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綱] 봄 3월에 魏나라는 병사를 보내어 吳나라의 항복한 장수를 맞아들이려고 하다가 가기 전에 중지하였다.
目
[目] 魏나라 襄陽太守胡烈이 말하기를 “吳나라 장군 鄧由 등 18개 주둔군이 함께 歸化하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볼모를 보내왔습니다.”注+魏나라 武帝(曹操)가 荊州를 평정하고 南郡의 編 이북과 南陽의 山都를 나누어 襄陽郡을 만들었다. 胡烈은 胡奮의 아우이다. 質(인질)은 음이 致이다.라고 하였는데, 조칙을 내려 王基에게 여러 군대를 편성하여 바로 沮水에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注+沮는 千余의 切이다. ≪水經≫에 “沮水는 漢中房陵縣淮山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臨沮縣 경계를 지나고, 다시 동남쪽으로 當陽縣 북쪽을 지나가고, 다시 동남쪽으로 枝江縣을 지나고, 동남쪽으로 長江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왕기는 司馬昭에게 편지를 보내어 등유 등의 의심스러운 상황을 말하고 또 “夷陵의 동서는 길이 모두 험애하고 대나무와 나무들이 울창합니다. 갑자기 군대가 험요한 지역이 있게 되면 弓弩와 말이 힘을 펼 수 없으니 이 일은 위험합니다.注+卒(갑자기)은 猝로 읽으니, 〈“弩馬不陳”은〉 갑자기 적군이 험요한 지역에 복병을 두어 요격하면 弓弩와 말이 그 힘을 펼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嘉平(魏나라 曹芳의 연호) 이래로 누차 국내에 난리가 있었으니注+〈“累有內難”은〉 曹爽 형제가 이미 죽었고 누차 임금을 폐하고 세운 일이 있고, 毌丘儉, 諸葛誕이 서로 이어서 병란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難(환난)은 去聲이다. 지금에 맞는 일은 마땅히 힘써 社稷을 안정시켜서 위아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농업에 힘써서 백성들을 품어주는 것이지,
군대를 동원하여 외변의 이익을 구하는 일은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하니, 사마소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등유 등은 과연 항복하지 않았다.
綱
[綱] 겨울에 董厥과 諸葛瞻을 將軍으로 삼아 함께 尙書의 일을 의논하게 하고, 樊建을 尙書令으로 삼았다.
目
[目] 이때에 中常侍黃皓가 권세를 부리니 董厥‧諸葛瞻이 모두 바로잡지 못하였다. 士大夫들이 대부분 황호에게 붙었으나 오직 樊建만이 황호와 왕래하지 않았다.
秘書令郤正이 오래도록 內職에 있으면서 황호와 집이 이웃하였으나 응대하는 30여 년 동안 담박하게 자신을 지켜서 스스로 독서를 즐기니,
황호에게 총애를 받지도 않고 또한 미움을 받지도 않았으므로 官秩이 六百石을 넘지 못하였으나 그 재앙을 당하지 않았다.注+秘書令은 秩이 六百石이다.
皇帝(劉禪)의 아우 甘陵王劉永이 황호를 미워하니, 황호가 유영을 헐뜯어서 10년 동안 朝見하지 못하게 하였다.
吳나라 사신 薛珝(설후)가 내빙하였다가注+薛珝는 薛綜의 아들이다. 珝는 況羽의 切이다. 귀국하였을 때 吳主(孫休)가 蜀漢 정치의 잘잘못을 묻자 대답하기를 “군주는 암매하여 자기의 잘못을 모르고 신하는 자신만 보전하여 죄에서 벗어나기를 구합니다.
그 조정에 들어갔을 때 바른말을 듣지 못하였고, 그 들을 지날 때 백성들은 모두 부황이 들은 얼굴빛이었습니다.
[目] 鮮卑의 索頭部가 대대로 북쪽 변방에 살면서 남방의 中夏(中國)와 교류하지 않았다.注+索頭는 鮮卑의 別部이니, 姓은 拓跋氏(탁발씨)이다. 그 풍속은 새끼를 꼬듯이 머리를 땋았기 때문에 索頭라고 불렀다. 魏收가 말하였다. “北魏의 선조가 黃帝에서 나왔고, 황제의 아들은 昌意이고, 창의의 작은아들이 봉지를 北國으로 받았는데, 大鮮卑山이 있기 때문에 鮮卑로 호칭을 하였다.” 하였다.可汗拓跋毛에 이르러 비로소 강대해져서 통합한 나라가 36국이고, 大姓이 99성이었다.注+可汗은 음이 榼寒이니, 북방의 尊稱으로 漢나라 때의 單于와 같다. 오랑캐 풍속에는 하늘을 可汗이라고 부른다. 毛는 그 이름이고, 뒤에 追尊하여 成皇帝라고 하였다. 그 뒤 5世可汗拓跋推寅에 이르러 남쪽 大澤으로 옮기고,注+拓跋毛가 죽자 拓跋貸가 즉위하고, 탁발대가 죽자 拓跋觀이 즉위하고, 탁발관이 죽자 拓跋樓가 즉위하고, 탁발루가 죽자 拓跋越이 즉위하고, 탁발월이 죽자 拓跋推寅이 즉위하였다. 뒤에 追尊하여 宣皇帝라고 하였다. 또다시 7世가 지나 可汗拓跋隣에 이르러 그 형제 7인과 族人乙旃氏(을전씨), 車惃氏(차곤씨)에게 部族의 무리들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여 10族으로 만들었다.注+拓跋推寅이 죽자 拓跋利가 즉위하고, 탁발리가 죽자 拓跋俟가 즉위하고, 탁발사가 죽자 拓跋肆가 즉위하고, 탁발사가 죽자 拓跋機가 즉위하고, 탁발기가 죽자 拓跋蓋가 즉위하고, 탁발개가 죽자 拓跋儈가 즉위하고, 탁발쾌가 죽자 拓跋隣이 즉위하였다. 뒤에 追尊하여 獻皇帝라고 하였다. 車는 昌遮의 切이다. 惃은 胡昆‧公渾‧古本 3개의 切이다. 살펴보면 ≪魏書≫ 〈官氏志〉에 “拓跋毛가 나라를 통합하여 99姓이 있었고, 탁발린에 와서는 나라 사람들을 일곱으로 나누어 여러 형제들에게 각각 다스리게 하였다. 〈탁발린이〉 그 백성을 나누어 첫째 형을 紇骨氏로 삼았는데 뒤에 胡氏로 바꾸었고, 둘째 형을 普氏로 삼았는데 뒤에 周氏로 바꾸었고, 셋째 형을 拔拔氏로 삼았는데 뒤에 長孫氏로 바꾸었고, 첫째 아우를 達奚氏로 삼았는데 뒤에 奚氏로 바꾸었고, 둘째 아우를 伊婁氏로 삼았는데 뒤에 伊氏로 바꾸었고, 셋째 아우를 丘敦氏로 삼았는데 뒤에 丘氏로 바꾸었고, 넷째 아우를 侯氏로 삼았는데 뒤에 亥氏로 바꾸었다. 일곱 씨족이 일어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叔父의 아들을 명하여 乙旃氏를 삼았는데 뒤에 叔孫氏로 바꾸었고, 또 疏族(소원한 씨족)을 명하여 車惃氏를 삼았는데 뒤에 車氏로 바꾸었다. 무릇 托拔氏(拓跋氏)가 일어난 것은 10姓이니, 百世토록 서로 혼인하지 않았다.” 하였다. 탁발린이 늙게 되자 지위를 그 아들 拓跋詰汾에게 주어 남쪽으로 가서 匈奴의 옛 땅에 살게 하였다.注+詰汾은 바로 元魏(北魏)의 聖武皇帝 이름이다. 탁발힐분이 죽자, 拓跋力微가 즉위하여 다시 옮겨 定襄의 盛樂에 살면서 部衆이 점점 많아졌다. 여러 部族들이 두려워하여 승복하였다.注+拓跋詰汾이 일찍이 산과 늪에서 사냥을 할 적에 홀연히 휘장을 친 수레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내려오자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는데 스스로 칭하기를 天女라고 하면서 천명을 받아 짝이 된다고 하였다. 해가 뜨자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일 년 週期가 될 때 다시 여기에서 만나자고 하고, 말을 마치자 헤어졌다. 일 년이 되어 〈탁발힐분이〉 예전에 사냥하던 곳에 갔는데 과연 천녀를 만났고 〈천녀는〉 낳은 아들을 탁발힐분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그대의 아들이니 當代에 帝王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떠나갔다. 바로 拓跋力微이니 뒤에 追尊하여 神元皇帝라고 하였다. “盛樂”은 ≪後漢書≫ 〈郡國志〉에 “成樂”으로 쓰였다. 漢나라 定襄郡에 成樂縣이 있는데 後漢 때에는 雲中郡에 속하였다. 建安 20년(215)에 雲中, 定襄, 五原, 朔方을 합병하여 新興郡을 만들어 郡은 다만 1縣만 두어 新興에 속하였고, 盛樂 옛 縣은 황량한 외변에 버려두었으므로 力微가 그곳에서 살 수 있었다. 이에 이르러 탁발력미가 비로소 그 아들 拓跋沙漠汗을 보내어 魏나라에 공물을 바치니 그대로 붙잡아두어 인질로 삼았다.
역주
역주1(列)[烈] :
저본에는 ‘列’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烈’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2(焚)[爽] :
저본에는 ‘焚’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제비와……모른다 :
화가 닥쳐오는 줄도 모르고 편안히 지낸다는 뜻이다. ≪孔叢子≫ 〈論勢〉의 “굴뚝에 불길이 치솟아 기둥과 처마가 불타려 하는데 제비와 참새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화가 자기에게 이르는 줄도 모른다.[竈突炎上 棟宇將焚 燕雀顔色不變 不知禍之己也]”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4(珠)[綜] :
저본에는 ‘珠’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綜’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鮮卑索頭 貢質于魏 :
“索頭가 처음 ≪資治通鑑綱目≫에 보인 것이다.[索頭 始見綱目]” ≪書法≫
역주6(曰)[自] :
저본에는 ‘曰’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自’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