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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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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三年이라
趙光初十一이요 後趙太和元年이라
溫嶠欲救建康하여 軍於尋陽이러니 韓晃 襲司馬流於慈湖하니 流素懦怯이라 將戰할새 食炙 不知口處러니 兵敗而死하다
濟自横江하니 臺兵屢敗하다
陶囘謂庾亮曰 峻 知石頭有重戍하고 必向小丹楊南道하여 歩來하리니 宜伏兵邀之하니 可一戰擒也리이다 不從注+元帝南渡, 建康置丹陽尹, 治於臺城西, 而丹楊太守, 舊治秣陵縣, 俗謂之小丹楊.이러니
果如囘言하여 而夜迷失道하여 無復部分하니 始悔之하다
朝士多遣家人하여 入東避難注+建康, 以吳․會稽爲東.이로되 左衛將軍劉超 獨遷妻孥하여 入居宫内注+晉志 “文帝初置中衛及衛將軍, 武帝受命, 分爲左․右衛.”하다
詔以卞壼都督大桁東諸軍하여 及峻戰於西陵이러니 大敗하다
攻青溪柵이어늘 又拒撃之注+靑溪水, 發源於鍾山, 接於秦淮. 吳孫權, 鑿城北塹, 以洩玄武湖水.러니 因風縱火하여 燒臺省諸營하여 皆盡注+杜佑曰 “宋․齊有三臺․五省之號, 三臺, 蓋兩漢舊名, 五省, 謂尙書․中書․門下․秘書․集書省也.”하다
背癰新愈 瘡猶未合이러니 力疾苦戰而死하고 二子眕, 盱隨之하여 亦赴敵死하니 其母撫尸哭曰 父爲忠臣하고 子爲孝子호니 夫何恨乎아하니라
丹楊尹羊曼 黄門侍郎周導 廬江太守陶瞻 皆戰死하니 侃子也
亮及郭黙, 趙胤으로 俱奔尋陽注+依溫嶠也.이러니 將行 顧謂侍中鍾雅曰 後事 深以相委하노라 雅曰 棟折榱崩 誰之咎也注+榱, 所追切, 秦曰屋椽, 齊․魯曰桷, 周曰榱.
峻兵 入臺城하니 司徒導謂侍中褚翜曰 至尊 當御正殿注+臺城, 卽宮城, 在建康城北二里. 翜, 所甲切.이니라
即入抱帝하여 登太極前殿하니 導及光禄大夫陸曄, 荀崧 尙書張闓 共登御床하여 衛帝하고 劉超, 鍾雅及翜 侍立左右하고 太常孔愉 朝服守宗廟하다
峻兵既入 叱翜令下한대 呵之曰 蘇冠軍 來覲至尊이니 軍人 豈得侵逼注+峻先以討沈充功, 進冠軍將軍, 故稱之.이리오
峻兵 不敢上殿하고 突入後宫하니 宫人 皆見掠奪하고 驅役百官하고 裸剥士女注+裸, 袒. 剝, 裂也.하다
官有布二十萬匹 金銀五千斤 錢億萬 絹數萬匹이러니 盡費之하다
或謂鍾雅曰 君性亮直하니 必不容於冦讐 盍早爲計 雅曰 國亂 不能匡하고 君危 不能濟하고 各遁逃以求免이면 何以爲臣이리오
峻以王導有徳望이라하여 猶使以本官居己之右하고 以祖約爲太尉하고 自錄尙書事하다
弋陽王羕 詣峻하여 稱述功徳이어늘 復以爲太宰西陽王하다
温嶠聞建康不守하고 號慟하며 人有候之者하면 悲哭相對러라
庾亮 至尋陽하여 宣太后詔하여 以嶠爲驃騎將軍開府儀同三司한대 嶠曰 今日 當以滅賊爲急이니 未有功而先拜官이면 何以示天下리오하고 遂不受하다
嶠素重亮하여 雖奔敗 嶠愈推奉하여 分兵給之러라
三月 皇太后庾氏以憂崩하다
南屯于湖하다
◑夏五月 温嶠以陶侃入討峻하니 遷帝於石頭하다
温嶠将討峻이로되 而不知建康聲聞注+聞, 音問.이러니
范汪하여 言峻政令不壹하고 貪暴縱横하니 雖强易弱이라 宜時進討라한대 嶠深納之하다
庾亮 辟汪參護軍事하고 與嶠互相推爲盟主러니 嶠從弟充曰 陶征西位重兵强하니 宜共推之注+侃時爲征西大將軍, 都督荊․湘․雍․梁, 專制上流.니이다
嶠乃遣督護王愆期하여 詣荆州邀侃하여 同赴國難하니 猶以不預顧命爲恨하여 答曰 吾 疆埸外將이니 不敢越局注+謂內輔外禦, 各有局分, 不敢踰越也.이로라
嶠屢説호되 不囘어늘 乃遣使謂曰注+使, 疏吏切, 下同. 仁公 且守하라 僕當先下注+漢․魏以來, 率呼宰輔․岳牧爲明公. 今嶠呼侃爲仁公, 蓋取天下歸仁之義, 言晉之征․鎭 皆歸重於侃也하리라
使行二日 參軍毛寳聞之하고 説嶠曰
師克 在和하니 不宜異同이라 假令可疑라도 猶當外示不覺이니 宜急追信改書하여 言必俱進注+信, 卽使也.이요 若不及이면 則更遣使可也니이다 嶠從之하다
果遣督護龔登하여 帥兵詣嶠하니 嶠有衆七千이라
於是 列上尙書하여 陳約, 峻罪狀하고 移告征, 鎮하고 灑泣登舟注+上, 時掌切. 以侃爲盟主, 與亮․嶠列名, 上之尙書也.러라
復追登還이어늘 嶠遺書曰
夫軍 有進而無退하니 可増而不可減이라 近已移檄遠近하고 言於盟府하니 惟須仁公軍至하여 便齊進耳注+盟府, 謂侃府也, 侃爲盟主, 故稱爲盟府.어늘 今乃反追軍還하여 疑惑遠近하니 成敗之由 將在於此
假令此州不守 則荆楚將來之危 乃當甚於此州之今이리라 仁公 進當爲大晉之忠臣하여 參桓, 文之功이요 退當以慈父之情으로 雪愛子之痛注+謂侃子瞻爲峻所殺.이라
且峻, 約無道하여 人皆切齒하니 今之進討 如石投卵이라 若復召兵還이면 是爲敗於幾成이요 而或者遂謂仁公緩於討賊이라하리니 此聲難追 願深察之하라
愆期亦謂侃曰 峻 豺狼也 如得遂志 寧有容足之地乎잇가
深感悟하고 即戎服登舟하여 瞻喪至호되 不臨하고 兼道而進注+臨, 力鴆切.하다
郗鑒 在廣陵하여 城孤糧少하고 逼近胡冦하니 人無固志러니 得詔書하고 即流涕誓衆하고 入赴國難하니 將士爭奮이라
遣將軍夏侯長等하여 間行謂嶠曰
或聞賊欲挾天子하고 東入會稽라하니 當先立營壘하여 屯據要害하여 既防其越逸하고 又斷賊糧運이니 然後 清野堅壁以待賊이라 攻城不拔하고 野無所掠이면 必自潰矣리이다
嶠深以爲然하다
五月 至尋陽한대 議者謂侃欲誅亮以謝天下라하니 甚懼러라
用嶠計하여 詣侃拜謝한대하여 止之曰 庾元規乃拜陶士行邪注+元規, 亮字. 士行, 侃字.
引咎自責하니 乃釋然曰 君侯修石頭以擬老子注+謂元年秋, 亮修石頭以備侃也.러니 今日反見求邪아하고 遂同趣建康하니 戎卒四萬이요 旌旗七百餘里러라
聞之하고 自姑孰還하여 遷帝於石頭어늘 司徒導固爭호되 不從하다
帝哀泣升車하니 時天大雨하여 泥濘이라 劉超, 鍾雅歩侍左右하다 給馬호되 不肯乗하고 而悲哀慷慨하니 惡之러라
以倉屋爲帝宫하고 日肆醜言하니 超, 雅與荀崧, 華恒, 丁潭等으로 不離帝側이러라
饑饉米貴로되 峻問遺 超一無所受하고 繾綣朝夕하여 臣節愈恭注+繾綣, 牢固相著之意. 繾綣朝夕, 謂朝夕不暫分離.하고
雖居幽厄之中이나 猶啟帝하여 授孝經, 論語하다
導密令張闓 以太后詔 諭三吳하여 使起義兵하니 會稽内史王舒 使庾冰將兵一萬하여 西渡浙江注+冰, 亮之弟也.하다
於是 吳興太守虞潭 吴國内史蔡謨 義興太守顧衆等 皆應之注+潭, 翻之孫也.하다
潭母孫氏謂潭曰 汝當捨生取義 勿以吾老爲累하라하고 盡遣家僮從軍하고 鬻環珮以給軍費하다
遣其將管商等하여 拒之하니 侃, 嶠軍於茄子浦注+茄, 求加切. 蓋其地宜茄子, 人多於此樹藝, 因以名浦. 案水經 “石頭城西, 對蔡洲, 長百里, 上有大荻浦, 下有茄子浦.”러니 嶠以南兵習水하고 峻兵便歩라하여 令將士有上岸者注+南兵, 謂侃․嶠之兵. 便步, 謂便於步戰.라하다
送米萬斛하여 饋祖約이어늘 毛寳爲嶠前鋒하여 告其衆曰 兵法 軍令有所不從하니 豈可視賊可撃하고 不上岸撃之邪아하고 乃往襲取之하니 由是饑乏이러라
嶠表寳爲廬江太守하고 表舒潭監浙東西軍事하고 郗鑒都督揚州八郡軍事하다
遂帥衆渡江하여 與侃等會하여 舟師直指石頭하니 望之하고 有懼色이러라
侃部將李根 請築白石壘注+白石壘, 在石頭東北, 峻極險固.한대 使庾亮守之러니 攻之로되 不克하다
舒等 數戰不利하니 孔坦曰 本不須召郗公이니 遂使東門無限이라 今宜遣還이니 雖晚이나 猶勝不也注+不, 讀曰否.리이다
乃令鑒還據京口하고 立大業, 曲阿, 庱亭三壘하여 以分峻兵勢注+曲阿, 秦雲陽縣也, 前漢屬會稽郡, 後漢屬吳郡, 晉屬毗陵郡. 大業, 里名, 在曲阿北. 庱, 音陵. 丁度曰 “庱亭在吳興.”하다
祖約 遣祖渙, 桓撫하여 襲湓口注+湓, 音盆, 水名, 湓口在尋陽.하니 毛寳中流矢하여 貫髀徹鞍이어늘 寳使人蹋鞍拔箭하니 血流滿鞾 還撃하여 破走之注+蹋, 踐也. 鞾, 與靴同.하다
桓彝聞京城不守하고 進屯涇縣注+彜, 自廣德進屯涇縣. 涇縣, 屬宣城郡.이러니
裨恵勸彝與峻通使하여 以紓交至之禍注+紓, 緩也. 交至之禍, 言州郡多降, 峻兵將四合而交至也.한대 彝曰
吾受國厚恩하여 義在致死하니 焉能忍恥하여 與逆臣通問注+焉, 於虔切.이리오 如其不濟 此則命也니라
彝遣將軍俞縱하여 守蘭石注+蘭石, 在涇縣東北.이러니 韓晃 攻之하여 將敗
左右勸退軍한대 縱曰 吾受桓侯恩厚하니 當以死報 吾之不可負桓侯 猶桓侯之不負國也라하고 遂力戰而死하다
遂進軍이러니 至是城陷하니 執彝殺之하다
秋七月 後趙攻壽春하니 衆潰하여 奔歴陽하다
祖約諸將 陰與後趙通謀하여 許爲内應이러니 後趙石聰 引兵濟淮하여 攻壽春하니 衆潰하여 奔歴陽하다
八月 後趙攻趙蒲阪이어늘 趙主曜撃破走之하고 遂攻金墉하다
石虎帥衆四萬하고 撃趙하여 攻蒲阪이어늘 趙主曜自將救之하니 虎懼하여 引退
曜追及하여 與戰하여 大破之하고 斬其將石瞻하고 枕尸二百餘里하니 虎奔朝歌하다
曜攻石生於金墉하여 决千金堨以灌之注+堨, 音竭, 堰也. 水經註 “河南縣城東十五里, 有千金堨.” 洛陽記曰 “千金堨, 舊堰穀水, 魏時更修此堰, 謂之千金堨.”하니 滎陽, 野王 皆降이라 襄國 大震注+野王縣, 自漢以來, 屬河內郡, 後趙始置郡也.이러라
腹心路永, 賈寧 勸峻盡誅諸大臣하고 更樹腹心호되 雅敬司徒導하여 不許하니 永等 更貳於峻이어늘 導使袁躭誘永하여 與皆奔白石注+耽, 渙之曾孫也.하다
西軍 與峻久相持不决하니 温嶠軍 食盡하여 貸於陶侃하다하여 欲西歸어늘 嶠曰
凡師克在和 古之善教也 光武之濟昆陽 曹公之拔官渡 以寡敵衆 杖義故也注+濟昆陽, 見漢帝玄更始元年, 拔官渡, 見漢獻帝建安五年.
峻, 約小豎 凶逆滔天하니 何憂不滅이리오 奈何捨垂立之功하고 設進退之計乎 且天子幽逼하고 社稷危殆하니 乃臣子肝腦塗地之日이라
嶠等 與公竝受國恩하니 事若克濟 則臣主同祚 如其不捷이면 當灰身以謝先帝耳 今之事勢 義無旋踵이라 譬如騎虎하니 安可中下哉
公若違衆獨返이면 人心必沮리니 沮衆敗事 義旗將廻하여 指於公矣리라
毛寳説侃曰
軍政 有進無退하니 非直整齊三軍하여 示衆必死而已 亦謂退無所據하여 終至滅亡이니
可試與寳兵하여 斷賊資糧하여 若不立效어든 然後 公去하시면 人心不恨矣리이다
然而遣之하다 竟陵太守李陽 説侃曰注+惠帝元康九年, 分江夏西界, 立竟陵郡. 大事不濟 公雖有粟이나 安得而食諸리오 乃分米五萬石하여 以餉嶠軍하다
寳燒峻句容湖孰積聚하니 峻軍乏食이라 遂不去注+句容․湖孰二縣, 屬丹楊郡.하다
韓晃等 急攻大業壘하니 郗鑒參軍曹納曰 大業 京口之扞蔽也 一旦不守 則賊兵至矣리니 請還廣陵하여 以俟後舉라한대
大會僚佐하고 責納하여 將斬之러니 久乃得釋하다
将救大業할새 長史殷羨曰注+羨, 隆之兄也. 吾兵 不習歩戰하니 不如急攻石頭 則大業自解注+謂急攻蘇峻, 晃等必還救之, 大業之兵自解.하리이다
從之하여 督水軍하여 向石頭하고 亮, 嶠帥歩兵萬人하고 從白石南上하니 將八千人逆戰이러니
乘醉突陣하여 不得入注+陳讀曰陣.하고 将囘 馬躓어늘 侃部將 斬之하니 三軍 皆稱萬歲하고 餘衆 大潰하다
峻司馬任讓等 共立峻弟逸爲主하고 閉城自守어늘 嶠乃立行臺하고 布告遠近하여 凡故吏二千石以下 皆令赴臺하니 於是 至者雲集이러라
冬十二月 後趙王勒 大破趙兵於洛陽하고 하다
後趙王勒 欲自將救洛陽하니 程遐等 固諫이어늘 大怒하여 按劒叱遐等出하고 召徐光하여 謂曰
庸人之情 皆謂劉曜鋒不可當이어니와 曜帯甲十萬으로 攻一城而百日不克하여 師老卒怠하니 以我初鋭擊之 可一戰而擒也
若洛陽不守 曜必自河以北으로 席捲而來하리니 吾事去矣 卿以爲何如
對曰 曜不能進臨襄國하고 更守金墉하니 此其無能爲 可知也 以大王威略臨之하시면 彼必望旗奔敗하리니 平定天下 在今一舉矣니이다
笑曰 光言 是也라하고 乃使内外戒嚴하고 命石堪等하여 會滎陽하고 石虎進據石門注+水經註 “漢靈帝於敖城西北, 壘石爲門, 以遏浚儀渠口, 謂之石門, 而滎瀆受河水, 亦有石門.”하다
自統歩騎하고 濟自大堨注+水經註 “石勒襲劉曜, 塗出延津, 以河冰泮爲神靈之助, 號是處爲靈昌津.”하여 謂光曰 曜盛兵成皐關 上策也 阻洛水 其次也 坐守洛陽이면 此成擒耳니라
至成皐하여 見趙無守兵하고 大喜하여 舉手加額曰 天也라하고 卷甲銜枚하여 詭道兼行하여 出於鞏, 訾之間注+鞏縣, 屬河南郡, 有東訾城.하다
曜専與嬖臣飲博하고 不撫士卒하며 左右或諫이면 曜以爲妖言이라하고 斬之러니
俄而 洛水候者 與後趙前鋒交戰하여 擒羯送之하니 曜問之하여 知勒自來하고 色變하여 使攝金墉之圍하고 陳於洛西하니 衆十餘萬이요 南北十餘里注+攝, 收也. 陳, 讀曰陣, 下揮陳同.러라
望見하고 曰 可以賀我矣라하고 帥歩騎四萬하여 入洛陽城하다
虎引歩卒하여 攻趙中軍하고 堪以精騎 撃其前鋒하여 大戰於西陽門注+西陽門, 卽洛城宣陽門也, 城西面南頭第一門. 或曰 “西陽門, 卽第二門西明門也.”이러니 躬貫甲胄하고 出閶闔門하여 夾撃之注+閶闔門, 洛城西面北頭門.하니
曜素嗜酒 至是將戰 飲數斗러니 至西陽門하여 揮陳就平 因而乘之하니 趙兵 大潰 曜昏醉墜馬하여 爲堪所執하니
下令曰 所欲擒者 一人耳 今已獲之하니 其抑鋒止鋭하여 縱其歸命之路하라
曜至襄國하니 嚴兵圍守하고 使曜與其太子熙書하여 諭令速降한대 曜但勅熙與諸大臣하여 匡維社稷하고 勿以吾易意라하여늘 乃殺之하다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화咸和 3년이다.
[] 조주趙主(전조前趙) 유요劉曜 광초光初 11년이고, 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태화太和 원년이다.
[] 봄 정월에 온교溫嶠가 군대를 이끌고 국난에 달려와서 심양尋陽에 이르렀다.
2월에 상서령尙書令성양공成陽公 변곤卞壼이 군대를 독려하여 소준蘇峻을 토벌하였다가 패전하여 죽었다. 유량庾亮심양尋陽으로 달아나니, 소준의 군대가 대궐을 침범하였다.
[] 온교溫嶠건강建康을 구원하고자 하여 심양尋陽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한황韓晃자호慈湖에서 사마류司馬流를 습격하였다. 사마류는 평소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장차 적과 싸우려 할 적에 〈긴장하여〉 불고기를 먹으면서 입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는데, 군대가 패하여 죽었다.
소준蘇峻횡강横江으로 건너오니, 대병臺兵(조정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였다.
도회陶囘유량庾亮에게 이르기를 “소준은 석두성石頭城에 강력한 수비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소단양小丹楊注+① 元帝가 남쪽으로 강을 건너올 적에 建康에 丹陽尹을 설치하여 臺城의 서쪽에 치소를 마련하였는데, 丹楊太守는 옛날 秣陵縣을 치소로 하니, 세속에서는 이곳을 小丹楊이라 하였다. 남쪽 길을 따라 걸어올 것입니다. 마땅히 여기에 군대를 매복하여 요격하여야 하니, 이렇게 하면 일전一戰에 소준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유량은 따르지 않았다.
소준이 과연 도회의 말처럼 〈소단양의 길을 따라오다가〉 밤중에 길을 잃어 더 이상 부대에 질서가 없게 되었다. 그제야 유량은 후회하였다.
조정의 선비들이 대부분 집안 식구들을 동쪽(오군吳郡회계군會稽郡)으로注+② 建康에서는 吳郡과 會稽郡을 동쪽이라고 하였다. 들여보내 피난하게 하였으나, 좌위장군左衛將軍注+③ ≪晉書≫ 〈職官志〉에 “文帝(司馬昭)가 처음 中衛將軍과 衛將軍을 설치하였는데, 武帝(司馬炎)가 天命을 받아 황제가 되자 〈중위장군을〉 나누어 左衛將軍과 右衛將軍을 만들었다.” 하였다. 유초劉超는 홀로 처자식을 옮겨 궁내宫内로 들어가 거처하게 하였다.
[] 조령詔令을 내려 변곤卞壼에게 대항大桁(주작항朱雀航) 동쪽의 여러 군대를 도독하여 서릉西陵에서 소준蘇峻과 싸우게 하였는데, 대패하였다.
소준이 청계책青溪柵注+① 靑溪水는 鍾山에서 발원하여 秦淮河로 이어지는데, 吳나라 孫權이 성 북쪽에 塹濠를 파서 玄武湖에 물을 유입하였다. 공격하자 변곤이 또다시 맞서 공격하였는데, 소준이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서 대성臺省注+② 杜佑가 말하기를 “宋나라와 齊나라에서는 三臺와 五省이라는 칭호가 있었으니, 는 兩漢 때의 옛 이름이고, 五省은 尙書省, 中書省, 門下省, 秘書省, 集書省을 이른다.” 하였다. 여러 건물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변곤은 등창이 막 나았으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병을 무릅쓰고 괴롭게 싸우다가 죽었고, 변곤의 두 아들인 변진卞眕(변진)과 변휴卞盱(변휴)도 그를 뒤따라 달려가 적과 싸우다가 죽으니, 그 어머니가 이들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통곡하기를 “아버지는 충신이 되고 자식은 효자가 되었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 단양윤丹楊尹 양만羊曼황문시랑黄門侍郎 주도周導여강태수廬江太守 도첨陶瞻이 모두 싸우다가 죽었는데, 도첨은 도간陶侃의 아들이다.
유량庾亮곽묵郭黙, 조윤趙胤과 함께 모두 심양尋陽으로 달아났는데,注+① 〈“俱奔尋陽”은 尋陽의〉 溫嶠에게 의지한 것이다. 길을 떠나려 할 적에 시중侍中종아鍾雅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후의 일을 깊이 부탁하노라.” 하니, 종아가 말하기를 “대들보가 부러지고 서까래가注+② 榱(서까래)는 所追의 切이니, 秦나라에서는 屋椽이라 하고, 齊지역과 魯지역에서는 桷이라 하고, 周나라에서는 榱라 하였다. 무너진 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하였다.
[] 소준蘇峻의 군대가 대성臺城으로 쳐들어오니, 사도司徒 왕도王導시중侍中 저삽褚翜(저삽)에게 이르기를 “지존至尊을 마땅히 정전正殿으로 모셔야 한다.” 하였다.注+① 臺城은 바로 宮城이니, 建康城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翜은 所甲의 切이다.
저삽이 즉시 들어가 황제( 성제成帝)를 안고서 태극전전太極前殿으로 오르자, 왕도와 광록대부光禄大夫 육엽陸曄(육엽), 순숭荀崧(순숭)과 상서尙書 장개張闓(장개)가 함께 어상御床에 올라 황제를 호위하고, 유초劉超종아鍾雅와 저삽이 황제의 좌우에서 모시고 서고, 태상太常 공유孔愉조복朝服을 입고 종묘宗廟를 지켰다.
소준의 군대가 궁중으로 쳐들어와서 저삽을 나무라고 내려가게 하자, 저삽이 꾸짖기를 “소관군蘇冠軍注+② 蘇峻이 먼저 沈充을 토벌한 공으로 冠軍將軍으로 승진하였으므로, 그를 蘇冠軍이라고 칭한 것이다. 와서 지존至尊을 뵈려 하는데, 군인들이 어찌 우리를 침해하고 핍박하는가.” 하였다.
소준의 군대가 감히 궁전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후궁後宫으로 뛰어들어가니, 궁녀들 모두가 약탈을 당하였다. 또 소준의 군대는 백관百官을 마구 부리고 성인 남녀의 옷을 벗기고 찢어서注+③ 裸는 옷을 벗음이요, 剝은 옷을 찢음이다. 나체로 만들었다.
[] 관청의 창고에 삼베 20만 필과 금은 5천 근과 돈 억만 전과 비단 수만 필이 있었는데, 소준蘇峻이 모두 써버렸다.
혹자가 종아鍾雅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성품은 성실하고 정직하니, 반드시 원수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일찍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 하자, 종아가 말하기를 “나라가 혼란할 때 바로잡지 못하고 임금이 위태로울 때 구제하지 못하고 각각 도망하여 화를 면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신하라 하겠는가.” 하였다.
[] 소준蘇峻은, 왕도王導가 덕망이 있다 하여 그대로 본래의 관직을 가지고서 자신의 위에 있게 하고, 조약祖約태위太尉로 삼고, 소준 자신은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익양왕弋陽王 사마양司馬羕이 소준에게 나아와 공덕을 칭찬하자, 소준은 그를 다시 태재太宰 서양왕西陽王으로 삼았다.
[] 온교温嶠건강建康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부짖고 슬퍼하였으며, 안부를 물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마주보며 슬피 통곡하였다.
유량庾亮심양尋陽에 이르러서 태후太后조령詔令을 선포하여 온교를 표기장군驃騎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자, 온교가 말하기를 “지금은 마땅히 역적을 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니, 아직 공이 있지 않은데 먼저 관직을 제수하면, 무엇을 가지고 천하 사람들에게 밝게 보이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받지 않았다.
온교는 평소 유량을 소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유량이 비록 패하여 달아났으나, 온교는 더욱 그를 추대하고 받들어 병력을 나누어 주었다.
[] 3월에 〈나라(동진東晉)〉 황태후皇太后 유씨庾氏가 근심하다가 하였다.
소준蘇峻이 남쪽으로 우호于湖에 주둔하였다.
[] 명목황후明穆皇后( 성제成帝의 모친)를 장례하였다.
[] 여름 5월에 온교温嶠도간陶侃을 데리고 들어와 소준蘇峻을 토벌하니, 소준이 황제( 성제成帝)를 석두성石頭城으로 옮겼다.
치감郗鑒왕서王舒가 국난에 달려왔다.
[] 온교温嶠가 장차 소준蘇峻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건강建康의 소식을注+① 聞(소식)은 音이 問이다. 알지 못하였다.
마침 범왕范汪이 와서 “소준은 정령政令이 통일되지 못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니, 비록 세력이 강하나 쉽게 약해질 것입니다. 적시適時에 진격하여 토벌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온교는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侃嶠會兵討蘇峻侃嶠會兵討蘇峻
유량庾亮은 범왕을 징소徵召하여 참호군사參護軍事로 삼고, 〈스스로〉 온교와 함께 맹주盟主로 추대되었는데, 온교의 종제從弟온충溫充이 말하기를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도간陶侃은 지위가 막중하고 군대가 강하니, 마땅히 그도 함께 맹주로 추대해야 합니다.”注+② 陶侃은 이때 征西大將軍이 되어서 荊州, 湘州, 雍州, 梁州를 도독하여 長江의 상류 지역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였다. 하였다.
온교가 이에 독호督護왕건기王愆期를 보내어 형주荆州에 가서 도간에게 청하여 함께 국난에 달려오게 하였는데, 도간은 오히려 자신이 고명顧命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면서 답하기를 “나는 변경에 진주하는 외장外將(지방에 있는 무장)이니, 감히 맡은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注+③ 〈“吾疆埸外將 不敢越局”은〉 안에서 군주를 보필하고 밖에서 적을 막음에 각각 맡은 부분이 있어서, 감히 그 영역을 넘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온교가 여러 번 설득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자, 마침내 사자를注+④ 使(사신)는 疏吏의 切이니, 아래도 같다. 보내어 이르기를 “인공仁公注+⑤ 漢․魏 이래로 宰輔와 岳牧을 모두 明公이라고 불렀다. 지금 温嶠가 陶侃을 仁公이라고 부른 것은 천하가 仁을 허여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晉나라의 이 모두 도간을 推重함을 말한 것이다. 우선 이곳을 수비하라. 나는 마땅히 먼저 내려가겠다.” 하였다.
사자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뒤에 참군參軍 모보毛寳가 이 말을 듣고 온교温嶠를 설득하기를
“군대의 승리는 인화人和에 달려 있으니, 피차의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도간陶侃에게 의심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겉으로는 모르는 체 해야 하니, 마땅히 급히 사자를注+⑥ 信은 바로 사신이다. 쫓아가 돌아오게 하여 편지를 다시 써서 반드시 함께 진격하자고 말해야 될 것이요, 만약 사자를 따라잡지 못하면 다시 사자를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온교가 그의 말을 따랐다.
[] 도간陶侃이 과연 독호督護 공등龔登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온교温嶠에게 가게 하니, 온교는 7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상서성尙書省에 글을 올릴 적에 도간의 이름을 나란히 올리고注+① 上(올린다)은 時掌의 切이다. 도간을 盟主로 삼아서, 庾亮, 温嶠와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여 尙書省에 올린 것이다. 조약祖約소준蘇峻의 죄상을 나열하고서 4과 4의 장군에게 통보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배에 올랐다.
[] 도간陶侃이 다시 〈사람을 보내〉 공등龔登을 쫓아가서 돌아오게 하였는데, 온교温嶠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었다.
“군대는 전진만 있고 후퇴가 없으니, 병력을 증원할 수는 있어도 줄여서는 안 됩니다. 근간에 이미 원근에 격문을 돌리고 맹부盟府에게도注+① 盟府는 陶侃의 府를 이르니, 도간이 盟主가 되었으므로 맹부라고 칭한 것이다. 말하였으니, 인공仁公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서 곧 함께 전진해야 하는데, 이제 도리어 군대를 쫓아가서 돌아가게 하여 원근을 의혹하게 하니, 성패成敗의 이유가 아마도 이번 일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를 지켜내지 못하면, 장래의 형초荆楚 지역의 위태로움은 응당 지금의 강주江州의 처지보다 심할 것입니다. 인공仁公은, 나아가서는 마땅히 대진大晉의 충신이 되어 환공桓公 문공文公에 참여하여야 하고, 물러나서는 마땅히 자애로운 아버지의 으로 사랑하는 자식의 애통함을 설욕하여야 합니다.注+② 〈“雪愛子之痛”은〉 도간의 아들 陶瞻이 蘇峻에게 살해당한 것을 이른다.
소준蘇峻조약祖約무도無道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고 있으니, 지금 전진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돌로 계란을 깨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군대를 불러 돌아간다면, 이는 거의 성공한 즈음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또 혹자는 마침내 인공仁公이 역적을 토벌하는 데 느슨했다고 할 것이니, 이러한 소문은 뒤따라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깊이 살피기를 바랍니다.”
왕건기王愆期 또한 도간에게 이르기를 “소준은 시랑豺狼과 같은 인물이니, 그가 만일 뜻을 얻는다면 이 어찌 발을 붙일 땅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도간은 깊이 감동하여 깨닫고는 즉시 군복을 입고 배에 올라서, 아들 도첨陶瞻의 시신이 왔는데도 가서 곡하지 않고,注+③ 臨(臨哭하다)은 力鴆의 切이다. 행군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전진하였다.
[] 치감郗鑒광릉廣陵에 있을 적에, 은 고립되고 양식은 부족하며 오랑캐(후조後趙)들과 근접하니, 사람들이 성을 지키려는 견고한 뜻이 없었다. 그런데 〈소준蘇峻을 토벌하라는〉 조서詔書를 받자, 즉시 눈물을 흘리면서 장병들과 맹세하고 국난에 달려가니, 장병들이 다투어 분발하였다.
치감은 장군將軍 하후장夏侯長 등을 보내어 사잇길로 가서 온교温嶠에게 이르기를
“혹 듣자 하니, 역적이 천자天子( 성제成帝)를 협박하여 동쪽으로 회계會稽에 들어가고자 한다고 합니다. 마땅히 먼저 보루를 세우고 요해처要害處에 주둔하여 경계를 넘어 도망하는 적을 막고 또 적의 군량이 운송되는 것을 차단해야 하니, 그런 뒤에 를 하여 적을 기다려야 합니다. 적이 성을 공격하여도 함락하지 못하고 들에 노략질할 것이 없으면, 반드시 스스로 궤멸할 것입니다.” 하니,
온교는 그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 5월에 도간陶侃심양尋陽에 도착하자,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도간이 유량庾亮주살誅殺하여 천하에 사죄하고자 한다.” 하니, 유량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유량이 온교温嶠의 계책을 따라 도간에게 찾아가 절하고 사죄하자, 도간이 놀라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유원규庾元規가 마침내 도사행陶士行에게 절을 한단 말인가.”注+① 元規는 庾亮의 자이고, 士行은 陶侃의 자이다. 하였다.
유량이 죄를 인정하고 자책하니, 도간은 마침내 마음을 풀고 말하기를 “군후君侯석두성石頭城을 수축하여 늙은 나를 대비하려고 하였는데,注+② 〈“君侯修石頭以擬老子”는〉 咸和 원년(326) 가을에 庾亮이 石頭城을 수축하여 陶侃을 대비한 일을 이른다. 오늘날 도리어 나에게 부탁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함께 건강建康으로 달려가니, 병졸이 4만이고 깃발이 7백여 리에 뻗쳐 있었다.
[] 소준蘇峻이 이 말을 듣고 고숙姑孰에서 돌아와 황제( 성제成帝)를 석두성石頭城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굳이 말렸으나 따르지 않았다.
황제가 슬피 울면서 수레에 올랐는데, 이때 큰비가 내려 온통 진흙탕이었다. 유초劉超종아鍾雅가 도보로 황제를 좌우에서 모셨다. 소준이 이들에게 말을 주었으나 타려 하지 않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니, 소준은 이들을 미워하였다.
소준이 창고를 황제의 궁궐로 삼고 날마다 추악한 말을 마구 하니, 유초와 종아가 순숭荀崧, 화항華恒, 정담丁潭 등과 함께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기근이 들어 쌀이 귀하였으나, 유초는 소준이 주는 물건을 하나도 받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고서注+① “繾綣”은 굳게 서로 붙어 있는 뜻이니, “繾綣朝夕”은 아침저녁으로 잠시도 떠나가지 않음을 이른다. 신하의 예절을 더욱 공경히 행하였다.
또 비록 갇혀 곤궁한 가운데 있었으나 황제를 인도하여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가르쳐주었다.
[] 왕도王導가 은밀히 장개張闓로 하여금 태후太后조령詔令을 가지고 삼오三吳 지역에 선유宣諭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하니, 회계내사會稽内史 왕서王舒유빙庾冰으로注+① 庾冰은 庾亮의 아우이다. 하여금 1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서쪽으로 절강浙江을 건너가게 하였다.
이때 오흥태수吳興太守 우담虞潭注+② 虞潭은 虞翻의 손자이다. 오국내사吴國内史 채모蔡謨, 의흥태수義興太守 고중顧衆 등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우담의 어머니 손씨孫氏는 우담에게 이르기를 “너는 마땅히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해야 하니, 늙은 나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말라.” 하고는, 집안에 있는 종들을 모두 보내어 종군從軍하게 하고 가락지와 패물을 팔아 군비軍費에 보태게 하였다.
[] 소준蘇峻이 자기의 장수 관상管商 등을 보내어 이들을 막게 하였다. 도간陶侃온교温嶠가자포茄子浦注+① 茄는 求加의 切이다. 이 지역은 茄子(가지)를 재배하기에 적합해서, 사람들이 여기에 이것을 많이 심었으므로 인하여 포구 이름을 茄子浦라 한 듯하다. 살펴보건대 ≪水經注≫에 “石頭城 서쪽에 蔡洲가 마주하고 있는데, 길이가 1백 리로 위에 大荻浦가 있고 아래에 茄子浦가 있다.” 하였다. 주둔하고 있었는데, 온교가 생각하기를 남쪽 병사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고 소준의 군사들은 보전步戰에 익숙하다 하여,注+② 남쪽 군대는 陶侃과 温嶠의 군대를 이른다. “便步”는 步戰에 익숙함을 이른다. 장병들 중에 강안江岸에 오르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명하였다.
마침 소준이 쌀 만 섬을 조약祖約에게 보내주자, 모보毛寳가 온교의 선봉대가 되어 자기의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군령軍令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어찌 적을 공격할 만한 틈이 있음을 보고도 강안江岸에 올라가 공격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가서 기습하여 곡식을 탈취하니, 조약의 군대가 이 때문에 굶주려 궁핍하였다.
온교가 표문을 올려 모보를 여강태수廬江太守로 삼고, 도간은 표문을 올려 왕서王舒우담虞潭감절동군사監浙東軍事, 감절서군사監浙西軍事로 삼고 치감郗鑒도독양주팔군군사都督揚州八郡軍事로 삼았다.
치감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와서 도간 등과 회합하여 수군이 곧바로 석두성石頭城으로 나아가니, 소준이 이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 도간陶侃부장部將 이근李根백석루白石壘注+① 白石壘는 石頭城 동북쪽에 있는데, 지극히 높고 견고하다. 구축할 것을 청하자, 도간이 유량庾亮으로 하여금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소준蘇峻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서王舒 등이 〈소준의 군대와〉 여러 번 싸워 승리하지 못하니, 공탄孔坦이 말하기를 “본래 굳이 치공郗公을 부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를 불러들임으로써〉 마침내 동문東門의 적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마땅히 치공을 돌려보내야 하니, 비록 늦었으나 돌려보내지 않는 것보다注+② 不(그렇게 하지 않다)는 否로 읽는다. 오히려 낫습니다.” 하였다.
도간은 이에 치감郗鑒으로 하여금 돌아가 경구京口를 점거하게 하고, 대업大業곡아曲阿, 능정庱亭(능정)의注+③ 曲阿는 秦나라 雲陽縣이니, 前漢 때에는 會稽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吳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毗陵郡에 속하였다. 大業은 마을의 이름이니, 曲阿의 북쪽에 있다. 庱은 音이 陵이다. 丁度가 “庱亭은 吳興에 있다.” 하였다.보루堡壘를 세워 소준의 병력을 분산시켰다.
[] 조약祖約조환祖渙환무桓撫를 보내어 분구湓口注+① 湓은 音이 盆으로 물 이름이니, 湓口는 尋陽에 있다. 기습하자, 모보毛寳유시流矢에 맞아 넓적다리를 관통하여 안장까지 뚫렸다. 모보가 사람을 시켜 안장을 밟고 화살을 뽑게 하니, 피가 흘러 신에 가득하였다.注+② 蹋는 밟음이다. 鞾(신)는 靴와 같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공격하여 조약을 패주시켰다.
[] 소준蘇峻이 군대를 나누어 선성宣城을 함락하니, 선성내사宣城内史 환이桓彝가 이때 죽었다.
[] 환이桓彝경성京城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진군하여 경현涇縣에 주둔하고 있었다.注+① 桓彝는 廣德에서 전진하여 涇縣에 주둔하였으니, 涇縣은 宣城郡에 속하였다.
비혜裨恵가 환이에게 소준蘇峻과 사신을 통하여 사방에서 몰려드는 화를 늦추라고 권하자,注+② 紓는 늦춤이다. “交至의 禍”는 州郡이 대부분 적에게 항복하여 蘇峻의 군대가 장차 사방에서 모여 닥쳐오리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환이는 말하기를
“나는 나라의 큰 은혜를 받아서 의리상 죽음을 바쳐야 할 입장에 있으니, 어찌注+③ 焉(어찌)은 於虔의 切이다. 치욕을 참고서 역신逆臣과 안부를 통하겠는가. 만약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는 운명이다.” 하였다.
환이가 장군 유종俞縱을 보내어 난석蘭石注+④ 蘭石은 涇縣의 동북쪽에 있다. 지키게 하였는데, 한황韓晃이 그를 공격하여 유종이 거의 패할 지경에 이르렀다.
좌우左右 사람들이 유종에게 군대를 후퇴시킬 것을 권하자, 유종이 말하기를 “나는 환후桓侯(환이)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죽음으로써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 내가 환후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은 환후가 나라를 저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하고는, 마침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한황이 마침내 진군하였는데, 이때 이 함락되니, 환이를 잡아 죽였다.
[] 가을 7월에 후조後趙수춘壽春을 공격하니, 조약祖約의 군대가 궤멸하여 역양歴陽으로 달아났다.
[] 조약祖約의 여러 장수들이 은밀히 후조後趙와 내통하여 내응内應이 되기로 허락하였는데, 후조後趙석총石聰이 군대를 이끌고 회수淮水를 건너가서 수춘壽春을 공격하니, 조약의 군대가 궤멸하여 역양歴陽으로 달아났다.
[] 8월에 후조後趙나라(전조前趙)의 포판蒲阪을 공격하자, 조주趙主 유요劉曜가 격파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금용金墉을 공격하였다.
[] 석호石虎가 4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나라로 진격하여 포판蒲阪을 공격하자, 조주趙主 유요劉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구원하니, 석호가 두려워하여 병력을 이끌고 후퇴하였다.
유요가 석호의 군대를 추격하여 따라잡아 싸워 대파하고 그 장수 석첨石瞻을 참수하였으며 또 시신이 2백여 리에 널려 있으니, 석호가 조가朝歌로 달아났다.
유요가 석생石生금용金墉에서 공격하면서 천금알千金堨(천금알)을注+① 堨은 音이 竭이니, 제방이다. ≪水經註≫에 “河南縣 城 동쪽 15리 지점에 千金堨이 있다.” 하였고, ≪洛陽記≫에 “千金堨은 옛날에 穀水를 막는 역할을 하였는데, 魏나라 때 다시 이 제방을 수축하고 千金堨이라고 했다.” 하였다. 터서 금용에 물을 대니, 형양滎陽야왕野王注+② 野王縣은 漢나라 이래로 河內郡에 속하였는데, 後趙 때에 처음 郡을 설치하였다. 지역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후조後趙의 도성인〉 양국襄國이 크게 진동하였다.
[] 9월에 도간陶侃온교温嶠석두성石頭城에서 소준蘇峻을 토벌하여 참수하니, 소준의 아우 소일蘇逸이 대신 그 병력을 통솔하였다.
[] 소준蘇峻의 심복인 노영路永가녕賈寧이 소준에게 여러 대신을 모두 죽이고 다시 심복을 세우라고 권하였으나, 소준은 평소 사도司徒 왕도王導를 공경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으니, 노영 등은 다시 소준에게 두 마음을 품었다. 이에 왕도는 원탐袁躭(원탐)으로注+① 袁耽은 袁渙의 증손이다. 하여금 노영을 유인하여 함께 모두 백석루白石壘로 달아나게 하였다.
[] 〈도간陶侃온교温嶠의〉 서군西軍소준蘇峻과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여 승부를 결단하지 못하니, 온교의 군대가 양식이 다하여 도간에게 식량을 빌리려 하였다. 도간이 노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온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군대의 승리는 화합에 달려 있으니, 이는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광무제光武帝곤양성昆陽城에서 왕망王莽의 군대에게 승리하고 조조曹操관도官渡에서 원소袁紹를 격파할 적에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注+① 光武帝가 昆陽城에서 이긴 일은 漢帝 劉玄 更始 원년(23)에 보이고, 曹操가 官渡에서 적진을 함락한 일은 漢나라 獻帝 建安 5년(200)에 보인다. 대의大義를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소준과 조약祖約은 흉악하고 패역하여 죄악이 하늘을 찌르니, 어찌 이들이 멸망하지 않을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어찌하여 거의 다 이룬 을 버리고 진퇴進退하는 계책을 세우십니까. 또 천자가 유폐당하여 핍박을 받고 사직이 위태로우니, 이는 바로 신자臣子가 충절을 다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과 함께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일이 만약 성공한다면 신하와 군주가 함께 복을 받을 것이요, 만일 승리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 선제先帝에게 사죄할 뿐입니다. 지금의 사세事勢는 의리상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어서 비유하면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세와 같으니, 어찌 중간에 내릴 수 있겠습니까.
공이 만약 여러 사람의 의견을 저버리고 홀로 돌아가시면 민심이 반드시 저상沮喪될 것이니, 여러 사람을 저상시켜 일이 실패하게 된다면, 의로운 군대의 깃발이 장차 방향을 바꿔 에게로 향할 것입니다.”
[] 모보毛寳도간陶侃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군대의 일은 전진만 있고 후퇴가 없으니, 단지 삼군三軍을 정돈해서 장병들에게 필사必死의 각오를 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후퇴하면 의거할 곳이 없어서 끝내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한번 저에게 병력을 주어서 적의 물자와 식량을 수송하는 길을 차단하게 해주십시오. 만약 공을 이루지 못하거든, 그런 뒤에 께서 떠나신다면, 인심이 공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간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모보를 보내었다. 경릉태수竟陵太守注+① 晉 惠帝 元康 9년(299)에 江夏의 서쪽 경계를 나누어 竟陵郡을 세웠다. 이양李陽이 도간을 설득하기를 “큰일을 이루지 못하면, 공이 아무리 많은 곡식을 갖고 있다 해도 어떻게 그 곡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도간은 마침내 쌀 5만 석을 온교温嶠의 군대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보가 구용句容호숙湖孰注+② 句容과 湖孰 2縣은 丹楊郡에 속하였다. 쌓아놓은 소준蘇峻의 곡식을 불태우니, 소준의 군대가 양식이 궁핍하였다. 도간은 마침내 떠나가지 않았다.
[] 한황韓晃 등이 대업大業의 진영을 맹렬히 공격하니, 치감郗鑒참군參軍 조납曹納이 “대업大業경구京口를 막아주는 울타리입니다. 하루아침에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적병이 당장 몰려올 것이니, 청컨대 광릉廣陵으로 돌아가서 후일의 거사를 기다리기 바랍니다.” 하였다.
치감은 막료幕僚와 보좌관들을 크게 모아놓고 조납을 책망하여 장차 참수하려 하였다. 조납은 오랜 뒤에야 비로소 풀려났다.
[] 도간陶侃이 장차 대업大業을 구원하려 할 적에, 장사長史 은선殷羨注+① 殷羨은 殷隆의 형이다. 말하기를 “우리 병사들은 보전歩戰에 익숙하지 못하니, 급히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대업의 포위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注+② 〈“不如急攻石頭 則大業自解”는〉 급히 蘇峻을 공격하면 〈소준의 부하인〉 韓晃 등이 반드시 돌아가 石頭城을 구원할 것이므로, 大業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가 저절로 포위를 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였다.
도간이 그의 말을 따라 수군水軍을 독려하여 석두성으로 향하고, 유량庾亮온교温嶠는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백석白石의 남쪽을 따라 올라가니, 소준蘇峻이 8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다.
소준이 술에 취하여 으로注+③ 陳(진영)은 陣으로 읽는다. 돌격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말이 쓰러지자, 도간의 부장部將이 그를 참수하니 삼군三軍이 모두 만세를 부르고 남은 병력이 크게 궤멸되었다.
소준의 사마司馬 임양任讓 등이 함께 소준의 아우 소일蘇逸을 주군으로 세우고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온교는 마침내 행대行臺를 세우고 원근遠近에게 두루 통고하여 이천석二千石 이하의 옛 관리들이 모두 로 달려오게 하니, 이때에 모여든 자가 구름 떼처럼 많았다.
[] 겨울 12월에 후조왕後趙王 석륵石勒나라(전조前趙) 군대를 낙양洛陽에서 대파하고, 조주趙主 유요劉曜를 포획하여 돌아가서 죽였다.
[] 후조왕後趙王 석륵石勒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洛陽을 구원하고자 하니, 정하程遐 등이 굳이 하였다. 석륵은 크게 노하여 을 어루만지며 정하 등을 꾸짖어 내보내고, 서광徐光을 불러 이르기를
“용렬한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유요劉曜예봉銳鋒을 당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요는 갑옷으로 무장한 군대 10만으로 한 (낙양洛陽)을 공격하여 100일 동안 함락시키지 못해서 군대가 지치고 사졸士卒들이 태만하니, 우리가 갓 투입된 정예병으로 공격하면 일전一戰에 그를 사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낙양이 함락되면 유요가 반드시 황하黃河 이북으로부터 석권하여 올 것이니, 이렇게 되면 우리 일이 틀려버릴 것이다. 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서광이 대답하기를 “유요가 능히 양국襄國으로 진격하여 오지 못하고 다시 을 지키고 있으니, 이로써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왕大王의 위엄과 지략으로 그를 공격하시면, 저들은 반드시 깃발만 바라보고도 패주할 것이니,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이번의 한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석륵은 웃으며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는, 마침내 내외内外로 하여금 삼엄하게 경계하게 하였다. 또 석감石堪 등에 명하여 형양滎陽에 모이게 하고 석호石虎에게는 전진하여 석문石門注+① ≪水經註≫에 “漢나라 靈帝가 敖城의 서북쪽에 돌을 쌓아 門을 만들어 浚儀渠의 입구를 막고 이것을 石門이라 하였는데, 河水를 받아들이는 滎瀆에도 석문이 있다.” 하였다. 점거하게 하였다.
[] 석륵石勒은 직접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대알大堨로부터 〈황하黃河를〉 건너가서注+① ≪水經註≫에 “石勒이 劉曜를 습격하고자 중도에 延津을 거쳐 〈배로 건너갈 때에〉 얼어 있던 황하가 녹은 것을 신령의 도움이라 하여 이곳을 이름하여 靈昌津이라 했다.” 하였다. 서광徐光에게 이르기를 “유요劉曜성고관成皐關에 군대를 크게 진열하는 것이 상책上策이고, 낙수洛水를 막아 항거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가만히 앉아서 낙양洛陽을 지키면 이는 우리에게 사로잡히는 계책이다.” 하였다.
성고成皐에 이르러 석륵은 나라(전조前趙)에 수비병이 없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말하기를 “이는 하늘의 뜻이다.” 하고는, 군사들에게 갑옷을 말아 올려 경무장을 하고 입에 재갈을 물고서 샛길을 따라 행군 속도를 배가倍加해서 ,注+② 鞏縣은 河南郡에 속하는데, 여기에 東訾城이 있다. 지역 사이로 출동하게 하였다.
[] 유요劉曜는 오로지 총애하는 신하들과 술을 마시며 도박을 하고 사졸士卒들을 돌보지 않았다. 또 좌우 신하들 중에 혹 하는 자가 있으면, 유요는 요망한 말을 한다 하여 참수하였다.
얼마 후 낙수洛水에서 정찰하는 자가 후조後趙의 선봉대와 교전交戰하여 갈족羯族을 잡아 보냈다. 유요는 그에게 물어서 석륵石勒이 직접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빛이 변하여 금용金墉의 포위를 철수하고 낙수洛水의 서쪽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注+① 攝은 거둠이다. 陳(진영)은 陣으로 읽으니, 아래 “揮陳”도 이와 같다. 병력이 10여 만이고 진영이 남북으로 10여 리에 뻗쳐 있었다.
석륵이 이것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나에게 축하를 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리고 낙양성洛陽城으로 들어갔다.
[] 석호石虎가 보병을 인솔하여 나라(전조前趙)의 중군中軍을 공격하고 석감石堪은 정예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라의 선봉을 공격해서 서양문西陽門에서注+① 西陽門은 바로 洛陽城의 宣陽門이니, 城 서쪽 방향 남쪽 가장자리에서 첫 번째 문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서양문은 바로 두 번째 문인 西明門이다.” 하였다. 크게 싸웠는데, 석륵石勒이 몸소 갑옷과 투구를 쓰고 창합문閶闔門으로注+② 閶闔門은 洛陽城 서쪽 방향 북쪽 가장자리에서 첫 번째 문이다. 나와서 좌우에서 협공하였다.
유요劉曜는 평소 술을 좋아하여, 이때 막 싸우려 하면서도 몇 말의 술을 마셨다. 유요가 서양문에 이르러서 진영을 지휘하여 평지로 나갈 적에 석감이 그 틈을 타서 공격하니, 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하였다. 유요는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하여 말에서 떨어져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석륵이 명령을 내리기를 “내가 사로잡고자 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지금 이미 그를 사로잡았으니, 공격을 멈추어서 적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돌아갈 길을 열어주어라.” 하였다.
後趙王勒獲劉曜後趙王勒獲劉曜
[] 유요劉曜양국襄國에 이르니, 석륵石勒이 군대를 엄하게 정돈하여 포위하고 지키면서 유요로 하여금 그의 태자 유희劉煕에게 편지를 보내어 빨리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유요는 유희와 여러 대신에게 신칙하여 “함께 사직을 바로잡고, 나 때문에 마음을 바꾸지 말라.” 하였다. 석륵이 마침내 유요를 죽였다.


역주
역주1 溫嶠以兵赴難……峻兵犯闕 : “‘들어와 구원했다.’라고 쓰고 ‘국난에 달려왔다.’라고 쓴 것은 많으나, 어디까지 왔다고 쓴 경우는 없었는데, 여기에서 ‘尋陽에 이르렀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陶侃을 죄책한 것이다. 도간을 죄책한 것은 어째서인가. 温嶠가 정월에 尋陽에 이르러서 도간에게 왕복하기를 서너 번 한 뒤에야 비로소 도간이 왔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여기서는 ‘정월에 심양에 이르렀다.’라고 썼고, 뒤에서는 ‘5월에 도간을 데리고 들어와 蘇峻을 토벌했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머뭇거리고 지체한 죄가 도간에게 있는 것이다.[書入援 書赴難 多矣 未有書所至者 此其書至尋陽 何 罪侃也 其罪侃 何 嶠以正月至尋陽 往復數四 方能致侃 綱目 此書正月至尋陽 後書五月以陶侃入討峻 則逗遛之罪 有在矣]” ≪書法≫
“앞에서는 ‘蘇峻을 徵召하였다.’라고 썼으니 소준의 배반은 비록 그 발단이 유량에게서 말미암았으나 다만 아직까지는 유량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고, 다음에는 ‘詔令을 내려 유량에게 諸軍을 감독하여 토벌하게 했다.’라고 썼으니 역적을 토벌하는 책임을 유량이 담당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卞壼이 군대를 독려하여 소준을 토벌하였다가 패전하여 죽었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역적을 막아 싸운 일은 변곤에게 있고 유량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또 ‘유량이 尋陽으로 달아나니, 소준의 군대가 대궐을 침범했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유량이 난을 당하여 군주를 버리고 달아나 도망해서 구차히 죽음을 면했으니, 그 죄를 애초에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준은 이리의 야심을 품고 있는데, 유량이 그를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고서 마침내 대번에 召命을 반포하여 그의 반역을 자초하였다. 막 유량이 詔命을 내릴 초기에 온 조정에서 불가하다 하였으나 유량은 끝내 간언을 따르지 않고 고집스레 자기 뜻대로 하였으니 그 첫 번째 잘못이다. 온교가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고자 하였고 三吳 지역에서 군대를 일으켜 국난에 달려오고자 하였는데 유량이 모두 거절하였으니 그 두 번째 잘못이다. 孔坦이 阜陵을 차단하고 當利의 여러 어구들을 지킬 것을 청하였으나 유량이 따르지 않았으니 그 세 번째 잘못이다. 陶囘가 小丹楊의 남쪽 길에 매복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나 유량이 또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네 번째 잘못이다.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兵亂을 일으켜 禍를 초래한 것을 실로 누가 주장하였는가. 나라가 격파되고 군주가 위태로워서 종묘사직이 지켜지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유량은 이때 목숨을 바쳐서 천하에 사죄하지 못하고 막 머리를 감싸 쥐고 쥐처럼 풀숲에 숨어서 구차하게 살기를 바랐으니, 이때 만일 溫嶠 등 諸賢이 힘을 다하여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다면 晉나라의 종묘는 반드시 血食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량이 비록 만 번 죽더라도 보탬이 될 것이 없다. 오직 前後에 쓴 것을 모아 보면 유량의 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나라를 그르침이 이와 같은데도 誅責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前書召峻 峻反 雖釁由庾亮 特未見其罪也 次書詔亮督諸軍討之 則討賊之責 亮當之矣 今此書卞壺督軍討峻 戰敗死之 則拒戰之事 在壼而不在亮也 又書亮奔尋陽 峻兵犯闕 則亮臨難棄君 奔竄茍免 其罪始不可逃矣 夫峻狼子野心 亮既不能思所處之 而乃遽頒召命 自速其反 方其下詔之初 舉朝以爲不可 亮乃愎諫自用 其失一也 温嶠欲帥衆入衛 三吳欲起兵赴難 亮皆拒之 其失二也 孔坦請斷阜陵 守當利諸口 而亮不從 其失三也 陶囘請伏兵小丹楊南道 亮又不許 其失四也 由是而觀 召釁稔禍 誰實尸之 至於國破君危 宗社不守 亮不能於此灰身以謝天下 方且奉頭鼠竄 草間求活 向非温嶠諸賢戮力討賊 則晉氏必不血食 亮雖萬死 猶爲無補 惟合前後所書而觀 則亮之罪 蓋有不容言者 誤國若此 尙可不加誅責乎]” ≪發明≫
역주2 三臺 : 中臺(尙書)․憲臺(御史)․外臺(謁者)이다.
역주3 皇太后庾氏以憂崩……葬明穆皇后 : “‘근심하다가[以憂]’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庾亮을 죄책한 것이다. 유량이 衆論을 어겨서 맨 처음 禍의 단서가 생겼는데, 元帥가 되어서는 군대가 패하자 자신만 도망해서 근심이 國母에 이르렀으니, 그 죄가 크다. ≪資治通鑑綱目≫에서 ‘靈思皇后를 장례했다.’라고 쓴 이후로는 后에 대하여 장례했다고 쓴 경우가 없다가 晉나라에 이른 뒤에야 썼고, 晉后에 대하여 이때 처음으로 崩하여 장례했다고 썼으니, 이전에는 시해하여 죽인 경우가 아니면 오랑캐의 병란에 빠졌을 때에만 썼을 뿐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나도록 ‘태후가 근심하다가 崩하였다.’, ‘태후가 근심하다가 卒하였다.’라고 쓴 것이 3번이다.(秦나라 芈氏, 晉나라 庾氏, 苻秦의 强氏)[書以憂 何 罪亮也 亮違衆議 首生厲階 及爲元帥 兵敗身竄 憂及國母 其罪大矣 綱目自書葬靈思皇后 是後后無書葬者 至晉而後書之 晉后至是始以崩葬書 前乎此 非弑殺則陷胡塵已 終綱目 太后書以憂崩卒三(秦芈氏 晉庾氏 苻秦强氏)]” ≪書法≫
“太后 庾氏는 어찌하여 근심하다가 崩하였는가. 庾亮이 禍를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게시하여 綱에 썼으니, 유량을 죄책한 뜻이 더욱 분명하다.[太后庾氏 何以憂崩 爲庾亮召禍故也 掲而書之 其所以罪亮之意 益明矣]” ≪發明≫
역주4 温嶠以陶侃入討峻……郗鑒王舒來赴難 : “‘陶侃을 데리고 왔다.[以陶侃]’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도간을 비난한 것이다. 도간은 義를 보고도 용감하지 못하여 여러 번 전진하였다가 퇴각하였다. 그러므로 ‘以(데리고 왔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의리가 오로지 温嶠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九江王 黥布가 漢나라로 돌아오기를 결단하지 못하였는데 隨何가 능히 그를 데리고 오자 ‘隨何以(수하가 데리고 왔다)’라고 썼으며(漢王 劉邦 3년(B.C.204), 陶侃이 용감하게 국난에 달려오지 못하였는데 온교가 능히 그를 데리고 오자 ‘温嶠以(온교가 데리고 왔다.)’라고 썼으며(이해), 동쪽 荆州의 병사들이 과감하게 長安에 달려오지 못하였는데 趙剛이 능히 그들을 데리고 오자 ‘趙剛以(조강이 데리고 왔다.)’라고 썼으니(梁나라 甲寅年(534)), 모두 그를 데리고 온 자에게 공을 돌린 것이다.
◯국난에 달려오면 반드시 ‘兵’을 썼다. 그런데 이때 郗鑒이 눈물을 흘리면서 병사들과 맹세하고 王舒가 1만 명의 병력을 보냈으니, 그렇다면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데도 ‘以兵(군대를 거느리고 왔다.)’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늦었기 때문이다. 무릇 ‘來援’이라고 쓰고 ‘來救’라고 쓴 것은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이다. 치감과 왕서는 晉나라 신하인데 어찌하여 ‘來(왔다)’라고 써서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과 같이 했는가. 이는 그들을 죄책한 것이다. 蘇峻이 배반한 지 이미 반년이 되고 또 이미 황제를 石頭城으로 옮긴 뒤에야 이들이 서서히 왔으니, 이것을 일러 무엇하겠는가. 綱에 ‘來’라고 쓴 것은 늦었다는 말이다. 이번 전쟁에 ≪資治通鑑綱目≫에서 ‘赴難(국난에 달려왔다.)’라고 쓴 것이 3번이고, ‘來(왔다)’라고 쓴 것은 1번뿐이다.[書以陶侃 何 譏侃也 侃見義不勇 屢爲前郤 故書以 然則義專歸於温嶠矣 是故九江之歸漢未决 而隨何能以之 則書隨何以(漢王邦三年) 陶侃之赴難未勇 而温嶠能以之 則書温嶠以(是年) 東荆州之兵 赴長安未果 而趙剛能以之 則書趙剛以(梁甲寅年) 皆歸功以之者也 ◯赴難必書兵 於是鑒流涕誓衆 舒遣兵一萬 則有兵矣 不書以兵 何 緩也 凡書來援 書來救 外辭也 鑒, 舒晉臣也 則曷爲書來 如外辭 罪之也 峻之反 已半年 且既遷帝石頭矣 然後徐徐而來 謂之何哉 書曰來 緩辭也 是役也 綱目書赴難者三 書來者一而已]” ≪書法≫
“무릇 군대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以’라고 한다. ≪春秋≫에 ‘以’라고 쓴 경우가 있으니, 魯나라 僖公이 楚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齊나라를 공격하여 穀 지역을 점령한 따위가 이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도 ‘以’라고 쓴 것이 있으니, 樂毅가 秦, 魏, 趙, 韓의 군대를 거느리고 齊나라를 공격한 따위가 이것이다. 他國에서 병력을 빌렸을 경우에 ‘以’라고 썼으니, 자기 나라의 臣子에 대해서 마침내 ‘以’라고 쓴 적은 있지 않았다. 蘇峻이 반역을 함에, 궁궐이 폐허가 되고 乘輿(황제)가 播遷하여 종묘가 무너졌다. 陶侃은 이때 都督과 大將軍이 되어서 수중에 강대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진실로 눈물을 흘리면서 병사들과 맹세하고는 폭풍처럼 치달리고 번개처럼 달려와서 힘을 다해 역적을 토벌해서 행여 미치지 못할 듯이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겨울부터 봄에 이르기까지 조정이 전복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면서 조금도 구원할 뜻이 없다가, 반드시 온교가 두세 번 맞이하여 설득하기를 기다려서야 겨우 비로소 전진하였고, 또 얼마 안 있다가 다시 鎮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니, 그때 만일 여러 사람이 강력히 만류하지 않았다면, 도간은 반드시 번연히 서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綱에 ‘以’라고 쓴 것은 도간이 본래 국난에 달려올 마음이 없었고, 다행히 온교 등이 좌지우지함에 힘입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도간은 晉나라 조정에 대해서 공이 없지 않았으나, 다만 군신간의 큰 절개에 있어서는 미진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군자가 깊이 그를 애석히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그 〈功過의〉 輕重을 저울질한 것이 書法의 사이에 나타났으니, 비록 어진 자를 위하여 잘못을 숨기고자 하나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은미하다.[凡兵能左右之曰以 春秋書以者有之 僖公以楚師伐齊取穀之類 是也 綱目書以者亦有之 樂毅以秦魏趙韓之師伐齊之類 是也 夫借兵他國 則書曰以 未有我國之臣子乃書以者也 蘇峻反逆 宫闕爲墟 乘輿播越 宗廟不守 陶侃身爲督將 手握强兵 固當洒泣誓衆 颷馳電赴 畢力討賊 猶恐不及 夫何自冬迄春 坐視朝廷傾覆 略無救援之意 必待温嶠再三邀説 僅乃肯前 未幾 又欲還鎮 向非諸人力挽 侃必翩然西上矣 書之曰以 所以見侃本無赴難之心 幸頼嶠能左右之耳 侃在晉朝 不爲無功 獨於君臣大節 有所未盡 故君子深爲惜之 綱目權其輕重 見於書法之間 雖欲爲賢者諱 不可得也 嗚呼 微矣]” ≪發明≫
역주5 4征과……장군 : 魏晉時代 때 征東․征南․征西․征北의 장군과 鎭東․鎭南․鎭西․鎭北의 장군을 가리킨다. 혹 ‘征鎭’은 각지의 軍政長官을 가리키기도 한다.
역주6 堅壁清野 : 전쟁을 할 때, 성벽을 굳게 지키면서 적에게 도움이 될 만한 物資 등을 옮기거나 숨겨서, 적이 취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하는 책략을 이른다.
역주7 峻分兵陷宣城 内史桓彝死之 : “이 싸움에서 의리에 용감한 자는 아마도 오직 桓彝일 것이다. 그러므로 始終 모두 그를 인정하는 말을 썼다.[於是役也 勇於義者 其惟桓彝乎 故始終皆予辭]” ≪書法≫
“蘇峻의 난리에 卞壼과 桓彝가 모두 節操를 보전하고서 죽었다고 썼다. 변곤의 부자는 함께 죽었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효도가 진실로 이미 특출해서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지만, 환이로 말하면 前史에서는 다만 그 城이 함락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썼을 뿐이요, 그가 절조를 보전하고서 죽었음을 밝힌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資治通鑑綱目≫에 쓸 적에는 변곤과 차이가 없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환이가 처음 소준이 배반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의병을 일으켜서 조금도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郡의 군대가 적고 세력이 약하였으나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자치통감강목≫에서 앞서 군대를 일으켜 국난에 달려온 것을 쓸 적에 환이를 유독 여러 사람의 앞에 두어서 그 내용을 급박하게 하였고, 얼마 안 있다가 포위를 당하여 위태로웠을 적에 혹자가 그에게 소준과 사신을 통하여 위난을 늦출 것을 권하였으나 환이는 의연히 정색을 하고서 반드시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이는 그의 뜻이 徇國에 있어서 죽으려는 마음은 있고 살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니, 진실로 타인이 비할 바가 아니다. ≪자치통감강목≫에서 그의 온전한 절개를 卞侯와 똑같이 쓴 것이 당연하다. 士君子가 만일 이 이치를 밝게 안다면, 반드시 利害를 계산하여 逆順을 밝히지 않고 군대를 보유하여 자신을 호위하면서 君父의 화를 구원하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아! 슬프다.[蘇峻之亂 卞壺桓彝皆以死節書 夫以壼之父子俱死 一門忠孝 固已表表 在人耳目 若彝則前史止書其城陷見殺而已 未有能明其死節者也 至綱目書之 則與卞壼無異 何哉 彝始聞峻反 即時起義 不少遲緩 雖郡兵寡弱 亦不暇顧 是以綱目前書起兵赴難 獨在衆人之先 而其詞急 未幾受圍危亟 或勸其通和以紓難 彝則毅然正色 誓以必死 此其志在徇國 有隕無貳 固非他人之比 宜乎綱目書其全節 與卞侯等也 士君子茍明此理 則必不計利害而不明逆順 擁兵自衛而不救君父矣 噫]” ≪發明≫
역주8 陶侃温嶠……代領其衆 : “앞에서는 ‘温嶠以陶侃(온교가 도간을 데리고)’이라고 썼었는데, 여기서 〈온교보다〉 도간을 먼저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의 功을 없애지 않으려 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도간에 대해서 심정과 공적을 서로 가리지 않았으니, 옳다.[前書温嶠以陶侃 此其先侃 何 不沒其功也 綱目於陶侃 心跡不相掩 可也]” ≪書法≫
“도간이 전에 들어와 지원했을 때에 ‘以(데려오다)’라고 쓴 것은 그의 심정을 따진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 蘇峻을 참수할 적에 먼저 도간을 쓴 것은 바로 그의 공적을 서술한 것이니, 이는 輕重을 잘 헤아린 것이다.[侃前入援 書以者 原其情也 今此斬峻 先書侃者 序其績也 此輕重之權衡也]” ≪發明≫
역주9 獲趙主曜以歸 殺之 : “‘獲(포획하다)’은 천하게 여기는 말이다. 이때 劉曜가 말에서 떨어져 붙잡혔는데 어찌하여 ‘執以歸(붙잡아서 돌아갔다)’라고 쓰지 않았는가. 趙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하였는데 유요는 한창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하여 사로잡혔으니, 匹夫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그를 천하게 여겨서 ‘獲’이라고 쓴 것이다. 망한 나라의 군주에게 쓰는 말이 다섯 가지이니, ‘死之(죽었다)’가 가장 위이고, ‘執虜(사로잡혔다)’가 다음이고, ‘以歸(데리고 돌아갔다)’가 다음이고, ‘獲(포획했다)’이 다음이고, ‘降(항복했다)’이 가장 아래가 된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망한 나라의 군주에 ‘獲’이라고 쓴 것이 3번이다(趙主 劉曜와 齊主 高緯, 陳主 陳叔寶이다.).[獲 賤辭也 於是曜墜馬被執 曷爲不書執以歸 趙兵大潰 曜方以昏醉被執 則與匹夫何異哉 故賤之書獲 亡國之君其辭五 死之上也 執虜次之 以歸次之 獲次之 降爲下 終綱目 亡國之君書獲三(趙主曜 齊主緯 陳主叔寶)]” ≪書法≫
역주10 金墉 : 洛陽에 있는 小城을 말한다.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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