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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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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成皇帝咸和元年이라
趙光初九 後趙八年이라
夏四月 後趙石生 冦汝南하여 執内史祖濟하다
◑六月 以郗鑒爲徐州刺史하다
司徒導稱疾不朝하고 而私送鑒한대 卞壼 奏導虧法從私하여 無大臣之節하니 請免官이라하니 雖事寢不行이나 舉朝憚之러라
儉素廉潔하고 裁斷切直하며 當官幹實하고 性不弘裕하여 不肯茍同時好 爲諸名士所少러라
阮孚謂曰 卿常無閑泰하여 如含瓦石하니 不亦勞乎注+孚, 咸之子也. 壼曰 諸君子以道徳恢弘하고 風流相尙하니 執鄙吝者 非壼而誰오하니라
貴遊子弟 多慕王澄, 謝鯤하여 爲放達이러니 厲色於朝曰 悖禮傷教하니 罪莫大焉이라 中朝傾覆 實由於此라하고 欲奏推之러니
導及庾亮 不聴하니 乃止注+中朝, 謂西晉. 奏推, 奏之於上, 推按其罪也.하다
秋八月 以温嶠爲都督江州軍事하고 王舒爲會稽内史하다
王導以寛和得衆이러니 及庾亮用事 任法裁物하여 頗失人心이러라
祖約 自以名輩不後郗, 卞이로되 而不預顧命注+名爲一時所稱, 輩以年齒爲等.하고 遺詔褒進大臣 又不及約與陶侃하니 二人 皆疑亮刪之하다
歷陽内史蘇峻 有功於國하여 威望漸著하고 卒鋭器精하니 有輕朝廷之志하여 招納亡命하여 衆力日多어늘 皆仰食縣官하되 稍不如意하면 輙肆忿言注+有功於國, 謂破沈充․錢鳳也.이라
既疑峻, 約하고 又畏侃之得衆하여 乃以嶠鎮武昌하고 舒守會稽하여 以廣聲援하고 又修石頭以備之하다
丹楊尹阮孚謂所親曰 江東 創業尙淺하고 主幼時艱이어늘 庾亮年少하고 徳信未孚하니 以吾觀之컨대 亂將作矣라하고
遂求出爲廣州刺史하다
自以失職怨望하고 又素與蘇峻善注+宗解兵衛, 故自以爲失職. 宗傅明帝, 踐阼, 加長水校尉. 轉左衛將軍, 與虞胤俱爲帝所昵, 委以禁旅. 宗與王導․庾亮志趣不同, 連結輕俠, 以爲腹心. 導․亮竝以爲言, 帝以宗戚屬, 每容之. 及帝疾篤, 宗․胤密謀爲亂, 亮排闥入升御牀, 流涕言之, 帝始悟, 轉爲驃騎將軍, 胤爲大宗正, 宗遂怨望, 形於辭色.이라 庾亮 欲誅之하고 宗亦欲廢執政이어늘
中丞鍾雅 劾宗謀反하니 收殺之하고 降封其兄太宰西陽王羕하여 爲弋陽縣王하다
宗室近屬이요 先帝保傅러니 一旦翦黜하니 由是 愈失遠近之心注+羕․宗, 兄弟也, 宗言近屬, 羕言保傅, 宗敍族, 羕敍官也.이러라
宗之死也 帝不之知 久之 帝問亮曰 常日白頭公何在 對以謀反伏誅한대
帝泣曰 舅言人作賊이면 便殺之하니 人言舅作賊이면 當如何하여 變色이러라
後趙使世子弘守鄴하다
後趙王勒 用程遐之謀하여 營鄴宫하고 使弘鎮之하니 石虎自以功多라하여 無去鄴之意러니 及修三臺 遷其家室하니 由是怨遐러라
十一月 後趙冦壽春하니 歷陽内史蘇峻 擊走之하다
石聰 攻壽春하니 祖約 屢表請救호되 朝廷 不爲出兵注+聦, 本晉人, 冒姓石氏. 爲, 去聲.이라
遂進寇阜陵하니 建康 大震注+阜陵縣, 屬淮南郡.이러니 蘇峻 遣其將韓晃하여 撃走之하다
朝議欲作涂塘以遏胡寇하니 約曰 是棄我也라하고 益懐憤恚注+作涂塘, 則壽春在涂塘之外. 涂, 讀曰滁.러라
十二月 下邳叛하여 降後趙하다
◑後趙始定九流하고 立秀, 孝, 試經之制注+秀․孝․試經, 晉制也. 後趙至此, 始行之.하다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화咸和 원년이다.
[] 조주趙主(전조前趙) 유요劉曜 광초光初 9년이고, 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8년이다.
[] 여름 4월에 후조後趙석생石生여남汝南을 침략하여 내사内史 조제祖濟를 사로잡았다.
[] 6월에 치감郗鑒서주자사徐州刺史로 삼았다.
[]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병을 핑계로 조회하지 않고 사사로이 치감郗鑒을 전송하자, 변곤卞壼이 아뢰기를 “왕도가 법을 무시하고 사사로운 정을 따라서 대신大臣절조節操가 없으니, 그를 면직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비록 이 일이 그치고 실행되지 않았으나, 온 조정이 두려워하였다.
변곤은 검소하고 청렴결백하며 일을 결단하는 것이 정확하고 솔직하며, 맡은 관직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렇지만 성품이 너그럽지 못하여 시속時俗이 좋아하는 것을 구차히 함께 따르려 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명사名士들에게 경시를 당하였다.
완부阮孚注+① 阮孚는 阮咸의 아들이다. 변곤에게 이르기를 “은 항상 한가롭고 편안한 때가 없어서 기왓장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하니, 너무 수고하는 것이 아닌가?” 하자, 변곤이 대답하기를 “여러 군자들은 도덕이 드넓고 풍류가 뛰어남으로써 서로 숭상하니,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일을 할 사람은 내가 아니면 또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귀유貴遊(관직이 없는 왕공귀족王公貴族)의 자제들 중에 왕징王澄사곤謝鯤을 사모하여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호방하게 행동하는 자들이 많았다. 변곤은 조정에서 얼굴빛을 엄숙하게 하고 말하기를 “예법을 무너뜨리고 풍교風敎를 해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다. 중조中朝가 전복된 것이 실로 이 때문이다.” 하고, 상주上奏하여 그들의 죄를 심문하고자 하였다.注+② 中朝는 西晉을 이른다. “奏推”는 上에게 아뢰어서 그 죄를 심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왕도王導유량庾亮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 가을 8월에 온교温嶠도독강주군사都督江州軍事로 삼고, 왕서王舒회계내사會稽内史로 삼았다.
[] 처음에 왕도王導는 너그러움과 온화함으로 인심을 얻었는데, 유량庾亮은 정권을 잡게 되자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여 인심을 크게 잃었다.
조약祖約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명망과 연배가注+① 名은 한때에 칭송을 받는 것이고, 輩는 年齒로 차등을 두는 것이다. 치감郗鑒변곤卞壼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황제의 유명遺命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또 유조遺詔로 대신들을 표창하여 승진시킬 때에도 조약과 도간陶侃에게는 그 은택이 미치지 않으니, 〈조약과 도간〉 두 사람은 모두 유량이 자기들을 제외시켰다고 의심하였다.
역양내사歷陽内史 소준蘇峻은 나라에 큰 이 있어서注+② “有功於國”은 蘇峻이 沈充과 錢鳳을 격파한 일을 이른다. 위엄과 명망이 점점 드러났고, 병졸들이 정예롭고 병기가 예리하니, 조정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망명자들을 불러들여 병력이 날로 많아졌는데, 모두 국가에서 식량을 공급받으면서도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번번이 함부로 원망하는 말을 하곤 하였다.
유량은 소준과 조약을 의심하는 데다가 또 도간이 인심을 얻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온교温嶠무창武昌에 진주시키고 왕서王舒에게 회계會稽를 지키게 하여 지원 세력을 확대하고 또 석두성石頭城을 수리하여 이들을 대비하였다.
[] 단양윤丹楊尹 완부阮孚가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강동江東(동진東晉)은 창업한 지가 아직 얼마 되지 않았고 군주가 어리고 시국이 어렵다. 그런데 유량庾亮은 나이가 젊고 신의信義가 아직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니, 내 보건대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광주자사廣州刺史가 되었다.
[] 겨울 10월에 남돈왕南頓王 사마종司馬宗을 죽이고, 서양왕西陽王 사마양司馬羕(사마양)을 강등하여 익양현왕弋陽縣王으로 봉하였다.
[] 사마종司馬宗은 스스로 직책을 잃었다고 여겨서 조정을 원망하였고注+① 司馬宗이 禁軍을 관장하는 직책에서 해임당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실직했다고 여긴 것이다. 사마종은 明帝의 사부였는데, 명제가 즉위하자 長水校尉를 더해주었다. 左衛將軍으로 전직하여, 虞胤과 함께 황제에게 신임을 받아서 금군을 관장하였다. 사마종은 王導, 庾亮과 뜻이 맞지 않아서 의리를 중시하고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협객들과 결탁하여 그들을 심복으로 삼았다. 왕도와 유량이 모두 이것을 아뢰었으나, 황제는 사마종이 친족이라 하여 매번 포용하였다. 황제가 병이 위독하자 사마종과 우윤이 은밀히 반란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는데, 유량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御牀에 올라가서 눈물을 흘리며 아뢰자, 황제가 그제야 비로소 깨닫고 사마종을 驃騎將軍으로 전직시키고 우윤을 大宗正으로 삼으니, 사마종은 마침내 원망하여 말소리와 얼굴빛에 나타났다. 또 평소 소준蘇峻과 친하였다. 〈이 때문에〉 유량庾亮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고, 사마종 역시 집정대신執政大臣인 유량을 폐하고자 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종아鍾雅가 사마종이 모반했다고 탄핵하니, 유량은 그를 체포하여 죽이고 그의 형인 태재太宰 서양왕西陽王 사마양司馬羕을 강등하여 익양현왕弋陽縣王으로 봉하였다.
사마종은 종실에 가까운 친족이고 사마양은 선제先帝의 사부였는데注+② 司馬羕과 司馬宗은 형제인데 사마종은 近屬이라고 하고 사마양은 保傅라고 하였으니, 사마종에게는 친족을 쓰고 사마양에게는 관직을 쓴 것이다. 유량이 하루아침에 죽이고 내치니, 이로 말미암아 더욱 원근遠近의 인심을 잃게 되었다.
사마종이 죽을 때에 황제( 성제成帝)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 황제가 유량에게 묻기를 “평상시 보이던 머리가 하얀 노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자, 유량은 그가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외숙이 누군가가 역적질을 한다고 말하면 곧바로 그를 죽여버리니, 사람들이 만일 외숙이 역적질을 한다고 하면 마땅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유량은 두려워하여 낯빛이 변하였다.
[] 후조後趙세자世子 석홍石弘을 보내서 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 후조後趙의 왕 석륵石勒정하程遐의 계책을 따라 업궁鄴宫을 짓고 세자 석홍石弘을 보내서 진주하게 하였다. 석호石虎는 스스로 공이 많다고 여겨서 지역을 떠날 뜻이 없었는데, 를 수리하게 되자 자기 가족들을 옮기니, 이 때문에 정하를 원망하게 되었다.
[] 11월에 후조後趙수춘壽春을 침략하니, 역양내사歷陽内史 소준蘇峻이 이들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 석총石聰수춘壽春을 공격하니, 조약祖約이 여러 번 표문을 올려 구원해줄 것을 청했으나, 조정에서는 그를 위해 병력을 출동하지 않았다.注+① 石聦은 본래 晉나라 사람인데, 石勒의 성씨인 石氏를 빌려 썼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석총이 마침내 전진하여 부릉阜陵注+② 阜陵縣은 淮南郡에 속하였다. 침략하니 건강建康이 크게 진동하였는데, 소준蘇峻이 그의 막하 장수인 한황韓晃을 보내어 석총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저당涂塘(저당)을注+③ 涂塘을 만들면 壽春이 저당의 밖에 있게 된다. 涂는 滁로 읽는다. 만들어 오랑캐의 침략을 막고자 하니, 조약은 말하기를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하고는, 더욱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 12월에 하비下邳가 배반하여 후조後趙에게 항복하였다.
[] 후조後趙가 처음으로 를 정하고, 수재秀才효렴孝廉경문經文으로 시험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注+① 秀才와 孝廉과 經文으로 시험하는 것은 晉나라 제도인데, 後趙가 이때에 이르러 처음 시행하였다.


역주
역주1 殺南頓王宗……爲弋陽縣王 : “庾亮이 정사를 보필한 초기에는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불안하였으니, 바로 온화한 정사로 안정시켜야 마땅한데, 곧바로 황제의 가까운 친척을 죽이고 옛 사부를 貶黜하였으니, 어떻게 遠近의 마음을 위로하겠는가. 이때 成帝가 막 6살이었는데도 〈유량이 司馬宗을 죽인 일을〉 따져 묻고 눈물을 흘렸으니, 유량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司馬宗과 司馬羕〉 두 사람에게 기록할 만한 실제 죄상이 없는 것을 보면 유량이 형벌을 잘못 시행한 것이 분명하다. 또 당시 대신들 중에 한 마디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없었던 것을 통해서도, 유량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전횡한 것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으니, 유량에게 어찌 나라를 그르친 잘못이 없겠는가.[庾亮輔政之初 主少國疑 正宜鎮之以靜 輙乃殺戮近親 貶黜舊傅 其何以慰遠近之心 是時成帝方六歲 乃能詰問垂泣 亮能無愧於心乎 觀二人無罪可書之實 則亮之失刑 明矣 而當時大臣 亦無有一言及之者 又以見亮之專己自用如此 寧無誤國之失乎]” ≪發明≫
역주2 三臺 : 漢 獻帝 建安 15년(210)에 魏나라 武帝(曹操)가 鄴城의 서북쪽에 세운 세 개의 臺를 가리킨다. ≪譯註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13≫ 晉 懷帝 永嘉 6년(312)에서 보이는 訓義에 “≪水經註≫에 ‘鄴城의 서북쪽에 三臺가 있는데……가운데를 銅臺라 하니 높이가 10丈인데, 그 뒤에 石虎가 다시 2丈을 증축하였다. 남쪽은 金雀臺이니 높이가 8丈이고, 북쪽은 冰井臺이니 이 또한 높이가 8丈이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3 九流 : 魏晉南北朝 때 士人을 아홉 등급으로 나눈 九品中正法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세부 내용은 본서 39쪽 역주 28) 참조.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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