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大明三年이요 魏太安五年이라
夏四月 宋竟陵王誕 反廣陵이어늘 宋主 遣兵討之하다
竟陵王 誕知宋主意忌之하고 亦潜爲之備러니 因魏人入冦하여 修城浚隍하고 聚糧治仗하니
參軍江智淵 知誕有異志하고 請假先還建康하니 宋主以爲中書侍郎注+智淵, 夷之弟子也. 夷, 湛之父. 假, 休假也.하다
智淵少有操行注+操, 七到切. 行, 去聲.하니 沈懐文毎稱之曰 人所應有 盡有 人所應無 盡無者 其唯江智淵乎인저
俄而事覺하니 宋主令有司 奏請収付廷尉하고 詔貶爵爲侯하여 遣之國하고 使兗州刺史垣閬으로 與戴明寳襲之注+閬, 護之伯父遵之子也.하니
明寳夜報誕典籖蒋成하여 使爲内應한대 誕聞之 斬成하고 擊閬殺之하니 明寳逃還이어늘 詔沈慶之하여 將兵討誕하다
慶之至歐陽注+水經註 “. 自永和中, 江都水斷. 其水上承歐陽, 引江入埭, 六十里至廣陵城.”하니 誕遣人齎書하여 説慶之하고 餉以玉環刀어늘 慶之遣還하고 數以罪惡하니 誕閉門自守하고 分遣書檄하여 邀結遠近하다
山陽内史梁曠 家在廣陵이라 誕執其妻子하고 遣使邀曠한대 曠斬其使하니
誕遂滅曠家하고 奉表投城外하여 數宋主罪惡하고 曰 陛下宮帷之醜 豈可三緘注+上孝建元年云 “帝淫義宣諸女.” 又大明元年云 “宋主閨門無禮, 不擇親疎尊卑, 流聞民間, 無所不至.” 家語 “孔子觀周, 入后稷之廟, 有金人, 三緘其口, 而銘其背曰 ‘古之愼言人也.’”이리오
宋主大怒하여 凡誕左右腹心 同籍期親으로 在建康者 誅死以千數注+同籍, 諸同宗屬之籍者. 期親, 謂期喪之親也.
慮誕奔魏하여 使慶之 斷其走路하고 豫州刺史宗慤徐州刺史劉道隆 竝帥衆來會하다
先是 誕誑其衆하여 云 宗慤助我라한대 慤至하여 繞城躍馬呼曰 我宗慤也라하니 誕見衆軍大集하고 棄城北走어늘 慶之遣兵追之하니 誕衆 皆不欲去
誕乃復還하여 築壇歃血以誓衆하고 以劉琨之爲參軍하니 琨之 遵考之子也
辭曰 忠孝不得竝이라 琨之老父在하니 不敢承命이로이다
誕囚之十餘日 終不受하니 乃殺之하다
慶之進營하여 逼廣陵城하니 誕於城上函表하여 請慶之爲送注+授, 南史作投, 當從之. 函表, 以匱盛表.한대 慶之曰
詔討賊하니 不得爲汝送表注+授, 通鑑作受. 汝必欲歸死朝廷인댄 自應開門遣使 吾爲汝護送하리라
五月 宋殺其東揚州刺史顔竣하다
竣遭母憂하여 送喪還都하니 宋主恩待猶厚러니 會王僧逹得罪한대 疑竣譛之하여 陳竣前後怨望誹謗之語하니 竣坐免官하다
竣懼하여 上啓請命하니 宋主益怒注+請命, 請生命也.러니 及誕反 遂誣竣與通謀라하여 収付廷尉하여 折足賜死하고 妻子徙交州하고 復沈其男口於江하다
秋七月 宋克廣陵하니 劉誕伏誅하다
沈慶之 値久雨하여 不得攻城하니 宋主 令有司 奏免慶之官하고 詔勿問하여 以激之하다
初閉城 參軍賀弼 固諫한대 怒抽刀向之러니 及誕兵屢敗 將佐多踰城出降하니
或勸弼宜早出한대 弼曰 公擧兵向朝廷하니 此事 既不可從이요 荷公厚恩하니 又義無違背 唯當以死明心耳라하고 乃飲藥自殺하다
參軍何康之等 謀開門納官軍이라가 不果하여 斬關出降하니 誕爲髙樓하여 置康之母於其上하고 暴露之不與食하니 母呼康之數日而死하다
范義爲誕左司馬러니 或勸其行한대 義曰 子不可以棄母 吏不可以叛君이라 必若康之而活 吾弗爲也
沈慶之帥衆하여 攻城克之하니 誕走어늘 追及斬之하니 母妻皆自殺하다
宋主聞廣陵平하고 出宣陽門하여 勅左右皆呼萬歲하니 侍中蔡興宗陪輦이러니 宋主顧曰 卿何獨不呼 興宗正色曰 陛下今日 正應涕泣行誅 豈得皆稱萬歲리오하니 宋主不悅하더라
詔貶誕姓留氏하고 廣陵城中士民 無大小 悉命殺之하니 慶之請自五尺以下全之하고 女子爲軍賞호되 猶殺三千餘口注+五尺, 童子也.러라
擢梁曠爲後將軍하고 贈劉琨之給事黄門侍郎하다 蔡興宗奉旨하고 慰勞廣陵하니 興宗與范義素善이라 収斂其尸하여 送歸豫章注+義, 濮陽人, 蓋寓居豫章也.하니
宋主謂曰 卿何敢故觸王憲 對曰 陛下自殺賊하시고 臣自塟故交 何不可之有리잇고 宋主有慙色注+兄弟․朋友, 皆天倫也. 興宗能不忘故交, 而宋主忍誅屠同氣, 故慙.이러라
◑九月 宋築上林苑하다
◑宋徙郊壇하고 造五路하다
晉人築南郊壇於巳位러니 至是하여 尙書右丞徐爰 以爲非禮라하니 詔徙於牛頭山西하여 直宮城之午位注+胡三省曰 “牛頭山在今建康府上元縣南四十里.” 直, 當也.하다
又造五路하여 依金根車加羽葆蓋注+路, 與輅同. 蓋, 華蓋也. 五路之制與金根車不同, 加羽葆蓋, 愈非古矣.러니 及廢帝即位 以郊壇舊地爲吉하여 復還故處注+廢帝, 宋主之太子也.하다


나라 세조世祖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 대명大明 3년이고, 북위北魏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濬 태안太安 5년이다.
[] 여름 4월 나라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광릉廣陵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가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가 자신을 꺼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서 또한 몰래 대비를 하였는데 북위北魏 사람들이 침입한 것을 이용하여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준설하고 양식을 모으고 병장기를 수선하였다.
참군參軍 강지연江智淵이 유탄이 반란할 뜻이 있음을 알고서 휴가를 청하여 미리 건강建康으로 돌아오니 송주宋主가 강지연을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삼았다.注+① 江智淵은 江夷의 아우의 아들이다. 강이는 江湛의 아버지이다. 假는 휴가이다.
강지연은 젊어서 품행이注+② 操(절조)는 七到의 切이다. 行(행실)은 去聲이다. 있으니 심회문沈懐文이 늘 칭찬하기를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가지고 있고, 사람으로 없어야 할 것을 모두 없는 이는 오직 강지연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유탄劉誕의〉 사건이 발각되자, 연주자사兗州刺史 원랑垣閬注+③ 垣閬은 垣護之의 伯父 垣遵의 아들이다.으로 하여금 대명보戴明寳와 연합하여 유탄을 습격하게 하였다.
대명보가 밤에 유탄의 전첨典籖장성蒋成에게 알려서 내응을 하도록 하였는데, 유탄이 그 사실을 듣고는 장성을 참수하고 원랑을 공격하여 죽였다. 대명보가 도망쳐 돌아오자 심경지沈慶之에게 조서를 내려서 군대를 이끌고 유탄을 토벌하게 하였다.
심경지가 구양歐陽에 도착하자注+④ ≪水經註≫에 “吳나라가 邗(한)에 성을 쌓고 水路를 뚫어 江水와 淮水에 통하게 하였다. 永和(345~356) 무렵부터 江都에 물길이 끊겼다. 그 물길은 위로 歐陽埭(제방의 이름)에 이어지므로 강수를 歐陽埭에 끌어들이는데, 여기서부터 60리를 가면 廣陵城에 이른다.” 하였다., 유탄은 사람에게 편지를 지니고 가서 심경지를 설득하게 하고 옥환도玉環刀를 선물로 보냈다. 그러자 심경지는 그를 돌려보내고 나서 유탄의 죄악을 열거하여 꾸짖었다. 유탄은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고 편지와 격문을 나누어 보내 원근의 사람들과 결탁하였다.
[] 이때에 산양내사山陽内史 양광梁曠이 집이 광릉廣陵에 있었다. 유탄이 양광의 처자妻子를 잡고 사자를 보내 양광을 불렀는데 양광이 그 사자를 참수하였다.
유탄은 마침내 양광의 가족을 멸족하고 황제에 올리는 표문을 받들어 성 밖으로 던져 보냈는데, 그 표문에 송주宋主의 죄악을 열거하고 이르기를 “궁중에서 벌어지는 폐하의 추잡한 행위가 알려지는 것을 어찌 세 겹으로 사람의 입을 막는다고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① 위의 孝建 원년(454)에, “황제(孝武帝)가 劉義宣의 여러 딸들을 간음했다.” 하였다. 또 大明 원년(457)에, “宋主는 閨門 안에 예절이 없어서 친소와 존비를 가리지 않으니 민간에 소문이 퍼져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하였다. ≪孔子家語≫ 〈觀周〉에 “孔子가 周나라에 관광을 갔다가 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보니 金人이 있었는데, 금인의 입이 세 겹으로 봉해져 있었고 그 등에는 ‘옛날에 말을 삼간 사람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하였다.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는 크게 노하여 건강建康에 있는 유탄의 측근과 심복, 동적同籍기년복期年服에 해당하는 친족을注+② “同籍”은 同宗으로 호적에 속한 사람이고, “期親”은 期年服을 입는 친속이다. 모두 죽였는데 이들이 천으로 헤아렸다.
송주宋主는 유탄이 북위北魏로 도주할까 우려하여 심경지沈慶之를 보내 도주할 길을 막게 하고 예주자사豫州刺史 종각宗慤서주자사徐州刺史 유도륭劉道隆에게 모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심경지와 회합하게 하였다.
[] 이보다 앞서서 유탄劉誕은 그의 군사들을 속여서 말하기를 “종각宗慤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종각이 이르러서는 성을 에워싸고 말을 달리며 외치기를 “내가 종각이라.”라고 하였다. 유탄은 여러 군대가 크게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자, 심경지가 군대를 보내 유탄을 추격하니 유탄의 무리들은 성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유탄이 다시 성으로 돌아와서 단을 쌓고 삽혈歃血하여 대중들과 맹세를 하고 유곤지劉琨之참군參軍으로 삼았으니, 유곤지는 유준고劉遵考의 아들이다.
그가 사양하기를 “를 둘 다 온전히 갖출 수 없습니다. 저 유곤지는 늙은 아버지가 계시니 명령을 감히 받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유탄이 유곤지를 감금한 지 10여 일이 되어도 유곤지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니 마침내 그를 죽였다.
심경지가 군영으로 가서 광릉성廣陵城을 핍박하자 유탄은 성 위에서 표문表文을 넣은 궤짝을 던져서 심경지에게 이를 보내주기를 청하였는데注+① 授는 ≪南史≫에 投로 되어 있으니, 이를 따라야 한다. “函表”는 궤짝에 表文을 담은 것이다., 심경지가 말하기를
“나는 조서를 받아注+② 授, ≪資治通鑑≫에 受로 되어 있다. 역적을 토벌하고 있으니, 너를 위하여 표문을 보내줄 수 없다. 네가 반드시 조정으로 돌아가서 죽으려고 한다면 직접 문을 열고 사자를 보내야 하니, 그렇게 하면 내가 너를 위하여 호송護送해주겠다.”라고 하였다.
[] 5월에 나라가 동양주자사東揚州刺史 안준顔竣을 죽였다.
[] 안준顔竣이 모친상을 당해 영구靈柩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자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의 은총과 대우가 여전히 후하였다. 마침 왕승달王僧逹이 죄를 얻었는데 안준이 자기를 참소한 것이라 의심하여 안준이 전후로 조정을 원망하며 비방한 말을 진술하니, 안준이 죄에 걸려 파면되었다.
안준은 두려워서 글을 올려 목숨을 살려줄 것을 청하니注+① “請命”은 목숨을 살려줄 것을 청한 것이다. 송주宋主가 더욱 노하였다. 유탄劉誕이 반란을 일으키자 송주宋主가 마침내 안준이 유탄과 함께 모반을 공모했다고 무고誣告하고 그를 체포하여 정위廷尉에게 회부시켜 다리를 자르고 죽음을 내렸다. 그리고 처자妻子들은 교주交州로 이주시키고 다시 안준의 남자 가족들을 강수江水에 빠뜨려 죽였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광릉廣陵을 함락시키니 유탄劉誕복주伏誅되었다.
[] 심경지沈慶之는 오랫동안 비를 만나서 성을 공격하지 못하였다.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는 유사有司를 시켜서 심경지의 관직을 파면할 것을 상주하게 하고는 조서를 내려 불문에 부치게 하여 심경지를 면려시켰다.
유탄劉誕이 애초 성문을 닫을 적에 참군參軍 하필賀弼이 굳게 간언하였는데 유탄이 노하여 칼을 뽑아 하필에게 겨누었다. 유탄의 군사가 누차 패배하자 그의 장군들과 보좌관들이 대부분 성벽을 넘어서 나아가 항복하였다.
어느 사람이 하필에게 일찍 나가 항복할 것을 권하였는데 하필이 말하기를 “(유탄)께서 군사를 일으켜 조정에 대항하니 이 일은 따를 수 없었던 것이고, 공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또 의리상 배반하지 못하겠다. 오직 죽음으로써 내 결백한 마음을 밝힐 뿐이다.”라고 하고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참군參軍 하강지何康之 등이 성문을 열고 관군官軍을 받아들일 것을 꾀하다가 실행하지 못하고서 성문을 부수고 나가 항복하였다. 유탄은 높은 누각을 만들어 하강지의 어머니를 그 위에 두고 밖에 드러내어 비바람을 맞게 하면서 음식을 주지 않으니 그 어머니는 며칠 동안 하강지를 부르다가 죽었다.
범의范義가 유탄의 좌사마左司馬였는데 어떤 이가 도주하기를 권하자 범의가 말하기를 “아들로서 어머니를 버릴 수 없고 관리로서 군주를 배반할 수 없다. 반드시 유강지처럼 사는 것은 내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심경지가 군사를 이끌고서 광릉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유탄이 도주하자 심경지가 추격하여 그를 참수하니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자살하였다.
[] 송주宋主(효무제孝武帝)가 광릉廣陵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양문宣陽門으로 나가서 측근들에게 명하여 모두 만세萬歲를 부르게 하였다. 시중侍中 채흥종蔡興宗이 어가를 모셨는데 송주宋主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은 어찌하여 홀로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라고 하니 채흥종이 안색을 바로잡으며 말하기를 “폐하陛下께서 금일에 마땅히 울면서 죄인을 주벌하셔야 하는데, 어찌 만세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송주宋主가 기뻐하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서 유탄劉誕의 성씨를 유씨留氏로 폄하하고, 광릉성廣陵城 안의 사민士民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 심경지는 키가 5자 이하인 아이들을注+① 五尺은 童子이다. 살려주고 여자女子들을 군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을 청하였는데도 3천여 명이나 죽였다.
양광梁曠을 발탁하여 후장군後將軍으로 삼고 유곤지劉琨之에게 급사황문시랑給事黄門侍郎을 추증하였다. 채흥종이 조서를 받들어 광릉廣陵의 사람들을 위로하였는데, 채흥종은 범의范義와 평소 친하였으므로 범의의 시신을 거두어 예장豫章으로 보내주었다.注+② 范義는 濮陽 사람인데, 豫章으로 寓居하였다.
송주宋主가 말하기를 “은 어찌하여 감히 고의로 제왕의 법을 저촉하였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폐하陛下께서 직접 역적을 죽이시고 이 직접 옛 친구를 장사 지냈습니다.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송주宋主가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注+③ 兄弟와 朋友는 모두 天倫이다. 蔡興宗은 옛 친구를 잊지 않았는데 宋主는 同氣間을 도륙하였으므로 부끄러워한 것이다.
[] 나라가 심경지沈慶之사공司空으로 삼았다.
[] 9월에 나라가 상림원上林苑을 축조하였다.
[] 나라가 교단郊壇(교제郊祭 제단祭壇)을 옮기고 를 만들었다.
[] 예전에 나라 사람들이 남교단南郊壇사위巳位(5시 방향 위치)에 축조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상서우승尙書右丞 서원徐爰이 이는 예가 아니라고 하니, 나라(효무제孝武帝)는 조서를 내려서 우두산牛頭山 서쪽으로 옮겨 궁성宮城오위午位(6시 방향인 정남쪽)에 해당하게 하였다.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牛頭山은 지금 建康府 上元縣 남쪽 40리에 있다.” 하였다. 直은 당함이다.
오로五路를 만들었는데 에 의거하고 를 더하였다.注+
五輅圖五輅圖
② 路는 輅(수레)와 동자이다. 蓋는 華蓋(日傘)이다. 五路의 제도는 金根車와 다른데 羽葆蓋를 더하였으니 더욱 古法이 아니다.
폐제廢帝注+③ 廢帝는 宋主의 太子(劉子業)이다. 즉위하게 되어서는 교단郊壇의 옛터가 길하다고 하여 다시 이전 장소로 옮겼다.


역주
역주1 宋主가……하고 : 이 부분은 ≪資治通鑑≫에는 “上乃令有司奏誕罪惡 請收付廷尉治罪 乙卯詔貶誕爵為侯 遣之國(상이 이에 유사들에게 劉誕의 죄악을 아뢰어서 그를 붙잡아 廷尉에게 회부하여 治罪할 것을 청하도록 명하였다. 乙卯日에 조서를 내려 유탄의 작위를 강등하고 그를 封國으로 가게 하였다.)”으로 되어 있다.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2 吳城(刊)[邗] 溝通江淮 : ≪春秋左氏傳≫ 哀公 9년에 보인다. 저본에는 ‘刊’으로 되어 있으나, ≪춘추좌씨전≫에 의거하여 ‘邗’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埭] : 저본에는 ‘埭’가 없으나, ≪水經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 (授)[投] : 저본에는 ‘授’로 되어 있으나, 아래 訓義 ①에 의거하여 ‘投’로 바로잡았다.
역주5 (授)[受] : 저본에는 ‘授’로 되어 있으나, 아래 訓義 ②에 의거하여 ‘受’로 바로잡았다.
역주6 宋以沈慶之爲司空 : “何尙之가 致仕하였을 때에 ‘復起(다시 기용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沈慶之 역시 致仕한 사람이었으나 ‘復起’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심경지가 출사한 것은 국난 때문이었으니 하상지와 다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復起’라 기록하지 않고 거듭 ‘罷就第(파면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심경지가 권력을 멀리함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뒤에 비록 太尉에 임명된 것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죽음을 당한 뒤에 기록하였으니 ≪자치통감강목≫에서 심경지에게는 나무란 것이 없다.[尙之致仕 書復起 慶之亦致仕者 其不書復起 何 慶之之出 爲國難也 與尙之異矣 故綱目不書復起 而再書罷就第 嘉遠權也 後雖爲太尉不書 見殺而後書 綱目於慶之無譏焉]” ≪書法≫
역주7 五路 : 천자가 타는 다섯 가지 수레로 五輅라고도 한다. 玉路, 金路, 象路, 革路, 木路이다. ≪周禮≫ 〈春官 巾車〉에 옥로는 當盧를 하고 樊纓을 열두 겹으로 하고 열두 가닥의 술을 단 太常旗를 세워서 제사 지내는 데에 쓰며, 금로는 鉤를 하고 반영을 아홉 겹으로 하고 대기를 세워서 빈객의 회동에 쓰고 동성의 제후를 봉하는 데에 쓰며, 상로는 붉은색을 칠한 굴레를 씌우고 반영을 일곱 겹으로 하고 大旂旗를 세워서 조정에서 정무를 보는 데에 쓰고 이성의 제후를 봉하는 데에 쓰며, 혁로는 용무늬 굴레를 씌우고 잡색의 絲帶로 꾸민 반영을 다섯 겹으로 하고 太白旗를 세워서 군대에 사용하고 四衛를 봉하는 데에 쓰며, 목로는 옅은 흑색의 반과 흰색 영을 하고 太麾旗를 세워서 사냥에 쓰고 蕃國을 봉하는 데에 쓴다 하였다. 또한 옥로, 금로, 상로는 각각 옥과 금과 상아를 가지고 수레의 모든 끝부분을 장식한 수레이다. 혁로는 가죽으로 덮은 수레이고 목로는 다른 장식이 없이 옻칠만 한 수레이다.
역주8 金根車 : 황금으로 치장한 제왕의 수레로 五路의 金路와는 다르다.
역주9 羽葆蓋 : 제왕이 사용하는 의장의 하나로, 새의 깃을 죽 이어 장식한 일산이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