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綱] 한漢나라 세종世宗효무황제孝武皇帝원광元光 원년이다.注+장성長星이 나타났기 때문에 원광元光으로 개원改元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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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겨울 11월에 처음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효렴孝廉(효성스럽고 청렴한 사람) 각 1명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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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동중서董仲舒의 말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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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장군將軍이광李廣과 정불식程不識을 보내서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 변방에 주둔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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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광李廣과 정불식程不識이 모두 군대를 거느리는 것으로 당시에 이름이 났다.
이광은 행군 시에 부部와 오伍를 나누고 진지陣地를 구축하지 않았으며, 수초水草가 좋은 곳을 잘 이용하여 머무니 군사들마다 편하게 여겼고,注+부部는 행군 시에 각기 나눈 부분部分(부대部隊)이 있는 것이고, 오伍는 5명을 오伍라 한다. 부部에는 교위校尉를 두고, 오伍에는 오장伍長을 둔다. 행行(항렬)은 호랑胡郞의 절切이다. 진陳(진지)은 진陣으로 읽는다. 편便은 빈면頻面의 절切이니, 편안하고 이롭게 여기는 뜻이다.조두刁斗를 쳐서 스스로 경계하지 않았으며, 막부幕府에서는 문서를 간략히 하였다.注+조刁는 음이 초貂이다. 옛날 행군 시에는 동銅으로 초鐎(세 발 달린 냄비)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니, 1두斗를 담을 수 있다. 낮에는 밥을 취사하는 데 사용하고, 밤에는 순찰할 때에 가지고 다니며 치니, 조두刁斗라고 불렀다. 초鐎는 음이 초焦이다.
그러나 또한 멀리까지 척후를 보내어 살펴서 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注+척斥은 헤아리는 것이고 후候는 살피고 멀리 바라보는 것이니, “척후斥候”는 험한 곳을 답사하고 도적을 살피는 것이다.
정불식은 부部와 곡曲과 항오行伍를 바르게 하며, 진지를 구축하고 조두를 치며, 군부軍簿를 처리하는 것을注+부簿은 문서이다. 매우 분명하게 해서 군대가 휴식을 할 수 없었지만 또한 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흉노匈奴는 이광의 방략方略을 두려워하였으며, 사졸들도 대부분 이광을 따르는 것을 즐겁게 여겼고 정불식을 따르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겼다.注+고苦는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역주2詔擧賢良文學 親策之 :
“‘親’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난한 것이다. 무엇을 비난한 것인가? 황제가 몸소 친히 策問했는데도 얻은 사람이 公孫弘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것을 훌륭한 사람을 잃었다고 여겼으므로 비난한 것이다. 이 때문에 文帝가 책문하여 鼂錯를 얻었으면 ‘親’이라고 쓰고, 武帝가 책문하여 公孫弘을 얻었으면 ‘親’이라고 썼고, 唐나라 文宗이 선비들을 책문하여 劉蕡을 잃었으면 ‘親’이라고 썼으니,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함을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친히 책문했다.[親策]’고 쓴 것은 3번뿐이다.[書親 何 譏也 何譏 躬親策之而所得者 公孫弘耳 以是爲失人 故譏之 是故文帝策士而得鼂錯 則書親 武帝策士而得公孫弘 則書親 文宗策士而失劉蕡 則書親 譏不知人也 終綱目 書親策三而已]”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