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5권 상
蜀漢 後主 建興 6년(228)~蜀漢 後主 建興 12년(234)
戊申年(228)
起戊申漢後主建興六年하여 盡壬申漢後主延熙十五年하니 凡二十五年이라
六年이라
魏太和二年이요 吳黃武七年이라
魏以夏侯淵子楙 都督關中注+楙, 音茂. 楙尙太祖女淸河公主.이러니 至是하여 丞相亮 將伐魏할새 與群下謀之한대
司馬魏延曰注+漢丞相, 有長史而無司馬, 是時用兵, 故置司馬. 主壻也 怯而無謀하니 今假延精兵五千하면 負糧五千하고 直從褒中出하여 循秦嶺而東하여
當子午而北이면 不過十日 可到長安注+ “長安正南山, 名秦嶺, 谷名子午. 一名樊川, 一名御宿.” 子北方, 午南方也. 言通南北道相當, 故名子午谷.이니이다 楙聞延奄至하면 必棄城走하리니 橫門邸閣 與散民之穀이면 足周食也注+橫, 音光, 長安城北面, 西頭第一門曰橫門. 邸閣, 倉之別名也. 魏置邸閣於橫門, 以積粟. 民聞兵至, 必逃散, 可收其穀以周食.
比東方合聚 尙二十許日하여 而公從斜谷來하시면 亦足以達注+比, 及也.이니 如此 則一擧而咸陽以西 可定矣니이다
以此爲危計 不如安從坦道하여 可以平取隴右 十全必克而無虞 不用延計하고
揚聲由斜谷取郿하고 使將軍趙雲, 鄧芝 爲疑軍하여 據箕谷注+箕谷, 當在陳倉之南‧漢中之北.하니 魏使曹眞督諸軍하여 軍郿以拒之하다
乃率大軍하여 攻祁山할새 戎陳整齊하고 號令明肅注+陳, 讀曰陣.이러라
魏以昭烈旣崩 數歲寂然無聞이라 是以 略無備豫러니 而卒聞亮出하고 朝野恐懼注+無備豫, 謂不豫爲之備也. 卒, 讀曰猝.
於是 天水, 南安, 安定 皆擧郡應亮하니 關中 響震注+魏分隴右, 置秦州, 天水‧南安屬焉. 漢靈帝分漢陽之䝠道, 立南安郡‧漢陽郡, 至晉, 乃改爲天水, 史追書也. 安定郡, 屬雍州.이러라
魏主叡如長安하여 右將軍張郃으로 率步騎五萬하여 拒之어늘 使參軍馬謖으로 督諸軍하여 與郃戰于街亭注+街亭, 在西縣.할새
違亮節度하고 擧措煩擾하며 舍水上山하고 不下據城注+舍, 讀曰捨. 郃傳, 謖依阻南山.이러니
絶其汲道하고하여 大破之하니 乃拔西縣千餘家하여 還漢中注+西縣, 前漢屬隴西郡, 後漢屬漢陽郡, 有嶓冢山‧西漢水.하다
以謖才術過人이라하여 深加器異러니 昭烈 臨終 謂曰 謖 言過其實하니 不可大用이라 君其察之어다
未以爲然하여 引謖參軍事하여 每與談論 自晝達夜러라
至是하여 乃收殺之하고 而自臨祭하여 爲之流涕하고 撫其遺孤하여 恩若平生하니라
蔣琬 謂亮曰 昔 楚殺得臣 而文公喜注+得臣, 姓成, 字子玉, 春秋楚令尹也. 先是, 晉‧楚戰于城濮, 楚師敗績, 晉文公有憂色. 左右曰 “有喜而憂, 何也.” 公曰 “得臣猶在, 憂未歇也.” 及楚殺得臣, 晉侯聞之, 而後喜可知也. 曰 “莫余毒也已.”하니 今天下未定이어늘 而戮智計之士 豈不惜乎잇가
流涕曰 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 用法明也注+孫子始計篇曰 “法令孰行.” 言法令行者必勝也, 故其敎吳宮美人戰也, 斬吳王寵姬二人, 以明其法. 今四海分裂하여 兵交方始하니 若復廢法이면 何用討賊邪리오
先是 禆將軍王平 連規諫謖이로되 不能用이러니 及敗衆散 惟平所領千餘人 鳴鼓自守하니 張郃 疑其有伏하여 不敢偪이라
於是 徐徐收合諸營散兵以還하니 拜平參軍하여 進位封侯하고 上疏請自貶三等이어늘 詔以右將軍으로 行丞相事하다
趙雲 亦以箕谷兵敗 坐貶이러니 問鄧芝曰 箕谷軍退 兵將 初不相失 何也
芝曰 趙雲 身自斷後하여 軍資什物 略無所棄 不但兵將不相失也注+軍居後曰斷後, 亦曰殿師. 什, 數也, 人家常用之器不一, 故以什爲數. 一說, 軍法五人爲伍, 三伍爲什, 則共器物, 故謂之什器.니이다
有軍資餘絹이어늘 使分賜將士한대 雲曰 軍事無利하니 何爲有賜리오 請須十月爲冬給하노이다 大善之注+須, 待也.러라
勸亮更發兵者어늘 亮曰 大軍 在祁山, 箕谷 皆多於賊이로되 而不破賊하고 乃爲賊所破하니 病不在兵少也 在一人耳注+謂兵之勝敗在將也.
今欲減兵省將하고 明罰思過하여 校變通之道於將來注+省, 簡也.하노니 若不能然者 雖兵多 何益이리오
自今已後 諸有忠慮於國이어든 但勤攻吾之闕이면 則事可定이요 賊可死 功可蹻足而待矣注+蹻, 擧足高也.리라
於是 考微勞하고 甄壯烈注+甄, 察也, 別也.하며 引咎責躬하여 布所失於天下하고 厲兵講武하여 以爲後圖하니 戎士簡練하고 民忘其敗矣러라
亮之出祁山也 天水參軍姜維 詣亮降이어늘 美其膽智하여 使典軍事하다
魏曹眞 復取三郡注+謂安定等三郡.하고 以亮懲祁山하여 必出陳倉이라하여 使將軍郝昭 城守以備之注+陳倉, 屬京兆右扶風.하다
夏四月 魏以徐邈爲涼州刺史하다
務農積穀하고 立學明訓하고 進善黜惡하며 與羌, 胡從事 不問小過하고 若犯大罪 先告部帥하고 乃斬以徇하니
由是 服其威信하여 州界肅淸이러라
五月 大旱하다
吳使鄱陽太守周魴으로 詐以郡降於魏하니 魏揚州牧曹休 率步騎十萬하여 向皖以應之注+魏揚州, 止得漢之九江‧廬江二郡地, 而江津要害之地, 多爲吳所據. 皖, 漢廬江邑, 三國屬吳, 爲重鎭.하고
魏主叡又使司馬懿向江陵하고 賈逵向東關하여 三道俱進注+東關, 卽濡須口, 亦謂之柵江口. 有東西關, 東關之南岸, 吳築城, 西關之北岸, 魏置柵, 後諸葛恪於東關, 作大堤, 以遏巢湖, 謂之東興堤, 卽其地也.이러라
八月 吳主權 至皖하여 以陸遜爲大都督하여 假黃鉞하여 親執鞭以見之注+鉞, 大斧也, 飾之以金, 故曰黃鉞. 大都督, 本無黃鉞, 假與之, 所以重其威. 親執鞭以見之, 猶古之王者遣將, 跪而推轂之意也.하고 以朱桓, 全琮爲左右督하여 各督三萬人하여 以擊休하다
桓曰 休以親見任이요 非智勇名將이니 今戰必敗 敗必走 走當由夾石, 挂車注+集覽, 夾, 本作硤, 今安慶府桐城北四十里南硤戍是. 挂, 與掛通. 車, 昌遮切. 桐城西四十里, 有挂車鎭, 鎭北有挂車嶺.하리니
此兩道險阨하니 若以萬兵柴路 則彼衆 可盡而休可虜注+柴路, 謂以柴塞路也. 一說, 柴, 去聲. 塞, 斷也. 請將所部以斷之하오니
若得休 則可乘勝長驅하여 進取壽春하여 以規許, 洛이니 此萬世一時也注+漢末都許, 有許昌宮, 魏時都洛.니이다
以問陸遜한대 以爲不可라하여 乃止하다
戰于石亭注+胡三省曰 “時吳王在皖口, 遣遜等, 與休戰于石亭, 則其地當在今舒州懷寧‧桐城二縣之間.”할새 令桓, 琮으로 爲左右翼하여 三道俱進하여 衝休伏兵하여 因驅走之하고 追至夾石하여 斬獲萬餘하고 資仗略盡하다
叡命賈逵引兵東하여 與休合注+按逵傳 “逵自豫州進兵, 取西陽以向東關, 休自壽春向皖.” 西陽在皖之西, 而東關又在皖之東. 今與休合, 蓋使合兵向東關也.하니 逵曰 賊無東關之備하니 必幷軍於皖注+幷, 必政切.이어늘 而休深入與戰하니 必敗라하고 乃亟進이러니
聞休已敗而吳遣兵斷夾石이라 諸將 或欲待後軍이어늘 逵曰 休兵敗路絶하여 進退不能하니 安危之機 不及終日이라
今疾進하여 出賊不意하면 此所謂先人以奪其心也注+先, 悉薦切. 左傳 “軍志曰 ‘先人有奪人之心.’” 若待後軍이면 賊已斷險하리니 兵多何益이리오하고
乃兼道進軍할새 而多設旗鼓疑兵하니 吳人 驚退 休乃得還注+驚退者, 斷夾石之軍耳.하다
逵與休不善이러니 至是하여 頼逵以免하고 魏亦不之罪也注+逵與休不善, 魏文帝黃初中, 欲假逵節. 休曰 “逵性剛, 易侮諸將, 不可爲督.” 遂止.하니라
冬十二月 右將軍亮 伐魏하여 圍陳倉이러니 不克而還할새 斬其追將王雙하다
右將軍亮 聞曹休敗하여 魏兵東下하여 關中虛弱하고 欲出兵擊魏로되 群臣 多以爲疑注+因祁山之敗, 疑魏不可伐.
言於帝曰 先帝以漢, 賊不兩立하고 王業不偏安故 託臣以討賊하시니 以先帝之明으로 量臣之才 固知臣才弱敵彊이니이다
이나 不伐賊이면 王業亦亡하리니 惟坐而待亡으론 孰與伐之리오 是故 託臣而弗疑也하시니이다
臣受命之日 寢不安席하고 食不甘味하여 思惟北征이면 宜先入南이라 五月渡瀘하여 深入不毛하니
臣非不自惜也로되 顧王業 不可偏全於蜀都 冒危難以奉先帝之遺意也어늘 而議者謂爲非計라하니이다
今賊 適疲於西하고 又務於東하니 兵法 乘勞라하니 此進趨之時也注+疲於西, 謂郿縣‧祁山之師. 務於東, 謂江陵‧東關‧石亭之師也.니이다
且高帝明竝日月하시고 謀臣淵深이나 然渉險被創하여 危然後安이어시늘
今陛下未及高帝하시고 謀臣 不如良, 平이로되 而欲以長計取勝하여 坐定天下하시니 此臣之未解一也注+解, 曉也. 一云 “解讀曰懈, 言未敢懈怠也.”니이다
劉繇, 王朗 各據州郡하여 論安言計 動引聖人이로되
群疑滿腹하고 衆難塞胸하여 今歲不戰하고 明年不征이라가 使孫策坐大하여 遂幷江東케하니 此臣之未解二也注+坐大, 言坐致大也.니이다
臣到漢中 中間朞年이로되 已喪趙雲等及曲長, 屯將七十餘人 突將, 武騎一千餘人注+曲長, 一曲之長也. 軍行有部, 部下有曲, 曲各有長. 屯將, 將屯者也. 突將‧武騎, 皆軍號也.하니
皆數十年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이면 則損三分之二하리니 當何以圖敵이리오 此臣之未解三也注+言不戰而將士耗損, 已如此也.니이다
今民窮兵疲而事不可息이니 事不可息이면 則住與行 勞費正等이어늘 而不及虛圖之하고 欲以一州之地 與賊支久하니 此臣之未解四也注+亮意欲及魏與吳連兵未解, 乘虛而圖之也. 支, 持也. 支久, 猶言持久也.니이다
夫難平者 事也 先帝兵敗於楚 曹操拊手하여 謂天下已定矣注+兵敗於楚, 謂獻帝建安十三年, 敗於當陽長阪也. 拊手, 乘快之意發見於外者也.니이다이나 先帝東連吳越하고 西取巴蜀하며 擧兵北征 夏侯授首하니 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注+夏侯授首, 事見建安二十四年. 其後 吳更違盟하여 關羽毁敗하고 秭歸蹉跌하고 曹丕稱帝하니 凡事如是하여 難可逆見注+關羽毁敗, 事見建安二十四年. 秭歸蹉跌, 事見章武二年. 逆見, 猶言豫料.이니이다 鞠躬盡力하여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하여는 非臣之明所能逆覩也니이다
十二月 引兵數萬하고 出散關하여 圍陳倉不克注+散關, 關名, 在漢故道縣.하니 使人說郝昭不下하다
昭兵 纔千餘人이라 進攻之할새 起雲梯衝車하여 臨城注+雲梯, 以木爲之, 可階而登城. 雲者, 言其升若入雲然. 杜佑曰 以大木爲牀, 下置六輪, 上立雙牙, 牙有檢, 梯節長丈二尺. 有四桄, 桄相去尺, 勢微 遞互相檢飛於雲間, 以窺城中. 有上城梯, 首冠雙轆轤, 枕城而上, 謂之飛雲梯.이러니 昭以火箭으로 逆射其梯하니 人皆燒死注+逆射, 謂迎其雲梯而射之.하고
昭又以繩連石磨하여 壓其衝車하니 衝車折注+
井闌圖井闌圖
磨, 莫臥切, 石磑也.
이리라
乃更爲井闌百尺하여 以射城中하고 以土丸塡塹하여 欲直攀城注+以木交構, 若井闌狀.이러니 昭又於內 築重墻注+重, 平聲.하고
又爲地突하여 欲踊出於城裏注+地突, 地道也.러니 昭又於城內 穿地橫截之하여 晝夜相攻拒二十餘日이러라
魏遣張郃救之호되 未至 糧盡引還이러니 將軍王雙 追亮이어늘 擊斬之하다
魏以公孫淵爲遼東太守하다
公孫康하니 子淵하여 弟恭이러니 及淵長 脅奪恭位하고 上書言狀한대
侍中劉曄曰 公孫氏世權日久 今若不誅 後必生患하리니 不如因其新立하여 有黨有仇하여
先其不意하여 以兵臨之하고 開設賞募하면 可不勞師而定也注+有黨, 故能奪恭位, 與之爲仇者, 則恭之黨也. 先, 悉薦切.리이다 魏主不從하고 因有是命하다
孫策 使範典財計注+典, 主也.러니 吳王權 年少 私從有求어든 必關白하여 不敢專許러라
及權 守陽羨長 有所私用이러니 或料覆하면 功曹周谷 輒爲傅著簿書하여 使無譴問注+陽羨縣, 前漢屬會稽郡, 後漢屬吳郡. 長, 令長也. 料, 音聊, 計也. 覆, 審校也. 爲, 去聲. 傅, 讀曰附. 著, 直略切.하니 以是 望範而悅谷注+望, 責望也, 怨望也.이러라
及後統事 以範忠誠이라하여 信任之하고 而谷能欺更簿書라하여 不用也注+更, 工衡切.하다 至是하여 以範爲大司馬러니 印綬未下而卒하다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5권 상
蜀漢 後主 建興 6년(228)~蜀漢 後主 建興 12년(234)
戊申年(228)
資治通鑑綱目≫ 제15권은 戊申年 나라(蜀漢) 後主 建興 6년(228)부터 시작해서 壬申年 나라(蜀漢) 後主 延熙 15년(252)까지이니, 모두 25년이다.
나라(蜀漢) 後主 建興 6년이다.
나라 明帝 曹叡 太和 2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黃武 7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가 新城을 함락하니, 孟達이 이때에 죽었다.
丞相 諸葛亮나라를 정벌할 적에 街亭에서 싸워 크게 패하니, 詔令을 내려 제갈량을 右將軍으로 폄출(좌천)하여 승상의 일을 행하게 하였다.
】 처음에 나라에서 夏侯淵의 아들 夏侯楙(하후무)로 關中都督하게 하였는데,注+는 음이 이니, 夏侯楙太祖(曹操)의 딸인 淸河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이때에 丞相 諸葛亮이 장차 나라를 정벌하려 할 적에 여러 부하들과 상의하자,
司馬魏延이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注+나라의 丞相長史만 있고 司馬가 없었는데, 이때 군대를 출동하여 전쟁하였으므로 司馬를 둔 것이다. “하후무는 나라 임금의 사위로, 겁이 많고 智謀가 없습니다. 이제 저에게 정예병 5천 명을 빌려주시면 5천 명분의 양식을 짊어지고 곧바로 褒中을 따라 나가서 秦嶺을 따라 동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子午谷을 만나 북쪽으로 가면 불과 10일 만에 長安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注+辛氏三秦記≫에 “長安正南에 있는 산은 이름이 秦嶺이고 골짜기는 이름이 子午谷인데, 일명 樊川이고 일명은 御宿이다.” 하였다. 는 북방이고 는 남방이니, 남쪽과 북쪽으로 통하는 길이 여기에서 만나므로 子午谷으로 이름했음을 말한 것이다. 하후무는 제가 갑자기 쳐들어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橫門(광문)의 邸閣과 흩어진 백성들의 곡식으로 충분히 군량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注+은 음이 이니, 長安城 北面의 서쪽 끝 첫 번째 문을 橫門이라 한다. “邸閣”은 창고의 별명이다. 나라는 橫門에 저각을 설치하여 곡식을 쌓아두었는데, 이 지역 백성들은 蜀漢의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도망하여 흩어질 것이니, 이 저각의 곡식을 거두어 군량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東方에서 서로 회합할 때까지는 아직도 20여 일의 여유가 있어서 斜谷에서 오시면 또한 충분히 도달할 수 있으니,注+는 미침이다. 이와 같이 하면 一擧咸陽 以西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諸葛亮魏延의 건의가 위험한 계책이라서 안전하게 평탄한 길을 따라 편안하게 隴右를 취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완전무결하여 반드시 승리하고 근심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위연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
제갈량이 斜谷을 따라 郿縣을 점령하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리고는 將軍 趙雲鄧芝로 하여금 疑軍(적을 미혹시키기 위해 虛張聲勢한 군대)을 만들어서 箕谷을 점거하게 하니,注+箕谷은 마땅히 陳倉의 남쪽, 漢中의 북쪽에 있을 것이다. 나라에서는 曹眞으로 하여금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미현에 군대를 주둔하고서 항거하게 하였다.
제갈량은 마침내 大軍을 거느리고서 祁山을 공격하였는데, 군대의 진영이 정돈되고 號令이 분명하고 엄숙하였다.注+(진영)은 으로 읽는다.
】 처음에 昭烈帝(劉備)가 하고 나서 몇 년 동안 잠잠하여 들리는 소식이 없자, 나라에서는 이 때문에 조금도 미리 대비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諸葛亮이 출병했다는 말을 듣고는 朝野에서 크게 두려워하였다.注+無備豫”는 미리 대비하지 않음을 이른다. (갑자기)은 로 읽는다.
이에 天水, 南安, 安定이 모두 을 들어 제갈량에게 응하니, 關中 지방이 진동하였다.注+나라는 隴右를 나누어 秦州를 설치하니, 天水南安이 여기에 속하였다. 靈帝漢陽䝠道를 나누어 南安郡漢陽郡을 세웠는데, 나라 때에 마침내 天水로 이름을 고치니, 여기에서 天水라고 한 것은 史官이 추후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安定郡雍州에 속하였다.
魏主 曹叡長安에 가서 右將軍 張郃에게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거느리고 諸葛亮을 막게 하니, 제갈량이 參軍 馬謖으로 하여금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장합과 街亭에서 싸우게 하였다.注+街亭西縣에 있다.
이때 마속이 제갈량의 節度(지휘)를 어기고 軍事에 대한 조처가 번거롭고 소란하였으며 물(水源池)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주둔하고 산 아래로 내려와 을 점거하지 않았다.注+(버리다)는 로 읽는다. ≪三國志≫ 〈魏書 張郃傳〉에 “馬謖南山을 의지하여 막았다.” 하였다.
장합이 물 긷는 길을 끊고 마속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제갈량은 마침내 西縣에 있는 1,000여 家戶를 공격하여 얻고서 漢中으로 돌아왔다.注+西縣前漢 때에는 隴西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漢陽郡에 속하였는데, 嶓冢山(파총산)과 西漢水가 있다.
】 처음에 諸葛亮馬謖이 재주와 지모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 하여 큰 인물로 여기고 重視하였다. 昭烈帝가 임종할 때 제갈량에게 이르기를 “마속은 말이 그 실제보다 더하니, 크게 등용해서는 안 된다. 그대는 부디 그를 잘 살펴라.” 하였다.
제갈량은 이 말이 옳지 않다고 여겨서 마속을 參軍事에 발탁하여, 매번 그와 談論을 하면 낮부터 밤중까지 이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그를 체포하여 죽였는데, 직접 에 가서 제사하고서 눈물을 흘리고 그의 어린 아들들을 어루만져, 은혜롭게 대우함이 평소와 같았다.
諸葛亮이 눈물을 흘리며 馬謖을 베다諸葛亮이 눈물을 흘리며 馬謖을 베다
蔣琬諸葛亮에게 이르기를 “옛날 나라가 得臣을 죽이자 文公이 기뻐하였습니다.注+得臣이고 子玉이니, 春秋時代 나라의 令尹(執政大臣)이다. 이보다 앞서 나라와 나라가 城濮(성복)에서 전투하여 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는데, 文公은 여전히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左右 신하들이 묻기를 “기쁜 일이 있는데 근심하심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물으니, 文公이 말하기를 “득신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근심이 그치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다가 나라에서 득신을 죽이자, 晉侯(문공)는 이 말을 듣고서야 기뻐함을 알 수 있었는데, 말하기를 “나를 해칠 사람이 없어졌다.” 하였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모가 있고 계략이 있는 선비를 죽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습니까.” 하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孫武가 천하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법을 분명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이다.注+孫子≫ 〈始計篇〉에 “法令을 누가 더 잘 행하는가.” 하였으니, 法令을 제대로 행하는 자가 반드시 승리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孫武나라 궁궐의 미인들에게 전투하는 방법을 가르칠 적에 吳王이 총애하는 여자 두 사람을 참수하여 그 군법을 밝힌 것이다. 지금 四海가 분열되어서 병기를 가지고 교전함이 막 시작되었으니, 만약 다시 법을 폐지하면 무엇으로 을 토벌하겠는가.”
】 이보다 앞서 禆將軍 王平이 연이어 馬謖에게 하였으나 마속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패전하여 병사들이 흩어졌을 적에 오직 왕평이 거느린 1,000여 명만이 북을 울려 자기 진영을 지키니, 張郃은 혹 복병이 있는가 의심해서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이 서서히 여러 진영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수습하여 돌아오니, 諸葛亮은 왕평을 參軍에 제수하여 지위를 승진시키고 하고는, 上疏하여 자신의 관직을 세 등급 폄출할 것을 청하자, 詔令을 내려 右將軍으로 丞相의 일을 행하게 하였다.
】 이때 趙雲 또한 箕谷에서 군대가 패하였으므로 이 일로 인해 좌천되었다. 諸葛亮鄧芝에게 묻기를 “箕谷에서 군대가 후퇴할 적에 병사와 장수가 시종 질서정연했던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등지가 대답하기를 “조운이 몸소 직접 후미가 되어 적의 추격을 막으니, 군수물자와 일용품이 조금도 버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병사와 장수가 질서정연했을 뿐만이 아닙니다.”注+군대가 뒤에 있는 것을 “斷後”라 하고, 또한 “殿師”라 한다. 이니, 사람의 집에 항상 사용하는 그릇은 한 가지가 아니므로 라 하였다. 일설에 “軍法은 5라 하고 3이라 하니, 여기에는 기물을 함께 겸하였으므로 什器라 한다.” 하였다. 하였다.
조운에게 군수물자와 비단이 남아 있었는데, 제갈량이 조운으로 하여금 장병들에게 이것을 나누어 주게 하자, 조운이 말하기를 “군대가 승리하지 못했는데, 어찌 상을 내리십니까. 청컨대 10월이 되기를 기다려 겨울에 지급하십시오.” 하니, 제갈량이 매우 훌륭하게 여겼다.注+는 기다림이다.
】 혹자가 諸葛亮에게 다시 군대를 징발할 것을 권하자, 제갈량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大軍祁山箕谷에 있을 적에 모두 보다 병력이 많았으나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격파당하였으니, 이는 병통이 병력의 적음에 있지 않고 장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注+〈“在一人”은〉 군대의 승패가 將帥 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지금 나는 병력을 감축하고 장수의 숫자를 줄이며 형벌을 분명히 밝히고 지난번의 잘못을 반성하여, 變通하는 방도를 장래에 밝히고자 하니,注+은 간략함(줄임)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비록 병력이 많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지금 이후로 그대들 중에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다만 나의 잘못을 부지런히 질책하라. 그렇게 하면 일이 안정될 수 있고 을 죽일 수 있고, 발꿈치를 높이 들고 서서 큰 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注+는 발꿈치를 높이 듦이다.
이에 제갈량은 작은 공로를 고찰하고 壯烈한 사람을 선별하여 등용하며注+는 살핌이요, 분별함이다. 허물을 끌어다가 자신을 질책해서 잘못한 바를 경내에 公布하였으며, 병기를 갈고 닦고 무예를 講習하여 후일을 도모하니, 병사들은 숙련되고 백성들은 패전의 시름을 잊었다.
諸葛亮祁山으로 출동했을 적에 天水參軍姜維가 제갈량에게 와서 항복하였는데, 제갈량은 그의 담력과 지략을 아름답게 여겨서 그로 하여금 군대의 일을 맡게 하였다.
姜維姜維
나라의 曹眞이 다시 세 을 점령하고注+〈“三郡”은 天水, 南安,〉 安定 등 세 을 이른다. 諸葛亮祁山으로 출동했다가 실패한 것을 경계로 삼아 〈蜀漢의 군대가〉 반드시 陳倉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장군 郝昭(학소)로 하여금 을 지키면서 대비하게 하였다.注+陳倉京兆 右扶風에 속하였다.
】 여름 4월에 나라가 徐邈涼州刺史로 삼았다.
徐邈은 농사에 힘써 곡식을 저축하고 학교를 세워 가르침을 밝히고 선한 사람을 등용하고 악한 사람을 내치며, 羌族胡族과 상대할 적에 작은 잘못을 따지지 않고 만약 큰 죄를 범하였으면 먼저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고하고서 참수하여 조리돌리니,
이 때문에 그의 위엄과 신의에 복종하여 의 경계가 엄숙하고 깨끗하였다.
】 5월에 크게 가물었다.
나라 사람이 나라 揚州牧 曹休를 유인하여 石亭에서 싸워 대패시켰다.
나라에서 鄱陽(파양)太守 周魴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파양군을 가지고 나라에 항복하게 하니, 나라 揚州牧 曹休가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皖邑(환읍)으로 가서 대응하게 하였고,注+나라 揚州는 다만 나라의 九江廬江을 차지하였고, 江津要害處는 대부분 나라에서 점령하였다. 皖邑나라 廬江이니, 三國時代에는 나라에 속하여 중요한 이 되었다.
魏主 曹叡는 또 司馬懿로 하여금 江陵으로 향하고 賈逵로 하여금 東關으로 향하여 세 길로 함께 진격하게 하였다.注+東關은 바로 濡須口이니, 또한 柵江口라고도 하였다. 東關西關이 있으니, 東關南岸나라가 을 쌓았고, 西關北岸나라가 城柵(木柵)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諸葛恪이 동관에 큰 제방을 만들어 巢湖를 막고 이것을 東興堤라 하였으니, 바로 이 지역이다.
】 8월에 吳主 孫權皖邑에 이르러 陸遜大都督으로 삼아 黃鉞을 빌려주고 직접 채찍을 잡고서 육손을 만나보고注+은 큰 도끼이니 황금으로 장식하였으므로 黃鉞이라 한 것이다. 大都督은 본래 黃鉞이 없는데 임시로 빌려준 것은 그의 위엄을 중하게 한 것이다. “親執鞭以見之”는 옛날 과 같은 것이다. 朱桓全琮左督右督으로 삼아서 각각 3만 명의 병력을 감독하여 曹休를 공격하게 하였다.
朱桓이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曹休魏主의 친척으로 임용된 것이지, 지혜가 있고 용맹한 名將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싸우면 반드시 패할 것이요, 패하면 반드시 달아날 것입니다. 달아나면 마땅히 夾石挂車嶺(괘차령)을 경유할 것입니다.注+資治通鑑綱目集覽≫에 은 본래 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安慶府 桐城의 북쪽 40리 지점에 있는 南硤戍가 이곳이다. 하고 昌遮이니, 桐城의 서쪽 40리 지점에 挂車鎭이 있고 의 북쪽에 挂車嶺이 있다.
이 두 길은 매우 험하니, 마땅히 만 명의 병력으로 섶나무를 쌓아놓아 길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들의 병력을 다 죽일 수 있고 조휴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注+柴路”는 섶나무로 길을 막음을 이른다. 일설에 (울타리)는 去聲이라 한다. 은 끊음이다. 은 청컨대 부하들을 거느리고 가서 길을 끊겠습니다.
만약 조휴를 잡으면 승승장구하여 나아가 壽春을 점령해서 許昌洛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니, 이는 萬代에 한 번 있는 기회입니다.”注+나라 말기에 許昌에 도읍하여 許昌宮이 있었는데, 나라 때에는 洛陽에 도읍하였다.
孫權이 이것을 陸遜에게 물었는데 육손이 “불가하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
石亭에서 싸울 적에注+胡三省이 말하였다. “이때 吳王皖口에 있고 陸遜 등을 보내어 曹休石亭에서 싸웠으니, 그렇다면 그 지역은 마땅히 지금 舒州懷寧桐城의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陸遜朱桓全琮左翼右翼으로 삼고서 세 길로 함께 전진하여 曹休伏兵을 충돌하고 인하여 뒤쫓아 敗走시키고는 夾石까지 추격하여 적병 만여 명을 참수하거나 생포하고 魏軍의 물자와 兵器를 거의 다 빼앗았다.
】 처음에 曹叡賈逵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曹休와 군대를 연합하게 하니,注+살펴보건대 ≪三國志≫ 〈賈逵傳〉에 “賈逵豫州에서 진군하여 西陽을 점령하고 東關으로 향하였으며, 曹休壽春에서 皖邑으로 향하였다.” 하였으니, 서양은 환읍의 서쪽에 있고 동관은 또 환읍의 동쪽에 있는 것이다. 지금 조휴와 군대를 연합하게 했다는 것은 가규로 하여금 병력을 합하여 동관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가규가 말하기를 “東關(濡須口)의 대비가 없으니 반드시 병력을 皖邑(환읍)으로 집중할 것이다.注+(합하다)은 必政이다. 그런데 조휴가 깊이 쳐들어가 나라와 싸우니,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급히 진군하였는데,
조휴가 이미 패하고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어 夾石을 차단했다는 말을 들었다. 장수들 중에 혹 後軍을 기다리고자 하는 자가 있으니, 가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휴는 군대가 패하여 길이 끊겨서 전진할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으니, 安危의 기틀(관건)이 채 하루도 못 된다.
이제 빨리 전진하여 이 예상하지 않았을 때에 출동한다면 이것은 이른바 ‘남(적)보다 먼저 출동하여 적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것이다.注+(먼저하다)은 悉薦이다. ≪春秋左氏傳文公 7년에 “軍志(옛 군사 서적)에 이르기를 ‘적보다 먼저 출동하면 적의 마음을 빼앗는다.’ 했다.” 하였다. 만약 후군을 기다리면 적이 이미 험한 곳을 차단할 것이니 병력이 많은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가규는 마침내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진군해서 깃발을 꽂아놓고 북을 울려 疑軍을 많이 설치하니, 나라 사람들이 놀라 후퇴하였다. 이에 조휴가 비로소 돌아왔다.注+驚退”는 夾石의 군대를 차단한 것이다.
처음에 가규와 조휴는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이때 조휴는 가규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고 나라 또한 조휴를 처벌하지 않았다.注+賈逵曹休는 사이가 좋지 못했으니, 나라 文帝黃初 연간에 가규에게 을 빌려주려 하자, 조휴가 말하기를 “가규는 성질이 강하여 장수들을 하찮게 여기고 업신여기니, 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 겨울 12월에 右將軍 諸葛亮나라를 정벌하여 陳倉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돌아올 적에 추격하는 나라 장수 王雙을 참수하였다.
右將軍 諸葛亮曹休가 패전하여 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가서 關中(長安)이 허약해졌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출동하여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나라를 정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注+〈“欲出兵擊魏 群臣多以爲疑”는〉 祁山의 패전으로 인하여 나라를 정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諸葛亮이 다시 出師表를 올리다諸葛亮이 다시 出師表를 올리다
제갈량은 황제(劉禪)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先帝께서는 나라와 (나라)은 양립할 수 없고 王業은 한쪽 구석인 蜀都에서 편안할 수 없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에게 적을 토벌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으신 지혜로 의 재주를 헤아려보심에 진실로 의 재주가 약하고 적이 강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적을 정벌하지 않으면 王業이 또한 망할 것이니,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적을 정벌하는 것이 낫기 때문에 에게 부탁하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은 명을 받은 날부터 잠자리에 누워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고 밥을 먹어도 밥맛이 달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기에 북쪽을 정벌하려면 마땅히 먼저 南中을 쳐들어가서 평정해야 했기에 5월에 瀘水(노수)를 건너 깊이 불모지에 쳐들어갔습니다.
이 제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나, 다만 왕업을 한쪽 구석인 촉도에서 편안히 할 수 없기 때문에 危難을 무릅쓰고 선제의 遺意를 받든 것인데, 의논하는 자들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합니다.
】 지금 적은 마침 서쪽에서 피폐하고 또 동쪽에서 일(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병법에 ‘적의 피로한 틈을 타라.’ 하였으니, 지금이야말로 진격할 시기입니다.注+疲於西”는 郿縣祁山의 군대(전쟁)를 이르고, “務於東”은 江陵東關石亭의 군대를 이른다.
高帝는 밝음이 日月과 같으셨고 謀臣들은 지혜가 못과 같이 깊었으나, 위험을 겪고 상처를 입어 위태로운 뒤에야 편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밝음은 고제에 미치지 못하시고 謀臣들의 지혜는 張良陳平만 못한데도, 장구한 계책으로 승리를 취하여 앉아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시니, 이것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첫 번째입니다.注+는 이해함이다. 일설에 “로 읽으니, 감히 懈怠하지 않는 것이다.”라 한다.
劉繇王朗은 각각 州郡을 점거하고는 〈하루 속히 孫策을 정벌하지 않고,〉 安危를 논하고 계책을 말함에 걸핏하면 聖人의 일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심이 뱃속에 가득하고 온갖 곤란하게 여기는 것들이 가슴속에 꽉 차서 올해도 싸우지 않고 내년에도 정벌하지 않다가 손책으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서 강대함을 이루어 마침내 江東 지방을 겸병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입니다.注+坐大”는 가만히 앉아서 강대해짐을 말한 것이다.
로 그간 1주년이 되었는데, 趙雲 등과 曲長, 屯將 70여 명과 突將, 武騎 1천여 명을 상실하였습니다.注+曲長”은 한 (부대)의 우두머리이다. 군대의 행렬에는 가 있고, 아래에는 이 있고, 에는 각각 이 있다. “屯將”은 將帥로서 주둔병을 거느리는 자이다. “突將”과 “武騎”는 모두 군대의 칭호이다.
이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사방에서 규합한 정예로운 자들이요 益州 한 고을의 소유가 아닙니다.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나면 3분의 2를 잃게 될 것이니, 마땅히 무엇으로써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입니다.注+〈“損三分之二”는〉 싸우지 않고도 장병이 소모되고 줄어듦이 이미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 지금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사들은 지쳐 있으나 나라를 정벌하는 일을 중지할 수가 없으니, 이 일이 중지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군대를 주둔하고 있는 것과 군대를 출동하여 진격하는 것은 노력과 비용이 서로 맞먹습니다. 그런데도 關中이 빈틈을 타서 적을 도모하지 않고 한 의 땅을 가지고 적과 지구전을 벌이고자 하니, 이것이 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입니다.注+〈“不及虛圖之……欲與持久”는〉 諸葛亮의 생각에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계속하여 해결되지 않을 때에 미쳐서 관중이 빈틈을 타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는 버팀이니, “支久(지구전을 벌이다)”는 持久라는 말과 같다.
】 미리 평정(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일입니다. 옛날에 先帝께서 (荊州) 지방에서 패전하시니, 曹操는 손뼉을 치면서 천하를 이미 평정했다고 생각했습니다.注+兵敗於楚”는 獻帝 建安 13년(208) 當陽 長阪에서 先帝(劉備)가 패한 일을 이른다. “拊手”는 상쾌한 뜻이 외면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선제께서는 동쪽으로 吳越(孫權)과 연합하고 서쪽으로 巴蜀을 점령하였으며, 군대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정벌함에 夏侯淵이 목을 바쳤으니, 이는 曹操의 실책이요 우리 나라의 일이 장차 이루어질 계기였습니다.注+夏侯淵이 머리를 바친 일은 建安 24년(219)에 보인다. 그러나 뒤에 나라가 맹약을 위반하여 關羽가 패하여 죽고 秭歸縣(자귀현)에서 차질이 생겼으며 曹丕皇帝를 칭하였으니, 모든 일이 이와 같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注+關羽가 패한 일은 建安 24년에 보인다. 逆見”은 미리 헤아린다는 말과 같다. 은 몸을 굽히고 수고로움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성공과 실패, 유리함과 불리함에 대하여는 의 지혜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 12월에 諸葛亮이 수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散關으로 진출하여 陳倉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注+散關”은 의 이름이니, 나라의 故道縣에 있다. 사람을 시켜서 郝昭를 설득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였다.
학소의 군대가 겨우 천여 명이었다. 제갈량이 나아가 공격할 적에 雲梯衝車를 설치하여 에 가까이 다가갔는데,注+雲梯는 나무로 만드니, 사다리를 타고서 을 오를 수 있는 것인바, 은 그 높이 올라감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杜佑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나무로 牀板을 만들고 아래에 여섯 개의 바퀴를 설치하고 위에는 두 개의 를 세우며 에는 (나무로 만든 기구로 쉽게 풀리지 않게 하는 것임)이 있으며 사다리의 마디(간격)는 1 2이다. 네 개의 틀이 있는데, 틀의 거리는 3이며 형세가 약간 굽어서 서로 구름 사이로 날아 적진의 성안을 엿본다. 성에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는데 머리에 두 개의 轆轤(도르래)로 사다리를 성에 가까이 대어 타고 올라가니, 이것을 飛雲梯라 한다.”
학소가 火箭으로 맞서서 운제를 향해 쏘니 운제 위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불타 죽었다.注+逆射”는 雲梯를 맞이하여 활을 쏨을 이른다.
衝車圖衝車圖
학소가 또 끈으로 맷돌을 연결하여 충차를 누르니, 충차가 부서졌다.注+莫臥이니, 맷돌이다.
諸葛亮은 마침내 다시 100쯤 되는 井闌(자 모양의 攻城 기구)을 만들어서 성안에 화살을 쏘고 흙을 둥글게 뭉쳐 塹壕를 메워서 곧바로 성에 올라가고자 하였는데,注+〈“井闌”은〉 나무를 서로 얽어서 우물의 난간 모양처럼 만든 것이다. 郝昭가 또다시 안에 이중 담장을 구축하였다.注+(거듭)은 平聲이다.
제갈량이 또 地突(지하도)을 만들어서 성안으로 뛰쳐 올라가려고 하였는데,注+地突”은 지하도이다. 학소가 또다시 성안에 땅을 파 가로로 차단하였다. 兩軍이 서로 밤낮으로 공격하고 항거한 지 20여 일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張郃을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으나, 장합이 도착하기 전에 제갈량이 식량이 다하여 병력을 인솔하고 돌아왔다. 將軍 王雙이 제갈량을 추격하자 제갈량이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나라가 公孫淵遼東太守로 삼았다.
】 처음에 公孫康하니, 아들 公孫淵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아우 公孫恭이 뒤를 이었다. 공손연이 장성하자, 공손공을 위협하여 태수의 지위를 빼앗고 조정에 글을 올려 이러한 내용을 말하였다.
侍中 劉曄(유엽)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公孫氏는 대대로 권력을 잡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주벌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후환이 생길 것이니, 그가 막 서서 태수가 되어 그를 지지하는 徒黨이 있고 원수가 있는 틈을 타
그들이 예상하지 않을 때에 먼저 출동해서 군대를 거느리고 가까이 다가가고 현상금을 내걸어 공손연을 사로잡을 사람을 모집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군대를 수고롭게 출동하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注+公孫淵을 지지하는〉 도당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公孫恭의 지위를 빼앗았으니, 그와 원수가 된 자는 공손공의 무리이다. (먼저하다)은 悉薦이다. 魏主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인하여 공손연을 요동태수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나라 大司馬 呂範하였다.
】 처음에 孫策呂範으로 하여금 재정과 회계를 맡게 하였는데,注+은 주관함(맡음)이다. 이때 吳王 孫權이 나이가 어려서 사사로이 요구하는 일이 있으면 여범은 반드시 손책에게 아뢰어 감히 자기 마음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손권이 陽羨縣長을 대리하여 사사로이 재물을 쓰는 경우가 있었는데, 손책이 간혹 헤아리고 자세히 살피면 功曹周谷이 손권을 위해 번번이 문서를 덧붙여 만들어서 견책이 없게 하였다.注+陽羨縣前漢 때에는 會稽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吳郡에 속하였다. 令長(현령)이다. 는 음이 이니 계산함이요, 은 자세히 비교하는 것이다. (위하다)는 去聲이다. (붙이다)는 로 읽는다. (붙이다)은 直略이다. 손권이 이 때문에 여범을 원망하고 주곡을 좋아하였다.注+責望이요, 怨望함이다.
뒤에 손권이 政事를 통솔하게 되자, 손권은 여범이 충성스럽다 하여 그를 신임하고, 주곡은 主君을 속이고 문서를 변경했다 하여 등용하지 않았다.注+(변경함)은 工衡이다. 이때에 이르러 여범을 大司馬로 삼았는데 印綬를 내리기 전에 여범이 하였다.


역주
역주1 魏陷新城 孟達死之 : “孟達이 일찍이 ‘魏나라에 항복했다.’라고 썼었는데 이윽고 ‘蜀漢으로 歸附하였다.’라고 쓴 것은 바름으로 돌아옴을 찬미한 것이요, 이때 특별히 ‘죽었다[死之]’라고 쓴 것은 그가 義理로 옮겨온 것을 勸勉함이 깊은 것이다.[孟達嘗書降魏矣 旣而書來歸 美反正也 於是特書死之 其爲徙義之勸 深矣]” ≪書法≫ 朱子의 ≪資治通鑑綱目≫ 〈凡例〉에 將師가 死節하거나 逆賊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죽을 경우 ‘死之’라고 한다 하였다.
“孟達이 예전에는 배반하여 魏나라에 항복하였다가 이윽고 또다시 蜀漢으로 귀부하였으니, 이는 미혹되었다가 능히 돌아온 자이다. 城이 함락되어 죽자 마침내 忠節에 죽은 것으로 인정하였다. 오직 漢나라(蜀漢)는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가 있고, 魏나라는 帝位를 찬탈하고 황제를 시해한 나라가 된다. 이 때문에 따르고 어기는 사이에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다.[孟達前叛降魏 旣而又復來歸 是迷而能反者也 城陷而殞 遂以死節予之 惟漢有討賊之義 魏爲簒弑之國 是以從違之間 書法如此]” ≪發明≫
역주2 丞相亮……行丞相事 : “‘伐魏’라고 쓴 것은 漢나라를 높인 것이다. 街亭의 패전은 馬謖이 잘못한 것인데 ‘敗績했다.’라고 쓰고, 다시 ‘諸葛亮을 폄출했다.’라고 써서 어진 자를 위하여 잘못을 숨겨주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제갈량이 스스로 폄출하였기 때문이다. ‘詔貶(詔令을 내려 폄출했다.)’이라고 쓴 것은 바로 공평하고 분명한 다스림을 밝힌 것이니, 어찌 숨길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로부터 다만 ‘右將軍 諸葛亮’이라고 쓴 것이다.[書伐魏 尊漢也 街亭之敗 馬謖爲之 書敗績矣 復書貶亮 其不爲賢者諱 何 亮自貶也 書曰詔貶 適所以昭平明之治 何諱焉 故自是止書右將軍亮]” ≪書法≫
“街亭의 패전에 命을 어긴 자는 馬謖인데 ‘丞相 諸葛亮’이라고 쓴 것은 권한이 主將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이요, 벼슬을 세 등급을 폄출할 것을 자청한 자는 孔明인데 ‘詔貶亮(詔令을 내려 諸葛亮을 폄출했다.)’이라고 쓴 것은 命이 上(황제)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공명은 몸소 역적을 토벌하는 책임을 맡아서 어린 君主를 섬기면서 두 마음이 없었다. 이 때문에 쓴 것이 이와 같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또한 어찌 孔明에게 사사로이 했겠는가.[街亭之敗 違命者馬謖耳 而以丞相亮書之者 權歸主將也 貶官三等 自請者孔明耳 而以詔貶亮書之者 命出于上也 惟孔明身任討伐之責 事幼主而無貳心 是以所書如此 綱目亦豈私於孔明者哉]” ≪發明≫
역주3 辛氏三秦記 : 漢나라 隴西의 大姓인 辛氏가 저술한 三秦의 地理, 沿革, 民政, 都邑, 宮室, 山川을 기록한 책으로, 1권이 전한다. 辛氏는 이름이 미상이며, 三秦은 項羽가 秦나라를 멸망시키고 雍, 塞, 翟의 3국으로 나누고 이를 三秦이라 하였다.
역주4 誘魏揚州牧曹休……大敗之 : “漢나라 〈武帝 시기에〉 ‘간첩을 보내어 匈奴를 유인했다.’라고 쓴 것은 유인한 자를 罪責한 것인데, 여기에서 ‘유인하여 싸웠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패한 자를 죄책한 것이다. 두 군대가 서로 향하여 싸울 적에 적에게 유인당하여 크게 패함에 이르렀으면 지혜가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유인하여 싸웠다.’라고 쓴 것이 4번인데 ‘敗滅’이라고 쓴 것이 3번이니, 모두 패한 자를 죄책한 것이다.[漢書遣間誘匈奴 罪誘之者也 此書誘戰 何 罪敗者也 兩軍相向 而爲所誘 以至敗績 不可以言智矣 綱目書誘戰四 而書敗滅者三 皆罪敗者也]” ≪書法≫ “遣間誘匈奴”는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4권 중 漢 武帝 建元 2년(B.C.133) 綱에 있는 말로, 漢나라 장군 王恢가 馬邑의 聶壹을 간첩으로 써서 匈奴의 單于를 유인하여 공격하였는데, 이것이 실패하여 이후로 漢나라와 匈奴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역주5 王者가……뜻 : 제왕이 장군을 임명하여 보낼 적에 베푸는 융숭한 예의를 이른다. ≪史記≫ 〈馮唐列傳〉에 馮唐이 文帝에게 아뢰기를 “臣이 들으니, 上古時代에 왕자가 장수를 보낼 적에 무릎을 꿇고 수레바퀴를 밀면서 말하기를 ‘도성문 안은 寡人이 통제하고 밖은 장군이 통제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보이며,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3권 하 漢 文帝 14년(B.C.166) 조에도 보인다.
역주6 (疆)[彊] : 저본에는 ‘疆’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彊’으로 바로잡았다. 다만 ≪資治通鑑≫ 註에는 ‘強’으로 되어 있는바, ‘強’과 ‘彊’은 서로 통용된다.
역주7 臣이……이후 : ≪資治通鑑≫에는 이 위에 ‘臣이 이해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더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曹操는 지모와 계략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 그 用兵하는 것이 孫武‧吳起와 방불하였습니다. 그러나 南陽에서 곤궁을 당하고 烏巢에서 위험을 겪고 祁連에서 위태롭고 黎陽에서 핍박을 당하고 伯山에서 패할 뻔하고 潼關에서 죽을 뻔한 뒤에야 임시로 한때나마 평정할 수 있었는데, 하물며 臣은 재주도 약하면서 위태롭지 않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이것은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입니다.
조조는 다섯 번 昌霸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네 번 巢湖를 넘어갔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李服을 임용하였는데 이복이 〈조조를 칠 것을〉 도모하였고 夏侯淵을 위임하였는데 하후연이 패망하였으니, 선제께서는 매번 조조를 ‘능하다’고 칭찬하셨는데도, 오히려 이러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재주가 노둔하고 낮은 臣이 어찌 필승을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네 번째입니다.[曹操智計殊絶於人 其用兵也 髣髴孫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偪於黎陽 幾敗伯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耳 況臣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 此臣之未解三也 曹操五攻昌霸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而李服圖之 委夏侯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臣之未解四也]”
그리하여 ‘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모두 여섯 가지이다.
그리고 첫 번째 글에 대한 胡三省의 註에 “‘南陽에서 곤궁을 당하였다.’는 것은 穰 땅을 공격하여 張繡에게 패한 일을 이르고, ‘烏巢에서 위험을 겪었다.’는 것은 袁紹의 장수 淳于瓊을 공격할 때를 이른다. ‘黎陽에서 핍박을 당하였다.’는 것은 袁譚의 형제를 공격할 때를 이르고, ‘伯山에서 패할 뻔하였다.’는 것은 白狼山에서 烏桓과 싸울 때를 이르고, ‘潼關에서 죽을 뻔했다.’는 것은 馬超와 싸울 때를 이른다. ‘祁連에서 위태로웠다.’는 것은 마땅히 상고해보아야 하는데, 혹자는 ‘袁尙을 祁山에서 포위했을 때를 이른 것이다.’ 하였다.[困於南陽 謂攻穰爲張繡所敗也 險於烏巢 謂攻袁紹將淳于瓊時也 偪於黎陽 謂攻袁譚兄弟時也 幾敗伯山 謂與烏桓戰于白狼山時也 殆死潼關 謂與馬超戰時也 危於祁連 當考 或曰圍袁尙於祁山時也]”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글에 대한 주에는 “昌霸는 昌俙이니, 曹操가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다가 뒤에 于禁에게 명하여 공격해서 참수하게 하였다. ‘네 번 巢湖를 넘어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孫權을 공격함을 이른다. 李服은 아마도 王服인 듯하니, 董承과 함께 조조를 죽이려고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夏侯는 夏侯淵이니, 漢中을 지키다가 先主(劉備)에게 패한 것을 이른다.[昌霸 昌俙也 操累攻不下 後命于禁擊斬之 四越巢湖不成 謂攻孫權也 李服 蓋王服也 與董承謀殺操被誅 夏侯 謂夏侯淵 守漢中 爲先主所敗也]” 하였다.
역주8 秭歸縣에서……보인다 : 劉備가 關羽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吳나라를 공격하였으나, 吳나라 陸遜에게 秭歸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를 秭歸大戰, 猇亭大戰, 夷陵大戰이라 한다.
역주9 (四)[三] : 저본에는 ‘四’로 되어 있으나, ≪通典≫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回)[曲] : 저본에는 ‘回’로 되어 있으나, ≪通典≫에 의거하여 ‘曲’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吳大司馬呂範卒 : “이때 大司馬의 印綬를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大司馬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어진 사람을 인정한 것이다. 진실로 어질면 呂範이 비록 印綬를 내리기 전에 卒하였더라도 大司馬라고 쓰고, 蔡興宗이 비록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卒하였더라도 中書監이라고 썼으니, 이는 모두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쓴 것이다.[於是印綬未下 書大司馬 何 予賢也 苟賢也 呂範雖印綬未下而卒 書大司馬 蔡興宗雖未拜而卒 書中書監 皆綱目之特筆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