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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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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年(237)
十五年이라
魏景初元年注+以改曆, 紀元景初.이요 吳嘉禾六年이라
春正月 魏黃龍見하니 하다
高堂隆 以魏得土德故 其瑞黃龍見하니 宜改正朔하고 易服色하여 以變民耳目이라한대
魏主叡從之하여 遂以建丑之月爲正하고 服色尙黃하고 牲用白注+殷爲地正, 以建丑十二月爲歲首. 服色尙黃, 以土代火之次, 犠牲用白, 從殷也.하다
夏六月 하다
◑魏以陳矯爲司徒하다
矯初爲尙書令 劉曄 嘗譖之하니 矯懼 其子騫曰 主上 明聖하고 大人 大臣이니 今若不合이라도 不過不作公耳니이다
尙書郞廉昭 以才能得幸하여 好抉擿群臣細過以媚上이러니 嘗奏左丞罰當關호되 不依詔라하여 扺罪하니 矯當連坐注+抉, 挑也. 擿, 發動也. 續漢志 “尙書左右丞各一人, 掌錄文書期會.” 罰, 罪罰也. 關, 白也. 言有罪罰, 當關白而不依詔書. 一說 “漢置當關之職, 欲曉卽至門, 呼人使起.” 此言尙書左丞曹璠, 行罰於當關之人, 而不依詔令, 故廉昭奏其罪, 陳矯爲尙書令, 當連坐也.러라
黃門侍郞杜恕上疏曰 陛下憂勞萬機하사 或親燈火로되 而庶事不康하고 刑禁日弛하니
原其所由컨대 非獨臣不盡忠이요 亦委任不專而俗多忌諱故也니이다 臣以爲忠臣不必親이요 親臣不必忠이라
有疏者毁人이면 而陛下疑其私報所憎하고 譽人이면 而陛下疑其私愛所親하시니
左右或因之하여 以進憎愛之說하여 遂使疏者 不敢毁譽하며 至於政事損益하여도 亦有所嫌하니
陛下當思所以廣朝臣之心하고 厲有道之節이어늘 反使如廉昭者 擾亂其間注+有道, 謂有道之士也.하시니
臣懼大臣 遂將容身保位하여 坐觀得失也하노이다
周公 戒魯侯曰 不使大臣怨乎不以注+以, 用也.라하니 言不賢則不可爲大臣이요
爲大臣則不可不用也 能者不敢遺其力하고 而不能者不得處非其任이니이다
今陛下於群臣 知其不盡力也하여 而代之憂其職하시고 知其不能也하여 而敎之治其事하시니
豈徒主勞而臣逸哉리오 雖聖賢竝世라도 終亦不能以此爲治也리이다
陛下又患臺閣禁令不密하고 人事請屬不絶하사 作迎客出入之制하여 以惡吏守寺門하시니 斯未得爲禁之本也注+臺閣, 謂尙書也. 寺門, 官寺之門也.니이다
昔漢安帝時 少府竇嘉 辟廷尉郭躬無罪之兄子호되 猶見奏劾注+按范書, 郭躬章帝元和三年, 拜廷尉, 和帝永元六年卒, 不及安帝時, 蓋躬死後, 竇嘉方辟其兄子也.이러니
近司隷校尉孔羨 辟大將軍狂悖之弟而有司嘿然注+裴松之曰 “案大將軍, 司馬宣王也. 晉書云 ‘宣帝第五弟名通, 爲司隷從事.’ 疑恕所云狂悖者.”하니 蓋陛下自無必行之罰하여 以絶阿黨之原耳니이다
夫糾擿姦宄 忠事也로되 然而世憎小人行之者 以其不顧道理而苟求容進也일새니이다
若陛下不考其終始하고 必以違衆忤世爲奉公하고 密行白人爲盡節注+謂潛伺人之過失, 以白上, 乃以爲盡節也.하시면 焉有通人大才而不能此邪잇가
誠顧道理而弗爲耳 使天下皆背道而趨利하면 則人主之所最病者也 陛下何樂焉이시리잇고 畿之子也
◑魏主叡嘗卒至尙書門注+卒, 讀曰猝. 尙書門, 尙書臺門也.하니 矯跪問曰 陛下欲何之시니잇고 曰 欲案行文書耳로라
矯曰 此自臣職分이니 非陛下所宜臨也니이다 若臣不稱職이면 請就黜退하노이다하니 叡慙而反하다
叡嘗問矯司馬公忠貞 可謂社稷之臣乎注+司馬公, 指司馬宣王也. 矯曰 朝廷之望也어니와 社稷 未之知也로이다
魏制三祖爲不毁之廟하다
魏有司奏以武皇帝爲太祖하고 文皇帝爲高祖하고 今皇帝爲烈祖하여 三祖之廟 萬世不毁하니 詔從之하다
孫盛曰 夫諡以表行이요 廟以存容注+行, 去聲.이니 未有當年而逆制祖宗하고 未終而豫自尊顯이라 魏之群司 於是乎失正矣注+群司, 百執事之臣也.로다
秋七月 魏擊遼東하여 不利하니 公孫淵 自稱燕王하다
公孫淵 數對國中賓客하여 出惡言하니 魏主叡欲討之하여 以毋丘儉爲幽州刺史注+毋, 音無. 毋丘, 複姓.하다
儉上疏曰 陛下卽位以來 未有可書 吳, 蜀恃險하니 未可卒平이요 聊可以此方無用之士 克定遼東注+卒, 讀曰猝. 聊, 且略之辭.이니이다
光祿大夫衛臻 諫曰 淵 生長海表하여 相承三世注+度‧康‧淵, 凡三世.하여 外撫戎夷하고 內修戰射어늘
而儉 欲以偏軍長驅하여 朝至夕卷하니 妄矣注+卷. 讀曰니이다
不聽하고 使儉率諸軍하여 屯遼東南界하고 璽書 徵淵하다
遂發兵하여 逆儉於遼隧注+遼隧縣, 二漢屬遼東郡, 晉志無其地, 蓋在遼水東岸.어늘 與戰不利하여 引軍還하다
因自立爲燕王하고 改元紹漢하고 置百官하고 誘鮮卑하여 以擾北方하다
皇后張氏崩하다
◑九月 魏大水하다
郭夫人 有寵於魏主叡하니 毛后愛弛注+夫人, 河右大族, 黃初中, 以本郡反叛, 沒入宮. 叡遊後園하여 曲宴極樂注+曲宴, 禁中之宴, 猶言私宴也.이러니 夫人 請延皇后한대 叡不許하고 因禁左右不得宣注+宣, 布也, 露其事也.이러라
毛后知之하고 明日 謂叡曰 昨遊北園 樂乎注+後園, 在洛城北隅.잇가하니 叡以左右泄之라하여 殺十餘人하고 因賜后死하다
冬十月하다
魏用高堂隆議하여 營洛陽南委粟山하여 爲圓丘注+孔穎達曰 “委粟山, 在洛陽南二十里.”하고 詔曰 漢承秦亂하여 廢無禘禮注+禮, 五年一禘, 禘其祖之所自出, 以其祖配之, 審諦昭穆而祭于太祖也. 以下文觀之, 則此乃禮記祭法所謂郊禘之禘, 鄭氏註曰 “禘郊祖宗, 謂祭祀以配食也. 此禘, 謂祭昊天於圜丘也.”
曹氏世系 出自有虞하니 今祀皇皇帝天於圓丘하여 以虞舜配하고 祭皇皇后地於方丘하여 以舜妃伊氏配注+舜妃, 堯女也. 堯, 伊祁氏.하고
祀天神於南郊하여 以武帝配하고 祭地祇於北郊하여 以武宣皇后配注+祇, 巨移切. 地祇, 提出萬物者也.하라
吳以諸葛恪爲威北將軍하다
至丹陽하여 移書屬城長吏하여 令各保疆界하고 明立部伍하고 從化平民 悉令屯居注+句.하다
乃內諸將하여 羅兵幽阻注+內, 讀曰納, 使諸將入扼幽阻之地, 故謂之內.하여 但繕藩籬하고 不與交鋒注+繕, 治也.하며
俟其穀稼將熟하여 輒縱兵芟刈하여 使無遺種하고 平民屯居 略無所犯하니
於是 山民饑窮하여 稍稍自首注+首, 謂有咎自陳也.어늘 復厚慰撫之하고 勅下不得拘執注+勅下者, 出敎令, 約束其下也.이러라
臼陽長胡伉 得舊惡民困迫暫出者하여 縛送府注+臼陽, 縣名, 屬丹陽郡. 長, 令長也.어늘 以伉違敎라하여 斬以徇하다
民間聞之하고 老幼相而出하니 歲期人數 皆如本規注+恪前云 “三年可得甲士四萬.”
自領萬人하고 餘分給諸將하니 吳主權 嘉其功하여 拜爲威北將軍하여 封都鄕侯하고 徙屯廬江皖口注+威北將軍, 孫氏所創置. 皖水, 自霍山縣, 東南流三百四十里, 入大江, 謂之皖口.하다
魏主叡徙長安鍾簴, 橐佗, 銅人, 承露盤於洛陽注+簴, 與鐻通. 橐佗, 秦始皇所鑄銅橐駝也. 銅人, 卽始皇所鑄金人. 承露盤, 解見漢武帝元鼎二年.이러니 盤折하니 聲聞數十里注+聞, 音問.하고
銅人 重不可致러니 大發銅하여 鑄銅人二하여 號曰翁仲이라하여 列坐於司馬門外하고
又鑄黃龍, 鳳凰하여 置內殿前하고 起土山於芳林園할새 使公卿으로 皆負土하고 樹雜木, 善草하고 捕禽獸하여 致其中注+水經注 “大夏門內東側際城, 有景陽山, 卽芳林園之西北陬也.” 裴松之曰 “芳林園, 卽今華林園, 齊王芳卽位, 改曰華林園.”하다
司徒掾董尋 上疏曰 建安以來 野戰死亡하여 或門殫戶盡하고 雖有存者 遺孤老弱이라
若宮室狹小하여 當廣大之라도 猶宜隨時하여 不妨農務어든 況作無益之物哉잇가
陛下旣尊群臣하여 顯以冠冕하고 載以華輿어시늘 而使穿方擧土하여 沾體塗足하여 毁國之光하여 以崇無益하시니 甚無謂也注+方, 穴土爲方也.니이다
孔子曰 君使臣以禮하고 臣事君以忠이라하시니 無忠無禮 國何以立이리오
臣知言出必死 而自比於牛之一毛하니 生旣無益인댄 死亦何損注+司馬遷答任安書曰 “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亡一毛, 與螻蟻何異.”이리오
秉筆流涕하여 心與世辭 臣有八子하니 死後 累陛下矣注+累, 託也.니이다
將奏 沐浴以待命이러니 叡曰 尋 不畏死邪 主者奏收之하니 詔勿問하다
○高堂隆 上書曰 今之小人 好說秦, 漢之奢靡하여 以蕩聖心하고
取亡國不度之器하여 以傷德政하니 非所以興禮樂之和 保神明之休也注+不度之器, 謂長安鍾簴‧橐佗‧銅人‧承露盤也.니이다
況今吳, 蜀 欲與中國爭衡注+衡, 所以稱輕重. 爭衡者, 言吳‧蜀自謂國勢與中國鈞, 無所輕重也.하니 若有人 來告權, 禪 竝修德政하여 輕省租賦하고
動咨耆賢하며 事遵禮度라하면 陛下聞之 豈不惡其如此而爲國憂乎잇가
若告者曰 彼竝爲無道하여 崇侈無度하여 重其賦斂하여 民不堪命이라하면 陛下聞之 豈不幸彼疲敝而取之不難乎잇가
苟如此 則可易心而度이니 事義之數 亦不遠矣注+度, 徒洛切, 下同.리이다
亡國之主 自謂不亡이니 然後 至於亡하고 賢聖之君 自謂亡이니 然後 至於不亡이니이다
今天下彫敝하니 若有寇警이면 臣懼版築之士 不能投命虜庭矣로이다
又將吏俸祿 稍見折減하고 不應輸者 今皆出半注+將, 去聲. 折, 耗也.하니 此爲官入 兼多於舊 其所出與 參少於昔이로되
而度支經用 更每不足注+參, 三分也.하니 反而推之하면 凡此諸費 必有所在矣注+自靑龍以來, 廣營宮殿, 婦官秩石, 擬百官之數, 後宮數千人. 隆言諸費所在, 蓋指此也.리이다
叡覽之하고 曰 觀隆此奏하니 使朕懼哉인저
○尙書衛覬上疏曰 今議者 多好悅耳하여 其言政治 則比陛下於堯, 舜하고 其言征伐이면 則比二虜於狸鼠하니 臣以爲不然이라하노이다
四海之內 分而爲三하여 群士陳力 各爲其主하니 是與六國分治 無以異也
武皇帝之時 後宮 食不過一肉이요 衣不用錦綉하고 茵蓐不緣飾하고 器物無丹漆이라
用能平定天下하고 遺福子孫注+茵蓐之字從草, 蓋古人用草爲之. 後世鞇字有旁從革者, 用皮爲之也. 裀褥二字有旁從衣者, 用帛爲之也. 古樸散而文飾盛, 又從而加緣飾焉. 緣, 兪絹切.이니이다 當今宜計校府庫하여 量入爲出이라도 猶恐不及이어늘
而工役不休하고 侈靡日崇하여 帑藏日竭이니이다
漢武信神仙之道하여 謂當得雲表之露하여 以餐玉屑이라 立仙掌以承高露하니 陛下通明하사 每所非笑니이다
漢武有求於露로되 而猶尙見非어늘 陛下無求於露로되 而空設之하여 糜費功夫하시니 皆聖慮所宜裁制也니이다
○時 有詔錄奪士女前已嫁爲吏民妻者하여 還以配士注+錄, 收拾也. 奪, 攘取也. 士女, 軍士之女.하니
太子舍人張茂 上書曰 陛下 天之子也 百姓吏民 亦陛下子也
今奪彼以與此 亦無以異於奪兄之妻妻弟也 於父母之恩 偏矣注+下妻, 去聲.니이다
又縣官 以配士爲名이나 實內之掖庭하고 其醜惡이라야 乃出與士注+內, 讀曰納.하니 得婦者 未必喜하고 而失妻者 必有憂
夫君天下而不得萬姓懽心者 鮮不危殆니이다 且軍師在外하여 日費千金이어늘
而後庭無錄之女 椒房母后之家 賞賜橫與하여 其費半軍注+無錄, 謂宮中錄籍無其名者. 橫, 戶孟切. 其費半軍, 謂其費與給軍之費相半也.하고
加以尙方 作玩弄之物하며 後園 建承露之盤하니 斯誠快耳目之觀이나 然亦足以騁寇賊之心矣니이다 皆不聽하다
魏光祿勳高堂隆하다
疾篤하여 口占上疏曰注+疾篤, 不能自書, 故口占而使人書之. 三代之有天下 歷數百載하여 尺土一民 莫非其有로되
然癸, 辛縱欲 皇天震怒하여 宗國爲墟하니이다 紂梟白旗하고 桀放鳴條하여 天子之尊 湯, 武有之하니 豈伊異人이리오
皆明王之冑也注+武王斬紂首, 懸之太白之旗, 商湯破桀於鳴條, 遂放之于南巢. 冑, 後也.니이다 黃初之際 天兆其戒하여 異類之鳥 育長燕巢하니 此大異也注+晉書五行志 “黃初元年, 未央宮中, 有燕生鷹, 口爪俱赤.”
宜防鷹揚之臣於蕭墻之內 可選諸王하여 使典兵碁跱하여 鎭撫皇畿하고 翼亮帝室注+鷹揚之臣, 指司馬懿也. 跱, 立也, 兵宜如碁之布立. 翼亮, 輔弼之意.이니이다
夫皇天無親하여 惟德是輔 民詠德政이면 則延期過歷하고 下有怨嘆이면 則輟錄授能注+輟, 止也. 錄, 圖錄也.하나니
由此觀之컨대 天下 乃天下之天下 非獨陛下之天下也니이다 魏主叡手詔慰勞之러니 未幾而卒하다
陳壽曰 隆 學業修明하고 志存匡君하여 因變陳戒 發於懇誠하니 忠矣哉
及至必改正朔하고 俾魏祖虞하여는 所謂意過其通者與注+意過其通, 謂意料之說, 執之甚堅, 反過其學之所通習者也.인저
魏作考課法이러니 不果行하다
魏主叡深疾浮華之士하여 詔吏部尙書盧毓曰 選擧 勿取有名이라 如畫地作餠하여 不可啖也니라
毓對曰 名不足以致異人이요 而可以得常士니이다 常士畏敎慕善然後 有名하나니 非所當疾也니이다
愚臣 旣不足以識異人이요 又主者正以循名案常爲職하니 但當有以驗其後耳니이다
古者 敷奏以言하고 明試以功이러니 今考績之法廢하여 而以毁譽爲進退 眞僞渾雜하고 虛實相蒙이니이다
叡納其言하여 詔散騎常侍劉卲하여 作都官考課法七十二條하여 下百官議하니
司隷崔林曰 周官考課 其文備矣注+周冢宰, 摠百官, 歲終則令百官府, 各正其治, 受其會, 聽其政事, 而詔王廢置, 三歲, 則大計群吏之治而誅賞之.로되 康王而下 遂以陵夷하니 蓋法存乎其人也注+陵夷, 言法度頹替, 若丘陵之漸平.니이다
且萬目不張이면 擧其綱하고 衆毛不整이면 振其領이니 若大臣 能任職이면 則孰敢不肅이리오 烏在考課哉잇가
杜恕曰 明試以功하여 三考黜陟 帝王之盛制也이나 其法 可粗依 其文 難備擧니이다
蓋世有亂人而無亂法이니 若法可專任이면 則唐, 虞不須稷, 契之佐 殷, 周無貴伊, 呂之輔矣리이다
今欲使州郡考士 必由四科하여 皆有事效然後 察擧하여
試辟公府하여 爲親民長吏라가 轉以功次補郡守者하고 或就增秩賜爵이니 此最考課之急務也注+漢官儀 “光祿擧敦厚‧質‧遜讓‧節儉, 此爲四行也.” 一說 “四科, 卽漢左雄所上, 黃瓊所增者也.”니이다
臣以爲當用其言하여 使爲課州郡之法하여 法具施行호되 必以賞罰隨之
至於三公하여는 坐而論道하고 內職大臣 納言補闕하여 無善不紀하고 無過不擧 焉有守職辦課而可以致雍熙者哉잇가
誠使容身保位 無放退之辜하고 而盡節在公 抱見疑之勢하면 公義不修而私議成俗하리니
雖仲尼爲課라도 猶不能盡一才 又況於世俗之人乎잇가
司空掾傅嘏曰注+嘏, 古雅切. 建官均職하여 淸理民物 所以立本也 循名考實하여 糾勵成規 所以治末也
本綱未擧而制末程하고 國略不崇而先考課注+擧綱則衆目張矣, 言所繫者大也. 十髮爲程, 十程爲分, 言其細也. 又曰 “程, 品式也.” 國略, 國經也. 先, 悉薦切. 懼不足以料賢愚之分하고 精幽明之理也니이다 議竟不行注+料, 音聊, 量也.하다
司馬公曰 爲治之要 莫先用人이요 而知人 聖賢所難也
求之毁譽 則愛憎競進而善惡混殽하고 考之功狀이면 則巧詐橫生而眞僞相冒注+橫, 戶孟切.하나니 要其本컨대 在至公至明而已矣
蓋公明者 心也 功狀者 迹也 己之心不能治어늘 而以考人之迹이면 不亦難乎
爲人上者 誠能不以親疎貴賤異其心하고 喜怒好惡亂其志하여
雖詢於人이라도 而決之在己하고 雖求於迹이라도 而察之在心이면
則群下之能否 焯然形於目中하여 無所逃矣注+焯, 音酌, 明也.리니 安得豫爲之法而悉委有司哉리오
苟親貴不能而任職하고 疎賤賢才而見遺하며 所喜好者 敗官不去하고
所怒惡者 有功不錄이면 則雖復爲之善法而繁其條目이나 又安能得其眞乎리오
或曰 內外之官 以千萬數 考察黜陟 人君 豈能獨任其事哉리오 曰 凡爲人上者 不特人君而已
公卿, 刺史, 太守 各用此道하여 以考察黜陟其在下之人하고 而爲人君者 亦用此道하여 以考察黜陟公卿, 刺史, 太守 則奚煩勞之有리오
或曰 考績之法 唐, 虞所爲 京房, 劉卲 述而修之耳니라 曰 唐, 虞之官 居位久而受任專하고 立法寛而責成遠이라
鯀之治水 九載弗成然後 治其罪하고 禹之治水 九州攸同然後 賞其功하니
非若房, 卲 校米鹽之課하고夕之效也 事固有名同而實異者하니 不可不察也니라
◑初 衛臻 典選擧 蔣濟遺之書曰 漢祖遇亡虜爲上將하고
周文 拔漁父爲太師注+亡虜, 謂韓信. 漁父, 謂呂望.하니 布衣廝養 可登王公이라 何必試而後用이리오
臻曰 子欲同牧野於成, 康하고 喩斷蛇於文, 景注+謂草創之規略, 不可用於承平之時也.하여 好不經之擧하고 開拔奇之津하니 將使天下 馳騁而起矣注+津, 江河濟度之要, 故以爲喩.로다
盧毓 論選 皆先性行而後言才注+先, 悉薦切.하니 人或問之한대 毓曰 才 所以爲善也
大才成大善하고 小才成小善하나니 今稱有才而不能爲善이면 是才不中器也니라 時人 服其言注+中, 去聲.하다


丁巳年(237)
나라(蜀漢) 後主 建興 15년이다.
나라 明帝 曹叡 景初 원년이고,注+책력을 바꿨으므로 景初紀元하였다. 나라 大帝 孫權 嘉禾 6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에 黃龍이 나타나니, 3월을 여름 4월이라 하였다.
高堂隆은 “나라가 土德을 얻었으므로 그 祥瑞黃龍이 나타났으니, 마땅히 正朔을 고치고 의복의 색깔을 바꾸어서 백성들의 이목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니,
魏主 曹叡가 그의 말을 따라서 마침내 建丑月을 정월로 삼고 의복의 색깔은 黃色을 숭상하고 犧牲白色을 사용하였다.注+ 의복의 색깔을 黃色을 숭상한 것은 로써 의 차례를 대신한 것이요, 犠牲을 백색을 사용한 것은 나라를 따른 것이다.
】 여름 6월에 나라에 지진이 있었다.
나라가 陳矯司徒로 삼았다.
陳矯가 처음 尙書令이 되었을 적에 劉曄이 늘 그를 중상모략하니, 진교가 두려워하였다. 그의 아들 陳騫이 말하기를 “主上은 밝고 성스러우시며, 大人大臣이십니다. 이제 만약 和合하지 못하더라도 三公이 되지 못함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였다.
尙書郞 廉昭가 재능으로 君主의 총애를 받아 여러 신하들의 작은 잘못을 들춰내 지적해서 윗사람에게 아첨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아뢰기를 “尙書左丞이 죄인을 처벌할 때에는 마땅히 아뢰어야 하는데, 조서를 따르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좌승이 죄를 얻게 되니, 진교도 이 일에 連坐되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注+은 들춰냄이요 은 적발함이다. ≪續漢志≫에 “尙書左丞右丞이 각각 한 사람이니, 文書를 기록하여 시기에 맞추는 일을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罪罰이다. 은 아룀이다. 〈“罰當關 不依詔”는〉 좌승이 죄인을 처벌할 적에 마땅히 군주에게 아뢰어야 하는데 詔書를 따르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일설에 “나라는 當關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였으니, 새벽이 되면 즉시 관문에 이르러서 사람을 불러 깨우고자 한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尙書 左丞 曹璠(조번)이 관문을 지키는 당관에게 형벌을 행하면서 詔令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廉昭가 그의 죄를 아뢰었는데, 陳矯尙書令이었으므로 連坐된 것을 말한 것이다.
黃門侍郞 杜恕가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만 가지 機務에 근심하고 수고로워 때로 직접 등잔불을 가까이하시는데도 여러 가지 일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형벌과 禁令이 날로 해이해지니,
그 이유를 근원해보면 다만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폐하께서 전적으로 委任하지 않아서 世俗에서 忌諱하는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은 생각건대 忠臣이 반드시 하지는 못하고 한 신하가 반드시 충성스럽지는 못합니다.
관계가 소원한 자가 남을 훼방하면 폐하께서는 그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사로이 보복하는가 의심하시고, 남을 칭찬하면 폐하께서는 그가 친한 사람을 사사로이 사랑하는가 의심하시니,
左右가 혹 폐하의 이러하신 태도에 영합하여 사랑하고 미워하는 말을 올려서 마침내 소원한 자로 하여금 감히 남을 훼방하거나 칭찬하지 못하게 하며, 政事損益에 이르러도 또한 혐의되는 바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조정의 신하들의 마음을 넓히고 가 있는 선비들의 節操를 장려할 것을 생각하셔야 하는데, 도리어 廉昭와 같은 자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소란을 피우게 하시니,注+有道”는 가 있는 선비를 이른다.
大臣들이 장차 몸을 편안히 하고 직위만을 보존하여 가만히 앉아서 정사의 得失觀望할까 염려됩니다.
】 옛날 注+는 따름이다. 하였으니, 어질지 않으면 大臣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大臣으로 삼았으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는 자가 감히 그 힘을 남기지 않고, 능하지 못한 자가 자기 임무가 아닌 자리에 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여러 신하들에 대하여 그가 힘을 다하지 않는 줄 알고서 대신하여 그 직책을 걱정하시고, 그가 능하지 못한 줄을 알고서 가르쳐 그 일을 다스리게 하시니,
어찌 다만 君主가 수고롭고 신하가 편안할 뿐이겠습니까. 비록 聖賢이 한 시대 한 세상에 있더라도 끝내 또한 이런 방식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또 臺閣禁令이 엄밀하지 못하고 人事請託이 끊이지 않는 것을 염려하시어 손님을 맞이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제도를 만들어서 나쁜 관리들로 하여금 寺門을 지키게 하시니, 이는 하는 근본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注+臺閣”은 尙書를 이른다. “寺門”은 官寺이다.
】 옛날 나라 安帝 때에 少府 竇嘉廷尉 郭躬의 죄 없는 형의 아들(조카)을 辟召하였는데도 오히려 탄핵을 당하였습니다.注+살펴보건대 范曄의 ≪後漢書≫에 郭躬章帝 元和 3년(86)에 廷尉에 제수되고 和帝 永元 6년(94)에 하여, 安帝 때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郭躬이 죽은 뒤에야 竇嘉가 비로소 그 형의 아들을 辟召한 듯하다.
그런데 근래에 司隷校尉 孔羨(공선)은 大將軍狂悖(망령되고 도리에 어긋남)한 아우를 벽소하였는데도 有司가 침묵을 지켰으니,注+裴松之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大將軍司馬宣王(司馬懿)이다. ≪晉書≫에 ‘宣帝의 다섯 번째 아우가 이름이 인데 司隷從事가 되었다.’ 하였으니, 의심컨대 杜恕가 말한 狂悖한 자인 듯하다.” 이는 폐하께서 본래 기필코 행하는 형벌이 없어서 阿黨하는 근원을 끊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사한 일을 규찰하고 적발하는 것은 충성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소인들이 이것을 행하는 것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도리를 돌아보지 않고 구차히 용납되어 등용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그 始終을 고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사람들을 어기고 세상과 반대되는 것을 奉公으로 여기시며, 은밀히 남의 행실을 아뢰는 것을 충절을 다한다고 여기시면,注+〈“密行白人爲盡節”은〉 은밀히 남의 과실을 사찰하여 에게 아뢰고는 마침내 이것을 충절을 다했다고 여김을 말한 것이다. 어찌 통달한 사람과 큰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것을 못하겠습니까.
진실로 도리를 돌아보아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만일 천하 사람들이 모두 도리를 등지고 이익을 추구한다면, 이는 군주가 가장 미워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이것을 즐거워하시겠습니까.” 杜恕杜畿의 아들이다.
魏主 曹叡가 갑자기 尙書門에 이르니,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尙書門尙書臺이다. 陳矯가 무릎을 꿇고 묻기를 “폐하께서 어디를 가시려고 하십니까?” 하였다. 대답하기를 “文書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진교가 말하기를 “이는 본래 의 직책이니 폐하께서 마땅히 보실 바가 아닙니다. 만약 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퇴출당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조예가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조예가 일찍이 진교에게 “司馬公(司馬懿)의 忠貞社稷의 신하(忠臣)라고 일컬을 만한가?”注+司馬公司馬宣王을 가리킨 것이다. 하니, 진교가 대답하기를 “사마공은 조정에 명망이 있는 분이지만 사직의 신하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나라에서 詔制를 내려 三祖毁撤하지 않는 사당으로 삼았다.
나라 有司武皇帝(曹操)를 太祖로, 文皇帝(曹丕)를 高祖로, 지금의 皇帝(曹叡)를 烈祖로 삼아서 三祖의 사당은 萬世에 훼철하지 않을 것을 주청하니, 魏主詔令을 내려 그의 말을 따랐다.
孫盛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諡號로써 행실을 표하고 사당으로써 용모(威儀)를 보존하니,注+(행실)은 去聲이다. 當年에 미리 祖宗를 만들고 죽기 전에 미리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드러낸 자가 있지 않다. 나라의 많은 신하가 이때에 바름을 잃었다.”注+群司”는 百官의 신하이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遼東을 공략하여 승리하지 못하니, 公孫淵이 스스로 燕王이라 하였다.
公孫淵이 여러 번 國內賓客에게 나쁜 말을 하니, 魏主 曹叡가 토벌하고자 하여 毌丘儉幽州刺史로 삼았다.注+
관구검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卽位하신 以來로 기록할 만한 일(행적)이 없습니다. 蜀漢이 험한 지역을 믿고 있으니 갑자기 평정할 수가 없고, 아쉽지만 우선 蜀漢의 전쟁에 사용하지 않는 지역의 병사로써 遼東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는 우선 대략이라는 말이다.
光祿大夫 衛臻이 다음과 같이 하였다. “公孫淵은 해외에서 生長하여 3가 서로 이어오면서注+〈“相承三世”는〉 公孫度公孫康, 公孫淵이니, 모두 3이다. 밖으로는 戎族夷族을 어루만지고 안으로는 전쟁과 활쏘기를 익혔습니다.
그런데 毌丘儉이 일부의 군대를 거느리고 길게 몰아서 아침에 도착하여 그날 저녁에 적을 席捲하고자 하니, 이는 망령된 생각입니다.”注+은 ()[]으로 읽는다.
曹叡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관구검으로 하여금 여러 군대를 거느려 遼東의 남쪽 경계에 주둔하게 하고 璽書(옥새를 찍은 親書)로 공손연을 불렀다.
公孫淵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서 遼隧에서 毌丘儉을 맞이하여 싸우자,注+遼隧縣二漢(前漢後漢) 때에는 遼東郡에 속하였는데, ≪晉書≫ 〈地理志〉에는 이 땅이 없으니, 아마도 遼水東岸에 있는 듯하다. 관구검이 그와 싸워 승리하지 못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공손연이 인하여 스스로 서서 燕王이 되고, 紹漢으로 改元하고 百官을 설치하였으며, 鮮卑를 유인하여 北方을 소란하게 하였다.
】 〈나라(蜀漢)〉 皇后 張氏하였다.
】 9월에 나라에 홍수가 졌다.
魏主 曹叡가 그 毛氏를 죽였다.
郭夫人魏主 曹叡에게 寵愛를 받으니, 毛后에 대한 사랑이 날로 쇠하였다.注+郭夫人河右(河西)의 큰 富豪家였는데, 黃初 연간에 本郡이 배반함으로 인해 籍沒되어 으로 들어왔다. 조예가 後園에서 놀면서 사사로이 잔치하여 지극히 즐거웠는데,注+曲宴”은 禁中의 잔치이니, 사사로운 잔치라는 말과 같다. 곽부인이 황후를 맞이해올 것을 청했으나 조예는 허락하지 않고 인하여 좌우에게 하여 이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注+은 폄이니, 일을 드러낸 것이다.
모후가 이 일을 알고 다음 날 조예에게 이르기를 “어제 북쪽 후원에서 노신 것이 즐거우셨습니까?”注+後園洛陽城 북쪽 귀퉁이에 있다. 하니, 조예는 좌우 신하들이 누설한 것이라고 여겨서 신하 10여 명을 죽이고 인하여 모후에게 사약을 내렸다.
】 겨울 10월에 나라는 圓丘方丘, 南郊北郊를 경영하였다.
나라는 高堂隆의 의논을 따라 洛陽의 남쪽 委粟山을 경영하여 圓丘를 만들고注+孔穎達이 말하였다. “委粟山洛陽 남쪽 20 지점에 있다.” 다음과 같이 詔令을 내렸다. “나라는 나라의 혼란한 틈을 뒤이어서 禘祭를 지내는 를 폐지하여 없앴다.注+에 5년에 한 번 禘祭를 지내니, 始祖가 말미암아 나온 분(할아버지)을 禘祭하고 그 시조로 배향하는바, 체제는 昭穆을 자세히 살펴서 太祖에게 제사한다는 뜻이다. 아래 글을 가지고 살펴보면, 이것은 바로 ≪禮記≫ 〈祭法〉에 이른바 이니, 鄭玄에 “함은 제사하여 配食함을 이른다. 이 圜丘(원구)에서 昊天에게 제사함을 이른다.” 하였다.
曹氏世系有虞에서 나왔으니, 이제 皇皇帝天圓丘에서 제사하여 虞舜으로 배향하고, 皇皇后地方丘에서 제사하여 虞舜伊祈氏로 배향하며,注+임금의 딸이니, 요임금은 伊祁氏이다.
天神南郊에서 제사하여 武帝로 배향하고, 地祇北郊에서 제사하여 武宣皇后로 배향하라.”注+(地神)는 巨移이니, “地祇”는 萬物을 끌어내는 자이다.
나라는 諸葛恪威北將軍으로 삼았다.
諸葛恪丹陽에 도착해서 소속된 城邑長吏(수령)들에게 글을 보내어 각자 국경을 잘 지키고 隊伍를 분명하게 하며, 귀순한 平民은 모두 모여 거주하게 하였다.注+여기에서 를 뗀다.
그런 뒤에 장수들을 들어오게 해서 그윽하고 막힌 곳에 군대를 진열한 다음注+(들이다)은 으로 읽으니, 장수들로 하여금 그윽하고 막힌 지역에 들어와 적을 막게 하였으므로 이라 한 것이다. 울타리만 수선하고 과 교전하지 않게 하였다.注+은 다스림이다.
곡식과 벼가 장차 익기를 기다렸다가 번번이 군대를 풀어 곡식과 벼를 수확하여 남은 종자가 없게 하고, 모여 거주하는 平民은 조금도 침범하는 바가 없으니,
이에 산속에 숨어 있던 백성들이 굶주리고 곤궁해서 차츰 산에서 나와 자수하였다.注+는 잘못이 있음을 스스로 말함을 이른다. 제갈각은 다시 이들을 후대하여 위로하고 어루만지고는 아랫사람들에게 명하여 사로잡지 못하게 하였다.注+勅下”는 敎令를 내려서 그 아랫사람들을 단속한 것이다.
臼陽縣長 胡伉(호항)이, 옛날 나쁜 백성으로서 곤궁하고 군색하여 잠시 산에서 나온 자를 잡아서 포박하여 丹陽府로 보내자,注+臼陽의 이름이니, 丹陽郡에 속하였다. 令長이다. 諸葛恪은 호항이 敎令을 어겼다 하여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민간에서 이 말을 듣고는 늙은이와 어린이가 서로 손을 잡고 나오니, 1년 후에 병사의 숫자가 모두 본래 약속했던 것과 같게 되었다.注+〈“歲期人數 皆如本規”는〉 諸葛恪이 예전에 “3년이면 甲士 4만 명을 얻을 수 있다.” 하였다.
제갈각은 직접 만 명을 거느리고 나머지는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니, 吳主 孫權은 그 을 가상히 여겨서 威北將軍으로 제수하여 都鄕侯하고 주둔지를 廬江皖口(환구)로 옮겼다.注+威北將軍孫氏가 처음 설치한 것이다. 皖水霍山縣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340리를 흘러 大江(長江)으로 들어가니, 이곳을 皖口라 한다.
나라에서 銅人(구리로 만든 인형)을 주조하고 芳林園土山을 일으켰다.
芳林園을 조성하다芳林園을 조성하다
魏主 曹叡長安에 있는 鍾簴(종거), 橐佗(탁타), 銅人, 承露盤洛陽으로 옮겼는데注+(종틀)는 한다. “橐佗”는 始皇이 구리로 주조한 낙타이다. “銅人”은 바로 진 시황이 주조한 金人이다. 승로반이 부러지니, 소리가 수십 리에 들렸다.注+(들리다)은 음이 이다.
銅人은 무거워서 가져올 수가 없자, 백성들에게 을 많이 징발하여 銅人 둘을 주조하고 이름을 翁仲이라 하여 司馬門 밖에 나란히 앉혔다.
黃龍鳳凰을 주조하여 內殿의 앞에 두고, 芳林園土山을 일으켜서 公卿들로 하여금 모두 흙을 져 나르게 하였으며, 토산에 각종 나무와 좋은 풀을 심고 새와 짐승을 잡아다가 이 가운데에 풀어놓게 하였다.注+水經注≫에 “大夏門 안 동쪽 가에 景陽山이 있으니, 바로 芳林園의 서북쪽 귀퉁이다.” 하였다. 裴松之가 말하기를 “芳林園은 바로 지금의 華林園이니, 齊王 曹芳이 즉위하여 화림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였다.
司徒掾 董尋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建安 以來로 병사들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죽고 도망하여 혹 가문이 모두 없어졌으며, 비록 生存한 자가 있더라도 남은 孤兒老弱者들 뿐입니다.
만약 宮室狹小해서 마땅히 넓히고 키워야 한다 하더라도 시기에 맞게 해서 농사일을 방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유익함이 없는 물건을 만듦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폐하께서 이미 여러 신하들을 높여서 冠冕으로 드러나게 하고 화려한 수레에 태우셨는데, 이들로 하여금 네모지게 땅을 파 짊어져서 흙이 온 몸과 발에 묻게 해서 나라의 광채를 훼손하여 유익함이 없는 일을 숭상하시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注+은 흙을 파서 네모지게 만드는 것이다.
孔子가 말씀하기를 ‘군주는 신하를 로써 부리고 신하는 군주를 충성으로써 섬긴다.’ 하였으니, 충성이 없고 가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은 이 말이 입에서 나오면 반드시 죽을 줄을 알지만 스스로 소의 한 터럭에 견주니, 살아서 이미 국가에 유익함이 없다면 죽은들 또한 무슨 손해될 것이 있겠습니까.注+〈“自比於牛之一毛”는〉 司馬遷任安에게 한 편지에 “가령 내가 법에 따라 죄를 얻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아홉 마리 소에 한 터럭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땅강아지와 개미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붓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이미 세상과 하직하였습니다. 에게 여덟 명의 자식이 있으니, 제가 죽은 뒤에 폐하에게 부탁드립니다.”注+는 부탁함이다.
동심은 글을 아뢰려 할 적에 沐浴하고 처벌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曹叡가 말하기를 “동심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였다. 刑獄을 주관하는 자가 그를 체포할 것을 주청하자, 詔令을 내려 그의 죄를 묻지 말라고 하였다.
高堂隆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의 小人들은 , 시대의 사치하고 화려함을 말하기 좋아하여 聖上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멸망한 나라의 법도에 맞지 않는 器物을 가져와서 덕스러운 정사를 해치니, 이는 禮樂의 조화로움을 일으키고 神明의 아름다움을 보전하는 것이 아닙니다.注+不度之器”는 長安鍾簴橐佗, 銅人承露盤을 이른다.
더구나 지금 蜀漢이 우리 中國과 힘을 겨루고자 하니,注+(저울대)은 輕重을 저울질하는 것이니, “爭衡”은 蜀漢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국가의 形勢中國(나라)과 대등해서 더 낫고 못한 바가 없다고 생각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孫權劉禪이 모두 덕스러운 정사를 닦아서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항상 나이 많은 원로와 賢者들에게 자문하며, 일마다 예와 법도를 따릅니다.’라고 하면, 폐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심에 저들이 이와 같이 훌륭한 정치를 하여 우리 국가의 근심이 됨을 어찌 싫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아뢰는 자가 말하기를 ‘저들은 모두 無道한 짓을 자행하여 사치를 숭상함에 한도가 없어서 부역과 세금을 무겁게 하여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 폐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심에 저들이 피폐하여 저들을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음을 어찌 다행으로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진실로 이와 같다면 마음을 바꾸어 헤아려볼 수 있으니, 事情을 헤아리는 것도 거의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注+(헤아리다)은 徒洛이니, 아래도 같다.
】 멸망한 나라의 군주는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고 편안하게 생각하니 그런 뒤에 결국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고,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는 스스로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런 뒤에 결국 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天下가 피폐하니, 만약 적이 침입했다는 경보가 있으면 築城에 동원된 병사들이 변경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또 장수와 관리들의 녹봉이 점점 깎여 줄어들고, 세금을 내지 않아야 할 자들이 지금 모두 절반을 내고 있으니,注+(장수)은 去聲이다. 은 소모됨이다. 이는 의 수입은 옛날보다 갑절이 많아지고 지출은 옛날보다 3분의 1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度支(국가의 재정)의 경비가 다시 매번 부족하니,注+은 셋으로 나눔이다. 돌이켜 推究해보면 무릇 여러 비용은 반드시 별도로 쓰이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注+靑龍 연간(233~236) 以來宮殿을 넓게 경영하고, 궁중의 女官에게 지급되는 봉록의 百官에게 지급되는 石數에 비견되었으며, 後宮이 수천 명이었다. 高堂隆이 말한 여러 비용이 별도로 쓰이는 곳이란 아마도 이를 가리킨 듯하다.
曹叡는 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高堂隆의 이 上奏文을 보니, 으로 하여금 두렵게 한다.” 하였다.
尙書 衛覬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대부분 남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여, 政治를 말하게 되면 폐하를 , 에 견주고 征伐을 말하게 되면 두 오랑캐(蜀漢)를 살쾡이와 쥐에 비하니, 은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지금 四海의 안이 세 나라로 나뉘어서 여러 선비들이 힘을 폄에 각각 자기 군주를 위하니, 이는 옛날 6국이 나누어 다스리던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武皇帝 때에 後宮은 먹는 것이 한 가지 고기에 지나지 않고 옷은 錦綉를 쓰지 않고 풀로 만든 자리에 가를 꾸미지 않았으며, 器物에는 丹沙와 옻칠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를 平定하고 자손들에게 복을 남겨주셨던 것입니다.注+茵蓐”의 글자가 草邊을 따른 것은 古人이 풀을 사용하여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後世의 ‘’자의 偏旁革邊을 따른 것은 가죽을 사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裀褥’ 두 글자의 偏旁衣邊을 따른 것은 비단을 사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스러움과 질박함이 사라지고 文飾이 성행하고 또 여기에 선을 둘러 꾸밈을 한 것이다. (선을 두르다)은 兪絹이다. 지금 府庫의 물자를 계산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더라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工役이 그치지 않고 사치가 날로 더해서 국고가 날로 고갈되고 있습니다.
】 옛날에 武帝神仙를 믿어서 폐하께서는 통달하고 밝으시어 매번 이것을 비웃으셨습니다.
한 무제는 이슬을 받아먹으려 하였는데도 오히려 비난을 받았는데, 폐하께서는 이슬을 얻을 생각이 없으시면서 공연히 承露盤(이슬을 받는 그릇)을 설치하여 공력을 허비하시니, 모두 聖上의 생각에 마땅히 재재해야 할 바입니다.”
】 이때에 曹叡詔令을 내려서 병사들의 딸 중에 예전에 이미 시집가서 관리와 백성의 아내가 된 자들을 수습하여 빼앗아서 다시 병사들에게 배필로 주니,注+收拾함이요, 은 빼앗음이다. “士女”는 軍士의 딸이다.
太子舍人 張茂가 다음과 같이 上書하였다. “폐하는 하늘의 아들이요, 관리와 백성 또한 폐하의 아들입니다.
이제 저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또한 형의 아내를 빼앗아서 아우에게 시집보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는 父母의 은혜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입니다.注+아래의 (시집보내다)는 去聲이다.
縣官(국가)에서는 병사들에게 배필로 준다고 명분을 삼고 있으나 실제는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은〉 掖庭(궁중)으로 들이고, 못생긴 여인만 병사들에게 보내주니,注+(들이다)은 으로 읽는다. 부인을 얻은 자가 반드시 기뻐하지는 않고 아내를 잃은 자는 반드시 근심합니다.
天下君主로 있으면서 만백성의 환심을 얻지 못하면 위태롭지 않은 자가 적었습니다. 또 군대가 밖에 주둔하고서 하루에 千金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後庭에 기록되지 않은 여인과 椒房(황후가 거처하는 곳)과 母后의 집안에게 마구 재물을 하사하여 그 비용이 군대의 비용의 절반이 되고,注+無錄”은 宮中의 기록에 그 이름이 없는 자를 이른다. (멋대로)은 戶孟이다. “其費半軍”은 그 비용이 군대에게 지급하는 비용의 절반이 됨을 말한 것이다.
게다가 尙方에서는 구경하고 희롱하는 물건을 만들며 後園承露盤을 세우시니, 이는 진실로 한때 사람의 이목을 상쾌하게 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 우리를 침략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조예는 모두 듣지 않았다.
나라 光祿勳 高堂隆하였다.
高堂隆은 병이 위독하자, 입으로 글을 불러주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注+〈“疾篤 口占上書”는〉 병이 위독하여 글을 손수 쓸 수 없으므로 입으로 불러주어 남으로 하여금 쓰게 한 것이다., , 三代가 천하를 소유했을 적에 수백 년을 지나도록 한 자의 땅과 한 명의 백성도 그들의 소유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桀王)와 (紂王)이 함부로 욕심을 부리자 皇天震怒하여 宗國이 빈터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紂王은 머리가 太白에 효시되고, 桀王鳴條에서 쫓겨나서 天子의 높은 지위를 湯王武王이 소유하였으니, 어찌 저들(桀王紂王)이 다른 사람이었겠습니까.
모두 훌륭한 왕자의 후손이었습니다.注+〈“紂梟白旗 桀放鳴條”는〉 武王紂王의 머리를 참수하여 太白에 매달았고, 나라 湯王桀王鳴條에서 격파하고는 마침내 南巢에 추방(유치)하였다. 는 후손이다. 黃初 연간에 하늘이 경계하는 조짐을 보여 종류가 다른 새가 제비의 둥지에서 자랐으니, 이는 큰 異變입니다.注+〈“異類之鳥 育長燕巢”는〉 ≪晉書≫ 〈五行志〉에 “黃初 원년에 未央宮 안에 제비가 매를 낳았는데, 입과 발톱이 모두 붉다.” 하였다.
마땅히 鷹揚(매처럼 무예를 드날림)하는 신하를 蕭墻(담장)의 안에서 방비해야 하니, 諸王들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병권을 주관하게 하고 병사들을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포진시켜 황제의 畿內鎭撫하고 황실을 돕게 해야 합니다.注+鷹揚之臣”은 司馬懿를 가리킨 것이다. 는 섬이니, 병사는 마땅히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포진하고 서 있어야 한다. “翼亮”은 輔弼하는 뜻이다.
皇天은 특별히 친애하는 사람이 없어서 오직 이 있는 사람을 돕습니다. 백성들이 덕스러운 政事를 읊으면 국운이 연장되어 국가가 오랫동안 유지되고, 아래에 원망하고 탄식하는 자가 있으면 圖錄(國統)을 그치게 하여 유능한 자에게 천하를 주니,注+은 그침이요, 圖錄(國祚)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천하는 바로 천하 사람의 천하이고 폐하만의 천하가 아닙니다.” 魏主 曹叡는 손수 詔令을 내려 위로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고당륭이 하였다.
陳壽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高堂隆은 학문이 정통하고 군주를 바로잡음에 뜻이 있어서, 災變으로 인하여 경계 말씀을 올린 것이 간곡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충성스럽다.
반드시 正朔을 고치고 나라로 하여금 나라를 선조로 삼게 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미리 헤아리는 말이 학문이 통달한 바를 넘었다는 것이다.”注+意過其通”은 일에 앞서 미리 헤아려 한 말을 너무 고집해서, 도리어 그 학문이 통하고 익힌 바를 넘음을 말한 것이다.
나라에서 考課法을 만들었는데,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魏主 曹叡浮華(겉만 화려하고 실제가 없음)한 선비를 매우 미워하여 吏部尙書 盧毓(노육)에게 詔令을 내리기를 “사람을 가려 뽑을 적에 有名한 사람을 취하지 말라. 명성은 땅에 그림을 그려 떡을 만들더라도 실제로 먹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에 노육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명성으로는 특이한 사람을 데려올 수는 없고 보통의 선비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보통의 선비가 가르침을 두려워하고 을 사모하면 뒤에 명성이 있게 되니, 마땅히 미워할 바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은 기이한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또 주관하는 일이 바로 이름을 따라 떳떳함을 살피는 것을 직책으로 삼고 있으니, 다만 마땅히 등용한 뒤를 징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성적을 考課하는 법이 폐지되어 훼방하는 말과 칭찬하는 말로써 사람을 등용하고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참과 거짓이 뒤섞이고 이 서로 가려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曹叡가 그의 말을 받아들여서 詔令을 내려 散騎常侍 劉卲에게 都官考課法 72조항을 만들어 百官들에게 회부해서 의논하게 하니,
司隷 崔林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周官≫에 考課하는 법은 그 글이 자세히 갖추어져 있으나注+〈“周官考課 其文備矣”는〉 나라 冢宰百官을 총괄하여 歲終(연말)이 되면 여러 官府로 하여금 각각 관부의 치적을 정비하고 회계를 받고 政事를 듣고는 에게 관리를 버릴 것인지, 그대로 둘 것인지를 보고하였으며, 3년이 되면 官吏들의 치적을 크게 계산하여 상과 벌을 시행하였다. 康王 이후로 마침내 침체하였으니, 은 시행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注+陵夷”는 丘陵이 점점 평평해지는 것처럼 법도가 무너지고 침체함을 말한 것이다.
또 만 가지 조목이 펼쳐지지 않을 때에는 큰 을 들어야 하고, 여러 털이 정리되지 않았을 때에는 옷깃을 떨쳐야 하니, 만약 大臣이 능히 그 직책을 잘 수행한다면 누가 감히 직책에 공경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考課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杜恕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그러나 그 법은 대략만 따를 수 있고 그 글은 자세히 거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 난을 일으키는 사람은 있어도 혼란을 일으키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법에만 오로지 맡겼다면
지금 州郡들로 하여금 선비를 고과할 적에 반드시 먼저 四科를 통과하게 하여 이 四科에 실제 효험이 있은 뒤에야 다시 천거하며,
公府辟召試用을 거쳐 백성과 가까운 長吏로 삼았다가 점점 功績에 따라 차례로 郡守에 보임하며, 그렇지 않으면 품계를 올려주고 관작을 하사해야 하니, 이것이 考課의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注+〈“四科”는〉 ≪漢官儀≫에 “光祿敦厚하고 質樸하고 遜讓하고 節儉한 자를 천거하였으니, 이것이 네 가지 행실이 된다.” 하였다. 일설에
은 생각건대 마땅히 그들의 말을 따라 州郡考課하는 법을 만들게 해서 법을 철저히 시행하되 반드시 상벌을 뒤따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三公의 경우에는 앉아서 治國를 논하고, 內職大臣들은 훌륭한 말씀을 올려 君主의 잘못을 바로잡아서 善行은 기록하지 않음이 없고 잘못은 열거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니, 어찌 직책만 지키고 고과만 하면서 천하의 화평함을 이루는 자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자기 한 몸을 편안히 하고 지위를 보전하는 자는 축출되어 면직되는 죄를 받지 않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충절을 지키면서 公事를 처리하는 사람은 의심을 받는다면, 공정한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사사로운 의논이 풍속을 이루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된다면 비록 仲尼가 고과를 하더라도 한 가지의 재주도 다할 수 없을 터인데, 또 하물며 세속의 사람이 고과하는 경우이겠습니까.”
司空掾 傅嘏(부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古雅이다.官吏를 세우고 직책을 고르게 나누어 백성을 깨끗이 다스리는 것은 근본을 세우는 것이요, 이름을 따라 실제를 고찰하여 이루어놓은 법을 살피고 힘쓰는 것은 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정치 원칙[]이 아직 거행되지 못하였는데 말단의 법조문[]을 제정하고, 국가의 經常적인 제도를 높이지 않고 考課를 먼저 하면,注+(벼리)을 들면 여러 細目이 펼쳐지니, 관계된 바가 큼을 말한 것이다. 10이라 하고 10이라 하니, 그 가늚(작음)을 말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品式(法式)이다.”라 한다. “國略”은 나라의 經常的인 제도이다. (먼저 하다)은 悉薦이다. 의 구분을 헤아리고 의 이치를 정밀히 살피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에 考課에 대한 의논이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헤아림이다.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政治하는 요점은 인물을 등용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인물을 아는 것은 聖賢도 어렵게 여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훼방하는 말과 칭찬하는 말로 인물을 구하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말을 다투어 올려서 이 뒤섞이고, 공로를 기록한 글로 상고하면 기교와 거짓이 멋대로 생겨서 참과 거짓이 서로 뒤바뀌니,注+(멋대로)은 戶孟이다. 그 근본을 요약해보면 군주의 마음이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밝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공정하고 밝은 것은 마음이요 공로를 기록한 글은 자취이니,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서 남의 자취를 고찰하려고 하면 어렵지 않겠는가.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진실로 親疎貴賤에 따라 그 마음을 달리하지 않고, 喜怒好惡(호오)에 따라 그 뜻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비록 남에게 묻더라도 결정은 자기 자신이 하고, 비록 자취에서 구하더라도 공정한 마음으로 살피면,
아랫사람들의 능하고 능하지 못함이 분명하게 눈 안에 나타나서 도피하는 바가 없을 것이니,注+은 음이 이니, 밝음이다. 어찌 미리 법을 만들어 모두 有司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만일 친척과 귀한 사람이 능하지 못한데도 직책을 맡기고, 소원하고 비천한 사람이 어질고 재주가 있는데도 버려지며, 기뻐하고 좋아하는 자는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는데도 제거하지 않고,
노여워하고 미워하는 자는 이 있어도 錄用하지 않는다면, 비록 다시 좋은 법을 만들어서 그 조목을 많게 하더라도 또 어찌 그 진실을 얻겠는가.
혹자가 ‘內外의 관직이 천이나 만으로 헤아려지니, 상고하고 살펴서 내치고 올림을 군주가 어찌 홀로 그 일을 맡겠는가.’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무릇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비단 군주뿐만이 아니다.
公卿刺史太守도 각각 이 방도를 사용해서 아랫자리에 있는 자들을 고찰하여 내치고 올리며, 군주가 된 자 또한 이 방도를 사용하여 公卿刺史太守를 고찰하여 내치고 올리면, 어찌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이 있겠는가.’
혹자는 ‘공적을 상고하는 법은 시대에서 한 것인데, 京房劉卲가 이것을 따라 修明하였을 뿐이다.’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의 관원은 한 지위에 오랫동안 있었고 임무를 받음이 전일하고 법을 세움이 너그럽고 성공을 책임 지우는 기간이 길었다.
劉卲가 쌀과 소금처럼 자잘하고 번거로운 일을 비교하고 조석간에 효험을 책임 지우려 한 것과는 똑같지 않다. 일은 진실로 이름은 같으나 실제가 다른 경우가 있으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 처음에 衛臻選擧를 맡자, 蔣濟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다. “
注+亡虜”는 韓信을 이르고, “漁父”는 呂望을 이른다. 布衣와 노역하는 자들도 王公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하필 시험한 뒤에야 등용하겠는가.”
이에 위진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그대는 武王牧野에서 싸운 것을 成王康王과 똑같이 보고자 하고 高祖가 뱀을 벤 것을 文帝景帝에 비유하고자 하여,注+〈“欲同牧野於成康 喩斷蛇於文景”은〉 草創할 때의 規模經倫承平할 때에 쓸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常規에 어긋나는 일을 좋아하고 기이한 사람을 발탁하는 나루터를 열어놓으니,
장차 天下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 치달려서 일어나게 할 것이다.”注+江河의 물을 건너는 요지(나룻터)이다. 그러므로 〈官界要路로〉 비유한 것이다.
盧毓選擧를 논할 적에 모두 사람들의 성품과 행실을 먼저 하고 재주를 뒤에 말하였다.注+(먼저 하다)은 悉薦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노육이 말하기를 “재주는 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큰 재주는 큰 을 이루고 작은 재주는 작은 을 이루는 것이니, 지금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지나 을 하지 못한다면 이는 재주가 그릇에 맞지 못하는 것이다.”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말에 탄복하였다.注+(알맞다)은 去聲이다.


역주
역주1 以三月 爲夏四月 : “建丑月을 정월로 하였으니, 그렇다면 3월을 4월로 했다고 하면 될 터인데 여름 4월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 道가 아님을 비난한 것이다. 三代가 正朔을 고칠 적에는 달수를 고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漢나라 초기에 秦나라의 建亥月을 그대로 계승하여 ‘겨울 10월’이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秦나라와 漢나라가 비록 正朔을 고쳤으나 그 겨울이 됨은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달수를 고쳐서 3월을 4월이라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의논이요, 봄을 여름이라 하였으니 이는 四時의 실제를 變易한 것이다. 그러므로 ‘夏’라고 써서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正朔을 고쳤다.’라고 쓴 것이 5번이다.[建丑也 然則書以三月爲四月可矣 書夏四月 何 譏非古也 三代改正 不改月數 漢初承秦建亥 書冬十月 則秦漢雖改正 而其爲冬自若也 今改月數 以三爲四 末論也 而以春爲夏 是變易四時之實矣 故書夏譏之 終綱目 書改正五]” ≪書法≫
역주2 殷나라는……하였다 : 建丑月은 北斗七星의 자루가 丑方을 가리키는 달로 음력 12월을 이른다. 북두칠성의 자루는 1년에 366번을 돌아 하루에 한 바퀴를 돌고 한 바퀴를 더 돌아 매월 한 방위씩 바뀌어 간다. 그리하여 초저녁에 북두성의 자루가 정북방인 子方을 가리키면 음력 동짓달이 되고 정동방인 卯方을 가리키면 2월이 되고 정남방인 午方을 가리키면 5월이 되고 정서방인 酉方을 가리키면 8월이 된다. 歲首는 正月을 이른다. 옛날 夏나라는 建寅月을 정월로 삼으니 이를 人正이라 하고, 殷나라는 建丑月을 정월로 삼으니 이를 地正이라 하고, 周나라는 建子月을 정월로 삼으니 이를 天正이라 하였는바, 이는 “하늘은 子會에서 열리고 땅은 丑會에서 열리고 사람은 寅會에서 태어났다.[天開於子 地開於丑 人生於寅]”는 運會說에 근거한 것이다. 律曆은 대부분 建寅月을 정월로 하여 建丑月은 음력 섣달이 되고 建子月은 동짓달이 되었는바, 이때 建丑月을 정월로 하여 종전에 사용하던 책력에서 한 달을 앞당겨 3월을 4월이라 한 것이다. 秦나라는 建亥月을 정월로 삼았는데, 漢나라 초기에는 秦나라 책력을 그대로 사용하여 매년 冬十月을 歲首로 하다가 武帝 때에 太初曆이 나오면서 建寅月을 정월로 하였다. 古代에는 五行說에 입각하여 국가마다 숭상하는 德과 이에 따른 색깔이 있었는바, 殷나라는 建丑月을 정월로 삼고 백색을 숭상하여 희생도 백색을 사용하였으며, 漢나라는 火德이라 하여 赤色을 숭상하였는데 火는 土를 낳으므로 魏나라는 土德을 쓰고 黃色을 숭상하면서도 殷나라의 제도를 일부 반영하여 희생은 백색을 사용한 것이다.
역주3 魏地震 : “≪資治通鑑綱目≫에서 지진을 쓴 것이 101번인데 漢代가 90번을 차지하니, 地道(땅의 道)의 변고가 漢나라보다 많은 적이 있지 않다. 이로부터 50년 동안 지진을 쓰지 않다가 晉 武帝 太康 9년(288)에 이른 뒤에 다시 썼고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쓴 것도 10분의 1에 불과하니, 어찌 地道가 그 떳떳함을 편안히 여겨서였겠는가. 이는 사관의 記注(기록)가 생략된 부분이 많아서일 것이다.[綱目書地震一百一 而漢世居九十 地道之變 未有多於漢者也 自是五十年不書地震 至晉武太康九年而後書 迄綱目之終 所書亦不過當十之一 豈地道之安其常哉 記注蓋多略矣]” ≪書法≫
역주4 周公이……말라 : 魯侯는 魯나라에 봉해진 周公의 아들 伯禽을 가리킨다. 이 내용은 ≪論語≫ 〈微子〉에 그대로 보이는바, 이는 주공이 封地로 나가는 아들을 보내면서 경계한 말씀이다.
역주5 毋는……複姓이다 : 여기에는 毋의 음이 無로 되어 있으나, 一本에는 毌으로 되어 있어 음과 뜻이 貫과 같은바, 毋丘는 山東省 曹縣에 있었던 옛 地名이다. 毋丘儉은 특히 高句麗를 정벌하여 유명한 인물인바, 우리나라 역사책에서는 ‘관구검’으로 읽는 경우가 많으므로 번역문에서 모두 관구검으로 표기하였다.
역주6 ()[捲] : 저본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捲’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魏主叡殺其后毛氏 : “魏나라에서 일찍이 ‘夫人 甄氏를 죽였다.’라고 쓰면서 魏王 曹丕를 指斥하지 않았으나 이때 魏主 曹叡를 지척한 것은 어째서인가. 조예를 심하다고 여긴 것이다. 毛氏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해서 잠깐 물어본 것은 떳떳한 情인데, 그녀에게 사약을 내렸으니 조예 또한 몹시 잔인하다. ≪資治通鑑綱目≫에 ‘그 后를 죽였다.’라고 쓴 것이 2번이고, ‘廢하여 죽였다.’라고 쓴 것이 3번인데, 남에게 살해당한 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魏嘗書殺夫人甄氏矣 不斥魏主丕 於是而斥魏主叡 何 甚叡也 毛氏不得與宴 薄有問焉 常情也 而賜之死 叡亦忍甚矣哉 綱目書殺其后二 廢而殺之三 爲人所殺不與焉]” ≪書法≫
역주8 魏營圓方丘, 南北郊 : “원형과 방형은 언덕과 못의 높고 낮음의 뜻이니, 이것이 옛 법이다. 그런데 圓과 方에 모두 ‘丘’자를 뒤에 붙였으니, 잘못이다. 이미 圓丘와 方丘를 세우고 또 南郊와 北郊가 있었으니, 더욱 잘못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비난한 것이다. 아래에 ‘晉나라가 원구와 방구의 제사를 남교와 북교로 합쳤다.’라고 썼으니, 이것은 晉나라를 좋게 여긴 것이다.[圓方 丘澤高下之義 古也 皆取諸丘 非矣 旣立圓方丘 又有南北郊 益非矣 故書譏之 下書晉幷圓方丘之祀於南北郊 善晉也]” ≪書法≫
역주9 (告)[攜] : 저본에는 ‘告’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攜’로 바로잡았다.
역주10 魏鑄銅人 起土山於芳林園 : “秦나라에서 金人을 주조했을 때에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 쓴 것은 어째서인가. 秦나라는 굳이 責할 것이 못 되지만 秦나라를 뒤이은 자는 책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靈帝가 銅人을 주조하면 썼고, 魏나라에서 銅人을 주조하면 쓴 것이다. ‘土山을 일으켰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백성을 수고롭게 함을 비난한 것이다. ‘토산을 일으켰다.’라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는데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토산을 일으켰다.’라고 쓴 것이 2번이다.[秦鑄金人不書 此其書 何 秦不足責 踵秦者可責也 故靈帝鑄銅人則書 魏鑄銅人則書 書起土山 何 譏勞民也 書起土山始此 終綱目 書起土山二]” ≪書法≫
“魏나라 曹叡가 基業을 이은 이후로 土木工事가 끊이지 않았고 이제 또다시 銅人을 주조하고 土山을 일으켰는데 ≪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책에 자세히 썼으니, 이는 후세에 사치하고 화려함을 좋아한 군주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魏叡承業以來 土木之工不已 今又鑄銅人 起土山 綱目皆詳書于冊 所以爲後世侈靡者之戒也]” ≪發明≫
역주11 承露盤은……보인다 :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4권 하 漢 武帝 元鼎 2년 鋼에 “봄에 柏梁臺를 건조하고 承露盤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나 그 아래 훈의에 승로반의 뜻이 해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同書 제5권 상 漢 武帝 元封 2년(B.C.109) 鋼에 “蜚廉觀, 桂觀, 通天莖臺를 만들었다.”라 하고 아래 訓義에 “臺 위에 承露盤이 있는데 仙人이 옥잔을 잡고 받들어 구름 위에 있는 이슬을 받게 하였다.[臺上 有承露盤 仙人掌擎玉杯 以承雲表之露]” 하였다.
역주12 구름……하니 : 漢 武帝가 元鼎 2년(B.C.115) 承露盤을 만든 故事를 말한 것으로, 높은 하늘의 깨끗한 이슬을 받아 옥가루와 함께 마시면 不老長生하여 神仙이 된다는 道敎의 말을 따른 것이다.
역주13 옛날에……하였는데 : ≪書經≫ 〈虞書 舜典〉에 “천자가 5년에 한 번 제후국을 巡守하면 제후들은 네 번 조회를 하였는데, 아뢰기를 말로써 하고 밝게 시험하기를 功으로써 하고 수레와 의복으로써 공에 대한 상을 내렸다.[五載一巡守 群后四朝 敷奏以言 明試以功 車服以庸]”라고 보인다.
역주14 밝게……제도입니다 : ≪書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