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懸瓠軍主白早生이 殺豫州刺史司馬悅하고 求援於梁司州刺史馬仙琕하니
時
에 梁安成王秀爲都督
注+① 秀以荊州刺史督諸州, 司州其所統也.이라 參佐咸謂宜待臺報
注+② 謂宜奏上天臺而待報. 江左率謂朝廷爲臺, 亦謂之天臺.라한대
秀曰 彼待我以自存
하니 援之宜速
이라 待敇雖舊
나 非所以應急也
注+③ 彼, 謂白早生. 舊, 謂舊制.라하고
即遣兵赴之할새 仙琕遣副將齊苟兒하여 助守懸瓠하다
魏主以邢巒으로 行豫州事하여 將兵擊早生한대 巒曰 早生非有深謀大智요 正以司馬悅暴虐이라 乘衆怒而作亂하니 民迫於凶威하여 不得已而從之어니와
縱使梁兵入城이라도 水路不通하여 糧運不繼니 亦成禽耳요
早生得梁之援하여 必守而不走리니 若臨以王師면 士民必翻然歸順하리니 不出今年에 當傳首京師矣리이다하다
目
【目】 高皇后가 황후에 오르고 나자 高肇는 더욱 귀하고 무거운 지위에 올라 권력을 장악하여 이전 조정의 옛 제도를 많이 바꾸어 官爵을 줄이고 功臣들을 쫓아내니,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여러 신하들과 宗室은 모두 몸을 낮추어 그의 밑에 있었으나, 度支尙書 元匡만은 고조와 맞섰는데, 먼저 棺을 만들어서 관청에 두었다가 관을 수레에 싣고 궁궐로 가서 고조의 罪狀을 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간언하려고 하였다.
고조가 원광을 미워하던 차에 마침 원광이 劉芳과 도량형에 관한 일을 의논하다가
注+① 〈“議權量”은〉 도량형에 관한 일을 논의하여 정하는 것이다. 고조가 유방의 주장에 동의하자, 원광이 表文을 올려 고조가
고 하였다.
注+② 〈“肇指鹿爲馬”는〉 高肇를 趙高에 비유한 것이다.
有司가 원광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니, 조서를 내려 그를 貶職시켰다.
目
【目】 魏主(元恪)가 京兆王 元愉를 위하여 于皇后의 누이동생을 들여 妃로 삼게 하였는데, 원유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妾인 李氏를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우황후가 이씨를 궁궐로 불러들여 매질하였고, 魏主가 다시 원유가 교만방자하고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곤장 50대를 치고는 冀州刺史로 내보냈다.
高肇가 또 자주 원유를 참소하니, 원유가 분노를 견디지 못하여 거짓으로 “고조가 弑逆을 저질렀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 李氏를 황후로 삼았다.
北魏가 尙書 李平을 都督으로 삼아 원유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注+① 李平은 李崇의 사촌동생이다. 이평의 군사가 經縣에 도착하니 밤에 蠻族의 군사 수천 명이 이평의 군영을 습격하였고 화살이 이평의 軍幕으로 날아들었는데, 이평이 누워서 꿈쩍도 하지 않으니 얼마 뒤에 저절로 안정되었다.
注+② 經縣은 漢나라와 晉나라 때에는 安平國에 소속되었는데,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經縣은〉 鉅鹿郡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蠻族의 군사는 역시 李平이 통솔하고 있었는데, 안에서 변란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이평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로 안정된 것이다.
目
【目】 北魏에서 高后가 황후 자리에 오를 때에 元勰이 굳게 간언하였으나 魏主(元恪)가 듣지 않았는데, 高祖가 원망을 품어 魏主에게 자주 원협을 참소하였다.
京兆王 元愉가 반란을 일으키자 드디어 高肇가 원협이 북으로는 원유와 내통하고 남으로는 蠻族의 도적들을 불러들였다고 무고하니,
注+① 伊闕 남쪽으로 淮水, 汝水, 江水, 沔水와 근접한 지역에는 모두 蠻左(蠻夷)가 있다. 魏主는 이를 믿고 궁중에서 열리는 연회에 원협을 불러들였다.
밤이 되자 모두 술에 취하여 각자 다른 장소로 가서 휴식을 취하였다.
注+② 각자 편안한 곳으로 가서 酒毒을 풀고 기운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左衛 元珍을 시켜 무사들을 이끌고 毒酒를 가지고 가서 원협에게 마시도록 하였는데,
원협이 말하기를 “나는 죄가 없으니 至尊을 한 번 뵙게 해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오.”라고 하니, 원진이 말하기를 “지존을 어찌 다시 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사가 칼 고리로 그를 치자,
注+③ 築은 공격한다는 뜻이다. 원협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원통하구나 하늘이여, 충성을 다했건만 죽임을 당하는구나.”라고 하고 마침내 독주를 마시자, 무사들이 즉시 그를 죽였다.
새벽 무렵에 그의 시신을 집으로 돌려보내고는 “왕이 술에 취하여 薨하였다.”라고 하였다. 諡號를 ‘武宣’이라 하였다.
조정에 있는 높고 낮은 지위의 관원들이 모두 氣가 꺾였고, 길가의 남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高令公이 무고하게 현명한 왕을 죽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안팎에서 고조를 더욱 미워하였다.
注+④ 高肇가 尚書令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令公’이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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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高肇의 아들 高植이 濟州刺史가 되어 공을 세워 봉작을 받아야 했는데,
注+① 〈“有功當封”은〉 ≪資治通鑑≫에 “擊愉有功(元愉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으로 되어 있다. 고식이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무거운 은혜를 입었으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注+② “致效”는 몸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어찌 감히 상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注+② “致效”는 몸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조와 中尉 王顯은 평소에 이평을 싫어하였다.
왕현은 이평이 冀州에 있을 때에 관아의 노비로 편입시킬 반역 도당의 남녀를 몰래 갈라서 〈자기가 소유하였다고〉 탄핵하였는데, 고조가 이평을 除名시켜야 한다고 아뢰었다.
注+③ 截은 끊는다는 뜻이다. “官口”는 반역도당의 남녀가 모두 沒入되어 관청의 노비가 된 자를 말한다. “除名”은 門籍에 이름이 오르지 못하여 궐문을 출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전에 顯祖(拓跋弘)의 치세에 柔然 1만여 戶가 항복을 하자, 北魏가 이들을 高平鎭과 薄骨律鎭 두 鎭에 두었는데,
注+④ 北魏 世祖(拓跋燾) 太延 2년(436)에 高平鎭을 설치하였고, 그 후 肅宗(元詡) 正光 5년(524)에 다시 原州를 설치하였다. 또 태연 2년에 薄骨律鎭을 설치하였고, 肅宗 孝昌 연간(525~527)에 다시 靈州를 설치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키고 도주하여 대략 다 사라졌고, 1천여 戶만이 남아 있었다.
太中大夫 王通이 이들을 淮水의 북쪽으로 이주시켜 그들의 반란을 방지해야 한다고 요청하니, 楊椿에게 조서를 내려 그들을 이주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양춘이 말하기를 “이전 조정에서 그들을 변경에 둔 것은 다른 풍속의 사람들을 불러 귀순하게 하고, 또 中華와 夷狄을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새로 귀순해오는 戶口가 몹시 많은데, 만약 예전에 귀순한 사람들이 이주당하는 광경을 본다면 새로 귀순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그들을 내몰아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또 이 종족들은 털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겨울을 즐기고 추위를 편안하게 여기는데,
注+⑤ 衣(입다)는 於旣의 切이다. 남쪽 지역은 습기가 많고 더워서 그들이 가면 반드시 다 죽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게 하면 夷狄이 귀순하려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고, 물러나게 하면 藩國들이 지켜주는 이익을 잃게 됩니다. 이들을 中夏에 두면 혹 뒷날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마침내 이들을 濟州로 이주시켰는데, 京兆王 元愉의 반란이 일어나자, 모두 黃河에서 배를 타고 원유에게로 가서 있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였으니, 양춘이 말한 것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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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 懸瓠의 軍主인 白早生이 豫州刺史 司馬悅을 죽이고, 梁나라의 司州刺史 馬仙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에 梁나라 安成王 蕭秀가 都督의 직임을 맡고 있었는데,
注+① 蕭秀가 荊州刺史로 여러 州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司州는 그의 관할 지역이었다. 보좌들이 모두 조정의 답변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注+② 〈“宜待臺報”는〉 마땅히 天臺에 상주하여 답변을 기다려야 함을 말한 것이다. 江左에서는 대체로 朝廷을 ‘臺’라고 하였으니, 역시 天臺라고도 말한다.
소수가 말하기를 “저 백조생은 우리가 구원해주어야 생존할 수 있으니, 마땅히 신속히 구원해주어야 한다. 칙서를 기다리는 것이 비록 오랜 제도라 하더라도 위급한 상황에 응하는 방법은 아니다.”라고 하고,
注+③ 彼는 白早生을 말한다. 舊는 오랜 제도를 말한다.
즉시 군대를 보내어 달려가게 하였는데, 마선변이 副將 齊苟兒를 보내어 현호를 도와서 지키도록 하였다.
魏主(元恪)는 邢巒을 行豫州事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조생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형만이 말하기를 “백조생은 깊은 계책과 큰 지혜를 지닌 자가 아니고, 바로 司馬悅이 포학하였기에 무리들이 분노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백성들은 흉측한 위세에 핍박을 받아 부득이 그를 따른 것입니다.
가령 梁나라 군사들이 성에 들어가더라도 水路가 통하지 않아서 군량의 운송이 이어지지 않을 것이니, 역시 우리들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백조생은 양나라의 후원을 받아 반드시 성을 지켜서 달아나지 않을 것이니, 만약 王師가 나아간다면 병사들과 백성들이 반드시 태도를 바꾸어서 우리에게 귀순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올해를 넘기기 전에 마땅히 백조생의 首級을 京師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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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邢巒이 鮑口에 도착하자 白早生이 장수를 보내어 그들을 맞아 전투를 치렀는데, 형만이 그들을 대파하고 승리의 기세를 몰아 멀리까지 달려가 懸瓠에 도착하여 성을 포위하니, 鎭東參軍 成景儁이 宿預의 戍主인 嚴仲賢을 죽이고는 성을 가지고 梁나라에 항복하였다.
이때에 北魏는 郢州와 豫州에 있는 모든 성들을 잃었고, 義陽城 한 곳만이 北魏를 위하여 굳게 지키고 있었는데, 蠻族의 장수인 田益宗이 여러 만족들을 거느리고 북위로 귀순하였다.
注+① 田益宗은 光城의 蠻族이다.
11월에 북위에서 將軍 楊椿을 보내어 숙예를 공격하고, 中山王 元英에게 명하여 義陽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는데, 원영은 병력의 수가 적었기에 여러 차례 表文을 올려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원영이 현호에 도착하여 바로 형만과 함께 공격하였는데, 12월에 齊苟兒 등이 항복하자 백조생의 목을 베었고, 원영은 의양으로 진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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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의 義陽太守 辛祥이 婁悅과 함께 의양을 지키고 있었는데, 梁나라 將軍 胡武城과 陶平虜가 그들을 공격하자, 신상은 밤에 그들의 군영을 습격하여 도평로를 사로잡고 호무성의 목을 베니, 이로 말미암아 郢州 지역이 온전하게 되었다.
공적을 논하여 포상할 적에 누열은 자신의 공적이 신상보다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권세가들에게 그를 이간질하니, 포상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