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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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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泰始四年이요 魏皇興二年이라
春正月 魏侵宋이어늘 宋豫州刺史劉勔擊却之하고 斬其將閼于拔하다
魏侵宋武津이어늘 宋劉勔擊却之하고 斬其將于都公閼于拔注+沈約曰 “武津縣屬汝陽郡.” 閼, 烏葛切.하다 淮西民賈元友 上書하여 陳伐魏取陳蔡之策注+宋豫州淮西之地, 春秋陳蔡之地也.하니 宋主以其書示勔한대
勔上言호되 元友稱虜主幼弱하고 内外多難하니 天亡有期라하나 臣以爲虜自去冬으로 蹈藉王土하고 今春 連城圍逼호되 國家未能復境하니 何暇滅虜리오 元友所陳 率多夸誕狂謀
言之甚易하고 行之甚難하니 元嘉以來 傖荒遠人 多勸討虜 從來信納 皆貽後悔하니
境上之人 唯視彊弱이라 王師至彼 必壺漿候塗라가 裁見軍退 便抄截蠭起하니 此前後所見 明驗非一也니이다하니 宋主乃止하다
宋東徐兗州降魏하니 魏以尉元爲徐州刺史하다
魏尉元 遣使하여 說宋東徐州刺史張讜하니 讜以團城降魏어늘 魏以髙閭與讜對爲刺史注+魏已得彭城, 又得團城, 故因宋所置東徐州以令讜.하고 又說宋兗州刺史王整蘭陵太守桓訢하여 降之注+宋失淮北, 僑立兗州, 寄治淮陰. 時蕭道成鎭淮陰, 王整蓋屯徐州界, 領兗州刺史耳. 此時宋․魏交兵, 疆吏能自守者, 卽以州刺史命之, 無常處也. 沈約志 “蘭陵太守治昌慮, 漢舊縣也.”하니
魏以元爲開府儀同三司徐州刺史하여 鎭彭城하고 召薛安都畢衆敬入朝하여 以客禮待之하고 封侯賜第하고 資給甚厚하다
二月 魏拔 宋歴城하다
崔道固出降하다
常珍奇犇宋하다
◑宋車騎大將軍王玄謨卒하다
◑夏四月 宋減民田租之半하다
◑宋劉勔敗魏兵於許昌하다
◑魏以李惠爲征南大將軍하고 馮熙爲太傅하다
李夫人之父 馮太后之兄也
冬十二月 宋改塟路太后하다
義嘉之亂 路太后暴殂하니 既塟 巫師復請發陵戮玄宮하여이러니 至是改塟之注+晉安王子勛稱帝時, 改元義嘉.하다
宋以阮佃夫爲游擊將軍하다
先是 中書侍郎舍人 皆用名流爲之러니 太祖始用寒士하고 世祖猶雜用士庶하니 而巢戴遂用事注+士, 謂巢尙之, 庶, 謂戴法興.러니
及宋主하여 盡用左右細人하니 佃夫及中書舍人王道隆 散騎侍郎楊運長 竝參豫政事하여 權亞人主하여 巢戴所不及也注+細人, 言纖微小人也.러라
佃夫尤恣横하여 納貨賂 作威福하니 朝士貴賤 莫不自結하고 僕隷皆不次除官하여 捉車人至中郎將하고 馬士至員外郎注+捉車人, 持車者. 馬士, 控馬者. 員外郞, 謂員外散騎郞也.하다


나라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태시泰始 4년이고, 북위北魏 현조顯祖 헌문제献文帝 탁발홍拓跋弘 황흥皇興 2년이다.
[] 봄 정월에 북위北魏나라를 침공하였는데 나라 예주자사豫州刺史 유면劉勔이 격퇴시키고 북위北魏 장군 알우발閼于拔을 참수하였다.
[] 북위北魏나라 무진武津을 침공하였는데 나라 유면劉勔이 격퇴시키고, 북위北魏 장군 우도공于都公 알우발閼于拔을 참수하였다.注+① 沈約이 말하기를 “武津縣은 汝陽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閼은 烏葛의 切이다. 회서淮西 백성 가원우賈元友상서上書하여 북위北魏를 정벌하여 의 지역을注+② 宋나라 豫州 淮西 지역은 春秋時代 陳․蔡의 지역이다. 빼앗는 계책을 진술하니 송주宋主가 그 상서를 유면에게 보여주었다.
유면이 다음과 같이 상언上言하였다. “가원우가 ‘오랑캐의 임금이 유약하고 안팎으로 난리가 많으니 하늘이 망하게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 생각건대 오랑캐는 지난겨울부터 우리 영토를 짓밟고 올 봄에는 연이어 성을 포위해 압박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국경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오랑캐를 멸망시키겠습니까. 가원우가 진술한 것은 대부분 과장되고 경망한 도모입니다.
말하기는 매우 쉽고 행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원가元嘉( 문제文帝 연호, 424~453) 이래로 창황傖荒(북인北人을 경시하는 말)한 원방 사람들이 대부분 오랑캐를 토벌하라고 권하였는데, 종래에 믿고 받아들였다가 모두 후회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국경 지역의 사람들은 오직 강약을 살펴보므로 왕사王師가 그곳에 이를 적에는 반드시 병에 음료수를 담아 길에서 기다리다가 군대가 물러난 것을 보자마자 바로 배후를 공격하여 차단하고 봉기합니다. 이것은 전후로 이 본 것 중에 명백한 증거가 하나가 아닙니다.” 송주宋主(유욱劉彧)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 나라 동서주東徐州연주兗州북위北魏에 항복하니 북위北魏울원尉元(울원)을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삼았다.
[] 북위北魏 울원尉元이 사신을 보내서 나라 동서주자사東徐州刺史 장당張讜을 설득하니注+① 北魏가 이미 彭城을 얻고, 또 團城을 얻었으므로, 宋나라가 설치한 東徐州에 따라서 張讜을 명한 것이다., 장당張讜단성團城을 가지고 북위北魏에 항복하였다. 그러자 북위北魏고려髙閭장당張讜을 함께 동서주자사東徐州刺史로 삼고, 울원이 또 나라 연주자사兗州刺史 왕정王整난릉태수蘭陵太守 환흔桓訢을 설득하여 북위北魏에 항복하게 하였다.注+② 宋나라가 淮北을 잃고 兗州를 僑置하고 淮陰에 治所를 붙였다. 이때 蕭道成이 淮陰을 鎭守하였고, 王整이 徐州 경내에 주둔하고서 兗州刺史를 겸직하였을 뿐이다. 이때 宋나라와 北魏가 전쟁을 하여 국경의 관리 중에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자는 즉시 州刺史로 임명하여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沈約의 ≪宋書≫ 〈州郡志〉에 “蘭陵太守가 昌慮를 치소로 삼으니, 漢나라의 옛 縣이다.” 하였다.
북위北魏가 울원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삼아서 팽성彭城에 진수하게 하고, 설안도薛安都필중경畢衆敬을 불러서 입조入朝케 하여 객례客禮로 우대하고 제후諸侯로 봉하며 저택을 하사하고 물자를 매우 후하게 주었다.
[] 2월에 북위北魏나라 역성歴城을 빼앗았다.
[] 최도고崔道固가 성에서 나가 항복하였다.
[] 상진기常珍奇나라로 도주하였다.
[] 나라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왕현모王玄謨하였다.
[] 여름 4월에 나라가 백성에게 전조田租의 반을 감면하였다.
[] 나라 유면劉勔북위北魏 병사를 허창許昌에서 패배시켰다.
[] 북위北魏이혜李惠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삼고, 풍희馮熙태부太傅로 삼았다.
[] 이혜李惠이부인李夫人의 아버지이고, 풍희馮熙풍태후馮太后의 형이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소도성蕭道成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로 삼았다.
[] 겨울 12월에 나라가 노태후路太后개장改葬하였다.
[] 의가義嘉의 난리에注+① 晉安王 劉子勛이 稱帝했을 때에 義嘉로 改元하였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무사巫師가 다시 을 파내어 현궁玄宮(제왕의 묘혈墓穴)을 파손하여 염승厭勝을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개장改塟하였다.
[] 나라가 완전부阮佃夫유격장군游擊將軍으로 삼았다.
[] 이보다 앞서 중서시랑中書侍郎중서사인中書舍人을 모두 명사名士로 임명했었다. 태조太祖( 문제文帝)가 처음으로 한미한 선비를 등용하고 세조世祖( 효무제孝武帝)가 선비와 서인庶人을 섞어서 등용하니 소상지巢尙之대법흥戴法興이 마침내 권세를 부리게 되었다.注+① 士는 巢尙之를 말하고, 庶는 戴法興을 말한다.
송주宋主(유욱劉彧)에 이르러 좌우左右소인小人들을注+② “細人”은 잗달은 小人을 말한다. 다 등용하니, 완전부阮佃夫중서사인中書舍人 왕도륭王道隆산기시랑散騎侍郎 양운장楊運長이 모두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권세가 임금에 버금가서 소상지․대법흥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완전부가 더욱 방자하고 전횡하여 뇌물을 받고서 상과 벌을 멋대로 행사하였다. 조정 인사들 중에 귀천에 관계없이 스스로 결탁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하인들도 모두 차례를 뛰어넘어 관직에 임명되어 수레를 끄는 사람도 중랑장中郎將에 이르고, 마부馬夫원외랭員外郎에 이르렀다.注+③ “捉車人”은 수레를 끄는 사람이다. “馬士”는 말을 부리는 사람이다. “員外郞”은 員外散騎郞을 말한다.


역주
역주1 宋以蕭道成爲南兗州刺史 : “이해 10월 초하루에 日食이 있었으나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마 누락된 듯하다.[是歲 十月朔日食不書 疑漏]” ≪書法≫
역주2 義嘉의……殂하였다 : 路太后가 죽은 것은 본서 104쪽에 보인다.
역주3 厭勝 : 方術의 일종으로 사악한 氣를 꺾어 힘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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