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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3)

자치통감강목(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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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年(314)
二年이라
漢嘉平四年이라
春正月 注+天文占曰 “三‧四‧五‧六日, 俱出竝爭, 天下兵作.” 又曰 “三日竝出, 不過三旬, 諸侯爭爲帝.”하다
流星 出牽牛하여 入紫微하여 光燭地하고 隕平陽北하여 化爲肉하니 長三十步 廣二十七步注+晉天文志 “牽牛六星, 在河鼓南.”
漢主聰 惡之하여 以問公卿한대 陳元達 以爲女寵太盛하여 亡國之徵이라하니 聰曰 此陰陽之理 何關人事리오
浚使者至襄國하니 匿其勁卒精甲하고 羸師虛府以示之하고 北面拜使者而受書하다
遺勒麈尾注+麈, 音主, 麋屬, 尾能生風, 辟蠅 晉王公貴人多執麈尾, 以爲柄.하니 陽不敢執하여 懸之於壁하여 朝夕拜之하고 曰 我不得見王公이로되
見其所賜하니 如見公也라하다 復遣董肇하여 奉表于浚하여
期以三月中旬 親詣幽州하여 奉上尊號하고 亦修牋于棗嵩하여 求幷州牧하다
問浚於王子春한대 子春曰 幽州去歲大水하여 人不粒食이어늘
積粟百萬이로되 不能賑贍하며 刑政苛酷하고 賦役殷煩하여 忠賢內離하고 夷狄外叛하니
人皆知其將亡이로되 而浚意氣自若하여 曾無懼心이라 方更置立臺閣하여 布列百官하고 自謂漢高, 魏武不足比也라하노이다
撫几笑曰 王彭祖眞可擒也로다 浚使者還薊하여 具言石勒形勢寡弱하고 款誠無二한대 益驕怠하여 不復設備러라
梁州人張咸 逐楊難敵하고 以州降成하다
於是 漢嘉, 涪陵, 漢中之地 皆爲成有 成主雄 虛己好賢하여 隨才授任하여
命太傅驤 養民於內하고 李鳳等 招懷於外하며 刑政寛簡하여 獄無滯囚러라
興學校하고 置史官하며 其賦民 男丁 歲穀三斛하고
女丁 半之하고 疾病 又半之하며 戸調 絹不過數丈이요 綿數兩注+調, 徒弔切.이라
事少役希하니 民多富實이요 新附者 給復除注+復, 方目切.러라
是時 天下大亂이로되 而蜀獨無事하며 年穀屢熟하여 乃至閭門不閉하고 路不拾遺
이나 朝無儀品하여 爵位濫溢하고 吏無祿秩하여 取給於民하고 軍無部伍하여 號令不肅하니 此其所短也러라
二月 以張軌爲太尉, 涼州牧하고 劉琨爲大將軍하다
◑三月 漢石勒 襲薊陷之하고 殺王浚하니 師還 薊降於段匹磾하다
纂嚴하여 將襲王浚而未發注+纂嚴, 謂纂集兵嚴也.이러니 張賓曰 豈非畏劉琨及鮮卑, 烏桓 爲吾後患乎잇가
勒曰 然하다 賓曰 彼三方 智勇 無及將軍者 將軍 雖遠出이나 彼必不敢動이요
且彼未謂將軍便能懸軍千里取幽州也 輕軍往返이면 不出二旬이요
藉使彼有心이라도 比其謀議出師 吾已還矣注+藉, 慈夜切.리이다 劉琨, 王浚 雖同名晉臣이나 實爲仇敵하니
若修牋于琨하고 送質請和하면 琨必喜我之服하고 而快浚之亡하여
終不救浚而襲我也리이다 用兵 貴神速하니 勿後時也니이다
勒曰 吾所未了 右侯已了之注+了, 決也.라하고 遂以火하고 遣使하여 奉牋于琨하여 自陳罪惡하고 請討浚自效하니
大喜하여 移檄州郡하여 言勒已降하니 當襲平陽하여 除僭逆이라하니라
三月 勒軍 達易水하니 督護孫緯 馳遣白浚하여 將勒兵拒之러니 遊統 禁之
浚將佐皆曰 胡貪而無信하여 必有詭計 請擊之라하니
怒曰 石公來 正欲奉戴我耳 敢言擊者하리라하고 設饗以待之하다
晨至薊하여 叱門者開門이로되 猶疑有伏兵하여 先驅牛羊數千頭하여 聲言上禮하나
實欲塞諸街巷하니 始懼注+上, 時掌切. 言欲以牛羊上浚, 以爲禮.러라 升其聽事하여 執浚於前注+聽, 他丁切. 古者治官處, 謂之聽事, 後語省, 直曰聽, 故加한대 罵曰 胡奴調乃公하니 何凶逆如此注+調, 田聊切, 戱也.
勒曰 公 位冠元台하고 手握彊兵하여 坐觀本朝傾覆하여
曾不救援하고 乃欲自尊爲天子하니 非凶逆乎注+三台星, 一名天柱, 上台司命爲太尉. 中台司中爲司徒. 下台司祿爲司空.아하고 卽送襄國하여 斬之하다
將佐等 詣軍門謝罪호되 前尙書裴憲 從事中郞荀綽 獨不至注+綽, 勖之孫也.어늘
召而讓之한대 對曰 憲等 世事晉朝하여 荷其榮祿하니 浚雖凶麤 猶是晉之藩臣이라 故從之하여 不敢有貳
明公 苟不修德義하고 專事威刑이면 則憲等 死自其分이니 請就死하노라하고 不拜而出注+分, 扶問切.하니 謝之하고 待以客禮하다
數朱碩, 棗嵩等以納財亂政하고 責遊統以不忠所事하여 皆斬之하다
籍浚將佐, 親戚家貲하니 皆巨萬이로되 惟憲, 綽 止有書百餘袠 鹽, 米各十餘斛而已注+袠, 與帙同, 書卷編次成帙.러라
勒曰 吾不喜得幽州 喜得二子라하고 以憲爲從事中郞하고 綽爲參軍하고 分遣流民하여 各還鄕里하다
停薊二日 焚浚宮殿하고 以故尙書劉翰으로 行幽州刺史하여 戍薊하고 置守宰而還이러니
孫緯遮擊之하니 僅而得免하다 遣使奉浚首하여 獻捷于漢하니 漢以勒爲東單于하다
劉琨 請兵於拓跋猗盧하여 以擊漢이러니 猗盧所部雜胡 謀應勒이어늘
猗盧悉誅之하여 不果赴約하다 知勒無降意하고 大懼러라
劉翰 不欲從勒하여 乃歸段匹磾하니 匹磾遂據薊城하다
左丞相睿 以邵續爲平原太守하다
王浚所署樂陵太守邵續 附勒注+樂陵縣, 漢屬平原郡, 晉分爲樂陵國.이어늘 以其子乂爲督護하다
勃海太守劉胤 棄郡依續하여 謂曰 君 晉之忠臣이어늘 奈何從賊以自汚乎注+胤亦浚所署.
段匹磾以書邀續하여 同歸江東한대 從之하니
其人曰 其如乂何 泣曰 我豈得顧子而爲叛臣乎아하고 殺異議者數人하니 聞之하고 殺乂하다
遣胤使江東하니 睿以胤爲參軍하고 續爲平原太守러니 石勒 圍續이어늘 匹磾救之하니 引去하다
襄國 大饑하다
穀二升 直銀一斤이러라
夏五月 하니 子寔하다
軌寢疾 遺令文武將佐호되 務安百姓하여 上思報國하고 下以寧家하라하다
軌卒 長史張璽等 表世子寔攝父位하니 詔寔爲都督, 刺史, 西平公하고 諡軌曰武穆이라하다
六月 寇長安하니 索綝 大破之하다
漢大司馬, 中山王曜 趙染 寇長安한대 索綝 出拒之러니
有輕綝之色한대 長史魯徽曰 晉之君臣 自知彊弱不敵하고 將致死於我하리니 不可輕也니이다
染曰 以司馬模之彊으로 吾取之如拉朽하니 索綝小豎 豈能汚吾馬蹄刀刃邪注+拉, 落合切.
帥輕騎數百하여 逆之하고 曰 要當獲綝而後食호리라
與戰于城西注+新豐城西也.러니 兵敗而歸하여 悔曰 吾不用徽言至此하니 何面目見之리오하고 先命斬徽하니
徽曰 將軍 愚愎以取敗하고 乃復忌前害勝하니 猶有天地 其得死於枕席乎注+忌前, 忌人在前, 害勝, 害勝己者.아하더니
攻北地라가 中弩而死注+中, 去聲.하다
漢石勒 命州郡하여 閱實戶口하다
戸出帛二匹, 穀二斛하다
漢主聰 以子粲爲相國하다
漢晉王粲 少有儁才러니 自爲相으로 驕奢專恣하여 遠賢親佞하고 嚴刻愎諫하니 國人 始惡之하니라


甲戌年(314)
[] 나라 孝愍皇帝 建興 2년이다.
[] 나라(前趙) 烈宗 劉聰 嘉平 4년이다.
[] 봄 정월에 해처럼 생긴 것이 땅에 떨어졌고, 또 세 개의 해가 있어 연이어 동쪽으로 지나갔다.注+에 “세 개와 네 개, 다섯 개와 여섯 개의 해가 함께 나와 서로 다투면 천하에 병란이 일어난다.” 하였고, 또 “세 개의 해가 함께 나오면 30일이 못 되어 제후가 황제가 되기를 다툰다.” 하였다.
[] 流星平陽의 북쪽에 떨어져 고깃덩어리로 변하였다.
[] 流星牽牛星에서 나와 紫微宮으로 들어가 빛이 땅에 비쳤고 平陽의 북쪽에 떨어져 고깃덩어리로 변하였는데, 길이가 30보이고 너비가 27보였다.注+晉書≫ 〈天文志〉에 “牽牛星의 여섯 별은 河鼓星의 남쪽에 있다.” 하였다.
漢主 劉聰이 이 일을 싫어하여 公卿들에게 묻자, 陳元達이 이르기를 “女寵(제왕이 총애하는 여인)이 너무 많아서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하니, 유총이 말하기를 “이는 陰陽의 이치일 뿐, 사람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 나라(前趙) 石勒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王浚에게 표문을 받들어 올렸다.
[] 王浚의 사자가 襄國에 도착하니, 石勒이 강한 병졸과 정예병을 숨기고 피로한 군대와 관청의 빈 창고를 보여주고는, 북향하고서 사자에게 절하고 왕준의 편지를 받았다.
왕준이 석륵에게 麈尾(주미)를 보내주자,注+로 사슴의 등속인데, 꼬리가 바람을 내어 파리와 모기를 쫓을 수 있다. 나라의 王公貴人들은 대부분 麈尾를 사용하였는데, 옥으로 자루를 만들었다. 석륵이 감히 잡지 못하는 체하면서 벽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王公을 뵐 수 없으나,
그분이 보내주신 것을 보니, 왕공을 뵙는 것과 같다.” 하였다. 또 董肇(동조)를 보내어 왕준에게 표문을 올려서
3월 중순에 직접 幽州에 나아가 尊號를 받들어 올리겠다고 약속하고, 동시에 棗嵩에게 편지를 보내어 幷州牧이 되기를 요구하였다.
[] 石勒王子春에게 王浚情況을 묻자, 왕자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幽州는 지난해에 큰 홍수가 져서 백성들이 곡식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준은 백만 석의 곡식을 쌓아놓고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형벌과 정사가 가혹하며, 부역이 많고 번거로워서 안으로는 忠賢들이 떠나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이 배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망할 줄을 알고 있으나 왕준은 意氣가 태연자약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막 다시 臺閣을 세워 백관들을 나열하고는 스스로 나라 高祖(劉邦)와 나라 武帝(曹操)도 자신과 견줄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석륵이 안석을 어루만지고 웃으며 말하기를 “王彭祖(왕준)를 참으로 사로잡을 수 있겠구나.” 하였다. 왕준의 사자가 薊城으로 돌아가서 석륵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며 석륵이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정성을 바치고 있다고 자세히 말하자, 왕준은 더욱 교만하고 나태하여 더 이상 대비하지 않았다.
[] 梁州 사람 張咸楊難敵을 축출하고 梁州를 가지고 나라에 항복하였다.
[] 이때에 漢嘉涪陵, 漢中의 지역이 모두 나라의 소유가 되었다. 成主 李雄은 마음을 겸허히 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여 재주에 따라 임무를 맡겨서,
太傅 李驤에게는 안에서 백성을 잘 다스리게 하고 李鳳 등에게는 밖에서 사람들을 안무하고 회유하게 하였다. 또 형벌과 정사가 너그럽고 간략하여 감옥에는 오래된 죄수가 없었다.
학교를 일으키고 史官을 설치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적에 성년 남자에게는 1년에 곡식 3섬을 거두고,
성년 여자에게는 이의 절반을 거두고 질병이 있는 자에게는 또 절반을 줄여주었으며, 戶稅는 비단 몇 필, 면이 몇 냥에 지나지 않았다.注+調(세금)는 徒弔이다.
일이 적고 부역이 드무니, 백성들이 대부분 부유하고 충실하였고, 새로 귀의해온 자에게는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였다.注+(부역을 면제하다)은 方目이다.
이때 천하가 크게 혼란하였으나 지역에는 홀로 일이 없었으며, 곡식이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들어, 마을의 문을 닫지 않고 길에 흘린 물건을 줍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정에는 禮制와 봉록이 없어서 작위가 지나치게 많았고 관리들은 봉록이 없어서 백성들에게 공급을 받았으며, 군대에는 部伍가 없어서 號令이 엄숙하지 못하니, 이것이 나라의 단점이었다.
[] 2월에 張軌太尉 涼州牧으로 삼고, 劉琨大將軍으로 삼았다.
[] 3월에 나라(前趙) 石勒薊城을 기습하여 함락시키고 王浚을 죽였다. 석륵의 군대가 돌아가자, 계현이 段匹磾에게 항복하였다.
[] 石勒이 병력을 모아 엄중하게 행장을 갖추고 王浚을 기습하려 하였으나 아직 출동하지 않았는데,注+纂嚴”은 군대가 모여 엄중하게 행장을 갖추고 출동하기를 기다림을 이른다. 張賓이 말하기를 “〈출발을 늦추는 것은〉 劉琨鮮卑, 烏桓이 우리의 후환이 될까 두려워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석륵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자, 장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세 방면 중에는 지혜와 용맹이 장군에게 미칠 자가 없습니다. 장군이 비록 군대를 이끌고 멀리 출동하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요,
게다가 또 저들은 장군이 곧바로 천 리 멀리 군대를 이끌고 幽州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무장한 군대로 공격하러 갔다가 돌아오면 20일이 넘지 않을 것이요,
가령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 마음이 있더라도 저들이 출병하기를 모의할 때에는 우리가 이미 돌아와 있을 것입니다.注+(가령)는 慈夜이다. 유곤과 왕준이 비록 명목상으로는 똑같이 나라 신하라고 하나 실제는 원수이니,
만약 유곤에게 편지를 보내고 인질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면, 유곤은 반드시 우리가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고 왕준이 망하는 것을 통쾌하게 여겨서,
끝내 왕준을 구하려고 우리를 기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병술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니, 때에 뒤늦지 말아야 합니다.”
[] 石勒이 말하기를 “내가 결단하지 못한 것을 右侯(張賓)가 이미 결단했다.”注+는 결단함이다. 하고서, 마침내 횃불을 들고 밤중에 출발하고는 사자를 보내어 劉琨에게 편지를 올려서 자신의 죄악을 직접 아뢰고 王浚을 토벌하여 스스로 을 바칠 것을 청하였다.
유곤이 크게 기뻐하여 州郡에게 격문을 돌려서 “석륵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平陽을 습격하여 참람하게 반역을 일삼는 자(劉聰)를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3월에 石勒의 군대가 易水에 도착하니, 王浚督護孫緯가 급히 사람을 보내어 왕준에게 아뢰고서 장차 군대를 무장하여 석륵의 군대를 막으려 하였는데, 遊統이 이를 제지하였다.
왕준의 장수와 보좌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랑캐는 탐욕스럽고 신의가 없으니, 반드시 속임수가 있을 것입니다.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준이 노하여 말하기를 “石公이 이번에 오는 것은 바로 나를 받들어 황제로 추대하고자 해서일 뿐이니, 감히 그를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하겠다.” 하고는, 연회를 마련하고서 석륵을 기다렸다.
[] 石勒은 새벽에 薊城에 도착해서 문지기에게 크게 소리쳐서 성문을 열게 하면서 혹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서 먼저 소와 양 수천 마리를 앞세워 몰고 가서 이것을 예물로 바친다고 크게 말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길거리를 막고자 하였으니, 王浚이 그제야 비로소 두려워하였다.注+(올리다)은 時掌이니, 〈“先驅牛羊數千頭 聲言上禮”는〉 소와 양을 王浚에게 올려서 禮物로 삼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 석륵이 그의 廳事로 올라가서 면전에서 왕준을 사로잡자,注+(관청)은 他丁이다. 옛날 정사를 다스리는 곳을 聽事라 하였는데, 뒤에 말이 생략되어서 곧바로 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广을 더하여 〈으로 썼다.〉 왕준이 꾸짖기를 “오랑캐 종놈이 너의 어르신을 조롱하니, 어찌 이와 같이 흉포하고 패역스럽단 말인가.”注+調田聊이니, 조롱함이다. 하였다.
석륵이 말하기를 “은 지위가 최고로 높은 三公으로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本朝(나라의 조정)가 기울고 전복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면서
일찍이 구원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 천자가 되고자 하였으니, 그대가 바로 흉포하고 패역스러운 자가 아니겠는가.”注+三台星은 일명 天柱라 하는데, 上台司命太尉가 되고 中台司中司徒가 되고 下台司祿司空이 된다. 하고는 즉시 襄國으로 보내어 참수하였다.
[] 王浚의 장수와 보좌 등이 軍門에 나와 사죄하였으나, 尙書 裴憲從事中郞 荀綽(순작)은 오지 않았다.注+荀綽荀勖의 손자이다.
石勒이 이들을 불러 질책하자, 대답하기를 “저희들은 대대로 나라 조정을 섬겨서 영화로운 祿을 받았으니, 王浚이 비록 횡포하고 추악하지만 그래도 나라의 藩臣이었으므로, 그를 따라서 감히 두 마음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明公이 만일 德義를 닦지 않고 오로지 위엄과 형벌만을 일삼는다면, 저희들은 죽는 것이 본래 분수에 마땅한 일이니, 죽음에 나아가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절하지 않고 나가니,注+(분수)은 扶問이다. 석륵이 그들에게 사죄하고 빈객의 예로 대하였다.
[] 石勒朱碩棗嵩 등에게는 재물을 받아 정사를 어지럽힌 죄를 일일이 들어 질책하고, 遊統에게는 섬기는 주인에게 不忠하였다고 책망하여, 모두 참수하였다.
王浚의 장수와 보좌와 친척들의 家産을 조사하여 몰수하니 모두 巨萬이었는데, 오직 裴憲荀綽은 다만 책 백여 질에 소금과 쌀이 각각 10여 섬이 있을 뿐이었다.注+(책질)은 과 같으니, 서책을 편집하여 질로 만든 것이다.
석륵은 말하기를 “내 幽州를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고 이 두 사람을 얻은 것을 기뻐한다.” 하고는, 배헌을 從事中郞으로 삼고 순작을 參軍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민들을 나누어 보내서 각각 鄕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 石勒薊城에 머문 이틀 동안에 王浚의 궁전을 불태웠으며, 尙書劉翰行幽州刺史로 삼아서 계성을 지키게 하고 또 각 군현의 守宰를 세우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孫緯가 석륵을 가로막고 공격하니, 석륵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석륵이 사자를 보내어 왕준의 머리를 받들어 나라(前趙)에 승전보를 올리니, 나라가 석륵을 東單于로 삼았다.
[] 劉琨拓跋猗盧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마침 탁발의로가 거느리고 있는 여러 오랑캐들이 石勒에게 호응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에 탁발의로가 이들을 다 주살하느라고 끝내 유곤과의 약속에 달려오지 못하였다. 유곤은 석륵이 항복할 뜻이 없음을 알고는 크게 두려워하였다.
劉翰이 석륵을 따르려고 하지 않아서 마침내 段匹磾에게 귀의하니, 단필제가 마침내 薊城을 점거하였다.
[] 左丞相 司馬睿邵續平原太守로 삼았다.
[] 王浚이 임용한 樂陵太守 邵續石勒에게 귀의하자,注+樂陵縣나라 때에는 平原郡에 속하였고, 나라 때에는 나누어 樂陵國으로 삼았다. 석륵이 그의 아들 邵乂督護로 삼았다.
勃海太守 劉胤을 버리고 소속에게 의지하고서 말하기를 “그대는 나라의 충신인데, 어찌하여 적을 따라 스스로를 더럽히는가?”注+劉胤 또한 王浚이 임용한 자이다. 하였다.
이때 마침 段匹磾가 편지로 소속을 불러 함께 江東에 귀의할 것을 청하자, 소속이 그의 말을 따랐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들 소예는 어찌할 것인가?” 하자, 소속이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 “내 어찌 자식을 돌보느라 배반하는 신하가 되겠는가.” 하고는 異議를 제기하는 자 몇 사람을 죽이니, 석륵이 이 말을 듣고 소예를 죽였다.
邵續이 아들을 버리고 晉 왕실에 귀순하다邵續이 아들을 버리고 晉 왕실에 귀순하다
소속이 劉胤江東에 사자로 보내니, 司馬睿는 유윤을 參軍으로 삼고 소속을 平原太守로 삼았다. 석륵이 소속을 포위하자 단필제가 구원하니, 석륵은 병력을 이끌고 떠나갔다.
[] 襄國縣에 크게 기근이 들었다.
[] 이때에 곡식 2되의 값이 은 한 근이었다.
[] 여름 5월에 太尉 涼州牧西平公 張軌하니, 아들 張寔이 뒤를 이었다.
[] 張軌가 병이 위독해지자, 文武의 장수와 보좌들에게 遺命을 내리기를 “되도록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서 위로는 국가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집안을 편안히 하라.” 하였다.
장궤가 죽자, 長史 張璽 등이 표문을 올려 세자 張寔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지위를 대신하게 하니, 詔令을 내려 장식을 都督, 刺史, 西平公으로 삼고, 장궤의 시호를 武穆이라 하였다.
[] 6월에 나라(前趙)가 長安을 침략하니, 索綝(삭침)이 대파하였다.
[] 나라(前趙) 大司馬 中山王劉曜趙染長安을 침략하자, 索綝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막았다.
조염이 삭침을 가볍게 여기는 기색을 보이자, 長史 魯徽가 말하기를 “나라의 군주와 신하는 자신들의 세력의 강약이 대등하지 못함을 알고 있어서 장차 우리와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조염이 말하기를 “司馬模처럼 강한 적도 내가 썩은 나무를 꺾듯 손쉽게 취하였는데, 삭침처럼 하찮은 놈이 어찌 능히 나의 말발굽과 칼날을 더럽히겠는가.”注+(꺾다)는 落合이다. 하였다.
그리고 새벽에 경무장한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서 삭침을 맞아 싸우며 말하기를 “반드시 삭침을 사로잡은 뒤에야 밥을 먹겠다.” 하였다.
삭침이 조염과 新豐城 서쪽에서 싸웠는데,注+〈“城西”는〉 新豐城의 서쪽이다. 조염이 패하고 돌아가면서 후회하며 말하기를 “내 노휘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무슨 면목으로 그를 만나보겠는가.” 하고는 먼저 노휘를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노휘가 말하기를 “장군이 어리석고 고집스러워서 패전하고는, 도리어 다시 자기보다 재주가 앞선 사람을 시기하고 자기보다 나은 자를 살해하려 하니, 아직도 천지가 있다면 어찌 이부자리에서 편안히 죽겠는가.”注+忌前”은 남의 재주가 자기보다 앞선 것을 시기하는 것이요, “害勝”은 자기보다 나은 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하였다.
조염은 北地를 공격하다가 쇠뇌를 맞고 죽었다.注+(맞다)은 去聲이다.
[] 나라(前趙) 石勒州郡에 명하여 실제 戶口를 조사하게 하였다.
[] 마다 비단 2필과 곡식 2섬을 내게 하였다.
[] 겨울에 漢主 劉聰이 아들 劉粲相國으로 삼았다.
[] 나라(前趙) 晉王 劉粲이 젊어서는 준걸스러운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相國이 된 이후로는 교만하고 사치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어진 이를 멀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며, 엄하고 각박하여 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역주
역주1 天文占 : 전국시대 魏나라의 천문학자이자 점성가인 石申夫의 저작으로, 모두 8권이다. 石申夫는 石申甫, 石申父라고도 하는데, 중국 최초로 星表를 제작하였으며, 四分曆, 歲星紀年, 行星運動, 천상관측 및 중국 고대의 占星 이론에 크게 기여하였다.
역주2 有如日隕于地 又有三日相承東行 : “해처럼 생겼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 개의 해가 있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 또한 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가 아니기 때문에 있다고 하였으니, 있다는 것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漢나라 成帝의 篇에 ‘두 개의 달이 서로 연이어 새벽에 동방에 나타났다.’라고 썼으니(建始 원년(B.C.32)), 이 또한 〈일찍이〉 없었다는 말이다. 愍帝의 세상에 이보다 더 큰 異變이 없었는데, 太興 원년(318)에 이르러 또다시 ‘해가 밤중에 나왔는데 높이가 세 길[丈]이다.’라고 썼으니, 晉나라의 중엽에 어쩌면 그리도 災變이 많은가.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1,361년 동안 세 개의 해가 서로 연이어 나오고, 해가 밤중에 나왔는데 세 길이라고 쓴 것은 각각 1번뿐이다.[如日 何 非日也 有三日 何 亦非日也 非日也 故曰有 有也者 世所無有者也 漢成之篇 書有兩月相承 晨見東方(建始元年) 亦所無有之辭也 愍帝之世 變莫大於此者 至太興元年 又書日夜出 高三丈 晉之中葉 何其多變哉 終綱目 千三百六十一年 三日相承 夜出三丈 各一書而已矣]” ≪書法≫
역주3 有流星隕于平陽北 化爲肉 : “별이 떨어졌다고 쓴 것은 많으나 변하였다고 쓴 적은 있지 않았는데, 이때 고깃덩어리의 길이가 30보이고 너비가 27보였으니, 우주가 있은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았던 큰 이변이다. 平陽은 漢나라(前趙) 지역인데도 ≪資治通鑑綱目≫에서 漢나라를 쓰지 않은 것은 천하를 위하여 災異로 여긴 것이다.[書星隕多矣 未有書所化者 於是 肉長三十步 廣二十七步 宇宙以來所未有之大異也 平陽 漢地 綱目不書漢 爲天下異之也]” ≪書法≫
“이때 劉聰이 제멋대로 중국(중원)을 점거하고서 음탕함과 포악함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도읍한 곳에 별이 떨어져 경계한 것인데, 유총은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책에 쓴 것 또한 우선 하늘이 변고를 보인 뜻을 드러내 보였을 뿐이다.[是時 劉聰竊據中土 淫虐不已 故星隕於其所都之地 以警之 然聰則不知戒也 書之于冊 亦姑以見上天示變之意云爾]” ≪發明≫
역주4 漢石勒 復遣使奉表於王浚 : “표문을 받들어 올리는 것은 바로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禮인데, 王浚이 신하의 신분으로 이것을 받는 것이 옳은가. ≪資治通鑑綱目≫에서 예전에 이미 ‘石勒이 왕준에게 표문을 받들어 올렸다.’라고 썼고, 지금 또 여기에 다시 쓴 것은 어째서인가. 한편으로는 석륵의 속임수를 나타내고 한편으로는 왕준의 어리석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석륵은 羯族의 역적일 뿐이니 속임수는 바로 그가 평소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왕준은 몸이 晉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면서도 조정이 기울고 전복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았으며, 또 석륵의 속임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바라서는 안 될 것을 요행으로 바랐으니, 죄가 석륵보다 더욱 크다. 그러므로 훗날 왕준이 석륵에게 죽임을 당했을 적에 그의 관직을 모두 삭제하고 쓰지 않은 것이다.[奉表 乃人臣事上之禮也 浚爲臣子受之 可乎 綱目前已書勒奉表於浚 今又復書于此 何哉 一以見勒之詐 一以見浚之愚也 然勒羯賊耳 詐乃其所素有 浚身爲晉臣 乃坐視朝廷傾覆 而不救 方且甘受其詐 僥倖非望 其罪有加於勒 多矣 故他日見殺於勒 盡削其官也]” ≪發明≫
역주5 (竭)[蜹] : 저본에는 ‘竭’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蜹’로 바로잡았다.
역주6 (王)[玉] : 저본에는 ‘王’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霄)[宵] : 저본에는 ‘霄’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宵’로 바로잡았다.
역주8 (厂)[广] : 저본에는 ‘厂’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广’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太尉涼州牧西平公張軌卒 : “張軌에게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의 충성을 인정한 것이다. 장궤는 ‘涼州刺史가 되었다.’라고 쓴 뒤로부터(惠帝 永寧 원년(301)) 뒤이어 ‘北宮純을 들여보내 호위했다.’라고 썼고(懷帝 永嘉 2년(308)), 또 ‘군대를 보내어 長安으로 달려가게 하였다.’라고 썼고(懷帝 永嘉 6년(312)), 또 ‘太尉 涼州牧으로 삼았다.’라고 썼었는데, 이때에 관작과 성씨를 갖추어 ‘卒’이라고 썼으니, 이는 모두 거듭 인정한 것이다.[書卒 何 予忠也 軌自書爲涼州刺史(惠帝永寧元年) 繼書遣北宮純入衛(懷帝永嘉二年) 又書遣兵詣長安(懷帝永嘉六年) 又書以爲太尉涼州牧 至是具官爵姓書卒 皆所以重予之也]” ≪書法≫
“≪資治通鑑綱目≫은 晉나라 때 할거한 여러 사람에 대하여 모두 ‘死’라고 썼는데, 유독 西涼의 張氏와 前燕의 慕容氏 父子에게만 그 관작을 쓰고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晉나라 황실을 바로잡고 도운 功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晉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것은 周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한 것과 같다. 周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한 뒤에 제후들이 다시는 周나라를 높이지 않았으나 유독 齊 桓公과 晉 文公은 간곡히 周나라의 왕실을 높이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春秋≫에서 이들을 인정하였다. 五胡가 中華를 어지럽힐 때에 창과 방패가 어지러이 일어나서 세상에서는 晉나라가 있음을 더 이상 알지 못하였으나, 張氏는 西涼을 점거하고 慕容氏는 燕 지역을 점거하여, 유독 이 두 사람은 本朝를 잊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그들을 인정한 이유이다.[綱目於晉世割據諸人 皆書死 獨於西涼張氏及前燕慕容氏父子 獨書其爵 及以卒書者 何 予其有匡輔晉室之功也 夫晉之南渡 猶周之東遷也 東遷之後 諸侯不復宗周 獨齊桓晉文拳拳以尊王室爲事 故春秋予之 當五胡亂華之時 干戈紛紛 世不復知有晉矣 而張氏據涼 慕容氏據燕 獨能不忘本朝 此其所以予之也]” ≪發明≫

자치통감강목(13)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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