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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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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癸未年(A.D.23)
漢帝玄更始元年注+漢兵起, 號玄爲更始將軍, 玄卽位, 遂以更始紀元.이라
綱
春正月에 攻阜, 賜하여 誅之하고 又破嚴尤, 陳茂於淯陽下하고 遂圍宛注+淯, 音育. 淯陽, 在淯水之陽. 續漢志 “淯陽縣, 屬南陽郡.”하다
目
先是에 靑徐賊衆이 雖數萬人이나 訖無文書, 號令, 旌旗, 部曲이러니
及漢兵起에 皆稱將軍하고 攻城略地에 移書稱說하니 莽이 聞之하고 始懼注+稱說者, 數莽之罪也.하니라
綱
二月에 新市, 平林諸將이 하다
目
舂陵戴侯曾孫玄이 在平林兵中하여 號更始將軍注+戴侯熊渠生蒼梧太守利, 利生子張, 納平林何氏女, 生更始.이러니 時에 漢兵이 已十餘萬이라
諸將이 議以兵多而無所統一이라하여 欲立劉氏以從人望할새
南陽豪傑及王常等은 皆欲立劉縯하고 而新市, 平林將帥는 樂放縱이라 憚縯威明하고 貪玄懦弱하여
先共定策立之하고 然後에 召縯하여 示其議하다
目
縯曰 諸將軍이 幸欲尊立宗室하니 甚厚라 然이나 今赤眉起靑, 徐하여 衆數十萬이라
聞南陽立宗室하고 赤眉復有所立이면 王莽未滅에 而宗室相攻하리니 是는 疑天下而自損權이니 非所以破莽也注+言宗室爭立, 則天下莫知所從, 是疑天下之心而自損其權也.라
不如且稱王以號令이니 亦足以斬諸將이요 若赤眉所立者賢이면 相率而往從之하고 若無所立이면 破莽, 降赤眉然後에 擧尊號亦未晩也니라
諸將이 多曰善이라호되 張卬이 拔劍擊地曰 疑事無功이니 今日之議는 不得有二라하니 衆皆從之하다
目
二月朔에 設壇場於淯水上注+水經注 “淯水出弘農盧氏縣攻離山, 東南過南陽西鄂縣西北, 又東過宛縣南.”하고 玄이 卽皇帝位하여 南面立하여 朝群臣이러니 羞愧流汗하고 擧手不能言이러라
大赦改元하고 拜置公卿할새 以縯爲大司徒하고 秀爲太常偏將軍하니 由是로 豪傑이 失望이러라
綱
三月에 劉秀徇昆陽, 定陵, 郾하여 皆下之注+徇, 略也. 昆陽․定陵․郾, 皆縣名, 竝屬潁川郡.하다
綱
◑莽이 遣其司徒王尋과 司空王邑하여 大發兵하여 會嚴尤, 陳茂하여 夏五月에 圍昆陽하다
目
王莽이 遣其司徒王尋과 司空王邑하여 發兵하여 平定山東할새
徵諸明兵法六十三家하여 以備軍吏하고 以長人巨無霸로 爲壘尉注+先新莽時, 連帥韓博上言 “蓬萊東南五城西北昭如海瀕, 有奇士, 身長一丈, 大十圍, 自稱巨無霸, 軺車不能載, 三馬不能勝, 臥則枕皷, 以鐵箸食.” 壘尉, 主壘壁之事. 昭如, 海名也.하고 又驅諸猛獸虎豹犀象之屬하여
以助威注+象, 出交趾, 雄者有兩長牙, 長丈餘.武
하다
目
邑이 至洛陽하니 州郡이 各選精兵하여 牧守自將하여 定會者四十二萬人이니 號百萬이라하고
餘在道者의 旌旗輜重이 千里不絶注+定會者, 謂期定同會者.이러라
目
五月에 出潁川하여 與尤茂合하니 諸將이 見兵盛하고 皆反走하여 入昆陽하여 惶怖하여 欲散歸諸城이어늘
劉秀曰 今兵穀旣少하고 而外寇强大하니 幷力禦之하면 功庶可立注+幷, 卑正切.이어니와 如欲分散이면 勢無俱全이라
昆陽卽拔이면 一日之間에 諸部亦滅矣리니 今不同心膽하여 共擧功名하고 反欲守妻子財物邪아
諸將이 怒曰 劉將軍이 何敢如是오하니 秀笑而起하다
目
會에 候騎還하여 言 大兵且至城北하니 軍陳數百里에 不見其後注+陳, 讀曰陣.라한대
諸將이 迫急하여 乃更請秀計之어늘 秀復爲圖畫成敗하니 皆曰諾注+爲, 去聲.다하다
時에 城中에 唯有八九千人이라 秀使王鳳, 王常으로 守昆陽하고 夜에 與李軼等十三騎로 出城南門하여 於外收兵하니
時에 莽兵到城下者 且十萬이라 秀等이 幾不得出이러라
目
尋, 邑이 縱兵圍昆陽이어늘 尤說邑曰 昆陽은 城小而堅하니 不如先擊宛이니 宛敗하면 昆陽이 自服하리라
不聽하고 遂圍之數十重하니 列營百數요 鉦鼓之聲이 聞數十里注+聞, 音問.하고
或爲地道하여 衝輣撞城하고 積弩亂發하여 矢下如雨注+衝, 衝車也, 從旁衝突者也. 輣, 步耕切, 樓車也. 撞, 丈降․傳江二切, 擊也.라 鳳等이 乞降호되 不許하다
尋, 邑이 自以功在漏刻이라하여 不以軍事爲憂러니 尤曰 兵法에 圍城에 爲之闕注+闕, 不合也, 圍其三面, 闕其一面, 所以示生路也.이라하니
宜使得逸出하여 以怖宛下라한대 又不聽注+怖, 普布切, 惶懼也. 時, 玄在宛下.하다
目
岑彭이 守宛城注+岑, 鋤針切, 姓也. 彭, 棘陽人, 時守本縣長.이러니 漢兵이 攻之數月에 城中이 人相食이라 乃降이어늘 更始入都之하다
諸將이 欲殺彭이어늘 劉縯曰 彭이 執心堅守하니 是其節也라 今擧大事에 當表義士라한대 更始乃封彭爲歸德侯注+歸德, 縣名, 屬北地郡.하다
綱
六月에 劉秀大破莽兵於昆陽下하고 殺王尋하다
目
劉秀至郾, 定陵하여 悉發諸營兵하니 諸將이 貪惜財物하여 欲分兵守之어늘
秀曰 今若破敵이면 珍寶萬倍요 大功可成이어니와 如爲所敗면 首領無餘하리니 何財物之有리오하고 乃悉發之注+首, 頭. 領, 項也.하다
目
六月朔에 秀自將步騎千餘하고 爲前鋒하여 去大軍四五里而陳注+陳, 讀曰陣, 下同.하니 尋, 邑이 亦遣兵數千하여 合戰이어늘
秀犇之하여 斬首數十級하니 諸將이 喜曰 劉將軍이 平生에 見小敵怯이러니
今見大敵勇하니 甚可怪也로다 且復居前하라 請助將軍하리라 秀復進하니 尋, 邑兵이 却이라
諸部共乘之하여 斬首數百千級하고 連勝遂前하니 諸將이 膽氣益壯하여 無不一當百注+數百千者, 八九百, 或千人也.이러라
目
秀乃與敢死者三千人으로 從城西水上하여 衝其中堅注+敢死者, 敢於致死者也. 凡軍事, 中軍將最尊, 居中以堅銳自輔. 故曰中堅也.하니
尋, 邑이 易之하여 自將萬餘人行陳注+易, 弋豉切, 輕易之也. 行, 去聲. 行陳, 謂巡行軍陳也.할새 勅諸營하여 皆按部하여 毋得動하고 獨迎與漢兵戰하여 不利하니
大軍이 不敢擅相救라 尋, 邑陳이 亂이어늘 漢兵이 乘銳崩之하여 遂殺尋하고
城中이 亦鼓譟而出하여 中外合勢하니 震呼動天地라 莽兵이 大潰하여 走者相騰踐하여 伏尸百餘里러라
目
會에 大雷風하여 屋瓦皆飛하고 雨下如注하니 滍川盛溢이라 虎豹皆股戰하고 士卒溺死以萬數하여 水爲不流注+滍, 直理切. 水經 “滍水, 出南陽魯陽縣西堯山, 東南經昆陽城, 北東入汝.” 股戰, 王莽傳, 作股栗, 言戰懼甚也. 爲, 去聲.하니라
邑, 尤, 茂輕騎逃去어늘 盡獲其軍實輜重하니 不可勝算이라 擧之連月不盡하여 或燔燒其餘하니 關中이 震恐注+軍實, 謂車徒․器械․芻糧之類.이러라
於是에 海內豪傑이 翕然響應하여 皆殺其牧守하고 自稱將軍하고 用漢年號하여 以待詔命하니 旬月之間에 徧於天下러라
綱
劉秀徇潁川하니 馮異以五縣降하다
目
劉秀復徇潁川하여 屯兵巾車鄕注+巾車鄕, 在父城縣界.이러니 郡掾馮異監五縣이라가 爲漢兵所獲이라
異曰 異有老母在父城하니 願歸據五城하여 以効功報德하노이다 秀許之注+父, 音甫. 父城縣, 屬潁川郡.하니 異歸謂父城長苗萌曰
諸將이 多暴橫호되 獨劉將軍이 所到에 不虜略하고 觀其言語擧止하니 非庸人也라하고 遂與萌으로 率五縣以降하다
綱
玄이 殺大司徒縯하고 以劉秀로 爲破虜大將軍하다
目
新市, 平林諸將이 以劉縯兄弟威名益盛이라하여 陰勸更始除之러니
縯部將劉稷이 勇冠三軍이라 聞更始立하고 怒曰 本起兵圖大事者는 伯升兄弟也러니 今更始는 何爲者邪오하고
以爲將軍호되 又不肯拜注+更始以稷爲抗威將軍. 不肯拜, 謂不肯拜受抗威之命也.라 更始乃與諸將으로 陳兵收稷誅之하니 縯이 固爭이어늘 李軼, 朱鮪因勸更始하여 幷執縯殺之하다
目
秀自父城으로 馳詣宛謝注+以縯見害, 心不自安, 故謝.러니 司徒官屬이 迎弔秀注+司徒官屬, 謂縯之官屬也.어늘 秀不與交私語注+遠嫌也.하고 惟深引過而已요 未嘗自伐昆陽之功注+引過, 謂引過以歸己也.하고
又不敢爲縯服喪하여 飮食言笑를 如平常注+爲, 去聲.하니 更始以是慙하여 拜秀爲破虜大將軍하고 封武信侯하다
目
道士西門君惠 謂涉曰注+西門, 復姓. 君惠, 名也. 讖文에 劉氏當復興이라하니 國師公姓名이 是也니라
涉이 遂與秀及大司馬董忠等으로 謀劫莽降漢이라가 謀泄에 皆自殺하다 莽以其骨肉舊臣으로 惡其內潰하여 故隱其誅注+骨肉, 謂王涉. 涉, 根之子. 舊臣, 謂劉秀也.하다
目
莽以軍師外破하고 大臣內叛하니 左右無所信이라하여
憂懣不能食하여 但飮酒, 啗鰒魚하고 讀軍書라가 倦이면 因馮几寐하고 不復就枕矣注+鰒, 音雹, 海魚名, 似蛤, 無鱗有殼, 一面附石, 細孔雜雜, 或七, 或九, 一名石決明. 馮, 讀曰憑.러라
綱
成紀隗囂起兵應漢하다
目
成紀隗崔, 隗義 同起兵以應漢注+成紀縣, 屬天水郡. 隗, 五罪切, 姓也. 義, 崔之兄也.하니 崔兄子囂 素有名하고 好經書라 共推爲上將軍이어늘
囂聘平陵方望하여 以爲軍師注+方望, 姓名. 武王伐紂, 以太公爲師尙父, 田單守卽墨, 以一卒爲神師, 韓信旣破趙, 師事李左車, 皆軍師也. 後遂以爲官稱.하니 望이 說囂立廟하여 祀高祖, 太宗, 世宗할새 稱臣執事하고
殺馬同盟하고 移檄郡國하여 數莽罪惡하다 勒兵十萬하여 擊殺雍州牧, 安定大尹하고
分遣諸將하여 徇隴西, 武都, 金城, 武威, 張掖, 酒泉, 燉煌하여 皆下之하다
綱
公孫述이 起兵成都하다
目
初에 茂陵公孫述이 爲淸水長하여 有能名注+淸水, 縣名, 屬天水郡.이라
遷導江卒正하여 治臨邛注+莽改蜀郡曰導江. 班志 “臨邛縣, 屬蜀郡.”이러니 南陽宗成이 起兵徇漢中하여 以應漢할새 衆數萬人이라
述이 遣使迎之하니 成等이 至成都하여 虜掠暴橫注+地理志 “成都縣, 屬蜀郡.”하다 述이 謂郡中豪傑曰 天下同苦新室하여 思劉氏久矣라
故로 聞漢將軍到하고 馳迎道路어늘 今百姓無辜而婦子係獲하니 此는 寇賊이요 非義兵也注+婦子係獲, 謂妻與子皆被係累虜獲也.라하고
乃詐爲漢使者하여 拜述將軍兼益州牧하여 擊成殺之하고 而幷其衆하다
目
更始遣王匡하여 攻洛陽하고 申屠建, 李松은 攻武關하니 三輔震動이라
析人鄧曄, 于匡이 起兵應漢하여 西拔湖注+松, 通之從弟. 析, 南陽之縣. 湖, 弘農之縣也.하니 莽이 憂하여 不知所出하여
乃率群臣하고 至南郊하여 陳其符命本末하고 仰天大哭하여 氣盡에 伏而叩頭하니 諸生, 小民이 旦夕會哭할새 甚悲哀者는 除以爲郞하다
拜將軍九人호되 皆以虎爲號하여 將精兵數萬以東하니 時에 省中黃金이 尙六十餘萬斤이요 它財物稱是注+稱, 尺孕切, 等也.로되
莽이 賜九虎士人四千錢하니 衆重怨하여 無鬪意注+重, 直用切.라 至華陰回谿하여 匡, 曄이 擊之敗走注+賢曰 “回谿, 今俗所謂回阬, 在洛州永寧縣東北, 其谿長四里, 闊二丈, 深二丈五尺.”하다
目
曄이 開武關하고 迎漢兵하여 以弘農掾王憲으로 爲校尉하고 將數百人하여 北度渭하여 至頻陽하니
所過에 迎降하며 諸縣大姓이 各起兵稱漢將하고 率衆隨憲이러라
李松, 鄧曄이 引軍至華陰하니 而長安旁兵이 四會城下하여 爭欲先入城이라
莽이 赦囚徒하여 授兵殺豨하고 與誓曰 有不爲新室者면 社鬼記之注+東方人名豕曰豨. 爲, 去聲.하리라하고 使史諶將之러니 度渭橋하여 皆散走注+史諶, 姓名.하다
衆兵이 發掘莽妻子父祖冢하여 燒其棺槨及九廟, 明堂, 辟雍하니 火照城中이러라
目
九月朔에 兵入하다 明日에 城中少年이 燒作室門하니 火及掖庭注+作室者, 未央宮西北織室․暴室之類, 黃圖謂爲尙方工作之所者也. 作室門, 則工徒出入之門, 蓋未央宮之便門也.이라 黃皇室主曰 何面目以見漢家오하고 自投火中而死하다
目
莽이 避火宣室前殿하니 火輒隨之라 莽이 紺袀服으로 持虞帝匕首注+紺, 古暗切, 深靑揚赤色也. 袀, 音均, 又弋旬切, 純也. 純爲紺服也. 虞帝匕首, 莽蓋欲神異之, 謂執持之, 則兵不敢犯也, 故妄稱云.하고 天文郞이 按式於前이어늘
莽이 旋席隨斗柄而坐하여 曰 天生德於予하시니 漢兵이 其如予何注+莽傳 “式作栻, 木局也. 有天地, 所以推陰陽, 占時日吉凶. 以楓子棗心木爲之. 天文郞, 卽用栻者也.”리오하니라
又明日에 群臣이 扶莽之漸臺하여 欲阻池水러니 衆共圍之注+此, 未央宮之漸臺也. 未央漸臺, 在滄池中, 建章漸臺, 在太液池中.하다 下餔時에 衆兵上臺注+餔, 申時食也. 或曰 “餔, 卽晡時, 晡後, 謂之下晡.” 前書天文志 “旦至食時, 食時至日, 日(跌)[昳]至晡, 晡至下晡, 下晡至日入.”하니 苗訢, 唐尊, 王盛等이 皆死하다
商人杜吳殺莽注+地理志 “商縣, 屬弘農郡.”이어늘 校尉公賓就 斬首注+公賓, 複姓. 就, 其名.하니 軍人이 分莽身하여 節解臠分之注+臠, 力轉切, 塊切肉也.하다
目
就持詣王憲한대 憲이 自稱漢大將軍하니 城中兵數十萬이 皆屬焉하다
居二日에 李松, 鄧曄이 入長安하고 趙萌, 申屠建이 亦至하여 以王憲得璽綬不上하고 多挾宮女하고 建天子鼓旗라하여 收斬之하고
傳莽首詣宛하여 縣於市하니 百姓이 共提擊之하고 或切食其舌注+縣, 讀曰懸. 提, 擲也.하니라
目
班固曰 王莽이 始起外戚하여 折節力行하여 以要名譽하고 及居位輔政에 勤勞國家하여 直道而行하니 豈所謂色取仁而行違者邪아
莽旣不仁而有佞邪之材하고 又乘四父歷世之權하며 遭漢中微하여 國統三絶而太后壽考하여 爲之宗主라
故로 得肆其姦慝하여 以成簒盜之禍注+四父, 謂王鳳․王音․王商․王根.라 及其竊位南面에 顚覆之勢 險於桀紂로되 而莽晏然自以黃虞復出也注+莽, 自以我爲黃帝․虞舜再出世也.라하여
乃始恣睢하고 奮其威詐하여 毒流諸夏하고 亂延蠻貊호되 猶未足逞其欲焉注+恣, 資二切. 睢, 呼季切. 恣睢, 謂肆情縱恣也.이라
是以로 四海囂然하여 遠近俱發하여 城池不守하고 支體分裂注+囂然, 衆口愁貌.하니 自書傳所載亂臣賊子로 考其禍敗컨대 未有如莽之甚也라
昔에 秦燔詩書하여 以立私議하고 莽誦六藝하여 以文姦言注+謂以六經之事, 文飾姦言.이라가 同歸殊塗하여 俱用滅亡하니 皆聖王之驅除云爾注+驅除, 言驅逐蠲除, 以待聖人也.라
綱
王匡이 拔洛陽하고 誅莽守將王匡, 哀章하다


目
계미년癸未年(A.D.23)
한제 유현漢帝 劉玄 경시更始 원년이다.注+한漢나라 군대가 일어나서 유현劉玄을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칭하였는데, 유현이 즉위하고 마침내 경시更始를 기원紀元으로 하였다.
綱
【강綱】 봄 정월에 〈한漢나라 군대가 왕망王莽의〉 견부甄阜와 양구사梁丘賜를 공격하여 주살誅殺하고 또 엄우嚴尤와 진무陳茂를 육양淯陽(육양) 아래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완宛을 포위하였다.注+육淯은 음이 육育이니, 육양淯陽은 육수淯水의 북쪽에 있다. ≪속한지續漢志≫에 “육양현淯陽縣은 남양군南陽郡에 속했다.” 하였다.
目
【목目】 이보다 앞서 청靑․서徐 지역의 도적 무리가 비록 수만 명이었으나 모두 문서文書와 호령號令, 정기旌旗와 부서部署가 없었다.
그런데 한漢나라 군대가 일어나자 모두 장군將軍이라 칭하고 성城을 공격하고 땅을 점령할 적에 서신을 보내 왕망王莽의 죄를 낱낱이 말하니, 왕망이 이 말을 듣고 처음으로 두려워하였다.注+“칭설稱說”은 왕망王莽의 죄를 낱낱이 열거하여 말한 것이다.
綱
【강綱】 2월에 신시新市와 평림平林의 장수들이 함께 경시장군 유현更始將軍 劉玄을 세워 황제皇帝로 삼고는, 크게 사면하고 개원改元하였다.
目
【목目】 용릉 대후舂陵 戴侯의 증손曾孫인 유현劉玄이 평림平林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칭호하였는데注+대후 유웅거戴侯 劉熊渠가 창오태수 유리蒼梧太守 劉利를 낳았고 유리가 아들 유장劉張을 낳았는데, 유장이 평림 하씨平林 何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경시更始(유현劉玄)를 낳았다., 이때에 한漢나라 병력이 이미 10여만 명이었다.
장수들은 의논하기를 “병력이 많은데, 통일된 영수가 없다.” 하여 유씨劉氏를 세워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하였다.
이 당시 남양南陽의 호걸들과 왕상王常 등은 모두 유연劉縯을 세우고자 하였고, 신시新市와 평림平林의 장수들은 방종함을 좋아하여 유연의 위엄과 현명함을 꺼리고 유현의 나약함을 탐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유현을 세우기로 함께 계책을 정하고, 그런 뒤에 유연을 불러 이 의논을 보여주었다.
目
【목目】 유연劉縯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들이 다행히 우리 종실宗室을 높이 세우고자 하니, 매우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적미赤眉가 청靑과 서徐 사이에서 일어나 무리가 수십만 명이었다.
적미가 우리 남양南陽에서 종실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다시 다른 유씨劉氏를 옹립하면, 왕망王莽이 멸망하기도 전에 종실끼리 서로 공격하게 될 것이다. 이는 천하 사람들을 의혹시켜 스스로 권세를 감소시키는 것이니, 왕망을 격파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이 아니다.注+종실宗室이 다투어 서서 황제라고 칭하면 천하天下가 따를 바를 알지 못하니, 이는 천하天下 사람들의 마음을 의혹시켜 스스로 그 권세를 감소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선 왕王이라고 칭하여 호령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또한 충분히 〈왕망의〉 장수들을 참수할 수 있고, 만약 적미가 세운 자가 어질면 서로 이끌고 가서 그를 따르고, 만약 적미가 세운 자가 없으면 왕망을 격파하고 적미를 항복시킨 뒤에 존호尊號를 거론하는 것도 늦지 않다.”
장수들은 대부분 “좋다.” 하였으나, 장앙張卬만이 검劍을 뽑아들고 땅을 치며 말하기를 “일을 의심하면 성공할 수 없으니, 오늘의 의논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하니, 무리들이 모두 그의 말을 따랐다.
目
【목目】 2월 초하루에 육수淯水 가에 단장壇場을 마련하고注+≪수경주水經注≫에 “육수淯水는 홍농 노씨현弘農 盧氏縣 공리산攻離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남양南陽의 서쪽 악현鄂縣 서북쪽을 지나가고, 또 동쪽으로 흘러 완현宛縣의 남쪽을 지나간다.” 하였다. 유현劉玄이 황제皇帝에 즉위하여 남면南面하고 서서 신하들에게 조회를 받았는데, 부끄럽고 무안하여 땀을 흘렸으며 손을 들어 올리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였다.
크게 사면赦免을 하고 개원改元하고서 공경公卿들을 제수할 적에 유연劉縯을 대사도大司徒로 삼고 유수劉秀를 태상太常과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실망하였다.
綱
【강綱】 3월에 유수劉秀가 곤양昆陽과 정릉定陵, 언郾(언)을 경략經略하여 모두 함락하였다.注+순徇은 경략함이다. 곤양昆陽․정릉定陵․언郾은 모두 현縣의 이름이니, 다 영천군潁川郡에 속하였다.
綱
【강綱】 왕망王莽이 자신의 사도司徒인 왕심王尋과 사공司空인 왕읍王邑을 보내 군대를 크게 징발하고서 엄우嚴尤와 진무陳茂와 회합하여 여름 5월에 곤양昆陽을 포위하게 하였다.
目
【목目】 왕망王莽이 자신의 사도司徒인 왕심王尋과 사공司空인 왕읍王邑을 보내 군대를 징발하여 산동山東 지역을 평정할 적에,
63가家의 병법兵法에 밝은 자들을 불러 군리軍吏로 보임하고 거인巨人인 거무패巨無霸를 누위壘尉로 삼았으며注+이보다 앞서 신新나라 왕망王莽 때의 연수連帥(연수)인 한박韓博이 글을 올려 “봉래蓬萊의 동남쪽, 오성五城의 서북쪽 소여昭如 바닷가에 기이한 선비가 있으니, 신장이 1장丈(길)이고 몸통이 10위圍(뼘)로 자칭 거무패巨無霸라 하는데, 작은 수레에는 싣지 못하고 세 마리의 말이 감당할 수 없으며, 누울 적에는 큰 북을 베개로 삼고 쇠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다.” 하였다. 누위壘尉는 누벽壘壁의 일을 주관하는 관리이다. 소여昭如는 바다의 이름이다., 또 호랑이와 표범, 무소와 코끼리 등의 여러 맹수들을 몰아서 위엄과注+코끼리는 교지交趾 지역에서 나오는데, 수컷은 길이가 1장丈이 넘는 두 개의 긴 상아象牙가 있다. 무용을 돕게 하였다.
目
【목目】 왕읍王邑이 낙양洛陽에 이르니, 주군州郡에서 각각 정예병을 선발하여 목牧과 수守가 직접 거느리고 정해진 기일에 모인 자가 42만 명이었는데 칭하기를 백만 대군이라 하였고,
나머지 도로에 있는 깃발과 치중輜重(보급품)이 천 리에 끊이지 않았다.注+“정회자定會者”는 기일을 정하여 함께 모인 자를 이른다.
目
【목目】 5월에 영천潁川을 나와 엄우嚴尤, 진무陳茂와 연합하니, 한漢나라의 장수들은 왕망王莽의 군대가 강성함을 보고 모두 오던 길로 도망하여 곤양성昆陽城으로 들어가 공포심을 품고 흩어져 여러 성城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에 유수劉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우리는 병력과 곡식(군량)이 적고 외적은 강대하니, 우리가 힘을 합하여 막으면 혹 공功을 세울 수 있지만注+병幷(합하다)은 비정卑正의 절切이다., 만약 나누어 흩어지고자 한다면 형세가 모두 온전할 수 없다.
만약 곤양성昆陽城이 함락되면 하루 사이에 여러 부서部署들도 멸망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마음을 함께하여 같이 공명功名을 이루지 않고, 도리어 처자식과 재물을 지키고자 하는가?”
장수들이 노怒하여 말하기를 “유장군劉將軍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말하는가?” 하니, 유수가 웃으면서 일어났다.
目
【목目】 마침 정탐하던 기병騎兵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의 큰 병력이 장차 성城의 북쪽에 이를 텐데, 군진軍陣이 수백 리여서 그 후미를 볼 수가 없습니다.”注+진陳(진을 치다)은 진陣으로 읽는다. 하였다.
장수들은 급박한 나머지 다시 유수劉秀를 청하여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유수가 그들을 위해 다시 성패에 대하여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자, 모두들 “옳다.”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하였다.
이때에 성안에는 병력이 오직 8, 9천 명이 있었다. 유수는 왕봉王鳳과 왕상王常으로 하여금 곤양성昆陽城을 지키게 하고, 밤중에 이일李軼 등 13명의 기병騎兵과 함께 성城의 남문으로 나가 밖에서 병력을 수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 성 아래에 이른 왕망王莽의 군대가 거의 10만 명이었으므로, 유수 등은 거의 성 밖으로 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目
【목目】 왕심王尋과 왕읍王邑이 군대를 풀어 곤양성昆陽城을 포위하자, 엄우嚴尤가 왕읍을 설득하기를 “곤양昆陽은 성城이 적으나 견고하니, 먼저 완宛을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완宛이 패하면 곤양昆陽은 저절로 항복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왕읍은 듣지 않고 마침내 수십 겹으로 곤양성昆陽城을 포위하니, 대열을 이룬 진영이 1백여 개나 되고 징소리와 북소리가 수십 리 밖까지 들렸으며注+문聞(들리다)은 음이 문問이다.,
혹은 지하 도로를 파서 충거衝車와 누거樓車로 성城을 공격하고 궁노병弓弩兵을 모아 사방에서 활을 쏘아대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注+충衝은 충거衝車이니 옆에서 충돌하는 것이다. 팽輣은 보경步耕의 절切이니 누거樓車이다. 당撞은 장강丈降과 전강傳江의 두 가지 절切이니, 공격함이다. 이에 왕봉王鳳 등이 항복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왕심과 왕읍은 스스로 공功을 세움이 경각에 달렸다고 생각하여 군대의 일을 걱정하지 않았는데, 엄우가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성城을 포위할 적에는 한 면을 열어둔다.’注+궐闕은 완전히 포위하지 않음이니, 3면을 포위하고 나머지 1면을 남겨두는 것은 적에게 살길을 보여주어 〈탈출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마땅히 적들로 하여금 탈출해 나가게 해서 완성宛城 아래 있는 자들을 두렵게 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또다시 듣지 않았다.注+포怖는 보포普布의 절切이니 두려워함이다. 이때에 유현劉玄이 완성宛城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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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왕망王莽의 극양장棘陽長인 잠팽岑彭(잠팽)이 완성宛城을 가지고 한漢나라에 항복하니, 유현劉玄이 들어가 도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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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잠팽岑彭이 완성宛城을 지키고 있었는데注+잠岑은 서침鋤針의 절切이니 성姓이다. 잠팽岑彭은 극양棘陽 사람이니, 이때에 본현本縣의 장長을 맡고 있었다., 한漢나라 군대가 몇 달 동안 공격하자, 성城 안에서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었다. 잠팽이 마침내 항복하자, 경시更始(유현劉玄)가 들어가 도읍하였다.
장수들이 잠팽을 살해하고자 하였는데, 유연劉縯이 말하기를 “잠팽이 마음을 잡아 굳게 지켰으니 이는 바로 충절이다. 지금 대사大事를 거행함에 마땅히 의사義士를 표창해야 한다.” 하니, 경시가 잠팽을 봉하여 귀덕후歸德侯로 삼았다.注+귀덕歸德은 현縣의 이름이니 북지군北地郡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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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수劉秀가 언郾과 정릉定陵에 이르러 여러 진영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니, 장수들은 재물을 탐하고 아까워하여 군대를 나누어 지키고자 하였다.
유수가 말하기를 “지금 만약 적을 격파하면 진귀한 보물을 만 배로 얻을 수 있고 큰 공을 이룰 수 있지만, 만약 적에게 패한다면 머리와 목이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니, 무슨 재물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모두 징발하였다.注+수首는 머리이고 영領은 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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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6월 초하루에 유수劉秀가 직접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선봉대가 되어서 대군大軍과의 거리를 4, 5리쯤 두어 진을 치니注+진陳(진을 치다)은 진陣으로 읽으니, 아래도 같다., 왕심王尋과 왕읍王邑 또한 수천 명의 병력을 보내 회전會戰하였다.
유수가 달려가서 수십 명의 적의 수급을 베니, 장수들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유장군劉將軍이 평소 작은 적을 보면 겁을 먹었는데,
지금 큰 적을 보고 용감하니 참으로 괴이하다. 우선 다시 선봉에 서라. 우리도 장군을 돕겠다.” 하였다. 유수가 다시 진격하니, 왕심과 왕읍의 군대가 퇴각하였다.
여러 부대가 함께 승세를 타고 8, 9백 명 내지 천 명의 수급을 베고 연달아 승리하여 전진하니, 장수들의 담력과 기운이 더욱 성해져서 일당백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注+“수백천數百千”은 8, 9백 명 혹은 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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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수劉秀가 마침내 용감하여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는 자 3천 명을 선발해서 거느리고 성城의 서쪽 물가를 따라 적의 중견中堅(중군장中軍將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였다.注+“감사자敢死者”는 목숨을 바치는 데 용감한 자이다. 무릇 군사軍事에는 중군장中軍將이 가장 높으니, 중앙에 있으면서 견고하고 정예로워 스스로 돕기 때문에 중견中堅이라 한 것이다.
왕심王尋과 왕읍王邑은 유수를 깔보아 직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진영을 순행할 적에注+이易는 익시弋豉의 절切이니, 가볍게 여기고 깔보는 것이다. 행行(순행하다)은 거성去聲이니, “행진行陳”은 군진軍陣을 순행巡行함을 이른다. 여러 진영에게 명하여 모두 부대를 통제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홀로 맞이하여 한漢나라 군대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대군大軍들은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구원하지 못하였다. 왕심과 왕읍의 진영이 혼란하자, 한漢나라 군대가 예기銳氣를 타고 적을 무너뜨려 마침내 왕심을 죽이고,
성안에서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와서 중외中外에서 세력을 합하니,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에 왕망王莽의 군대가 크게 궤멸하여 도망하는 자들이 서로 밟혀 땅에 널린 시신이 백여 리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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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마침 천둥이 치고 세찬 바람이 불어서 지붕의 기왓장이 모두 날아가고 비가 물을 쏟아붓듯이 내리니, 치천滍川(치천)이 크게 범람하였다. 호랑이와 표범들이 벌벌 떨고, 익사한 병졸이 만 명으로 헤아려져서 물이 이 때문에 흐르지 않았다.注+치滍는 직리直理의 절切이다. ≪수경水經≫에 “치수滍水는 남양 노양현南陽 魯陽縣의 서쪽 요산堯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곤양성昆陽城을 지나 북동쪽으로 여수汝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고전股戰”은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고율股栗”로 되어 있으니, 매우 두려워함을 말한다.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왕읍王邑, 엄우嚴尤, 진무陳茂가 각기 날랜 기마騎馬 한 필을 타고 도망가자 그의 군실軍實(군수물자)과 치중輜重을 모두 노획하니, 그 많음을 이루 다 계산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취하는 데 한 달이 지나도록 다 수습하지 못하여 혹 그 나머지를 불태우니, 관중關中 지역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注+“군실軍實”은 거도車徒(거마車馬와 복도僕徒)와 기계器械(병기兵器)와 마초馬草와 양식 따위를 이른다.
이에 해내海內의 호걸들이 모두 호응하여 자기 고장의 목牧과 수守를 죽이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 한漢나라의 연호年號를 사용하면서 조령詔令을 기다리니, 열흘 내지 한 달 사이에 온 천하에 두루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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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수劉秀가 영천潁川을 경략經略하니, 풍이馮異가 다섯 개의 현縣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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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수劉秀가 다시 영천潁川을 경략經略하여 건거향巾車鄕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注+건거향巾車鄕은 보성현父城縣의 경계에 있다., 군郡의 연掾인 풍이馮異가 다섯 개의 현縣을 감독하다가 한漢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다.
풍이가 말하기를 “노모老母가 보성父城(보성)에 계시니, 원컨대 돌아가 다섯 개의 성城을 점거하여 공功을 바쳐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유수가 이를 허락하니注+보父는 음이 보甫이니, 보성현父城縣은 영천군潁川郡에 속하였다., 풍이가 돌아가 보성父城의 장長인 묘맹苗萌에게 이르기를
“장수들이 대부분 포학하고 횡포를 부리는데, 유독 유장군劉將軍은 이르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지 않고 또 그의 언어와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용렬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는, 마침내 묘맹과 함께 다섯 개의 현縣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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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현劉玄이 대사도大司徒인 유연劉縯을 죽이고 유수劉秀를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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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신시新市와 평림平林의 장수들은 유연劉縯의 형제가 위엄과 명성이 더욱 성하다 하여, 은밀히 경시更始에게 제거할 것을 권하였다.
유연의 부장部將인 유직劉稷은 용맹이 삼군三軍에 으뜸이었는데, 경시가 황제皇帝에 즉위했단 말을 듣고는 노하여 말하기를 “본래 군대를 일으켜 대사大事를 도모한 자는 백승伯升 형제인데, 지금 경시는 무엇 하는 놈인가.” 하였다.
또 경시가 자신을 장군으로 임명하였으나 절하고 받으려 하지 않았다.注+경시更始가 유직劉稷을 항위장군抗威將軍으로 임명하였다. “불긍배不肯拜”는 항위장군抗威將軍의 임명을 절하고 받으려 하지 않음을 이른다. 경시가 이에 장수들과 함께 군대를 진열하고서 유직을 체포하여 죽이려 하니, 유연이 강력히 간쟁하였다. 이일李軼과 주유朱鮪는 이 일로 인해 경시에게 권하여 유연도 함께 체포하여 살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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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수劉秀가 보성父城에서 급히 완宛으로 달려와 사죄하였는데注+유연劉縯이 살해당하자 마음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사죄한 것이다., 사도司徒(유연劉縯)의 관속들이 유수를 맞이하여 조문하였다.注+사도司徒의 관속은 유연劉縯의 관속을 이른다. 이에 유수는 그들과 사사로운 말을 나누지 않고注+〈“불여교사어不與交私語”는〉 혐의를 멀리한 것이다. 오직 잘못을 자신에게 깊이 돌릴 뿐, 스스로 곤양昆陽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注+“인과引過”는 잘못을 이끌어 자신에게 돌림을 이른다.
또 감히 유연을 위하여 상복을 입지 않고서 마시고 먹고 말하고 웃기를 평상시와 똑같이 하니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경시更始가 이 때문에 부끄러워하여 유수를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으로 임명하고 무신후武信侯를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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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에 왕망王莽의 장군將軍인 왕섭王涉과 국사國師인 유수劉秀(유흠劉歆)가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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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도사 서문군혜道士 西門君惠가 왕섭王涉에게 이르기를注+서문西門은 복성複姓이고 군혜君惠는 이름이다. “도참문圖讖文에 유씨劉氏가 마땅히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으니, 국사공國師公(유수劉秀)의 성명이 맞습니다.” 하였다.
왕섭이 마침내 유수와 대사마 동충大司馬 董忠 등과 함께 왕망王莽을 위협하여 한漢나라에 항복할 것을 도모하다가, 이 모의가 누설되자 모두 자살하였다. 왕망은 자신의 골육친척骨肉親戚과 옛 신하가 그 내부를 무너뜨리려 한 것을 혐의했기 때문에 이들을 주벌한 사실을 일부러 숨겼다.注+“골육骨肉”은 왕섭王涉을 이르니, 왕섭은 왕근王根의 아들이다. “구신舊臣”은 유수劉秀(유흠劉歆)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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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망王莽은, 군대가 밖에서 격파되고 대신大臣이 안에서 배반하니, 좌우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근심하고 고민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고 다만 술을 마시고 전복을 먹었으며, 병서兵書를 읽다가 피로하면 그대로 안석에 기대어 잠을 자고 다시는 침상에 나아가 편히 잠들지 못하였다.注+복鰒(전복)은 음이 박雹이다. 바닷물고기의 이름이니, 조개와 비슷한데 비늘이 없고 껍질이 있으며 한 면으로 돌에 붙어 사는데, 작은 구멍이 촘촘하여 혹은 7개 혹은 9개이니, 일명 석결명石決明이라 한다. 빙馮(기대다)은 빙憑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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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성기成紀 사람 가 군대를 일으켜 한漢나라에 호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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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성기成紀 사람 외최隗崔와 외의隗義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한漢나라에 호응하였는데注+성기현成紀縣은 천수군天水郡에 속하였다. 외隗는 오죄五罪의 절切이니 성姓이다. 외의隗義는 외최隗崔의 형兄이다., 외최의 형의 아들 외효隗囂가 평소에 명망이 있고 경서經書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함께 그를 추대하여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외효가 평릉平陵 사람 방망方望을 초빙하여 군사軍師로 삼으니注+방망方望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할 적에 태공太公을 사상보師尙父(보)로 삼았고, 전단田單이 즉묵卽墨을 지킬 적에 한 병졸을 신사神師로 삼았고 한신韓信이 조趙나라를 격파한 다음 이좌거李左車를 사사師事하였으니, 이들이 모두 군사軍師이다. 이후로는 마침내 군사軍師를 관명官名으로 삼았다., 방망은 외효를 설득하여 사당을 세워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와 태종太宗(문제文帝)과 세종世宗(무제武帝)을 제사할 적에 신臣이라 칭하고 제사의 일을 주관하였으며,
말[마馬]을 잡아 함께 맹약하고, 격문檄文을 군국郡國에 돌려서 왕망王莽의 죄악을 나열하였다. 이들은 10만 명의 군대를 무장하여 옹주목雍州牧과 안정대윤安定大尹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서 농서隴西와 무도武都, 금성金城과 무위武威, 장액張掖과 주천酒泉, 돈황燉煌 등을 순행(경략)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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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공손술公孫述이 성도成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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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무릉茂陵 사람 공손술公孫述이 청수淸水의 현령縣令이 되어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注+청수淸水는 현縣의 이름이니, 천수군天水郡에 속하였다.
도강졸정導江卒正으로 승진하여 임공臨邛을 다스렸는데注+왕망王莽이 촉군蜀郡을 고쳐 도강導江이라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임공현臨邛縣은 촉군蜀郡에 속했다.” 하였다., 남양南陽 사람 종성宗成이 군대를 일으켜 한중漢中을 순행(경략)하여 한漢나라에 호응할 적에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공손술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종성을 맞이하였는데, 종성 등이 성도成都에 이르러 노략질하며 횡포를 부렸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성도현成都縣은 촉군蜀郡에 속했다.” 하였다. 공손술이 군내郡內의 호걸들에게 이르기를 “천하 사람들이 함께 신新나라에 괴로움을 당하여 유씨劉氏를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장군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도로에서 맞이하였는데, 이제 백성들이 잘못이 없는데도 부녀자들이 끌려가 사로잡혔으니, 이는 도적이요 의병義兵이 아니다.”注+“부자계획婦子係獲”은 아내와 자식이 모두 끌려가서 사로잡힘을 이른다. 하였다.
마침내 한漢나라 사자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공손술을 장군將軍 겸 익주목益州牧으로 임명하고는, 종성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그 군대를 합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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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망劉望이 여남汝南에서 황제皇帝라 칭하고 엄우嚴尤와 진무陳茂를 장수와 정승으로 삼자, 유현劉玄(경시更始)이 군대를 보내 공격하여 유망을 죽이고 엄우와 진무를 주살誅殺하였다.注+유망劉望은 장사 정왕長沙 定王(유발劉發)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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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경시更始가〉 상공 왕광上公 王匡을 보내 낙양洛陽을 공격하고 대장군 신도건大將軍 申屠建에게는 무관武關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사析 사람 등엽鄧曄(등엽)이 군대를 일으켜 관문을 열고 신도건을 맞이하여 9월에 장안長安에 들어갔다.
효평황후孝平皇后가 스스로 분신焚身하여 붕崩하였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왕망王莽을 주살誅殺하여 수급을 파발마로 전하고 완宛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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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경시更始가 왕광王匡을 보내 낙양洛陽을 공격하고 신도건申屠建과 이송李松에게는 무관武關을 공격하게 하니, 삼보三輔 지역이 진동하였다.
사析 사람 등엽鄧曄과 우광于匡이 군대를 일으켜 한漢나라에 호응하여 서쪽으로 호湖를 함락시키니注+이송李松은 이통李通의 종제從弟이다. 사析는 남양南陽의 현縣이고 호湖는 홍농弘農의 현縣이다., 왕망王莽이 근심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왕망은 마침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교南郊에 이르러 〈하늘로부터〉 부명符命을 받게 된 본말을 아뢰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통곡하다가 기진맥진하여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는데, 유생들과 백성들이 아침저녁으로 모여 통곡할 적에 매우 슬퍼하는 자는 낭관郞官으로 제수하였다.
장군將軍 9명을 임명하되 모두 호虎라고 칭호하여 정예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동진東進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궁정 안에는 황금이 아직도 60여만 근斤이나 남아 있었고 또 다른 재물도 이와 비슷하였으나注+칭稱은 척잉尺孕의 절切이니 동등함이다.,
왕망은 구호九虎의 병사들에게 겨우 4,000전錢을 하사하니, 사람들이 거듭 원망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注+중重(거듭하다)은 직용直用의 절切이다. 화음華陰의 회계回谿에 이르자, 우광과 등엽이 이들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회계回谿는 지금 세속에서 말하는 회갱回阬으로 낙주 영녕현洛州 永寧縣 동북쪽에 있는데, 그 계곡의 길이가 4리里이고 너비가 2장丈이고 깊이가 2장丈 5척尺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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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등엽鄧曄이 무관武關을 열고 한漢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홍농弘農의 연掾인 왕헌王憲을 교위校尉로 삼고 수백 명을 거느리고서 북쪽으로 위수渭水를 건너 빈양頻陽에 이르니,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이들을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며 여러 현縣의 대성大姓들이 각각 군대를 일으켜 한漢나라 장수라 칭하고 무리를 거느리고 왕헌을 뒤따랐다.
이송李松과 등엽鄧曄이 군대를 이끌고 화음華陰에 이르니, 장안長安 부근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성城 아래로 모여 다투어 장안성長安城에 먼저 들어가고자 하였다.
왕망王莽은 죄수와 부역하는 무리들을 사면하여 병기를 주고 돼지를 잡아 이들과 함께 맹세하기를 “신新나라를 위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社의 귀신(토지신土地神)이 기억할 것이다.”注+동방東方 사람들은 시豕(돼지)를 이름하여 희豨라 한다.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하고 사심史諶(사심)으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위교渭橋를 건너가자 모두 흩어져 도망하였다.注+사심史諶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여러 군대가 왕망의 아내와 아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무덤을 발굴하여 그들의 관곽棺槨과 구묘九廟, 명당明堂과 벽옹辟雍 등을 불태우니, 불빛이 도성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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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9월 초하루에 군대가 도성都城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도성 안의 소년들이 작실作室의 문門을 불태우니, 불길이 액정掖庭에까지 미쳤다.注+작실作室은 미앙궁未央宮 서북쪽에 있는 직실織室과 폭실暴室 따위이니, ≪황도黃圖≫에 “상방尙方의 공작工作하는 곳이다.” 하였다. 작실문作室門은 공인工人들이 출입出入하는 문門이니, 미앙궁未央宮의 편문便門이다. 황황실주黃皇室主가 말하기를 “내 무슨 면목으로 한漢나라를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스스로 불속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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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망王莽이 선실宣室의 정전正殿으로 가서 불길을 피하였는데 불길이 가까이 따라왔다. 왕망은 순전한 감색 의복 차림으로 우제虞帝의 비수匕首(비수)를 잡고 있고注+감紺은 고암古暗의 절切이니, 짙은 푸른 색깔에 붉은 색깔을 띤 것이다. 균袀은 음이 균均이고 또 익순弋旬의 절切로 순전함이니, 〈“감균복紺袀服”은〉 순전하게 감색 의복 차림을 한 것이다. 우제虞帝의 비수匕首를, 왕망王莽이 신령하고 기이하게 여기고자 하여, 이것을 잡으면 적병이 감히 범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이처럼 망령되이 말한 것이다. 천문랑天文郞은 앞에서 식式을 잡고 있었는데,
왕망이 자리를 돌려 두병성斗柄星 자루의 방향을 따라 앉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德을 내셨으니, 한漢나라 군대가 나를 어찌하겠는가.”注+≪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식式이 식栻(점치는 기구)으로 되어 있으니, 〈별자리가 그려진〉 나무판이다. 이 나무판에 하늘과 땅이 그려져 있으니, 음양陰陽을 추측하고 시일時日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다. 단풍나무와 대추나무의 속살로 만들었다. 천문랑天文郞은 바로 식栻을 사용하는 자이다.” 하였다. 하였다.
또 다음 날 신하들이 왕망을 부축하여 점대漸臺로 가서 못의 물에 의지해서 〈한漢나라의 공격을〉 막고자 하였는데, 한漢나라의 여러 병사들이 함께 포위하였다.注+이는 미앙궁未央宮의 점대漸臺이다. 미앙궁未央宮의 점대漸臺는 창지滄池 가운데에 있고, 건장궁建章宮의 점대漸臺는 태액지太液池 가운데에 있다. 저녁 때에 여러 병사들이 점대로 올라오니注+포餔는 신시申時(오후 3시~5시)에 저녁밥을 먹는 것이다. 혹자는 “포餔는 바로 저녁밥을 먹을 때[포시晡時]이니, 포시晡時 이후를 하포下晡라 한다.” 하였다. ≪전한서前漢書≫ 〈천문지天文志〉에 “아침부터 아침밥 먹을 때에 이르고, 아침밥 먹을 때부터 한낮에 이르고, 한낮부터 포시晡時에 이르고, 포시晡時부터 하포下晡에 이르고, 하포下晡부터 해질 때까지 이른다.” 하였다., 〈왕망의 부하인〉 묘흔苗訢(묘흔)과 당존唐尊, 왕성王盛 등이 모두 죽었다.
상商 사람인 두오杜吳가 왕망을 살해하자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상현商縣은 홍농군弘農郡에 속했다.” 하였다., 교위 공빈취校尉 公賓就가 그의 목을 베니注+공빈公賓은 복성複姓이고 취就는 그의 이름이다., 병사들이 왕망의 시신을 나누어 마디마다 해체하고 살점을 나누어 가졌다.注+련臠은 역전力轉의 절切이니 잘라 놓은 고깃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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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공빈취公賓就가 〈왕망王莽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왕헌王憲에게 찾아가자, 왕헌은 자신이 한漢나라 대장군大將軍이라고 자칭하니, 성안의 병력 수십만 명이 모두 그에게 속하였다.
이틀 뒤에 이송李松과 등엽鄧曄이 장안長安에 들어오고 조맹趙萌과 신도건申屠建 또한 뒤따라와서, 왕헌이 그동안 옥새玉璽와 인수印綬를 얻고도 바치지 않았고 궁녀宮女들을 많이 데리고 놀았으며 천자天子의 북과 깃발을 세웠다 하여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또 왕망의 수급을 파발마로 급히 완宛으로 보내 시장에 매다니, 백성들이 함께 던지고 치고 혹은 그의 혀를 잘라서 먹기도 하였다.注+현縣(매달다)은 현懸으로 읽는다. 제提는 던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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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반고班固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왕망王莽이 처음 외척外戚으로 일어나서는 자신을 낮추고 훌륭한 행실을 힘써 명예를 얻고자 하였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정사를 보필하게 되어서는 국가에 힘을 다하여 정직한 도道로 행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가 아니겠는가.
왕망은 인仁하지 못하면서 아첨하고 간사한 재주가 있었고, 또 네 명의 백부伯父와 숙부叔父가 대대로 이어온 권세를 이용하였으며, 한漢나라가 중간에 침체하여 국통國統이 세 번 끊기고 왕태후王太后가 장수를 누려서 종주宗主가 되는 때를 만났다.
그러므로 자신의 간특한 꾀를 제멋대로 부려서 황제皇帝의 지위를 찬탈하여 도둑질하는 화를 이루었다.注+사부四父는 왕봉王鳳, 왕음王音, 왕상王商, 왕근王根을 이른다. 황제의 지위를 도둑질하여 남면南面하게 되자, 전복될 형세가 걸왕桀王, 주왕紂王보다 더 위험하였으나 왕망은 태연하게 스스로 황제黃帝와 우순虞舜이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 여겼다.注+〈“황우복출야黃虞復出也”는〉 왕망王莽 스스로 자신을 황제黃帝와 우순虞舜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위엄과 거짓을 부려서, 해독이 여러 중하中夏(중화中華)에 흘러 퍼지고 혼란이 오랑캐들에게까지 뻗쳤는데도,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충분히 채우지 못했다고 여겼다.注+자恣는 자이資二의 절切이고 수睢는 호계呼季의 절切이니, “자휴恣睢”는 감정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함을 이른다.
이 때문에 사해四海가 떠들썩하게 시끄러워 원근에서 함께 일어나서, 결국 외성外城과 해자를 지켜내지 못하고 사지四支와 몸통이 분열되었으니注+“효연囂然”은 많은 사람이 근심하는 모양이다., 서책에 기재된 난신적자亂臣賊子 중에 그 화패禍敗를 고찰해보건대 왕망처럼 심한 자가 있지 않다.
옛날에 진秦나라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불태워 사사로운 의논을 세웠고, 왕망은 육경六經을 외워 간사한 말을 문식하였다.注+〈“망송육예 이문간언莽誦六藝 以文姦言”은 왕망王莽이〉 육경六經의 일을 가지고 간사한 말을 문식함을 이른다. 이들은 길은 달랐으나 똑같이 한곳으로 돌아가서 함께 멸망하였으니, 모두 성왕聖王을 위하여 제거한 것이다.”注+“구제驅除”는 〈나쁜 사람을〉 몰아내고 제거하여 성인聖人이 나오기를 기다림을 말한 것이다.
綱
【강綱】 왕광王匡이 낙양洛陽을 함락시키고 왕망王莽의 수장守將인 왕광王匡과 애장哀章을 주살하였다.


역주
역주1 共立……大赦改元 : “劉玄은 어떤 사람인가. 節侯 劉買의 玄孫이다. 그런데 ‘漢나라 宗室’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유현을 劉縯과 나란히 세우지 않은 것이다. ‘改元했다.’라고 썼는데, 어찌하여 유현의 紀年을 큰 글자로 쓰지 않았는가.(無統으로 했다는 뜻임) 유현이 皇帝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유현이 皇帝가 되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는가. 유현은 天下에 군주 노릇 할 수 없는 인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쓰기를 ‘아무를 세워 皇帝를 삼았다.’ 하였으니, 立이란 마땅히 세워서는 안 될 자를 세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현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資治通鑑綱目≫에 항상 유현의 이름을 指斥하여 쓴 것이다.[玄者 何 節侯買玄孫也 不書漢宗室 何 不以玄竝縯也 書改元矣 曷爲不以玄紀年大書之 不足玄之爲帝也 玄則何以不成之爲帝 玄之不足以君天下 明矣 書曰 立某爲皇帝 立者 不宜立者也 是故終玄之世 綱目恒斥名之]다” ≪書法≫
역주2 以助威武 : 저본에 訓義의 원문이 威자 바로 뒤에 있는데, 이는 잘못 句讀를 뗀 것으로 보인다.
역주3 莽……入都之 : “전에 이미 更始가 皇帝가 되었다고 썼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오히려 이름을 쓴 것은, 경시는 용렬한 재주여서 애당초 漢나라를 일으킬 뜻이 없었고 여러 도적들이 옹립하였기 때문이니, 만일 伯升(劉縯) 형제가 좌우에서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천하는 반드시 漢나라의 소유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伯升이 大義를 창도하다가 도리어 경시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경시 또한 스스로 따라 즉시 패멸하였으니, 그가 어떻게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지척하여 경시의 이름을 쓴 것은 그 실제를 찾은 것이니, 지나친 폄하가 아니다.[前已書更始爲帝 至此猶名之者 更始奴材 初無興漢之志 群盜擁而立之 向非伯升兄弟左提右挈 天下必非漢有 況伯升唱義 反爲所殺 而更始又自隨卽敗滅 豈足以君天下哉 斥而名之 求其實爾 非過貶也]” ≪發明≫
역주4 6월에……죽였다 : 본서 394쪽 지도8 ‘昆陽城 전투’ 참조.
역주5 莽……自殺 : “王涉은 劉秀(劉歆)의 이름이 도참설에 응한다고 하여, 유수와 함께 王莽을 겁박할 것을 도모하다가 이 일이 누설되자 자살하였는데, 어찌하여 ‘왕망을 겁박할 것을 도모했다.’라고 쓰지 않았는가. 역적을 토벌하는 義理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의 筆法은, 비록 義로운 일이더라도 만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토벌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自殺’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를 罪責한 것이다. 유수는 왕망의 심복이 되어서 그의 찬탈을 이뤄주고자 하였고, 왕섭은 왕망의 측근의 신하로 불의를 도왔다가 찬탈하는 일이 이루어지자 또다시 자신의 이익을 삼고자 하였으니,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자초했을 뿐이다. 무릇 왕망의 신하 중에 ‘自殺’이라고 쓴 것은 모두 자초했다는 말이다.[涉以秀名應讖 共謀劫莽 事泄自殺 曷爲不以謀劫莽書 不予以討賊之義也 綱目之法 雖義事 苟以利心爲之 則不予之以討矣 然則其書自殺 何 罪之也 秀爲莽腹心 以成其簒 涉其親臣 助之不義 事旣成矣 又欲以爲己利焉 則其殺也 自取之而已矣 凡莽臣 書自殺者 皆自取之之辭也]” ≪書法≫ “심하다. 劉歆의 죄여! 한 번 죽음으로는 그 죄를 다할 수가 없다. 아버지 劉向은 王氏의 강성함을 지적하여 皇室에 충성을 다하였는데, 유흠은 역적인 王莽에게 아첨하여 스스로 宗國을 전복하였다. 그리고 또 왕망과 더불어 간사한 말을 문식하여 당세를 속였고, 심지어는 이름을 바꾸어 도참설에 응하여 바라서는 안 되는 일(황제의 자리)을 요행으로 바라다가 끝내 가문이 멸망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본래 班固가 ≪前漢書≫를 지을 적에 유흠을 〈劉向傳〉의 끝에 나열하여, 그의 저술을 기록하였으나 그가 이름을 ‘秀’라고 고친 뒤에는 〈王莽傳〉에 실려 있어서, 마치 다른 두 사람인 듯하다. 이 때문에 후세의 학자들이 다시 미루어 고증하지 않고 한결같이 유향과 유흠을 나란히 칭하였으니, 유흠은 바로 유향의 죄인임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유향과 동일선상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이들 父子가 의논을 달리한 것으로 말하면 다만 소소한 일일 뿐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유흠을 왕망의 國師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유흠이 역적인 왕망을 군주로 섬겨서 그의 謀主가 되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니, 보는 자가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甚矣 劉歆之罪 一死不足以盡之也 劉向指陳王氏 盡忠帝室 歆乃阿附賊莽 自覆宗國 方且與之文飾姦言 矯誣當世 甚至易名應讖 僥倖非望 卒之夷滅 爲天下笑 自班固作漢史 列歆於向傳之末 紀其著述 及改名秀之後 乃載在莽傳 殆若二人 由是後之學者 不復推考 槪以向歆竝稱 豈知歆乃向之罪人 烏可同日而語 若其父子異論 是特小小者爾 綱目書莽國師 則歆臣事賊莽 爲之謀主 不言可知 觀者不可不察也]” ≪發明≫
역주6 隗囂(외효) : 囂는 ≪後漢書≫ 李賢의 주에는 五高의 切로 표현하여 음이 ‘오’임을 나타내었으나 본서에서는 ‘효’로 표기하였음을 밝혀둔다.
역주7 劉望……誅尤茂 : “稱이란 무엇인가. 稱해서는 안 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그를 죽였을 적에 ‘劉望을 죽였다.[殺]’라고 썼으니, ‘殺’이라 썼으면 그의 將帥와 정승을 어찌 ‘誅’라고 쓸 수 있겠는가. 嚴尤와 陳茂는 본래 王莽의 신하이다. 이 때문에 역적의 徒黨은 비록 주인이 바뀌더라도 ‘誅’라고 씀을 면치 못하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역적을 토벌함이 엄격하다.[稱者 何 不宜稱者也 故其殺之也 書殺望 書殺則其將相 何以書誅 尤茂 故莽臣也 是故逆賊之黨 雖易主 猶不免於書誅 綱目之討賊 嚴矣]다” ≪書法≫
역주8 遣上公王匡……傳首詣宛 : “보통 사람인데 ‘鄧曄’이라고 이름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 義理를 인정하고 또 功을 기록한 것이다. 의리가 있으면 비록 하찮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이름을 쓴 것은 의리를 권장하기 위해서이다. 孝平皇后는 綱에 ‘칭호를 바꾸어 黃皇室主라 하였다.’라고 썼는데, 여기서 황황실주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그를 〈밖으로 여기지 않고〉 안[內]으로 여긴 것이다. 皇后는 劉氏가 폐위된 후로부터 항상 질병을 칭탁하여 조회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칭호를 바꾸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고 인하여 병이 나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여전히 漢나라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효평황후’라고 쓴 것은 그녀를 漢나라에서 끊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王莽의 어미와 아내를 모두 ‘死’라고 썼는데, 后는 비록 왕망의 딸로 스스로 불타 죽었는데도 ‘崩’이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때에 맞게 결단함이 분명하다. 왕망을 誅殺할 적에 ‘여러 사람[衆]’이라고 쓴 것은 함께 공격함을 똑같이 허여한 것이다.[人也 書鄧曄 何 予義 且志功也 苟有義 雖人必書 所以勸義也 孝平皇后書更號黃皇室主矣 不書黃皇室主 何 內之也 后自劉氏廢 常稱疾不朝會 旣聞更號 大怒 因發病不肯起 是則猶有漢氏之心焉 書曰孝平皇后 不絶之於漢也 故莽母妻 皆書死 后雖莽女 雖自焚 猶書崩 綱目之權衡 審矣 莽誅 書衆 均其攻也]” ≪書法≫ “皇后는 王莽의 딸이다. 왕망이 漢나라를 찬탈한 뒤로부터 이미 그녀의 칭호를 바꾸어서 ‘安定太后’라 하였고 이윽고 또다시 ‘黃皇室主’라고 바꿨다. 예전의 史書에서는 그의 새로운 칭호를 따랐으나 여기에서 모두 쓰지 않은 것은, 皇后가 漢나라를 보존하려 한 절개를 갖고 있어서 왕망이 그것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망의 망령되고 悖逆한 짓을 그의 아들이 잘못이라 하고 그의 딸 또한 잘못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왕망을 욕한 것을〉 따라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리어 士大夫라고 이름한 자 중에 왕망의 관작을 받고 왕망의 녹봉을 먹으면서 그의 臣僕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겨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 자가 있었다. 이는 그들의 지혜가 도리어 한 부녀자의 아래에 있는 것이니, 어찌 심히 부끄럽지 않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 ‘孝平皇后가 스스로 분신하여 崩했다.’라고 특별히 썼으니, 그렇다면 그녀가 漢나라와 끊지 않아서 천하의 어머니가 됨을 잃지 않은 것이다. 왕망 때문에 이 사실을 없애지 않고서 능히 큰 절개를 온전히 하여 그 몸을 욕되지 않게 한 것이 모두 분명히 눈앞에 드러나 있으니, 무릇 이러한 종류는 ≪資治通鑑綱目≫이 아니면 편수하지 못한다.[后 莽之女也 自莽簒漢 已易其號 爲安定太后 旣又更爲黃皇室主 前史隨其所稱 而此皆不書之者 后有存漢之節 莽不得而易之也 夫以莽之狂繆 其子非之 其女亦非之 則天下之人 從可知矣 乃有名爲士大夫者 受其爵 食其祿 甘爲之臣僕 而不知恥者 是其智又在一婦人女子下矣 豈不甚可愧哉 綱目特書孝平皇后自焚崩 則其不絶於漢 不失爲天下之母 不以莽故而沒其實 能全大節 不辱其身 皆瞭然在目矣 凡此類 非綱目 不能修也]” ≪發明≫ “심하다. 亂臣賊子들이 세상을 속임이여! 禮를 나라에 베풂은 宋나라 鮑가 그 군주를 시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백성들에게 후하게 은혜를 베풂은 田氏가 齊나라를 겸병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예로부터 간사하고 거짓된 무리들이 왕왕 이와 같았다. 王莽은 漢나라의 왕실을 찬탈하기 전에는 허리를 굽혀 선비들에게 낮추고 재물을 탐하지 않고 베풀기를 좋아해서 헛된 명예가 융숭하고 흡족하였으니, 元后(孝元王太后)는 그에게 현혹당하여 그의 宗主가 되었다. 점점 만연하여 나라를 도둑질함에 이르러서 해독이 四海에 퍼진 뒤에야 큰 병력이 사방에서 모여 元惡인 왕망을 죽였으니, 비록 漢나라의 국통이 다시 돌아왔으나 그 화가 또한 참혹하였다. 살펴보건대 分注(目)에서는 ‘杜吳가 왕망을 죽이자, 군인들이 왕망의 몸을 나누었다.’라고 썼는데, 지금 ≪資治通鑑綱目≫(綱)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왕망을 誅殺했다.’라고 쓴 것은, 왕망의 극악함은 사람마다 모두 토벌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사람들이 함께 주살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왕망의 패망은 劉氏가 다시 일어남에서 연유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에 남의 나라를 찬탈한 자들은 왕왕 前代의 皇族들을 남김없이 모두 죽여 後嗣를 남겨두지 않았다. 이는 왕망이 비단 당시에 화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萬世에 화를 끼친 것이니, 그 폐해가 크다. 이 때문에 인하여 여기에서 언급한 것이다.[甚矣 亂臣賊子之欺世也 禮施於國 宋鮑之所以弑其君 厚施於民 田氏之所以倂其國 自古姦僞之徒 往往若此 方莽未簒之前 折節下士 輕財好施 虛譽隆洽 元后爲其所惑 爲之宗主 浸淫至於盜國 毒流四海 然後大兵四合 克殄元惡 雖漢祚復還 而其禍亦慘矣 按分注 杜吳殺莽 軍人分莽身 今綱目書衆共誅莽者 明莽之極惡 人人皆得而討 衆所共誅之者也 自莽之敗 出於劉氏之復興 由是後世簒國之人 往往殄滅前代種族 至無遺育 是莽不獨貽禍當時 亦且貽禍萬世 其爲害也大矣 玆故因而及之]” ≪發明≫
역주9 (跌)[昳] : 저본에는 ‘跌’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昳’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10 얼굴빛은……자 : 이 내용은 ≪論語≫ 〈顔淵〉에 “聞이란 얼굴빛은 仁을 취하나 행실은 어긋나고 여기에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라고 한 孔子의 말씀이 보인다.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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