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효화황제 원흥孝和皇帝 元興 원년이다. 봄에 고구려高句驪가 요동遼東을 침략하였다.
綱
【강綱】 겨울 12월에 황제가 붕崩하니注+향년이 27세였다., 태자 유융太子 劉隆이 즉위하였다.
目
【목目】 처음에 황제가 황자皇子 10여 명을 잃으니, 뒤에 태어난 황자皇子는 번번이 민간에 숨겨 길러서 신하들 중에 아는 자가 없었다.
황제가 붕崩하자 황후皇后가 민간에서 황자皇子를 데려왔는데, 장자 유승長子 劉勝이 고질병이 있으므로注+고痼는 음이 고固이니, “고질痼疾”은 견고하고 오래 앓는 병이다. 작은 아들 유융劉隆이 태어난 지 겨우 백여 일에 태자太子로 영립迎立되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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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황후皇后를 높여 황태후皇太后라 하고, 태후太后가 임조臨朝(섭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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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낙양령 왕환雒陽令 王渙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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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환王渙은 처신이 공평하고 바르며 밝은 통찰력으로 숨겨진 간악함을 적발하였으며, 겉으로는 엄격하고 마음은 인자하니 사람들이 모두 진심으로 기꺼이 복종하였다.
이때에 관청에서 졸卒하니注+〈“졸관卒官”은〉 관청에서 졸卒함을 이른다.,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시詩를 지어 현악기로 노래하여 제사하였다.注+〈“작시현가이제作詩絃歌以祭”는〉 지은 시詩를 가지고 현악기를 타면서 노래한 것이다.
태후太后가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충성스럽고 어진 관리는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지는 방도이다. 이러한 관리를 국가에서 매우 부지런히 구하나 얻는 경우가 지극히 적으니, 왕환의 아들 왕석王石을 낭중郎中으로 삼아라.” 하였다.
역주
역주1高句驪寇遼東 :
“高句驪가 ≪資治通鑑綱目≫에 보인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高句驪見綱目 始此]다” ≪書法≫
역주2帝崩 :
“賀善의 贊에 말하였다. “和帝가 재위했을 적에 ≪資治通鑑綱目≫에서 竇憲을 쓴 것 외에는 侯를 봉하고 제수한 것이 아니면 하늘의 변고와 변방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陳寵을 廷尉로 삼았다.’라고 썼고, ‘가뭄과 황충에 조세를 면제했다.’라고 썼고, ‘使者를 보내 순행해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창고의 곡식을 대여해주었다.’라고 썼고, ‘太官에게 詔令을 내려 진귀한 음식을 받지 말게 하였다.’라고 썼으니, 이는 또한 인자하고 검소한 군주이다. 이에 일찍이 英斷(지혜로운 결단)을 내어 조정의 大權을 거두어 잡고 또 儒學을 높이고 간언을 받아들여서 행실에 큰 과오가 없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처음의 계책이 멀리 이어지지 못하여, 權奸은 제거하였으나 환관이 권력을 행사해서 마침내 東漢의 화를 마련한 군주가 되었다. ≪자치통감강목≫에 ‘鄭衆을 봉하여 鄛鄉侯를 삼았다.’고 쓴 것은 거듭 애석히 여긴 것이다. ○惠帝의 말년에 太子(少帝)가 즉위한 것을 썼으나 태자를 세운 것을 쓰지 않은 것은 타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太后가 皇子를 민간에서 거두었으면 그 정통이 분명한데, 세워서 태자로 삼았다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國喪을 발표한 뒤에 옹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玄孫 劉嬰은 어찌하여 썼는가. 王莽이 居攝할 적에 유영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으니, 그를 세워 皇太子로 삼았다고 쓴 것은 명분을 바로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劉隆을 세운 것을 쓰지 않았으니, 少帝와 무슨 차별이 있는가. 즉위할 때에 ‘太子隆’이라고 이름을 썼으니, 이 때문에 다른 것이다. 兩漢 시대에 태자에게 ‘立’이라고 쓰지 않은 것이 두 번이니 少帝와 殤帝이고, 冲帝 이하로 ‘立太子’라고 쓰지 않은 것이 五世이니, 자식이 없는 경우가 아니면 일찍 세우지 않은 것이다.[賀善贊曰 和帝在位 綱目書竇憲外 非封拜 則天變邊事而已 然其間如書陳寵爲廷尉 書旱蝗除租税 書遣使循行廩貸 書詔太官勿受珍羞 蓋亦慈儉之君也 乃能早發英斷 收攬權綱 而又尊儒納諫 動無大過 惜乎 始謀不遠 權奸雖除 而閹豎用事 遂爲東漢基禍之主 綱目書封鄭衆爲鄛鄉侯 重惜之也 ○惠帝之末 書太子卽位而不書立太子 他人子也 於是太后收皇子於民間 則其正統明矣 不書立爲太子 何 迎立於發喪之後也 玄孫嬰則何以書 王莽居攝 嬰未嘗卽位 書立爲皇太子 所以正名也 然則隆不書立 與少帝何别焉 卽位書名 所以爲異也 兩漢太子不書立 二 少帝殤帝 冲帝以下 不書立太子者五世 非無子則不早建也]” ≪書法≫
역주3雒陽令王渙卒 :
“현령에게 ‘卒’이라고 쓴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渙에게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循吏를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令長에게 ‘卒’이라고 쓴 것이 두 사람뿐이니, 王渙과 陳寔이다.[令未有書卒者 其卒渙 何 錄循吏也 終綱目 令長書卒者二人而已矣 王渙陳寔]” ≪書法≫ “현령에게 ‘卒’이라고 쓴 적이 있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쓴 것은 그의 循良의 공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令未有書卒 而此書之者 蓋欲著其循良之績也]”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