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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平蘇峻功하여 侃, 鑒, 嶠以下 封拜有差하고 諡卞壼曰忠貞이라하고 其二子眕, 盱及桓彝, 劉超, 鍾雅, 羊曼, 陶瞻을 皆加贈諡하다
路永, 匡術, 賈寧은 皆峻黨으로 先歸朝廷이러니 司徒導欲賞之한대 嶠曰
永等이 首爲亂階하니 晚雖改悟나 未足贖罪니 得全首領이 爲幸多矣라하니 乃止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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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南陽王胤
이 帥衆數萬
하고 自上邽趣長安
하니 隴東戎, 夏皆應之
注+魏收地形志有隴東郡, 領涇陽․祖厲․撫夷三縣. 蓋後趙分安定置也.라
石生이 嬰城自守어늘 虎救之하여 大破趙兵하고 乗勝追撃하여 枕尸千里하다
上邽潰하니 虎執趙太子熙와 及胤以下三千餘人하여 皆殺之하고 徙其臺省文武와 關東流民과 秦, 雍大族於襄國하니 秦, 隴이 悉平하다
蒲洪, 姚弋仲이 俱降於虎어늘 虎表洪監六夷軍事하고 弋仲爲六夷左都督하고 徙氐, 羌十五萬落於司, 冀州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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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소준蘇峻은 거주하는 백성들을 핍박하여 후원後苑에 모아놓고 그의 장수 광술匡術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광록대부光禄大夫 육엽陸曄과 그의 아우 육완陸玩이 광술을 설득하여 원성苑城을 가지고 서군西軍에 귀의하게 하니, 백관百官도 모두 육엽 등에게 달려갔다.
종아鍾雅가 황제(진晉 성제成帝)를 받들어 성을 빠져나가 서군에게 갈 것을 모의하였는데, 이 일이 누설되었다. 소일蘇逸이 임양任讓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유초劉超와 종아를 체포하게 하니, 황제가 이들을 껴안고서 슬피 울며 말하기를 “나의 시중侍中과 우위장군右衛將軍을 돌려달라.” 하였다. 그러나 임양은 황제에게서 이들을 빼앗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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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趙나라 태자太子 유희劉熙가 남양왕南陽王 유윤劉胤과 함께 진주秦州를 지킬 것을 모의하였는데, 상서尙書 호훈胡勲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군주를 잃었으나 영토가 아직 완전하고 장병들이 배반하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힘을 합쳐 막아야 합니다. 힘으로 막을 수 없으면 그때 달아나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유윤은 호훈이 사기士氣를 저상沮喪시킨다 하여 그를 참수하고 마침내 상규上邽로 달아났다. 이에 관중關中(장안長安)이 크게 혼란하였다.
장영蔣英이 수십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장안을 점거하고서 사자를 보내어 후조後趙에 항복하니, 석생石生이 병력을 인솔하고 장안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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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 궁궐이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온교温嶠는 예장豫章으로 천도하고자 하고, 삼오三吳 지역의 호걸들은 회계會稽에 도읍할 것을 청하자, 왕도王導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중모孫仲謀(손권孫權)와 유현덕劉玄徳(유비劉備)이 모두 건강建康은 왕자王者의 거처라고 말하였습니다. 옛날 제왕들은 굳이 재정의 풍부하고 적음에 따라 도읍을 옮기지 않았으니, 만약 근본인 농업을 힘쓰고 비용을 절약한다면, 어찌 재정의 궁핍함을 근심하겠습니까. 만약 농사에 힘을 쓰지 않으면 좋은 땅도 폐허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또 북쪽 오랑캐(
후조後趙)의 떠도는 혼이
注+① “游魂”은 북쪽 오랑캐들이 떠돌아다니고 흩어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약한 모습을 보여서
만월蠻越(예장과 회계)로 달아나면, 명망과 실제를 얻는 데에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합니다.
注+② 望은 聞望과 外望이고 實은 실제의 일이니, 명망과 실제가 모두 不可함을 말한 것이다. 지금은 오직 고요함으로 진무한다면 민심이 저절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는 천도하려는 의논을 하지 않고, 저삽褚翜을 단양윤丹楊尹으로 삼았다. 저삽이 흩어지고 도망한 자들을 거두어 모으니, 경읍京邑이 마침내 편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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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준蘇峻을 평정한 공功을 논하여 도간陶侃, 치감郗鑒, 온교温嶠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작위를 주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변곤卞壼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그의 두 아들인 변진卞眕, 변휴卞盱와 환이桓彝, 유초劉超, 종아鍾雅, 양만羊曼, 도첨陶瞻에게 모두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주었다.
노영路永, 광술匡術, 가녕賈寧은 모두 소준의 도당徒黨이었는데, 솔선하여 조정에 귀의하였다.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이들에게 상을 주려고 하자, 온교가 말하기를
“노영 등이 가장 먼저 난亂의 단서를 만들었으니, 뒤늦게 비록 잘못을 고치고 깨달았다 해도 속죄할 수 없습니다. 몸을 보존하는 것도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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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유량庾亮은 외척外戚으로 정사政事를 보필하면서 가장 먼저 화禍의 기미를 일으켜 나라가 분열되고 군주가 위태로워졌는데도, 자신은 도망하여 구차하게 화를 면하였다. 또 변돈卞敦은 방진方鎮의 지위(상주자사湘州刺史)에 있으면서 병력과 군량이 모두 풍족하였는데도, 조정이 전복될 때에 가만히 앉아서 승부를 관망하기만 하였다. 신하의 죄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법에 따라 공개적으로 처형하지 못하고 또 총록寵禄을 그에게 내려주었으니, 진晉나라 황실에 정사가 없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자가 어찌 왕도王導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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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目]
조趙나라(
전조前趙)
남양왕南陽王 유윤劉胤이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상규上邽에서
장안長安으로 달려가니,
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隴東郡이 있으니, 涇陽과 祖厲, 撫夷 3縣을 통솔한다. 이는 後趙가 安定郡을 나누어 설치한 것이다. 등의 오랑캐와
화하華夏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였다.
석생石生이 직접 성벽에 올라 굳게 지키자, 석호石虎가 그를 구원하여 조趙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널린 시신이 천 리에 이어졌다.
상규上邽가 무너지자, 석호는 조趙나라 태자 유희劉熙와 유윤 이하 3천여 명을 사로잡아 모두 죽이고, 대성臺省의 문무관文武官과 관동關東의 유민流民과 진秦, 옹雍 지역의 대족大族(명문 가문)을 양국襄國으로 옮기니, 진秦 지역과 농隴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포홍蒲洪과 요익중姚弋仲이 모두 석호에게 항복하자, 석호는 표문을 올려 포홍을 감육이군사監六夷軍事로, 요익중을 육이좌도독六夷左都督으로 삼았다. 저족氐族과 강족羌族 15만 부락을 사주司州와 기주冀州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