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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高祖疾甚에 召太子義符誡之曰 檀道濟雖有幹略하나 而無遠志하니 非難御之氣也요 徐羨之傅亮은 當無異圖요
謝晦數從征伐하여 頗識機變하니 若有同異면 必此人也라 又爲手詔曰 後世若有幼主어든 朝事一委宰相하고 母后不煩臨朝라하다
高祖清簡寡欲하고 嚴整有法度하여 被服居處 儉於布素하고 遊宴甚稀하고 嬪御至少러라
嘗得後秦高祖從女
하여 有盛寵
하여 頗以廢事
어늘 謝晦微諫
하니 即時遣出
注+秦王 廟號高祖.하다
財帛皆在外府
하여 內無私藏
注+藏, 祖浪切.이러니
嶺南嘗獻入筒細布 一端八丈
이어늘 惡其精麗勞人
注+揚雄蜀都賦曰 “布則蜘蛛作絲, 不可見風, 筩中黃潤, 一端數金.” 言其細也.하여 即付有司彈太守
하며 以布還之
하고 竝制嶺南
하여 禁作此布
하다
公主出適에 遣送不過二十萬이요 無錦繡之物하니 內外奉禁하여 莫敢爲侈靡러라
性不信奇恠하여 微時多符瑞러니 及貴에 史官審以所聞이라도 拒而不答이러라
義符即位하니 年十七이라 立妃司馬氏爲皇后하니 后는 晉恭帝女海鹽公主也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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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魏主聞宋高祖克長安하고 大懼하여 遣使請和한대 自是歲聘不絶이러니 及高祖殂에 沈範等奉使在魏라가 還에 及河러니 魏主遣人追執之하고 議發兵取洛陽虎牢滑臺하다
崔浩諫曰 陛下不以劉裕歘起
하여 納其使貢
하고 裕亦敬事陛下
注+欻, 許勿切. 欻起, 暴起也.러니 今乘喪伐之
면 雖得之
라도 不足爲美
요
且國家今日에 亦未能一擧取江南也요 而徒有伐喪之名이니 竊爲陛下不取커늘 臣謂宜遣人吊祭하고 存其孤弱하고 恤其凶災하여 使義聲布於天下하면 則江南不攻自服矣요
況裕新死하고 黨與未離하니 不如緩之하여 待其彊臣爭權하여 變難必起然後에 命將出師면 可以兵不疲勞하고 坐收淮北也니이다
魏主曰 劉裕乘姚興之死而滅之하니 今我乘裕喪而伐之하면 何爲不可리오하니
浩曰 不然하니이다 姚興死에 諸子交爭이라 故裕乘釁伐之어니와 今江南無釁하니 不可比也니이다
魏主不從하고 假司空奚斤節하여 使督將軍周幾公孫表伐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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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에 將發에 公卿議以攻城略地何先하니 奚斤欲先攻城한대 崔浩曰
南人長於守城하니 昔苻氏攻襄陽에 經年不拔하니 今以大兵坐攻小城하니 若不時克이면 挫傷軍勢니 敵得徐嚴而來면 我怠彼鋭니 此危道也니라
不如分軍略地하고 至淮爲限하여 列置守宰하고 收斂租穀이니 則洛陽滑臺虎牢更在軍北이라 絶望南救하여 必沿河東走요 不則爲囿中之物이니 何憂其不獲也오하니
公孫表固請攻城한대 魏主從之하다 斤等帥步騎三萬하여 濟河營於滑臺之東하니 宋司州刺史毛德祖遣翟廣等將步騎三千救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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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宋나라 高祖가 병이 심해지자 太子 劉義符를 불러 훈계하기를 “檀道濟는 비록 재간과 책략이 있으나 심원한 뜻이 없으니 부리기 어려운 기질이 아니다. 徐羨之와 傅亮은 당연히 반역을 도모함이 없을 것이다.
謝晦가 자주 정벌에 따라다녀 임기응변의 책략을 제법 알고 있으니, 만약 이변이 있게 된다면 반드시 이 사람이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고, 또 손수 조서를 써서 말하기를 “후세에 만약 어린 군주가 있게 된다면 조정의 일은 한결같이 재상에게 맡기고, 황태후(母后)가 번거롭게 臨朝(攝政)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서선지․부량․사회․단도제가 함께 顧命을 받았다. 송 고조가 마침내 殂하였다.
송 고조는 청렴하고 검약하며 욕심이 적었고, 엄정하여 법도가 있어서 옷을 입고 거처하는 것이 평민보다 검소하였고, 유람하거나 잔치를 여는 일이 아주 드물었으며, 妃嬪과 궁녀가 매우 적었다.
일찍이 後秦 高祖의
注+① 後秦의 왕 姚興은 廟號가 高祖이다. 조카딸을 얻어 매우 총애하여 그로 인해 정무가 폐기되었는데, 謝晦가 은밀히 간언하자 그녀를 즉시 내보냈다.
재화와 비단은 모두 外府(國庫)에 있고 안에는 사사로이 저장해둔 것이
注+② 藏(저장물)은 祖浪의 切이다. 없었다.
嶺南에서 일찍이 대나무 통에 넣은 가는 베를 바치니,
注+③ 揚雄의 〈蜀都賦〉에 “베는 거미가 실을 짠 것과 같아 바람에 일렁임을 볼 수 없네. 통 속의 黃潤(고운 베 이름)은 1端에 몇 金이로다.”라고 하였으니, 베의 가는 정도를 말한 것이다., 베가 정밀하고 화려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을 싫어하여 즉시 有司에게 회부하여 太守를 탄핵하게 하였으며, 베를 돌려보내고 아울러 영남에 명을 내려 이런 베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공주가 시집을 가는 데 보내는 혼수가 20만을 넘지 않았고, 비단에 수놓은 물품이 없었다. 안팎에서는 금령을 받들어 감히 사치하고 낭비하는 자가 없었다.
성격이 기괴한 것을 믿지 않아서, 미천했을 때에 상서로운 징조가 많았는데 귀하게 되자 史官이 들은 것을 살피려 하여도 거절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유의부가 즉위하니 나이가 17세였다. 太子妃 司馬氏를 세워서 황후로 하였다. 황후는 晉 恭帝의 딸 海鹽公主이다.
7월에 고조를 初寧陵에
注+④ 初寧陵은 丹陽 建康縣 蔣山에 있다.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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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主가
을 복용하였는데, 몇 년을 이어서 독성이 발작하였고 災異가 여러 차례 나타나니, 환관을 파견하여 崔浩에게 몰래 묻기를
“근래 일식이
에 있었고, 짐의 병이 일 년이 넘도록 낫지 않으니 갑자기 죽게 될까 걱정이 된다. 여러 아들이 모두 어리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최호가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니, 장차 회복하실 것입니다. 부득이 말을 해야 한다면 어리석은 말을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聖代의 聖君(道武帝)께서 황제를 칭하셨을 때에 황태자를 높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永興의 초기에 사직이 위태로울 뻔하였습니다.
注+① 永興은 魏主가 처음 즉위했을 때의 연호이다. 당시 道武帝(拓跋珪)가 시해를 당하고, 拓跋嗣가 아직 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 마땅히 東宮을 속히 세우셔서 현명한 公卿을 뽑아서 師傅로 삼고, 측근의 신뢰할 신하를 빈객과 벗으로 삼으셔서, 안으로는 萬機를 총괄하고 밖으로는 군사업무를 다스리게 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폐하께서는 느긋하게 지내면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고 정신을 수양하며
注+② 頤는 또한 기른다는 뜻이다. 수명을 보양할 수 있습니다.
성상께서 돌아가신 뒤에 나라에 성숙한 군주가 있어 백성들이 돌아갈 곳이 있게 되면 간악한 사람은 야망을 멈추고, 재앙이 저절로 생겨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皇子 拓跋燾는 나이가 장차 周星(12세)이
注+③ 周星은 木星이 12년에 한 번 하늘을 도는 것이다. 되려 하는데 사리에 밝고 온화하니, 장자를 세우는 것은 예의 큰 법도입니다.”라고 하였다.
長孫嵩
魏主가 다시 장손숭에게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장자를 세우는 것은 순리이고 현명한 사람을 두면 사람이 복종하는데 탁발도는 장자이고 또 현명하니, 하늘이 명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따라 탁발도를 세워 태자로 삼아서 그에게 正殿에 머물면서 조정을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副主(太子)로 삼았다. 장손숭과 奚斤․安同을 左輔로 삼고 東廂(廟堂의 동쪽 행당)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게 하고, 최호와 穆觀․丘堆를 右弼로 삼고 西廂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게 하고, 백관이 모두 자신들의 직책을 총괄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魏主가 자리를 피하여 西宮에 머물면서 때때로 숨어서 엿보았는데
注+④ 〈“隱而窺之”는〉 스스로 몸을 은폐하고 엿보는 것이다., 그가 결단하는 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侍臣에게 말하기를
“장손숭은 덕망을 쌓은 원로대신이니 4代에 걸쳐 섬겨서 공로가 사직을 보존하고
注+⑤ 長孫嵩은 昭成帝와 道武帝, 明元帝와 太子 拓跋燾를 섬겼으니, 4대가 된다., 해근은 말을 잘하고 지모가 있어서 명성이 원근에 났고, 안동은 세속의 사정을 잘 알아 일에 밝고 익숙하며,
목관은 정무의 요점에 통달하여 나의 뜻을 알고, 최호는 견문이 넓고 잘 기억하여 하늘과 사람을 정밀하게 살피고, 구퇴는 비록 큰 쓰임새는 없으나 공적인 일에서 專心으로 신중하게 한다. 이 여섯 명으로 태자를 보좌하게 하고, 내가 너희들과 함께 사방의 지역을 순행하여 반역자를 정벌하고 복종하는 자를 편안하게 대하면
注+⑥ 柔는 편안하다는 뜻이다. 천하에서 뜻을 얻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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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魏主가 宋나라 高祖가 長安에서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두려워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청하였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交聘이 끊이지 않았다. 고조가 殂하자, 沈範 등이 使命을 받들고 北魏에 있다가 돌아올 적에 황하에 이르렀는데, 魏主가 사람을 보내어 쫓아가서 그들을 체포하고, 군사를 일으켜 洛陽․虎牢․滑臺를 점령할 것을 논의하였다.
崔浩가 간언하기를 “폐하께서는 劉裕가 갑자기 흥기하였다고
注+① 欻(갑자기)은 許勿의 切이다. “欻起”는 갑자기 일어난다는 뜻이다. 생각하지 않으셔서 그의 사신과 공물을 받아들였으며, 유유 역시 폐하를 공경히 섬겼습니다. 지금 喪事를 틈타서 정벌하면 비록 성공한다 해도 아름다운 일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우리나라도 지금 일거에 江南을 탈취할 수 없고, 다만 상중에 공격하였다는 惡名만 갖게 될 것이니 삼가 폐하를 위하여 옳게 여기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사람을 파견하여 조문하며 제사 지내고 어린 상주를 위로하고 흉악한 재해를 구휼하여 의롭다는 명성을 천하에 퍼지게 하면 江南은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게다가 유유가 막 죽었고 그 당여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으니, 〈군사를 내는 것을〉 천천히 하여 그 강한 신하들이 권력을 다투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뒤에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병사들이 피로하지 않고도 앉아서 淮水 이북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유유가 죽은 틈을 타서 정벌하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자,
최호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요흥이 죽자 아들들이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유유가 그 틈을 타서 정벌하였습니다. 지금 강남은 틈이 없으니 비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따르지 않고, 司空 奚斤에게
장군 周幾와 公孫表를 감독하게 하여 宋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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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10월에 출발하려 할 때에 공경들이 성을 공격하는 것과 땅을 빼앗는 것 중에서 무엇을 먼저 할지를 의논하였다. 奚斤이 먼저 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崔浩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방 사람은 성을 지키는 것에 長技가 있습니다.
지금 많은 군사를 가지고 눌러앉아 작은 성을 공격하는데 만약 제때에 이기지 못하면 군대의 기세가 꺾이고 손상될 것입니다. 적이 서서히 전열을 정비하고 쳐들어오면 우리는 해이하고 저들은 날랠 것이니, 이것은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군대를 나누어 땅을 경략하고 淮水까지 한계를 삼아 수령을 차례로 배치하여 조세를 거둬들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洛陽․滑臺․虎牢가 또한 우리 군대의 북쪽에 있게 되어 남쪽의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끊겨 반드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달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갇힌 물건이 될 것이니, 어찌 그것을 잡지 못할까 두려워하겠습니까.”
공손표가 굳이 성을 공격하겠다고 요청하자, 魏主가 이를 따랐다. 해근 등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황하를 건너가서 활대의 동쪽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宋나라는 司州刺史 毛德祖가 翟廣 등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