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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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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年(A.D.22)
임오년壬午年(A.D.22)
三年이라
나라 왕망 지황王莽 地皇 3년이다.
春二月 關東 하다
】 봄 2월에 관동關東 지역에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夏四月 樊崇兵 自號赤眉어늘 遣其太師王匡 將軍廉丹하여 擊之하다
】 여름 4월에 번숭樊崇의 군대가 스스로 적미赤眉라고 칭하자, 왕망王莽이 그의 태사 왕광太師 王匡장군 염단將軍 廉丹을 보내 적미를 공격하게 하였다.
樊崇等 衆旣寖盛하니 乃相與爲約호되 殺人者死 傷人者償創注+償, 還也. 創, 傷也.이라하다
】 처음에 번숭樊崇 등은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마침내 서로 약속하기를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부상시킨 자는 상처를 보상한다.”注+은 상환함이요, 은 상처이다. 하였다.
遣太師王匡 更始將軍廉丹하여 討之注+更, 工衡切.하니 崇等 恐其衆與莽兵亂하여 乃皆朱眉以相識別이라 由是 號曰赤眉注+識, 與誌同. 別, 異也.라하니라
왕망王莽태사 왕광太師 王匡경시장군 염단更始將軍 廉丹을 보내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注+공형工衡이다. 번숭 등은 자기의 무리가 왕망의 군대와 뒤섞일까 염려하여 마침내 모두 눈썹에 붉은 칠을 하여 표시해서 서로 구별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이들을 이름하여 ‘적미赤眉’라고注+(표시하다)는 와 같다. 은 구별하여 다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匡, 丹 合將銳士十餘萬人호되 所過 放縱하니 東方 爲之語曰 寧逢赤眉언정 不逢太師
왕광과 염단이 연합하여 정예병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는데, 지나가는 곳에 병사들을 풀어놓고 단속하지 않으니, 동쪽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미를 만날지언정 태사太師(왕광)를 만나지 말아야 하고,
太師 尙可어니와 更始 殺我라하여 卒如田況之言하니라
태사太師는 그래도 괜찮지만 경시更始(염단)는 우리를 죽인다.” 하여, 끝내 전황田況의 말과 같게 되었다.
綠林兵 分爲下江, 新市兵이러니 遣其將軍嚴尤, 陳茂하여 擊之하다
녹림綠林의 군대가 하강下江신시新市의 군대로 나뉘었는데, 왕망王莽장군 엄우將軍 嚴尤진무陳茂를 보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綠林賊 遇疾疫死者且半이라 乃各分散할새 王常等 西入南郡하여 號下江兵이라하고
녹림綠林의 도적들 중에 역질을 만나 죽은 자가 거의 절반에 이르렀다. 이에 각각 나뉘어 흩어질 적에 왕상王常 등은 서쪽으로 남군南郡에 들어가서 하강下江의 군대라 이름하고,
王匡等 北入南陽하여 號新市兵이라하고 皆自稱將軍이어늘 遣嚴尤, 陳茂하여 擊之하다
왕광王匡 등은 북쪽으로 남양南陽에 들어가서 신시新市의 군대라 이름하고는 모두 장군이라 자칭하였는데, 왕망王莽엄우嚴尤진무陳茂를 보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蝗飛蔽天하다
황충蝗蟲이 날아 하늘을 뒤덮었다.
◑流民入關者 數十萬人이러라
관중關中에 들어간 유민流民이 수십만 명이었다.
聞城中飢饉하고 以問中黃門王業한대 業曰 皆流民也라하고
왕망王莽도성都城 안의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고 중황문 왕업中黃門 王業에게 물으니, 왕업이 대답하기를 “이들은 모두 유리流離하는 백성들입니다.” 하였다.
乃市所賣粱飯肉羹 持入示莽曰 居民食 咸如此라하니 信之하다
그러고는 마침내 시장에서 파는 기장밥과 고깃국을 가지고 들어와 왕망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도성 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식생활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왕망은 그의 말을 믿었다.
秋七月 荊州平林兵하다
】 가을 7월에 형주 평림荊州 平林의 군대가 일어났다.
新市王匡等 進攻隨注+賢曰 “隨縣, 屬南陽郡, 今隨州縣.”하니 平林人陳牧, 廖湛 復聚衆千餘人하여 號平林兵이라하여 以應之注+賢曰 “平林, 地名, 在今隨州隨縣東北.” 廖, 力敎切, 姓也.하다
신시新市왕광王匡 등이 로 진격하니,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수현隨縣남양군南陽郡에 속하니 지금의 수주현隨州縣이다.” 하였다. 평림平林 사람 진목陳牧요담廖湛(요담)이 다시 무리 1천여 명을 모아서 평림平林의 군대라 칭하고 호응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평림平林지명地名이니, 지금의 수주 수현隨州 隨縣 동북쪽에 있다.” 하였다. 역교力敎이니 이다.
적미赤眉염단廉丹을 격파하고서 그를 주살하였다.
莽以詔書讓廉丹한대 惶恐하여 夜召其掾馮衍하여 以書示之하니
왕망王莽조서詔書를 내려 염단廉丹을 꾸짖자, 염단은 두려워하여 밤에 자신의 부하인 풍연馮衍을 불러 왕망이 내린 조서詔書를 보여주었다.
因說丹曰 張良以五世相韓이라하여 椎秦始皇博浪之中하니 將軍之先 爲漢信臣注+廉褒, 宣帝時爲後將軍, 卽丹之先.이라
풍연은 인하여 염단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장량張良은 자신이 나라의 다섯 조정에서 재상을 지낸 가문이라 하여, 진 시황秦 始皇박랑博浪에서 철퇴로 저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선대는 나라의 신실한 신하였습니다.注+선제宣帝 때에 후장군後將軍을 지낸 염포廉褒가 바로 염단廉丹의 선조이다.
新室之興 英俊不附하고 今海內潰亂하여 人懷漢德 甚於詩人思召公也하니 人所歌舞 天必從之
나라가 일어남에 영웅호걸들이 따르지 않고, 지금은 해내海內가 혼란하여 사람들이 나라의 을 생각하기를 보다 더 심하게 하니, 하늘은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반드시 따릅니다.
方今爲將軍計컨대 莫若屯據大郡하여 鎭撫吏士하고 砥厲其節하여 納雄傑之士하고
지금 장군將軍을 위하여 계책을 세우건대, 대군大郡을 점거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진무하고, 충절을 갈고 닦아서 영웅호걸의 선비들을 받아들이며,
詢忠智之謀하여 興社稷之利하고 除萬人之害하니 則福祿流於無窮하고 功烈著於不滅하리니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계책을 물어 사직社稷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만인萬人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록福祿이 무궁한 후대에까지 이어지며 공렬功烈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드러날 것이니,
何與軍覆於中原하고 身膏於草野하여 功敗名喪하여 恥及先祖哉注+與, 猶如也.리오 不聽하다 奉世曾孫也
드넓은 벌판에서 군대가 전복되어 멸망하고 몸이 썩어 초야를 기름지게 해서 공이 무너지고 이름이 상실되어 치욕이 선조에게 미치는 것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注+(같다)는 와 같다. 그러나 염단은 듣지 않았다. 풍연은 풍봉세馮奉世증손曾孫이다.
赤眉別校董憲等衆數萬人 在梁郡이어늘 匡, 丹 引兵進戰이라가 兵敗하여 匡走하니
적미赤眉별교別校동헌董憲 등의 무리 수만 명이 양군梁郡에 있었는데, 왕광王匡염단廉丹이 군대를 이끌고 전진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왕광이 도망하였다.
丹曰 小兒 可走어니와 吾不可라하고 遂戰死하니라
염단이 말하기를 “소아小兒는 도망할 수 있지만, 나는 도망할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싸우다가 죽었다.
長沙定王發 生舂陵節侯買注+發, 景帝子也. 舂陵, 鄕名, 本屬零陵郡泠道縣. 元帝時, 徙南陽, 仍號舂陵.하고 買生戴侯熊渠하고 熊渠生考侯仁하니
】 처음에 장사정왕 유발長沙定王 劉發용릉절후 유매舂陵節侯 劉買를 낳았고注+유발劉發경제景帝의 아들이다. 용릉舂陵의 이름으로 본래 영릉군 영도현零陵郡 泠道縣에 속했었는데, 원제元帝 때에 남양南陽으로 옮기고 그대로 용릉舂陵이라 이름하였다. 유매가 대후 유웅거戴侯 劉熊渠를 낳았고 유웅거가 고후 유인考侯 劉仁을 낳았는데,
仁以南方卑濕이라하여 徙封南陽之白水鄕하여 與宗族往家焉하다
유인은 남쪽 지역이 낮고 습하다 하여 봉읍封邑남양南陽백수향白水鄕으로 옮겨서 종족宗族들과 함께 남양南陽에 가서 거주하였다.
커늘 子敞러니 値莽簒位國除하다 節侯少子外 爲欝林太守하니 外生鉅鹿都尉回하고
유인이 죽자 그의 아들 유창劉敞이 뒤를 이었는데, 마침 왕망王莽제위帝位를 찬탈하는 때를 만나 나라가 없어졌다. 절후節侯(유매)의 작은아들 유외劉外울림欝林태수太守가 되었는데, 유외는 거록도위 유회鉅鹿都尉 劉回를 낳았고
回生南頓令欽注+南頓縣, 屬汝南郡.하고 欽娶湖陽樊重女하여 生三男하니 縯, 仲, 秀注+湖陽縣, 屬南陽郡. 縯, 音衍.
유회는 남돈령 유흠南頓令 劉欽을 낳았고注+남돈현南頓縣여남군汝南郡에 속하였다. 유흠은 호양湖陽 사람 번중樊重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으니, 유연劉縯, 유중劉仲, 유수劉秀이다.注+호양현湖陽縣남양군南陽郡에 속하였다. 은 음이 이다.
性剛毅慷慨하고 有大節하여 常憤憤懷復社稷之慮하고 不事家人居業하여 傾身破産하여 交結天下雄俊하고
유연劉縯은 성품이 강직하고 굳세고 호방하였으며 큰 절개가 있어서 항상 비분강개하여 사직社稷을 회복할 생각을 품고, 집안 식구들의 살림살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온 힘을 쏟고 재산을 털어 천하의 영웅호걸들과 교제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隆凖日角注+日角, 謂庭中骨起, 狀如日.이라 嘗受尙書長安하여 略通大義하고 性勤稼穡하니 常非笑之하여 比於高祖兄仲注+仲, 郃陽侯喜也, 能爲産業. 高祖爲太上皇, 壽曰 “始大人, 常以臣不能治産業, 不如仲力, 今某業所就 孰與仲多.”이러라
光武帝 劉秀(≪萬古際會圖像≫)光武帝 劉秀(≪萬古際會圖像≫)
유수劉秀는 코가 높고 이마가 해처럼 솟아 있었는데注+일각日角”은 이마 중앙 부분의 뼈가 솟아 모양이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음을 이른다., 일찍이 장안長安에서 ≪상서尙書≫를 수학하여 대의大義를 대략 통하였고, 성품이 부지런하여 농사에 진력하니, 유연이 항상 비웃으면서 고조高祖의 형인 유중劉仲에게 견주었다.注+유중劉仲합양후 유희郃陽侯 劉喜이니, 집안의 살림살이를 잘하였다. 고조高祖태상황太上皇을 위하여 축수祝壽하면서 말하기를 “처음 부친께서는 항상 이 집안의 살림살이를 잘하지 못하여 중형仲兄(유희劉喜)이 힘써 농사짓는 것만 못하다고 하셨는데, 지금 저의 성취한 사업이, 중형仲兄과 비교하여 누가 더 낫습니까?” 하였다.
秀嘗過穰人蔡少公하니 少公 頗學圖讖이라 言劉秀當爲天子라하여늘
유수劉秀가 일찍이 사람인 채소공蔡少公을 방문하였다. 채소공은 자못 도참설을 배웠는데, 말하기를 “유수가 마땅히 천자天子가 될 것이다.” 하니,
或曰 是國師公劉秀乎인저 秀戱曰 何用知非僕邪아하니 坐者皆大笑하니라
혹자가 말하기를 “이는 바로 국사공 유수國師公 劉秀(유흠劉歆)일 것이다.” 하였다. 유수가 농담으로 “내가 아닌 줄을 어떻게 아는가.” 하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宛人李守 好星歷讖記러니 嘗謂其子通曰 劉氏當興이니 李氏爲輔라하더니
사람 이수李守천문天文역법曆法, 도참기圖讖記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그의 아들 이통李通에게 이르기를 “유씨劉氏
李通(≪雲臺三十二將圖≫)李通(≪雲臺三十二將圖≫)
마땅히 다시 일어날 것이니, 우리 이씨李氏가 그의 보좌가 되어야 한다.” 하였다.
及新市, 平林兵起 南陽騷動이어늘 從弟軼 謂通曰注+軼, 音逸. 今四方擾亂 漢當復興이니
그러다가 신시新市평림平林의 군대가 일어나 남양南陽이 소란하자, 이통의 종제從弟이일李軼(이일)이 이통에게 이르기를注+은 음이 이다. “지금 사방이 소란스러우니 나라가 마땅히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南陽宗室 獨劉伯升兄弟 汎愛容衆하니 可與謀大事注+伯升, 縯字.니라 通笑曰 吾意也라하니라
남양南陽종실宗室 중에 유독 유백승劉伯升(유연劉縯) 형제가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무리를 포용하니, 더불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만합니다.”注+백승伯升유연劉縯이다. 하니, 이통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뜻이다.” 하였다.
秀賣穀於宛이어늘 遣軼往迎秀하여 與相約結하고 定謀議하여
】 마침 유수劉秀에서 곡식을 팔고 있었는데, 이통李通이일李軼을 보내어 가서 유수를 맞이하여 서로 약속을 맺고 계책을 정하여,
欲以立秋材官都試騎士日 劫前隊大夫甄阜及屬正梁丘賜하여 因以號令大衆하고 使軼與秀 歸舂陵하여 擧兵以相應注+莽改南陽曰前隊, 置大夫, 職如太守, 每隊置屬正一, 職如都尉.하다
전수前隊(전수)의 대부大夫견부甄阜속정屬正양구사梁丘賜를 위협하고 인하여 큰 무리를 호령하고, 이일과 유수로 하여금 용릉舂陵으로 돌아가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였다.注+왕망王莽남양南陽을 고쳐 전수前隊라 하고 대부大夫를 두었는데 직책이 태수太守와 같았으며, 마다 속정屬正 한 사람을 두었는데 직책이 도위都尉와 같았다.
於是 召諸豪傑하여 計議曰 王莽暴虐하여 百姓分崩하고 今枯旱連年하여 兵革竝起하니
이에 유연劉縯호걸豪傑들을 불러 의논하기를 “왕망王莽이 포학하여 백성들이 이반하고, 지금 가뭄이 몇 년 동안 이어져서 병란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다.
此亦天亡之時 復高祖之業하고 定萬世之秋也注+言定天下, 傳之萬世, 此其時也. 秋, 一歲中功成之時, 故擧以爲言.라하니 衆皆然之러라
이는 하늘이 왕망을 망하게 하는 때이니, 고조高祖(유방劉邦)의 기업基業을 회복하고 만세萬世를 안정시킬 기회이다.”注+〈“정만세지추야定萬世之秋也”는〉 지금이 천하天下를 평정하여 만세萬世에 전할 시기임을 말한 것이다. 가을은 1년 중에 농사지은 공력이 이루어지는 때이므로, 가을을 들어 말한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겼다.
於是 分遣親客於諸縣하여 起兵할새 自發舂陵子弟하니 子弟恐懼하여 皆亡匿曰 伯升殺我라하더니
】 이때에 친한 들을 여러 으로 나누어 보내서 군대를 일으킬 적에 유연劉縯이 직접 용릉舂陵의 자제들을 징발하니, 자제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해 숨으며 말하기를 “백승伯升이 나를 죽일 것이다.” 하였다.
及見秀絳衣大冠하여는 皆驚曰 謹厚者亦復爲之라하고 乃稍自安注+絳衣․大冠, 將軍服也. 大冠, 環纓無蕤, 以靑絲爲緄, 加雙鶡尾, 竪左右, 謂之鶡冠. 鶡, 音芬, 勇雉也, 其闘對一死而止.하니라
그러다가 붉은 옷을 입고 큰 을 쓴 유수劉秀를 보고는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신중하고 후덕한 자도 다시 이 일을 한다.” 하고, 이에 차츰 저절로 안정되었다.注+붉은 옷과 큰 관은 장군將軍의 의복이다. 큰 관은 고리로 된 갓끈에 늘어진 술이 없고 푸른 실로 띠를 만들고 두 개의 분조鶡鳥(꿩 비슷한 새)의 꼬리를 가하여 좌우에 세웠는데, 이것을 분관鶡冠(분관)이라 하였다. 은 음이 으로 용맹한 꿩이니, 그들은 서로 싸울 적에 한 마리가 죽어야 싸움을 그만둔다.
凡得子弟七八千人하여 部署賓客하고 自稱柱天都部注+柱天, 若天之柱也. 都部者, 都統其衆也.하니 秀時年二十八이러라
대략 7, 8천 명의 자제를 얻어서 빈객들을 나누어 부서部署를 정하고 주천도부柱天都部라 자칭하니,注+주천柱天은 하늘의 기둥과 같은 것이다. 도부都部는 그 무리를 모두 통솔한다는 뜻이다. 유수는 이때 나이가 28세였다.
李通 未發 事覺亡走하니 父守及家屬坐死者 六十四人이러라
이통李通이 출발하기 전에 일이 발각되어 도망하여 달아나니, 아버지 이수李守와 함께 연좌되어 죽은 가솔이 64명이었다.
使族人으로 招說新市平林兵하여 與其帥王鳳, 陳牧으로 西擊長聚하여 進屠唐子鄕注+長聚, 聚名. 賢曰 “唐子鄕, 有唐子山, 在今唐州湖陽縣西南.”하고
유연劉縯이 집안사람을 시켜 신시新市평림平林의 군대를 불러 설득해서 그들의 장수인 왕봉王鳳진목陳牧과 함께 서쪽으로 장취長聚를 공격하고서 당자향唐子鄕을 도륙하고注+장취長聚취락聚落(촌락村落)의 이름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당자향唐子鄕당자산唐子山이 있으니, 지금의 당주 호양현唐州 湖陽縣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
又殺湖陽尉하고 進拔棘陽注+棘陽, 縣名, 屬南陽郡.하니 李軼, 鄧晨 皆將賓客來會注+秀姊元, 爲鄧晨妻.하다
호양위湖陽尉를 죽이고 진격하여 극양棘陽을 함락하니注+극양棘陽의 이름이니 남양군南陽郡에 속하였다., 이일李軼등신鄧晨이 모두 빈객을 거느리고 와서 회합하였다.注+유수劉秀의 누이인 유원劉元등신鄧晨의 아내가 되었다.
下江兵 與莽荊州牧戰하여 大破之하다
하강下江의 군대가 왕망王莽형주목荊州牧과 싸워서 대파大破하였다.
嚴尤, 陳茂 破下江兵이러니 成丹等 收散卒復振하여 與荊州牧으로 戰於上唐하여 大破之注+賢曰 “上唐, 鄕名, 故城在今隨州棗陽縣東北.”하다
엄우嚴尤진무陳茂하강下江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성단成丹 등이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여 다시 기세를 떨쳐 상당上唐에서 형주목荊州牧과 싸워 대파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상당上唐의 이름이니, 옛 은 지금의 수주 조양현隨州 棗陽縣 동북쪽에 있었다.” 하였다.
冬十一月 有星孛于張注+張六星, 在天廟北, 主天廚飮食賞賚觴客.하다
】 겨울 11월에 패성孛星장수張宿에 나타났다.注+장수張宿의 여섯 별은 천묘天廟의 북쪽에 있으니, 천주天廚의 음식과 을 주고 손님들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것을 주관한다.
劉縯 欲進攻宛할새 至小長安聚하여 與甄阜, 梁丘賜戰하여注+賢曰 “續漢書 ‘淯陽縣, 有小長安聚, 故城在今鄧州南陽縣南.’”하다
유연劉縯을 진격하고자 할 적에, 소장안취小長安聚에 이르러 견부甄阜양구사梁丘賜와 싸워서 패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속한서續漢書≫에 ‘육양현淯陽縣소장안취小長安聚가 있으니, 옛 이 지금의 등주 남양현鄧州 南陽縣 남쪽에 있다.’ 했다.” 하였다.
復收兵하여 保棘陽이러니 阜, 賜乘勝하여 留輜重於藍鄕하고 引精兵十萬하여 南臨沘水注+比陽縣, 有藍鄕. 沘, 音比. 水經注 “沘水出沘陽縣東北大胡山, 南與澧水會, 謂之派水.”하다
유연이 다시 병력을 수습하여 극양棘陽을 지키고 있었는데, 진부와 양구사가 승세를 타고 치중수輜重隊(보급부대)를 남향藍鄕에 남겨두고 정예병 10만 명을 인솔하여 남쪽으로 비수沘水에 이르렀다.注+비양현比陽縣남향藍鄕이 있다. 는 음이 이다. ≪수경주水經注≫에 “비수沘水비양현沘陽縣 동북쪽 대호산大胡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예수澧水와 만나니, 이것을 파수派水라 한다.” 하였다.
新市, 平林 見漢兵數敗하고 各欲解去러니 下江兵五千餘人 至宜秋注+宜秋, 聚名. 續漢志 “南陽平氏縣, 有宜秋聚.”하니
신시新市평림平林의 군대는 나라 군대가 〈왕망王莽의 군대에게〉 여러 번 패전하는 것을 보고는 각각 해산하여 떠나가고자 하였는데, 마침 하강下江의 병력 5천여 명이 의추宜秋에 이르렀다.注+의추宜秋촌락村落의 이름이다. ≪속한지續漢志≫에 “남양 평씨현南陽 平氏縣의추宜秋라는 취락聚落이 있다.” 하였다.
縯與秀俱造其壁하여 曰 願見下江一賢將하여 議大事注+
王常(≪雲臺三十二將圖≫)王常(≪雲臺三十二將圖≫)
將, 卽亮切.
하노라 衆推王常이어늘 見常하고 說以合從之利한대
이에 유연劉縯유수劉秀가 함께 그 성벽으로 찾아가서 설득하기를 “하강의 한 어진 장수를 만나보고 대사大事를 의논하기를 원한다.”注+(장수)은 즉량卽亮이다. 하였다. 여러 사람이 왕상王常을 추대하자, 유연은 왕상을 만나보고 합종合縱의 이로움으로 설득하니,
大悟曰 王莽殘虐 百姓思漢이러니 今劉氏復興하니 卽眞主也라하니 遂與常深相結而去하다
왕상이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왕망이 잔학함에 백성들이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유씨劉氏가 다시 일어나니 바로 참다운 군주이다.” 하였다. 유연은 마침내 왕상과 깊이 정의情誼를 맺고 떠나왔다.
하여 具爲餘將言之注+常與縯會, 餘將成丹․張卬在軍.한대 皆曰 大丈夫旣起 當各自爲主 何故受人制乎리오
왕상王常이 돌아와서 다른 장수들에게 이 사실을 자세히 말하자注+왕상王常유연劉縯과 만나고, 나머지 장수인 성단成丹장앙張卬(장앙)은 군중에 있었다., 모두 말하기를 “대장부大丈夫가 기왕에 군대를 일으켰으면 마땅히 각자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남의 제재를 받아야 합니까?” 하였다.
乃徐曉說之曰 王莽苛酷하여 積失百姓之心하니 民之謳吟思漢 非一日也 使吾屬으로 因此得起
왕상이 차근차근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왕망王莽이 가혹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여러 번 잃었으니,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며 나라를 그리워한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로 인하여 군대를 일으킬 수 있었다.
夫民所怨者 天所去也 民所思者 天所與也 擧大事 當下順民心하고 上合天意라야 功乃可成이라
백성들이 원망하는 사람은 하늘이 제거하고, 백성들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하늘이 도와주니, 대사大事를 일으킬 적에 마땅히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에 순종하고 위로는 하늘의 뜻에 부합하여야 비로소 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若負彊恃勇하고 觸情恣欲이면 雖得天下 必復失之 以秦項之勢로도 尙至夷覆注+夷, 滅. 覆, 敗也.이어든
만약 강함과 용맹함을 믿고 감정과 욕심을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면 비록 천하를 얻더라도 반드시 다시 잃게 되니, 나라와 항우項羽의 형세로도 결국은 멸망하고 전복하였는데注+는 멸망함이고, 은 패망함이다.,
況今布衣相聚草澤하여 以此行之 滅亡之道也 今南陽諸劉 擧宗起兵하니 觀其來議者컨대 皆有深計大慮하니 王公之才
더구나 지금 우리들이 포의布衣로 초야에 모여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멸망하는 길이다. 지금 남양南陽의 여러 유씨劉氏가 온 종실宗室(집안)이 나서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들이 와서 의논하는 것을 보건대 모두 깊은 계책과 큰 생각이 있으니, 왕공王公의 재주이다.
與之幷合이면 必成大功하리니 此天所以祐吾屬也니라
이들과 더불어 연합하면 반드시 큰 을 이룰 것이니, 이것은 하늘이 우리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諸將 素敬常이라 乃皆謝曰 無王將軍이면 吾屬 幾陷於不義라하고 卽引兵하여 與漢軍及新市平林合하니
】 장수들은 평소 왕상王常을 존경하였다. 이에 모두 사죄하기를 “왕장군王將軍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이 거의 불의不義에 빠졌을 것이다.” 하고는 즉시 병력을 인솔하여 나라 군대와 신시新市, 평림平林의 군대와 합병하니,
於是 諸部齊心同力하여 銳氣益壯이라 大饗軍士하고 設盟約하고 休卒三日하여 分爲六部하다
이에 여러 부대가 마음과 힘을 함께하여 예기銳氣가 더욱 성대하였다. 유연劉縯은 병사들에게 큰 연향을 베풀어주고 맹약盟約을 만들었으며 3일 동안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나누어 6로 만들었다.
十二月晦 潛師夜起하여 襲取藍鄕하여 盡獲其輜重하다
12월 그믐, 한밤중에 은밀히 군대를 출동하여 남향藍鄕을 기습 점령해서 적의 치중輜重을 모두 노획하였다.
역주
역주1 人相食 :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라고 쓴 것이 10번인데 王莽의 세대에 모두 2번을 썼으니, 백성들의 불행함이 참으로 심하였다.[終綱目 書人相食十 而莽世凡再書 民之不幸甚矣]다” ≪書法≫
역주2 赤眉破……誅之 : “赤眉가 廉丹을 격파하였는데, 어찌하여 王莽이 병사를 주관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州郡의 군대가 일어났다.’라고 쓴 뒤로부터 모든 전투에서 일찍이 王莽을 위주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반역과 순종을 구분한 말이다. 이때에 馮衍이 염단에게 전쟁하지 말라고 설득하였는데, 염단이 듣지 않았다. 敗하여 王匡이 도망하자, 염단이 말하기를 “小兒는 도망할 수 있지만, 나는 도망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전사하였다. 그런데 ≪資治通鑑綱目≫에 〈염단을〉 ‘死之’라 쓰지 않고 ‘誅之’라고 썼으니, 叛逆을 따름에 용감한 자는 이것을 경계로 삼을 만하다.[赤眉破廉丹 何不以莽主兵也 自書州郡兵起 凡戰 未嘗主莽言之 逆順之辭也 於是馮衍說丹毋戰 丹不聽 及敗 王匡走 丹曰 小兒可走 吾不可 遂戰死 綱目 不書死之 書誅之 勇於從逆者 可以懲之矣]” ≪書法≫ 朱熹의 〈凡例〉에 將帥가 死節할 때 ‘死之’라 쓴다 하였다. “赤眉는 도적이었고 廉丹은 장수였다. 염단이 마음을 다하여 왕망을 섬긴 것을 살펴보면 힘써 싸우다가 죽으면서 스스로 忠節에 죽는 의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였을 터인데, ≪資治通鑑綱目≫에서 ‘誅’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염단을 주벌하는 것은 王莽을 주벌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적인 왕망이 簒逆함에 왕망을 섬기던 모든 무리들이 다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도적이라도 역적을 주벌할 수 있는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에 왕망을 섬긴 자에 대하여 반드시 그 죄를 바로잡았으니, 그 徒黨을 주벌하는 것은 元惡(王莽)을 외롭게 하고 亂臣賊子를 막는 근원이기 때문이니, 그 뜻이 엄격하다. 옛날 荀況이 말하기를 “모든 주벌은 백성을 주벌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를 주벌하는 것이다. 백성 중에 逆賊을 보호하는 자가 있으면 이 또한 역적이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염단의 무리인 것이다.[赤眉 賊也 廉丹 將也 觀丹盡心所事 力戰而死 自謂得死節之誼 而綱目乃以誅書之 何哉 誅丹所以誅莽也 賊莽簒逆 凡事莽之徒 皆賊爾 雖盜賊 亦得而誅之 綱目 於事莽之人 必正其罪 蓋誅其黨 所以孤元惡窒賊亂之原也 其旨嚴矣 昔荀況有曰 凡誅 非誅百姓也 誅其亂百姓者也 百姓有捍其賊者 是亦賊也 此卽廉丹之類也]” ≪發明≫
역주3 詩人이……것 : 詩人은 ≪詩經≫의 〈周南 甘棠〉을 지은 사람을 가리킨다. 〈甘棠〉은 周나라 초기 召公 奭이 남쪽 지역을 순행하여 文王의 仁政을 펼치면서 때로 甘棠나무 아래에 머물렀는데, 그 뒤에 이 지방 사람들이 召公의 은덕을 생각하여 감당나무를 아끼는 내용을 읊은 것이다.
역주4 漢나라……따랐다 : 본서 392쪽 지도6 ‘舂陵兵의 봉기’ 참조.
역주5 漢宗室……皆附之 : “劉縯에게 漢나라 宗室이라고 썼으니, 이는 劉崇과 劉快와는 또 다르다. 이 때문에 ‘起兵’이라고 쓴 것이 많지만 ‘漢나라의 황실을 부흥시키려 한다.[興復帝室]’라고 쓴 것은 있지 않으니, 여기에 ‘興復帝室’이라고 쓴 것은 특별히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오직 劉縯 형제에게만 ‘起兵興復’라 썼고, 〈唐 中宗 嗣聖 5년에〉 琅邪王 李冲에게만 ‘擧兵匡復(거병하여 나라를 구원하고 부흥시켰다.)’라 썼고, 〈唐 昭宣皇帝 天祐 4년에〉 淮南節度使와 西川節度使만 ‘移檄興復(격문을 돌려 〈唐室을〉 부흥시켰다.)’라 썼다.[縯書漢宗室 則與崇快又異矣 是故書起兵多矣 未有書興復帝室者 書興復帝室 特筆也 終綱目 惟劉縯兄弟書起兵興復 唯琅邪王冲書擧兵匡復 唯淮南西川書移檄興復]” ≪書法≫ “이보다 앞서 臨淮와 綠林, 樊崇과 秦豐 등에 대해서 모두 ‘군대를 일으켰다.[兵起]’라고 써서 역적을 討伐하려는 뜻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인정하지 않은 것은, 번숭 등은 山林에 의지하여 무리를 모아 도둑 떼가 되어서 능히 大義를 내세워 역적을 토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에 이르러 伯升(劉縯)의 형제가 大義를 창도하자 그 명분이 처음으로 바루어졌다. 이 때문에 ≪資治通鑑綱目≫에 ‘漢나라 宗室이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의 황실을 興復했다.’라고 크게 썼으니, 그런 뒤에야 사람과 神의 분노를 풀 수 있다. 역적 王莽은 굳이 평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前此臨淮綠林樊崇秦豐等 皆書兵起 以見討賊之意 然猶不盡予之者 崇等依阻山林 聚衆爲盜 非能仗義誅討故也 至是 伯升兄弟唱義 其名始正 是以綱目大書漢宗室起兵興復帝室 然後人神之憤可伸 賊莽不足平矣]” ≪發明≫
역주6 立秋……적에 : 材官은 지방의 예비군이며, 都試는 閱兵하고 무예를 시험하여 考課하는 것으로 立秋 날에 총괄하여 시행하였는데, 뒤에는 매년 9월 중에 시행하였다.
역주7 (之)[人] : 저본에는 ‘之’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 〈光武帝紀〉에 의거하여 ‘人’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漢나라……탈취하였다 : 본서 393쪽 지도7 ‘舂陵兵․下江兵의 宛 진격로’ 참조.
역주9 漢兵……其輜重 : “이것은 특별히 쓴 것이다. 특별히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이 甄阜와 梁丘賜를 속히 주벌하게 된 이유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의 筆法은, 정벌하고 전쟁하는 즈음에 진실로 성패의 원인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特筆로 썼다. 그러므로 漢王이 楚나라의 積聚를 불태웠을 적에 썼고, 漢兵이 王莽의 輜重을 습격하여 탈취하였을 적에 썼고, 曹操가 袁紹의 輜重을 습격하여 격파하였을 적에 쓴 것이다.[特筆也 其特筆 何 此阜賜所以速誅也 綱目之法 征戰之際 苟有關於成敗之故者 必特筆書之 故漢王燒楚積聚書 漢兵襲取莽輜重書 曹操襲破紹輜重書]” ≪書法≫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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