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初
에 述
이 徵廣漢李業
하여 爲博士
한대 業
이 固稱疾不起
注+業平帝元始中, 除爲郞, 會王莽居攝, 以病去官, 杜門不應州郡之命. 王莽以業爲酒士, 病不之官, 遂隱藏山谷, 絶匿名迹.하니
述이 羞不能致하여 使大鴻臚尹融으로 奉詔命以劫業호되 若起則受公侯之位요 不起면 賜以毒酒라하라
融이 譬旨曰 方今天下分崩하니 孰知是非완대 而以區區之身으로 試於不測之淵乎아
朝廷
이 貪慕名德
하여 曠官缺位
가 于今七年
이라 四時珍御
하여 不以忘君
注+珍御, 謂食珍之供進者.하니
宜上奉知己하고 下爲子孫하여 身名俱全이 不亦優乎아
業이 乃歎曰 古人이 危邦不入하고 亂邦不居는 爲此故也라 君子見危授命이어늘 乃誘以高位重餌乎아
融曰 宜呼室家計之니라 業曰 丈夫斷之於心이 久矣니 何妻子之爲리오하고 遂飮毒而死하다
述
이 恥有殺賢之名
하여 遣使弔祠
하고 賻贈百匹
하니 業子翬逃
하여 辭不受
注+賻, 音附, 助也. 旣夕禮曰 “知死者贈, 知生者賻.” 翬, 音暉.하다
目
帝旣平蜀에 詔贈常少爲太常하고 張隆爲光祿勳하며 譙玄은 已卒이라 祠以中牢하고 勅所在하여 還其家錢하고 而表李業之閭하다
徵費貽, 任永, 馮信이러니 會에 永, 信은 病卒하고 獨貽仕하여 至合浦太守하다
上以述將程烏, 李育이 有才幹이라하여 皆擢用之하니 於是에 西土皆悅하여 莫不歸心焉이러라
目
【목目】 황제가 오한吳漢에게 경계하기를 “성도成都는 병력이 10만이니,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다만 광도廣都를 굳게 점거하여 저들이 와서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적과 예봉을 다투지 말라.
만일 적이 감히 오지 못하면, 공公이 진영을 옮겨 압박해서 적의 힘이 쇠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오한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성도成都를 압박하였다.
성城과 10여 리 떨어진 곳에 강의 북쪽을 막고 진영을 설치하여 부교浮橋를 만들고, 부장 무위장군副將 武威將軍 유상劉尙으로 하여금 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강의 남쪽에 주둔하게 하니, 진영이 서로 20여 리쯤 떨어져 있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오한을 꾸짖기를 “근래
공公에게 천만번 당부하였는데, 일을 당하여 이처럼 어그러지고 혼란할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注+“천조만단千條萬端”은 상세함을 말한 것이다. 발勃(어그러지다)는 패悖와 같다.
적을 깔보아 깊이 진입하였고 또 유상과 진영을 달리하였으니, 일이 다급하게 되면 다시 서로 미칠 수가 없다.
적이 군대를 출동하여
공公의 진영을 견제하고 큰 병력으로 유상을 공격하면 유상이 격파될 것이니, 이렇게 될 경우
공公은 즉시 패할 것이다.
注+철綴은 속박(견제)과 같다. 다행히 다른 일이 없으면 급히 병력을 거느리고
광도廣都로 돌아오라.”
注+“행무타幸無它”는 다행히 다른 우환이 없어서 패망함에 이르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目
【
목目】 이
조서詔書가
오한吳漢의 진영에 이르기 전 9월에
공손술公孫述이 과연 그의
대사도 사풍大司徒 謝豐과
집금오 원길執金吾 袁吉로 하여금 10여 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20여 개의 진영을 나누어 배치하고 나가 오한을 공격하게 하고
注+“십허만十許萬”은 대략의 숫자를 말한 것이다.,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유상劉尙을 위협하여 오한을 구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한이 이들과 하루를 크게 싸우다가 군대가 패하여 달아나 성벽에 들어가니, 사풍이 인하여 포위하였다.
오한이 마침내 장수들을 불러 격려하기를
注+려厲는 힘씀이다. “내
제군諸君들과 험한 곳을 넘어서 천여 리를 이동하면서 전투하여
注+“전전轉戰”은 옮겨 다니면서 전투하는 것이다. 마침내 적지에 깊숙이 쳐들어와 적의
성城 아래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유상과 함께 두 곳이 포위되어서, 군세가 이미 서로 이어지지 못하니, 화를 측량하기 어렵다. 군대를 은밀히 출동하여 강의 남쪽에 있는 유상에게 가서 병력을 합하여 적의 침공을 막고자 하니,
그대들이 만약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쳐서 각자 싸우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여지없이 패할 것이다. 성패의 기틀이 이 한 번의 일에 달려 있다.” 하니, 장수들이 모두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目
【
목目】
오한吳漢은 이에 군사들에게 연향을 베풀고 말에게 곡식을 먹이고
영문營門을 3일 동안 닫고 출전하지 않았으나
注+말秣은 막갈莫葛의 절切이니, 말에게 곡식을 먹이는 것을 말秣이라 한다. 깃발을 많이 꽂아놓고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가, 밤에 병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유상劉尙의 군대와 회합하였다.
사풍謝豐 등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다음 날에야 비로소 군대를 나누어 강의 북쪽을 막고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강의 남쪽을 공격하였는데, 오한이 군대를 총동원하여 맞아 싸워서 마침내 대파하고 사풍謝豐과 원길袁吉을 참수하였다.
오한은 이에 군대를 이끌고 광도廣都로 돌아와서 유상을 남겨두어 공손술公孫述을 막게 하고, 저간의 상황을 자세히 아뢰면서 자신을 깊이 견책하였다.
황제가 답서를 내리기를 “
공公이 광도로 돌아온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니, 공손술은 감히 유상의 부대를 지나서
공公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注+약略(지나감)은 과過와 같다.
만약 공손술이 먼저 유상을 공격하거든 공公이 광도 50리에서 보병과 기병을 총동원하여 달려가면 마침 적군이 위급하고 곤궁한 때를 만나고 있을 것이니,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오한은
광도廣都와
성도成都의 사이에서 공손술과 8번 싸워 8번 이기고, 마침내 그 외곽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注+〈“곽중郭中”은〉 성도成都의 외곽이다.
장궁臧宮은
면죽綿竹을 함락하고
부성涪城을 격파하고서
공손회公孫恢를 참수하였으며
注+부현涪縣(부성涪城)은 광한군廣漢郡에 속하였다., 다시
번繁과
비郫(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오한과
성도成都에서 회합하였다.
注+비郫는 음이 피皮이다. 번繁과 비郫는 두 현縣의 이름이니, 모두 촉군蜀郡에 속하였다.
目
【
목目】 겨울 11월에
장궁臧宮이
함양문咸陽門에 군대를 주둔하니
注+함양문咸陽門은 ≪후한서後漢書≫ 〈장궁전臧宮傳〉에 함문咸門으로 되어 있으니, 성도성成都城의 북면 동쪽의 정문正門인바, 동東은 혹 서西로 되어 있다.,
공손술公孫述이 자신은 수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오한吳漢을 공격하고,
연잠延岑에게는 장궁을 막게 하였다.
크게 싸워 연잠이 세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아침부터 점심까지 병사들이 밥을 먹지 못하여 모두 피곤하였다.
오한이 이 틈을 타서 호군 고오護軍 高午와 당함唐邯으로 하여금 정예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니, 공손술의 군대가 크게 혼란하였다.
고오가 적진으로 달려가 공손술을 찔러서 가슴을 관통하여 말에서 떨어뜨리니
注+진陳(진을 치다)은 진陣으로 읽는다. 동洞은 관통함이다., 공손술의 측근들이 수레에 태워 성안으로 들어갔다. 공손술은 군대를 연잠에게 부탁하고 그날 밤에 죽었는데, 다음 날 아침 연잠이 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오한은 공손술의 처자를 죽이고
공손씨公孫氏를 모두 도륙하고 연잠의
삼족三族도 아울러 멸하였으며
注+이夷(멸하다)는 멸滅과 같다., 마침내 군대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고 공손술의 궁실을 불태웠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오한을 견책하고 또 유상劉尙을 꾸짖기를 “적이 항복한 지 3일에 관리와 백성들이 따라 복종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병사들을 풀어놓아 불을 놓았으니, 나는 이 말을 듣고는 비통하여 코끝이 찡하다.
그대는 종실의 자손으로 일찍이 관리의 직책도 맡았었는데,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행한단 말인가. 참으로 적장을 목 베고 백성을 위로하는 의리를 잃었다.”
注+경更(지내다)은 공형工衡의 절切이다. 양良(진실로)은 심甚과 같다. 하였다.
目
【
목目】 처음에
공손술公孫述이
광한廣漢 사람
이업李業을 불러
박사博士로 삼았으나 이업이 한사코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으니
注+이업李業은 평제 원시平帝 元始 연간에 낭관郞官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왕망王莽이 거섭居攝을 하자 병을 이유로 관직을 떠나서 문을 닫고 주군州郡의 명에 응하지 않았다. 왕망이 이업을 주사酒士로 삼았으나 병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마침내 산골짜기에 은둔하여 이름과 자취를 숨겼다.,
공손술은 그를 초치하지 못한 것을 수치로 여겨서 대홍려大鴻臚(대홍려) 윤융尹融으로 하여금 조명詔命을 받들어 이업에게 만약 나오면 공후公侯의 지위를 받을 것이고, 나오지 않으면 독약을 탄 술을 내리겠다고 위협하게 하였다.
윤융이 공손술의 뜻을 비유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분열되었으니, 누가 옳고 그름을 알기에 구구區區한 일신一身을 가지고 측량할 수 없는 깊은 물속을 시험하려 한단 말인가.
조정에서 당신의 명망과 덕을 사모해서 관직과 지위를 비워둔 지 지금 7년이 되었다.
사시四時의 진귀한 음식을 차려놓고
군君을 잊지 않고 있으니
注+“진어珍御”는 진귀한 음식을 바쳐 올림을 이른다.,
마땅히 위로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받들고 아래로 자손을 위하여 몸과 명예가 모두 온전해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업이 이에 탄식하기를 “옛사람이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혼란한 나라에 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군자君子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는데, 높은 지위와 많은 미끼로 유인한단 말인가.” 하였다.
윤융이 말하기를 “마땅히 집안 식구들을 불러 상의하라.” 하니, 이업이 말하기를 “장부丈夫가 마음에 결단한 지 오래이니, 처자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독약을 탄 술을 마시고 죽었다.
공손술은
현자賢者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됨을 수치로 여겨서
사자使者를 보내 조문하여 제사하고 비단 100
필匹을
부증賻贈하였는데, 이업의 아들
이휘李翬(이휘)는 도망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注+부賻는 음이 부附이니 도움이다. ≪의례儀禮≫ 〈기석례旣夕禮〉에 “죽은 사람을 아는 자는 증贈을 하고, 산 사람을 아는 자는 부賻를 한다.” 하였다. 휘翬는 음이 휘暉이다.
目
【목目】 상上이 두융竇融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5개 군郡의 태수太守와 함께 들어와 조회하게 하였는데, 두융 등이 조령을 받들고 올 적에 관속과 빈객들이 따라와서 멍에한 수레가 천여 량輛이었다.
두융이 도착하여 성문에 나와
인수印綬를 올리니
注+≪후한서後漢書≫ 〈두융전竇融傳〉에 “두융竇融이 도착하여 낙양성洛陽城 성문에 나와 양주목涼州牧과 장액속국도위張掖屬國都尉, 안풍후安豐侯의 인수印綬를 올렸다.” 하였다., 황제가 조령을 내려
사자使者를 보내
후侯의
인수印綬를 돌려주게 하였고,
인견引見할 적에 하사한 물건과 은총이
경사京師를 진동하였다.
얼마 후 두융을
기주목冀州牧에 제수하고 또
양통梁統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고
고장장 공분姑臧長 孔奮을
무도군 승武都郡 丞으로 삼았다.
注+고장姑臧은 현縣의 이름이니 무위군武威郡에 속하였다.
고장姑臧은
하서河西에서 가장 부유하여 천하가 평정되기 전에는 선비들이 대부분 행실[
검조檢操]을 닦지 않았다.
注+“검조檢操”는 ≪후한서後漢書≫ 〈공분전孔奮傳〉에는 절조節操로 되어 있다.
공분이 관직에 있은 지 4년 동안 청렴결백함을 힘써 행하니, 여러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몸은 기름[
지고脂膏] 덩어리 속에 있으면서 자신의 몸조차 윤택하게 하지 못한다.”
注+머리에 뿔이 있는 짐승의 기름을 지脂라 하고, 뿔이 없는 짐승의 기름을 고膏라 한다. 하였다.
공분이 두융을 따라 들어와 조회할 적에, 다른 수령守令들은 재화財貨가 수레를 연하여 내와 못에 가득하였으나, 오직 공분은 물자가 없고 한 대의 수레로 길에 나오니, 황제가 이 때문에 그에게 상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