侍郞 張騰이 말하기를 “모용수는 강하고 적소는 약하니, 무슨 피폐함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적소를 구원하여 鼎足의 형세를 이루는 것만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군대를 이끌고 中山으로 달려가서 낮에는 疑兵(기치를 많이 세워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많이 나열하고 밤에는 횃불을 많이 들고 있으면 모용수가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구원할 것이니, 이때 우리가 그 앞을 충돌하고 적소가 그 뒤를 밟으면 이는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모용영이 따르지 않았다.
目
【目】 慕容垂가 黎陽에 군대를 주둔하고서 河水에 임하여 건너고자 하였는데, 翟釗가 南岸에 군대를 나열하여 막았다. 모용수가 진영을 옮겨 西津으로 나아가니, 黎陽과는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거리였다.
소가죽으로 배 백여 척을 만들고서 거짓으로 병장기를 나열하고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체하니, 적소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모용수가 은밀히 王鎭 등을 보내어 黎陽津에서 밤에 河水를 건너 河水 남쪽에 진영을 치게 하니, 날이 밝을 즈음 진영이 이루어졌다.
적소가 급히 돌아와 공격하자, 모용수가 진영의 벽을 굳게 지키고 싸우지 말 것을 명하니, 적소의 병사들은 오가느라 피로하고 더위에 지쳐 모용수의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장차 병사들을 이끌고 떠나려 하였다.注+① 暍은 음이 謁이니, 더위에 상하는 것이다.
왕진 등이 나가 싸우고 慕容農이 西津에서 물을 건너가 협공해서 적소를 대파하여 그의 무리와 그가 거느리고 있던 7개 郡의 3만여 호를 모두 사로잡았다.
최음은 형법을 간소화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니, 유민들이 그에게 귀의하여 戶口가 더욱 불어났다.
綱
【綱】 가을 7월에 秦主(前秦) 符登이 군대를 이끌고 安定을 핍박하니, 後秦主 姚萇이 막아 물리쳤다.
目
【目】 秦主 符登은 後秦主 姚萇이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병기를 수선하여 나아가 安定을 핍박하였는데, 요장의 병이 조금 나았다. 요장이 군대를 출동하여 막자 부등이 두려워하여 돌아갔다.
요장이 밤중에 병사를 이끌고 그 뒤를 밟았는데, 아침에 정탐하던 기병이 부등에게 아뢰기를 “적의 군영이 이미 비어서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부등은 놀라 말하기를 “저 요장은 어떤 사람이길래 오고 감에 나로 하여금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가. 그가 장차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다시 살아 돌아왔다. 짐이 이 羌族과 같은 세상을 사니, 어쩌면 이리도 운수가 사나운가.”라고 하였다. 부등이 마침내 雍州로 돌아가니, 요장 또한 安定으로 돌아갔다.
綱
【綱】 겨울 11월에 殷仲堪을 都督荆․益․寧州軍事로 삼았다.
目
【目】 殷仲堪은 비록 당시 사람들의 칭찬이 있었으나 이력과 명망이 아직 얕았고, 관청에 부임하자 작은 은혜를 행하기를 좋아하여 크고 작은 일이 제대로 거행되지 못하였다.
南郡公 桓玄은 자신의 재주와 문벌을 믿고 雄豪로 자처하니,注+① ‘負其才地’는 그 재주와 문벌을 믿음을 이른다. 조정에서는 그를 의심하고 등용하지 않았다. 환현은 나이 23세에 비로소 洗馬에 제수되었다.
目
【目】 〈桓玄이〉 일찍이 琅邪王 司馬道子에게 찾아갔을 적에 사마도자가 마침 술에 취해 있었는데, 눈을 크게 뜨고 객들에게 이르기를 “桓溫이 말년에 역적이 되려고 했다 하니,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환현이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환현은 스스로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서 사마도자에게 이를 갈았다.
太湖圖
이후에 義興太守로 나가 보임되니,注+① 懷帝 永嘉 4년(301)에 琅邪王 司馬睿가 陽羨 사람 周玘에게 鄕里의 병사들을 규합해서 錢璯를 토벌하게 하여 참수하였다. 그러므로 주기의 鄕里에 義興郡을 설치하여 표창하였으니, 바로 이곳이다. 환현은 뜻을 얻지 못하여 우울해하다가 한탄하기를 “아버지는 九州의 伯이 되셨는데 자식은 五湖의 현령이 되었다.”라고 하고는注+② 虞翻은 말하기를 “太湖에 五湖가 있으니 隔湖, 洮湖, 射湖, 貴湖, 太湖가 오호가 된다. 태호의 작은 지류를 아울러 모두 태호와 연결하였기 때문에 태호가 오호의 이름을 겸하여 얻은 것이다.” 하였고, 韋昭는 말하기를 “胥湖, 蠡湖, 洮湖, 隔湖에 太湖까지 넣어 오호라 한다.” 하였고, 酈善長은 “長塘湖, 射湖, 貴湖, 隔湖에 太湖를 넣어 오호라 한다.” 하였고 ≪吳中志≫에는 “貢湖, 遊湖, 胥湖, 梅梁湖, 金鼎湖를 오호라 한다.” 하였다. 長(우두머리)은 知兩의 切이다.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目】 桓氏가 여러 대에 걸쳐 荆州에 군림하였고 桓玄이 다시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注+① 橫은 戶孟의 切이니, ‘豪橫’은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함을 이른다.
일찍이 殷仲堪의 청사 앞에서 말[馬]을 달리며 놀 적에 은중감에게 창을 겨누었는데,注+② 擬는 창을 들어 향해서 장차 찌를 듯이 하는 것이다. 參軍 劉邁가 말하기를 “말을 타며 창질하는 데는 넉넉함이 있으나 정묘한 이치를 터득하는 데는 부족하다.”라고 하니, 환현이 기뻐하지 않았다.
나온 뒤에 은중감이 유매에게 이르기를 “경은 狂人이다. 환현이 밤중에 사람을 보내어 경을 죽일 것이니, 내 어찌 그대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유매로 하여금 피하게 하였다. 환현이 과연 사람을 시켜 쫓아가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目
【目】 征虜參軍 胡藩이 江陵을 지날 적에 殷仲堪을 보고 말하기를 “桓玄은 뜻이 비범한데 節下께서 그를 너무 높여 우대하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호번의 内弟인 羅企生이 은중감의 功曹가 되었는데,注+① 內弟는 외숙의 아들이다. 호번이 나기생에게 이르기를 “殷侯가 창을 거꾸로 잡아 창자루를 남에게 주니, 반드시 화에 이를 것이다. 그대가 일찍 떠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綱
【綱】 〈晉나라(東晉) 황제(孝武帝)가〉 아들 司馬德文을 세워 琅邪王으로 삼고 司馬道子를 옮겨 會稽王으로 삼았다.
綱
【綱】 〈晉나라(東晉)의〉 李遼가 표문을 올려 孔子廟를 수리할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目
【目】 清河 사람 李遼가 표문을 올려서 兗州에 칙명을 내려 孔子廟를 수리하고 청소할 家戶를 배치해주고 이어서 庠序를 세워 배우는 자들을 가르칠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일이 여유가 있는 듯하면서도 실제로 급하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표문을 올렸으나 황제는 살펴보지 않았다.注+① 孔子廟가 魯郡에 있었으니, 魯郡은 前漢 때에는 徐州에 속하였고 後漢과 晉나라 때에는 豫州에 속하였는데, 江表(東晉․南朝) 때에 처음으로 나누어 兗州에 소속시켰다.
역주
역주1卞莊子의 계책 :
卞莊子는 춘추시대 魯나라의 大夫로 勇力이 뛰어난 인물이다. 변장자가 범을 창으로 찔러 잡으려 하자, 館에 있는 下人이 만류하기를 “두 범이 이제 소를 잡아먹으려 하니, 반드시 먹이를 빼앗으려고 싸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큰 놈은 반드시 부상을 당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입니다. 이때 부상당한 놈을 찌르면 일거양득할 것입니다.” 하였다. 변장자는 그의 말대로 하여 두 마리 범을 잡았다.(≪史記≫ 권70 〈張儀列傳〉)
역주3李遼……不報 :
“李遼는 누구인가. 清河 사람이다. 그가 청한 것은 兗州의 孔子廟인데 어찌하여 여기에 썼는가. 이요를 가상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써서 그 이름을 게시한 것이다. 兗州는 孔子가 태어나신 곳인데 사당이 폐지되어 수리되지 못하였으니, 다른 곳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資治通鑑綱目≫에 앞에서는 ‘罷遣太學生徒(태학의 생도를 해산하여 보냈다.)’라고 썼고 뒤이어 ‘立佛精舍(부처의 精舍를 內殿에 세웠다.)’라고 썼고 이때에 ‘請修孔子廟 不報’라고 썼으니, 晉나라를 거듭 서글퍼한 것이다. ‘孔子廟’를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으니, ≪자치통감강목≫에 ‘孔子廟’를 쓴 것이 3번이다.(이해(392)와 임오년(442)에 宋나라가 孔子廟를 수리한 것, 을유년(505)에 梁나라가 孔子廟를 세운 것이다.)[李遼 何 清河人也 所請兗州廟也 何以書 嘉遼也 故特書而揭名之 兗州 夫子所生也 廟廢不修 他可知矣 綱目前書罷遣太學生徒 繼書立佛精舍 於是書請修孔子廟不報 重傷晉也 書孔子廟始此 綱目書孔子廟三(是年 壬午年 宋修孔子廟 乙酉年 梁立孔子廟)]” ≪書法≫“晉나라가 나라를 세움에 원대한 계책이 없어서 앞서는 군수 물자로 인하여 태학의 생도를 파하여 보내니, 이 때문에 학교가 마침내 폐하였다. 지금 李遼가 孔子廟를 수리할 것을 청하였는데, 만일 그 말을 따른다면 한 번 兗州에 칙명을 내리는 데 불과할 뿐인데도, 상소문이 들어왔으나 답하지 않았으니, 과연 무엇하는 것인가. 이때에 임금이 불교를 숭상하고 조정의 사대부들은 한창 老莊學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특별히 써서 폄하하였으니, 매우 부끄럽도다.[晉氏立國無遠猷 前因軍興罷遣生徒 由是學校遂廢 今李遼請修孔子廟 使其從之 不過一敕下兗州爾 疏入不報 果何爲者 是時 人君崇尙浮屠 而朝廷薦紳 方好老莊 故其所爲如此 特筆貶之 可媿甚矣]”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