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 제14권 하 漢獻帝建安 24년(219)~蜀漢後主建興 5년(227) 己亥年(219) 【綱】 겨울 10월에 孫權이 呂蒙으로 하여금 江陵을 기습 점령하게 하였다. 魏王曹操가 군대를 거느리고 樊城을 구원하니, 關羽가 패주하여 돌아오자 손권이 요격하여 참수하였다. 12월에 여몽이 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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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許都 이남이 왕왕 멀리 關羽에게 호응하니, 관우의 위엄이 華夏(中原)에 진동하였다. 曹操가 도읍을 許都로 옮겨서 그의 銳鋒을 피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司馬懿와 蔣濟가 다음과 같이 반대하였다. “于禁 등은 홍수에 패몰된 것이지 전투를 잘못한 것이 아니니, 국가의 大計에 있어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劉備와 孫權이 겉으로는 친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관우가 뜻을 얻는 것을 손권은 반드시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손권에게 은밀히 관우의 뒤를 밟도록 권하고 江南을 떼어서 손권에게 봉해줄 것을 허락한다면, 樊城의 포위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조조가 그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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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처음에 魯肅은 항상 孫權에게 권하기를 “曹操가 아직 건재하니, 마땅히 우선 關羽를 어루만져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와 함께 조조를 원수로 여겨야 하고, 그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呂蒙이 魯肅을 대신하게 되자, 여몽은 관우가 평소 용맹하여 吳나라를 兼幷할 마음을 가지고 있고 더구나 吳나라의 上流 지역에 있으니 형편상 우호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孫權에게 은밀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征虜將軍孫皎로 하여금 南郡을 지키게 하고注+孫皎가 이때 征虜將軍이었다.潘璋은 白帝에 주둔하게 하고 蔣欽은 遊兵(유격대)을 거느리고 강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敵에게 대응하게 하고,
저는 국가(孫權)를 위해서 전진하여 襄陽을 점거할 것이니,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 “嘗爲”의 爲도 모두 같다. 이와 같이 하면 어찌 조조를 근심할 것이 있으며 어찌 관우에게 의뢰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관우의 군주와 신하는 속임수와 무력을 멋대로 행사하여 있는 곳마다 反覆無常하니, 心腹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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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孫權이 말하기를 “내 지금 먼저 徐州를 점령한 뒤에 關羽를 공격하여 취하고자 하니, 어떠한가?”注+廣陵 이북은 모두 徐州의 땅이다. 하니, 呂蒙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지금 曹操가 幽州와 冀州를 어루만지고 수습하느라 동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서주의 땅은 우리가 쳐들어가면 반드시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주는 지형이 사방의 육로와 통하여 금일에 점령하더라도 조조가 후일에 반드시 와서 다툴 것이니,注+“後旬”은 日後(후일)라는 말과 같다. 비록 7, 8만의 병력을 남겨두어 지키게 하더라도 오히려 근심해야 할 것입니다.注+呂蒙은 吳나라의 병력이 북쪽을 향하여 中原을 다툴 수 없다고 스스로 헤아렸으니, 이는 〈徐州 지방이〉 兵車와 騎兵을 사용하여 싸우는 지역이라서 남쪽 병사들이 편리하게 여기는 바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관우를 공격하여 취하여 長江을 완전히 점거하여 우리의 형세가 더욱 커져서 수비하기가 쉬운 것만 못할 것입니다.” 손권이 그의 말을 좋게 여겼다.注+張(커지다)은 去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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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孫權이 일찍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關羽에게 청혼을 하였는데, 관우가 그 使者를 꾸짖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呂蒙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관우가 樊城을 토벌하면서 수비병을 많이 배치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제가 그 뒤를 도모할까 염려해서입니다.
저는 항상 병이 있으니, 바라건대 병력을 나누어 建業으로 돌아가서 병을 치료한다고 구실을 삼게 하소서. 그리하면 관우가 이 말을 듣고 반드시 수비병을 철수하여 모두 襄陽으로 달려갈 것이니,
우리의 大軍이 강에 배를 띄워 밤낮없이 上流로 치달려 올라가서 그의 빈 진영을 습격한다면, 南郡(江陵)을 함락시키고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注+여기의 南郡은 江陵을 이른다. 여몽이 마침내 병이 위독하다고 칭하니, 손권은 露檄을 보내 여몽을 불러 돌아오게 해서 은밀히 계책을 도모하려 하였다.注+露檄(봉함하지 않은 문서)은 露布, 露板과 같으니, 반드시 관우로 하여금 그 내용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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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呂蒙이 하류로 내려가 蕪湖에 이르자, 陸遜이 여몽에게 이르기를 “關羽와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먼 곳까지 내려오십니까?” 하니, 여몽이 말하기를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으나, 내 병이 위독하다.” 하였다.
육손이 말하기를 “관우는 北進을 힘써서 우리를 의심하지 않고, 지금 君께서 병환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더욱 대비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저들이 예상과 달리 지금 출동하면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려가 至尊(孫權)을 뵙거든 계책을 잘 세워야 합니다.”注+至尊은 孫權을 이른다. 손권은 建業에 도읍하였고 陸遜은 蕪湖에 있었으니, 이곳은 강물의 상류에 있으므로 아래로 내려가서 뵙는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여몽이 말하기를 “관우는 평소 용맹하니, 쉽게 도모할 수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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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呂蒙이 도성(建業)에 이르자, 孫權이 묻기를 “누가 卿을 대신할 만한 자인가?” 하니, 여몽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陸遜은 사려가 매우 깊고 재주가 重任을 감당할 만하며, 아직 원대한 명성이 없어서 관우가 꺼릴 상대가 아니니, 이보다 더 나은 자가 없습니다.
만약 그를 등용하신다면 응당 밖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감출 수 있고 안으로는 적의 형세를 잘 살피게 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관우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注+韜는 감춤이다. 손권이 이에 육손을 불러 여몽을 대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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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陸遜은 陸口에 이르러 편지를 써서 關羽에게 보내어 관우의 공로와 훌륭한 德을 칭송하고 깊이 스스로 겸양하니, 관우는 내심 매우 편안히 여겨 점차 수비병을 철수하여 樊城으로 달려갔다.
육손이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아뢰니, 孫權은 마침내 군대를 징발하여 관우를 습격하였다. 이때 손권은 孫皎로 하여금 呂蒙과 좌‧우를 나누어 감독하게 하고자 하였는데,注+孫皎는 孫靜의 아들이다.
여몽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征虜將軍(손교)이 재능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그를 등용해야 할 것이요, 제가 재능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마땅히 저를 등용하셔야 합니다. 예전에 周瑜와 程普가 左督과 右督이 되어서 江陵을 공격할 적에 모든 일을 주유에게 결정하게 하였으나,
정보는 자신이 오랫동안 장수로 있었던 경력을 믿고서 마침내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거의 國事를 망칠 뻔하였으니, 이는 目前의 경계입니다.” 손권이 깨닫고서 마침내 여몽을
【目】 曹操가 徐晃을 宛 땅에 주둔시켜 曹仁을 돕게 하니, 孫權이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보내어 關羽를 토벌하여 스스로 功을 세울 것을 청하고, 아울러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아니하여 관우로 하여금 대비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 사실을 비밀로 숨겨야 한다고 말하자, 董昭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軍事는 權道(임시변통)를 숭상하니, 마땅히 안으로 이 사실을 노출시켜서 관우로 하여금 손권이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 스스로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樊城의 포위가 빨리 풀릴 것이고, 또 두 賊(蜀漢과 吳)으로 하여금 서로 지구전을 하게 하여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그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으니, 이 사실을 숨기고 노출시키지 않아서 손권으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또 포위되어 있는 장수와 관리들이 상부에서 구원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혹시라도 딴마음을 품게 되면 대처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니, 노출시키는 것이 유리합니다. 또 관우는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하니, 스스로 江陵과 公安의 두 城의 수비가 견고함을 믿고서 반드시 속히 후퇴하지 않을 것입니다.”注+〈“強梁”은〉 물건이 강한 것은 들보만 한 것이 없으니, 들보는 그 體이고 강함은 그 用이다.
조조가 즉시 서황에게 명하여 손권의 편지를 화살에 매달아 포위된 성안과 관우가 주둔하고 있는 陣中으로 쏘아 보내니,注+射(쏘다)은 食亦의 切이다. 著(로 향하다)은 陟略의 切이다. 포위된 성안에서는 이 말을 듣고 意氣가 백배가 되었고, 관우는 과연 망설이면서 떠나가지 못하였다.注+關羽가 비록 孫權의 편지를 보았으나, 江陵과 公安의 수비가 견고하여 손권이 하룻저녁에 함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스스로 믿었다. 또 水勢를 인하여 포위망을 쳐서 樊城에 임하여 반드시 적을 격파할 기세가 있는데 이곳을 버리고 떠나가면 반드시 그동안에 세운 功을 잃게 될 것이니, 관우는 이 때문에 망설이면서 떠나가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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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曹操가 雒陽에서 남쪽으로 曹仁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摩陂에 주둔하였는데,注+≪水經≫을 근거해보면 摩陂는 潁川郡郟縣에 있으니, 길이와 너비가 15리쯤 된다.徐晃이 關羽를 공격하여 격파하니 관우가 포위망을 풀고 후퇴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선박들이 아직도 沔水를 점거하고 있었다.
관우가 군대를 출동시켰을 적에 군수물자를 제때에 공급하지 못하였다. 관우가 “돌아가서 이들을 治罪하겠다.”라고 말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워하여 이에 즉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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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呂蒙은 江陵에 들어가서 于禁을 석방하고注+처음에 曹仁이 于禁으로 하여금 樊城의 북쪽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關羽가 우금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그를 江陵에 가두었다.關羽와 장병들의 가솔을 거두어 모두 어루만지고 위로하였으며, 軍中에 명하여 민가에 함부로 亂入하여 물건을 요구하거나 탈취하는 바가 없게 하였다.
여몽의 麾下 중에 여몽과 같은 郡의 사람이 민가의 삿갓 하나를 가져다가 公用의 갑옷을 덮었는데,注+笠(삿갓)은 비를 막는 것이다. 覆는 敷救의 切이니, 덮음이다. 여몽은 이것도 軍令을 범한 것이라 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를 참수하였다. 이에 군중이 두려워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다.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친근한 사람을 시켜서 노인들을 위문하여 부족한 바를 묻고 의약품을 지급하고 옷과 양식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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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關羽가 패주하여 돌아가자 曹仁이 장수들을 모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지금은 관우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 틈을 타서 추격하여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趙儼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孫權과 관우가 군대를 연합하였으니, 손권은 우리가 저들의 피폐한 상황을 틈탈까 염려하여 공손한 말로 〈마음과 힘을 다해〉 功을 바치겠다고 한 것일 뿐입니다.注+“求效”는 스스로 功을 바치기를 바란다는 말과 같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 말을 공손히 하여 功效를 이루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관우가 이미 고립무원의 지경이 되어 달아났으니, 다시 그를 남겨두어서 손권의 골칫거리로 삼아야 합니다.注+“孤逬”은 근본을 잃고 형세가 고립되어 달아남을 말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깊이 쳐들어가서 패한 적들을 추격한다면, 손권은 장차 관우를 방비하는 마음을 바꾸어서 우리에게 환란이 될 것이니,注+虞는 헤아림이고 방비함이다. 〈“若深入追北則權將改虞於彼而生患於我矣”는〉 손권은 關羽가 자신들의 폐해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헤아리면 관우를 막으려던 마음을 바꾸어서 曹操를 막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반드시 조조의 우환이 될 것임을 이른 것이다. 왕(조조)께서는 반드시 이것을 깊이 염려하시게 될 것입니다.”
조인이 이에 엄하게 경계시킨 군대를 해산하였다.注+“解嚴”은 엄하게 경계시킨 군대를 풀어서 다시는 關羽를 추격하지 않음을 이른다.曹操는 관우가 패주했다는 말을 듣고는 장수들이 그를 추격할까 염려해서 급히 조인에게 명하였는데, 과연 조엄이 예측한 바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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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關羽가 자주 使者를 보내어 呂蒙에게 소식을 전하니, 여몽은 그때마다 관우의 사자를 후대하였고 성안을 두루 다니면서 집집마다 안부를 물었으며 혹은 직접 쓴 편지로 信義를 보였다.
사자가 돌아오자, 사람들은 자기 집에 아무 탈이 없고 평상시보다 더 대우를 잘 받고 있음을 알고는 모두 전투할 마음이 없어졌다.注+“使還”은 ≪資治通鑑≫에는 ‘羽人還(關羽의 사람(부하)이 돌아오자)’으로 되어 있다.孫權이 江陵에 오자 荊州의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歸附하였으나, 오직 治中從事인 潘濬(반준)이 병을 칭탁하고 만나보지 않았다.
손권이 사람을 보내어 수레를 타고 오게 하니, 반준은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손권이 간곡하게 위로하고 타이르자 반준이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니, 즉시 그를 治中으로 삼아서 荊州의 軍事를 일체 그에게 자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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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從事樊伷(번주)가 여러 오랑캐들을 유인하여 서쪽으로 漢中에 歸附하였다. 어떤 사람이 군대 1만 명을 보내어 토벌할 것을 아뢰자,注+伷는 冑와 같다. 樊伷가 이때 武陵部從事로 있었는데, 劉備가 당시 漢中王이 되어서 漢水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쪽으로 귀부하였다.”라고 말한 것이다. “外白”은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아뢴 것이다. ≪資治通鑑≫에는 “번주가 武陵을 가지고 漢中王 유비에게 귀부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孫權에게〉 督을 차임해서 1만 명의 병력을 감독하고 가서 토벌하라고 아뢰었다.”라고 되어 있다.潘濬이 말하기를 “5,000명의 병력으로 쳐들어가면 충분합니다.” 하였다.
孫權이 말하기를 “卿은 어찌 적을 가벼이 여기는가?” 하니, 반준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번주는 입술을 잘 놀리나 실제로는 재주와 지략이 없습니다.注+吻은 武粉의 切이니, 입가이다.
일찍이 고을 사람들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할 적에 점심때에 이르렀는데도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10여 명이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니, 이 또한 난장이는 한 肢節(뼈마디)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注+比는 미침(이름)이다. 侏儒는 난장이이다. 節은 肢節을 이르니, 굳이 全身을 보지 않아도 오직 한 지절이 짧은 것만 보면 그가 난장이임을 알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一說에는 “侏儒는 광대이니 해학과 우스갯소리를 잘하여 총애를 받는바, 그 한 가지 일을 보면 그의 기예를 징험할 수 있다.”라고 한다.
손권이 크게 웃고는 즉시 반준을 보내어 5,000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니, 반준이 과연 번주를 참수하고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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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孫權이 呂蒙을 南郡太守로 삼고 陸遜을 右護軍으로 삼아서 모두 侯를 봉하고,注+呂蒙은 孱陵侯로 봉하고, 陸遜은 승진시켜 婁侯로 봉하였다. 육손으로 하여금 夷陵에 군대를 주둔하여 峽口를 지키게 하였다.注+峽口는 西陵의 峽口이다.
에 “黃牛灘으로부터 동쪽으로 西陵의 경내로 들어가서 협구에 이르기까지 100여 리인데, 산과 물이 굽어 있고 두 강안과 높은 산과 험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겹겹으로 둘려 있어서 점심때와 한밤중이 아니면 해와 달을 보지 못한다.” 하였다.
關羽가 도망하여 달아났는데 군대가 모두 해산하여 겨우 10여 명이 남아 있었다. 손권은 미리 潘璋으로 하여금 관우가 도주할 지름길을 차단하게 하였는데, 12월에 관우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마침내 荊州를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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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처음에 全琮이 상소하여 關羽를 잡을 수 있는 계책을 아뢰자, 孫權은 이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묵살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전종에게 이르기를 “君이 예전에 이 말을 아뢰었을 적에 내가 비록 그대에게 답하지 않았으나, 금일의 승리는 실로 그대의 功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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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孫權이 다시 劉璋을 益州牧으로 삼아서 秭歸(자귀)에 머물게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卒하고,注+劉備가 益州로 들어가서 劉璋을 公安으로 옮겼는데, 지금 孫權에게 잡히게 된 것이다.呂蒙 또한 미처 封侯를 받기 전에 병이 나서 卒하니, 손권은 매우 애통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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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뒤에 孫權은 陸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公瑾(周瑜)은 웅장하고 맹렬하며 담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마침내 曹孟德(曹操)을 격파하고 荊州를 개척하였으니, 아득히 높아 필적할 만한 이가 드물다.
子敬(魯肅)은 공근이 나에게 추천하였는데, 나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帝王의 큰 도략을 언급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통쾌한 일이다.
또 뒤에 맹덕이 동쪽으로 내려올 적에 여러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자경이 불가하다고 논박하고는 나에게 급히 공근을 불러와서 임무를 맡기라고 권하여, 공근이 무리를 거느리고 맹덕을 맞아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통쾌한 일이다.注+駁은 異論을 하는 것이니, 이론을 세워서 여러 의논의 잘못을 논박한 것이다.
뒤에 비록 玄德(劉備)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나에게 권하였으니 이는 그의 한 가지 단점이나, 이로써 두 가지 장점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그를 鄧禹에게 견주노라.注+
子明(呂蒙)이 젊었을 때에는, 나는 그가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사양하지 않고 과감하여 담력이 있다고 여겼을 뿐이었다.注+子明은 呂蒙의 자이다. 劇은 어려움이다. 그런데 자명은 몸이 長大해지자 학문이 啓發되었고 또 계책과 지략이 몹시 빼어나서 공근의 다음이 될 만하였다.
다만 언론에 英氣가 드러나는 것이 공근에게 미치지 못할 뿐,注+長(자라다)은 知兩의 切이다.關羽를 도모하여 취함은 자경보다 나았다. 자경이 말하기를 ‘관우는 굳이 꺼릴 것이 못 됩니다.’ 하였으니, 이는 안으로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밖으로만 큰소리를 친 것일 뿐이다.
나 또한 그를 용서하여 구차히 책망하지 않았노라. 그러나 그가 군대를 출동시키고 진영에 주둔했을 적에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행해지고 금하면 즉시 그쳐져서 사람들이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으니, 법 또한 아름다웠다.”
目
【目】 曹操가 荊州의 피폐한 백성들을 옮기려 하자, 司馬懿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荊楚 지역의 사람들은 행동거지가 가볍고 취약하여 동요하기 쉽습니다. 또 關羽가 막 격파되어 여러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도망해 숨어서 관망하고 있습니다.
善良한 자들을 옮기면 그들의 뜻을 해치게 되고 또 도망간 자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조조가 그의 말을 따르니, 이 뒤로는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왔다.
綱
【綱】 孫權을 票騎將軍으로 삼아 荊州牧을 겸하게 하였다.
目
【目】 曹操가 표문을 올려 孫權을 票騎將軍으로 삼아서 符節을 빌려주고 荊州牧을 겸하게 하고 南昌侯를 봉하였다.注+南昌縣은 豫章郡에 속하였다. 손권이 글을 올려 조조에게 臣을 칭하고 天命이 조조에게 돌아갔다고 말하자,
조조는 이 글을 밖의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나를 화롯불 위에 앉혀놓고자 하는가?”注+踞(앉다)는 坐와 같다. 著은 둠이다. 〈“欲踞吾著爐火上邪”는〉 漢나라가 火德으로써 왕 노릇 하였으니, 孫權이 曹操를 그 위에 두고자 함을 말한 것이다. 하니, 陳群 등이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漢나라의 국운이 이미 끝났으니,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注+“非適”은 非特(非但)이라는 말과 같다.
殿下의 功德이 높고 높아서 모든 백성들이 屬望하고注+注(모으다)는 屬(촉)과 같다. 있으므로 손권이 멀리 있으면서 신을 칭하였으니, 이는 하늘과 사람이 응하는 것입니다. 氣類가 다른 자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전하를 칭송하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大位(大統)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시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注+“私論”은 조정의 의논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사사로이 아래에서 의논을 세워 잘못된 조정의 의논을 바로잡음을 이른다. 이 때문에 政治가 비록 혼탁하였으나 풍속이 쇠퇴하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만약 현명한 군주가 나와서 교화와 풍속을 진작하였다면 漢나라의 국운을 측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행히 桓帝와 靈帝가 거듭 어둡고 포악해서 간사한 자를 보호하고 기르기를 骨肉보다도 더 심하게 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자를 죽이고 없애기를 도적과 원수보다도 더 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선비들의 울분을 쌓고 四海의 노여움을 쌓으니,
이에 宗廟가 빈터가 되고 여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서 大命(天命)이 끊기어 다시는 구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병력을 보유하고 토지를 점거한 자들이 비록 서로 병탄하였지만 그래도 일찍이 漢나라를 높이는 것을 구실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고, 魏나라 武帝(曹操)는 강포하고 굳센데다가 천하에 큰 공이 있어서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을 간직한 것이 오래되었으나,注+“強伉”은 강포하고 굳셈을 이른다.
마침내 종신토록 감히 漢나라를 폐하고 스스로 즉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 마음에 이를 바라지 않았겠는가마는 그래도 名義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억제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교화를 어찌 태만히 하며 풍속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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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程子가 말씀하였다. “後漢의 명분과 절개가 風俗에서 이루어졌으니,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주1十二月 蒙卒 :
“周瑜와 張紘(장굉)과 魯肅이 卒하였을 적에 모두 관직을 썼다. 그런데 이때 呂蒙이 大督(총사령관)으로 있었으나 그가 卒하였을 적에 관직을 갖추어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여몽을 죄책한 것이다. 劉備와 孫權이 함께 曹操를 원수로 여겼는데 여몽이 맨 먼저 서로 병탄할 계책을 내었으니, 이 때문에 魏나라는 더욱 강성해졌고 漢나라는 다시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關羽가 돌아왔을 적에 ‘요격하여 참수하였다.’고 써서 손권을 심하게 여겼고, 여몽이 卒하였을 적에 관직을 쓰지 않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 蜀漢과 吳나라, 魏나라와 晉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卒하였을 적에 관직을 쓰지 않은 경우는 呂蒙과 孫峻‧陳祗‧劉穆 네 사람이다. 여몽을 이 사람들과 똑같이 대하였으니, ≪자치통감강목≫에서 죄책한 것이 깊다.[周瑜張紘魯肅卒 皆書官 於是蒙爲大督 則其卒也 不具官 何 罪蒙也 劉孫同仇 而蒙首發相呑之謀 此魏之所以益彊而漢之所以不復也 故關羽之還 書邀斬之 以甚孫權 而蒙之卒 不書官 綱目於蜀漢吳魏及晉諸臣卒 不書官者 呂蒙孫峻陳祗劉穆之四人焉 夷蒙於數子 綱目罪之深矣]” ≪書法≫ “呂蒙이 江陵을 기습하여 점령할 계책을 세웠는데, 어찌하여 ‘孫權이 시켰다.[權使]’고 썼는가. 關羽가 潘璋의 손에 죽었는데, 어찌하여 ‘손권이 요격하여 참수하였다.’고 썼는가. 이때에 劉備와 孫權이 함께 曹操를 원수로 여겨 토벌하고 있었는데, 손권이 도리어 관우를 공격하여 마침내 귀신과 물여우처럼 험악한 조조로 하여금 뜻을 얻고 勝勢를 더욱 떨치게 하였으니, 그 잘못은 이 조처에 있었다. 書法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손권에게 죄를 돌려서 그가 漢나라를 도우려는 마음이 없고 桀王을 도와준 악함이 있음을 드러냈을 뿐이다. 여몽은 미처 封爵을 받기 전에 卒하였는데 곧바로 아래에 이것을 썼으니, 또 〈善한 자에게 福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禍를 내리는〉 天道가 멀리 있지 않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呂蒙爲襲取江陵之計 何以書曰權使 關羽死於潘璋之手 何以書曰權邀斬之 是時劉孫同仇討操 而權乃自相攻擊 遂使鬼蜮得志 勝勢益張 其失蓋在此擧 書法若此 所以歸罪孫權 著其無翊漢之心 有助桀之惡耳 呂蒙未及受封而卒 卽書于下 又見天道不遠之意云]” ≪發明≫
역주2大督 :
後漢 시기 御史, 中郞將 등을 파견하여 임시로 지방의 軍事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때 督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후 三國時代 吳나라가 長江의 요지에 屯兵을 두면서 夏口督, 武昌左部督 등 그 지휘관을 督이라 하였다. ≪資治通鑑≫ 권69에 陸遜을 大都督으로 임명한 기사의 註에 “孫權이 처음으로 呂蒙을 임명하여 大督으로 삼아 관우를 사로잡았다.[孫權始命呂蒙爲大督以取關羽]”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大督은 총사령관의 의미로 기존의 督보다 우위에 둔 것으로 보이며 大督이 발전하여 大都督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魏나라에서도 대도독을 두었는데, 이를 都督中外諸軍事라 하였다.
역주3分督左右 :
≪三國志≫ 〈吳書 孫皎傳〉과 ≪資治通鑑≫에는 “左右部大督”으로 되어 있다. 아래의 “周瑜程普爲左右督” 역시 ≪삼국지≫와 ≪자치통감≫에는 “左右部督”으로 되어 있다.
역주5三國志……성씨이다 :
≪三國志≫ 〈蜀書〉 권6 〈考登〉에 士仁은 字가 君義이고 廣陽 사람이라 하면서, 〈吳書〉의 〈吳主傳〉과 〈呂蒙傳〉에 모두 士仁이라 하였고 〈關羽傳〉에만 傅士仁으로 되어 있으니 여기의 傅는 오자라고 하였다.
역주6宜都記 :
晉나라의 袁山松이 지은 책이다. 地理와 그 지방 人物에 대한 기록으로 인용문에는 자주 보이나 ≪宜都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袁山松은 袁崧으로도 표기하는바, 字는 橋孫이고, 陽夏 사람이다.
역주7(難)[灘] :
저본에는 ‘難’으로 되어 있으나, ≪水經註≫에 의거하여 ‘灘’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鄧禹가……못하였으므로 :
등우는 光武帝 劉秀를 보필하여 漢나라를 中興한 功臣으로 많은 戰功을 세우고 長安을 수비하였다. 그러나 建武 2년(26) 赤眉兵에게 패하고 군량이 다하여 곤경에 처하자, 광무제는 등우를 소환하고 馮異를 대신 보내 長安에 있는 적미병을 토벌하게 하였다.
역주9以孫權爲票騎將軍 領荊州牧 :
“曹操가 고아를 속이고 과부를 깔본 것(獻帝를 폐하여 山陽公으로 삼고 皇后 伏氏를 죽인 일)은 羯奴인 石勒(後趙의 군주)도 부끄럽게 여긴 것인데, 마침내 자신을 周나라 文王에게 견주고자 하였고, 孫權은 江東 지역을 점거하였으나 漢室을 위해 간악하고 더러운 자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조조에게 臣을 칭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漢나라의 죄인이다. 작위를 올리고 州를 겸하여 다스리게 한 것을 쓴 것이 어찌 이들을 인정한 것이겠는가. 이는 또한 둘 다 비난한 것일 뿐이다.[曹操欺孤弱寡 羯奴所恥 乃欲自比周文 孫權據有江東 不能爲漢室除殘去穢 乃反稱臣於操 是皆漢之罪人也 進爵領州 豈予之乎 蓋亦交譏之耳]” ≪發明≫
역주10文王이……섬겼다 :
≪論語≫ 〈泰伯〉에 “천하를 셋으로 나눔에 그 둘을 소유하고서 복종하여 殷나라를 섬기셨으니, 周나라 〈文王의〉 덕은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三分天下 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라고 하신 孔子의 말씀이 보이는데, 朱子의 ≪集註≫에 “≪春秋左氏傳≫ 襄公 4년에 ‘문왕이 商(殷)나라에 배반한 나라들을 거느려 紂를 섬겼다.’ 하였으니, 이때 천하에 문왕에게 귀의한 자가 6개 州였으니, 荊州, 梁州, 雍州, 豫州, 徐州, 揚州이고 오직 靑州, 兗州, 冀州가 아직도 紂王에게 속하였다.” 하였다.
역주11辟雍에……절하고 :
後漢의 明帝가 辟雍의 위에서 친히 희생을 잡아 三老와 五更(오경)을 봉양하였으며, 연향과 大射禮를 행한 뒤에는 바르게 앉아 스스로 經典을 講論하였다.(≪後漢書≫ 〈儒林列傳〉)
역주12위로는……扶持하고 :
袁安과 楊震은 和帝와 安帝 때의 名臣이고 李固와 杜喬는 桓帝 때의 명신이며, 陳蕃과 李膺은 靈帝 때의 명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