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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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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皇帝隆和元年이라
秦甘露四 燕建熙三年이라
春正月 減田租하여 畝收二升注+① 成帝咸和五年, 始度百姓田, 畝取十分之一, 率畝稅米三升, 今減之, 畝收二升.하다
◑ 二月 以庾希爲徐․兗刺史하고 袁眞하다
希鎭下邳하고 眞鎭汝南注+① 希, 冰之子也.하다
拜母貴人周氏하여 爲皇太妃하다
◑ 燕呂護 攻洛陽이어늘 桓溫 遣兵救之하니 秋七月 燕師引還하다
呂護攻洛陽하니 守將陳祐告急이어늘 桓溫 遣庾希, 竟陵太守鄧遐하여 帥舟師三千人하고 助祐守之하니 嶽之子也
因上疏하여 請遷都洛陽하고 自永嘉之亂으로 播流江表者 一切北徙以實河南注+① 播流, 播越流離也. 中原, 以江南爲江外, 亦曰江表.한대 朝廷 畏溫하여 不敢爲異러라
著作郞孫綽 上疏曰注+① 綽, 楚之孫也.
昔中宗龍飛 非惟信順 協於天人이라 實頼萬里長江하여 畫而守之耳注+② 中宗, 元帝廟號. 易大傳曰 “天之所助者, 順也, 人之所助者, 信也.”
喪亂已来六十餘年 河, 洛丘墟하고 函夏蕭條注+③ 自賈后之廢, 趙王倫之誅, 繼而諸王交兵, 胡․羯乘之而起, 天下大亂, 至是, 六十餘年矣.하니 士民 播流江表 已經數世
存者 老子長孫하고 亡者 丘隴成行注+④ 長, 知兩切, 行, 戶剛切.하니 雖北風之思 感其素心이나 目前之哀 實爲交切注+⑤ 史傳云 “胡馬每北風, 則翹首北望.” 又古詩 “胡馬嘶北風.”이라
溫今此擧 誠爲遠圖 而百姓震駭하니 豈不以反舊之樂賖하고 而趨死之憂促哉注+⑥ 賖, 音奢, 遠也.잇가
臣愚 以爲宜遣將帥有威名資實者하여 先鎭洛陽하여 掃平梁許하고 清壹河南注+⑦ 梁, 謂梁國. 許, 謂許昌. 皆當江南入洛之要路.하여
運漕之路旣通하고 開墾之積已豐하며 豺狼遠竄하여 中夏小康이니 然後 可徐議遷徙耳니이다
奈何捨百勝之長理하고 擧天下而一擲哉잇가
少慕高尙하여 嘗著遂初賦以見志러니
見綽表하고 不悅曰 致意興公하노니 何不尋君遂初賦하고 而知人家國事邪注+① 興公, 綽字.아하다
朝廷 憂懼하여 將遣侍中止溫이러니
王述曰 溫 欲以虛聲威朝廷耳 非事實也 但從之 自無所至라한대
詔從其計하니 果不行하다
又議移洛陽鍾虡어늘
述曰 永嘉不競하여 暫都江左注+① 競, 强也. 懷帝永嘉五年, 爲劉聰所獲. 故云 “永嘉不競也.”하니 方當蕩平區宇하여 旋軫舊京이요 若其不爾 宜改遷園陵이니 不應先事鍾虡라한대 乃止하다
七月 護退하니 希等 亦還하다
秦王堅 親臨太學하여 考第諸生經義하고 與博士講論이러니 自是 毎月一至焉하니라
冬十二月朔 日食하다
◑ 庾希退屯山陽하고 袁眞 退屯壽陽하다


【綱】 晉나라(東晉) 哀皇帝 隆和 원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甘露 4년이요, 燕나라(前燕) 幽帝 慕容暐 建熙 3년이다.
【綱】 봄 정월에 〈晉나라(東晉)가〉 田租를 감하여 畝마다 2升을 거두었다.注+① 晉 成帝 咸和 5년(330)에 처음으로 백성들의 田地를 헤아려 畝마다 10분의 1을 취하여 대체로 1畝에 稅米 3升을 내게 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견감해서 畝마다 2升을 거둔 것이다.
【綱】 2월에 庾希를 徐州와 兗州의 刺史로 삼고 袁眞에게 豫州, 司州 등의 軍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目】 庾希는 下邳에 진주하고 袁眞은 汝南에 진주하였다.注+① 庾希는 庾冰의 아들이다.
【綱】 황제(晉 哀帝)의 생모 를 제수하여 皇太妃로 삼았다.
【綱】 燕나라(前燕) 呂護가 洛陽을 공격하자, 桓溫이 군대를 보내어 낙양을 구원하니, 가을 7월에 연나라 군대가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目】 呂護가 洛陽을 공격하니, 守將인 陳祐가 위급함을 고하자, 桓溫이 庾希와 竟陵太守 鄧遐를 보내어 수군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진우를 도와 지키게 하였다. 등하는 鄧嶽의 아들이다.
환온이 이로 인해 상소하여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고, 이후로 江南에 流離한 자들을 일체 북쪽으로 옮겨서 河南 지방을 충실히 하여야 한다고 말하니,注+① ‘播流’는 피란하여[播越] 流離함이다. 中原은 江南을 江外라 하고 또한 江表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환온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견을 내지 못하였다.
桓溫上表詐遷都桓溫上表詐遷都
【目】 著作郞 孫綽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注+① 孫綽은 孫楚의 손자이다.
“옛날 中宗(晉 元帝)이 등극하였을 적에 誠信과 和順함이 하늘의 뜻과 사람의 바람에 화합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만 리의 長江에 의지하여 이 지역을 경계로 삼아 지켰습니다.注+② 中宗은 元帝의 廟號이다. ≪周易≫ 〈大傳(繫辭傳)〉에 말하였다. “하늘이 돕는 것은 順함이요, 사람이 돕는 것은 信이다.” 하였다.
喪亂이 있은 이래로 60여 년이 지났는데, 黃河와 洛水 일대가 폐허가 되고 中原이 쓸쓸하니,注+③ 賈后가 廢黜을 당하고 趙王 司馬倫이 죽임을 당한 뒤에 이어서 여러 王이 서로 군대를 일으켜 싸웠고, 胡族(匈奴)과 羯族이 그 틈을 타고 일어나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는데, 이때 이르러 60여 년이 되었다. 선비와 백성이 강남에 流離한 지 이미 몇 대가 지났습니다.
생존한 자는 아들이 늙고 손자가 자랐으며, 죽은 자는 무덤이 항렬을 이루고 있으니,注+④ 長(길다)은 知兩의 切이고, 行(항렬)은 戶剛의 切이다. 비록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평소 가슴속에 가득하나, 그들에게 눈앞의 슬픔이 실로 急切합니다.注+⑤ 史傳에 이르기를 “胡馬는 매번 북쪽 바람이 불면 머리를 들고 북쪽을 바라본다.” 하였다. 또 古詩에 “胡馬는 北風에 운다.” 하였다.
환온의 이번 조처는 진실로 원대한 계책이라고 할 수 있으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놀라고 있으니, 어찌 옛 수도로 돌아가는 즐거움은 오히려 요원한 일이고, 죽음으로 달려가는 근심은 눈앞의 급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注+⑥ 賖는 음이 奢이니, 멂이다.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위엄과 名望, 資歷과 실질적인 능력을 갖춘 將帥를 보내어 먼저 洛陽에 진주하여 梁과 許昌 지방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河南을 깨끗이 통일시켜야 합니다.注+⑦ 梁은 梁國(梁州)을 이르고 許는 許昌을 이르니, 모두 江南에서 洛陽으로 들어가는 要路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漕運하는 길이 통하고 개간한 곳의 곡식이 풍부하게 쌓이며, 야만스러운 異族들이 멀리 도망하여 中夏가 다소 편안해진 뒤에야 서서히 천도를 의논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수 있는 훌륭한 계책을 버리고, 온 천하를 한 번에 던져버린단 말입니까.”
【目】 孫綽은 어려서부터 高尙한 일을 사모하여 일찍이 를 지어 은둔하려는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桓溫은 손작의 表文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興公에게 내 뜻을 말하노니, 어찌하여 그대의 〈수초부〉에 담긴 은둔하는 삶을 찾지 않고 남의 나랏일을 알려(간섭하려) 하는가.” 하였다.注+① 興公은 孫綽의 字이다.
【目】 이때 조정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장차 侍中을 보내어 桓溫의 천도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는데,
王述이 말하기를 “환온은 虛張聲勢하여 조정에 위엄을 보이고자 할 뿐이요, 실제로 천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말을 따르면 그가 스스로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조서를 내려 그 계책을 따르니, 환온은 과연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
환온이 또다시 洛陽 궁전의 거대한 종 틀을 옮겨올 것을 의논하자,
왕술이 말하기를 “永嘉 연간에 나라가 세력을 떨치지 못해서 잠시 江南에 도읍하였습니다.注+① 競은 강성함이다. 懷帝는 永嘉 5년(311)에 劉聰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永嘉 연간에 강하지 못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바야흐로 천하를 소탕하여 평정하고서 옛 서울(낙양)로 돌아가야 할 것이고, 만일 이렇게 하지 못하면 마땅히 先帝의 園陵을 옮겨와야 하니, 미리 종 틀을 옮겨 오는 것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환온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7월에 〈燕나라(前燕)〉 呂護가 〈군대를 거느리고〉 물러가니, 〈晉나라(東晉)〉 庾希 등도 또한 돌아갔다.
【綱】 秦王 符堅이 太學에 임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친히 太學에 임하여 諸生에게 經書의 뜻을 시험 보여 등급을 매기고 博士와 講論하였는데, 이로부터 매월 한 번 태학에 이르렀다.
【綱】 겨울 1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晉나라(東晉)의〉 庾希가 후퇴하여 山陽에 주둔하고 袁眞이 후퇴하여 壽陽에 주둔하였다.


역주
역주1 監豫司等州軍事 : 魏晉時代에 監某州軍事, 監某某等州軍事의 職이 보인다. 監某州, 監某郡 등으로 쓰일 경우 刺史나 郡守의 직권을 행하여 그 지역의 민정을 맡는 것으로 보이는데, 監某州를 간략히 監州라고 하기도 한다. 監某州軍事와 監某某等州軍事는 그 지역의 군정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글의 구조상 풀어서 번역하였다. 아래에서도 이처럼 처리하였다.
역주2 貴人 周氏 : 晉 成帝의 貴人으로 이때 皇太妃로 높였다.
역주3 永嘉의 난리 : 영가는 晉나라 懷帝(재위 307〜313)의 연호인데, 말년에 흉노족인 劉聰이 쳐들어와 진나라의 수도인 洛陽을 함락하고 회제를 사로잡아 시해한 일을 이른다. 이후 司馬睿가 江南에 나라를 세우고 南京에 도읍하니, 이를 東晉이라 하였고, 그 이전을 西晉이라 하였다.
역주4 遂初賦 : 은거하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으로, 孫綽이 會稽 땅에서 10여 년 동안 山水를 즐기며 살 때 지은 것이다.(≪晉書≫ 권56 〈孫綽列傳〉)
역주5 秦王堅臨太學 : “晉나라에서는 生徒를 돌려보냈다고 썼고, 秦나라(前秦)에서는 군주가 太學에 임했다고 썼으니, 中國이 부끄러워할 만하다. 그리하여 특별히 써서 符堅을 허여한 것이다.[晉書遣生徒 秦書臨太學 中國爲可愧矣 特書予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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