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曹仁
이 以步騎數萬
으로 向濡須
하니 朱桓
이 兵纔五千人
注+去年, 吳王以朱桓爲濡須督.이라
諸將이 皆懼어늘 桓曰 勝負는 在將이요 不在衆寡라 兵法에 稱客倍而主人半者는 謂俱在平原而士卒勇怯等耳라
今仁은 非智勇이요 士卒이 甚怯하고 千里步涉하여 人馬罷困이라
桓이 與諸君으로 共據高城하여 臨江背山하여 以逸待勞하고 以主制客이면 此百戰百勝之勢라 雖曹丕自來라도 尙不足憂어든 況仁等邪아하고
乃偃旗鼓하여 示弱以誘之하다 仁이 遣其子泰하여 攻濡須城하고 分遣常雕, 王雙等하여 襲中洲하니 中洲者는 桓部曲妻子所在也라
桓이 遣別將하여 擊雕等하고 而身自拒泰하니 泰燒營退어늘 桓이 遂斬雕, 虜雙하다
目
亮이 嘗自校簿書어늘 主簿楊顒이 諫曰 爲治有體하니 上下不可相侵이라 請爲明公하여 以作家譬之하리이다
今有人이 使奴執耕, 婢典㸑하고 鷄司晨, 犬吠盜하고 牛負重, 馬涉遠이면 私業無曠하고 所求皆足하여 雍容高枕하여 飮食而已라가
忽一旦에 盡欲以身親其役하면 形疲神困하여 終無一成하리니 豈其智之不如奴婢鷄狗哉리오 失爲家主之法也라
是故
로 古人
이 稱坐而論道
를 謂之王公
이요 作而行之
를 謂之士大夫
라 丙吉
이 不問死人
하고 陳平
이 不知錢穀
하니 彼誠達於位分之體也
注+分, 扶問切.라
今公이 躬校簿書하여 流汗終日하니 不亦勞乎잇가 亮이 謝之러니 及顒卒에 亮이 垂泣三日하니라
目
【
目】
曹仁이
步兵과
騎兵 수만 명을 거느리고
濡須로 향하였는데,
吳나라의
朱桓은 병력이 겨우 5,000명이었다.
注+지난해에 吳王이 朱桓을 濡須의 督으로 삼았다.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자, 주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기고 지는 것은 장군에게 달려 있고, 병력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兵法에 ‘客(멀리서 싸우러 온 군대)은 병력이 倍가 되어야 하고 主人(현지에서 방어하는 군대)은 반만 되어도 된다.’고 말한 것은, 객과 주인이 모두 平原에 있고 양쪽 士卒들의 용맹한 정도가 똑같은 경우를 말한 것일 뿐이다.
지금 조인은 지혜롭고 용맹한 자가 아니고 魏나라 사졸들은 매우 겁을 먹고 있으며, 천리 먼 길을 도보로 걸어오고 강을 건너와서 사람과 말이 몹시 피곤하다.
내 제군들과 함께 높은 성을 점거하여 강물을 굽어보고 산을 등지고서 편안한 군대로 수고로운 敵을 상대하고 주인으로서 객을 제어한다면, 이는 百戰百勝할 수 있는 형세이다. 비록 曹丕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오더라도 오히려 근심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조인 등에 있어서랴.”
주환은 마침내 깃발과 북을 눕혀 약함을 보여 조인의 군대를 유인하였다. 조인이 아들 曹泰를 보내어 濡須城을 공격하게 하고 常雕와 王雙 등을 나누어 보내어 中洲를 기습하게 하니, 중주는 朱桓의 部曲과 처자식들이 있는 곳이었다.
주환이 別將을 보내어 상조 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조태를 막으니, 조태가 진영을 불태우고 후퇴하였다. 주환이 마침내 상조를 참수하고 왕쌍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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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처음에 曹丕가 賈詡에게 묻기를 “내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니, 吳나라와 蜀漢 중에 어느 곳을 먼저 정벌해야 하는가?” 하니,
가후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劉備는 영웅의 재주가 있고
諸葛亮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孫權은
虛實을 알고
陸遜은 군대의 형세를 잘 살핍니다.
蜀漢은 험한 곳을 점거하고 요해처를 지키며
吳나라는
江湖에 배를 띄우니, 두 나라 모두 갑자기 정벌하기 어렵습니다.
注+“據險守要”는 蜀漢을 이르고 “汎舟江湖”는 吳나라를 이른다. 卒(갑자기)은 猝로 읽는다.
用兵하는 방법은 먼저 승리할 방책을 세운 뒤에 싸우고, 敵을 헤아리고 적장을 논합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일으킴에 남겨진 계책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신하 중에는 유비와 손권을 상대할 자가 없고, 비록 황제의 위엄으로 임하시더라도 萬全의 형세를 볼 수 없습니다.” 조비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군대가 끝내 功을 세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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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황제는 또다시 劉禪에게 다음과 같은 詔勅을 내렸다. “惡이 적다 하여 하지 말고, 善이 적다 하여 아니하지 말라. 오직 어짊과 德만이 남을 복종시킬 수 있다. 네 아비는 德이 부족하니, 본받을 것이 못 된다. 너는 丞相과 國政에 從事하면서 그를 아버지처럼 섬겨라.”
諸葛亮이 상여를 받들어
成都로 돌아오고
李嚴을
中都護로 삼아서
永安에 남아 진무하게 하였다.
注+蜀漢은 左, 右, 中의 세 都護를 두었다. 劉禪이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大赦와 改元을 행하고, 제갈량을 봉하여 武鄕侯로 삼아서 益州牧을 겸하게 하고는, 政事를 모두 제갈량에게 결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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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諸葛亮이 일찍이 직접 문서를 살피자, 主簿 楊顒(양옹)이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정치를 하는 데에는 體統이 있으니, 상하간에 서로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明公을 위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것으로 비유하겠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남자 종에게 밭 가는 일을 시키고 계집종에게 밥 짓는 일을 맡기며, 닭에게는 새벽에 우는 것을 맡기고 개에게는 도둑이 오면 짖게 하며 소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말에게는 먼 곳을 가게 하면, 사사로운 일에 잘못됨이 없고 바라는 바가 모두 충족되어 편안하게 베개를 높이 베고 음식을 마시고 먹으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자신이 그 일을 직접 하고자 하면 육체와 정신이 피곤하여 끝내 한 가지도 이루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니, 어찌 그 지혜가 노비와 닭과 개만 못해서이겠습니까. 이는 집안의 주인이 된 법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앉아서
道를 논하는 것을
王公이라 하고, 일어나서 행하는 것을
士大夫라 한다.’ 하였습니다.
저들은 진실로 지위와 직분의 체통을 통달한 것입니다.
注+分(직분)은 扶問의 切이다.
지금 公이 직접 문서를 살피느라 하루 종일 땀을 흘리고 계시니, 수고롭지 않습니까.” 이에 제갈량이 사례하였다. 양옹이 卒하자, 제갈량은 3일 동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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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吳王 孫權이 鄧芝를 만나보고 말하기를 “내 진실로 蜀漢과 和親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촉한은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작아서 魏나라에게 침공을 받아 스스로 온전하지 못할까 두렵다.” 하니,
등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大王은 세상에 이름난 영웅이고,
諸葛亮은 당대의 영걸입니다.
蜀漢에는 중복된 험한 지형이 있고
吳나라는
을 보유하고 있으니,
함께 입술과 이빨의 관계가 되면 나아가서는 천하를 겸병할 수 있고 물러나서는 솥발처럼 삼분하여 설 수가 있습니다.
注+重(거듭, 중복되다)은 直龍의 切이니, “重險”은 밖으로는 斜谷, 駱谷, 子午谷의 험한 지형이 있고, 안으로는 劍閣의 험한 지형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만약 대왕께서
魏나라에게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시면
魏나라에서는 반드시 대왕이
入朝하기를 바라고
太子가
魏나라에 인질로 들어와 모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魏나라는 황제국으로서〉 황제의 말을 받들어 배반한 자를 정벌할 것이고 蜀漢 또한 물길을 순히 따라 승리할 만한 점을 발견하고서 진격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江南의 땅은 다시는 대왕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손권이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는 마침내 魏나라와 절교하고 오로지 蜀漢과 연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