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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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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年(146)
병술년丙戌年(146)
孝質皇帝本初元年이라 夏四月 詔郡國하여 擧明經하여 詣太學하고 受業者 歲滿課試하여 拜官有差하다
나라 효질황제 본초孝質皇帝 本初 원년元年이다. 여름 4월에 군국郡國조령詔令을 내려 경학에 밝은 자를 천거해서 태학太學에 나오게 하고, 수업受業한 자를 해가 차면 시험하여 관직에 제수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自是 公卿 皆遣子受業하니 遊學增盛하여 至三萬餘生하다
】 이로부터 공경公卿들이 모두 아들을 태학太學에 보내어 수업受業하게 하니, 유학遊學하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3만여 생도에 이르렀다.
하다
】 바닷물이 넘쳤다.
◑閏六月 大將軍冀 進毒弑帝注+壽, 九歲.하고 白太后하여 策免太尉固하고 하다
】 윤6월에 대장군 양기大將軍 梁冀을 올려 황제를 시해하고注+향년이 9세였다. 태후太后에게 아뢰어서 태위 이고太尉 李固책면策免하게 하였다. 여오후蠡吾侯(여오후) 유지劉志를 맞아들여 즉위하게 하였는데, 태후가 여전히 임조臨朝하였다.
帝少而聰慧러니 嘗因朝會하여 目梁冀曰 此跋扈將軍也注+跋扈, 猶彊梁也. 爾雅 “山卑而大, 扈跋者, 不由蹊隧而行.” 言彊梁之人, 行不由正路, 山卑而大, 且欲跋而踰之, 故曰跋扈.라하니
】 황제는 나이가 어려도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일찍이 조회朝會를 하다가 양기梁冀를 지목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발호장군跋扈將軍이다.”注+발호跋扈”는 강량彊梁(고집스럽고 난독함)이란 말과 같다. ≪이아爾雅≫에 “이 낮고 크면, 호발扈跋하는 자는 길을 따르지 않고 뛰어 넘어간다.” 하였으니, 강량彊梁한 사람은 길을 감에 바른길을 따르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산이 낮고 크면 장차 뛰어 넘어가고자 하므로 발호跋扈라 한 것이다. 하였다.
冀深惡之하여 使左右 置毒於煮餠以進注+煮餠, 湯餠也.하니 帝苦煩甚하여 召李固어늘
양기梁冀가 매우 미워하여 좌우左右로 하여금 자병煮餠(떡국)에 을 넣어 올리게 하니注+자병煮餠탕병湯餠(떡국)이다., 황제가 이것을 먹고 몹시 괴로워하면서 이고李固를 불렀다.
固入前問한대 帝曰 食煮餠이러니 腹悶이라 得水 尙可活이로다
이고가 들어가 앞에서 물으니, 황제가 말하기를 “자병煮餠을 먹었는데 배가 더부룩하다. 물을 마시면 그나마 살 수 있겠다.” 하였다.
冀曰 恐吐하니 不可飮水라하더니 語未絶而崩커늘 固伏尸號哭하고 推擧侍醫注+伏尸號哭, 言伏地而號哭, 其狀如尸也. 推擧者, 劾擧其侍疾無狀, 而推究其姦也.하다
양기가 말하기를 “토할까 염려되니, 물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하였다. 이고가 그 앞에 엎드려서 흐느껴 하고는 시의侍醫를 탄핵하여 조사하였다.注+복시호곡伏尸號哭”은 땅에 엎드려 흐느끼고 함을 말한 것이니, 그 모양이 시신과 같다. “추거推擧”는 시의侍醫가 황제의 병환을 치료함에 형편이 없음을 탄핵하여 그 간악한 죄를 조사하는 것이다.
議立嗣할새 固與司徒胡廣, 司空趙戒 先與冀書曰 先世廢立 未嘗不詢訪公卿하여 廣求群議하여 令上應天心하고 下合衆望이라
】 후사를 세울 것을 의논할 적에, 이고李固사도 호광司徒 胡廣사공 조계司空 趙戒와 함께 먼저 양기梁冀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대先代에 황제를 폐하고 세울 적에 일찍이 공경公卿들에게 자문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구하여 위로는 천심天心하고 아래로는 중망衆望에 합하게 하였습니다.
傳曰 以天下與人하고 爲天下得人이라하니 至憂至重이니 可不熟慮리오
하였습니다. 〈후사後嗣를 정하는 것은〉 지극히 근심스럽고 지극히 소중하니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悠悠萬事 唯此爲大 國之興衰 在此一擧注+就冀而言, 萬事皆可付之悠悠, 至於立嗣, 關天下國家之大.니라 冀乃召百官入議하니
유유悠悠만사萬事 중에 오직 이것이 큰일입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이 한 번의 조처에 달려 있습니다.”注+양기梁冀의 입장에서 말하면 만사萬事를 모두 유유悠悠(한가로움)에 부칠 수 있지만, 후사를 세우는 일에 이르러서는 천하天下국가國家의 대사에 관계된다. 양기가 이에 백관百官을 불러 들여 회의하게 하였는데,
固, 廣, 戒及大鴻臚杜喬 皆以爲淸河王蒜 明德著聞하고 又屬最尊親하니 宜立爲嗣注+蒜於質帝爲兄, 尊也, 同出樂安王寵, 親也.라호되
이고와 호광, 조계와 대홍려大鴻臚두교杜喬는 모두 청하왕 유산淸河王 劉蒜이 밝은 이 드러나 알려졌고 또 친속親屬 중에 가장 높고 친하니 마땅히 그를 세워 후사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注+유산劉蒜질제質帝에게 이 되니 높고, 똑같이 낙안왕 유총樂安王 劉寵에게서 나왔으니 친한 것이다.
而中常侍曹騰 嘗謁蒜하니 不爲禮 由此惡之러라
그러나 중상시 조등中常侍 曹騰은 일찍이 유산을 뵌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유산이 자신을 예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산을 미워하였다.
平原王翼 旣貶歸河間 其父請分蠡吾縣以侯之注+翼父, 河間孝王開也. 蠡, 音禮. 蠡吾縣, 前漢屬涿郡, 時屬河間國.하다커늘 子志嗣하니
】 처음에, 평원왕 유익平原王 劉翼폄출貶黜되고 나서 하간河間으로 돌아가자, 그의 아버지가 여오현蠡吾縣을 나눠 로 봉해줄 것을 청하였다.注+유익劉翼의 아버지는 하간효왕 유개河間孝王 劉開이다. 이니 여오현蠡吾縣전한前漢에는 탁군涿郡에 속하였는데 이때에는 하간국河間國에 속하였다. 유익劉翼하자 아들 유지劉志가 뒤를 이으니,
太后欲以女弟妻志하여 徵到夏門亭注+妻, 去聲. 夏門, 卽夏城門, 門外有萬壽亭.이러니 帝崩이라 冀欲立之하다 又夜往說冀曰
태후太后가 자기의 여동생을 유지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여 하문夏門의 밖에 있는 만수정萬壽亭으로 불렀는데注+(시집보내다)는 거성去聲이다. 하문夏門은 바로 이니, 문밖에 만수정萬壽亭이 있다., 마침 황제가 하였다. 양기梁冀는 그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또 조등曹騰이 밤에 양기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將軍 累世椒房之親으로 秉攝萬機하여 賓客從橫하여 多有過差注+累世椒房, 謂恭懷后及太后也. 從, 子用切. 橫, 胡孟切.하니 淸河 嚴明이라 若果立이면 則將軍受禍矣
장군將軍은 여러 대에 걸친 초방椒房(황후皇后)의 친척으로 정사政事만기萬機를 잡고 있어서 빈객賓客들이 종횡從橫(방종하다)하여 잘못을 많이 저질렀습니다.注+누세초방累世椒房”은 공회황후恭懷皇后(화제和帝의 생모인 양귀인梁貴人)와 태후太后를 이른다. (방종하다)은 자용子用이고, (멋대로 하다)은 호맹胡孟이다. 청하왕淸河王은 성품이 엄격하고 분명하니, 만약 그가 과연 즉위한다면 장군將軍를 입을 것입니다.
不如立蠡吾侯 富貴 可長保也리이다 冀然其言하여 明日 重會公卿호되 冀意氣凶凶注+重, 直用切, 再也. 凶凶, 言意氣惡暴也.하니
여오후蠡吾侯를 세우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부귀富貴를 장구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기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다음 날 다시 공경公卿들과 회의하였는데, 양기의 뜻과 기운이 흉흉凶凶하니注+직용直用이니 거듭이다. “흉흉凶凶”은 의기意氣가 포악함을 말한 것이다.,
廣, 戒懾憚하여 皆曰 惟大將軍令이니이다 獨固, 喬守本議한대 冀厲聲罷會하고 說太后하여 策免固하고
호광胡廣조계趙戒가 두려워하고 꺼려서 모두 말하기를 “오직 대장군大將軍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고李固두교杜喬만 본래의 의논을 지키니, 양기가 큰 소리로 회의를 하고 태후를 설득하여 책서를 내려 이고李固를 면직시켰다.
迎蠡吾侯志하여 入南宮卽位하니 時年 十五 太后猶臨朝政하다
여오후 유지蠡吾侯 劉志를 맞이하여 남궁南宮에 들어와 즉위卽位하게 하니, 이때 나이가 15세였는데, 태후가 여전히 임조臨朝하였다.
大將軍掾朱穆 戒梁冀曰注+穆, 暉之孫也. 願將軍 專心公朝하여 割除私欲하고 廣求賢能하며 斥遠佞惡하고
대장군大將軍주목朱穆양기梁冀에게 경계하기를注+주목朱穆주휘朱暉의 손자이다. “원컨대 장군將軍은 오로지 공조公朝에 마음을 두어 사욕私欲을 제거하고 어진 자와 유능한 자를 널리 구하며 아첨하고 간악한 자들을 배척하여 멀리해야 합니다.
爲皇帝置師傅호되 宜得小心忠篤之士하여 與之參勸講授니이다 又薦种暠欒巴等호되 冀不能用하니라
황제皇帝를 위하여 사부師傅를 두되 마땅히 조심하고 충성스럽고 돈독한 선비를 얻어서 그와 더불어 강론講論하고 전수傳授하는 것을 함께 권면해야 합니다.” 하였고, 또 충고种暠난파欒巴 등을 천거하였으나, 양기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秋七月 葬靜陵注+陵, 在雒陽東南三十里.하다
】 가을 7월에 〈질제質帝를〉 정릉靜陵에 장례하였다.注+정릉靜陵낙양雒陽의 동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九月 追尊河間孝王하여 爲孝穆皇이라하고 蠡吾先侯曰 孝崇皇이라하고 冬十月 尊母匽氏하여 爲博園貴人注+匽, 音偃. 匽氏, 蠡吾侯之媵妾也. 博園, 博陵寢園也. 博陵, 孝崇皇之陵也.이라하다
】 9월에 하간효왕河間孝王(유개劉開, 환제桓帝)을 추존追尊하여 효목황孝穆皇이라 하고, 여오선후蠡吾先侯(유익劉翼, 환제桓帝)를 효숭황孝崇皇이라 하고, 겨울 10월에 황제의 어머니 언씨匽氏(언씨)를 높여 박원귀인博園貴人이라 하였다.注+이니, 언씨匽氏여오후蠡吾侯잉첩媵妾이다. 박원博園박릉博陵침원寢園이니, 박릉博陵효숭황孝崇皇이다.
역주
역주1 海水溢 : “海溢을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해일을 쓴 것이 여섯 번이다.[海溢始此 終綱目書海溢六]다” ≪書法≫
역주2 迎蠡吾侯志……太后猶臨朝 : “迎立하는 것은 국가의 큰 계책이니, 황제가 시해되었다고 썼으면 바로 蠡吾侯 劉志가 들어와 卽位했다고 쓰는 것이 옳고, 책서로 大臣을 파면한 것은 늘 있는 일인데 반드시 먼저 李固를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특별히 쓴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한 번뿐이다. 이고가 제거되지 않으면 여오후를 세우는 일이 끝내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며, 더구나 이고가 막 황제를 모시던 의원을 推擧하여 탄핵하였다. 이는 罪人(梁冀)이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니, 이고를 급급히 제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安漢公(王莽)이 황제를 시해하였을 때에는 ‘進毒’이라고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썼으니, 이는 이고를 면직시킨 이유를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質帝의 세대에 먼저 ‘策書로 太尉 李固를 면직시켰다.’고 썼으니 그런 뒤에 여오후가 설 수 있었으며, 陳 文帝가 죽었을 적에 먼저 ‘始興王이 伏誅되었다.’고 썼으니 그런 뒤에 太子 叔寶가 설 수 있었다. 이처럼 한 가지 일을 앞에 두고 한 가지 일을 뒤에 두었으니, ≪資治通鑑綱目≫의 뜻이 은미하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시해에 ‘進毒’이라고 쓴 것이 네 번이다.(梁冀, 胡太后, 大丞相 宇文泰, 冢宰 宇文護) 沖帝가 섰을 적에 太后가 臨朝했다고 썼으니, 質帝가 섰을 때에도 태후가 여전히 임조하였음을 알 수 있으므로 쓰지 않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임조를 쓰면서 ‘猶(여전히)’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질제는 즉위했을 때에 나이가 8세이니 태후가 임조하는 것이 굳이 비난할 것이 못 되지만, 여오후는 이때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임조를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여겨 ‘猶’라고 써서 비난한 것이다. 이 때문에 安帝가 즉위했을 때에 나이가 13세였는데도 태후가 여전히 임조하였으므로 ‘猶’라고 썼고(殤帝 延平 元年(106)), 桓帝가 즉위했을 때에 나이가 15세였는데도 태후가 여전히 임조하였으므로 ‘猶’라고 썼으니(이해), 모두 임조를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은 경우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猶臨朝’라고 쓴 것이 두 번뿐이다.[迎立 大策也 書帝弑矣 卽書蠡吾侯志入卽位 可也 策免大臣 常事耳 其必先書固 何 此特筆也 終綱目 一而已矣 固不去 則蠡吾之立 特未定也 況固方推擧侍醫 此罪人所甚懼者 宜其汲汲於去之 故安漢公之弑帝也 不書進毒 而此則書之 所以著免固之由也 是故質帝之世 先書策免太尉固 而後蠡吾侯可以立 陳文之殂 先書始興王伏誅 而後太子叔寶可以立 一先一後 綱目之意微矣 終綱目 弑書進毒四(梁冀 胡太后 大丞相泰 冢宰護) 沖帝之立 書太后臨朝矣 質帝旣立 太后猶臨朝可知也 不書 至是則書之而稱猶 何也 質帝立年八歲 太后臨朝 無足議也 蠡吾於是年十五矣 以爲可已而不已也 故書猶以議之 是故安帝立 年十三 而太后猶臨朝 則書猶(殤帝延平元年) 桓帝立 年十五 而太后猶臨朝 則書猶(是年) 皆可已而不已者也 終綱目 書猶臨朝二而已]” ≪書法≫ “元后(元帝의 后인 王氏)가 없었으면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하지 못했을 것이고, 章德皇后(竇皇后)가 없었으면 竇憲이 조정을 어지럽힐 수 없었을 것이다. 梁冀의 죄악은 진실로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것이나, 太后가 안에서 주장하지 않았다면 또한 반드시 이처럼 지극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質帝는 나이가 비록 어렸으나 급히 大臣을 불러서 자신이 먹은 음식물을 말했으니, 이는 그 心中이 총명하여 〈자신의 고통이〉 進毒의 禍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漢나라 조정의 여러 사람들은 음식을 올린 사람을 推求하고 병을 이룬 이유를 살펴 조사해서 기필코 賊을 찾아내지 못하였고, 바야흐로 聯名으로 써서 경계를 보였다가 賊(梁冀)에게 명령을 들었으니, 과연 무슨 짓인가. ≪春秋≫의 法에, 군주가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흉하고 패악한 양기를 진실로 쉽게 토벌하여 죽일 수는 없지만, 만일 힘이 이기지 못하면 그의 죄를 천하에 성토하다가 죽는 것도 괜찮고 떠나가는 것도 괜찮으니, 어찌 大行皇帝가 서거하였는데 鴆毒으로 禍를 입은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不問에 부칠 수 있단 말인가. 李固와 杜喬 등 여러 사람은 충성은 有餘하였으나 지식이 부족하여 ≪춘추≫의 의리를 밝히지 못해서 죽어서도 보탬이 되는 바가 없었다. 태후는 비록 반드시 시해에 간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罪人의 주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스스로 해명하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서 양기의 일에 대하여 첫 번째도 ‘태후에게 아뢰었다.’ 하였고, 두 번째도 ‘태후에게 아뢰었다.’ 하였고, 또 蠡吾侯가 이미 즉위한 뒤에는 ‘태후가 여전히 臨朝했다.’라고 썼으니, 태후가 비록 스스로 죄를 면하고자 하나 어찌 가능하겠는가.[無元后 則王莽不得以簒國 無章德 則竇憲不得以亂朝 梁冀之惡 固天地之所不容 然非太后主之於內 則亦未必能至此極 方是之時 質帝年雖幼穉 乃能促召大臣 言其所食之物 是其心中了了 明知進毒之禍 而漢朝諸人 不能推求進膳之人 考核致疾之由 必期得賊而後已 方且聯書示戒 聽命于賊 果何爲者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以國爲無人 以冀之凶悖 固未易以討殺 然使力不能勝 則聲其罪於天下 死之可也 去之可也 烏有大行晏駕 明知鴆毒致禍 而可付之不問者乎 李固杜喬諸人 忠有餘而識不足 不明春秋之義 死而無補 太后雖未必與聞乎弑 然身爲罪人之主 何以自解 綱目於梁冀之事 一則曰白太后 二則曰白太后 至於蠡吾旣立之後 又書太后猶臨朝 太后雖欲自免 其可得乎]” ≪發明≫
역주3 傳에……어렵다 : ≪孟子≫ 〈縢文公 上〉에 보이는 말이다.
역주4 夏城門 : 洛陽城 南門의 이름이다.(≪御批歷代通鑑輯覽≫ 권25) 夏는 四時에 있어서는 여름이 되고 方位에 있어서는 南方이 되므로 남문을 夏城門 또는 夏門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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