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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慶之 値久雨하여 不得攻城하니 宋主 令有司로 奏免慶之官하고 詔勿問하여 以激之하다
誕이 初閉城에 參軍賀弼이 固諫한대 誕이 怒抽刀向之러니 及誕兵屢敗에 將佐多踰城出降하니
或勸弼宜早出한대 弼曰 公擧兵向朝廷하니 此事를 既不可從이요 荷公厚恩하니 又義無違背라 唯當以死明心耳라하고 乃飲藥自殺하다
參軍何康之等이 謀開門納官軍이라가 不果하여 斬關出降하니 誕爲髙樓하여 置康之母於其上하고 暴露之不與食하니 母呼康之數日而死하다
范義爲誕左司馬러니 或勸其行한대 義曰 子不可以棄母요 吏不可以叛君이라 必若康之而活은 吾弗爲也라
沈慶之帥衆하여 攻城克之하니 誕走어늘 追及斬之하니 母妻皆自殺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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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보다 앞서서 유탄劉誕은 그의 군사들을 속여서 말하기를 “종각宗慤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종각이 이르러서는 성을 에워싸고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내가 종각이라.”라고 하였다. 유탄은 여러 군대가 크게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자, 심경지가 군대를 보내 유탄을 추격하니 유탄의 무리들은 성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유탄이 다시 성으로 돌아와서 단을 쌓고 삽혈歃血하여 대중들과 맹세를 하고 유곤지劉琨之를 참군參軍으로 삼았으니, 유곤지는 유준고劉遵考의 아들이다.
그가 사양하기를 “충忠과 효孝를 둘 다 온전히 갖출 수 없습니다. 저 유곤지는 늙은 아버지가 계시니 명령을 감히 받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유탄이 유곤지를 감금한 지 10여 일이 되어도 유곤지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니 마침내 그를 죽였다.
심경지가 군영으로 가서
광릉성廣陵城을 핍박하자 유탄은 성 위에서
표문表文을 넣은 궤짝을 던져서 심경지에게 이를 보내주기를 청하였는데
注+① 授는 ≪南史≫에 投로 되어 있으니, 이를 따라야 한다. “函表”는 궤짝에 表文을 담은 것이다., 심경지가 말하기를
“나는 조서를 받아
注+② 授, ≪資治通鑑≫에 受로 되어 있다. 역적을 토벌하고 있으니, 너를 위하여 표문을 보내줄 수 없다. 네가 반드시 조정으로 돌아가서 죽으려고 한다면 직접 문을 열고 사자를 보내야 하니, 그렇게 하면 내가 너를 위하여
호송護送해주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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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심경지沈慶之는 오랫동안 비를 만나서 성을 공격하지 못하였다.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는 유사有司를 시켜서 심경지의 관직을 파면할 것을 상주하게 하고는 조서를 내려 불문에 부치게 하여 심경지를 면려시켰다.
유탄劉誕이 애초 성문을 닫을 적에 참군參軍 하필賀弼이 굳게 간언하였는데 유탄이 노하여 칼을 뽑아 하필에게 겨누었다. 유탄의 군사가 누차 패배하자 그의 장군들과 보좌관들이 대부분 성벽을 넘어서 나아가 항복하였다.
어느 사람이 하필에게 일찍 나가 항복할 것을 권하였는데 하필이 말하기를 “공公(유탄)께서 군사를 일으켜 조정에 대항하니 이 일은 따를 수 없었던 것이고, 공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또 의리상 배반하지 못하겠다. 오직 죽음으로써 내 결백한 마음을 밝힐 뿐이다.”라고 하고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참군參軍 하강지何康之 등이 성문을 열고 관군官軍을 받아들일 것을 꾀하다가 실행하지 못하고서 성문을 부수고 나가 항복하였다. 유탄은 높은 누각을 만들어 하강지의 어머니를 그 위에 두고 밖에 드러내어 비바람을 맞게 하면서 음식을 주지 않으니 그 어머니는 며칠 동안 하강지를 부르다가 죽었다.
범의范義가 유탄의 좌사마左司馬였는데 어떤 이가 도주하기를 권하자 범의가 말하기를 “아들로서 어머니를 버릴 수 없고 관리로서 군주를 배반할 수 없다. 반드시 유강지처럼 사는 것은 내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심경지가 군사를 이끌고서 광릉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유탄이 도주하자 심경지가 추격하여 그를 참수하니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