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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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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泰始六年이요 魏皇興四年이라
春正月 宋定南郊明堂歲祀하다
間二年 一祭南郊하고 間一年 一祭明堂하다
注+提要作宋太子昱納妃江氏, 江氏, 智淵孫女也.하다
宋納太子妃할새 令百官皆獻하니 始興太守孫奉伯 止獻琴書한대 宋主大怒하여 封藥賜死러니 既而原之하다
魏擊吐谷渾敗之하다
◑夏六月 宋以王景文爲僕射揚州刺史하다
宋主宮中大宴할새 裸婦人而觀之하니 王后以扇障面한대
上怒曰 外舍寒乞 今共爲樂하니 何獨不視注+外舍, 謂皇后家也. 寒乞, 謂寒微乞丐, 言貧賤也. 后曰 爲樂之事 其方自多 豈有姑姊妹集而以此爲笑乎 外舍之樂 雅異於此니이다
上大怒하여 遣后起하니 后兄景文聞之曰 后在家劣弱이러니 今段 遂能剛正如此로다
道成 在軍中久하고 民間或言其有異相注+齊書言 “道成姿表奇異, 龍顙鍾聲, 鱗文遍體.”이라 宋主疑之하여 徵爲黃門侍郎하니 道成懼하여 不欲內遷이나 而無計得留러니
參軍荀伯玉 敎其遣數十騎入魏境하니 魏果遣遊騎行境上注+行, 去聲.이어늘 道成以聞한대 宋主乃使道成復本任하다
宋立總明觀하다
置祭酒一人 儒玄文史學士各十人注+文帝元嘉十五年, 立儒․玄․文․史四學, 今置總明觀祭酒以總之.하다
柔然侵魏어늘 魏主引群臣議之한대 僕射南平公目辰曰注+目辰, 猗㐌之後. 車駕親征이면 京師危懼 不如持重固守
虜懸軍深入하여 糧運無繼 不久自退리니 遣將追擊이면 破之必矣리이다
給事中張白澤曰注+白澤, 袞之孫也. 蠢爾荒愚 輕犯王略注+略, 封界也.하니 若鑾輿親行이면 必望麾崩散이라 豈可坐而縱敵이리오 以萬乘之尊으로 嬰城自守 非所以威服四夷也니이다 魏主從之하니 柔然大敗
乘勝逐北하여 降斬數萬이요 所獲馬仗 不可勝計 旬有九日 往返六千里하다
魏百官不給祿하니 少能以廉白自立者 魏主詔吏受所監臨羊一口酒一斛者하고 與者從坐하고 有能糾告尙書以下罪狀者 以所糾官授之하니
白澤 諫曰 昔周之下士 尙有代耕之祿이어늘 今皇朝貴臣 服勤無報하니 若使受禮者刑身하고 糾之者代職注+受禮, 謂受羊酒之禮. 刑身, 謂刑加其身.이면
臣恐姦人闚望하고 忠臣懈節하니 求簡而民安이라도 不可得也注+闚, 與窺同. 請依律令舊法하여 仍班祿以酬廉吏하노이다 魏主乃止하다
魏殺其靑州刺史慕容白曜하다
魏乙渾專政 白曜附之러니 魏主追以爲憾하여 誅之하다
宋討臨海賊平之하다


나라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태시泰始 6년이고, 북위北魏 현조顯祖 헌문제献文帝 탁발홍拓跋弘 황흥皇興 4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가 남교南郊명당明堂세사歲祀(해마다 일정한 시간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하였다.
[] 2년을 사이에 두고 한 번씩 남교南郊에 제사 지내도록 하고, 1년을 사이에 두고 한 번씩 명당明堂에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 나라가 태자비太子妃 강씨江氏를 맞아들였다.注+① ≪提要≫에는 “宋나라 太子 劉昱이 태자비 江氏를 맞아들였는데, 江氏는 江智淵의 손녀이다.”라고 되어 있다.
[] 나라가 태자비를 들이면서 백관들에게 모두 물품을 바치게 하였는데, 시흥태수始興太守 손봉백孫奉伯이 겨우 거문고와 책을 바치니, 송주宋主(유욱劉彧)가 크게 노하여 독약을 보내어 죽음을 내렸는데, 얼마 뒤에 용서해주었다.
[] 북위北魏토욕혼吐谷渾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 여름 6월에 나라가 왕경문王景文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 송주宋主(유욱劉彧)가 궁중에서 큰 연회를 베풀어 궁녀들의 옷을 벗기고 보자, 황후가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미천한 처가 식구들이注+① “外舍”는 王皇后의 친정을 말한다. “寒乞”은 한미하고 구걸하는 것을 말하니, 가난하고 미천하다는 뜻이다. 지금 함께 즐기고 있는데 어찌하여 혼자만 보지 않는 것이오?”라고 하니, 황후가 말하기를 “즐기는 일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 어찌 고모와 자매가 모여 있는데, 이런 일을 웃음거리로 삼는 것입니까? 친정에서 즐기는 일은 본래 이와는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이 화가 나서 황후를 일으켜 내보냈는데, 황후의 오빠 왕경문王景文이 그 일을 듣고는 말하기를 “황후가 집에 있을 때는 나약했는데, 지금에는 드디어 이처럼 강직하고 올바르게 되었구나.”라고 하였다.
[] 나라가 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 소도성蕭道成황문시랑黃門侍郎에 임명하였는데, 이윽고 본래 직임으로 복귀시켰다.
[] 소도성蕭道成이 오랫동안 군대에 몸을 담고 있었고, 민간에서 소도성이 기이한 관상을注+① ≪南齊書≫에 “蕭道成은 용모가 기이하여 용의 이마와 종소리 같은 목소리를 가졌으며, 온 몸에 비늘 문양이 있다.”라고 하였다. 지니고 있다고 하니, 송주宋主가 의심하여 불러들여 황문시랑黃門侍郎에 임명하였는데, 소도성이 두려워 조정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지만 군대에 머물러 있을 계책이 없었다.
참군參軍 순백옥荀伯玉이 소도성에게 수십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북위北魏의 경계 지역으로 들여보내게 하자, 북위北魏에서 과연 유격 기병을 파견하여 경계 지역을 순찰하였다.注+② 行(순행하다)은 去聲이다. 소도성이 보고를 하자 송주宋主가 본래 임무로 복귀시켰다.
[] 나라가 총명관總明觀을 세웠다.
[] 좨주祭酒 1명과 유학儒學현학玄學문학文學사학史學학사學士를 각각 10명씩 두었다.注+① 宋 文帝 元嘉 15년(438)에 儒學․玄學․文學․史學의 四學을 설립하였는데, 지금 總明觀 祭酒를 두어 총괄하게 한 것이다.
[] 유연柔然북위北魏를 침략하자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격퇴하였다.
[] 유연柔然북위北魏를 침략하자,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가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논의를 하였는데, 복야僕射 남평공南平公 탁발일신拓拔目辰注+① 拓跋目辰은 拓跋猗㐌(탁발의타)의 후예이다. 말하기를 “황제께서 직접 정벌에 나서면 경사京師가 위태롭고 두려워할 것이니, 진중하게 견고히 지키는 것만 못합니다.
고립무원한 오랑캐의 군대가 깊숙이 들어와 군량을 계속 조달하지 못하여 오래지 않아 스스로 물러갈 것이니, 장수를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급사중給事中 장백택張白澤注+② 張白澤은 張袞의 손자이다. 말하기를 “무지하고 거칠고 어리석은 자들이 왕의 영토를注+③ 略은 국경의 경계이다. 가벼이 보고 침략하였으니, 만약 황제께서 친히 나서신다면 황제의 깃발만 바라보고도 무너질 것입니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적들이 제멋대로 날뛰게 둘 수 있겠습니까. 만승萬乘의 존엄으로 성곽을 둘러싸고 방어만 하는 것은 사방의 오랑캐를 복종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그의 말을 따르자, 유연柔然이 대패하였다.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였는데 수만 급을 참수하였고, 포획한 말과 무기를 헤아릴 수 없었다. 19일 동안 오고간 거리가 6천여 리였다.
당시에 북위北魏의 모든 관리들에게는 녹봉을 주지 않았는데, 청렴결백으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 위주魏主가 조서를 내려 “관리로서 담당하는 백성들로부터 양 1마리, 술 1곡 이상을 받은 자는 사형에 처하고 준 사람도 따라서 연좌시켜 판결하고, 상서尙書 이하의 죄상을 밝혀서 규명하여 보고한 경우에는 죄상이 드러난 관료의 직책으로써 고발한 자에게 주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장백택이 간언하기를 “옛날에 나라의 하사下士도 항상 경작을 하지 못하는 대신 봉록을 받았습니다. 지금 황조皇朝의 존귀한 신하가 열심히 복무를 하여도 대가가 없으니, 만약 예물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몸에 형벌을 받게 하고注+④ “受禮”는 양과 술의 예물을 받는 것이다. “刑身”은 몸에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것을 밝히는 자에게 그 관직을 대신하게 한다면
신은 간사한 사람들이 기회를 엿보고注+⑤ 闚(엿보다)는 窺와 같다. 충신들은 절개를 느슨히 할까 두려우니, 일을 간단하게 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기를 바란들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율령과 옛 법을 따라 이전과 같이 녹봉을 주어 청렴한 관리들에게 보답하소서.”라고 하니, 위주魏主가 이에 그쳤다.
[] 북위北魏청주자사靑州刺史 모용백요慕容白曜를 죽였다.
[] 예전에 북위北魏을혼乙渾이 정사를 천단할 적에 모용백요慕容白曜가 그에게 붙었었는데,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가 뒤늦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그를 죽였다.
[] 나라가 임해臨海의 도적을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역주
역주1 宋納太子妃江氏 : “太子妃를 들인 것은 기록하지 않는데 여기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뇌물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태자비를 들인 것으로〉 百官들에게 모두 물품을 바치기를 요구하였으므로 기록하여 나무란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太子가 妃를 들인 것을 기록한 것이 3번인데(晉나라 司馬衷의 태자비 賈氏, 이해(470) 江氏, 北周 宇文贇의 태자비 楊氏) 모두 나무란 것이다.[納太子妃不書 此其書 何 志賄也 於是責百官皆獻 故書譏之 終綱目太子書納妃三(晉衷賈氏 是年江氏 周贇楊氏) 皆譏也]” ≪書法≫
역주2 宋以南兗州刺史蕭道成爲黃門侍郎 尋復本任 : “이윽고 본래 직임으로 복귀시켰는데 어찌하여 기록하였는가. 속임을 당한 것을 나무란 것이다. 이때에 蕭道成은 내직으로 옮겨가기를 바라지 않아 기병을 보내 北魏를 침략하자 北魏는 과연 유격 기병을 보내 변방을 순시하였다. 소도성이 그것을 보고하자 마침내 본래 직임으로 복귀시켰으니 속임을 당한 것이 심하였으므로 나무란 것이다.[尋復本任矣 何以書 譏受欺也 於是道成不欲内遷 遣騎略魏 魏果遣遊騎行邊 道成以聞 遂復本任 受欺甚矣 故書譏之]” ≪書法≫“宋主는 의심하여 蕭道成을 불렀는데 소도성이 계책을 써서 부르는 명을 취소시켰다. 君臣 간에 서로 속이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윽고 본래 직임으로 복귀시켰으니 直筆로 그것을 기록하여 함께 나무란 것이다.[宋主以疑而召道成 道成以計而寢召命 君臣相詐如此 果何益哉 尋復本任 直筆書之 交譏之爾]” ≪發明≫
역주3 柔然侵魏 魏主自將擊敗之 : “柔然이 北魏에 대해 ‘冦(도적질했다)’라고 기록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여기서는 다만 ‘侵(침략했다)’이라고만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 죄를 적게 준 것이다. 壬午年(442)에 유연이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자 北魏가 유연을 습격하여 이로부터 4번 정벌하였다. 지금 원망을 품은 것은 情理이므로 다만 ‘侵’이라고만 기록한 것이다. 孝文帝가 즉위한 이후로 2년 만에 3번 침략했으니 다시 용서할 수 없으므로 甲寅年(474)에 다시 ‘冦’라고 기록하였다.[柔然於魏書冦久矣 此其止書侵 何 薄其罪也 蓋自壬年遣使如宋 而魏襲之 自是又四伐焉 今而修怨 情也 故止書侵 孝文既立 二年三侵 則不可以復恕矣 故甲寅復書冦]”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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