에 가게 하려 할 적에 崔浩가 尙書 李順을 추천하자 마침내 이순을 太常으로 삼았다. 沮渠蒙遜에게 관작을 수여하여 涼王으로 삼아서 7郡을注+① “七郡”은 武威․張掖․敦煌․酒泉․西海․金城․西平이다. 다스리고 將相과 여러 卿과 百官을 두며 天子의 旌旗를 걸고 出入할 적에
황폐해진 정무를 다스리며 隱逸한 백성을 등용하려 한다. 范陽 盧玄, 博陵 崔綽, 趙郡 李靈, 河間 邢穎, 渤海 髙允, 廣平 游雅, 太原 張偉 등은注+① 盧玄은 盧諶의 증손이고, 李靈은 李順의 從父兄(사촌형)이다. 모두 현명하며 뛰어난 사람의 후예들이다.
州郡에서 제일 우수하니, 여기에 견줄 만한 사람들을 州郡에 모두 칙명을 내리노니 예우하여 출발해 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드디어 노현 등 수백 명을 징소하여 등급에 따라서 차등을 두어 등용하였는데, 최작은 어머니가 연로한 것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였고, 노현 등은 모두 中書博士를 임명받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을 주군에서 대부분 핍박하여 보내자 魏主는 다시 수령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禮儀로 거듭注+② 申은 거듭함이다. 유시하여 그 진퇴를 隱士들의 임의에 맡기게 하였다.
崔浩는 매번 노현과 함께 말을 할 적에 번번이 감탄하기를 “子眞(노현의 字)과 대화하면 내가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라고 하였다.注+③ 崔浩는 盧玄의 외삼촌이다. 子眞은 노현의 자이다.
하였다. 노현이 이를 말려서 말하기를 “무릇 제도를 창립하고 사업을 세우는 데에는 각기 그때가 있으니, 이 일을 좋아할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注+④ 詎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마땅히 재삼 고려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최호가 따르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얻었다.
綱
[綱] 겨울 10월에 北魏가 崔浩를 시켜서 律令을 정하게 하였다.
目
[目] 예전에 北魏의 昭成帝(拓跋什翼犍)가注+① 拓跋什翼犍은 시호가 昭成帝이다. 처음으로 법령을 제정하면서 이르기를 “반역을 저지른 사람은 멸족하고, 그 나머지 사형에 처할 사람은 금전이나 말을 바쳐서 속죄하는 것을 허락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은 사람의 집에 소와 말과 장례 도구를 주어서 화해하는 것을注+② 平은 화해한다는 뜻이다. 허락하며, 관청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에는 5배로 배상하고 개인의 물건인 경우에는 10배로 배상한다.”注+③ 備는 배로 배상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준엄하고 엄밀한 것을 걱정하여 三公郎 王德에게 명하여 刪定하게 하였는데 간결하고 편이함을 힘써 숭상하였다.
태조가 말년에 병이 들자, 형벌이 문란하고 가혹하게 되었다. 太宗(拓跋嗣)이注+⑤ 明元帝의 묘호가 太宗이다. 이를 계승하여 법조문이 또한 각박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崔浩에게 명하여 다시 율령을 개정하게 하여 5년형과 4년형의 徒刑을 없애고 1년형을 늘리게 하였다. 巫蠱한 사람은 黑羊을注+⑥ 羖는 음이 古이다. ≪說文解字≫에 “夏羊(검은 양)의 수컷을 羖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일설에 “羖는 䍽羊(山羊)이다.”라고 한다. 䍽은 음이 歷이다. 짊어지거나 개를 품에 안게 하고서 연못에 가라앉게 하였다.注+⑦ 漢나라 관직은 秩石(녹봉의 양)으로 차등을 두었는데 魏․晉 시대에 비로소 品秩(官品)의 차등을 정하였다.
처음으로 관품이 9품 이상인 사람에게는 관작을 내놓아서 형벌을 속죄하도록 하였다. 형벌에 처해야 할 부인이 임신한 경우는 출산 후 100일이 지난 후에 결행하게 하였다.
궁궐 문의 왼편에 登聞鼓를 매달아 억울한 사람들에게 뜻을 통하도록 하였다.注+⑧ 禹임금은 獄訟을 하는 사람에게 鞀(자루 달린 작은 북)를 흔들도록 하였다. ≪周禮≫ 〈秋官 大司寇〉에 “왼쪽
에는 罷民(교화를 안 따르는 백성)을 앉혀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억울한 사람들에게 뜻을 통하도록 하는 것이다. 登聞鼓는 억울함을 지닌 사람들이 궐문에 나아와 북을 쳐서 즉시 상달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率府 :
秦나라 때 처음 설치되었으며 漢나라 때에도 인습하였다. 晉나라 때 다섯 率府를 두니, 左衛率, 右衛率, 前衛率, 後衛率, 中衛率이다. 남북조 시대에는 각 나라와 시기에 따라 바뀌었다. 唐나라 때 10率府로 정비되었다. 이는 太子의 속관으로 東宮 병장기, 衛兵, 궁궐 수비 등을 담당하였다.
역주2魏收의 地形志 :
魏收는 처음에는 北魏에서 벼슬하였으며 나중에 北齊에서 벼슬하여 尙書左僕射에 올랐다. 그의 저술에는 北魏의 역사를 기록한 ≪魏書≫가 있다. 〈地形志〉는 ≪魏書≫의 篇名이다.
역주3尙方 :
帝王의 기물을 만드는 관아이다. 상방의 노역이 심하였고, 죄인들에게 노역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역주4魏以王慧龍 爲滎陽太守 :
“裴潜(漢 獻帝 建安 21년(216))과 張薿(漢 後主 延熙 3년(240))를 기록한 것으로부터 太守를 기록한 것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政事의 업적으로 기록된 것은 없었다. 이때에 이른 뒤에 北魏에는 王慧龍을 기록하고, 宋나라에서는 孔靈符를 기록하였다. 이로부터 隋나라가 郡을 고쳐 州를 만들기까지 〈현명한 태수의 기록이〉 알려진 적은 없다. 심하구나, 현명한 태수를 많이 보지 못함이여.[自書裴潜(漢獻帝建安二十一年)張薿(漢後主延熙三年) 書太守 不知其幾矣 未有以政績書者 至是然後 魏書王慧龍 宋書孔靈符 由是至隋改郡爲州 無聞焉 甚矣 賢守之不多見也]” ≪書法≫ ‘宋書孔靈符’는 ≪資治通鑑綱目≫ 宋主 劉子業 景和 원년(465) 綱에 “宋主가 會稽太守 공령부를 죽였다.[宋主殺其會稽太守孔靈符]”라고 하고, 그 目에 “공령부가 부임하는 곳마다 정사의 업적이 있었으나 임금의 近臣들에게 거슬려 저촉하니, 근신들이 비방하였다. 宋主 유자업은 사신을 보내 공령부의 두 명 아들까지 아울러 채찍으로 때려 죽였다.[靈符所至 有政績 以忤犯近臣 近臣譛之 子業遣使 鞭殺竝其二子]”라고 하여, 공령부가 살해된 기사이지만 정사의 업적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隋나라 때 郡을 州로 바꾸었다.
역주5行事 :
南北朝 시대에 行某州, 行某府事로 다른 관직을 대행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長史, 司馬 등이 刺史나 將軍의 직무를 대행하였다. 이는 어린 皇子들을 州刺史나 장군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실제 정무를 장사나 사마가 대신하였던 것이다.
역주6宋……않았다 :
桓玄이 帝位를 찬탈했을 적에 張邵의 아버지 張敞은 尚書로 있다가 잘못에 연루되어 廷尉卿으로 강등되었다. 宋 武帝가 환현을 토벌할 때 장소가 장창에게 아뢰어 표문을 올려 충성을 바치게 하자 송 무제는 크게 기뻐하고 관청 門을 지키는 관리에게 “張廷尉의 집을 침범하는 자는 軍法으로 논죄하겠다.”라고 하였다. 일이 평정된 뒤에 장창을 吳郡太守로 삼고, 王謐이 揚州를 鎭守하게 되어서는 장소를 불러 主簿에 보임하였다. 劉毅는 지위가 亞相이었는데 人士들을 좋아하고 인재들을 아껴서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장소만은 가서 친하지 않았으므로 친구가 괴이해 하여 묻자 장소는 “主公께서는 當世에 저명한 인걸이신데 어찌 번거롭게 여러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劉穆之가 송 무제에게 이를 말하자 송 무제는 더욱 장소를 친애하였고, 太尉參軍으로 전보시켰다.(≪南史≫ 〈張邵列傳〉)
역주7類篇 :
宋나라 학자 王洙 등이 편찬을 시작하여 宋 神宗 熙寧 2년(1069)에 45권으로 완성한 韻書이다. ≪集韻≫에 수록된 글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빠진 것을 보충하고 중복된 글자를 제거하였다.
역주8警蹕(경필) :
‘出警入蹕’의 줄임말로 외출할 때에는 경계하고 들어올 때에는 사람들을 辟除함을 이른다. 一說에는 출경입필은 한 가지씩만을 든 것으로, 실제는 출입할 적에 모두 경계하고 벽제하는데, 互文을 사용하여 각각 한 가지씩 든 것이라 한다. 호문은 같은 내용이 중복될 경우 다 쓰지 않고 각각 한 가지만을 듦을 이른다.
역주9漢初諸侯王故事 :
前漢 초기에는 諸侯王의 政權機構가 중앙의 천자와 비슷함을 말한 것이다. 제후왕은 자신이 封國의 丞相과 都尉 그리고 기타 관리를 임명하는 권력을 가졌다.(≪資治通鑑新注≫, 陝西人民出版社, 1998)
역주10魏徵世冑遺逸 :
“≪資治通鑑綱目≫에서 선비를 징소한 것을 기록한 것이 21번인데(漢 光武帝 建武 5년(29)에 자세하다.), 그 당사자를 기록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째서 그 당사자를 기록하지 않았는가. 모두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니, 이때에 盧玄 등 수백 명을 징소하였다.[綱目書徴士二十有一(詳漢光武建武五年) 未有不書其人者 此則曷爲不書 不勝書也 於是 徴盧玄等凡數百人]” ≪書法≫
역주11무력을……강구하여 :
원문의 ‘偃武修文’는 ≪書經≫ 〈周書 武成〉에 나오는 말로 “武王이 商나라를 이기고 돌아와 豐에 이르러 武를 쉬고 文을 닦아서 華山의 남쪽에 軍馬를 돌려보내고 桃林의 들판에 짐수레를 끌던 소를 풀어놓아서 무력을 쓰지 않겠다는 뜻을 천하에 보였다.[王來自商 至于豐 乃偃武修文 歸馬于華山之陽 放牛于桃林之野 示天下不服]”라고 하였다.
역주12流品 :
각 지역의 문벌 등급으로 九品官人法에서는 이를 鄕品이라 한다. 九品官人法은 九品中正制라고도 불리는 관리 등용제도이다. 魏나라 때 漢나라의 秩石制에 의한 관직의 등급을 1品에서 9품까지의 官品으로 재편성하고서 郡國에 中正官을 설치하고 이들에게 현 관료들과 仕官 대상자들의 자질을 심사하게 하였다. 중정관이 관내 인물들을 1품에서 9품까지 등급을 매겼는데, 이를 鄕品이라고 한다. 초임관을 起家官이라 하는데, 기가관은 향품보다 4등급 낮추어 그에 해당하는 관품의 관직을 부여하였다. 이는 魏晉南北朝時代 귀족제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岩波書店)
역주13姓族을……구별하려고 :
姓族詳定, 姓族分定이라고 하는데, 北朝人과 漢人의 인물에 대한 귀족적 평가를 통해 문벌을 등급화하려고 한 것으로 이를 통해 관직, 혼인 등을 결정하게 한 것이다. 이는 北魏에 대한 漢化政策으로 崔浩 때에는 좌절되었으나 뒤의 孝文帝 때 이루어지게 된다.(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岩波書店)
역주14四部의 大人 :
北魏 초기에는 禮俗이 순박하고 刑禁이 간단하였다. 宣帝(拓跋推寅, ?~13)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 다시 四部의 大人을 두었는데, 王庭에 앉아 辭訟을 판결하고 말로 約束을 하고 부호를 새기는 방법으로 일을 기록하였으며 감옥과 심문하는 방식은 없었고 모든 犯罪者는 일체 그때에 임하여 판결하고 징벌해 보냈다.(≪魏書≫ 권111 〈刑罰志〉) 拓跋什翼犍(318~376)은 北魏가 아직 代國일 때이고 지금 말하는 내용은 代國 이전 북방 대흥안령 지역에서 수렵하다가 남쪽 大澤으로 내려와 유목 생활로 바꾼 것을 말한다.
역주15이전……律令 :
여기의 이전 시대는 北魏의 선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이전 왕조의 율령을 가리킨 것이다.
역주16嘉石 :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앉혀 부끄러움을 주어 회개시키는 데 쓰이는 무늬가 있는 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