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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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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天監十三年이요 魏延昌三年이라
春二月 梁主耕籍田하다
宋齊籍田 皆用正月이러니 至是하여 始用二月하고 及致齋祀先農注+① 先農卽神農炎帝也. 漢儀, 正月始耕, 耕日以太牢祀先農.하다
魏東豫州亂이어늘 討平之하다
魏東豫州刺史田益宗衰老하여 與諸子孫으로 聚斂無厭하니 部内苦之하여 咸言欲叛이어늘
魏主聞之하고 詔遣其子魯生하여 赴闕한대
久未至어늘 詔徙益宗하여 爲濟州刺史호되 慮其不受代하여 遣將軍李世哲하여 帥衆襲之하여 奄入廣陵注+① 此新息之廣陵也.하니
魯生與其弟奔關南하여 招引梁兵하여 攻取光城已南諸戍注+② 宋文帝元嘉十五年, 以豫部蠻民立光城等七縣, 明帝大明中, 立光城左郡.어늘 世哲擊破之하고 以益宗還하니 拜光祿大夫하다
魏王足之伐梁也 梁主命寧州刺史李略禦之할새 許事平이어든 用爲益州러니 足退 梁主不用하니 略怨望有異謀어늘 梁主殺之하니
其兄子苗犇魏하고 會校尉淳于誕 亦自漢中入魏 二人共說魏主以取蜀之策한대 魏主信之하여 以高肇爲大都督하여 將歩騎十五萬하여 攻益州어늘
游肇諫曰 今頻年水旱하니 不宜勞役이요 蜀地險隘하여 鎭戍無隙하니 豈得承浮說而動大軍이리오 舉不愼始 悔將何及이리오하니 不從하다
梁築淮堰하다
魏降人王足陳計하여 求堰淮水以灌壽陽한대
梁主以爲然하여 使水工陳承伯將軍祖暅으로 視地形하니 咸謂淮内沙土漂輕하니 功不可就注+① 漂, 匹妙切, 浮也, 亦輕也.라호되
弗聽하고 發徐揚民할새 率二十戶 取五丁하여 以築之하고 假康絢都督諸軍하여 并護堰作하니 役人及戰士合二十萬이라
南起浮山하여 北抵巉石하고 依岸築土하여 合脊於中流注+② 巉, 鋤衘․仕檻二切. 水經註 “淮水自鍾離縣, 又東逕浮山, 山北對巉石山.하다
魏以楊津爲華州刺史注+① 華, 胡化切. 五代志 “馮翊郡, 後魏置華州.”하다
椿之弟也 先是 官受調絹할새 尺度特長하니 吏緣爲姦하여 百姓苦之어늘
津令悉依公尺하고 其輸物尤善者 賜以杯酒하고 劣者라도 亦爲受之호되 但無酒以示恥注+① 爲, 去聲.하니
於是 輸者競勸하여 更勝於舊하더라
魏免其侍御史陽固官하다
魏中尉王顯謂侍御史陽固曰 吾作太府卿 府庫充實하니 何如
固曰 公收百官之祿四分之一하고 州郡贓贖 悉輸京師하니 以此充府 未足爲多
且有聚斂之臣으론 寧有盜臣이라하니 可不戒哉아하니 顯不悅하여 因事奏免固官하다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天監 13년이고, 北魏 世宗 宣武帝 元恪 延昌 3년이다.
【綱】 봄 2월에 梁主(蕭衍)가 籍田을 경작하였다.
【目】 宋나라와 齊나라에서 籍田의 禮를 모두 정월을 거행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2월에 거행하고, 아울러 지극히 齋戒하고 先農에게 제사를 지냈다.注+① 先農은 바로 神農 炎帝이다. 漢나라의 제도에는 정월에 처음 경작을 하고, 경작하는 날에 太牢로 先農에게 제사를 지냈다.
【綱】 北魏의 東豫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北魏의 東豫州刺史 田益宗이 노쇠하여 자손들과 함께 재산을 긁어모으면서도 만족할 줄을 모르니, 관할 지역 안에서는 이를 고통스럽게 여겨 모두 반란을 일으키고 싶다고 말하였다.
魏主(元恪)가 이 소식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전익종의 아들인 田魯生을 대궐로 보내라고 하였다.
오랜 시일이 흘러도 도착하지 않자, 조서를 내려 전익종을 옮겨 濟州刺史로 삼았는데, 그가 새로 대신한 직책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염려하여 將軍 李世哲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기습하도록 하여 신속히 廣陵으로 들어가게 하였다.注+① 이는 新息縣의 廣陵이다.
전노생과 그의 아우가 關南으로 달아나 梁나라의 군대를 불러들여 光城 이남의 여러 戍자리를 공격하여 탈취하자,注+② 宋 文帝 元嘉 15년(438)에 豫部의 蠻民으로 光城 등 7개의 縣을 세웠고, 明帝 大明 연간(457~464)에 光城左郡을 세웠다. 이세철이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고 전익종을 데리고 〈洛陽으로〉 돌아가니, 〈전익종에게〉 光祿大夫를 제수하였다.
【綱】 겨울 11월에 北魏에서 司徒 高肇를 보내어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梁나라 益州를 침략하였다.
【目】 北魏의 王足이 梁나라를 침략하였을 때에 梁主(蕭衍)가 寧州刺史 李略에게 명령을 내려 방어하게 하면서 일이 평정되면 益州刺史에 임명하겠다고 허락하였다. 왕족이 물러가고 나서 梁主가 그를 임명하지 않으니, 이략이 원망하면서 배반할 모의를 꾸미자 梁主가 그를 죽였다.
이략의 형의 아들인 李苗가 北魏로 달아났고, 마침 校尉 淳于誕 역시 漢中에서 북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魏主(元恪)에게 蜀 지역을 빼앗을 계책을 가지고 설득하자, 魏主가 그들의 말을 믿고 高肇를 大都督으로 임명하여 보병과 기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益州를 침략하게 하였다.
游肇가 간언하기를 “지금 해마다 홍수와 가뭄이 들고 있으니,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고, 蜀 지역은 지세가 험준하고 좁아 방어하는 곳에 틈이 없으니, 어찌 헛된 주장을 듣고 대군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군대를 움직일 때에 처음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魏主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綱】 梁나라에서 淮水에 방죽을 수축하였다.
【目】 北魏에서 항복한 사람인 王足이 계책을 진술하여 淮水에 방죽을 쌓아 壽陽으로 물을 대라고 요청하였다.
梁主(蕭衍)가 옳다고 여겨 水工 陳承伯과 將軍 祖暅을 시켜서 지형을 살피도록 하니, 모두 말하기를 “회수 안에 있는 모래와 흙은 물에 뜰 정도로 가벼우니 공사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注+① 漂는 匹妙의 切이니, 뜸이고, 역시 가벼움이다.
그러나 梁主는 그 말을 듣지 않고 徐州와 揚州의 백성 중에서 20호마다 5명의 장정을 징발하여 방죽을 쌓도록 하고, 康絢에게 諸軍을 都督하는 직책을 내리고 아울러 방죽을 쌓는 공정을 監護하도록 하니, 노역하는 사람과 병사들은 도합 20만 명이었다.
남쪽에서는 浮山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巉石山까지 이르렀고, 강안에 의지하여 흙을 쌓아 강의 중간에서 방죽의 등마루가 이루어졌다.注+② 巉는 鋤衘와 仕檻의 두 개의 切이다. ≪水經註≫에 “淮水는 鍾離縣에서 나와 또 동쪽으로 浮山을 경유하는데, 부산이 북쪽으로 巉石山과 마주보고 있다.” 하였다.
【綱】 北魏에서 楊津을 華州刺史로 삼았다.注+① 華는 胡化의 切이다. ≪五代志≫에 “馮翊郡은 後魏(北魏) 때에 華州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目】 楊津은 楊椿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관청에서 세금으로 내는 비단[調絹]을 받을 적에 자[尺]의 길이를 특별히 길게 하였으니, 담당 관리가 농간을 부려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양진이 명을 내려 모두 公尺(국가에서 길이를 규정한 자)에 의거하도록 하고, 더 좋은 물품을 바친 사람에게는 한 잔의 술을 내려주었으며,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바친 사람의 것도 받아주되, 다만 술을 주지 않아서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였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그리하여 바치는 사람들이 서로 권면하여 〈더 좋은 것을 바치니〉 품질이 예전보다 더욱 나아졌다.
【綱】 北魏에서 侍御史 陽固를 면직시켰다.
【目】 北魏의 中尉 王顯이 侍御史 陽固에게 말하기를 “내가 太府卿을 맡았을 때 官府의 창고가 가득 찼으니,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양고가 말하기를 “공은 百官의 녹봉 중에 4분의 1을 징수하였고, 州와 郡의 贓物과 贖罪金을 모두 京師로 보냈으니, 이런 방법으로 창고를 가득 채운 것은 많다고 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있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왕현은 기뻐하지 아니하여 어떤 일로 인해 주청을 올려 양고를 면직시켰다.


역주
역주1 魏遣司徒高肇……侵梁益州 :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督諸軍]’라고 기록하고, ‘침략하였다[侵]’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北魏에 명분이 없어서이다.[書督諸軍矣 其書侵 何 魏無辭也]” ≪書法≫
역주2 재물을……낫다 : ≪大學≫ 10章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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