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劉義康이 豫章에 도착하여 江州刺史를 사직하였는데, 宋主가 그를 都督三州軍事로 삼았다. 前 龍驤參軍 扶令育이注+① 扶는 姓이다. 표문을 올리기를
“彭城王은 先帝의 사랑하던 아들이고 폐하의 다음 아우입니다. 만약 미혹되거나 그릇된 허물이 있다면 바로 의로운 방법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어찌하여 갑자기 강등하여 멀리 남쪽 변방으로 보낸 것입니까.
만일 유의강이 목숨이 다 되어 남쪽에서 갑자기 죽는다면 신은 비록 미천하나 가만히 폐하를 위하여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폐하는 다만 나쁜 가지는 마땅히 잘라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어찌 가지를 자르면 나무가 손상되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바라건대 빨리 불러 돌아오게 하여 형제간에 화합하고 군신간에 화목하게 된다면 四海의 원망이 해소되고 유언비어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표문이 상주되자 賜死되었다.
目
[目] 裴子野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무릇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구름이 지나가며 비가 내려서 만물이 그 은혜를 받는 것과 같고, 그 악행에 미쳐서는 마치 하늘이 찢어지고 지진이 발생하여 만물이 놀라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어찌 한 사람을 죽이고 입을 다물게 하여 없앨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는 모두 그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병을 더 증대시키는 것이다. 太祖(劉義隆)의 넓은 도량으로도 오히려 彭城王의 죽음을 간언하는 것에는 귀를 막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누가 쉽게 말을 하겠는가.注+① 彭城王의 죽음은 아래 28년(451)에 보인다. 易(쉽다)는 以豉의 切이다. 宋나라는 몇 代가 되도록 정직하고 진실한 간언을 드물게 들으니, 어찌 당시에 뼈대 있는 사람의 기백이 이전만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아마도 당시 제왕의 형벌과 정치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